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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 - 9) 올바른 집중
원폴리 라훌라 / 전재성역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가운데 마지막이 올바른 집중 내지 삼매이다. 그것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미식가가 음식을 생각하던가 음탕한 자가 여색을 생각한다던가 군인이 전장에서 적을 죽인다던가 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과정의 악하고 불건전한 집중은 집중이 아니라 집착이므로 제외된다. 그러므로 명상의 과정에서의 올바른 집중은 선하고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의 집중과정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새김을 수반하며 해탈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삼매는 건전한 집중으로 일상적으로 흐트러진 마음의 흐름을 내적인 통일로 향하게 한다. 이러한 마음의 집중은 바람 없는 곳에서 타오르는 램프의 고요한 불꽃에 비유되는 안정된 마음의 과정이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은 마치 물이 말라 마른 땅에 버려진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에 비유된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마음의 대상은 임의적인 생각의 파문에 왜곡되어 나타난다.
그러자 잘 집중된 마음은 명상의 주제인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 속에 침투하고 거기에 흡수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정신적 장애의 제거와 마음새김의 확립이라는 삼매의 과정에 수반되는 올바른 집중은 마음의 멈춤(止,samatha)과 대상의 관찰(觀,vipassana)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갖고 있다. 이러한 멈춤과 관찰의 실천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명상의 장(業處,kammatthana)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러한 명상의 장으로 101가지나 열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싸가 간추린 40가지만을 분류하여 설명해보기로 한다.
1. 열가지 지평(十遍處,dasa kasina)에 대한 집중이 있다. 이러한 열가지 지평을 토대로 초보자들도 쉽게 삼매의 집중과정에 들어선다.
[붓다] "열가지 지평이 있는데 한 사람이 있어 땅의 지평, 물의 지평, 불의 지평, 바람의 지평, 푸른색의 지평, 노란색의 지평, 붉은색의 지평, 흰색의 지평, 허공의 지평, 의식의 지평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하나로서 무한하게 지각하는 것이다."
2. 열가지 더러움(十不淨,dasa asubha)에 대한 집중이 있다. 올바른 새김 가운데 신체에 관한 관찰, 특히 시체의 열 가지 특성에 대한 새김이 삼매의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대상화된 것을 이른다. 여기에는 [청정도론]의 분류에 의하면,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동물이 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살해되어 사지가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피로 물든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의 열 가지가 거론된다.
3. 열가지 따라새김(十隨念,dasa anussatiyo)에 대한 집중이 있는데, 따라새김은 새김의 구체적 항목들을 열거한 것이다. 올바른 새김은 보다 심층적인 삼매의 집중과정으로 전화되어 명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청정도론]에 열거된 새김의 종류는 통일성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부처님에 대한 새김 (2) 가르침에 대한 새김 (3) 승가에 대한 새김 (4) 계행에 대한 새김 (5) 보시에 대한 새김 (6) 하늘사람에 대한 새김 (7) 죽음에 대한 새김 (8) 신체에 대한 새김 (9) 호흡에 대한 새김 (10) 적정에 대한 새김.
앞의 세 가지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로 부처님을 열 가지의 이름으로써 조명하여 관찰한다던가 가르침을 적절히 분류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승가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四雙八輩,四向四果)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경전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다음의 계행과 보시로 천상에 태어난다는 고대적인 도덕관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새김은 존재의 필연적인 사멸에 관해서 숙고하여 관찰하는 것이며, 신체에 대한 새김은 지수화풍의 사대로 구성된 몸을 관찰하거나 32가지의 구성부분으로 된 신체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새김은 올바른 새김의 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날숨과 들숨에 대한 것인데 그 새김이 집중을 통해 깊어지면 미세하게 되어 고요한 지복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고 적정에 대한 새김을 가능하게 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이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을 수행하고 익히면 적정, 승묘, 무염, 지복에 머물러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그것들을 사라지게 하여 지멸시킨다."
4. 네가지 청정한 삶(四梵住,cattari brahmavihara)에 대한 집중은 모든 중생에게까지 확대되는 자리이타적인 무량한 마음인 사무량심에 대한 집중이라고도 한다. 자애(慈,metta), 동정(悲,karuna), 희열(喜,mudita), 평정(捨,upekkha)의 네가지 청정한 삶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자애는 올바른 사유 가운데 성냄을 여읜 사유를, 동정은 폭력을 여읜 사유를, 희열이나 평정은 욕망을 여읜 사유에서 비롯한다.
(1) 자애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타인도 자신을 사랑하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사랑을 그 원리로 한다.
[붓다] "모든 방향으로 마음을 편력하더라도 어디에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각의 자아는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2) 연민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연민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수반하는 것이지만 [분별론]에 의하면 역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연민을 갖춘 마음으로 한 방향을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역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연민하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하여 연민을 편만시킨다."
(3) 희열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희열은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수반되는 자유로서 [분별론]에 의하면 사랑하는 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이 모든 중생에게 희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희열을 갖추어 마음으로 한 방향을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고 희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희열을 편만시킨다."
(4) 평정의 청정한 삶에 대한 명상 : 사랑, 동정, 희열은 애착의 사유(愛執作意)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항상 그러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평정은 불가결한 것이다. [분별론]에 나타난 평정의 범주의 수습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은 어떻게 평정을 갖춘 마음을 한 방향으로 편만시키는가? 예를 들어 마음에 들지도 마음에 들지 않지도 않는 사람을 보고 평정하듯이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 대해서 평정한 마음을 편만시킨다."
5. 네가지 무형상(四無色)에 대한 집중은 이미 선정의 단계에 깊이 들어간 자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상태는 또한 존재의 영역으로 범천계에 속하며 화생한 범천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1) 공간이 무한한 세계(空無邊處) : 물질의 지각현상이 사라져 그 다양성이 소멸하고 공간만이 무한하게 현존하는 객관적 대상이 소멸된 경지를 말한다.
(2) 의식이 무한한 세계(識無邊處) : 공간이 무한하다는 지각의 상태가 대상없는 의식의 무한성으로 주관적으로 환원된 상태이다.
(3) 아무 것도 없는 세계(無所有處) : 의식의 무한성마저 소멸되어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아무런 의식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이다.
(4)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非想非非想處) : 허공의 무한성에 대한 의식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에 대한 지각상태로서 미묘하여 지각이 소멸하여 남아 있다 또는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6. 수렴적 지각(一想, eka sanna)에 대한 집중은 자양분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는 지각(食厭想)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에 따른 그 본래의 의미는 네가지의 존재를 구성하는 자양분(食,ahara)에 대한 지각을 뜻한다. 거기에는 물질의 자양분(搏食)과 그밖에 정신적인 것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가지의 감수를 수반하는 접촉의 자양분(觸食)과 욕망의 세계, 형상의 세계, 무형상의 세계의 존재로 되고자하는 의도의 자양분(意思食)과 태어남의 계기에 정신물리적 현상인 명색(名色)을 수반하는 의식의 자양분(識食)이 있다. 이러한 자양분에 대해 싫어하여 떠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것이다.
(1) 물질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어떤 부부가 적은 양식을 가지고 황야로 여정을 떠났다. 그런데 중도에 양식이 다 떨어져서 하는 수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아들을 죽여 그 살코기를 먹으면서 '외아들이 어디에 있느냐' 고 외치면서 황야를 빠져나왔다면 그 아들의 고기를 즐겁게 먹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자양분도 그와 같이 유혹적인 대상으로 보는 미관(味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연생의 실상을 보는 위험한 대상으로 보는 환관(患觀)에 의해서 괴로운 대상인 염역(厭逆)의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2) 접촉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접촉의 자양분은 가죽이 찢겨진 목우의 신세와 같다. 가죽이 찢겨진 목우가 한 담벼락에 기대서면 담벼락에 살고 있는 생물이 그를 먹어치울 것이고 나무 곁에 서 있으면 그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물 속에 있으면 그 물 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 데에 서 있으면 한 데에 사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치울 것이다. 존재의 다발 가운데 접촉의 자양분은 이와 같이 가죽이 찢겨진 목우처럼 위험해서 결국 생노병사의 윤회를 낳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접촉의 자양분도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3) 의도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의도의 자양분은 석탄화로에 떨어지는 것과 같이 위험한 것이다. 작열하면서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는 석탄화로에 강제로 어떤 사람을 끌어넣는다면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의도의 자양분도 이와 같아서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4) 의식의 자양분에 대한 지각 : 의식의 자양분은 아침, 점심, 저녁마다 찌르는 백개의 창에 비유된다. 사로잡힌 흉악한 도둑에게 왕이 명령하여 아침에 백개의 창으로 그를 찌르도록 했다. 저녁때에도 아직 그가 살아있으므로 다시 백개의 창으로 찌르도록 했다. 의식의 자양분도 이와 같아서 유혹적인 대상으로 봄으로써 즐거운 것으로 오인돼서는 안되며 위험한 대상으로 봄으로써 싫어하여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7. 분석적 지각(一差別,ekavavatthana)에 대한 집중은 육체에 대한 분석적인 지각을 통해서 그 실체에 대한 관념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네가지 세계에 대한 분별(四界分別)을 뜻한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구성된 우리 육신을 네가지 세계, 즉 땅, 물, 불, 바람의 세계로 분석하는 것이다.
[붓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숙련된 도살자나 도살자의 제자가 소를 죽여서 네거리에 조각 내어 분할하고는 앉아 있듯이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바로 이 몸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세계를 따라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 고."
붓다고싸에 의하면 소가 도살되어 죽어서 분할되어 가는 동안에 소 도살자에게는 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하고 쇠고기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듯이 수행승에게도 이 몸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여 관찰하면 중생(有情,satta)이나 사람(人,posa)이나 개인(個人,puggala)이라는 지각은 소멸하고 요소로 분해된다. 이 분석방법에 관해서는 [상적유대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내부의 땅의 세계 : 견고한 것으로 머리카락, 몸털, 손발톱, 이빨, 피부, 살,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등.
(2) 내부의 물의 세계 : 습윤한 것으로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점액, 관절액, 오줌 등.
(3) 내부의 불의 세계 : 온난한 것으로 열을 내는 것, 늙게 하는 것, 연소시키는 것, 먹고 마시고 삼키고 맛본 것을 잘 소화시키는 것 등.
(4) 내부의 바람의 세계 : 동적인 것으로 상향풍, 하향풍, 위주풍, 하복주풍, 지체순환풍, 출식풍, 입식풍 등.
올바른 명상에 들어 집중하기 위해서는 명상의 장(業處)를 선정한 뒤에 올바른 명상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다리를 편하게 결가부좌하고 상체를 곧게 세운 뒤에 손을 포개고 머리를 곧추세우고 입을 다물고 눈은 반쯤 감고 숨을 고르게 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며 흐트러지면 알아채고 다시 집중시킨다. 이러한 단계를 예비삼매(遍作定,parikammasamadhi)라고 하며, 이때에 명상의 장이 되는 특징(現相)을 예비현상(遍作相)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비현상을 취해서 올바른 집중을 실천하다보면 다섯 가지의 마음의 장애가 소멸되면서 다섯가지 선정의 고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음의 장애(五障)] [선정의 요소(五支)]
해태와 혼침 -> 사유
매사의 의심 -> 숙고
분노 -> 희열
흥분과 회한 -> 행복
감각적 쾌락 -> 심일경성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유는 명상의 대상이라는 종을 치는 것과 같으며, 숙고는 그 종의 반향을 관찰하는 것이고, 희열은 명상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 따르는 기쁨으로 사막을 여행하는 자가 멀리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쁨에 해당하며, 행복은 오아시스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고 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심일경성은 마음과 대상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명상의 장으로서의 대상은 거친 물질적 감각자료들이거나 거친 정신적 인상이었으나 집중이 심화될수록 실제적 대상이 없이도 마음에 분명히 보이는 정신적 대상인 습득상으로 바뀌고 습득상은 다시 청정하고 밝은 대응상으로 바뀐다. 습득상은 [청정도론]에 의하면 구름 낀 달에 비유되고 대응상은 구름이 사라진 달에 비유된다. 왜냐하면 대응상이 나타나면서 선정의 요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은 근접적 삼매(近行定,upacarasamadhi)에 이른다. 더욱 깊이 마음의 집중과정에 들어서면 근접적 삼매는 근본적 삼매(近本定,appanasamadhi)에 들어간다. 이때 두 삼매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근접적 삼매는 선정의 요소들의 정신적 힘이나 견고성이 약해서 자주 넘어지는 어린아이에 비유되고 근본적 삼매는 힘과 강도를 지녀 탄탄히 걸어가는 어른에 비유된다.
이렇게 해서 선정의 요소들이 갖추어진 근본적인 삼매는 여덟 단계 내지 아홉 단계로 이끌어진다. 이 가운데 다섯번째에서 여덟번째까지는 네가지 무형상계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불교에만 고유한 첫 네가지 선정과 마지막 단계의 멸진정(滅盡定)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1) 첫번째 선정(初禪)의 과정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지면서 성립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법을 떠나서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초선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소멸하게 된다' 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으나 그것은 대상 지향적인 감각적 욕망을 떠나는 과정에 수반되는 지칭적 언어표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개념화된 언어로 대상을 이해하는 사유나 숙고는 아직 제거되지 않는다.
(2) 두번째 선정(二禪)의 과정에서는 사유와 숙고가 다른 요소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로 제거된다. 더욱 깊은 심일경성을 속성으로 하는 삼매에서 생겨나는 더욱 커다란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에 내적인 평온, 심일경성에 도달하여,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3) 세번째 선정(三禪)의 과정에서 희열은 거친 것으로 제거되고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 가운데 더욱 심화된 행복과 심일경성만이 남는다. 이때에 평정함이 심화되고 주의깊은 새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희열이 사라진 뒤에 평정하고 주의깊고 올바로 알고 육체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바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깊고 행복하다' 라고 한 세번째 선정에 도달한다.
(4) 네번째 선정(四禪)에서 거칠게 지각되는 육체적인 행복이 제거되고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상태에 도달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이전의 희열과 우울이 사라진 뒤에 행복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네번재 선정에 도달한다."
여기서 삼선에서의 행복의 상태마저 제거되는 순수한 선정의 집중 상태만이 남지만 거기에 주의깊음 즉 바른 새김이 수반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네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소멸하게 된다' 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와 두번째 선정에서 언어적 형성이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을 통해 육체적인 행복과 날숨과 들숨이라고 하는 육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심일경성은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고 불리우며, 이 마음에 의한 해탈은 세속적이지만 탁월한 정신적 능력(세간신통)의 구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 탁월한 정신적 능력이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의 초월지(abhinna)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지는 결코 일반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누구나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체험적 구조 속에서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사상가들이 요가체험의 기초 위에 이러한 지식을 신비적 직관으로 여겼고 그것은 아트만이나 브라흐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계시하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 비해 붓다는 이러한 지식의 생성을 조건적 발생과정으로 해체시켰다. 쁘레마씨리에 의하면 '초월적인 인식능력은 결코 불교에서 플라톤의 초월적인 이데아에 대한 지적인 직관과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체험과 지적 직관은 상호배타적인 인식론적인 범주에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초월지는 초감각적 실재에 대한 신비적 직관이 아니고 단지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적 능력의 확장과 정제의 결과' 이다. 여기에는 감각적 대상과 기억과 같은 정신적 내용을 초월하는 실체에 관한 인식은 없다.
(1) 신족통(神足通,iddhi)은 정신적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의 정신적 능력을 즐긴다. 나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나는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집착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서 간다. 나는 물 속에서처럼 땅 속을 드나든다. 나는 땅 위에서처럼 물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나는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움직인다. 나는 손으로 이처럼 큰 위력을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나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신족통에 대한 서술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불사의한 것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난해한 문제를 던져준다. 그러나 일체의 존재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공간, 담, 성벽, 물, 땅, 새, 달, 해, 범천, 육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위법적으로 조건적으로 발생된 연생(緣生)이라고 한다면 무상하고 실체가 없으므로 어떠한 물질적 장애도 실제로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사사무애(事事無碍)적인 자유가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 쁘레마씨리처럼 신족통을 염력과 같은 정신적 힘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2) 천이통(天耳通,dibbasota)은 청각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청정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귀로 멀고 가까운 신들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
이 능력은 별반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감각기관이 지극히 청정해지면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텔레파시나 전파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멀고 가까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신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신들은 우리의 정신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화생(化生)으로서 마음에서 조건적으로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청정한 청정한 마음으로 그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모든 장애의 소멸이 어떠한 소리도 민감하게 수용하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면 천이통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3) 타심통(他心通,parassa cetopariyanana)은 타인의 마음의 상태를 헤아리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중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 나는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알거나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진애로 가득한 마음을 진애로 가득한 마음이라고 알거나 진애에서 벗어난 마음을 진애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우치에 가득 찬 마음을 우치에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거나 우치에서 벗어난 마음을 우치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통일된 마음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알거나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최상의 마음을 최상의 마음이라고 알며 최상이 아닌 마음을 최상이 아닌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며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나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이 타심통은 나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이나 중생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에 언급된 타심통의 대상은 언제나 일정한 타자의 마음 상태, 특히 그들의 조건지어진 것에 대한 속박과 그것의 소멸에 따르는 자유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4) 숙명통(宿命通,pubbenivasanussati)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대한 기억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한번 태어나고 두번 태어나고 세번 태어나고 네번 태어나고 다섯번 태어나고 10번 태어나고 20번 태어나고 30번 태어나고 40번 태어나고 50번 태어나고 백번 태어나고 천번 태어나고 10만번 태어나고 수많은 파괴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생성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파괴와 세계 생성의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여기서 숙명통에 관해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거의 무한이지만 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어 소급되는 자신의 전생에 관한 초월지이다. 왜냐하면 윤회의 시작은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간적 계기에 따라 조건지어진 존재의 계기가 흔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조건의 소멸에 수반되는 여실지견에 의해 전생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생의 사건에 대한 인과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직접지각이 아니며 다중적인 전생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5) 천안통(天眼通,dibbacakkhu)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미루어 타자의 행위와 업보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중생들을 본다. 어떤 중생들은 몸으로 악행을 갖추고 입으로 악행을 갖추고 마음으로 악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중생들은 몸으로 선행을 갖추고 입으로 선행을 갖추고 마음으로 선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선처, 하늘나라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중생들을 관찰한다."
천이통처럼 천안통이 멀고 가까운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중생들의 다양성을 그들의 업보의 다양성에 따른 인과응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앞서의 숙명통은 자신에 관련된 것이고 지금 논의되고 있는 천안통은 타자의 다양한 업보에 따라 등장하는 숙명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현재적 사건을 일반적인 시각능력의 범주를 넘어서 지각하는 것이다. 또한 타심통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타자의 마음을 알듯이 천안통은 자신의 숙명을 미루어 타자의 숙명에 관해 아는 것이다. 천안의 계발은 초감각적 초시간적 실재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천안통은 현재적 사건을 보는 목적을 위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초월지는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능력의 확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데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능력을 제외한 시각능력과 청각능력 그리고 정신력의 확장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초월지는 연기론의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하는 초인식적 능력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과거는 오직 기억을 수반하여 관찰함으로써 식별된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므로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붓다는 이러한 명상수행에 따른 미래에 관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미래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지혜만을 언급했다.
불교의 초월지는 동시대인들이 주장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는 전지(全知)를 극단적인 결정론과 관계된 것으로 부정한다. 초월지의 체험내용은 나중에 언급할 누진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 감각내용과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지 않은 누구라도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는 무형상계의 선정에서 가장 초월적인 존재상태인데.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세계(想受滅)의 선정은 그러한 비형상계의 최상의 단계마저 초월하는 선정의 결과이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선정에 든다."
이러한 지각과 감수가 소멸된 멸진정이 붓다가 성취한 가장 높은 형태의 명상이지만 궁극적인 열반의 성취와는 다른 것이다. 깔루빠하나에 의하면 붓다는 요가 수행자의 선정에 의해 도달하는 초감각적 지각의 타당성을 수용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각과 감각이 모두 중지되는 멸진정과 같은 최고단계의 법열도 열반의 일시적 측면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경전에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싸리뿟따에게 '지혜로써 관찰되어 번뇌들이 소멸한다' 그리고 '그는 그 입정(入定)으로부터 새김을 갖추어 출정(出定)한다' 라는 진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지각과 감수가 소멸한 멸진정이 곧 선정의 최상 단계로서 모든 선정을 대변하지만 그것이 곧 최종적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붓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도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 그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이에 있다."
지혜는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 가운데, 네가지 거룩한 진리이나 연기법에 대한 완전한 통찰을 의미하는 올바른 견해의 완성과 더불어 나타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