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삼국지 [17]
황조가 ③
두 여인을 떼어 놓으니 겉으로 보기엔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화희의 적개심은 절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라비인 화식(禾息)을 불러 치희를 쫓아 버릴 방법을 의논했다.
“얼마 후에 폐하께서 사냥을 떠나실 겁니다. 그때를 틈타 치희의 처소에 사내를 슬쩍 들여보내는 겁니다. 그런 연후에 왕후께서 찾아가 행실을 꾸짖고 떠나라 하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떠날 겁니다.”
간교한 계책에서는 타고난 위인이었다. 화희가 듣기에도 흡족한 계략이었다.
“훌륭한 계교요. 오라버니만 믿겠소.”
며칠 뒤, 유리명왕이 근신을 이끌고 사냥을 떠났다. 왕이 궁을 비우자 화식은 장안의 왈패로 유명한 울묵이라는 사내를 은밀히 불렀다.
“너는 그냥 들어갔다 바로 나오면 된다. 음심을 품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줄 알아라. 그리고 입조심 단단히 해라.” 울목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밤, 울목은 서궁으로 갔다. 담을 넘는데 궁인은 물론 병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순라를 도는 자조차 없었다. 이는 모두 화식이 손을 써 둔 탓이었다. 사내는 거칠 것 없이 치희의 처소로 들어섰다.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놀란 여인이 눈을 떴다.
자신의 앞에 선 괴한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비명에 옆방에서 자고 있던 시녀가 뛰어왔다.
괴한은 그녀를 밀치고 재빨리 달아났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치희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언제 괴한이 또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며칠 뒤였다. 시녀가 들어오더니 화희가 찾아왔다고 알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억지를 쓰려고 찾아왔는지 걱정이 앞섰다.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화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치희는 마지못해 일어나 맞았다.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화희가 잠시 치희를 노려보더니 입을 비죽인다.
“뻔뻔하기도 하지.” 이번에는 또 무슨 트집인가 하여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화희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임금을 모시는 몸이 감히 외간의 사내를 끌어들이다니! 그러고도 이리 당당하단 말이냐! 이건 죽어 마땅한 죄이다.”
치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누명을 씌우십니까?” 화희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사흘 전 폐하가 아닌 사내가 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냐?”
치희는 며칠 전 침입했던 괴한을 떠올렸다.
비록 아무 일도 없었지만 뭐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희가 다그쳤다.
“그걸 부정하지는 못할걸. 버젓이 증인까지 있는데.” 증인이란 말에 치희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시녀뿐이었다. 그녀는 상전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치희는 오히려 담담했다.
“네가 지금 당장 궁을 떠난다면 폐하께 말씀드리지는 않겠다. 그것이 왕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치희는 별말 없이 화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용히 물러나는 게 왕실이 아닌 왕을 위해서 좋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짐을 꾸려 떠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그동안 유리명왕과 함께했던 나날이 주마등처럼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날이 밝았다. 치희는 서둘러 궁을 떠났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유리명왕이 사냥에서 돌아왔다. 왕은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치희를 보기 위해 서궁으로 향했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몇 년 만에 보는 듯 느껴졌다. 서궁에 도착한 왕은 서둘러 치희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시녀를 불렀다.
치희를 배신한 시녀가 나타났다. “치희는 어디에 있느냐?” 국왕의 물음에 시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대답한다.
“떠나셨습니다.” 유리명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딜 갔단 말이냐?”“친정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유리명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유리명왕은 치희를 쫓아 기산으로 달렸다.
도조와 구추가 황급히 왕의 뒤를 따랐다. 왕은 말이 더디 달리는 것 같아 연신 채찍질을 했다.
뒤따르는 신하와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난곡(難谷)에 이르러 치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비 맞은 단풍처럼 쓸쓸해 보였다. 치희를 다시 보게 된 기쁨과 함께 애잔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녀를 부르려 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만 멈추시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치희는 왕의 목소리를 듣고 숨이 멎는 듯했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낭군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됐다. 앞으로 자신으로 인해 왕이 겪게 될 분란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가슴이 찢어지는 쪽이 나았다.
그녀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인 일로 이렇게 쫓아오셨습니까?”
“어찌 날 두고 떠날 수 있소?”“더는 푸대접을 참을 수 없어서요. 궁성에는 소첩의 자리가 없습니다.
” 치희의 태도는 찬 서리처럼 냉랭했다. 마음고생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왕은 매우 미안했다.
“나의 불찰이오. 화희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게 단단히 꾸짖겠소.”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치희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왕은 치희에게 매달리며 애원한다.
“제발 나를 두고 떠나지 마시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치희는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누르며 차갑게 끊어냈다.
“이제는 폐하 옆에 있는 것이 의미 없게 느껴집니다.” 매정한 한마디에 왕은 그녀에게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치희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폐하, 불초한 소첩은 잊으시고 부디 마음을 편안히 하소서.’ 유리명왕은 치희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왕이 한참 멍한 상태로 있는데 귓가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꾀꼬리 한 쌍이 서로 어울려 날며 즐거운 듯 지저귀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암수가 어울린다는 것은 천상(天上)의 축복이었다. 유리명왕은 우두커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 순간 실연의 슬픔이 밀려와 가슴을 할퀴었다.
왕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를 불렀다.
翩翩黃鳥 하늘하늘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외로울사 이 내 몸은
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가리
치희 없이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앞날이 막막했다.
왕이 낙담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신하들이 달려왔다. 치희가 떠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유리명왕이 정청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도조가 달려와서 아뢰었다.
“선비족이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우리 백성을 끌고 갔다 합니다.”
당시 선비족은 요락수(饒樂水) 일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우문부(宇文部)가 요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용맹하여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섬이 없었다.
전발(前髮)을 한 그들이 나타나면 모두가 두려워했다. 선비의 우문부가 주변 부족을 병합해서 큰 세력을 이루더니, 급기야는 고구려의 변경까지 침범해 온 것이었다.
유리명왕은 대책 마련을 위해 신하들과 머리를 맞댔다.
“근래 선비족이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니 나라의 근심이 아닐 수 없다.”
사자(使者) 설지가 아뢰었다.
“선비는 험준한 땅에 살아서 그런지 흉포하고 강맹합니다. 그들과 싸워 봐야 이로울 게 없으니 잘 달래는 게 상책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태사자(太使者) 부분노가 꾸짖는다.
“어찌 그리 나약한 말을 하는가! 겁도 없이 우리 고구려를 공격한 자들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부분노가 왕을 바라보며 역설한다. “선비가 용맹하다고는 하나 지혜가 부족합니다.
힘이 아니라 계략을 쓴다면 굴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어떻게 하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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