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범부의 네 가지 전도⋅아라한의 네 가지 전도⋅갖가지 전도된 견해의) 전도와 (망상)몽상을 멀리 떠나서,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究竟涅槃.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보리살타(菩提薩埵)”,‘보리살타’는 바로 보살입니다.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密多故)”, 이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은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보리살타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만약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언제나 지닌다면 반야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얻을 것이 있기를 바란다면 구할 것이 있게 되고, 구할 것이 있다면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유위법이 되어버립니다. “일체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유위법이면 반야가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완전히 없애야 비로소 수행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반야는 사람들이 수행하여 도달할 수 없는 곳이며, 당신이 수행하려면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반드시 모조리 없애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보리살타는 “이무소득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당신은 구함이 없고 함이 없습니다[無求無為]. 당신이 구함이 없고 함이 없어야 비로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눈앞에 있는 만사 만물은 그 자체의 본질이 바로 공임을 시시각각 관조할 수 있습니다. 꿈속의 사물을 예로 들면, 꿈속에서는 호랑이가 진실로 있어 자신을 물려고 하는 것을 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허망이어서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일체에 대해서도 응당 이렇게 대하여야 합니다. 시시각각 어느 곳에서나 이렇게 관조하여 훈습(熏習)하기를 오래 오래 해가서 완전히 익숙해지게[純熟] 되었을 때는 경계에 대해 무심하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 억지로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망념을 떠난다면 걸리는 장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심무가애(心無罣礙)”, 당신은 본래 갖추고 있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니 조금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무슨 걸림이 있겠습니까? 걸림도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무유공포(無有恐怖)”, 공포도 사라져버렸으니,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본래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이 일체의 무명도 본래 공합니다. 이 일체는 모두 허깨비 경계[幻境]입니다. “허깨비인 줄 알고, 허깨비를 떠납니다. 허깨비를 떠나면, 바로 깨달음입니다 [知幻即離, 離幻即覺].”
그래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전도몽상을 멀리 떠납니다. <전도(顚倒)는 이지적이지 못한 모든 생각과 행동입니다. 범부에게 네 가지 전도된 견해[四倒]가 있고, 2승에게도 네 가지 전도된 견해가 있습니다.>
“구경열반(究竟涅槃)”. <반야심경은 문자반야이니, 그 속의 심오한 묘의(妙義)를 이해하여, 관조(觀照)를 일으켜 5온이 모두 공하고 일체 얻을 수 없음을 반복해서 훈습합니다. 그리하여 점차 무위(無爲)로 들어가 범부의 네 가지 전도⋅아라한의 네 가지 전도⋅갖가지 전도된 견해를 멀리 떠날 뿐만 아니라 몽상을 멀리 떠납니다. 몽상은 바로 망상입니다. 관조가 완전히 익숙해져서 망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잡념 집착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구경열반”이라 합니다. 아라한이 증득한 것은 단지 인공(人空)이며, 법공(法空)을 증득하지 못해서 유여열반(有餘涅槃)일 뿐입니다. 대승은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하며,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합니다. 열반의 뜻은 적멸(寂滅)이며, 원적(圓寂)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열반은 3덕이 드러난 것입니다. 3덕은 법신덕(法身德)⋅반야덕(般若德)⋅해탈덕(解脫德)입니다. <반야에 의지해야 비로소 무량한 번뇌 속으로부터 해탈을 얻을 수 있고, 해탈덕을 성취합니다. 법신덕도 반야덕이라야 자신의 법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미혹한 때는 알지 못하고, 지혜의 광명이 비추어야 비로소 현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다들 눈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다음은 어떠할까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고(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중에서 당신은 어느 한마디를 집어 쥘까요? 어떻게 당신더러 집어 쥐어라고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무소득(無所得)’을 말했는데, ‘얻을 것이 없음’이야말로 그것입니다. 그다음이 이어집니다. 이미 바로 그렇기 때문인 바에야, 삼세제불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시방제불은 최초에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부터 중간에 보살도를 행하며 줄곧 최후 성불에 이르기까지 반야를 선도자로 삼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를 제불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아뇩다라(阿耨多羅)는 무상(無上)이라 번역할 수 있고,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는 정등정각(正等正覺)으로 번역하며, 이를 합하여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증득된[所證] 최고 무상의 과(果)입니다. 이전까지는 줄곧 “무득(無得)”을 말하였고, 여기서 갑자기 부처가 무상정등정각을 얻음이 출현하는 것은 중도(中道)를 바르게 드러내는 것으로, 얻음이 없는 얻음이라야 진정한 얻음(眞得)이라는 것입니다. 얻었으면서 얻음이 없어서 부처는 자기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해(上海) 1차 대토론」에서 두 무리의 거사들이 공원에서 공개 토론을 가졌는데, 토론이 꼴사나웠습니다. 이는 벌써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뒷날 상해 사람이 왔는데, 그들은 우리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알고 있군요!” “당신네 일을 우리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한 팀은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다 [無修無證].”라고 말하였고, 다른 한 팀은 “닦음도 있고 증득도 있다 [有修有證].”라고 보았습니다. 이 둘은 서로 고집을 부리며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원에 가서 토론하였습니다. 토론한 뒤에도 아직 안 되겠기에, 다시 2차 토론을 했습니다. 나중에 스님 한 분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들 두 팀은 모두 틀렸소! 이렇게 토론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습니다!”라며 조정하였습니다. 그의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닦음이 없는 닦음[無修之修]으로써 얻음이 없는 얻음[無得之得]을 얻고, 증득이 없는 증득[無證之證]을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일률적으로 닦음이 없고 증득이 없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일률적으로 닦음이 있고 증득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닦으면서 닦음이 없고, 닦음이 없으면서 닦으며, 증득하면서 증득함이 없고, 증득함이 없으면서 증득한다 [修而無修, 無修而修 ; 證而無證, 無證而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앞에서 ‘얻는 것이 없다’가 있는 까닭에, 이 ‘얻는 것이 없다’를 틀어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중생의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직 잘 열심히 공부해야만 서서히 자기가 부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