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단발령
단발령은 1895년(고종 32년)에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명령이다.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 개국 504년이 지난 1895년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ㆍ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인(日人)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배일적(排日的)이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국민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사ㆍ농ㆍ공ㆍ상이 따로 없었으며 수백 년 간 이어져 왔던 상투를 자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관습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이 단행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한 번 내려진 단발령은 철회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조선을 장악하자 친일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이들 친일 세력은 단발을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들은 단발을 곤 ‘일본화’로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단발을 둘러싸고 항간에서는 백성들과 관리들이 맞붙어서 실랑이를 벌였다.
조선 팔도가 상투를 둘러싸고 일제와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열기는 세월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에 상제께서는 단발을 받아들이는 공사를 보시게 된 것이었다.
상제께서 갑진년(1904년) 정월에 장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성보(金成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 때 정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깍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 전경 행록3장 9절
일본이 조선에 들어온 이유는 조선을 개혁시켜 후천의 동량(棟樑)으로 쓰고자 함이다.
즉 일본은 후천선경을 열기 위하여 상제께서 짜 놓으신 각본에 따라 맡은 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상제께서는 일본에게 역사의 무대에서 악역(惡役)을 맡겼으니 단발령 또한 조선 개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우직한 조선의 백성들은 여기저기에서 왜와 부딪치며 쓸데없는 살상과 불필요한 힘의 소비를 하고 있으니 상제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 상투를 잘라 주신 것이다.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추수의 계절인 가을에 낫으로 벼를 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주의 절기가 추수의 계절인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또한 이는 유도(儒道)의 상징인 상투를 자름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유교의 폐습을 일소하시는 공사의 처결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