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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한춘 시비 제막식에 부쳐
전경업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금방 엊그제 만났던 것 같은데
벌써 40년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걸걸한 웃음소리 귓가에 생생한데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그날 하얼빈 전염병병원 입원실에서
이름 모를 호스들을 더덕더덕 가슴에
걸고 누운 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슬그머니 엉덩이 쪽에 손을 넣어보니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피골이……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삶은 생명 차게 살아야 멋이 있는데
방사성요법을 해서는 무얼하나 하면서
방사성치료를 거절하시던 모습
그렇게 님은 활달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 유감은 없으니
질 없는 생명은 싫다 하시고는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고민과 상처와 애수와 한을 훨훨 벗어 던지고
극락으로 가신 겁니까 아니면
분쟁이 소란한 홍진으로 환생하신 겁니까
북관땅 매운 바람에 얼어드는 손을 부비며
은방울꽃을 울던 서러움을 안고 임은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앞가슴에 하얀 구리 단추를 달고
노크하던 옥양목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
서울 거리에서 바짓가랑이에 걸려드는
그림자를 차면서 외롭게 방랑하던 사나이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누르께한 하얼빈의 가로등 불빛 아래
기다란 그림자를 뿌리며
한 잔 술에 만취하여 거리를 쓸던 모습
눈앞에 생생한데 어느새 저렇게
두둥실 외로운 비석으로만 남은 것입니까
몰몰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타고 들리는
잔잔한 애수가 담긴 석쉼한 목소리
주소 없이 떠돌던 임의 영혼은
오호라, 지금은 어디에 계신답니까
이렇게 그리움과 쓸쓸함만 던져버리고
홀로 훌쩍 떠나버리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어찌하란 말입니까
북방의 거목
도옥
꽃구름 감아올렸던 꽃샘 바람
타끓는 심장 추켜든 붉은 구름
북방의 산자락 모닥불 지피고
여기 상지의 모교에 돌로 섰구나
돌에 귀를 대고 그대 숨결 듣는다
차갑고 매서운 메아리 굽이쳐온다
언제나 처음처럼 시의 옷를 벗고
일어섰던 새벽빛이 석비에 서린다
타오르는 담배연기 그대 숨결인가
정갈한 시줄 타고 우뚝 선 사나이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말을 하리
독한 술잔에 쏟아 붓던 타는 목마름
훈민정음 고운 메아리 고운 정성
맑은 눈동자에 새겨진 은방울 꽃
굽이치는 벽계수 은은한 종소리여
석탑으로 영원한 북방의 거목이여!
한춘 시비 제막식
최룡관
여기 상지에 한 폭의 깃발이
영원을 향하여 펄럭이고 있다
여기 상지에다 노오란 빵 굽어놓았다
개미와 새들 먹으라고
날개를 흔드는 고니 울음 싱그럽고
강물의 주절거림 반짝인다
안개나 구름이 감싸 안을 때 바람이 불고
햇살은 마냥 따슨 손으로 쓰다듬으리라
시인이 돌비석으로 된다는 것은
ㅡ한춘 시비에 부쳐
효문
아무리 칭송해도 눈 감으면
흩어진 구름처럼 방황하는 것이
보통 시인의 넋이다
누군가 시인이 된다는 것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한 줌의 골회로 버려질 때
영혼마저 흩날려 재가 될까 두려웠더니
아니구나, 시인이 영원히 죽지 않는 비결
시인이 죽어 하나의 돌비석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값지고 고상한 줄을
내 오늘 모교에 세워진
시우 한춘의 시비에서 보았다
지금껏 한자 한자 정성들여 써온 시편들이
허물어지지 않고 부스러지지도 않고
또골또골 여물은 자갈이 되었다가
그것들이 다시 또 하나의 돌덩이로 모여
더는 세월의 강바닥에 엎드려 있지 않고
낮은 하늘 받쳐 올리며 거대 비석이 되니
돌은 돌인데 막돌이 아니라
시인의 영혼을 빼닮은 돌이여서
마치 살아있는 인간과 같이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대방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되어
차고 굳은 돌덩이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의 정이 물신 풍긴다
이제 옥돌이 된 한춘은
지금껏 정성들여 쓴 시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은방울꽃”을
빨간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서
새로운 삶의 영원을 산다
임국웅, 한춘은 거목
-한춘 문학비 제막식에 드림
김상봉
말이 없는 돌비석에서
옥음소리 듣는다
눈물이 없는 돌비석에서
물 흐름을 본다
연수 땅에 태를 묻고
북만벌 구석구석
새싹 찾아 누빈 발자국
모교에 “뿌리 내린 무지개”
미소 어린 저 얼굴
구수한 목소리 울려라
수양버들 아지마다
그대 키운 별들이 반짝이여라
헤어 온 머언머언 길
줍고 다듬는 고역의 길
그대 피운 담배연긴 오솔길
오솔길 따라 잔별들 커왔다
거목이 심어 준 시심
한 자리에 모여 추억에 잠기네
어디선가 풍겨오는 술 향기
가슴치는 숨결이 묻어 있네
한춘, 거목아!
돌걸상 둘러 앉아
그대 미소에 자라나는 새싹은
흰옷 어린 미래이여라
눈물 말린 하늘이 파랗다
파란 하늘 떠인 송화강에
흰 유람선이 항행이다
그 이 웃음소리에 펼쳐지는 미지세상이여!
눈물이 없는 돌비석에서
눈물이 시냇물 이루네
눈물의 강 송화강에 뜬 유람선
동으로 먼 바다로……
诗碑는 말이 없어도
운영
누군가 인간이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했다
허나 지금 나는
한 시인 诗碑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북방시단의 거목이여서 아니다
몽롱시의 기수여서도 아니다
문학신인 발굴의 선두주자여서도 아니다
시, 수필, 평론을 주름잡던 잡가(杂家)여서도 아니다
오직 한 점 부끄럼 없이 북방문단을 지켜선 기수였기에
오직 흑토라는 이 땅에서 진달래를 키우는 원예사였기에
술과 담배를 친구 삼아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보살님처럼
언제나 응원이 먼저고 꾸중이 뭔지 모르는 대가이기에
诗碑가 모교의 한 자락에 세워질 때
너도나도 힘을 보탤 수 있었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세상이 변하고 또 변해도
诗碑는 언제나 빛나리
세월과 함께
당신은 북두성
김창희
당신이 있어
하얼빈의 겨울이 따뜻했습니다
한춘(韩春)
흑토 같이 너그러운 품으로
봄날 같이 살뜰한 마음으로
후학들을 다독이고 보듬어주고
호탕한 웃음소리
예리한 안목으로
세상과 대화하면서
짧은 코스
큰 자국
남기었습니다
당신은
산도 아니고 강도 아닌
한춘이란 이름 하나로 빛나는
북
두
성
!
가을의 혼은 누렇다
ㅡ한춘 시비에 드려
변창렬
손가락사이에 물든
담배꽁초의 맛 그대로
노랗게 모셔왔습니다
고향집 온돌방에 그슬은
구들장이라 한다면
아래 목에서 피우시던 담배연기가
시의 혼으로 괴여 오른 것
아니겠습니까
떡갈나무의 떨어진 노란 자국에는
선생님의 옛 이야기가
구수한 멍으로 말라든 것입니다
눈 오기 전 북쪽 하늘에는
노란빛이 눈을 따시게 합니다
선생님의 소주잔에 어린
가을의 풍경이 아니옵니까
그런 가을이 노랗게
돌 속으로 슴베인 것입니다
다른 어떤 가을도 싫습니다
통통 여문 벼알들이
선생님 시에서 혼으로
화끈한 가을을 개척한 것이옵니다
북극성
-한춘 시비에 부쳐
최화길
아득히 머얼리
떠나셨지만
별이기에
내 마음의 하늘은
어둡지 않다
한생 봄을 가꾸신
소담한 은방울꽃
애솔들의
뿌리가 되어
거목 키우고 있다
북방을 지켜
영원한 별이여!
오늘도 변함없는
등대의 삶이여!
물이 되어 흐르시네 시인이시여
한영남
칠색무지개 쌍무지개 높이도 걸어두시더니
서러운 별을 매만지던 손길 그토록 따스하시더니
주소 없는 편지를 적어 내려가던 붓 아직 눕히지 않으시더니
무지개는 드디어 뿌리 내릴 곳을 찾으셨는가
솔파도로 와와 산허리를 사정없이 후려치시더니
오고간 파랑새의 자취를 찾는 눈길 안타까우시더니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까치둥지에서도 철학을 길어내시더니
현대시의 불안과 곤혹을 껴안으시고 어느 언덕을 넘으셨는가
한춘·임국웅
이춘열
한 개비 담배 연기로
詩想을 불태우며
춘하추동 詩를 꿰매고
꿰매주며 사셨다
임야의 촉촉한 詩雨로
세상을 적시고
국음의 변두리에서
詩語만 주어 담으며
웅대한 詩山에
詩碑 하나로 우뚝 섰다
흑토의 아들
-고 한춘 시백 시비 바라보며
김승종
모두들 절 보구
담배연기 타구 왔다는디 전 아닌디유
모두들 절 보구
술 향기 타구 왔다는디 전 아닌디유
전 연수벌 “쌍무지개” 타구 왔는디유
전 마연하 뚝짱개 반두질하다 왔는디유
전 하동촌 촌장께 “편지”를 부치고 왔는디유
전 상지벌 입쌀주머니 두루뭉실 메고 왔는디유
전 야부리 엽초 영감태기하고 옛말하다 왔는디유
전 하얼빈 중앙대가 “파랑새”들을 데리고 왔는디유
……
세상 돌뱅이 흑토의 아들인디유
고향의 “은방울꽃”들을 보고 싶어 왔는디유
사시절 하얗게 “메아리”치며 얘기하고 싶어 왔는디유……
“은방울꽃”과 함께
산천(山川)이란 또 다른 이름 앞에!
고안나
그날은 별들도 요란히 무너지던 날이었지요
흑룡강은 혼절한 채 울음 대신한 신음소리로
아직까지 앓고 있습니다
꽃삽으로 꽃밭 정성들여 가꾸듯
한 삽 한 삽 세상 곱게 일구시던 선생님
해신 장보고 발자취에 귀 기울이셨던
한춘 선생님의 큰 발걸음 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눈밭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처럼
너무나 선명한 선생님의 족적,
노승은 이미 죽어 탑이 되셨듯이
선생님 역시 어디에서 큰 탑으로
우뚝 서 계시겠지요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까치둥지 같은
조선민족 詩의 열매 주저리주저리
단단한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고향의 큰 오라버니 같은 넉넉한 웃음
손꼽아 뵈올 날 기다렸더니
이젠, 어느 곳으로 가야 만나 뵐 수 있을 런지요
피를 말리듯 뜨거웠던 매미소리는
남은 자들의 설움을 대신한 듯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끝없는 여행길에 지치지 마시고
샘터에 피어났던 은방울꽃 은은한 향기 맡으며
세월의 물구름에 헹굴 것 다 헹구시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사시옵소서
선생님의 시비 제막에 즈음하여
구성진 목청으로 아리랑 노래
한바탕, 질펀하게 불러 주시옵소서
한춘 시비
방순애
돌거울
제자들 다듬
창 여는
붓대의 날개
얼의 시가 들려온다
함박눈 내려
옥 꽃으로 피어 난다
꽃들 행진 한다 푸른 언덕 넘으며
다선-다양체의 시에 대하여
-한춘 시에 대한 탐구
최흔
한춘은 1990년 4월, 첫 시집 “주소 없는 편지”를 남겼고 2003년에는 “무지개는 뿌리 내릴 곳을 찾는다”를 펴냈으며 2013년 3월,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까치둥지”를 출간한 시인이다. 그로 말하면 시집 세 권이란 많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집 세 권이 중국조선족시단에 획을 그은 예쁜 시집이다. 시인 생전에 독자들은 그의 시를 몽롱시 난해시라고 몰아 부치면서 타매도 많이 하였다. 독자들 말이 맞았다. 그의 시는 몽롱시 난해시였다. 그런데 몽롱시 난해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한 가지는 그의 시는 계몽이 드러난 시가 아닌 현대시였고 많은 독자(필자도 포함)들이 시를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란 어떤 시인가 하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쓴 것도 알아보지 못하던 시대에 여러 가지 이미지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에 속하는 것이었다. 시인 자신은 이미지로 시를 쓴다고 하였고 자신은 주지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그의 시는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이고 주지주의를 넘어선 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요원인은 한춘의 많은 시가 단선구조인 것이 아니라 다선구조였기 때문이었고 다양체였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선구조로 된 시들은 “주소 없는 편지”에서는 (12) (15) (22) (23) 등 많은 시들이고, “무지개는 뿌리 내릴 곳을 찾는다”에서는 (그리움) (기타소리) (십년 고독) (간단한 진실) 등 많은 시들이고,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까치둥지”에서는 (무제18) (21세기 심우도(21)) (심야명상 (7)) (두견화) 등 많고 많다. 필자는 본 평론에서 한춘 시의 다양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아래 한 수의 시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더위에 지지는 베짱이 울음소리, 목표는 박수소리가 아니라오. 햇살과 녹음사이, 암석과 강물사이, 초가삼간과 고속도로사이. 절벽과 바다사이…… 모든 계절풍이 동쪽으로 불어요.
자꾸만 회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꾸만 생명을 소비한다는 것이지만 맘속의 햇살 한 아름 건사한다는 것은 생명이 진해도 빛 보일 씨앗을 영그는 작업이라는 것을 주해달지 않아도 알겠지요.
송화강 대교 가로등에 물든 붉은 구름이 이마를 스쳐가는 6층집 한 칸에 한밤이 지새도록 어둠을 밀어내는 등불이 보이거든 살풋이 눈을 감아도 좋아요.
올빼미의 핏빛 울음은 행복을 절단하여 절반은 몸에 걸치고 절반은 마음에 심어놓고 에이즈 병이 무섭지 않다는 선언, 수리개만 하늘의 적자인 것이 아니라요.
이 시는 “주소 없는 편지(63)” 전문이다. 1990년 시집에 이런 시가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 시집은 개혁개방 후부터 1990년까지 쓴 시들을 추려 묶은 시집일 것이다. 그러니 한춘은 오래 전부터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이런 시를 모르는 청맹과니였으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시를 모르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 마당에는 이런 시가 많고도 많다. 그의 시 구성은 대개 이런 횡적구성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시를 다선시 혹은 다양체시라 부른다. 우선 각 연이 한 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내용들은 서로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었다. 첫 연은 더 세세하게 분리되고 있다. 연결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기에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지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 네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이미지가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구별이 없다. 높이로 말하면 똑같은 높이고 인격으로 말하면 똑같은 인격이고 급으로 말하면 똑같은 급이다.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변두리고 겉이고 곁이다. 이런 시를 다양체라 한다. 이런 다양체로 하여 이 시는 현대시인 것이 아니라 후기현대주의시며 하이퍼시다.
필자의 졸견은 아래와 같다. 이 시는 시간과 공간이동이 강하다. 이 시에서 처음에는 사물과 사물 사이를 나열하였고, 어떤 회답에 대한 것을 썼고 다음 송화강 대교에 대한 것을 썼고 다음 올빼미의 핏빛울음에 대한 것을 썼다. 시를 한 사물에 모를 박고 쓴 것이 아니라 시의 사물(이미지)이 자꾸 딴 것으로 바뀌며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시간과 공간의 확장은 어떤 근거나 원인으로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의 영혼에 떠오르는 상상적 형상이다. 상상은 언제나 자유롭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누구네 헛간을 생각할 수도 있고 산을 생각할 수도 있고 강물의 파도를 생각할 수도 있고 남자나 여자를 생각할 수도 있고 범이나 나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다. 한춘의 시는 이런 자유스러운 생각으로 시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럼없이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하게 되며 한 수의 시에서 그런 여러 가지 상상을 쓰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자유가 아니겠는가. 상상으로 성격이 완연 다른 여러 가지 사물을 떠올리며 시를 쓰지 못한다는 제한은 없는 것이다.
한 수의 시에서 여러 가지 사물을 떠올리는 것을 필자는 영토화 탈영토와 재영토화라고 생각한다. 한 이미지를 영토라고 한다면 그 영토는 무수한 다른 영토와 연결되거나 결합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 하겠다. 그 문으로는 어떠한 사물(이질적인)이든 들어올 수 있으며 들어와 원 영토와 연합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세상사물은 모두 음과 양이라는 동일성으로 구성되었으며 한 사물 속에는 우주의 사물 모두가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음과 양은 조건에 따라 서로 상대와 바뀌기도 한다.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다. 나무가 뱀으로 될 수도 있고 강물이 산악으로 될 수도 있고 하늘이 땅으로 될 수도 있고 땅이 하늘로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철학의 변증법이자 시의 변증법이다. 변증법에 부합되는 “주소 없는 편지(63)”는 이 도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주소 없는 편지(63)”는 이것저것 쓴 가작이다. 현대시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수법이다. 사물들은 계속 도주하고 있으며 뒤에 나온 사물은 앞의 사물을 밀어버리기도 하고 대체하기도 한다. 각 연과 연 사이가 그럴 뿐만 아니라 첫 연은 밀도가 더 긴밀하다. 밀면서 연합되고 대체된다. 처음에는 베짱이 울음소리와 박수(이질적인 사물임)를 결박시켰고 다음 햇살과 녹음이 베짱이와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자기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다음 암석과 강물사이가 햇살과 녹음을 밀어내고 앞자리를 차지하고 다음 초가삼간과 고속도로, 절벽과 바다사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런 시의 수법에서 적어도 시인의 사유의 자유율과 여울진 숨결의 맥박을 들을 수 있고 보아낼 수 있다.
“주소 없는 편지(63)”는 이색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미저리라 할 수 있다. 이미저리란 색깔과 모양이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의 집합이다. 시를 약탕관이라 한다면 약탕관 속에는 여러 가지 약재가 있어야 한다. 시를 읽어보면 우리는 “주소 없는 편지(63)”에서 여러 가지 약재를 달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짱이 울음소리가 있는가 하면 박수소리도 있고 회답이 있는가 하면 송화강 대교도 있고 올빼미도 있다…… 이런 수법은 하나의 사물을 보고 쓰는 재래식과는 틀린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써오던 재래식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식으로 쓴 것이라 하겠다. 파괴 속에는 건설이 있고 건설 속에는 새로운 시풍이 있고 질서가 있다. 시인의 파괴와 건설은 일상적인 상상을 뛰어넘는 출기불의(出其不意)다. 왕청같고 엉뚱한 이미지 출현으로 하여 독자는 다음을 예측할 수 없어 강타를 당하며 강타에서 오는 떨림을 받게 되며 혼돈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게 된다.
시는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 현대주의 시 (모더니즘), 후기현대주의 시(포스트모더니즘)로. 계몽주의 시는 봉건사회에서 쓰던 수법이고 모더니즘 시는 근대주의에서 쓰는 수법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화시대, 세계화해주의 시대에 쓰는 수법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전자시대ㅡ컴퓨터시대의 산물이다. 한춘 시는 필자의 견해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라 할 수 있다. 때론 모더니즘 수법으로, 때론 포스트모더니즘 수법으로 씌어지고 때론 이량자의 혼합으로 씌어졌다고 하겠다. “내”자가 들어가고 나의 정서를 말한 것은 모더니즘 유형에 속하고 나나 나의 정서가 없이 여러 가지 사물들 관계로만 엮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유형(예하면 “주소 없는 편지(63)”)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의 모더니즘 시들은 읽으면서 사고하면 뜻을 알 수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쓴 시들은 한두 번 읽어봐서는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다.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자아를 바탕으로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아를 바탕으로 쓰기 때문이다. 자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이미지 하나를 둘러싸고 쓰게 되고 무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성격이 다른 이미지를 나열집성하면서 다양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 양자를 다른 말로 하면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라 하겠다. 의식으로 쓴 모더니즘 시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주제가 있지만 무의식으로 쓴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한계가 무한하고 풀이도 다르게 된다. 모더니즘 시는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이미지 단위마다 다른 주제를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절대적으로 소통을 위한 시라 할 것이 아니라 언어를 위한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풀이에서도 C가 고추라면 고추일 수도 있고, N이 마늘이라면 마늘일 수도 있고, D가 비행기라면 비행기일 수도 있다. 시에 대한 이해능력의 차이로 해석에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이다. 소통과 언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말해보려 한다.
많은 지적과 양해를 바라며 각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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