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담기
이 남 희
"얘야, 넌 어둡지도 않냐? 커튼 좀 치워라, 집이 훤해야 복이 들어온다는데 아이구 앞을 꽉 막아 놔서야…"
집안이 어두워서 답답하다는 시어머니의 말씀은 죄송스럽지만 나는 노랫소리로 듣고 산다.
우리 집은 시장 통에서 40여 년을 버텨온 건물이라 세월만큼 낡았다. 더군다나 북향이라 해 드는 시간도 짧아서, 넓은 창을 삼면으로 내었다. 왁자한 시장 통 잡다한 소음과 겨울 외풍을 차단할 목적으로 나는 두툼한 방음커튼을 달아놓고 산다. 그런데 문제는 여름철이다. 상가가 밀집한 곳이라 가게마다 내뿜는 에어컨 열기로 골목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 열기 때문에 지열도 높아져 문을 열지 않고서는 여름을 지낼 수가 없다. 그런데 2층에 사는 우리는 앞 집 건물과 까꿍 할 정도로 가까워서 2,3층 봉제공장 사람들과 뻘줌한 눈 맞춤이 자주 일어난다. 욕실에서 나올 때는 옷매무새에 바짝 신경을 쓰지 않으면 민망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다.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어어머니의 복 타령에도 불구하고 창가에 모시 발이라도 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빛 꼬리가 방을 빠져 나갈 준비를 한다. 마침, 3층에 사시는 시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나는 얼른 커튼을 한쪽으로 몰아두고, 방에서 빠져나가는 햇빛을 쫓아 옥상으로 빨래 널러 갈 채비를 한다.
아기 몸통만 한 빨래 통을 두 손으로 보듬고 비좁은 계단을 오를라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때마다 제발 이사 좀 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같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다.
5층 옥상에 오르는 일이 번거로우나 일단 오르고 나면 하늘이 손에 잡힐 듯 속은 후련해진다. 속살까지 파고드는 바람 맛이 기분을 좋게 한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아예 나 자신을 널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난다.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 박혀든 곤궁한 생각들을 햇볕에 쫙 말리고 싶어서이다. 바람에 몸이 빨려든 날은 마음마저 빨아진 느낌을 가지게 한다.
빨래 줄을 널찍이 차지한 이불 홑청이 바다처럼 출렁거린다. 옷이 날개라면 옥상은 너울너울 식구들이 날갯짓을 응원하는 공간이 된다. 키가 크길 소원하는 아들의 청바지를 쭉쭉 잡아당겨 아빠 옷 옆에 나란히 널어놓는다. 다리가 한층 길어진 아들의 청바지와 남편의 두툼한 스키복이 빨랫줄에 붙들려서 바람에 흔들거린다.
남편의 옷이 허수아비처럼 꼼짝없이 빨랫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난다. 아가리가 큰 집게로 더 꼼짝 못하게 단단히 집어 놓는다. 호주머니마다 바람과 햇볕이 잘 들도록 안을 뒤집어 빼놓고, 모자가 달린 남편의 스키복 머리통을 주물거려 본다. 남편의 뒤통수인 양 모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보기도 한다. 남편의 머리통을 감히 쥐락펴락하면서 맘대로 허물하는 손맛이 꽤 좋다. 바람이 나를 보듬고, 나는 식구들의 허물을 매만지며 햇볕과 바람의 에너지를 허물 안에 재충전하는 중이다.
언제나처럼 방앗간에서 곡물 볶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온다. 때마침 제주 갈치가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다는 뜨내기 생선장수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 입담에 이끌려 골목으로 나가본다. 외침과 달리 생선들은 햇볕에 늘어져 자고 있다. 사모님 기다리다 이제 막 잠들었다는 생선장수의 넉살이 듣기 싫지는 않다. 신선도를 가늠키 위해 눈치껏 속가락으로 녀석들을 눌러보니 그런대로 탱탱하다. 자는 놈 살살 누르라는 생선장수의 구릿빛 얼굴도 목소리도 건강해 보인다.
서둘러 빨래를 걷어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옥상에 있는 허물들에게 불려간다. 후줄근하던 옷에 볕이 드나들며 바람구멍을 숭숭 내어 옷의 결이 성글성글하다. 햇볕을 받아먹은 식구들의 허물들이 짱짱하게 부피를 늘인 것이다. 잘 마른 것들을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오는데, 허수아비 같던 남편의 시키복 팔이 부풀려진 채로 내 코 끝을 치고 간다. 남편의 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빨래 통을 방안에 와르르 쏟아 부으니 옥상에서 담겨온 햇볕이 안방에 뿌려진다. 기장이 늘어난 아들의 청바지에서, 남편의 스키복에서 햇살이 슬렁슬렁 기어 나온다. 수건에서는 샛볕 냄새가 정말로 많이 난다. 까슬까슬한 수건의 촉감이 방에서 말린 것과는 판이하게 뽀송하다. 남편과 딸애는 햇볕 냄새를 유달리 좋아한다. 빨래를 개켜놓는데 딸애가 수건을 한 장 집어가며 한 말씀 날린다.
"맞아, 이 냄새, 바로 이게 엄마 냄새지~~."
가스렌지 위에서 갈치조림 냄비가 보글거리며 뚜껑을 달막거린다. 방에 가득했던 햇볕 냄새를 갈치가 먹어치우는 소리인 것이다. 글세 방안에 갈치조림 냄새가 진동한다. 햇볕담기는 이렇게 나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