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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요경 제22권
25. 광연품(廣演品)
1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그 이치 모르면 무슨 이익 있으리.
단 한 구의 법 글귀라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면 도를 얻으리.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그 이치 모르면 무슨 이익 있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무릇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이 외우고 널리 배우더라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의미와 글귀의 뜻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백천 짐이나 되는 나무[草木]를 많이 짊어지고 몹시 고달파하면서도 시기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그 이치 모르면 무슨 이익 있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단 한 구의 법 글귀라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면 도를 얻으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옛날 어떤 사람이 재물과 곡식을 많이 쌓아 두었다. 그는 멀리 돌아다니며 놀고 싶어, 그 집의 곡식을 많은 보물과 바꿔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그 보물[珍寶]과 좋은 은과 바꿨다.
그러나 다시 그 많은 은이 귀찮아 그 좋은 은과 자마금(紫磨金)과 바꿨고, 또 그것을 많이 가진 것이 귀찮아 그 좋은 금과 무엇이나 뜻대로 되는 마니보주[如意]와 바꿨다. 그리하여 모두가 소원대로 되어 어긋나지 않았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많이 배웠더라도 그 글귀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한 가지라도 그 이치를 알아 얻는 이익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한구의 법 글귀라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면 도를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그 법의 이치를 완전히 알아야 한다.
단 하나의 법 글귀 듣더라도
그로써 번뇌를 멸할 수 있다.
“비록 천 장(章)을 외우더라도, 그 법의 이치를 완전히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많이 배웠더라도 의미를 완전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스스로 추락하여 최후의 경지[究竟]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천 장을 외우더라도, 그 법의 이치를 완전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단 하나의 법 글귀 듣더라도, 그로써 번뇌를 멸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세상 사람들은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한 글귀를 생각하더라도 백천의 이치를 알고, 그 이치들이 서로 연결되어 실마리를 잃지 않으면 차츰 무위(無爲)의 대도(大道)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법 글귀 듣더라도, 그로써 번뇌를 멸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계율을 훼손하고 그 뜻이 고요하지 못하면
단 하루 동안이나마 계율을 지니는 이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니라.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계율을 훼손하고 그 뜻이 고요하지 못하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계율을 범하는 사람은 좌선ㆍ경전 암송ㆍ남 돕기 등의 세 가지 일을 지키지 못하니, 그런 사람은 친근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아무리 오래 이 세상을 살아도 죄악만 한량없이 쌓이고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가 수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즉 불 수레ㆍ숯불 화로ㆍ칼 산ㆍ칼 나무 따위의 지옥과 축생이나 아귀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계율을 훼손하고 그 뜻이 고요하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단 하루 동안이나마 계율을 지니는 이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계율을 지닌 사람으로서 뜻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면 하루 동안의 공덕이라도 수없고 한량없어 비유로써도 견줄 데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세상에 살면서 한량없이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나게 되어 저절로 그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하루 동안이나마 계율을 지니는 이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지혜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하루 동안이나마 지혜가 있고
마음이 고요한 것만 못하니라.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지혜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움[慚愧]을 알지 못하여 여섯 종류의 짐승과 다름이 없다. 마치 낙타나 노새ㆍ나귀ㆍ코끼리ㆍ말ㆍ돼지ㆍ개 따위는 존귀하고 비천함, 높고 낮음의 구별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무지(無智)도 그와 같아서 어리석음과 어둠에 싸여 밝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지혜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루 동안이나마 지혜가 있고, 마음이 고요한 것만 못하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경전에 깊이 몰입하여, 한 글귀의 이치에서 백천 가지의 이치에 이르기까지를 곱씹어 사유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이나마 지혜가 있고, 마음이 고요한 것만 못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게을러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이나마 부지런히 힘써
마음이 굳센 것만 못하니라.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게으르고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으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마음이 항상 게을러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추락하고 또 남도 생사(生死)에 빠져 있게 한다. 스스로 생사에 빠진 사람은 5분법신(分法身)을 잃어 무위(無爲)의 큰 도에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 도에 어두울 뿐 아니라, 또 남으로 하여금 생사에 빠져 있게 한다.
그리하여 시주[檀越]로부터 음식ㆍ침구ㆍ의약품을 받아도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며, 비록 사람의 몸을 받더라도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변방[邊地]에 나거나 세속의 지혜와 변재(辯才)밖에 배우지 못하는 등 여덟 가지 어려움이 있는 곳에 난다. 그 이유는 전생에 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게으르고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루 동안이나마 부지런히 힘써, 마음이 굳센 것만 못하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세상이 항상하지 않음을 알고, 사람의 몸 얻기 어렵고,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려우며, 불법의 땅[中國]에 나기도 어렵고 모든 감관을 완전히 갖추기도 어려우며, 현성의 법 안에서 사문이 되기를 구하지도 못하며, 진정한 법의 말씀을 듣지도 못한다고, 지혜 있는 사람이 이런 줄을 잘 알면, 그는 마땅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도과(道果)를 구하려고 생각할 것이요, 또 열반[泥洹]에 이르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완전히 갖추면 곧 번뇌 없는 법의 몸[無漏法身]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이나마 부지런히 힘써, 마음이 굳센 것만 못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나고 사라지는 일 알지 못하면
하루 동안이나마 나고 소멸하는 일
밝게 아는 것만 못하니라.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나고 사라지는 일 알지 못하면”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무명에 싸여 벗어나지 못하고, 백 년을 헤아리는 동안 죄악만 한량없이 쌓으면서도, 나는 것도 소멸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비록 집을 떠나 도를 닦는다 해도 여래법(如來法) 가운데에서 나고 소멸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 한결같이 범부 자리에 있으면서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비구나 사문의 업이 아니니, 여래장(如來藏)에서 멀어지는 것이요, 불협(佛篋)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나고 소멸하는 일 알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루 동안이나마 나고 소멸하는 일, 밝게 아는 것만 못하니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법 하나하나가 허무하다는 것을 밝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생겨도 생기는 까닭을 알지 못하고 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만일 그 각각을 분별하여 근본을 잘 알 수 있으면 죽음에 다달았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 난처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후생에 태어나는 곳에 이르러서도 그 의식이 어지럽지 않고 현성을 만나 법을 듣고 제도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이나마 나고 소멸하는 일, 밝게 아는 것만 못하니라”고 말한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고통이 생기는 곳을 관찰하라’는 것이겠으니,
그것은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는 비록 비구가 되었더라도 사문의 행에 통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생기는 곳을 관찰하라’고 말한 것이다.
번뇌[有漏]의 없어짐을 잘 관찰해야 하나니, 사람이 공부할 때 번뇌를 밝게 알지 못하면 곧 삼계(三界)와 5취(趣)에 머물러 생사에 헤매면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할 때 이 번뇌를 관찰하여 그것이 생기는 곳과 그것이 소멸하는 곳을 잘 안다. 만일 그것이 생겨도 생기는 까닭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사라져도 사라지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점차로 나아져 번뇌 없는[無漏] 경계에 이를 수 있겠는가?
또 흔들리지 않는 행[不動行]의 자취를 관찰해야 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행의 자취를 관찰하지 못하면 그는 스스로 타락하여 생사에 떨어질 것이다. 그는 비록 사문으로 행세하지만 사문의 행이 아니요, 바라문으로 행세하지만 바라문의 행이 아닐 것이다.
네 가지 일의 인연으로 아무리 심오한 법을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우하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행의 자취를 관찰하여 잘 알면, 그 뜻은 기울지도 않고 또 변하지도 않아서 차츰 무위(無爲)의 언덕에 이르러 바르게 될 것이다.
또 죽지 않는 행[不死行]의 자취를 관찰해야 하나니, 만일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그 생사를 모르면 죽은 뒤 정신이 떠날 때 바람은 사라지고 불기운은 식으며 영혼은 흩어져서 몸뚱이가 빳빳이 굳어져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법복[法衣]을 입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복을 지녔더라도,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임을 능히 관찰하지 못하고 또 능히 청정한 범행을 닦지도 못할 것이다. 이른바 죽지 않은 행의 자취란 번뇌가 완전히 멸해 다한 열반[滅盡泥洹]이다. 그러므로 무위의 처소, 즉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앓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에 욕심이 없어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 행을 관찰하라고 한 것이다.
또 청정한 행의 자취를 관찰해야 하나니, 도는 청정하여 더럽거나 흐림이 없는 것이니, 도를 배워야 번뇌[垢]를 제거할 수 있다. 그리하여 번뇌에 길들여지지 않은 학인은 다음으로 하늘의 형상(形象)을 관찰해야 하나니, 법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상인(上人)의 행적을 익혀야 한다. 그것은 일체 법 중에서 가장 으뜸이고 가장 높아 아무것도 그것에 미치지 못하나니, 이른바 번뇌가 없어진 열반이 바로 그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감로행(甘露行)의 자취를 관찰하면 굶주리거나 목마르다는 생각이 없고 번뇌의 뜨거움에 대한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하면 영원히 생사에 떨어져 그 근본을 밝게 알지 못하고 감로법을 얻지 못하게 된다.
복업(福業)을 완전히 갖추면 자기의 것을 남에게 주더라도 애석해 하거나 아까워함이 없다.
7
비록 백 년을 살면서
산이나 숲에서 불에 제사지내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행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 것만 못하니라.
“비록 백 년을 살면서, 산이나 숲에서 불에 제사지내더라도”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옛날 어떤 범지는 몸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히면서 넓은 들판이나 깊은 산 속에서 불 신[火神]에게 제사지내되, 수시로 불을 돌보고 예배하여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깨끗한 나무와 좋은 꽃을 길러 모으고 갖가지 향을 피워 공양하면서 그 은혜와 복 얻기를 희망하였다.
그때 범지는 게으른[退] 마음이 생겨 가만히 혼자 생각하여 말하였다.
‘나는 이 산에서 기술(奇術)을 배워 익히려고 이 불을 생각하고 섬겨 온 지 이미 백 년이 지났다. 이제 스스로 시험해 보면 불의 은혜와 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불이 은혜를 줄 생각이 있다면 마땅히 그 징험이 나타나리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
그때에 범지는 생각에 스스럼 없이 앞으로 나아가 두 손으로 불타는 불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불은 손을 태웠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범지는 혼자 생각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불을 섬겼지만 다만 한낱 수고롭게 그 공력만 허비한 채 아무런 이익 없이 내 몸에 이런 고통만 가져 왔다.’
그때 그 산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도를 배우던 어떤 비구가 그의 그런 생각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범지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이란 그 본성이 뜨거운 것이어서 존귀함과 비천함을 따라 따로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알고자 하면 내게는 삼계(三界)에서 홀로 높으신 거룩한 스승이 계신데 그 분은 거니실 때에는 허공을 밟는 듯 아무런 걸림이 없고 앉으시면 광명을 드날려 시방세계를 두루 환히 비추신다.
그대는 지금 나와 함께 거기 가서 친히 뵙고, 그 심오한 법을 들으면,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범지는 이 말을 듣자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그 도인과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발에 대어 예배하고 한쪽에 섰다.
그때 세존께서는 범지가 제도될 수 있다고 보시고서 대중 가운데서 이 게송을 읊으셨다.
비록 백 년을 살면서
산이나 숲에서 불에 제사지내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행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 것만 못하니라.
그때 범지는 마음이 환히 열려 온갖 번뇌가 다 없어지고 법안(法眼)이 깨끗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범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산에 있으면서 백 년 동안 불을 섬기고 온갖 신에게 제사지냈으나 한낱 수고롭게 그 공력만 허비한 채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하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진정한 도의 자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짓은 잠깐 동안이나마 행을 가지고 자기를 닦는 것만 못하니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게 집착하여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백 년 동안 불을 섬기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안고 어둠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고치지 못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닌 줄을 스스로 깨닫고 항상 깊이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병이 생기며 어디서 생기고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알 수 있고 그것이 진실한 법이 아닌 것을 모두 알게 되느니라.
그리하여 또 남에게서 의복ㆍ음식ㆍ평상ㆍ침구ㆍ의약품을 받더라도 능히 잘 소화하여 잃어버림이 없고, 아름다운 꽃과 도향(擣香)ㆍ잡향ㆍ문채 비단ㆍ당기ㆍ번기를 공양받는 등 이러한 복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 년 동안 불을 섬겨도 그것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한 번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는 것보다 못하며, 그 복은 이를 수 없이 가장 높아 말하기도 어렵고 헤아리기도 어려우며 어떤 비유로도 비유할 수 없느니라.
그것은 마치 겨자를 수미산에 비유하는 것과 같고 소 발자국 물을 바닷물에 비유하는 것과 같으며, 손톱 위의 티끌이 땅보다 많다는 것과 반딧불의 빛으로 햇빛과 밝음을 다투려는 것과 같다. 자비스런 마음의 공덕은 이와 같거늘 하물며 백 년 동안 덕을 닦아 두루 갖춤이겠는가?”
한번 이 복을 받으면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일찍이 자리에 떨어지는 일이 없고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모두 공경하고 받지 않는 이가 없으리니, 그것은 모두 전생에 행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깐 동안이나마 오로지 자비스런 마음을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8
한 달이 흐르고 또 한 달이 되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단식(摶食)을 즐기지만
그는 부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
“한 달이 흐르고 또 한 달이 되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단식(摶食)을 즐기지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중생들은 음식에 탐착하여 그 몸을 기르며 후세의 재앙을 생각지 않고,
‘네 가지 요소로 된 몸은 그 성질이 다르며 정신이 그 속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해 안다.’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진실을 알고 어리석은 사람은 거꾸로 된 견해로 금세와 후세의 선악의 행을 알지 못하고, 3도(塗)와 8난(難) 속에 굴러다니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그러므로 “한 달이 흐르고 또 한 달이 되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단식(摶食)을 즐기지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부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어떤 중생이 하루나 반나절이나 한 시간이나 반시간이나 혹은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나마 부처님을 독실하게 믿어 그 뜻이 변하지 않으면 그 복은 한량없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어떤 비유로도 견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복으로 도달하는 그윽한 과보는 아무런 형상이 없고 또 갑자기 이르는 것이지만 그 공과 복은 다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요점을 들어 말하면 그는 법(法)을 믿지 않기 때문에 16분의 1도 얻지 못하고, 억천만겁 동안 다만 법이란 말만 들을 뿐이다. 이른바 법이란 번뇌가 아주 다한 열반[泥洹]이 바로 그것이다.
계경(契經)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지금 나는 너희들에게 세 가지 제일 높은 것을 말하리니, 첫째는 부처님이 제일 높고, 둘째는 법이 제일 높으며, 셋째는 스님이 제일 높다.
어째서 부처님이 제일 높은가? 모든 중생들로서 발이 없는 것이나 발이 있는 것이나, 한 발ㆍ두 발ㆍ네 발인 것이나 나아가 발이 많은 것에 이르기까지, 혹은 색이 있거나 색이 없는 것, 생각이 있거나 생각이 없는 것 나아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중생 가운데서 여래를 높다 하고 제일이라 하며 그 위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으로서 부처님을 독실히 믿으면 그를 제일 높은 이를 믿는다고 하고, 제일 높은 이를 믿기 때문에 제일의 복을 받으며, 제일의 복을 받기 때문에 인간과 천상에서 제일 존귀한 이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제일 높다 하느니라.
어째서 법을 제일 높다 하는가? 이른바 법에는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있으니 번뇌가 아주 다하여 욕심이 없고 생멸이 없는 법, 즉 열반법[泥洹法]을 높다 하고 제일이라 하며 그 위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법을 공경하는 이를 제일 높은 것을 공경한다 하고 제일 높은 것을 공경하기 때문에 제일의 복을 얻으며 제일의 복을 얻기 때문에 인간과 천상에서 제일 존귀한 이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법을 제일 높다 하느니라.
어째서 스님을 제일 높다 하는가? 여러 큰 무리의 큰 모임 가운데서 여래의 성스런 무리들을 높다 하고 제일이라 하며 그 위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어떤 중생이 스님을 독실히 믿으면 그를 제일 높은 이를 믿는다 하고 제일 높은 이를 믿기 때문에 제일의 복을 받으며 제일의 복을 받기 때문에 천상이나 인간에서 제일 존귀한 이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스님을 제일 높다 하느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16분의 1도 얻지 못하나니 중생들은 밤낮으로 독한 마음을 품고 분노에 휩싸여 서로 잡아먹는다. 그들은 부모에게까지 분노를 품고 대하거늘,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생들을 돌보겠는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중생을 가엾게 여기지 않으면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여러 나라에는 그 이름이나 성을 이루 셀 수 없는 중생들이 그 안에 사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자비의 선정에 들어 그들을 교화하고 그 궁핍함을 구제하되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또 ‘이 사람에게는 주어야 한다. 이 사람에게는 주지 않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평등하여 둘이 없고 한결같아서 차별이 없으면, 그야말로 진정한 보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혹 어떤 국토에서는 그 중생들의 이름을 연동류(蠕動類)라 한다. 그 중에는 아주 용맹스러워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때 어떤 이가 그 국토에 가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면, 그것도 보시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동류들은 천지의 신명[神祇]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보시의 공덕은 16분의 1도 되지 못한다.
또 바른 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을 스스로 외도이학(外道異學)인 니건자(泥犍子)의 무리에 떨어져 스스로 높다고 일컬으며, 철판을 배에 감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저희끼리 말한다.
“이 석씨 종족의 사문 도사들은 세상에서 미친 사람들이다. 머리를 드러내고 옷깃을 왼쪽으로 돌려 여미고 스스로 높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저들이야말로 상서롭지 못한데 무엇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거기 미치고 반하여 높이며 섬기는가?
만일 어떤 중생이든지 저들에게 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 반드시 나쁘고 더러운 과보를 받을 것이다. 저들을 꿈에서 보기만 해도 깨어나면 재수가 없거늘 하물며 길을 가다가 서로 만남이겠는가?”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능히 바른 법을 믿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백천 가지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뜻으로 믿고 나아가 뒤바뀐 견해를 익히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여래의 바른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지 않으면 16분의 1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어떤 신심(信心) 있는 사람이 믿는 마음으로 바른 법을 향하여 나아가면, 그 복은 한량없어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백 배ㆍ천 배ㆍ만 배ㆍ수억 배나 되어 어떤 비유로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니라.”
무엇 때문에 16분의 1도 얻지 못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16이란 16대국(大國)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 염부제(閻浮提)의 경계에서 인의(仁義)를 가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이 16대국보다 나은 곳이 없다. 거기는 옛것을 널리 살피고 지금 것을 두루 거두어 잡아 심오한 이치를 널리 설명하고 때를 따라 결단하여 의심을 아주 끊고 망설임이 없게 하는 곳이다.
그 열여섯 나라의 이름은 첫째는 앙가(鴦伽)요, 둘째는 평사왕(蓱沙王)의 묵갈타(黙偈陁)며, 셋째는 가시(迦詩)요, 넷째는 바사닉왕(波斯匿王)의 구살라(拘薩羅)이며, 다섯째는 소마(素摩)요, 여섯째는 수라타(須羅吒)며, 일곱째는 악생왕(惡生王)의 발차(拔蹉)요, 여덟째는 우전왕(憂塡王)의 발라(拔羅)며, 아홉째는 알파(遏波)요, 열째는 우타라연왕(憂陁羅延王)의 아바단제(阿婆檀提)며, 열한째는 구류(鳩留)요,
열두째는 아구람왕(阿拘嵐王)의 반차라(般遮羅)며, 열셋째는 연난(椽難)이요, 열넷째는 야반나(耶般那)며, 열다섯째는 검부(劍桴)니라[열여섯째는 빠졌음].
이 16대국은 모든 일을 두루 분별하고 온갖 일에 미혹되지 않으며, 모든 변재(辯才)는 날카롭고 학문은 번거롭지 않으며, 묘한 이치를 밝게 통달하고 근본과 끝을 궁구하여 널리 펴 연설함에 한량없으며, 심오한 그 뜻을 궁구하여도 끝이 없다.
이 16대국에 태어나서 수행하는 사람은 보시의 마음은 없으나, 묘한 이치를 우러러 사모하는 사람은 이 16대국을 돌아다니며 위의와 예절을 스스로 닦아 이룬다. 그러나 스승에게서 배우지 않아 어떤 모범이나 법칙도 없다.
9
어떤 사람이 여러 해를 지내며
신에게 제사하여 그 복을 바라지만
그는 그 네 몫 중에서
한 몫도 얻지 못하리.
“어떤 사람이 여러 해를 지내며, 신에게 제사하여 그 복을 바라지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생각하건대 외도이학(外道異學)들은 뒤바뀐 삿된 견해 때문에 어리석게 집착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에게 제사하여 한 해를 지나며 그 사이 백성들의 재물을 허비하니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여러 가지 맛난 음식을 불에 태우면서 복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만 도리어 화(禍)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두 무지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스스로 고치지 못하면 다시 죽은 뒤에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가 빛과 지혜의 광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네 몫 중에서, 한 몫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점차로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여 어리석음과 미혹을 일깨워 안온한 곳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니, 그것이 잠깐 동안이나마 선을 행하면 한 해의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다.광연품(廣演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