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신영복 선생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따온 ‘더불어 숲’이란 말은 많은 곳에서 사용한다. 울산 동구에도 ‘더불어숲'이란 간판을 단 공간이 있다. ‘삶을 나누는 공간, 더불어 숲’은 과연 무엇일까.
29일 오전 울산 동구 대송시장 건너편 ‘더불어숲’을 찾아 노옥희 대표를 만났다. 문의 070-7793-6053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을 나눈다
6번 진행한 부모학교가 새끼 친 자생 동아리
청소년 인문학 교실에선 독서토론과 역사기행
주부.학생 넘어 일하는 사람의 발길 잡을 고민
노 대표는 원래 교사였다. 현대공고에서 79년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다 86년 ‘교육민주화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이후 전교조, 민주노총 등에서 활동하다 2006년 울산시장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생활과 동떨어지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 운동은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 돈에 덜 얽매이고 서로 나누며 더불어 소박하게 함께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뜻 맞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억 정도를 마련해 장소를 빌리고, 예쁘게 꾸몄다. 그렇게 2009년 4월 3일 ‘더불어숲’이 문을 열었다.
‘더불어숲’에선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한다. 숲을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은 주부들이다. 주부들을 더불어 숲에 오게 만든 일등공신은 ‘부모학교’다. 부모학교는 현재 6기까지 진행됐다. 자녀와 관계, 교육문제 등을 고민하는 부모들이 모여 함께 강의도 듣고 고민도 나눈다. 부모학교는 더불어 숲을 유지하는 튼튼한 기둥이다.
부모학교를 마친 엄마들은 관심사에 따라 각종 동아리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더불어숲의 자원활동가로 성장했다. 막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육아 모임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조금 더 큰 아이를 둔 엄마들은 보육, 교육에 관한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한 민들레 모임을 만들었다. 사교육 없이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엄마표 영어’ 모임, 아이들 동화책을 함께 읽는 ‘책 나들이’ 모임도 있다.
성인 대상 프로그램은 부모학교 외에도 많다. 어른 인문학교실, ‘책에서 길을 찾다’는 독서치료모임이다. 노자·장자 읽기 모임도 있다. 동구청 지원으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한다.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은 인문학 아카데미 ‘날개’가 있다. ‘날개’는 인기가 매우 높다. 1달에 2번씩 모여 1년 동안이나 하는 프로그램인데도 늘 신청자가 넘친다. 한 반에 10명 이내로 중학생 2반, 고등학생 2반, 총 4반을 모집한다. ‘날개’는 역사, 철학 등 주제별로 책 읽고 토론한다. 말 한 마디도 못 하던 아이들이 몇 달 지나면 자신의 생각을 술술 이야기한다. 역사책을 함께 읽고 역사기행을 다녀온 후로 아이들이 직접 역사기행을 기획하는 팀도 만들었다. 어린이 대상 고전 강좌도 있다. 사자소학을 따라 읽고 외운다. 12월부터는 한시 강좌도 시작한다.
그래도 더불어 숲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더불어 숲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프로그램은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월례강좌’다. 더불어 숲이 문을 연 뒤 3년 넘게 거의 빠짐없이 꾸준히 해왔다. 강의 때마다 오는 열혈 팬도 있다. 3년간 하다 보니 주제잡고 강사섭외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요새는 독서 모임이나 인문학 모임에서 읽은 책의 저자를 모신다. 책 읽고 이야기 듣는 거라 호응도 전보다 더 좋다. 얼마 전엔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인 전희식 씨를 모시고 강연했다. 강연 중에 울산에만 귀농학교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귀농학교를 열어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더불어 숲의 인력과 재정으로는 무리라 접었다. 대신 ‘도시농부학교’를 열기로 했다. 일단 올해는 울산환경운동연합에서 분양하는 텃밭을 빌려서 시험 삼아 농사를 지었다. 내년엔 땅을 50평 정도 무료로 빌려줄 분이 있어 ‘공동경작’을 한다. 밭을 잘게 쪼개 분양해 가족별로 자기 농사만 짓는 것보다는 함께 농사짓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더불어 숲이 문을 연지 3년 반,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아직도 함께 하고픈 사람, 함께 나누고픈 일이 많다.
주부, 어린이, 청소년의 참여는 높지만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더불어 숲 바로 앞 시장과 상가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더불어 숲을 잘 찾지 않는다. 일 때문에 여유가 없는 탓도 있지만 더불어 숲의 문턱이 높게 느껴지기 때문일 게다.
지역주민, 노동자들과 함께 할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머리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한 분야에서 오래 일 한 사람을 모시고 노하우를 배우는 거다. 예를 들면 세탁소 주인을 초대해서 다림질 잘 하는 법을 배우는 거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노동현장과 삶의 현장을 잇는 역할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송전탑에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가 응원하는 것 등이다.
‘더불어 숲’에서 사람들은 밥도 먹고, 책도 읽고, 함께 농사도 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울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도 한다. 그 많은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삶을 더불어 나누기 위해서다. ‘삶을 나누는 공간, 더불어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불어 살며 나누는 울창한 숲이 되기 위해 오늘도 더불어 숲의 나무들은 자라고 있다.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더불어숲 <육아모임>
지난 29일 목요일 오전 10시. ‘더불어 숲’의 문을 열었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한가운데 아기를 안거나 업은 젊은 엄마들이 몇 명은 자리에 앉은 채로, 몇 명은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서성이며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잠시 지켜보니 육아 문제를 다룬 방송 다큐멘터리다. 그녀들 곁에서 오늘 만나기로 한 노옥희 더불어숲 대표도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 엄마가 사람들과 함께 마실 차를 준비하러 주방에 간 사이 울음이 터진 아이를 달래고 있는 거라고 했다.
다큐멘터리를 다 본 후 그녀들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들은 더불어 숲 부모학교 6기 수료생들이다. 신기하게도 부모학교가 거듭될수록 참가자들의 연령대가 낮아져 이번 부모학교 신청자들은 다들 막 아이를 낳은 엄마들이었다.
노 대표는 “우리 때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아이 키우기 어렵다고 느꼈는데 요새는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들은 각자 힘든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첫 아이를 낳은 엄마는 낯설고 어설픈 육아의 어려움을, 둘째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아이 둘 키우는 어려움을 얘기한다. 한 엄마가 친정 엄마에게서 받았던 상처, 그 상처를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얘기하며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다른 엄마가 “그래도 우리 잘 살고 있잖아”라고 말하자 다들 그 말에 “맞아, 맞아” 맞장구치며 환하다.
그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둔 ‘선배 엄마’다. 그녀는 어제 김장했다며 김치를 가지고 왔다. 잠시 들렀다던 그녀도 옆에 앉는다.
더불어 숲 부모학교와 육아 모임이 좋은 이유를 묻자 한 엄마가 옆 자리 ‘선배 엄마’의 팔을 잡으며 “먼저 애기 키운 언니들 얘기 들을 수 있어 좋아요”라고 답한다. 어떤 엄마는 “혼자 집에 있으면 우울증 걸릴 것 같은데 나와서 수다 떠니 좋아요”라고 말한다. 다른 엄마가 “난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하며 웃는다.
가사와 육아를 잘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 다이어트, 아이 옷 이야기까지 그녀들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진다.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그것이야말로 ‘더불어 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