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중구 신당동의 유래
시구문 밖 무당들의 터
1751년(영조 27)에 반포된 수성守城책자『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豆毛坊신당리계神堂里契무당골로 성저십리에 속했다가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1914년 4월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신당리新堂里로 관할이 바뀌었고 이때부터 ,神귀신신'자가,新새신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신당동은 타워호텔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기 전 버티고갯길 쪽에 해당하는데 이곳에는 광희문光熙門이 있다.
1456년(세조 2) 세워진 남소문南小門을 풍수가들이 대궐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관계로 왕궁의 황천문黃泉門이 되어 불길하다고 상주하자 이를 1469년(예종 1)에 폐쇄하였다가 1719년(숙종 45) 남쪽의 소문을 아예 없앨 수 없다 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원래의 광희문 현판을 그곳에 걸었다 한다.
이 문은 지금의 응봉 뒷산 기슭에 1426년(세종 8) 집현전 학사들을 위하여 사가독서 하던 독서당 선비들의 출입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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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신당동에 있는 남소문터
한편 도성 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오직 두 문을 통하여 시신이 운구되었는데 바로 광희문, 일명 시구문屍口門과 남문·서문 사이에 있던 서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구문 밖 주변 일대에는 많은 무당들이 살았고 신당神堂, 당집, 무당골, 무원巫院, 수당水唐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남산 기슭의 약수골에서 발원하여 이 동네 한 가운데를 지나 청계천清溪川본류에 합류하고 있는 개천을 무당개울(무당천巫堂川)로, 이 개울 곳곳에 놓인 다리 역시 무당다리(무당교巫堂橋)로 불렀다.
무당다리를 한자로 수당교水唐橋라고도 했는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무당이라는 말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巫무당 무자를 '물수水,자로, '집 당堂,자 대신 ,唐당나라당자를 써 무관한 척 부르기도 하였다. 신당리神堂里라는 지명은 고지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마을 인근에는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기 마련으로 특히 일제는 전용 화장장까지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광희문을 나와 성 밖을 나서면 차현車峴, 살곶이다리, 뚝섬을 거쳐 광주, 용인과 충주를 잇는 남행길의 유일한 교통로로 큰몫을 담당했던 길가에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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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신당동에 있는 광희문
지금의 신당동 236번지 일대에 해당하는데 도성 안에서 발생한 돌림병이나 피부 질환자들을 구호해 준 곳이었다. 이곳은 1392년(태조 1)에는 대비원大悲院으로, 1414년(태종 14)에는 활인원活人院으로, 1466년(세조 12)에는 활인서活人署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임진왜란 때 폐지된 후 1611년(광해 4)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에 혜민서惠民署에 통합된 후로 서양 선교사에 의해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는데, 오늘날 대한적십자병원의 전신이다.
또한 약수동과 이어진 부근에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버티 고개라 하였다. 조선 중기 한때는 도성 서쪽의 무악재, 남쪽의 남태령 못지않게 고개가 높고 험해서 낮에도 고개를 넘는 행인들 앞에 도적들이 출몰하여 피해를 주므로, 포졸들이 순찰하면서 "번도, 번도" 외치면서 도적들을 쫓았다고 하여 번티, 버티, 부어치扶於峙등으로 와전되어 지어진 고개라는 설이 전해진다.
오늘날 전혀 사용되지 않는 동명으로 옛 신당리 내에 광복 후 잠시 부르던 청구동靑丘洞이 있다. 광복 후의 신당동은 황학동黃鶴洞을 비롯하여, 동·서·남북중무학동舞鶴洞과 앵두언덕마을(앵구동櫻丘洞) 5개 동이 주축을 이루어 13개 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49년 이후 앵구동을 없애면서 청구동으로 불렀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13호 "동장정원 및 명칭과 관할구역 변경 조례에 근거하여 신당4동으로 바뀌면서 21년간 사용된 청구동은 역사 속에 사라진 지명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곳에는 청구초등학교가 있어 옛 지명을 상기시키고 있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