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말복이 지났지요. 무더위가 한풀 꺾일 법도 하건만 여전히 뜨거운 공기 속에, 서늘한 바람 한자락 불어드리는 심정으로 아름다운 공포 영화를 한 편 추천 드립니다.
2003년에 개봉한 <장화,홍련>은 이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단순한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정말 가슴 아픈 정서와 아름다운 영상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수준 있는 한국영화라고 생각되어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한번씩 주변에 권하게 됩니다.
이 영화를 만든 김지운 감독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상처와 죄의식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큰 상처는 미리 예방하거나 서로가 합의하에 양보하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오히려 사소한 상처는 그것이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함으로 해서 나중에 평생 죄의식으로 남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영화 <장화,홍련>을 통해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해요.
이 영화의 핵심 코드는 주인공 수미의 '다중인격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입니다. 그녀는 과거에 겪은 가슴 아픈 일 때문에 커다란 마음의 고통과 그로 인한 깊은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다중 인격 장애'는 다른 말로 '해리 장애'라고도 하는데, 정신의학적 용어로 많은 수의 인격이 교대되는 현상으로 교대되는 인격은 원래의 인격과 상반되거나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각각의 인격은 자기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격의 교대는 극적이고 아주 빠르게 일어나는데, 다른 인격이 지배했을 때의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무속에서는 신들렸다고 하는 빙의(憑依) 현상을 정신과에서는 다중인격장애라고 하는데, 이러한 의학적 시도는 19세기부터 있어 왔지만 환자들의 증상이 귀신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증거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반대로 귀신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분야이기도 하지요.
이것과 종종 혼동되는 것이 '자아분열(自我分列)'이라는 증상인데, 이것은 스스로의 분신(分身)을 경험하는 현상일 뿐 '다중인격장애'처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격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왜 세 사람의 인격을 동시에 지니게 됐는지 알려면 영화의 후반부로 건너 뛰어야 하는데 처음 이 집에는 엄마, 아빠와 두 자매가 살고 있었지만 엄마가 병이 들게 되자 그 당시 간병인이었던 은주(염정아)와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그 사실을 안 엄마는 괴로워하다 딸의 방에 있는 옷장 안에서 독약을 먹은 후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이 놀라서 엄마를 꺼내려다 안타깝게 희생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 새엄마 노릇을 하는 간병인과 신경전을 벌이느라 그 모든 상황을 알아채지도, 막아내지도 못했던 수미는 감당하기 힘든 후회와 죄책감 속에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아버린 간병인에 대한 증오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 수미는 그런 감정을 도저히 풀 길이 없었기에 그렇게 자기 안에서라도 그 상황을 돌이켜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화의 장면 장면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쟝센을 보여주고 있지만, 일반 관객들이 처음 이 영화를 접하고 한번에 모든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것은 영화가 그만큼 많은 관점과 해석을 이끌어 내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관객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라는 반응이 있는 반면에 "잘 모르겠다,내용이 너무 빈약한거 아니냐" 등의 상반된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이 영화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가 또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곳곳에 숨겨진 코드와 풍성한 컨텐츠로 가득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로 기억되기 보다는, 충격과 아픔을 겪은 어린 소녀의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로 느껴져서 엔딩크레딧을 볼 때 수미의 작은 뒷모습을 왠지 한 번 안아주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거든요.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올 여름이 가기 전에 한 번 시도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