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적송 군락은 일명 학자수라 일컫는데,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에서 학자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3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義)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며 문신이었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 학자수 가로수길을 따라 소수서원 들어서는 입구엔 위풍당당한 당간지주가 서 있다. 불교를 배척했던 유교의 성지 초입에 사찰의 당간지주라니... 상당히 이채로웠다. 이 소수서원은 바로 숙수사지 터 위에 지어진 서원이다. 고려 조 죽계별곡에도 등장하였던 숙수사이니 그 역사도 오래되었거니와, 소수서원 내 숙수사지의 많은 석조물들로 보나,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숙수사지 출토의 유물들로 보나 사찰의 규모가 인근의 부석사 못지않게 컸을 터인데, 어인 연유로 갑자기 황무지가 되어 그 위에 서원이 지어지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숙수사가 사라진 이유는 단종복위운동과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어졌던 영주 순흥, 이곳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며 단종복위를 꿈꾸었던 사육신과 관련되었다하여 세조의 친동생이었던 금성대군이 귀향을 오게 되었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귀향을 와서도 단종의 복위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이곳 순흥 군수와 상의하여 삼남의 여러 선비들을 규합하고 군사를 모아 단종복위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 순흥지역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는 것. 순흥땅에 위치한 숙수사도 이러한 격변의 역사에 휘말려 번영했던 자취는 한순간에 불타 사라지고 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격변속에서도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경렴정(景濂亭)
정문밖 동쪽 시내(竹溪) 언덕 절벽 위에 있다. 주세붕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1칸의 팔작집. 호박 주추에 두리기둥, 개방된 마루바닥에 계각(鷄脚) 난간을 둘렀다. 냇물을 격하여 연화봉(蓮花峰)을 마주하고, 취한대(翠寒臺)를 굽어보는 이 정자는 둘레엔 울창한 老松숲, 바로 절벽밑은 잔잔한 푸른 못을, 여울소리가 송뢰(松뢰 )에 어울려 더욱 맑고 시원스러운데, 건너편 절벽에 새긴 「敬」자가 담심(潭心)에 어리어, 난간에 기대여 완상하노라면 절로 숙연함과 함께 소쇄(瀟灑)한 풍취(風趣)를 만끽하게 된다. 정자에서는 주신재(세붕)·李퇴계·황금계(黃錦溪)·이준(李埈)등 명사(名士)들의 시판(詩板)이 있다. 사당(文成公廟) 회헌을 주향(主享)으로, 文貞公 안축(安軸)·文敬公 안보(安輔)·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가 함께 봉안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을 맞배집으로, 평면은 통간(通間)으로 되어있다.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주춧돌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강학당(講學堂)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주추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웃몸은 창방(昌防)으로 결구, 기둥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초익을 서로 결구한 초익공(初翼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 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斜面)으로 끊겼으나, 방(枋)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앞·뒷면에 놓인 평주(平柱)들의 간살은 통간으로, 20여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平柱위에 놓고, 거기 동자기둥을 세워 중보(中樑)를 받치고,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고, 종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반 크기의 대청은 우물 바루바닥에 연동 천장을 이루었고,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 뒷면엔 반칸의 마루방을 달았다. 그리고, 강당 사방 둘레엔 반칸폭의 툇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겹처마, 추녀는 활주로써 받치고 있다.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 답게 단아하면서도 위엄과 품격이 갖춰진 모습이다. 이 곳에서는 그 옛날 아래 그림에서처럼 엄한 스승 밑에서 저리 공부를 하였을 게다...
동·서재(東·西齋) 동재는 일신재(日新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로, 양재가 한 채(棟)로 되어있다.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1칸반, 기단은 앞면은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로 했고 후면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바른 층쌓기 했다. 복판에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 방앞엔 각각 반칸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일신재는 일반 교수들이 쓰는 방이고, 직방재는 이곳 소수서원의 원장(백운동주)이 쓰던 방이었다. 이 두 공간이 한 건물에 위치한 것이 독특한 건물이다. 오래된 이 가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대학]에 나오는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말을 따서 교수들이 쓰는 방은 일신제(日新齋)라 이름 붙이고, [주역]에서 나오는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말을 따서 원장의 방은 직방재(直方齋)라 이름 붙인 것이 인상적이다. 교수들은 이 방의 현판을 볼때마다 항상 자신의 수양과 학문을 갈고 닦았을 것이며, 원장은 자기 방의 현판을 매일같이 보며 안팍 단속을 철저히 하였을 것이다.
학구재(學求齋) 동서재(東·西齋)의 동쪽 조금 뒷편에 동남향으로 자리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막돌 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基壇)이다. 복판칸은 개방된 마루가, 좌우에 온돌방이다. 신재(주세붕)의 문인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가 세웠다 한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支樂齋) :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였다. 학구재는 특히 모양새가 재미나다.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工자형 구조로 지어졌다. 특히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가르침도 있듯이 스승의 숙소보다는 뒷쪽에 세워졌으며, 기단은 물론 방바닥 높이까지 낮추어 지어진 건축물이다. 지락재 역시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니 유생들은 잠을 자면서도 공부하는 꿈을 즐겁게 꾸었겠다.
지락재(至樂齋) 동·서재와 학구재(學求齋)의 동편에 서향으로 자리했다. 막돌 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에,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북쪽 끝칸을 온돌방으로, 나머지 두칸은 개방된 마루로 꾸며져 있다. 이는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豊基군수(광해5년,1613년 부임, 이듬해 이임)로 있으면서 세웠다 한다.
영정각
영정각엔 미수 허목, 오리 이원익, 신재 주세붕, 한음 이덕형, 회헌 안향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건한 장소이다. 영정각 내엔 모셔진 이들의 초상이 각각 모셔져 있는데 특히 안향의 초상화는 국보 제111호로, 주세붕 초상화는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영대 해시계이다. 맑은 날에 상부석재 위에 꽂은 막대 그림자가 12간지에 드리운 것으로 시간을 알수 있었다. 요즘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 시계탑을 설치하듯 소수서원도 많은 유생들에게 시간을 가늠할 수 있도록 이렇듯 서원 한가운데 일영대를 설치해 두었다.
경(敬)자 바위 소수서원 입구에는죽계수가 흐르고 있어 운치를 돋우고 있습니다.죽계수는 멀리 소백산 초암계곡에서 발원하여 계곡으로 주변의 바위가 병풍처럼 펼처져 있으며, 울창한 노송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의 경렴정에서 죽계의 경승을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되면 혼령들이 울 게 되므로 연유를 물어본즉, 예전에 단종복위(端宗復位)운동 실폐로 희생된 넋들어었다. 주세붕이 날을 택해 위혼제(尉魂祭)를 드리면서 경(敬)자에 붉은칠을 한뒤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이로써 원귀들의 한이 위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비정신을 일깨워 주는 곳 선비촌
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통하여 관광자원화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광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우리 전통적 고유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