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론 1권
7.3.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
89.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기를 원하는 자도 조용히 혼자 머물러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성스러운 승가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90. 이 가운데서 잘 도를 닦고라 함은 좋은 도닦음이다.
바른 도닦음과, 퇴보함이 없는 도닦음과,[열반에] 수순하는 도닦음과, 반대가 없는 도닦음과, [출세간]법과 [그것에] 이르게 하는 법(dhamma-anudhamma)의 도닦음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세존의 교훈을 신중하게 듣기 때문에 제자들이다.
제자들의 승가가 제자들의 승가(sāvakasaṅgha)이다. 계와 바른 견해를 함께 가져서 공동체를 이룬 제자들의 무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른 도닦음은 곧고, 구부러짐이 없고, 왜곡됨이 없고, 뒤틀림이 없고, 성스럽고, 참되다(ñāya)고 말한다. 그리고 어울리기 때문에 적당하다는 명칭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런 도를 닦는 성스러운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참되게 도를 닦고, 합당하게 도를 닦는다고 말한다.
91. 여기서 도에 선 자들은 바른 도닦음을 가졌기 때문에 잘 도를 닦고,
과에 선 자들은 바른 도닦음으로 증득해야 할 것을 증득했기 때문에,
과거의 그 도닦음을 두고 잘 도를 닦았다한다고 알아야 한다.
92. 그리고 잘 설해진 법과 율에서 설한대로 도를 닦고 티 없이 도를 닦기 때문에 잘 도를 닦고, 중
도로 양극단을 피하여 도를 닦고, 몸과 말과 마노의 구부러짐과 왜곡됨과 뒤틀림의 결점을 버리고 도를 닦기 때문에 바르게 도를 닦는다.
열반은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하여 승가가 도를 닦기 때문에 참되게 도를 닦는다.
존경 받기에 적합한 자들이 되도록 도를 닦기 때문에 합당하게 도를 닦는다.
93. ‘곧’(yad idaṁ):
즉 이들(yāni imāni).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쌍으로써 첫 번째 도에 선 자와 과에 선 자를 한 쌍으로 만들어 네 쌍의 인간들이 있다.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인간으로 첫 번째 도에 선 자를 하나로 만들고 또 과에 선 자를 하나로 만들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덟 사람이 있다.
사람들(purisa-puggala)이란 단어에서 뿌리사(purisa)라 하든 뿍갈라(puggala)라 하든 이 단어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뜻을 가졌다. 배우는 자의 [근기에] 따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
이 쌍으로 네 쌍의 인간들과 개별적으로 여덟 명의 인간들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이다.
94.
‘공양받아 마땅하고 등에 대해서’:
가져와서 헌공할만한 것이 시물(āhuna)이다. 먼 곳으로부터 가져와서 계를 갖춘 자들에게 보시할만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네 가지 필수품의 동의어이다.
승가는 그런 [보시자와 시물]로 하여금 큰 과를 얻게 하기 때문에 시물을 받기에 적절하다. 그러므로 공양받아 마땅하다.
95. 혹은 먼 곳으로부터 직접 와서 모든 소유물을 여기 헌공할 만하기 때문에 승가는 헌공 받을만한 자(āhavanīya)이다.
혹은 제석(Sakka삭까=인드라) 등도 헌공할만하기 때문에 헌공 받을만한 자다.
이런 바라문의 불을 아하와니야(Āhavanīya, 헌공 받을만한 자)라 한다. 그 불에 준 것은 큰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헌공 받을만한 자라 한다면 승가야말로 헌공 받을만한 자다. 왜냐하면 승가에 헌공한 것은 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숲 속에서 백 년 동안 불을 섬길지라도
닦은 자들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예배하면
이 예배는 백년의 제사를 능가하리.(Dhp.107)”
다른 부파에서 말하는 이 헌공 받을만한 자(āhavanīya)라는 단어는 여기서 말한 공양받아 마땅한 자(āhuneyya)라는 단어와 뜻은 같고 문자로만 조금 차이가 있을뿐이다. 그러므로 공양받아 마땅한자다.
96.
‘선사받아 마땅하고’:
여러 곳으로부터 온 친애하는 친척과 친구들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준비한, 손님들에게 보시하는 물건을 선사품(pāhuna)이라 한다. 이 경우에도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선사품을 주는 것보다 승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한 선사품을 받을 만한 이는 승가와 같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승가는 두 부처님들의 사이에 나타났고, 지속적으로 사랑받을 만하고 마음에 드는 [계 등의] 법을 갖추었다.
이와 같이 그에게 선사품을 주기에 적절하고 선사품을 받기에 적절하기 때문에 선사받아 마땅하다(pāhuneyya).
그러나 성전을 독송할 때 빠후네야(pāhu-neyya)대신에 빠하와니야(pāhavanīyo, 먼저 공양받을 자)라고 독송하는 사람들의 경우 승가가 우선으로 대접 받을 만하기 때문에 공양할 것을 여기 가장 먼저(paṭhamaṁ) 가져와서(ānetvā) 헌공할 만하기 때문에(hunitabbaṁ)먼저 공양받을 자(pāhavanīya)이다.
혹은 모든 측면에서 공양을 받을 만하디 때문에 먼저 공양받을 자다. 그것을 여기서는 같은 뜻으로 선사받아 마땅한 자(pāhuneyya)라고 한다.
97. 보시(dakkhiṇa)란 다가올 내생을 믿고 베푸는 보시를 말한다.
[승가는] 그런 보시를 받을 만하다 혹은 보시에 도음이 된다. 왜냐하면 큰 결과를 얻게 하여 공양물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시받아 마땅하다(dakkhiṇeyya).
모든 세상 사람들이 양손을 머리에 얹어 합장할 만하기 때문에 합장받아 마땅하다(añjalikaraṇīya).
98.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밭)이시다’:
모든 세상의 비교할 수 없는 복이 증장하는 곳이다.
마치 왕이나 대신의 벼나 보리가 자라는 곳을 왕의 논이나 보리밭이라고 부르듯이 승가는 모든 세상의 복이 자라는 곳이다.
승가를 의지하여 세상의 갖가지 이익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복이 증장한다.
그러므로 승가는 세간의 위없는 복밭이다.
99. 이와 같이 ‘잘 도를 닦고’라는 등으로 구분한 승가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계를 의지하여 올곧아진다.(A.iii.285)”
이와 같이 앞서 설한 방법대로(§66) 장애들을 억압할 때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승가의 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 禪은 본삼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근접에만 이른다.
이처럼 이것은 승가의 덕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僧隨念)이라 부른다.
100. 이러한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비구는 승가를 존중하고 승가에 순종한다. 믿음이 깊어진다. 희열과 기쁨이 커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승가와 함께 사는 것 같은 인식을 얻는다.
승가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항상 몸속에 지니고 있을 때 그의 몸도 승가가 운집한 포살당처럼 예배를 받을 만하다.
그의 마음은 승가의 덕을 증득함으로 향한다.
계를 범할 대상을 만날 때 마치 면전에서 승가를 대하는 것처럼 양심과 수치심이 나타난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큰 위력을 가진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이것이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