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9
제21장.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나기 전에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네 (人生人死注生前)
노수고盧水庫
2012년 중추절이 지난 후, 저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인연생스승님을 뵈러 갔습니다. 스승님은 저희 가족을 데리고 래불사에 가서 육신보살께 참배하게 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사원에서 남양 유전油田에 사시는 거사 두 분, 낙양에 사시는 거사 한 분, 주마점駐馬店에 사시는 거사 두 분, 강소성에 사시는 거사 한 분, 섬서성에 사시는 거사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래불사는 아직 이름이 나지 않았을 때여서 오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습니다. 인지법사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이곳 래불사에서 오셔서 모이셨는데, 이 또한 얼마나 많은 생과 얼마나 많은 겁의 연분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제안하겠는데, 다함께 불칠佛七법회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의견에 모두가 만장일치로 찬성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기 전이었는데, 노화상은 나무뿌리를 쪼개고 계셨고, 저희들 중 한 무리는 노화상 곁에 둘러서서 법문을 해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이 내용은 바로 인연생스승님께서 《해회성현》속에서 써놓으신 그 단락입니다. ― 저는 노화상의 손이 도끼의 날에 스쳐서 찢어진 것을 보고는 즉시 허리를 구부리면서 노화상께 말씀드리길, “이제 그만 더 이상 쪼개지 마셔야 합니다. 피가 흘러 손이 온통 피투성이세요.” 제 말에 노화상은 손을 들어서 쳐다보시고 나서 가볍게 한 말씀 하셨습니다. “그저 좀 피가 흐른 것을 갖고 뭐 그리 겁내는가?” 그 말씀에 모두들 그 자리를 떠들썩할 정도로 한 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 이때 마침 인전印拴사부가 노화상께 공양을 드실 것을 청하자, 노화상께서 말씀하시길, “우선 좀 식게 그곳에 놓아라. 난 이것을 쪼개고 나서 먹으마.” 인전사부는 노화상의 손에 든 공구를 뺏으면서 말하길, “스승님, 어서 가서 공양 드십시오. 제가 쪼개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도끼로 나무뿌리 위를 찍은 후 쇠망치로 그 도끼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노화상께서 말씀하시길, “천천히! 천천히! 도끼를 때려 망가지게 하지 말거라.” 그 말씀이 막 끝나자마자 도끼 자루가 정말로 “뚝” 하고 부러졌습니다. 노화상은 조금도 인전사부를 나무라지 않으셨으며, 몸을 일으키신 후 웃으면서 저희들을 부르며 말씀하시길, “가자꾸나.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불칠법회를 원만하게 끝마친 후, 저희들 가족 세 사람은 그 즉시 바로 떠나지 않았으며, 래불사에서 한참 동안 지낼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래불사에 머문 동안이 저희 가족으로 하여금 현공노화상의 마지막 100일을 증명할 수 있는 행운이 있게 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아이는 그 해가 다섯 살이었으며, 장난이 대단히 심한 개구쟁이였습니다. 저희 부부가 염불할 때에는 노화상께서 료방寮房에서 율무구슬을 꿰시면서 저희를 위해 대신 아이를 돌봐주셨습니다. 노화상께서는 언제나 금방 아주 쉽게 한 꿰미의 구슬을 꿰셨습니다. 그런데 제 아이가 느닷없이 갑자기 구슬을 한 주먹 집어 방바닥에 흩어놓는 바람에 방바닥에 구슬들이 이리저리 뒹굴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노화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신 채 구슬을 하나하나 주워서 다시 꿰셨습니다.
왕생하시기 얼마 전, 노화상은 남들 모르게 조용히 탑원으로 통하는 길에 쌓여있던 옥수수줄기를 조금씩 조금씩 탑원의 벽 구석에 옮겨다 놓으셨습니다. 인지스님은 이를 본 후 그곳에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니 옮기시지 말라고 권하였지만 노화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지스님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불러서 다함께 이 옥수수줄기를 옮겼습니다. 이틀 동안 바쁘게 일하고 나서야 결국에는 전부 다 옮겼습니다. 또한 노화상은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셨습니다. 저희들은 당시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노화상께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일을 공연히 하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노화상께서 왕생하신 후, 저희들은 어르신의 법체法體를 들어 탑원으로 옮길 때 비로소 문득 완전히 깨닫게 되었으며, 원래 노화상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자신을 위해 길을 내신 것이었습니다!
왕생하시기 4, 5일 전, 노화상께 점심공양을 드실 것을 청하려고 탑원에 갔을 때, 어르신께서 담장 옆에 쌓여 있던 벽돌을 하나하나 자신의 탑 곁에 한창 옮겨 놓고 계시는 중이셨으며, 그 뿐만 아니라 벽돌을 가지런하게 쌓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노화상은 저를 보자, 저에게 말씀하시길, “어서 거들어 벽돌을 옮겨 놓거라.”
노화상과 저 두 사람이 벽돌을 옮기고 있을 때, 인지스님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어르신께 점심 공양할 것을 청하였지만, 어르신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당시에 노화상께서는 원래 이러한 옹고집이 아니신데, 이 며칠 동안 도대체 어떻게 이처럼 성품이 고집불통이실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노화상께서 왕생하신 후, 인지법사가 벽돌을 사서 노화상을 위해 탑을 세우려고 하였을 때, 모두들 비로소 그 순간에 노화상의 깊고 깊으신 배려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공연히 돈쓰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이 벽돌들을 탑 옆에다 옮겨 놓으시어 자신을 위해 탑을 세우는데 쓰라고 미리 준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왕생하시기 하루 전 저녁 무렵, 저희들 거사 몇 사람은 인지법사와 함께 강경당講經堂에서 정공노법사께서 강설하시는 《무량수경대경해연의》동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노화상께서 자신의 료방寮房에서 인경을 치면서 염불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소 이 시간에는 늘 어르신께서는 료방에서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인경을 치면서 염불하였으며, 그 시간은 언제나 매우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인경을 치신 시간은 의외로 평소의 몇 배가 훨씬 넘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곁에 있는 오거사에게 말하길, “노화상께서 오늘 무슨 일로 저렇게 계속해서 인경을 치시면서 염불하고 계십니까? 혹 평소와 다른 일이 있는 것입니까?” 오거사 역시 말하길, “맞아요.” 그렇지만 모두들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공양을 마친 후, 노화상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찌감치 쉬셨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1시가 조금 넘었을 때, 사원에서 상주하는 노보살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다가 노화상의 료방의 전등이 이미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아침 공과功課를 마치고 나서 노화상께 아침 공양을 드시라고 부르러 갔을 때, 노화상께서 침상 위에 누워계시는 것을 보았으며, 옷과 물건들은 전부 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노화상은 평소에 절대로 늦잠을 주무시는 분이 아니며, 옷과 물건 또한 한 번도 가지런하게 개놓은 일이 없으십니다. 인전법사가 여러 번 불렀으나 대답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가까이 가서 보고 나서야 노화상께서 이미 왕생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화상의 요강은 이미 화장실에 갖다 놓았기 때문에, 노화상께서는 분명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공과를 다 마치신 후에 다시 침상으로 가서 누웠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반드시 노화상을 본보기로 삼아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손안에 꽉 쥐고서 생전에 결정해야 합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2012년 음력 11월 16일, 노수고거사의 세 식구가 저희 집에 왔을 때, 제가 노화상의 건강이 어떠신 지 물었습니다. 노거사가 대답하길, “며칠 전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노화상께서 허리가 조금 아프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수신구隨身灸 하나와 애구조艾灸條 두 갑을 꺼내어 노거사에게 사원에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노화상께 붙여드리게 하였습니다. 노거사는 갈 때 저에게 언제 노화상을 뵈러 올 것이냐고 묻기에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어떨 결에 대답하길, “이 두 갑의 애구조艾灸條는 대충 하루에 한 개 쓸 것이니, 20일은 쓸 수 있을게야. 다 썼을 때 내가 노화상을 뵈러 가야지.”
음력 12월 6일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노거사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하길, “스승님, 어서 이쪽으로 건너오세요! 노화상님께서 가셨습니다.” 이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사실 저는 어르신을 뵈러 가려고 막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노거사가 말을 전부 다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곧 희망을 가지고서 한 마디 더 물었습니다. “노화상께서 어디를 가셨다고 말하는 것이냐?” 노거사가 대답하길, “노화상께서는 왕생하러 가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으며,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났습니다. ……
《논어․이인》편 제21장에서 말하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의 연세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子曰: 父母之年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공자께서 저희들에게 부모님의 연세를 자식이 된 사람은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신 말씀이십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짧고도 고달프며, 자식이 장성하여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된 후에는 부모님은 또한 점점 연세가 들어가 노쇠해지니, 효를 다할 날이 이미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연세를 아는 것이 기쁜 까닭은 부모님 두 분이 다 연세가 많지만 자식이 오히려 부모님을 시봉할 수 있는 것이 기쁜 것이고, 연세를 아는 것이 두려운 까닭은 부모님께서 연세가 갈수록 많아지시니, 이 세상에 살아계실 날이 갈수록 적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며,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여도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는 예측하지 못하는 근심이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섬기고 보살필 때에는 반드시 더욱 공경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 말학은 거듭 부끄럽습니다! 삼강三江과 오호五湖의 물을 남김없이 다 퍼서 제 얼굴에 전부 쏟아 부을지라도, 오늘의 얼굴 가득 부끄러움은 씻어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노거사의 성품은 너그럽고 인자합니다. 그러므로 말학은 그의 말은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현공께서 왕생하시기 며칠 전에 하셨던 평소와는 다른 여러 가지 행동은 어르신께서 이미 돌아가실 때가 된 것을 미리 아셨음을 증명하기가 충분합니다.
남양 육방불당六方佛堂에 있는 언성본鄢成本노거사가 일찍이 현공께, “어르신께서 왕생하실 때 저희가 어르신을 위해 조념해 드리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노화상께서 대답하시길, “남이 조념해 주길 바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갈 수가 없네. 나는 때가 되면 남이 조념해 줄 필요가 없으며, 내 스스로 갈 것이네.”(要人助念那是不相信佛, 他走不了. 我到時候不用人助念,我自己就走了) 어르신께서는 이미 벌써 마음속에 계획이 있으셨고, 생사에 자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염암羅念庵(1504~1564년) 장원狀元이 지은 《경세시醒世詩》한 수를 지금 이곳에 수록합니다.
너그러운 성품 너그러운 마음으로 몇 년을 지냈던가? (寬性寬懷過幾年?)
사람이 태어나고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나기 전에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네. (人生人死注生前)
지위가 높거나 지위가 낮거나 다 때를 따라 지나가니, (隨高隨低隨時過)
혹 짧을지라도 혹 길지라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라. (或短或長莫怨愆)
집이 부유하다 집이 가난하다 탄식하지 말지니, (家富家貧休歎息)
본래 없고 본래 있음은 모두 천명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自無自有總由天)
평생의 의식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 좋나니, (平生衣食隨緣好)
바야흐로 한가로울 수 있어야 바로 신선일세. (才得清閒便是仙)
29편♣
첫댓글 사람이 태어나면 운명적으로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만약 죽기 싫다면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다른 두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없는 상태 불생불멸은 사성제 8정도의 길을 걸어서 해탈할때 반드시 얻을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매순간 염불하시며 분명하게 8정도의 길을 걸으신 해현 노화상님은 우리가 일상생활 할 때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몸과 마음을 써야 하는지 자상하게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해현노화상께서 직접 실천하시고 보여주신 바를 우리가 한가지라도 배운다면 큰 공덕이 되겠습니다.
해현 노화상님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