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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5권
변연기품 ⑤
3. 12연기(緣起)에 따른 윤회전생
3.1. 12지(支)의 3세 양중(兩重)의 인과
1) 총설
[탯집] 내외에 존재하는 갈랄람(羯剌藍) 등과 종자[種] 등에 관한 도리와 그것의 인과상속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인과상속을] 설하여 바로 연기(緣起)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기에는 오로지 12지(支)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무엇을 일컬어 연기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1) 그렇지만 계경 중에서는 연기에 대해 분별하면서 혹 어떤 때에는 12지를 갖추어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 등에서 설한 바와 같다.2) 혹은 11지를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지사(智事)』 등의 경이 바로 그러하다. 혹은 오로지 10지만을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성유경(城喩經)』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3) 혹은 다시 9지를 설하기도 하였으니, 『대연기경(大緣起經)』 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4) 혹은 8지가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으니, 계경에서 “온갖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으로서 온갖 법성 등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
이렇듯 설하는 바에 따라 온갖 차별이 있으니, 어떠한 이유에서 본론(本論)의 설과 계경 사이에 그토록 차이가 있는 것인가?
논(論)은 법성(法性)에 따른 것이지만 경(經)은 교화하는 방식[化宜]에 따른 것이니, 그래서 계경 중에서는 연기를 분별하면서 교화할 이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논(論)은 요의(了義)이나 경(經)은 불요의이다. 혹은 논에서는 유정과 무정 모두에 대해 설하였던 것이지만, 계경에서는 다만 유정수에 근거하여 설하였을 뿐이다.
즉 유정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염오와 청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6) 부처님께서는 유정을 위하여 이 두 가지를 개현(開顯)하였으니, 부처님께서는 다만 이 일을 위해 세간에 출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계경 중에서는 다만 유정에 근거하여 크나큰 의리(義利)를 성립시키기 위해 [여러 종류의]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였던 것이다.
[연기의] 온갖 지분 중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별적인 뜻이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바야흐로 3생(生, 과거ㆍ현재ㆍ미래생)의 분위(分位)로서 무간으로 상속함에 따라 12지(支)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간략히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같은 온갖 연기는
12지(支)로서, 3제(際)이니
전제와 후제는 각기 2지이며
중제는 원만한 자에 따를 경우 8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2지(支)란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두 번째는 행(行)이며, 세 번째는 식(識)이며, 네 번째는 명색(名色)이며, 다섯 번째는 6처(處)이며, 여섯 번째는 촉(觸)이며, 일곱 번째는 수(受)이며, 여덟 번째는 애(愛)이며, 아홉 번째는 취(取)이며, 열 번째는 유(有)이며, 열한 번째는 생(生)이며, 열두 번째는 노사(老死)이다.
그리고 3제(際)라고 하는 말은 첫 번째는 전제(前際)이고, 두 번째는 후제(後際)이며, 세 번째는 중제(中際)이니, 바로 과거ㆍ미래와 아울러 현재의 3생을 말한다.
어떻게 12지를 3제에 건립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전제와 후제에 각기 2지를 설정하고, 중제에 8지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12지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즉 무명과 ‘행’은 전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과거의 생이다. 생과 노사는 후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미래의 생이다. 그 밖의 나머지 8지는 중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현재의 생이다. 그리고 [이러한 8지 중에서] 전제의 두 원인에 의해 초래된 5지는 결과이고, 후제의 두 결과에 근거[待]가 된 3지는 원인이다.7)
그렇지만 모든 이의 일생이 다 이러한 8지를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본송에서] ‘원만한 자에 따를 경우에는 [중제에] 8지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
원만한 자란 어떠한 자를 말하는 것인가?
지분[支]에 결여됨이 없는 자를 말한다. 혹은 원만한 혹(惑, 즉 번뇌)과 업(業)에 의해 초래된 자이니, 이를테면 이전(전생)의 증상(增上)의 혹과 업에 의해 인기된(태어난) 이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보특가라로서 모든 단계[位]를 거친 이를 ‘원만한 자’라고 일컬은 것으로,8) 중간에 요절한 이[中夭]나 색ㆍ무색계의 보특가라는 ‘원만한 자’가 아니니, 갈랄람 등의 온갖 상태를 결여하였기 때이다. 세존께서도 다만 욕계의 일부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12지를 갖추었다고 말하였으니, 예컨대 『대연기경(大緣起經)』 중에서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식(識)이 만약 입태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증성 광대해 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증성 광대해질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바와 같다.9)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보특가라가 바로 이전 생에 무명과 ‘행’을 지었다면 현재 생에 ‘식’ 등의 5지를 모두 초래하게 될 것이며, 다시 현재 생에서 애ㆍ취ㆍ유를 지었다면 바로 다음 세에 ‘생’ 등의 2지를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이 계경은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모든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연기의] 모든 지분(즉 12지)을 설정하였다면, 바로 잡란(雜亂)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그러한 보특가라가 혹 현재 생의 5지를 가질지라도 그것은 이전 생의 무명과 ‘행’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있으며, 아울러 바로 다음 세의 ‘생’과 노사의 지분도 현재 생의 애ㆍ취ㆍ유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그러한 경우가 다 이 경의 뜻만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10) 그렇지만 결과와 원인이 서로 떨어져 격절(隔絶)되어 있다 하여 그것이 원인에 의해 초래되고 결과를 일으키는 데 어떠한 공능도 없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2) 12지의 2세 양중의 인과
연기의 [12]지는 간략히 오로지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의 둘로 나누기도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7지와 5지를 결과와 원인으로 하여 인과관계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원인과 결과가 되는 5지와 7지에서 원인을 원인에 포섭시키고 결과를 결과에 포섭시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재의 애ㆍ취는 바로 과거의 무명에 포섭되며, 현재의 ‘유’는 바로 과거의 ‘행’에 포섭된다. 또한 현재세의 ‘식’은 바로 미래의 ‘생’에 포섭되며, 그 밖의 현재의 4지(명색ㆍ6처ㆍ촉ㆍ수)는 바로 당래(미래)의 노사에 포섭되니, 이것을 ‘인과의 이분(二分)의 차별’이라 이름한다.11)
| 구분(인과 이분) | 대응하는 지분 (2세 양중의 포섭 관계) | 내용 및 설명 |
| 원인 (因) 쪽으로 포섭 (전제 + 현재의 미혹) | • 무명 · 행(과거의 인) • 애 · 취 · 유(현재의 미혹과 업) | • 현재의 애·취는 과거의 무명에 포섭됨 • 현재의 유는 과거의 행에 포섭됨 (결국 번뇌와 업이라는 ‘인(因)’의 측면으로 통합) |
| 결과 (果) 쪽으로 포섭 (현재의 과보+미래의 과보) |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현재의 과) • 생 · 노사(미래의 과) | • 현재의 식은 미래의 생에 포섭됨 • 현재의 4지(명색·6처·촉·수)는 미래의 노사에 포섭됨 (결국 고통스러운 과보라는 ‘과(果)’의 측면으로 통합) |
3) ‘연기(pratītya samutpāda)’의 어의(語義)
이러한 ‘연기’라는 말은 어떤 뜻에 근거한 것인가?12)
지금 여기서 [연기 즉 pratītya samutpāda(=prati-itya-sam-ut-pāda)라는 말의] 차별적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테면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현전(現前)의 뜻이다. 일녀(壹女, iti)의 어근[界, 즉 √i]은 존재[有]의 뜻이니, 하나의 어근 중에는 다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일녀(iti)의 어근(√i)은 앞의 [접두사] 발랄저(prati)에 의해(다시 말해 발랄저와 결합하여) ‘연(緣)’의 뜻이 되었다. 흘타(訖埵, ktvā=tya)라는 어미[緣]는 바로 ‘이미[已]’의 뜻으로, [연기의 ‘연’이란] 이것이 소의(所依, 즉 pratī)와 결합하여 변화함으로써 이루어진 말이다.
그리고 엽비삼(獵比參, abhisam)은 바로 ‘화합하다’의 뜻이고, 올(嗢, ut)은 ‘상승하다’의 뜻이며, 발지(鉢地, padi)의 어근(즉 √pad)은 존재[有]의 뜻이다. 곧 올(ut)이 앞에 옴으로 말미암아 발지(padi)의 어근(√pad)은 ‘일어나다[起]’의 뜻이 되었다. 이상의 뜻을 종합하면 ‘연(緣)이 현전하고 나서 화합함으로써 존재하는 법이 상승 생기한다’는 것이니,13)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연이 현전한다’는 말은 바로 ‘화합한다’는 말인데,14) 다시 ‘화합한다’고 말한 것에는 어떤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인가?
어떠한 법도 오로지 하나의 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혹은 구생연(俱生緣)과 전생연(前生緣)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니, ‘연이 현전한다’는 말은 구생연을 나타내며, ‘연이 화합한다’는 말은 전생연을 나타낸다. 이는 곧 [어떤 법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의지할 연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났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또는 발랄저(prati)는 마땅히 ‘가다[行]’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하고, 일녀(iti)의 타도(馱都, 界dhātu의 音寫, 즉 어근 √i를 말함)는 불괴법(不壞法)을 나타내며, 삼(參, sam)은 ‘바로 집합하다[正集]’는 뜻을 나타내니, 이러한 뜻들은 전체적으로 세간이 출현하는 원인을 설하여 ‘연기’라고 이름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일녀(iti)의 어근(√i)은 앞의 [접두사] 발랄저(prati)의 도움에 의해(다시 말해 발랄저와 결합하여) [그 뜻이] 전변하여 ‘연(緣)’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집합하다(즉 sam)’와 ‘상승하다(즉 嗢, ut)’는 말이 앞의 [접두사가] 되어 도왔기 때문에 발지(鉢地, padi)의 어근(즉 √pad)은 [그 뜻이] 전변하여 ‘일어나다[起]’의 뜻이 되었으니,15) 바로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연기’라는 말을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연기’의 어의에 대한 경주(經主) 설 비판
그러나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와는 차별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발랄저(鉢剌底, prati)는 바로 ‘이르다[至, prāti]’의 뜻이다. 의저(醫底, iti)의 어근[界, 즉 √i]은 ‘가다[行,gati]’는 뜻이지만, 앞의 [접두사(즉 prati)의] 조력(助力)으로 어근의 뜻이 전변하였다. 그래서 ‘가다’가 ‘이르다’에 의해 [그 뜻이] 전변하여 ‘연(緣)’이 되었다. 그리고 삼(參, sam)은 바로 ‘화합하다’는 뜻이고, 올(嗢, ut)은 ‘상승하다’는 뜻이며, 발지(鉢地, padi)의 어근(즉 √pad)은 존재[有, sattā]의 뜻이다. 즉 존재가 ‘화합하다’와 ‘상승하다’는 말에 의해 [그 뜻이] 전변하여 ‘일어나다[起]’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어떤 법이 연에 이르고 나서 화합 상승하여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16)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그의 종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먼저 ‘존재’의 [뜻이라는 발지(鉢地, padi)의] 어근(즉 √pad)이 앞의 [접두사(즉 sam과 ut)의] 조력으로 [그 뜻이] 전변하여 ‘일어나다[起]’가 되었다고 하였지만, [이것(일어나는 것)도] ‘존재’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다시 ‘존재’의 뜻을 나타내어 본들 궁극적으로 성취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즉 [여기서] 그가 종의로 삼는 바는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없고 일어난 것도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일어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으로서 동일하니, 마땅히 아무런 뜻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17)
경주 스스로도 이상과 같은 [해석의] 말[句義]을 제시하고서 다시 스스로 다음과 같은 힐난을 일시 시설하고 있다. 즉 “이와 같은 말의 뜻은 이치상 옳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한 명의 작자에 근거하여 두 가지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미’라는 말을 붙여야 하니,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목욕하고 나서[已] 비로소 식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어떠한 법도 일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다가 먼저 연에 이르고 난 후에 비로소 일어나는 일은 없으니, [아직 일어나지 않아] 작자가 없어 [‘이른다’는] 작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18) 이를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연(緣)에 이르는 것’이 만약 ‘일어나는 것’보다 먼저라면
[작자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치에 맞지 않고
만약 양자가 동시라고 한다면, 바로 허물어질 것이니
그것(‘연에 이르는 것’)을 마땅히 먼저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19)
그리고서는 스스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이제 바야흐로 도리어 성론(聲論)의 여러 논사들에 대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법은 어느 때의 것이 일어나는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설혹 그렇다고 하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가?
만약 현재의 법이 생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겨난 것[已生]’이 아닌데 어떻게 현재의 법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현재에 이미 생겨났다고 한다면 [생겨난 법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이 다시 일어난다고 할 경우 무한소급[無窮]에 이르게 된다. 또한 만약 미래의 법이 생기한다면, 그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인데 어떻게 작자를 성취할 것이며, 작자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작용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생기하려는 상태에 대해서도 역시 바로 ‘연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생기하려는 상태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미래세의 제행(諸行)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나려고 하는 상태에 대해서도 역시 ‘연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0)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능히 앞의 힐난에 대해 해석한 것이 아니니, [우리의 종의에서는] 바로 일어나려고 하는 상태[正起位]는 미래에 속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종의에 의하면, 미래[법]은 그 자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무엇에 근거하여 ‘연에 이른다’는 사실과 ‘일어난다’는 사실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 같은 해석은] “어떠한 [제]행의 법도 일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다가 먼저 연에 이르고 난 후에 비로소 일어나는 일은 없으니, [아직 일어나지 않아] 작자가 없으므로 [‘이른다’는] 작용도 있을 수 없다”는 앞서의 힐난에 대해 두루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성론(聲論)의 논사들이 망령되게 설정한 작자와 작용도 이치상 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 즉 그들은 ‘이 같은 작자가 있어 이 같은 작용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여기에서 ‘일어나는 작용과는 다른 별도의 작자가 존재하여 [비로소 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진실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뜻의 말은 세속적 용법[世]상에 있어서도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하였다.21)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작자와 작용은 의미상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떠한 것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필경 비존재[無]가 마땅히 작자가 되어야 한다.22) 또한 그의 말에 따를 것 같으면, 작자와 작용은 혹은 다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동일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그에 의하는 한] 그것(일어나는 작용)의 미래[법]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작자는 성취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말은 앞의 허물(비존재가 작자가 되어야 하는 허물)을 면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대덕 라마(邏摩)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만] 뜻을 드러내기 위해 말소리를 발(發)하는 것으로, ‘생’이나 ‘멸’ 등의 말은 다 제행이 상속하는 상태[分位]에서 차별 안립되어 다수의 뜻 중에서 비로소 구경(究竟, 본래의 뜻)을 획득하니, 일 찰나의 미세함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속하는 상태를 [유위]상(相)으로 설정한다는 사실은 이미 성취(논설)하였으니,23) [여기서의] 일 찰나도 역시 이에 준하여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24)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다만 헛된 말[虛言]일 뿐이다. 즉 ‘말소리는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이미 설하였지만, 그의 종의에 의하면 ‘생’ 등은 그 자체로서 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 등의 말은 드러낼 만한 뜻이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뜻으로 삼는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생’ 등의 상은 [제]행이 상속하는 상태를 안립한 것이 아니니, 앞서 유위상에 대해 사택하면서 이미 비판 부정하였기 때문이다.25) 요컨대 찰나의 상태에 [근거하여] 상(相, ‘이르는 것’과 ‘일어나는 것’의 상)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제]행의 상속 중에서도 바야흐로 이에 준하여 [유위상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니, 상속은 가유(假有)로서 실체(즉 유위4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일어난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여 설한 것인가? [작자(즉 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작용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작용’이라는 말도 설할 수 없을 것이니, 절대적 비존재[畢竟無, 토끼 뿔과 같은 궁극적 비존재]에 대해 작용을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경주 세친)는 [앞서 성론의 논사들이 제기한] 힐난에 대해 역시 잘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대법종(對法宗)만이 ‘이미’라고 하는 말을 설하더라도 아무런 허물이 없으니, [법 자체는] 일어날 때도 일어나기 전에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으로,26) 이를테면 대법자(對法者)는 “법이 일어날 때에도 이미 생겨난 상태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 실유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연에 이른 것’에 대해] 세속적 용법에 따라 작자를 설하더라도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하였지만,27) 일어나려고 하는 온갖 상태[起位, 즉 미래 生相位)를 설하여 절대적 비존재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작자를 설한 것이 어찌 오류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인과가 구생(俱生)한다고 논의하는 자도 ‘이미’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과실에서 해탈할 리(벗어날 리) 없다”고 한다면,28) ‘이미’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논의[進退]에 어긋남이 없으니, 작자(즉 법체)와 [작용하는] 시간이 동시[俱]로서 결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동일한 작자에 근거하여 ‘이미’라는 말을 설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미’라는 말이 다른 작자에 근거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으니, 예컨대 ‘나에게 이미 의지하고 나서[依我已] 그대는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비록 ‘이미’라는 말을 이전 시간에 근거하여 설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역시 이후의 시간에 근거하여 설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으니, 예컨대 ‘입을 벌리고서 잠을 잔다[開口已眠]’고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비록 ‘이미’라는 말을 [전후의] 다른 시간에 근거하여 설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역시 다르지 않은 시간에 근거하여 설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으니, 예컨대 세간에서 ‘등불이 이르고 나서 어두움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29)
그렇기 때문에 인과가 구생(俱生)한다고 논의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연기의 이치에 대해 논의[進退]하는데 어긋남이 없다. 곧 연기(緣起)라고 하는 말의 뜻은 오로지 이러한 해석만이 지극히 잘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30)
4)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의 의의
(1) 연기 법설(法說)과 의설(義說)에 관한 상좌의 해석 비판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12]연기를 해석하기 위해 먼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하여, 오로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으로만 설하지 않은 것인가?
연기의 뜻에 대해 해석하리라.
먼저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연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정수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비 유정수에 관한 것이다. 앞의 두 구절(즉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의 말은 두 종류를 모두 포섭하니, 이 말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은 오로지 유정만을 포섭하니, [무명 등은] 유정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 상좌가 직접 가르친 문인[親敎門人]들은 스스로 이를 배척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나타낸 것’과 ‘해석한 것’이 이치상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31) 즉 앞서 ‘나타낸 것’과 뒤에 ‘해석한 것’은 이치상 반드시 서로 부합해야 하는데, 어떻게 [앞에서는] 두 구절[雙]로 나타나고서 뒤에서는 오로지 한 가지로만 해석하였을 것인가? 또한 이 경 중에서는 외적 존재에 관한 연기[外緣起, 즉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를 먼저 나타내지 말았어야 하였을 것이니, 무용(無用)하기 때문이다.”32)
그러나 이러한 배척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앞에서 [상좌가] 해석한 말은 ‘나타낸 것’과 ‘해석한 것’이 어긋나지 않으며, 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의 뒤에 해석한 말은 [앞서] 나타낸 것 중 유정에 관한 연기[有情緣起]와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낸 것’과 ‘해석한 것’이 이치상 상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저 [경에서는] 먼저 [전체적인 뜻을] 나타내고서 이를 헤아려 뒤에 해석하는 것으로, 뒤에 이미 [비유정수에 관한] 해석이 없는데 앞서 무슨 소용에서 [그것을] 나타내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앞의 두 구절은] 다만 마땅히 유정수에 관한 연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면 [뒤의] 해석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이상 상좌 문인들의 힐난)
바야흐로 [앞의 두 구절은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를] 별도로 나타낸 것이 아닌데, 해석하지 않은들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이미 별도로 해석할 일이 없다면 무슨 소용에서 [유정수와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를 앞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내었을 것인가?
여기서(앞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내게 된 데에는 크나큰 의미와 소용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非情緣起]는 바로 관찰할 수 있지만, 내적 존재에 관한 연기[內緣起, 즉 유정수에 관한 연기]는 바로 관찰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즉 종자가 싹 등을 낳는다는 것은 세간에서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의 사실은 세간에서 바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마치 종자 등이 있으므로 싹 등이 있을 수 있으며, 아울러 종자 등이 생겨났기 때문에 싹 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 등이 있으므로 ‘행’ 등이 있을 수 있으며, 아울러 무명 등이 생겨났기 때문에 ‘행’ 등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현시(顯示)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연기를] 전체적으로 나타내게 된 데에는 크나큰 의미와 소용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앞의 두 구절(즉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은] 일체의 유위법으로서 온갖 연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3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비유정수에 대해서는 앞에서 나타내고 뒤에서 해석한 유정의 경우처럼 해석하지 않은 것인가?
비유정수[에 관한 연기]는 알기 쉽기 때문에 다만 전체적으로 나타내었을 뿐이지만, 유정수[에 관한 연기]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별도의 해석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연기의 온갖 교법은 대개 이근(利根)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나타낸 바를 모두 다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유정은 수승하기 때문에 마땅히 널리 분별해 보아야 하지만, 외적 존재[外法]는 역시 또한 내적 존재를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종유경(種喩經)』 등과 같은 그 밖의 다른 계경 중에서는 외적 존재에 관한 연기에 대해서도 역시 널리 분별하고 있는 것인가? 따라서 [그대가] 해석한 바는 옳지 않은 것이다.(상좌 문인들의 해석)
이와 같은 스승(즉 상좌 스리라타)의 제자[師徒]들을 어질고 착하다고 할 수 없을 것으로, 이렇듯 자신들의 스승이 노심초사하여 지은 논(論)의 종의를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경솔하게 탄핵하고 배척하니, 법을 잘 설하는 자[善說法者]라면 이치상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그(상좌)가 해석한 바를 자세히 살펴보니, 일체의 모든 해석이 다 자신의 논(論)과 서로 모순 된다. 이를테면 그는 논에서는 “경은 모두 요의(了義)이다”고 말하였으면서 지금 여기서의 해석은 그 논의 종의에 어긋나니, [『연기경』에서는 앞에서] 나타낸 뜻을 모두 펼치지 않았다고(해석하지 않았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으로, 그것은 바로 이 경이 요의경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결정코 그가 종의로 삼는 경의 뜻이 아닌 것이다.34)
(2) 대덕 라마(邏摩)의 해석 비판
대덕 라마(邏摩)는 자신의 스승의 해석에 대해 심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시 스스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12지(支)가 3제(際)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바로 3제의 연기를 간략히 포섭하기 위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다시 말해 3제에 근거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두 구절은 순서대로 친인(親因, 직접적인 원인)과 전인(傳因, 간접적인 원인)을 나타낸다.”35)
그러나 이 역시 그렇지가 않다. 먼저 ‘3제의 연기를 포섭하기 위해 이러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두 갈래[門]의 말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상세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말의 뜻이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 뜻이 같다고 한다면, 단지 한 갈래의 말만 설하더라도 그 뜻이 두루 미쳐 다른 한 갈래의 말은 쓸모없게 되고 말 것이다. 또한 뒤의 해석(2구는 각기 친인과 전인을 나타낸다는 해석)을 부정하고서 이러한 2구의 말은 두 가지의 원인을 별도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앞뒤[의 해석]을 다시 설하여 그 의미가 같다고 하든지 혹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뒤의 해석처럼 2구의 뜻이 다르다고 한다면, 3제를 포섭하기 위해 이러한 2구의 말을 설할 경우 이러한 두 말을 각기 거듭하여 설해야 한다.36) 만약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면, [앞의 2구의 뜻은 12연기의] 일체[의 모든 지분]에 두루 미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럴 경우 [앞서] ‘나타낸 것’과 [뒤에] ‘해석한 것’은 뜻이 서로 부합하지 않게 된다.37) 이를테면 [앞서] ‘나타낸 것’ 중에 포섭되지 않은 뜻을 [뒤에] 해석하는 중에서 널리 분별하였다면 그 뜻이 어찌 상응한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그는 [뒤의 12연기의 지분은 앞서] ‘나타낸 것’과 어긋나는 해석이라는 이치를 다시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친(親)ㆍ전(傳)의 원인도 다 [12연기의] 온갖 지분 상에서 거듭하여 말한 일이 없다.38) 다만 [앞서] 나타낸 1구를 따라 [말하였을] 뿐으로, 뒤의 [12연기의 온갖 지분에 대한] 광석(廣釋)과 상응하지 않는다.39) 따라서 만약 이 2구가 [12연기의] 온갖 지분에 두루 소속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처음의 무명이 연이 되어 ‘행’을 낳을 때 혹은 친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전인이 되기도 하며, ‘행’ 등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면, 이는 단지 희망사항(그럴 수도 있다는 추측)일 뿐 실제적인 이치는 없으니, 뒤(12연기의 온갖 지분에 대한 해석)에서 이와 같이 분별하여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즉 [마라의 두 번째 해석에 따를 경우에도] [앞의] 나타낸 것과 [뒤의] 해석이 다시금 서로 부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유종(譬喩宗)에서는 과거ㆍ미래[법]은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다[過未無體]고 하였는데, 어떻게 친(親)ㆍ전(傳)의 두 원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업은 무간에 능히 이숙과를 낳지 않기 때문에 업은 이숙과에 대해 친인이 되지 않는다. 또한 역시 전인도 되지 않으니, ‘전(傳)’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즉 업이 소멸하고 난 이후 그 밖의 [수계(隨界)와 같은] 다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 업력에 의해 이숙과가 초래되는 것으로, 요컨대 선행한 원인이 소멸하고 나서 다른 원인이 결과를 초래한다고 할 때 멀리 떨어진[遠] 선행한 원인의 힘에 의해 [초래되는 것을] 바야흐로 ‘전인(傳因)’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40)
온갖 유정들이 [이 같은 이숙과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제멋대로 생각하는 구(舊) 수계(隨界) 등에 대해서는 ‘인연(因緣)’을 사택(思擇)하면서 이미 널리 부정하고 비판하였다.41) 설혹 [수계에] 그 같은 ‘전(傳)’의 뜻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원ㆍ근의 두 원인은 되지 않으니, [전법(前法)인 이상] 소멸한 것으로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에 근거하여 그것은 원인(遠因, 즉 轉因)이고, 이것은 근인(近因, 즉 親因)이라고 말할 것인가?
증유(曾有) 즉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이라는 설에 근거하더라도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42) 둘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할 때에는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이 ‘전’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43) 이에 따라 당유(當有) 즉 당래 존재할 것이라는 설에 근거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한 셈이다. 그리고 현재[법]이 비록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미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근거하는 바가 없어 그것에 ‘전(傳)’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44)
그렇기 때문에 비유자(譬喩者)의 논의라고 하는 것은 다만 광혹(誑惑)하여 참된 정리(正理)와 성교(聖敎)에 미혹하고 각혜(覺慧)가 없는 이들이 무시로 해석한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하는 것이다.
(3) 2구의 연기설에 대한 상좌와 그의 문인(門人)들의 논란 비판
나아가 상좌(上座)의 도당(徒黨) 중의 어떤 이는 “[이와 같은 2구는] ‘원인이 없다[無因]’거나 ‘영속하는 원인[常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깨트리기 위한 것이다”고 해석하였으며,45) 어떤 이는 “[이러한 2구는] 인과의 지속[住]과 생기[生]를 밝히기 위해 설한 것이다”고 해석하였다.46) 그러나 이러한 2구에 관해 설한 것에 대해서는 경주(經主)가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다시 비판하지 않는다.47)
[이에 대해] 상좌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함은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에 소멸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은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할 경우] 결과는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 의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고 다시 말하게 된 것으로, 원인 없이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이같이 힐난하여 말하였다.
“경의 뜻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없게 된다’고 설해야 하였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먼저 ‘원인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나서 그 후에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이 없게 된다’고 말했어야 하였을 것이니, [그가 해석한대로 라면] 이와 같은 순서를 선설(善說)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연기를 분별하고자 하면서 어떠한 순서에 의거하였기에 ‘원인의 소멸’을 먼저 설한 것인가? 따라서 그가 해석한 바는 이 경의 뜻이 아니다.”48)
이렇듯 상좌가 말한 바는 그가 직접 가르친 문인[親敎門人]들과 같은 견해를 가진 자[同見者]들도 계승하여 믿지 않거늘 하물며 성교(聖敎)에 따르고 정리(正理)에 따르는 이들이 어찌 능히 인가하여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동방(東方)에서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하겠다.49)
그런데 경주는 어떠한 연유에서 단지 ‘그의 해석은 이 경의 뜻이 아니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인가? 나(중현)는 여기서 ‘저 상좌가 말한 바는 전혀 뜻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오로지 “앞서 생겨난 것[前生]을 원인으로 하며, 아울러 오로지 현세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온갖 유정들로서 “결과가 존재할 때 비로소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한 이는 일찍이 없었으니, 결과가 존재할 때 원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과가 일어나려고 하는 상태에서만 원인에 소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원인이 소멸할 때 결과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결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원인이 존재할 때에도 [결과가] 바로 괴멸하는 찰나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결과가 존재할 때 비로소 원인이 소멸한다고 인정할 경우,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니, 결과가 존재할 때 원인은 아직 비존재[無]가 아니기 때문이며(다시 말해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때(원인이 소멸할 때) 결과도 역시 소멸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결과가 있으므로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결과가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원인과 결과가] 함께 나타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결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원인에 소멸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는 그것에 따라 나타났으며,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결과가 원인 없이 일어났다’는 의심을 갖게 될 것인가? 그런 즉 ‘원인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겨난다’는 [뒤의 구절을] 다시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점에 대해] 해명하여 “내 뜻은 ‘결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원인이 소멸한다’는 사실을 설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 뜻은 다만 ‘요컨대 결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만 비로소 원인에 소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결과가 존재할 때에 비로소 원인에 존재하지 않음이 있다’는 뜻이다”고 말한다면,50) 설혹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역시 마땅히 [결과가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결과가 존재할 때 비로소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라면, 이는 바로 ‘원인이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非無]’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것인데, 어찌 ‘결과가 원인 없이 일어난 것’이라고 다시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는] 다른 곳에서 “종자 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싹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설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인가? 만약 [여기에] 바로 그러한 뜻(‘결과가 존재하므로 원인에 소멸이 있다’는 뜻)이 존재한다면, [상좌는] 자신의 종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뜻과는] 다른 별도의 뜻이 존재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결정코 ‘미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이 아님을 인정하지만 과거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임을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또한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법[無體法]을 ‘존재한다[有]’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열반에 대해 사택하면서 이미 모두 비판하였다.51) 또한 결과가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라도 마땅히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원인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존재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뜻으로 볼 때 [그가 설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의 의미는 [진위가] 부정(不定)이지만, [그는]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좌가 말한 바는 전혀 뜻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저 경주(經主)는 ‘[그의 해석은] 이 경의 뜻이 아니다’고 말하여 차별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어떤 이가 말한 “이 석녀의 아이는 지극히 용감하지 않다”고 말한 것과 어떠한 차이도 없는 것이다.
또한 경주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2구의 뜻에 대한 자신의 궤범사(軌範師)의 해석을 서술하면서 자신의 인효(仁孝)를 나타내고 있다. 즉 그에게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으니, 스승과 제자[師資]의 도리는 실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현)는 그 스승으로부터 배워 계승한 바가 없으니, 설혹 탄핵하고 배척한다고 할지라도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그의 그릇됨을 여실(如實)히 드러낼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여러 스승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러한 2구는 인과의 부단(不斷)과 생기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무명이 끊어지지 않음에 의해 제행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며, 무명이 생겨나므로 말미암아 제행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머지 지분에 대해서도] 모두 다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52)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경의 뜻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역시 마땅히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역시 행이 끊어지지 않음에 의해 무명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행과 무명은 동일한 대치(對治)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취(取)가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면 애(愛)도 끊어지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동일한 대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는 현행(現行)의 끊음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뒤(제2구)의 ‘생겨난다[生]’는 말은 무용하게 될 것이다. 즉 일찍이 어떠한 무명도 현행하는 것이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 없거늘 어찌 [‘생겨난다’는 사실에 대해] 거듭하여 설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따라서 경주가 [가르침을] 품수하였던 여러 스승들은 제 법상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 2구의 연기설에 대한 아비달마 논사의 해석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이러한 2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12연기의] 모든 지분은 반드시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구생인(俱生因)과 전생인(前生因)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다만 존재 자체[有體]를 원인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 혹은 존재의 차별[有之差別]을 원인으로 삼는 경우도 있으니, 먼저 이러한 두 종류의 원인을 나타내기 위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이며, 그 뒤에 이러한 두 종류의 원인을 해석하기 위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혹은 이러한 2구는 그 의미는 비록 다르지 않을지라도 연기의 지분에 간략히 두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의 인과가 동일하지 않으니, 전제[의 인과]를 간략히 나타내기 위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설한 것이고, 후제[의 인과]를 간략히 나타내기 위해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이다. 즉 이러한 전제는 결정코 이미 존재하였고[已有] 지금 존재한다[現有]고 말해야함에 따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한 것이니, [전제의] 인과는 순서대로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후제에 대해서라면 결정코 지금 바로 생겨나고[現生] 미래에 생겨날 것[當生]이라고 말해야 함에 따라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한 것이니, [후제의] 인과는 순서대로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제 중의 결과는 이미 ‘존재한다[有]’는 뜻이 원만하기 때문에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 것이지만, 후제 중의 결과는 ‘존재한다’는 뜻이 아직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것이니,53) [후제 중의] 결과는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희구하는 바이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그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2제(諦)에 근거하여 이러한 두 언구(言句)를 해석하면 [이와 같다]. 여기서 2제란 바로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를 말하는 것으로, 다수에 근거하여 하나를 설정한 것을 세속제라 이름하고, [다수의] 근거 자체[界體]를 건립하여 승의제라 이름하였다.54) 즉 앞의 [세속]제는 세간에 수순(隨順)하는 말이며, 뒤의 [승의]제는 현성(賢聖)에 수순하는 말로서, 세속제의 법이 존재성[有]을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생(生)’이라 하고, 존재성을 상실하는 것을 일컬어 ‘멸(滅)’이라 하며, 승의제의 법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일컬어 ‘생’이라 하고, 작용을 마치는 것을 일컬어 ‘멸’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성을 획득한다’고 하는 말은 일시 소의가 되는 중연(衆緣)이 화집(和集) 화합(和合)하여 하나의 존재로 설정되는 것을 말하며, ‘작용을 일으킨다’고 하는 말은 온갖 실유의 존재[實有物]가 중연으로서 화합할 때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오로지 현재만이 실유라고 주장하는 논의[唯現有論]에서도 역시 결정코 마땅히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존재(즉 세속유와 승의유)의 뜻을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만약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계경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곧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함은, 바로 일시 소의가 되는 존재(즉 승의유)가 일시 존재성(즉 세속유)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인 것[假, 즉 세속유]은 바로 존재하는 것(즉 假有)이지 생겨나는 것[生]이 아니니, 소의가 된 [중]연이 화합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온갖 부분(부품)을 취하여
일시 수레로 설정하듯이
세속에서 유정이라 말하는 것도
온갖 온이 취합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탐(貪) 등의 번뇌는 다수의 연(緣)에 의해 일시 생겨날 때 비로소 능히 원인이 되어 후유(後有)의 식(識)을 낳으니, 정리(正理)에 근거하여 설하는 경우에도 필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함은 바로 실유의 근거[實界]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실유의 근거가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하자면, 실유[의 법]은 중연(衆緣)의 힘 때문에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생겨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55)
어떠한 근거에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두 가지 인(因)과 두 가지 연(緣)은 능히 정견(正見)을 낳는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이것이 생겨나므로’라고 함은 ‘과거ㆍ현재의 온갖 연이 생겨났기 때문에’라는 뜻이며, ‘저것이 생겨난다’고 하는 말은 ‘미래의 결과가 생겨난다’는 뜻이니, 비록 미래[법] 역시 연의 뜻을 가질지라도 분위(分位)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다만 ‘이미 생겨난 것(즉 결과)’이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함은 바로 전생인(前生因)에 근거하여 현생의 결과[現生果]가 있다는 것으로, 존재[有]의 의미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고 함은 바로 현생의 결과가 생겨났기 때문에 후생의 원인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즉 여기서의 뜻은 ‘현생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막아 후유(後有)의 원인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56)
[혹은] 다시 ‘현생의 원인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후생의 결과가 있을 수 있으며, 후생의 결과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후후생의 원인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니, 이처럼 존재의 수레바퀴[有輪]는 돌고 돌아 그 시작이 없는 것이다.57)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언구(言句)는 [12]연기에 대해 결정적으로 알게 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계경]에서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제행이 있을 수 있으며, 무명을 떠나서 제행은 있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연기에는] 오로지 4구(句)만이 존재하는 것이다.58)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수의 구를 성취해야 하니, 이를테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거나 저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울러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나거나 저것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지분의 해석도] 6구의 차별을 성취해야 하니, 이를테면 ‘등불이 있으므로 등불의 밝음[燈光]이 있고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울러 등불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등불의 밝음이 생겨나고 어두움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59)
이는 마땅히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니, ‘등불의 존재[燈有]’와 ‘어두움의 소멸[暗滅]’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인과로서 상응하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며,60) 법의 존재[法有]와 자아의 비존재[我無]에도 결정코 인과로서 상응하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本無]’고 미혹되게 주장하기에 인과 상응의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이 계경에서 [연기에 관한] 차별적인 온갖 언구를 설하였던 것으로, 존재[有]와 비존재[無]에는 인과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존재와 비존재에 인과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앞서] 나타낸 것(즉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은 마땅히 아무런 소용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61) 예컨대 뒤의 설(즉 義說)이 [12지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듯이 앞의 설(즉 法說)은 마땅히 [연기의 뜻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뒤의 해석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無]’고 하였다면, 앞서 나타낸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62) 그렇기 때문에 앞의 해석이 잘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는 오로지 인과의 상(相)만을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즉 4구(句)를 초과한다는 주장은 이치상 마땅히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이를테면 ‘등불이 있기[有] 때문에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며, 등불이 존재하지 않기[非有] 때문에 어두움이 바로 존재한다[有]’고 하는 경우, 이와 같은 설은 인과의 상을 분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필시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8구를 성취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생(生)과 멸(滅)을 능히 원만(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앞의 4구에 의해 ‘생’을 원만하게 나타내게 되고, 뒤의 4구에 의해 ‘멸’을 원만하게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연기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별도의 4구만을 성취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아울러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가 바로 그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연기의] 뜻을 능히 원만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니, 오로지 여기서만 ‘생겨난다[生]’에 대해 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있다[有]’는 말을 이미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의미상 오로지 ‘있다’는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만 설하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설하지 않을 경우, 존재하는 모든 법이 반드시 ‘생’을 갖는 것은(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생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던 것이 지금 존재하는 것[本無今有]’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수차례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는 결정코 아무런 뜻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승의공경(勝義空經)』상에서 그같이 설하고 있다’고 말한다면,63) 나는 마땅히 또 다른 뜻에 근거하여 그것을 회통하여 해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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