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박순백 2004/7/20(화) 08:21 (MSIE6.0,WindowsNT5.1,DigExt) 61.85.89.58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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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어머니 모시기>에 관하여
<잡다한지식2004/06/17 16:57> "
- 몇 년에 메디넷 전자게시판(BBS)에 실린 글을 하나 읽고서 그 글을 쓴 분에게 전자 메일로 답장을 보낸 일이 있다. 글을 쓰신 분은 "윤혁민" 선생님. 60-70년대를 살아온 분이라면 "팔도강산"(八道江山)이니, "꽃동네, 새동네" 등의 KBS TV극을 그 이름과 결부시켜 보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극의 작가이시다. 이젠 환갑을 넘기신 분이다.
윤 선생님은 메디넷 전자게시판의 회원이어서 알게 되었는데, 이분을 자주 뵙지는 못했으나 뵐 때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분이다. 이분이 키워낸 작가 중에는 SBS의 "마지막 승부" 등 몇 개의히트작을 낸 손영목, 김지수 부부 등이 있다.
윤혁민 선생님의 통신 ID는 "두리기." 전래의 우리 나라 협동사회에서 두레 친목 모임이 있는 경우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분이 운영하시던 예촌 글방과 드라마 패밀리의 식구들이 붙여드린 ID로 기억된다. 메디넷 회원들은 이분을 "두목님," 혹은 "대장님"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느 날 이분이 쓰신 글, "홀어머니 모시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일이 있다. 이 답장은 위의 글 "홀어머니 모시기"를 읽어본 후에 읽어야 그 진정한 뜻이 와닿을 것이라 생각한다.
"홀어머니 모시기"에 대한 답장 두리기 님, 오늘 대장님이 모친에 대하여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아니, 읽은 것은 오늘이 아닙니다. 한 사흘전에 읽고 지금까지 손을 못 대고 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손은 대기 시작한 것은 첫날 글을 읽어가면서였지만 그 글은 한 30여 매의 글로 쓰여진 채로 그냥 집에 있는 컴퓨터 안에 저장되어 있고, 오늘 학교에 나온 길에 집에서 쓰여진 것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정리 되는 글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어 페이지 못 읽고 있었던 것을 오늘 아침에 다 읽었던 때문입니다. 그 글들을 인쇄해 두고 있었거든요. 여러 페이지 중 두 페이지를 남기고는 다 읽었었고, 오히려 집사람은 제가 그 걸 읽다가 집에 두고 왔었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다 읽은 것입니다.
집사람의 말. "윤 선생님은 드라마 쓰시느라 고생하실 필요가 없네요. 이 게 드라만데, 그 걸 본인 이름이 주인공의 이름으로 나오면 이상하니까 이름만 바꾼 채로 극화하면 되겠네요." 어버이날 특집극으로 쓰면 좋겠다는 소리였습니다. 또 하나의 팔도강산이 나오는 거죠. 팔도강산 2부가 아니고, 전혀 다른 포맷의 또다른 팔도강산 말씀입니다. 사실 팔도에 퍼져있는 아들, 딸들이 경쟁하듯 효도하는 모습 자체가 극적입니다. 극이란 게 픽션이어야 하는데, 이 건 픽션 같은 사실이 니...... 아니, 어떻게 그런 효도가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아마도 그 글을 극화해서 방영하면 사람들이 끝에 이런 소릴 할겁니다. "여보. 저 거 보구 느껴지는 거 없수?" "그따우 소리하지도 마! 그러잖아도 찔리는 판인데......" "찔리긴 뭘...... 극이니까 저렇지 진짜 저런 사람들이 어디 있겠수?" "허긴 그렇지. 세상에 없는 얘기니까 극이 되지...... 그래도 좀 맘이 편친 않구먼...... 에이, 어서 불끄구 잡시다." 불끄고 자는 일 밖엔 별도리가 없는 게 대부분 아들놈들, 딸년들의 행태일 것입니다. 부모에 대해 죄지은 줄은 알면서도 어째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윤 선생님보다 훨씬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럴 것입니다.
현재 주한 노르웨이 대사로 있는 린드맨 씨의 부인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집 나가 사는 아들이있는데, 이담에 우리가 늙으면 좀 찾아와 주기도 하면 좋으련만...... 그래도 우리와 20년을 함께 살다가 나갔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요?" 영 미덥지 않아서 남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가 제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건 참으로 비참한 증언이었습니다. 아들이니 아무리 세태가 이래도 이담에 부모를 찾아오지 않겠느냐는 것이 아니라, "20년을 함께 살았으니" 이 담에 자신들이 늙으면 좀 찾아와 주기도 하면 좋겠다는 바램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부모는 장남이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을 만나 얘기하다보면 그들은 대부분 처음엔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우리의 전통에 대해 이상하게, 혹은 희한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들과 문화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연세가 지긋한 분들을 만나보면 다릅니다. 처음엔 그 전통을 희한스레 생각하다가 금방 우릴 부러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하는 태도를 보면서 '사람 사는 건 다 같구나.'하고 당연한 일을 전혀 당연치 않은 일을 겪는 것처럼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피어슨이란 마이애미대학의 총장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80노모는 아들이 멀쩡히 살아있고, 대학의 운영자로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데도 아들이 주선한 양로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아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어머니를 뵈러 가는 게 아니라, 그 노모가 버스를 타고 아들의 집을 찾습니다. 그런 얘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 그 대학 총장을 보면서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엉뚱한 자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 한국에 태어난 것이 그래서 자랑스럽습니다. 한 땐 영 그렇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내 늙어 꼬부라졌을 때 내가 공들여 키운 놈들이 날 양놈들 제 애비, 에미 대하듯 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조국에 충성을 맹세하곤 합니다.
잘하려해도 부모가 가신 뒤일 것임을 가르쳐 주는 한시의 내용에 감탄하면서도,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고 있는 놈이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칠순을 넘긴 아버님. 일흔 셋이십니다. 어머님은 이제 일흔이 되셨습니다. '내 저분들을 10년 후에도 뵈올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감추려 뒤를 돌아선 적도 있지만...... 생각 뿐. 전 아직도 집을 나와 따로 사는 장남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새끼들 끌고 찾아가 뵈리라.' 몇 번 그렇게 하다가 해가 가니 일이 있어 그리 못하고, 때론 귀찮아 그리 못하고...... '일은 무슨 일? 어머니 위해 그분 모시고 집 나와 둘이 산 분도 있는데?'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가끔 윤 선생님처럼 효도하는 낡아빠진(?) 관념에 충일한 분을 뵈면, 마음이 찔려서 그 주일엔 조그만 효도의 방안을 생각해 냅니다. 실천도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서 " “엄마. 제가 오늘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참 난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 어떻게 표현해야할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부모를 참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활 했죠." 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냐? 그 소리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 하시며, 잘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먼데 계시지도 않지요. 제가 이문동에 살고, 어머닌 천호동에 사시니 길도 멀잖은 40분 거립니다. 동생이 모시고 사니 외롭지 않으시리라 자위하면서 학교 다니기 불편하답시고 이곳에 나와 삽니다. '부몬 큰놈이 모셔야지.' 가끔 이렇게 생각하면, 그 게 괴로워할 정도는 아니지 만, 약간의 가책은 항상 느끼며 살게 됩니다. 그 게 벌써 여러 햅니다. '언젠간 내가 집에 들어가 그분들을 모시고 살리라.' 그런 생각으로, 단지 생각만으로 이제까지 살고 있지요. '이러다간 부모 돌아가시고서 후회한다.'는 생각이 언뜻 들어서 구체적으로 들어갈 살길을 모색해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사정, 저런 사정 따지다 보니 결론은 '아직 힘들다.'로 나는 것이었습니다. '애들 학군이 다르니 이사가도 여기 학교에 다녀야 하잖나?' '바쁜 일이 많은 내가 걸어서 9분이면 나갈 수 있는 학교를, 그 지옥 같은 천호동에서 이문동까지 시간 반씩이나 걸려 오가야 하다니???' 등등. 그런 핑계들이 집에 들어가 살겠다는 생각을 천천히 눌러오다가, 완전히 짓누르지요. 결국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윤 선생님, 두리기 님, 대장님, 우리 두목님이 모친께 보이는 말도 안되는(?) 정성과 효도를 알게 되면 기가 죽는 겁니다.(위의 "말도 안되는"이란 표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의 의미입니다. - 필자 주.) '얌마, 저런 분도 있는데?' 자신을 질책합니다. 하지만 그런 질책 자체에 길들여지기를 수십 번. 포기한 듯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가끔 정신 나간 분들 - 정말 효도에 정신이 나가서 모든 거 다 포기하고 사는 분들 -의 얘길 듣고 나면 후딱 정신이 들어서 며칠간 행동으로 효도하다가 다시 잊어버리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 장남이고 차남이고 부모 모시기 싫어하는 걸 알고, 또 추세가 계속 그렇게 되어 가는 걸 보면서, 전 제 아들놈이 이담에 저와 함께 살아줬음하는 꿈을 꿉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이지요. '에이, 미친 자식아. 꿈 깨라!' 자신에게 질책하면서 혼자 낯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불효하는 애비를 보면서 큰애가 어떻게 효자가 되겠습니까?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것이 있습니다. 조카 녀석과 아들 놈 현근이가 논쟁이 붙었습니다. 형인 조카 녀석이 "우리 할머니야."하면 현근이란 놈이 질세라 "우리 할머니야." 합니다. 그 둘의 씨잘 데 없는 논쟁을 지켜보던 제 딸이 그래도 제일 큰애랍시고 가소로운 듯이 말합니다. "할머닌 우리 모두의 할머니야."라고 말함으로써 그 논쟁을 종식시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일 어린 조카 애, 그 앙증맞은 여자애가 한 마디를 해서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고, 파토를 칩니다. "우리 할머니야. 우리하고 사니까......" 아이들의 있음직한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전 완전히 그 어린 조카의 한 마디에 찬물을 뒤집어 쓴 꼴이 되고 맙니다. 그 때 옆에 있는 애비가 응원을 해줬으면 하는 눈초리로 제 아들놈이 절 올려다봤습니다. 전 그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아픔을 느끼며 가만히, 짐짓 모른 체 서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뜹니다. 지금 이 기회에 심지어는 집사람에게조차 고백하지 못한 소릴 하는 겁니다. 그 이후 제 아들놈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 다. 저 놈(애비)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응원을 청할 일조차 만들지 않는 겁니다. 작은조카의 그 말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그런 쓸 데 없는 논쟁 꺼릴 만들지도 않으며, 현명하게 크고 있는 겁니다.
"홀어머니 모시기"에 관해서 - 2
부모를 모시고 사는 동생에게도 전 별로 할 말이 없는 놈입니다. 제수씨께야 더 더욱 그렇고요. 동생. 도예하는 놈. 예술이란 게 뭔지 그 올가미에 씌우니 예술아니면 용납을 안한다면서 작품 만들어 장사조차 않고 사는 놈. 그래서 제 힘만으론 생각도 못할 부를 누리고 사는 놈. 부자인 부모를 등쳐먹고 살고 있는 놈. '임마. 너 이 시키. 내 덕에 잘 살고 있는 줄 알어 임마. 내가 장남인데 내가 집에 들어앉아 살면 넌 마 국물도 없어, 이 시키야. 난 마 수도세, 전기세 다 내가 벌어서 내고 있어 짜샤. 우린 시캬 여기만(천호동) 오면 좋은 음식 포식하는 기분으로 먹고 가는 거 알기 나 하냐 마? 너 하여간 내 덕에, 시키야, 잘 살고 있는 줄 알어야 돼. 이 시키." 죄 없는 동생을 가끔 머릿속에서만 욱박지르며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하는 속물로서 삽니다. '우리 윤 두목님의 형제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나 효성스러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평범한 인간은 생각을 돌립니다. '혹시 윤 두목 이 대목에서 사기친 거 아냐?' 이렇게 막갑니다. 그러다가 '평소 행동거지로 봐선 사기칠 거 같지 않은데, 이 거 그럼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다시 이성을 찾으며, 그 원인을 규명해 갑니다. 결론은 역시 두목님의 리더쉽에 있다는 걸 글 속에서 찾아냅니다. 무시무시하게 겁나는 형, 여차 하면 무섭게 호통을 치는 오빠에게 질려서 동생들이 미리미리 알아서 잘하는 거, 잘해온 거라는걸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 게 생활화되었고, 이젠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그렇게 두목님에 의해 길들여진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오질 않습니다. 호통치는 장남을 둔 집안이 한둘이 아닌데 그 집안들 중에서 잘 나가는 집안은 한 집구석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두목님의 집안이 가진 특성은 두목님의 그 무엇에 있다는 결론에 달하게 됩니다. '뭘까?' 솔선수범. 흔히 말하는 그 거라고 생각됩니다. 말로만 쉬운 그 일.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실시!"를 은근히 강압하시니...... '어차피 챙길 일, 먼저 해치우자.'고 형제들이 달려드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결론을 몰아가려는 제 무지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추리엔 한계가 있습니다. 동생들은 그렇다 치고, 제수님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부분들은 그런 식으로는 해결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거기선 손을 듭니다. 자발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그런 효성들. 원미경, 남일우씨가 출연한 극에서조차 그려내지 못한 다른 부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와, 자발적인 효성이란 게 존재하는구만?' 놀라워하며...... 그런 걸 극작가의 가정에 서 엿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극적입니다. "드라마 패밀리." 남의 이름이 아닌, 두목님의 가족이 바로 그것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두목님의 가족들은 효에 관한 아주 멋진 극을 하나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
- 내가 보낸 답장은 위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그글을 읽고 답장을 쓴 것이 91년이 아닌가 싶다. (혹은 92년일 수도 있다.) 그분이 환갑기념 문집을 만들면서 필요한 글이 있다고 내게 글 하나를 찾아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감상을 적어서 메디넷에 올린 것이었다. 나중에 메디넷의 그 글이 안 보여서 내게 혹시 그 백업본이 있느냐고 연락을 해오셨던 것이다. 그래서 쓴 것이 아래의 답장이고, 또 거기에 포함시킨 "윤혁민 선생님에 대한 인상"이다.
두리기 님, 이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지난번에 "청년 두리기"를 찾아 곧 보내겠다고 말씀만 드려놓고는 그 간 잊고 있었습니다. 잊은 이유는 제가 이곳 메디넷 전자게시판에 자주 들어오지 못한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레오 님의 글, 민선 님의 글을 읽고 답장을 보내다가 문득 '두리기!!!' 하고 외치며, 제가 뭘 실수하고 있는가를 깨달은 것입니다.(Hi) 그래서 당장 접속을 끊고 나와서 두리기란 파일을 찾았습니다. '혹시나 그 글을 지웠으면 어쩌나???' 이런 불안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ff(File Find) 프로그램으로 dooriki란 파일을 찾으니 하드 디스크에 그런 파일이 있더군요. '아이고 다행이다. 이 거 없었으면 난 완전히 실없는 놈 될지도 몰랐는데.....' 생각하면서 그 파일을 읽어들였지요. 왠 걸요? 그 파일은 dooriki란 이름을 가진 것이었지만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두리기 님이 주신 포도주를 스키 모임에서 마신 얘기였습니다. 정말 아찔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걸, 그 "청년 두리기"란 내용의 글을 지운 기억은 없었습니다. 괜히 지우기 아까워 잘 두었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3.5인치 파일 중 essay란 레이블이 붙은 것에 dooriki란 것이 있었습니다. '에그, 이름이 같은 것이니 아까 그 거로구나!' 생각하고 파일의 크기를 보니 이건 짧았습니다. 뒤져보니 바로 두리기 청년에 관한 글.(Hi)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킬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내용을 다시 읽어보니 제가 처음에 드렸던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보내 드리고 나서 글을 좀 더 마음에 들게 손질한 것 같았습니다(저는 글을 한 번 쓰고 나서도, 나중에 그 글을 열 심히 고쳐댑니다). 하여간 아래의 글을...... 보내드립니다.('휴우우..... 다행일세!!!')
박순백, 1993. 1. 곳 : 메디넷(MediNet) 보내는 이 : Spark 이름 : 박순백 받는 이 : 두리기 공개 편지번호 : 3885/3885 보낸 날짜 : 1991/11/25 보낸 시각 : 10:22:05 안 읽었음
제목 : 청년 두리기 쪽 번호: 1/4
청년 두리기 - 극작가 윤혁민 선생님을 처음 뵙고 -
난 노인넨줄 알고 나갔다가 정말 실망했다 배만 좀 나온 청년이 나와 술마시고 춤추고 화통하게 웃어 제끼며 여러 사람 기를 죽였다 '나 늙어 저럴 수 있겠나?' '나 이 담에도 저리 젊을 수 있겠나?' 한탄만 저절로 나오고......
그 젊어 죽은 김치(kimch)의 동창이란다 그럴 법도 했다 그 젊은 김치 사는 모양이 같아 생각하는 게 같아 내 친구였던 김치 그의 친구 두리기 그 두 젊은이로 하여 나나 다른 이들 마음이 폭삭 늙어버린 우리 젊은 애들은 주눅드는 밤이었다 거지는 김치의 아들과 통화한 눈물나는 두리기의 글을 갖고 다닌다
'글쟁이가 달래 글쟁이냐?'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감탄하며...... 그와 함께 사는 총통 목요일 클 악마 모두는 행복하다 생각한다
술 좀 먹을 줄 알면 그와 친구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까운 맥주 그냥 두고 향기로운 포도주 월요일 아침이 무서워 몇 모금 홀짝대고 목수, 거지, 니기, 스위티, 마누라, 내 새끼와 함께 내 집에 와 좀 떠들었다
주제는 두리기 예촌 글방 두목에 관한 얘기들 하고많은 술값이며, 밥값이며 술췐 길에 "내가 냈노라! 허풍치고 돌아가 오늘 아침 배아플 그를 생각하며...... 음주운전 못된 버릇 다행히 친구 따라가잖고 예촌에 무사히 돌아가 드라마 패밀리가 아닌 실로 드라마틱한 가족들 점잖은 총통에 춤잘추는 화려한 목요일에 귀여운 작은 악마와 함께 키보드를 두드리리라 생각했다
밀린 글쓰느라 머리 빠지고 배가 나오고 시집갈 새가 없는, 그들 그 두목과 귀여운 졸개들 '팩스 고장났으면 어쩌나?' 횡설수설 내갈겨 써 보낸다해도 걱정인....... 목요일이 술김에 쓴 원고 그래도 못 보내 펑크날까 걱정하는 예촌 일가의 한 사람이 되어 난 옹기쟁이 동생에게 전화 걸 생각을 한다 그 옹기쟁이 놈도 곧 "드라마 패밀리"의 일원. 두리기 -- 배만 좀 나온 아직 새 파란 우리 또래 모두들 그를 일컬어 "예촌사는 청년" -----
- 아래는 위의 글의 일부에 붙였던 주(註)인데, 원래 주를 붙였던 곳은 텍스트로 변환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래의 주들은 위의 글의 어느 부분에 있는 내용과 일치할 것이다. 1. 인하대 김충회 교수의 BBS ID: "김치"(국문학자로서는 매우 어울리는 ID.) 2. [소프트월드] 지 김영인 편집장(현 한컴프레스 대표이사)의 ID.: 거지 3. 나중에 김지수 씨의 부군이 된 극작가 손영목 씨의 ID: 총통. 4. 김지수 씨의 ID: 목요일 5. 드라마 패밀리의 일원: "작은악마"란 ID 6. 모두 메디넷의 사람들의 ID 7. 드라마 패밀리의 예전 이름: "예촌 글방" 8. 수십 명의 메디넷 회원들이 모인 그날 모임의 모든 비용을 두리기 님이 내셨으니... 9. 김충회 교수 10. 두리기 님은 메디넷 모임을 마친 날, 음주 운전. 11. 모임 다음 날 원고를 방송국에 팩스로 보낸다셨기에... 12. 옹기쟁이: 도예가 도정 박순관
한밭골: 감동있게 읽었읍니다. 리더쉽,자발적인 효성, 모두 맞읍니다.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장남으로서 아우들에게 제수씨들에게 보내는 사심없는 따뜻한 정의 산물이 아닐까요? 전 다섯째입니다. --[07/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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