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6월27일에 당시 제정 러시아 흑해 함대중 최강의 화력을 보유했던 포템킨호에서 선상반란이 일어난다.그로부터 보름 후
1905년 7월 11일에600여명의 반란 수병들은 루마니아 콘스탄차항에서 항복을 한다.
1905년 01월09일 일요일.성 페테르부르크의 동궁앞에서 20만명의 러시아 민중들이 모여 하루 8시간 노동,하루 최저임금1루블(50쎈트)보장,제헌의회 구성들을 요구하다 군대에 의해 수백명이 피살된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멘셰비키의 주도하에 짜르를 압박하는 혁명투쟁이 전개되었다.짜르는 그해 10월선언을 통해 의회(두마)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가로 변신하게 된다.이 때를 러시아 혁명사는 1905년 혁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전함 포템킨의 선상반란은 이러한 혁명적 기운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군대내에 심어진 사회혁명당원들의 주도로 발생한 계획적인 봉기인 동시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고기에 대한 불만과 이를 무모하게 제압하려는 장교들에 대한 반발로 우연적으로 터진 수병들의 폭동이였다.
이 사건은 1925년 영화감독 에이젠슈쩨인에 의해 <전함 포템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전 과정속에서 중요하게 기록되는 승리한 투쟁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들은 루마니아에서 항복을 했고 망명길에 올랐으며 대다수는 고국으로 돌아가 교수형을 당하거나 종신형 혹은 시베리아 유배를 당하였다. 이 책은 바로 역사속에서 통으로 평가하고 넘어가는 오류를 지적하고 여러 문건과 증언을 토대로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사건의 일지를 따라가면서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활동 상황과 고민들을 같이 느껴본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어 본다면 의외로 많은 간접경험을 얻를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이 책은 2005년 서해문집출판사에서 해양관련 저술가인 김 성준씨가 번역한 것으로,원저는 1960년에 영국인 리처드 휴가 쓴 책이다.
첫댓글 수병들은 일순간 혁명적 열정에 휩싸이다가도 반란자의 종말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기도 하였다.포템킨의 붉은 깃발을 믿고 오데사 민중들은 항거의 물결을 일으켰으나 결국 6천명의 사상자만을 남기게 되었다.그때 포템킨은 다른 흑해함대의 연대만을 고대하고 오데사 민중들의 학살을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수병들이 겁쟁이였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교수형이 정해져 있는 반란병이였고 여차하면 대의를 위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군인들이였다.다만 이들에게 행동의 명분과 방향을 제시하고 책임질 수 있는 리더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포템킨 함상에 앞을 내다 보는 리더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했다. 짜르와 장교의 폭압에 벗어난 수병들에게 리더는 또 다른 독재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수병들의 투표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 지고 여기에서의 토론을 통해 결정된 것만이 행동의 지침이였다.오데사에서온 선동가의 노력이나 실제 반란의 지도자들도 인민위원회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이 것이 포템킨반란의 한계였다. 결국 흑해함대의 동조세력들도 황망하게 잃어 버리고 뒤늦게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던 전함도 잃어 버렸다.혁명의 집중된 힘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함대는 다시 짜르의 충성스런 대원들로 다시 충원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접하고 열심히 행동으로 실천하고 계시네요^*^ 편식이 아닌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는 기분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문득 떠오른 생각! 혁명이나 변화를 원했던 수병들에게 자율적인 의지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적극적이고 치열한 노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측면이 아쉬운 결과로 끝나지 않았나 싶네요. 따라가는 의지로는 개혁해내기엔 부족하고 동력을 전달할 뿐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