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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대간길에서 산불 예방기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행을 있어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태백산 구간을 지나고 5개월 만에 소백산 구간을 마무리한다. 남은 구간이 고치령에서 어의곡 삼거리이긴 하나 이왕 왔으니 비로봉을 외면할 수 없어 삼가리로 내려가기로 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백산에 비소식은 없어도 하늘은 잔뜩 흐리고 시야가 좋지 않다. 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니 주어진 상황에서 산을 즐기면 되지......
좌석리 최고급 리무진으로 고치령에 도착한다. 후미와 여성배려로 첫 번째 탑승을 기대했는데 기대는 무너지고 오늘도 역시 후미에서 산행하게 생겼다.
고치령
오래된 고개 아니면 높은 고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한문으로 곶(串) 자를 쓰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두드러진? 아니면 돌출된? 뭐 그런 뜻이 아닐까...(심곡 개인생각 ㅎㅎ) 참고로 대동여지도에는 곶적령(串赤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를 잇는 고개다. 태백과 소백, 소위 양백지간의 가운데에서 마구령과 함께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사실 양백지간이란 말은 정감록에 나오는 말로써 “사람의 씨를 구하려면 양백지간이어야 한다”라고 하며 이곳을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기 좋은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 고치령엔 또 다른 이야 가 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순흥으로 유배된 그의 숙부 금성대군 사이를 잇는
가장 빠른 길목이 바로 고치령이다.
금성대군은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기 위해 고치령을 남나들며
비밀리에 연락을 주거받았으나
결국 계획이 탄로 나
두 사람 모두 죽임을 당했다..
고치령에는 이들의 넋을 기리는 산령각이 있고
민간 신앙에 서는 사후에 단종은 태백산 산신이 되고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고 다.
산령각 내부에는 백마를 탄 단종의 영정과
두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죽어서나마 두 산신령이 이곳
고치령에서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고치령에 누에고치 닮은 돌을 갖다 놓았으니 참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아니면 장난스럽기도 하고...
ㅎㅎㅎ
여섯 기가 있었다는 장승은 이제 삭아 낡아진 두기의 장승만 보인다.
이곳 방향표시가 형제봉 방으로 등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선달산과 갈곶산 사이는 늦은 목이.
이곳은 늦은 맥이.
무엇이 다를까. 별것이 없다. 목이 그러니까 잘록한 지형을 목이라 하는데 그 목이가 편한 발음 내지 방언으로 맥아가 된 것이니 그 뜻은 같다. 대간꾼들은 그냥 위치적으로 구분하면 될 것이다.
상월봉이 기다리고 있으니 부지런히 가야겠다.
직진하지 말고 상월봉으로...
고치령에서 이곳 상월봉까지 전망이 없는 숲길을 걸어왔다.
이제부터는 소백의 완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실컷 조망을 해 보자.
근데 이 흐릿함은 가시지 않고 시야를 방해하고 있으니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가자.
지나온 대간길과 신선봉과 민봉.
저 민봉 아래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는 신비스러운 지형이 있다. 이름하여 ‘8문 9봉’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 사이에서 시작하는 구봉팔문은 2개면 5 개리에 걸쳐있는 자연의 신비함과 불교의 법문과 일치하는 기이한 자연형상으로 9개 봉오리에 8개 골짜기를 문에 비유하여 문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첫째 봉오리를 아곡문봉(我谷門峰), 둘째 봉오리를 밤실문봉, 셋째 봉오리를 여의생(如 意生) 문봉, 넷째 봉오리를 뒤시랭이 문봉, 다섯째 봉오리를 덕가락(德辛) 문봉, 여섯째 봉오리를 곰절(能寺) 문봉, 일곱째 봉오리를 배골문봉, 여덟째 봉오리를 귀기문봉, `````아홉째 봉오리를 새밭 (乙田) 문봉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이 난다. 여덟 문은 1문 안골을 아골문안, 2문 안을 밤실문안골, 3문 안을 여의생문안골, 4문 안은 덕가락 문안골, 5문 안을 곰절문안골 6문 안을 배골문안골, 7문 안을 귀기 문안골, 8문 안을 새밭문안골이라 한다. 9봉과 8문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의 형상을 9봉 8문이라한다. 9봉 8문이 합하여 표대봉(1066m)에 끝이 모여 민봉을 거쳐 저 신선봉으로 올라가 마치 접는 부채꼴 모양을 이룬다.
8문 9봉을 완주하면 득도할 수 있다고 하니 거인 산악회 회원님들 도전해 보세요.^^
가야 할 국망봉.
어의곡. 가까운 용산봉도 희미하다.
뒤돌아본 상월봉과 주먹바위.
다음에 상월봉에 오게 되면 저 바위에 갔다 와야겠다.
범의꼬리가 지천이다.
국망봉에 도착해서 우선 1등급 삼각점부터 확인했다.
국망봉(國望峯)의 명칭은 신라 말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은거지를 찾아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과 선조(宣祖) 때 수철장(水鐵匠 대장장이) 배순(裴純)이 왕이 승하하
자 왕성을 바라보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냥 설이다.ㅎㅎ
참고로 초암사 아래 순흥면 배점리가 있는데 그 유래를 보면
조선 선조때 무쇠쟁이 배순(裵純)이 국상을 당하자 상복을 입고 소백산 위에 올라가서 삼년동안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통곡망배하여 충신 정문이 1615년에 내려져서 배충신이라 하고 망배하던 산봉을 국망봉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무쇠점을 주었다. 그 연유로 배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저기 비로봉까지 갈길이 아직 멀다.
초암사 갈림길
퇴계 선생이 이곳으로 올라왔다. 선생의 등로를 보면
백운동서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초암사→석륜사(1박)→국망봉→석륜사(1박)→석성(소백산성)→죽암폭포→관음굴(1박)→박달현→비로사→욱금 쪽으로 하산하면서 총 4박 5일간의 전체 일정을 끝낸다.
퇴계의 『소백산 유산록』을 읽어보고 싶으면 빌려드리겠음(ㅎㅎ)
국망봉 뒤로 신선봉과 민봉
어의곡 삼거리.
이 이정목은 늘 삐딱하게 서 있는데 오히려 더 정감이 있다.
스위스를 가보지 못했지만 이곳을 알프스에 비유하는 걸 보니 그럴듯하다.
소백산 비로봉에 도착.
비로란 산스크리트어로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으로, 대승 불교권에서 널리 숭배되는 최고의 부처를 말한다.
※ 활인지산(活人之山)의 전설
옛날, 격암 남사고 선생은
소백산을 지나다 갑자기 말에서 내려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活人之山)”라고
감탄하며 절을 올렸습니다.
그의 말처럼 소백산은
『정감록』이 꼽은 십승지 중에서도
으뜸가는 명당이다.
특히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의 지형인 풍기의 금계리는 십승지 중 제 일이라는데
오늘 하산 지점인 삼가리 아래 욱금리를 지나면 금계리가 있다.
남사고 南師古 :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저 아래 오늘 하산지점인 삼가리가 있고 금계 저수지가 보인다.
이 산에서 조난당해 숨진 이의 추모비. 위로와 명복을 빈다.
이 후 접속 구간의 사진은 생략하고, 오늘 20km가 넘는 대간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긴 거리지만 등로가 좋아 아무 사고 없이 모두 산행을 마쳤다.
산행도 내가 즐거우면 같이 하는 산우님도 즐겁고 그 산우님이 즐거우면 나 또한 더 즐겁다.
우리는 산에 와서 경치를 보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꽃도 보고 풀밭을 걷는다.
이렇게 진심을 다해 오랫동안 산에 오르다 보면 그땐 내가 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산이 되어가지 않을까....
흰구름 드리우고 산에서 살고 싶다.
★에필로그
이렇게 소백을 마쳤다.
소백을 지나는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선달산을 지나 늦은 목이부터 시작되는 소백산 아래 영주 땅. 부석사를 품고 있는 부석면,
단종과 금성대군의 사연이 있는 고치령의 단산면, 퇴계와 소수서원, 금성대군의 이야기가 있는 순흥면, 살기 좋은 금계리와 희방사가 있는 인삼의 고장 풍기읍.
많은 얘기들을 전하고 싶었는데 지면도 그렇고 내가 독수리 타법이라 아쉬움만 남긴 채 기약 없는 다음으로 미룬다.
그래도 소백산 대관록의 덴동어미 화전가는 꼭 전하고 싶다.
그냥 심심할 때 읽어 보시라. ㅎㅎ
한국 내방가사의 백미로 꼽히는 화전가의 주인공(?) 덴동어미의 기구한 인생을 소개하면
1. 덴동어미는 영주의 순흥 임이방의 딸로, 예천의 장이방의 며느리가 되어 시집을 가게 된다. 하지만, 혼인한 이듬해 같이 처가로 왔다가 단오가 되어 장이방이 그네를 뛰다가 떨어져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리고 양쪽부모 의논하고 허락을 받아 이승발이라는 자의 후취가 되어 상주로 떠나게 된다.
2. 두 번째 결혼, 재혼: 이승발과 혼인한지 3년 되던 해, 상주목에 조씨 성의 지방관이 부임하게 된다. 새로운 지방관의 부임은 이승발의 집안을 급속히 몰락시킨다. 수만 냥에 해당하는 이포(吏逋)를 징수하여 재산을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시아버지는 장독으로 7개월 만에 사망하고, 시어머님 역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빈털터리가 된 이승발과 덴동어미만 남게 된다. 유리걸식하던 덴동어미 내외는 군노 부인에게 고용되는 신세가 되고, 덴동어미는 5년만 고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남편인 이승발에게 이야기한다. 200냥을 선불로 주겠다는 주인의 말에 평생 하지 않던 마죽 쑤기, 소죽 쑤기, 마당 쓸기 등 일을 해낸다. 선불로 받은 돈은 일수, 월수를 놓아 돈을 불리는 목돈으로 이용하고 결국 3년이 지나 큰돈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병술년 괴질로 인하여 남편을 비롯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사망한다. 덴동어미는 다시 혼자가 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번째 결혼생활이 끝이 난다.
3. 세 번째 결혼: 덴동어미는 다시 빌어먹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던 중 울산 읍내 황도령이 덴동어미에게 자신의 불쌍한 신세를 이야기하며 삼십 넘은 노총각과 삼십 넘은 혼과부가 서로 만나 같이 늙는 것이 어떠하냐고 묻는다. 불길한 자신의 과거를 듣고도 적극 청혼하는 황도령. 그래서 도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10여 년을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주막 뒷산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로 황도령이 죽는다.
4. 네 번째 결혼: 세 번의 결혼이 모두 남편의 죽음으로 끝난 덴동어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주인댁이 “팔자 한번 또 고치게”라는 말에 고민하지만, 결국 주인댁이 주선한 엿장사 조첨지와 네 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장을 돌아다니며 엿장사를 하던 도중 아들까지 낳았다. 별신굿이 있을 것이니 호박엿을 많이 고아 두라는 요청으로 사흘 밤낮으로 엿을 고다가 집에 불이 나게 된다. 결국, 화마가 덮친 집에서 아들만 구해 나온 덴동어미는 조첨지의 주검을 보게 된다. 결국, 덴동어미는 수족에 화상을 입은 덴동이를 업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화전놀이에서 만난 청춘 과부들에게 젊을 때 빨리 개가하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덴동어미화전가>는 '소백산대관록(小白山大觀錄)'에 수록된 화전가(花煎歌)로, 영주시 순흥을 고향으로 하는 한 여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가 겪었던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상부(喪夫)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하층 여성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덴동어미’는 네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이가 불에 덴 후부터 불리기 시작한 이름으로,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탄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화전가는 규방가사의 일종으로, 영남지방 동족부락의 양반 부녀들이 중심이 된 놀이에서 부르던 가사이다. 1년에 한번 청명절을 전후하여 일가의 부녀자들이 명승지를 찾아가서 풍류적인 야유회를 하고, 그 현장에서 두견화를 따 모아 화전병을 만들어 먹으면서 화전가를 창작하였다. <덴동어미화전가>의 경우 이러한 사설에 덴동어미가 겪은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상부를 더한 장편화된 작품이다.
내용 중 한대목을 옮길 수 없어 사진으로 올립니다. ㅋㅋ

첫댓글 소백산 마무리가 훈훈합니다. 저 길을 돌고 돌아 ..이젠 소백아래로 가네요~~ 산길에서 배우고 산행기에서 또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