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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론 제3권
2.10. 초능변식이 있다는 논증, 바른 논리1
앞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인용하여 증명했다[敎證].
이제 바른 논리를 나타내 보인다[理證].125)
[논증1]
경전126)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잡염법(유루법)과 청정법(무루법)의 종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곳이므로 심(心)127)이라고 이름한다”고 한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그 종자를 지니는 심(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전식(轉識)은 멸진정 등에서 단절됨이 있어서, 128) 감각기관ㆍ대상ㆍ작의(作意) 심소의 종류가 달라서 선(善) 등 3성(性)이 바뀌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번개가 번쩍이는 빛 등과 같이 체성이 견고하게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훈습을 받을 수 없고 종자를 지닐 수 없으며, 잡염ㆍ청정법의 종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심(心)이 아니다.129)
이 식은 한 종류이기 때문이고, 항상하여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며,
비유하면 거승(苣勝) 등과 같이 견고하게 머물기 때문에 훈습 받을 수 있고, 그 경전에서 말씀한 심(心)의 뜻에 계합된다.
만약 능히 종자를 지니는 심(心)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다만 경전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또한 바른 논리에도 어긋난다.130)
생겨난 모든 잡염법ㆍ청정법은 훈습 받는 곳이 없어서 종자를 훈습하지 못하면, 곧 일어난 그 공(功)을 헛되이 훼손해야 한다.
잡염법ㆍ청정법이 일어날 때에 원인의 종자가 없다고 말하면, 외도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색법과 불상응행법은 심법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소리나 빛 등과 같이 논리적으로 잡염ㆍ청정법의 내면의 훈습 받는 곳이 아니어야 하는데, 어떻게 종자를 지닐 수 있겠는가?131)
또한 그것은 식에서 떠나 실재의 자성이 없는데, 어찌 집착해서 내부 종자[內種]의 의지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132)
전식과 상응하는 모든 심소법은 식처럼 단절됨이 있기 때문이고 3성이 바뀌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또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에 종자를 지닐 수 없어야 한다.
또한 훈습을 받을 수 없어야 한다.133)
따라서 종자를 지니는 심(心)이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바른 논리이다.
[다른 견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34)
6식은 아득한 옛적부터 감각기관ㆍ대상 등을 의지하여 이전 찰나의 생각과 이후 찰나의 생각의 분위(分位)에서 식의 자체[事]는 비록 전변하지만 식의 부류[類]135)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識類]이 훈습을 받은 곳이고 능히 종자를 지닌다.
따라서 잡염ㆍ청정법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이룬다.
어째서 반드시 제8식의 체성이 있다고 집착하는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말뿐이고 합당한 뜻[義]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부류가 실재라고 집착하면, 곧 외도와 같다.136)
부류가 임시적인 것[假]이라고 인정하면, 곧 뛰어난 작용이 없는 것이 되므로 내면의 법인 실재의 종자를 지닐 수 없어야 한다.
또한 집착하는 식의 부류는 어떤 성품인가?
만약 선이나 악이라고 말하면, 훈습을 받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기가 아닌 유기(有記)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택멸(擇滅)137)과 같다.
만약 무기(無記)라고 말하면, 선심이나 악심인 때에는 무기심이 없기 때문에 이 부류가 단절되어야 한다.
식의 자체는 선이나 악인데, 부류는 무기일 수가 없다. 별개의 부류는 반드시 별개의 자체의 성품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6식이 활동하지 않는 지위[無心位]에서는 이 부류가 반드시 없어야 한다. 단절됨이 있기 때문이고, 체성이 견고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종자를 지니고 훈습을 받을 수 있다고 집착하는가?
또한 아라한과 중생의 마음은 식의 부류가 같기 때문에 모든 잡염ㆍ무루법에 훈습되어야 한다.138) 그렇다고 인정하면, 곧 과실이 있게 된다.
또한 안근 등과 혹은 나머지 법은 안식 등과 함께 감각기관과 법이 부류가 같기 때문에 서로 훈습해야 한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식의 부류가 훈습을 받는다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139)
또한 6식은 식의 자체이든 부류이든, 이전 찰나의 생각과 이후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간격을 두고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훈습하지 못한다.140) 능히 훈습하는 것[能熏:전식]과 훈습을 받는 것[所熏:제8식]은 반드시 때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오직 6식만이 동시에 전전(展轉)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141)도 앞에서 말한 논리의 취지142)에 의거해 보면, (6식은) 훈습 받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도 역시 능히 종자를 지니는 뜻이 없어야 한다.
[다른 견해]
다음과 같은 국집된 견해가 있다.143)
신체와 정신은 자기 부류의 바로 다음 찰나에 전법을 후법의 종자로 해서 원인과 결과의 뜻이 성립된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은144) 증명으로 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국집된 견해도 바른 논리가 아니다. 훈습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145)
그것(신체ㆍ정신)의 자기 부류(전념)는 이미 훈습이 없는데, 어떻게 전법이 후법의 종자가 된다고 고집하는가?
또한 단멸되는 것은 다시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146)
2승(乘)의 무학(無學)은 최후의 온(蘊)이 없어야 한다.147) 죽는 순간의 신체와 정신을 최후의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와 정신이 전전(展轉)해서 서로 종자가 되어 생겨난다고 집착해서도 안 된다. 전식과 색법(신체) 등은 훈습을 받는 곳이 아니라고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견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148)
3세의 모든 법은 다 실유(實有)로서, 원인과 결과로 초감(招感)하고(因) 나아감으로써(果) 다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어찌 수고롭게 능히 종자를 지니는 식이 있다고 집착하는가?
그런데 경전에서 마음을 종자로 삼는다고 말씀한 것은, 잡염ㆍ청정법을 일으키는 세력의 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주장도 바른 논리가 아니다.
과거세와 미래세는 상주하는 것[常:무위]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어서, 허공 꽃 등과 같이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세와 미래세가 작용이 없다고 말하므로 집착해서 인연성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149)
만약 능히 잡염ㆍ청정법의 종자를 지니는 식이 없다면, 모든 원인과 결과가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또한 대승에서도 현상계[相]를 부정하는 공의 도리[空理]150)를 집착해서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사람들151)은, 사비량(似比量)152)에 근거하여 이 식과 모든 법을 부정한다.
그들은 특히 앞에서 인용한 경전에 위배된다.
고(苦)를 알고 고(苦)의 집(集)을 끊으며 멸(滅)을 증득하고 도(道)를 닦는, 잡염법(고제ㆍ집제)과 청정법(멸제ㆍ도제)의 원인(집제ㆍ도제)과 결과(고제ㆍ멸제)를 모두 참된 것이 아니라고 집착하므로 큰 삿된 견해가 된다.
외도들도 잡염ㆍ청정법의 인과를 비방하면서도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가 아니라고만 집착하기 때문이다.153)
만약 법이 모두 실유가 아니라면 보살이 생사를 버리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깨달음의 자량(資糧)을 닦아 나갈 필요가 없다.
지혜 있는 자라면 허깨비[幻]라는 적(賊)을 없애기 위해서 석녀(石女)의 아이를 구하여 그를 활용해서 군대로 삼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능히 종자를 지니는 마음[心]이 있으며, 그것에 의지해서 잡염ㆍ청정법의 원인과 결과를 건립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곧 이 제8식이다.154)
125)
이하 제8식의 존재를 열 가지로 논증한다.
이것을 10리증(理證)이라고 하며, 이에 지종증(持種證)ㆍ이숙심증(異熟心證)ㆍ취생증(趣生證)ㆍ능집수증(能執受證)ㆍ수난식증(壽煖識證)ㆍ생사증(生死證)ㆍ식명색호위연증(識名色互爲緣證)ㆍ4식증(食證)ㆍ멸정증(滅定證)ㆍ염정증(染淨證)이 있다. 먼저 지종증(持種證), 즉 종자를 집지(執持)하는 것은 오직 제8식뿐임을 논증한다.
126)
경전을 인용해서 정리(正理)를 서술한다.
127)
심(心)의 산스끄리뜨 citta의 어원은 ci(쌓다, 증대하다)이다. citta는 집기(集起)로 의역(意譯)된다. 심(心), 즉 아뢰야식이 모든 법을 종자의 형태로 모아 저장하고[集], 그 종자가 현행되기[起] 때문이다.
128)
이하 경량부를 세 가지로 논파한다. 먼저 5온(蘊)이 훈습을 받아서 종자를 지닌다는 주장을 논파하는데, 처음에 6식, 즉 유식학적으로 전식(轉識)이 종자를 집지(執持)할 수 없음을 논증한다.
129)
이 문단에서 삼지작법(三支作法)의 인명논리를 다음과 같이 세울 수 있다.
(宗) 모든 전식(轉識:有法)은 훈습을 받지 못하고, 종자를 지닐 수 없으며, 잡염과 청정법의 종자가 집기(集起)되는 심(心)이 아니다(法).
(因) 단절됨이 있기 때문이고, 감각기관[根]ㆍ대상[境]ㆍ작의(作意)심소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며, 선(善) 등 3성(性)이 바뀌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 체성이 견고하게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喩) 번개가 번쩍이는 빛[電光] 등과 같다.
130)
이 문단에서도 역시 인명논리를 아래와 같이 건립할 수 있다.
(宗) 이 식(識:有法)은 훈습을 받을 수 있고, 그 경전에서 말씀한 심(心)의 뜻에 계합하며, 능히 종자를 집지(執持)하는 심(心)이어야 한다(法).
(因) 한 종류이기 때문이고, 항상하여 단절됨이 없기 때문이며, 체성이 견고하게 머물기 때문이다.
(喩) 거승(苣勝) 등과 같다.
131)
경량부에서 색법이 훈습을 받아 종자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한다.
132)
색법과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종자를 집지하지 못함을 밝힌다.
133)
심소법은 종자를 집지할 수 없음을 밝힌다.
134)
이하 경량부에서 식류(識類)가 훈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파한다.
135)
여기서 부류[類]는 전념(前念)과 후념(後念) 두 찰나의 요별(了別)의 뜻을 지니는 상(相)을 말한다.
136)
승론(勝論)학파에서는 모든 부류를 여섯 가지 범주[六句義] 중 특수성(viśeṣa, 異 또는 同異性)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실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과 같다고 비판한다.
137)
무위법인 택멸(擇滅)은 훈습을 받지 못한다.
138)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아라한(阿羅漢)이 모든 잡염법에 의해 훈습 받고 범부가 무루법에 훈습 받아야 한다고 비판한다.
139)
감각기관[根]과 법이 동류(同類)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즉 안근(眼根) 등 혹은 신근(身根) 등을 안식 등에 배대하면, 감각기관과 법이 같은 부류이다. 왜냐하면 안식 등은 과거로 낙사(落謝)하면 의근(意根)이 된다. 따라서 감각기관 쪽에서 말할 때는 5근(根)이나 신근(身根) 등과 안식 등이 같아야 한다.
또한 안근 등과 나머지 법이 공통적으로 법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보면, 6식도 마찬가지로 법이므로 모두 다 법이 된다.
이와 같이 감각기관과 법이 같은 부류이므로 색심호훈(色心互熏)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것을 논파하여, 만약 그렇다면 모든 법이 혼동되어야 하고, 예를 들면 장미꽃이 국화꽃에게 훈습하는 것같이 불합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대들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색심호훈(色心互熏)을 말할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
140)
경량부의 비유사(譬喩師)를 논파한다. 그들은 식류(識類)가 전후로 훈습함[識類前後熏習], 즉 인과이시(因果異時)이므로 식의 자체[事]도 부류[類]도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서로 훈습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것을 논파한다.
141)
대중부(大衆部)를 가리킨다.
142)
앞에서 모든 전식(轉識)은 멸진정 등에 있어서 잠깐 단절됨이 있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143)
이하 상좌부(上座部)를 논파한다. 그들에 의하면 전념(前念)의 색법은 후념(後念)의 색법의, 전념(前念)의 심법은 후념의 심법의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이 인과가 상속하기 때문에 굳이 제8식을 건립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므로 여기서 논파한다.
144)
제8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145)
그대들은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상속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전념의 법이 후념의 법을 이끌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훈습이 필요한 까닭이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146)
그대들의 주장대로 신체와 정신의 자기 부류[自類]의 바로 다음 찰나에 전법을 후법의 종자로 한다면,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자가 하계(下界)에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비판이다.
147)
전념(前念)의 법이 후념의 법의 원인이 된다면, 순차로 후념을 이끌어 상속되기 때문에 무학(無學)의 회신멸지(灰身滅智)는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학의 최후의 온(蘊)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148)
이하 설일체유부를 논파한다. 유부에서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설(法體恒有說)을 주장하여, 모든 법이 다 동류인(同類因)과 등류과(等流果)로 상속해서 인과를 이루는데, 어째서 수고롭게 제8식을 건립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것을 논파한다.
149)
유부는 3세(世)를 작용 위에 건립하여, 과거세와 미래세는 체가 없다[過未無體]고 말한다. 따라서 법이 미작용(未作用)인 미래로부터 정작용(正作用)인 현재로 오려면, 어떻게 무체(無體)인 미래로써 현재의 원인으로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제8식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0)
현상계를 부정하는 공의 도리[遺相空理]란, 모든 법이 자성이 없다고[一切法無自性]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청변(淸辯) 일파의 견해에 의하면, 의타기(依他起)의 차별상을 부정하고 공리(空理)를 집착한다. 즉 모든 법은 다 무자성으로서 공이라고 편집(偏執)하고, 반야개공설(般若皆空說)을 집착한다.
그러나 유식학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것(일체법무자성)은 밀의(密意)ㆍ불료의(不了義)의 설이다. 3성설(性說)을 분명하게 말하기 위한 방편교(方便敎)일 뿐이고, 유식학의 3성(性)ㆍ3무성(無性)의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설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내는 요의의 가르침[顯了眞實敎]이라고 말한다.
151)
중관학파의 청변(淸辯) 등을 논파한다.
152)
사비량(似比量)은 하나의 사상(事象)에 의해 다른 부정(不正)한 사상(事象)을 추리하여 아는 경우를 말한다.
진비량(眞比量)에 대한 용어로서 인명입문(因明入門)의 하나이다. 청변(淸辯)의 사비량은 그의 『장진론(掌珍論)』 상권에 나온다. 즉, “참된 성품[眞性]에 있어서 유위법은 공(空)이어야 한다. 환(幻)과 같이 연(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위법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일어나지 않는 것이 허공의 꽃과 같다”라고 한다.
153)
청변 등이 다만 실(實)이 아니라고만 집착함으로써 큰 사견(邪見)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154)
총체적으로 결론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