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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5권
4. 변연기품(辯緣起品)④
4.4. 유정의 지속ㆍ사멸과 세 가지 결정적 부류[定聚]
1) 4유(有)의 염ㆍ불염과 3계에서의 존재유부
[유정의] 연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바로 이러한 [연기] 중에 처하는 상태의 차별에 따라 중(中)ㆍ생(生)ㆍ본(本)ㆍ사(死)의 4유(有)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본론 제13권 ‘중유의 형상과 4유)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마땅히 그것의 선 등의 차별과 3계에서의 존재유무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종류의 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성이니
자지(自地)의 번뇌 때문이며
나머지는 3성이고, 무색계에는 3유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4유(有) 가운데 생유는 오로지 염오한 것일 뿐, 결정코 선이나 무부무기가 아니다.
어떠한 혹(惑,번뇌)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인가?
일체의 번뇌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번뇌가 모든 생유를 더럽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다만 자지(自地)의 번뇌로 말미암아 더럽혀지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지(地)에 태어날 경우, 오로지 이러한 지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번뇌로 말미암아 생유는 더럽혀질 뿐이다.
즉 [자지의 온갖 번뇌 중에서] 결생위(結生位)에서 [생을] 윤택(潤澤)시키는 공능을 갖지 않는 번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결생은 오로지 번뇌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뿐 전(纏)과 구(垢)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36)
그 까닭이 무엇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현행하는 회(悔, 혹은 惡作 즉 후회)나 부(覆, 죄의 은폐) 등의 ‘전’은 요컨대 사택력(思擇力)에 의해서만 비로소 현기(現起)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생위 중에서는 신심(身心)이 어둡고 저열하여 [그 같은 사택력이 없다].
요컨대 특별한 노력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번뇌[任運惑]만이 비로소 현행할 수 있어 오로지 수면(隨眠)만이 존재하니, 자주 익힌 힘(즉 惰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즉 온갖 번뇌는 능히 자주 현행하였기에 결생할 때에도 특별한 노력 없이도 저절로 현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과 ‘구’는 자주 익힌 힘이 저열할뿐더러 사택에 의하지 않고서는 현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생은 온갖 ‘전’과 ‘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자지의 온갖 번뇌의 힘만이 생유를 더럽힌다고 함은 이치 상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의 중유 등은 각기 세 가지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모두 선ㆍ염오ㆍ무기와 통하는 것이다.
[다만] 중유의 첫 찰나의 상속 역시 필시 염오한 것으로서, 생유와 같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4유는 어떠한 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인가?
욕계와 색계는 4유가 모두 다 존재하며, 무색계에는 오로지 세 가지만 존재할 뿐이다.
즉 무색계의 업은 중유의 과보를 초래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순정리론』에서 이미 모두 사택(思擇)하였다.37)
2) 유정이 4유(有)로 머물게 되는 조건-4식(食)
그렇다면 유정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네 종류의 유(有) 중에 머물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은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는 것이니,
단식(段食)은 욕계계이며, 그 본질은 오직 3처(處)로서
색처(色處)는 그것의 본질이 아니니
자신의 근(根)과 해탈자에게 능히 이익되지 않기 때문이다.
촉(觸)ㆍ사(思)ㆍ식(識)의 세 가지 식(食)은
유루로서, 3계와 통하는 것이며
의성(意成)과 구생(求生)ㆍ식향(食香)ㆍ
중유(中有)ㆍ기(起)는 [중유의 다섯 이름이다].
앞의 두 가지 식(段ㆍ觸食)은 현세의
소의와 능의(能依)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뒤의 두 가지 식(思ㆍ識食)은 당유(當有)를
각기 순서대로 이끌어내고 일으키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설하기를,
“세존께서는 어떤 한 법을 스스로 깨달았는데, 올바로 깨닫고 올바로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온갖 유정으로서 식(食)으로 말미암아 머물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38)
어떠한 것을 ‘식(食,āhāra)’이라고 한 것인가?
식(食)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단식(段食)이며,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사식(思食)이며,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단식(段食)]
단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미세한 것[細]과 거친 것[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미세한 단식이란 중유의 ‘식’을 말하니, 그것은 향(香)을 먹기 때문이다.
또한 천(天)과 겁초(劫初, 세계가 이루어지던 태초) 유정의 ‘식’을 말하니, 배설의 더러움[便穢]이 없기 때문이며,39)
그것은 마치 기름이 모래에 스며들듯이 [4]지(支)에 흩어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혹은 더러움에서 생겨난 미세한 벌레[細汚蟲, 이를테면 이나 벼룩 따위)나 어린 아기 등이 먹는 것을 일컬어 미세한 단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거친 단식이다.
이와 같은 단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는 것(즉 욕계繫)으로, 단식에 대한 탐을 떠나야 상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40)
상계에서의 소의신은 외연(外緣)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색계에는 비록 능히 [소의신을] 증익할 만한 대종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단식이 아니니, [색계의 탐을] 묘욕(妙欲)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색계 중에 비록 미묘한 색(色)ㆍ성(聲)ㆍ촉(觸)의 경계가 존재할지라도, 이에 대한 증상의 탐을 견인하여 낳지 않기 때문에 ‘묘욕’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계에는 비록 가장 미묘하고 능히 섭취 증익할 만한 촉의 경계가 존재할지라도, 필경 조각으로 나누어[分段] 삼켜 먹는 일[呑噉]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단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단식에 포섭되지 않을지라도 ‘식’의 뜻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희(喜)와 같은 것은 비록 4식 중에 포섭되지 않을지라도 계경에서는 그것을 설하여 ‘식’이라고 하였으니, 식의 뜻을 갖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나는 극광정천(極光淨天)과 마찬가지로 희식(喜食)을 먹으며, 희식으로 말미암아 오래 머문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단식 자체에는 열세 가지(향ㆍ미ㆍ11촉)가 있지만, 처(處)로써 전체적으로 포섭하면 오로지 세 종류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오로지 욕계의 향ㆍ미ㆍ촉 세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는] 모두 다 단식(段食, 분단하여 먹는 것) 자체이니, 조각으로 나누어야 삼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입이나 코로써 그것을 부분적으로 나누어 수용하는 것으로, 소수의 경우는 대개의 경우에 따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단식 즉 ‘조각으로 나누어 삼켜 먹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삼켜 먹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만 몸을 능히 이익 되게 하고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라면, 역시 미세한 [단]식에 포섭되니,
예컨대 그림자나 광선, 덥거나 시원함, 바르고 씻는 것 따위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41)
또한 겁초(劫初)의 단계의 지미(地味) 등의 ‘식’ 역시 단식이라 이름하니, 분단되어 섭취되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마실 것 역시 단식이라 이름하니, 그것들도 모두 조각으로 나누어야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처(色處)는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것[段]’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먹는 것[食]’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섭취되어 자신에 대응하는 근(즉 안근)을 이익[攝益]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저 ‘식(먹을거리)’이라고 하는 것은 섭취되어 온갖 근(根)과 온갖 대종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지만, 색처는 섭취되어 자신의 근과 그것의 온갖 대종을 이익되게 할 만한 힘을 갖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직접 접촉하지 않고서[不至] [경계대상을] 취하는 근(根)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42)
즉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기 때문이다.
“단식(段食)은 손이나 그릇 속에 있으면 ‘먹는 것[食事]’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요컨대 코나 입 속으로 들어와 이빨로 잘 씹혀지고 침과 섞여져 목구멍을 넘어가 생장(生臟) 중에 떨어져 점차로 소화되어 맛의 세력이 그 품성을 성숙[熟德]시켜 온갖 [혈]맥(血脈) 중에 흘러들고, 온갖 세포[蟲]에 섭취되어 이익되게 할 때, 이를 ‘식(食)’이라 이름하며, 그때 비로소 ‘먹는 것’이 될 수 있다.”
만약 손이나 그릇 속에 있는 것도 미래[當]에 [먹을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마치 천수(天授)를 나락가(那落迦)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43)
비록 그것이 조각으로 나누어져[分段] 전체적으로 ‘식’이라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식’을 성취할 때에는 오로지 향ㆍ미ㆍ촉으로서만 존재하니, 그때는 오로지 이것만이 근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색처가 ‘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소의신 내의 근과 대종에 섭취되어 그것을 이익되게 하는 공능이 향ㆍ미ㆍ촉의 경우처럼 별도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때(실제 먹었을 때)에도 그러한 경계(즉 色處)의 식(識,즉 안식)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식(즉 안식)을 낳을 때에도 자신의 근(즉 안근)과 대종을 손상시키거나 이익 되게 하지 않거늘, 하물며 소의신에 들어가(섭취되어) 자신의 식을 낳지 않은 [그 밖의 다른 근이나 대종에 대해 그러하겠는가? 그러니] 그것을 어찌 능히 ‘먹는 것’이 된다고 하겠는가?
해나 달 등을 보고서 능히 안근이 손상되거나 이익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촉의 공능이지 형태나 색채[形顯]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찌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식(識)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 두 가지(형태와 색채)도 능히 손상시키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색처 역시 안근을 손상시키고 이익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치상으로 볼 때 마땅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마땅히 안근이 밝음[明] 등을 ‘식(食)’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밝음 등)이 경계대상(즉 觸境)이 될 경우 순고락촉(順苦樂觸)은 능히 ‘먹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색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안선나(安繕那)나 산가지[籌] 등의 온갖 색을 보더라도 안근은 증익되거나(좋아지거나) 감손되지(나빠지지) 않는다.44)
요컨대 안근 중에 이르러야(다시 말해 눈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여야) 비로소 안근은 증익되거나 감손된다.
그렇기 때문에 색처는 결정코 단식이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단식을 색ㆍ향ㆍ미를 갖춘 것이라 하여 찬탄하고 있는 것인가?
거기서는 기뻐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보조적인 연[助緣]도 아울러 찬탄한 것으로, 이는 마치 ‘공경하여 [단식을] 시여(施與)한 것’에 대해 찬탄하여 말한 것과도 같으니, 어찌 여기서의 ‘공경’을 역시 또한 단식이라고 말하겠는가?45)
즉 단식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보조적인 연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언급하여 향ㆍ미ㆍ촉을 나타낼지라도 역시 미묘하게 기뻐할 만하기 때문에 [경에서] 이렇게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식’의 본질은 오로지 향ㆍ미ㆍ촉일 뿐으로, 색이 아니니, 자신의 근(根)과 해탈자에게 능히 이익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식(食)’이라 이름하는 것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근과 대종(이를테면 생리조직)에 섭취되어 이익되게 하고, 그런 후 그 밖의 다른 근이나 대종에도 그러한 이익을 미쳐야 한다.
그러나 색[처]을 마시거나 삼킬 때에는 자신의 근이나 대종에 대해서도 이익되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능히 그 밖의 다른 근이나 대종에까지 미칠 것인가?
즉 그러한 온갖 근은 그 경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 어느 때 색을 보고서 희락(喜樂)이 생겨났을 경우, 이는 색을 연으로 하여 촉이 생겨난 것으로, 바로 ‘식(즉 觸食)’이지 색이 아니다.46)
또한 불환자(不還者)나 아라한의 경우 식에 대한 탐욕[食貪]으로부터 해탈하여 비록 미묘한 ‘식’을 볼지라도 ‘희’가 생겨나지 않아 어떠한 이익도 없기 때문에 [색은 ‘식’이 아닌 것이다].
단식의 계계(界繫)와 그 체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촉식(觸食)과 사식(思食)과 식식(識食)에 대해 나타내 보아야 할 것이다.
[촉식(觸食)과 사식(思食)과 식식(識食)]
촉식이란 이를테면 근ㆍ경ㆍ식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 심소를 말하는데,47) [12]연기를 설하면서 이미 널리 사택하였다.
사식이란 의업(意業)을 말하며,48)
식식이란 경계대상을 요별하는 것(즉 識蘊)을 말한다.49)
즉 이러한 세 가지는 오로지 유루로서, 그 모두는 다 3계에 존재한다.
이와 같이 4식의 체성(體性)에는 모두 열여섯 가지가 있다.50)
그리고 [본송에서] 오로지 뒤의 세 가지 식에 대해서만 유루라는 말을 설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향 등의 세 가지(즉 단식)도 무루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무루의 촉은 식이 아니다]
어떠한 연유에서 무루의 촉 등은 식(食)이 되지 않는 것인가?
‘식’이란 말하자면 온갖 유(有, 즉 4유)를 능히 견인하고, 능히 자조(資助)하는 것으로, 참으로 싫어하여 끊어야 할 애(愛)의 생장처(生長處)가 된다.
그러나 무루는 비록 다른 법에 의해 견인된 유(有)를 자조할지라도 스스로는 ‘유’를 견인할 만한 공능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참으로 싫어하여 끊어야 할 ‘애’의 생장처가 되지 않기 때문에 4식 중에 포함시켜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비록 유루법이라 할지라도 다른 계(界)나 다른 지(地)에 대해서는 역시 ‘식’이 되지 않는다.
다른 계나 다른 지에 속한 어떤 법은 비록 역시 원인이 되어 능히 현재의 ‘유’를 자조한다고 할지라도 능히 후유를 견인하는 원인은 되지 않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51)
즉 온갖 무루법이 현전할 때 비록 능히 원인이 되어 근(根)과 대종을 자조할지라도 능히 후유를 견인하는 원인은 되지 않는다.
비록 잠시 원인이 되어 근과 대종을 자조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다만 자기 자신의 수승한 소의가 되어 신속하게 열반으로 나아가 모든 ‘유’를 영원히 소멸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자지(自地)의 유루법이 현전할 때에는 현재의 [‘유’를] 도와 증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능히 후유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단식을 원인으로 하여 후유를 초래한다’는 뜻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 즉 촉 등의 ‘식’이 후유를 견인할 때 당래 내적으로 존재[內法]하는 향 등도 역시 견인하는데, 현재 내적으로 존재하는 향 등은 촉 등의 원인(즉 根이나 識)을 도와 당유(當有)를 견인하게 하며, 또한 역시 당래 [내적으로 존재하는] 향 등도 능히 스스로 취하여 등류과(等流果)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식은 후유의 원인(즉 촉 등의 식)과 동일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역시 능히 ‘유’를 견인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52)
그렇지만 향ㆍ미ㆍ촉 자체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숙생(異熟生)과 등류성(等類性)과 소장양(所長養)이 바로 그것으로,
외적으로 존재하는 향 등은 소의신 중의 내적으로 존재하는 향ㆍ미ㆍ촉을 각발(覺發)시키므로 말미암아 ‘먹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에서] 설한 [4]식은 그 이치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식(食)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능히 부다(部多)와 유정을 안주(安住)하게 하고, 아울러 능히 생을 구하는 자[求生者]를 도와 이익 되게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53)
즉 여기서 ‘부다(bhūta)’라는 말은 이생(已生)의 뜻을 나타내는데, 온갖 취(趣)로서 이미 생겨난 것을 모두 ‘이생’이라고 하는 것이다.54)
다시 ‘생을 구하는 자’라고 설한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이는 중유(中有)를 가리키는 말이니, 불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명칭으로서 중유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의성(意成,mano-maya)이니,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으로, 이는 바로 견인하는 업에 의해 견인된 결과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마땅히 커다란 과실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중유는 외적 조건[外緣]이 되는 정혈(精血) 등의 사물을 취하여 그것으로써 소의신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5)
둘째는 구생(求生, saṃbhavaiṣin)이니, 대개 기뻐하며 당래 태어날 곳을 찾아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이란 생유를 말하는데, 중유는 대개 생유의 처소로 나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식향신(食香身, gandharva-kāya)이니, 향식(香食)에 힘입어 태어날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넷째는 중유(中有, antarābhāva)이니, 생유(生有)와 사유(死有)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起, abhinirvṛtti)라고 이름하니, 사유와 무간에 지체(支體)상에 결함이 없는 소의신이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혹은 당래의 ‘생’에 대향하여 결정적으로 잠시 동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상 식이 무루가 아닌 이유)
[그렇다면 계경에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식(食)에는 오로지 네 종류만이 있다고 설한 것인가?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식’의 작용을 가지니, 경에서는 열반에도 역시 ‘식’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열반에도 ‘식’이 존재하니, 이른바 각지(覺支)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모든 유위법이 다 ‘식’의 작용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수승한 것만을 [‘식’으로]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대선존(大仙尊)께서는 교화할 자들을 위해 자조(資助)하는 힘이 수승한 것으로서 오로지 네 가지 ‘식’만을 설하였던 것이다.
즉 앞의 두 식(즉 段食과 觸食)은 이러한 신체의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를 능히 증익하고,
뒤의 두 식(思食과 識識)은 능히 당유(當有)를 견인하고, 능히 당유를 일으킨다.56)
다시 말해 그것들은 각기 순서대로 색(色)과 명(名)의 두 종류의 ‘유’의 몸을 북돋우어 이익[資益]되게 하고, 견인하여 일으키기[引起] 때문에 네 가지 식으로 설정하게 된 것으로, 여기서 소의란 ‘색’ 즉 유근신(有根身)를 말하며, 능의란 ‘명’ 즉 심ㆍ심소를 말한다.
즉 이러한 [4식] 중의 단식은 소의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니, 유근신은 이로 인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4식] 중의 촉식은 능의를 북돋우어 이익되게 하니, 심ㆍ심소는 이로 인해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식은 이미 생겨난 존재[已生有,즉 현재생의 유정]를 북돋우어 이익 되게 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하다.
그리고 사식(思食)은 인업(引業)이 되고, 식식(識食)은 종자가 되어 당유을 견인하여 일으킨다.
즉 [인]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당래의 ‘명’과 ‘색’의 두 종류의 ‘유’가 견인되며, 업이 [당래의 명색을] 견인하고 나면 애(愛)가 식(識)의 종자를 윤택하게 하여 능히 당유의 ‘명’과 ‘색’의 몸을 일으키니,
그래서 계경에서는
“업을 생인(生因)으로 삼고, 애를 기인(起因)으로 삼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 식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未生有,즉 미래생]를 인기하는 공능이 가장 수승하다.
그래서 오로지 이러한 네 종류만을 ‘식(食)’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4식 중 뒤의 두 가지는 낳아준 어머니와 같으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며,
앞의 두 가지는 길러준 어머니와 같으니, 이미 생겨난 것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널리 결택해 보아야 할 것은 『순정리론』 제30권에서와 같다.
3) 유정이 태어나고 죽을 때의 식(識) 등에 대하여
여기서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앞에서 4유(有)를 해석하면서 생유와 사유의 두 가지는 오로지 일 찰나라고 하였다.57)
그렇다면 이때에는 어떠한 식(識)이 현기하며, 이러한 식은 다시 어떠한 수(受)와 상응하는 것인가?
[또한] 선정심[定心]이나 무심(無心)의 상태(무상정과 멸진정)에서도 사유와 생유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인가, 획득할 수 없는 것인가?
[3성(性) 중] 어떠한 성질의 식(識)에 머물러야 열반에 들 수 있을 것인가?
목숨을 마칠 때 식은 어떠한 처소에서 멸하며, 단말마(斷末摩)는 무엇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단선근(斷善根)과 속(續)선근과
이염(離染)과 거기서 물러나는 것과, 죽고 태어나는 것은
오로지 의식 중에서만 그럴 수 있다고 인정되며
죽을 때와 태어날 때에는 오로지 사수(捨受)만이 존재한다.
선정심과 무심에는 두 가지(死ㆍ生有)가 있지 않고
두 가지 무기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며
서서히 죽을 때[漸死]에는 발과 배꼽과 마음에서
최후의 의식이 소멸하는데
하계(下界,악취)와 인ㆍ천과 불생(不生)이 그러하다.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것은 수(水) 등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선근을 끊을 때와 선근을 상속할 때, 3계 9지[界地]의 염오함을 떠날 때와 그러한 이염(離染)으로부터 물러날 때, 목숨을 마칠 때와 생을 받을 때, 이러한 여섯 가지 상태 중에서는 오로지 의식(意識)만이 [현전한다고] 인정하니, 그것들은 다 의식의 불공법(不共法)이기 때문이다. 즉 5식은 이러한 상태에 대해 어떠한 공능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생’(본송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은 [생유뿐만 아니라] 중유의 첫 찰나도 함께 포섭한다.
의식은 비록 3수(受, 苦ㆍ樂ㆍ捨受) 모두와 상응하는 것일지라도 죽거나 태어나는 순간에는 오로지 사수와 [상응할] 뿐이다.
즉 불고락수(不苦樂受,사수)의 성질은 명리(明利)하지 않아 죽거나 태어나는 순간에 수반될 수 있지만, 고ㆍ락의 두 수는 그 성질이 지극히 명리하여 죽거나 태어나는 순간에 수반되지 않는다.
그리고 명리한 식(識)의 상태에서도 죽거나 태어나지 않으니, 죽을 때나 태어날 때에는 필시 어둡고 저열[昧劣]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치상 ‘아래 세 정려에서는 오로지 근분지(近分地)의 마음에서만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근본지(根本地)에는 사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58)
비록 의식이 존재하여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할지라도, 이치상 선정심[定心]에서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그러한 선정심은 소의신과의] 계지(界地)가 달라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59)
설혹 계지가 동일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러한 선정심은] 지극히 명리하기 때문에, 뛰어난 가행력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없다].
또한 선정심은 능히 [소의신을] 섭익(攝益)하기 때문에 [죽는 일이 없으니], 필시 [소의신이] 해손(害損)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목숨을 마치기 때문이다.
또한 선정에 든 모든 마음은 염오하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는 일도 없으니], 필시 염오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을 받기 때문이다.
나아가 [계지(界地)가 다른 경우] 다른 지(地)에 [생겨난] 염심 역시 [소의신을] 섭익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목숨을 마칠 리가 없으며, 가행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생을 받을 리도 없다.
다른 지에 [생겨난] 염심은 필시 수승한 지[勝地]에 포섭되는 것이기에 저열한 지[劣地]로 가서 생을 받는 것을 즐겁게 여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에 [생겨난 정심(淨心)과] 무기심도 염오한 것이 아니며, 가행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역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다.
또한 역시 무심(無心)의 상태에서도 죽고 태어나는 일이 없으니,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혹 어떤 경우 다른 이의 해코지에 의해 [죽기도 하고],
혹은 자연적으로 목숨을 마치기도 한다.
그러나 무심의 상태에서는 다른 이가 능히 해코지할 수 없으니,
수승한 법이 몸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며,
무심의 상태에 처해서는 자연적으로 목숨을 마치지도 않으니, [무심정에] 드는 마음[入定心]은 결정코 능히 출정심(出定心)을 인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60)
이를테면 입정심을 등무간연으로 삼아 현재의 몸(즉 출정할 때의 몸)에 근거한 심(心) 등의 결과를 취하는 것으로, 필시 어떤 별도의 법이 능히 장애하여 [결과(즉 출정심)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일은 없다.
만약 소의신이 장차 변괴(變壞)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정적으로 이러한 소의신에 속한 마음(즉 출정심)을 다시 일으키고 난 연후에 비로소 [변괴하여] 목숨을 마칠 수 있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이치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어떤 계경에서 무심의 상태에서는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무상(無想)의 유정은 상(想)이 일어나야 그 처소에서 몰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심정의 상태에서 생을 받을 수도 없으니, [그것은] 필시 수승한 마음에 의해 바로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은 어둡고 저열한 상태에 머무를 때 받기 때문으로,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생을 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계경에서 무심의 상태에서는 생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식(識)이 만약 모태 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명색은 갈랄람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성취할 수 없을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61)
그런데 사유(死有)의 마음이 비록 3성(性)과 통할지라도 아라한은 필시 염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사유에] 비록 선심과 두 가지 무기심(즉 工巧處와 通果心)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강성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열반에 들지 못한다.
열반에 드는 마음은 오로지 두 가지의 무기이니, 이를테면 위의로(威儀路)나 혹은 이숙생(異熟生)이 바로 그것이다.62)
그리고 만약 욕계의 사수(捨受)의 이숙생을 갖는 경우라고 한다면 열반에 드는 마음은 두 가지의 무기와 통하지만,
만약 욕계의 사수의 이숙생을 갖지 않는 경우라고 한다면 열반에 드는 마음은 다만 위의로일 뿐이니,
마음은 필시 수(受)를 떠나 단독으로 존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성한 힘을 갖지 않는] 저열한 선심으로는 어떠한 까닭에서 열반에 들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한 선심에는 이숙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아라한은 미래의 모든 이숙과를 싫어하여 등지고서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숙생의 마음에 머물 경우 마땅히 열반에 들 수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으니, 앞서 [아라한은] 미래의 그것(이숙과)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열반에 든다고] 이미 분별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현재의 이숙과를 싫어하여 등지지 않는 것인가?
현재의 이숙과에 근거하여 모든 유(有)를 영원히 끊었다고 알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이숙과에 의해 무학과(無學果)를 증득한 것으로, 그것에 은혜가 있음을 알기에 깊이 염환(厭患)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아라한은 미래의 생[當生]에 대해 깊이 염환하기 때문에 목숨을 마칠 때 그것의 원인이 되는 선심에서도 벗어난다.
오로지 두 가지 무기만이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상속이 끊어진 어둡고 저열한 마음[昧劣心]과 순응한다.
따라서 오로지 두 가지 무기의 마음에 의해서만 열반에 드는 것이다.
안식 등의 온갖 식(識)은 색근에 의지(依止)하지만 [그것이 머무는] 방소(方所)를 갖지 않는데 하물며 의식이겠는가?
그렇지만 신근(身根)에 근거하여 그것(의식)이 [최후로] 멸하는 곳에 대해 말해보면 [이와 같다].63)
만약 갑작스레 죽는 자[頓死者]라면 의식과 신근이 문득 함께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멸하는] 별도의 처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서서히 죽는 자[漸死者]로서 하계(下界)와 인(人)과 천(天)으로 가는 이는 각기 순서대로 발과 배꼽과 마음(즉 심장)에서 의식이 소멸한다.
즉 악취에 떨어지는 자를 설하여 ‘하계로 가는 이’라고 말한 것으로, 그러한 이들의 의식은 최후로 두 발에서 소멸한다.
만약 인취(人趣)로 나아가는 이라면 그들의 의식은 배꼽에서 소멸하며,
만약 천취 중으로 왕생하는 이라면 그들의 의식은 마음 즉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아라한을 설하여 ‘불생(不生)’이라 이름하는데, 그들의 최후심 역시 심장에서 소멸한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그들의 의식이 멸하는 곳은 정수리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목숨을 마칠 때에는 신근은 [최후에] 발 등의 처소에서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도 이에 따라 그곳에서 [함께] 소멸하는데,
목숨을 마칠 때가 되면 신근은 점차 소멸하여 발 등의 처소에 이르러 문득 모두 소멸하게 된다.
이는 마치 약간의 물을 뜨거운 돌 위에 두게 되면 점차 줄어들고 점차 소실되어 마침내 어떠한 곳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는] 필시 동분의 상속을 원인으로 하는 일이 없으며, 능히 무간에 나아갈 곳의 후유(즉 5취 중의 어떤 후유)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서서히 목숨을 마치는 자만이 목숨을 마칠 때 말마(末摩)가 끊어지는 고수(苦受)에 의해 핍박되는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존재[別物]를 일컬어 ‘말마’라고 한 것은 아니다.64)
그렇지만 몸 가운데 신이(神異)한 마디[支節]가 있어 그것을 건드리면 바로 죽음에 이르게 되니, 이것을 ‘말마’라고 한다.
즉 풍(風)ㆍ열(熱)ㆍ담(痰)이 치성하여 몸 가운데 별도의 처소를 핍박하고 끊을 때 지극한 고수가 생겨나며,65) 문득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말마’라고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몸 가운데 별도의 처소가 있어
이를 건드리면 바로 목숨을 마치게 되니
마치 푸른 연꽃의 꽃술이
미진(微塵) 등에 의해 건드려지는 것과 같다.
즉 만약 수(水)ㆍ화(火)ㆍ풍(風)이 평등하게 인연화합하지 않을 경우, 서로가 서로를 어기고 배반한다.
[세 가지의] 세력작용이 혹은 전체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증성하여 말마를 상해하니, 마치 예리한 칼날로써 사지의 뼈마디를 분해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극심한 고수(苦受)가 인발(引發)되어 생겨나며, 이에 따라 잠시간[須臾]에 결정코 마땅히 목숨을 버리게 된다.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말마가 끊어졌다[斷末摩]’고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이를테면 장작이 잘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끊어졌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끊어져 지각이 없는 상태와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단’이라고 하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혹은] 즐거이 말을 발하여 그를 나무라거나 헐뜯게 되면 [그 말의] 진실되고 진실되지 않음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끊어지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당래 말마가 끊어지는 괴로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지계(地界)는 말마를 끊지 않는 것인가?
내적인 재앙과 환란[災患]으로서 제4의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적인 재앙과 환란에는 풍(風)ㆍ열(熱)ㆍ담(痰)의 세 가지가 있을 뿐으로, 그것들은 각기 [역순으로] 수ㆍ화ㆍ풍이 증가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66)
그러나 어떤 이는 “그것은 외적인 기세간[外器]의 3재(災)와 유사하다”고 말하였다.67)
그런데 이러한 말마가 끊어지는 일[斷末魔]은 천취(天趣)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천취의 유정[天子]이 장차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는 먼저 다섯 종류의 소소한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
첫째로는 의복과 장엄구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끊어지는 것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광명이 갑자기 어둡고 저열해지는 것이며,
셋째로는 목욕할 적에 물방울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며,
넷째로는 그 전의 본성은 시끄럽게 치달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경계에만 머무르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눈은 [한 곳을] 응시하여 고요하였지만 지금은 자주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다.
즉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더라도 결정코 목숨을 마치는 것은 아니니, 수승한 인연을 만나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섯 가지 커다란 쇠퇴의 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
첫째로는 옷이 티끌과 먼지에 더럽혀지는 것이며,
둘째로는 꽃다발이 시들고 마르는 것이며,
셋째로는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것이며,
넷째로는 악취가 몸에 배는 것이며,
다섯째로는 본래의 자리[本座]를 즐기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섯 가지의 상이 나타나면 결정코 목숨을 마치게 되니, 설혹 강력한 인연을 만나더라도 역시 뒤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4) 유정의 세 부류―3聚
세존께서는 이러한 유정세간이 태어나고, 머무르고, 몰(沒)하는 것을 논의하면서 3취(聚)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무엇을 3취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성(正性)과 사성(邪性)과 부정(不定)의 취(聚)는
성자와 무간업을 지은 이와 그 밖의 유정들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첫째는 정성정취(正性定聚)이며,
둘째는 사성정취(邪性定聚)이며,
셋째는 부정성취(不定性聚)이다.
[정성정취(正性定聚)]
무엇을 ‘정성’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하기를,
“탐(貪)을 남김없이 끊고, 진(瞋)을 남김없이 끊고, 치(癡)를 남김없이 끊었으며, 일체의 번뇌를 모두 남김없이 끊은 자, 이를 일컬어 ‘정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일체의 번뇌를] 끊은 이를 설하여 ‘정성’이라고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들은 거짓된 법[邪僞法]을 영원히 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끊음] 자체는 선하고 항상하여 지자(智者)라면 결정코 애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역시 성도(聖道)를 설하여 ‘정성’이라 말하였으니,
경에서
“[성도(즉 견도)에 들어가는 것을]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68)
[사성정취(邪性定聚)]
무엇을 ‘사성(邪性)’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취(趣)의 사성이고,
둘째는 업(業)의 사성이며,
셋째는 견(見)의 사성으로,
이는 바로 순서대로 악취(惡趣, 지옥ㆍ아귀ㆍ방생)와, 5무간업과, 다섯 가지 부정견(不正見)을 그 본질로 한다.69)
[정취(定聚)]]
그리고 이러한 [사성과 정성의] 두 가지를 ‘정(定)’이라고 한 것은, 학ㆍ무학법과 5무간업은 그 순서대로 결정코 이계(離繫)와 지옥의 과보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성취하는 자는 이러한 취(聚,즉 정성취와 사성취)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이러한 이를 일컬어 [각각?] ‘성자’라 하고, ‘무간업을 지은 자’라고 한다.
즉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지금 바로 해탈하거나 이미 해탈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말한 것이니, 성자란 바로 자재(自在)한 이로서, 계박을 떠났다는 뜻이다.
혹은 온갖 악을 멀리하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한 것이니, 필경 이계의 득(得)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혹은 선에 의해 나아가기 때문에 ‘성자’라고 말하였다.
또한 [‘무간업을 지은 자’에서] 중간에 [찰나의] 간격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무간업’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러한 [지옥의] 원인을 즐겨 행하였기 때문에 ‘지은 자’라고 말한 것이다.
[부정성취(不定性聚)]
나아가 정성과 사성의 결정적인 취 이외의 그 밖의 나머지 유정을 부정성(不定性)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들은 이러한 두 인연(즉 정성ㆍ사성)과 관계하여 둘 중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정코 어느 한 가지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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