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 천년의 사랑 -
맑고 아름다운 산청
- 유영복
산천이 좋아 산청에 왔다
맑은 지리산 새벽이슬이
경호강물 되어 굽이굽이 흐르고
지리산의 광활한 숲을 품은 솔바람이
마음을 맑게 한다
이곳에 온 연고를 묻곤 한다
낯선 산촌의 맑고 아름다운 풍경
여유로운 동네의 일상
안면 없는 사람들은
이곳의 끌림에 끌림을 더한다
*유영복 : 경남 사천 출생, 경상국립대학교 농학과 졸업, 경상국립대학교 대학원 농학박사,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농업연구관 역임. 현재 지리산 부근에 귀촌하여 텃밭을 가꾸면서 문학활동을 한다. 현 산청 필봉 문학회 회장. 시집으로 ‘반딧불이(2003)’, ‘조약돌(2013)’, ‘행복한 인생(2022)’ 등이 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월요일 출근하니 사표 쓰고 싶은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얼른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 바빴다. 거기에다 주간회의니, 확대간부회의 같은 각종 회의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아니, 나라는 사람은 특히 그랬다. 나약하고 건망증이 심해 불과 어제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였다. 너무 바빠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는 1시경에 식당에 내려가니 그녀가 동료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처럼 바빴던 모양이었다.
그날부터 목요일까지 너무 바빠서 그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내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로가 바쁜 일상 속에 지내다 보니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아내의 이런 점이 나와 그녀에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물론 그녀에게 우리 관계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화하거나, 시시콜콜하게 묻지 않았다.
그녀를 온전하게 밖에서 만날 수 있던 날은 겨우 금요일이 되어서였다. 목요일 저녁이었다. 늦게까지 야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거실에서 T.V를 켜놓고 자고 있었다. 그때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아내가 잔다고 생각하여 그냥 거실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내일 영화를 한 편 보자고 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프랑스 영화였다. 그녀는 시내 영화관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하려다 부장에게 호출을 받은 나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 이십 여분 후에 그곳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표를 끊어놓았다. 상영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영화관 내 로비에서 팝콘과 콜라를 사서, 로비 의자에 앉아 먹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리산에 있어야 할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나는 멋쩍어서 그냥 팝콘만 씹고 있었다.
“다음에 가지. 뭐. 꼭 이번에 들어가야 하나?”
“전 솔직히 말씀드려 아저씨가 월요일 아침에 정말 사표를 쓰면 어쩌나, 싶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날 놀릴 심산인지 자꾸 입을 댔다.
“하여간 대책 없고 즉흥적인 분이에요. 그런데 우스운 건, 만약 아저씨가 사표를 썼다 하면, 저도 쓸 각오를 했다는 거예요.”
“왜?”
“왜라뇨? 우리 그때 약속했잖아요. 각자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지리산으로 갈 거라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죠”
“미안해. 내가 그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는가 봐.”
내 말에 그녀는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쓸쓸한 느낌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핸드백과 팝콘, 콜라를 챙겨 일어섰다. 상영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놀랍게도 아내와 아내의 친구 몇이 서 있었다. 그녀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팝콘과 콜라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녀는 아내를 한 번도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주 선 여자가 내 아내인 줄 알았는지 이상했다. 그런 생각으로 정신이 복잡해지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의 친구들이 내게 인사까지 했다. 대충 일어서서 묵례만 하고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은 놀랍게도 매우 침착했다. 이럴 땐 아내같이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가 좋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아내가 여자의 뺨을 때리거나 아니면 남편에게 콜라를 붓는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나는 그녀 옆에서 바보같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영화 보러왔어요?”
아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옆에 있는 여자는 사무실 여직원이나 보네요. 참 예쁘게 생겼다.”
아내의 친구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면서 그녀를 아래, 위로 쳐다보더니 아내의 손을 이끌었다.
“이제 들어가야 해. 곧 시작이야.”
아내와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우리를 지나쳤다. 그때 찬바람이 쌩, 하고 불었다. 그제야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팝콘과 콜라를 집어 쓰레기통에 붓고선, 자리에 힘없이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마저 무표정이었다. 나는 어떡하던 그녀에게 말을 붙여야 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내 물음에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아내인 줄 말이야.”
그러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일전에 화상통화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하고 놀랐다.
“아니, 그날은 사무실 전화로 통화했다면서?”
“그 후에 몇 번 통화했어요. 화상통화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내는 내겐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에겐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분노가 끓어오르면서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다.
“왜 내게 말 안 했어?”
“말을 하면요. 뭐가 달라져요?”
그녀는 정색하며 내게 반문했다. 언뜻 보니 그녀의 눈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핸드백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하려고?”
“뭐하긴요. 그럼, 이런 칙칙한 기분으로 영화 보자는 거예요? 오늘은 일찍 들어갈래요.”
그녀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찬바람이 부는 표정으로 뒤돌아서서 갔다. 말문이 막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던 영화표를 구깃구깃 접어 휴지통에 넣고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젊은 연인들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파가 넘치고 있었다. 제각기 뭐가 즐거운지 입에 함박웃음을 띤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의기소침했다.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즐거워야 할 그녀와의 데이트는 본의 아니게 취소되었고 나는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것같이 가슴이 쓰렸다. 부적절한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위태위태한 것일까. 나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영화관 앞 골목에 선술집이 줄을 서 있었다. 술집 안은 금요일이라 그런지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로 복잡했다. 나는 아직도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K 관세사 대표 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이런 날은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술 한잔하는 게 제격이었다.
그는 나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있을 때쯤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한 건 오늘 속상한 건 난데 오히려 그가 더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녀석은 앞에 앉자마자 손수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더니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이상하다 싶어 몇 번이나 말을 건네려 했으나 그는 정말 화가 난 표정으로 인상만 구기고 있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내게 말을 건넨 것은 추가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난 후였다.
“최 림! 이 시간에 영화관에 있을 놈이 웬 술이야?”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영화관에 간다고 말한 적도 없으려니와, 설마 유희가 그에게 말할 것은 아닌듯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영화관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찔리냐?”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몰라 고개만 주억거렸다.
“틀어졌어? 그래서 네놈만 비참하게 이런 선술집에 온 거지. 맞지?”
그의 말에 예감이 좀 이상했으나 나는 시치미를 뗐다.
“물어보려면 구체적으로 물어라. 내가 누구랑 틀어졌단 말이야?”
그러자 그는 종업원에게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이번엔 작은 소주잔 대신 맥주잔에 소주를 부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최 림! 너, 이놈아.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응? 빌딩 안에 소문이 다 났는데 네놈만 모르고 있네, 모르고 있어.”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다더니 나는 그가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잡혔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 알고 싶어 입을 굳게 닫았다.
“너, 그때 술 마시며 말한 여자가 같은 문학회 소속 여시인이라 그랬지?”
“…….”
“여시인은 개뿔! 너, 지금 미친 것 아냐? 아니, 차라리 여시인이라면 오히려 더 좋겠다. 왜 하필이면 상대가 정유희야!”
그는 고함과 함께 술잔을 탁자 위에 쾅, 하고 쳤다. 그 바람에 옆좌석에 있던 젊은 연인이 슬쩍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모든 게 허탈했다. 하긴, 언제까지 사람을 속일 수은 없는 노릇이어서 때가 되면 그에게 말을 할까, 했었는데 오늘 그가 먼저 알아 버린 것이다.
“변명하진 않겠다. 그냥, 그렇게 되었어.”
“유희가 지금 몇 살인지 잘 알고 있지?”
“그래, 알고 있어.”
그는 남은 소주를 또 맥주잔에 따라 냉큼 마셔버렸다.
“그년이 먼저 유혹하디?”
오늘따라 그에게서 소주 냄새가 역하게 났다.
“그렇게 말하지 마. 유희는 아무 잘못 없다.”
“꼴값하고 있네. 뭐 벌써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야? 내 참! 설마설마했네. 다른 사람들이 너와 그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말해도 난 믿지 않았어. 그런데 이게 뭐야?”
그가 자꾸 유희에게 그년, 이라고 지칭하는 바람에 나는 은근슬쩍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꾸 그년, 그년 하지 마! 그녀도 이제 성인이야. 최소한의 인격은 보장해주어야지. 특히 넌 유희의 상사잖아.”
“그러셔? 아이고! 열녀, 아니 열남, 나셨네.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도 보호해주고 말이야. 그건 그렇고 야! 오늘 내가 너희들 영화관에 간 것 어떻게 알았는지 안 궁금해?”
궁금하긴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정말 궁금했다.
“퇴근 무렵에 네 아내에게 전화가 왔더라. 내가 받았는데 내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대뜸 유희를 찾는 거야. 휴대전화로 했더니 받지 않는다면서 바꿔 달래. 나는 네 처가 유희를 어떻게 알며, 무슨 용건으로 그녀를 찾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바꿔주었어. 그런데 유희가 네 처의 전화를 받고 쩔쩔매는 거야. 그때 나는 뭔가 알아차렸어. 유희가 퇴근하고 나는 그녀의 책상 달력에서 우연히 오늘 날짜 밑에 메모를 하나 발견했어. ‘남포동 B 극장, 7시. 림(林).’이라 되어있더군. 단번에 너와 같이 간 걸 알았지.”
나는 그의 말에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