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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31:1-31) 0.03초 만에 범에게 물려 잡혀간다.
1. 르무엘 왕이 말씀한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2.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3.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4.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5.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7.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오늘 말씀중심으로 <0.03초 만에 범에게 물려 잡혀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0.03초 만에 범에게 물려 잡혀간다.’
이 제목은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는 속담을 염두에 두고 패러디해서 정해 본 제목입니다. 왜 0.03초 만에 범에게 물려 잡혀간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미국에 James Vicary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1957년에 뉴저지에 있는 Ft. Lee극장에서 한 가지 실험을 하게 됩니다. "잠재의식의 광고효과"를 실험을 하는 거예요.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을 하면서 그 사이에 팝콘 선전과(HUNGRY? EAT POPCORN. 이라는 문구가 들어 간 필름) 또 코카선전(Drink Coke). 코카콜라 선전 0.03초짜리들, 필름들이 영사기에서 돌아갈 때 0.03초 동안 영사되어지는 분량의 광고를 여러 번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0.03초 동안에 잠깐 보였다가 잠깐도 아니지요? 잠잠깐 보였다가 없어지는 것을 사람들이 전혀 의식을 못합니다. 그냥 영화필름이 이어지는 것으로 알고 코카콜라 선전과 이 팝콘 선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영화만 보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영화를 반복해서 0.03초짜리 광고를 집어넣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영화 한편을 다 보고 났을 때 그 이전 보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팝콘을 사먹는데 팝콘을 사먹는 판매량이 58%가 늘었다는 겁니다. 코카콜라는 18%가 늘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도 도대체 잠재의식의 광고라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Vicary라고 하는 분이 이외도 눈 깜빡거림을 측정해서 백화점에 들어오는 여자 분들의 심리상태를 규명해 낸 것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물건을 보면 황홀경에 빠진다고 합니다. 황홀경에 빠졌을 때의 눈 깜빡거림의 숫자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하여간 이런 실험을 했는데 0.03초 만에도 전혀 나는 의식적으로 ‘아! 코카콜라 선전하는구나. 팝콘 선전하는구나.’라는 것을 모르는데도 우리의 마음이 그 선전에 반응하고 그 광고에 사로잡혀 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하는데 생명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게 뭡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목표가 있다면 어떻게 하던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늘나라 가기 이전에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켜내야만 하나님이 만나지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만나지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뻐집니다. 행복해 집니다. 그게 안 되면 어떤 것이 주어져도 이 세상 상황이 어떻게 주어져도 참 기분이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게 돼 있어요. 기분이 좋아도 잠깐 뿐이요. 다시 이 삶에 지쳐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지켜내야 하는데 이 마음은 이 세상에 보이고 들리는 가지가지 사람과 일과 사건과 이야기들에 마음이 노출되어 있고 0.03초 만에도 내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마음은 범에게 물려 잡혀가듯이 이 세상 것에 잡혀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에 물리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라고 합니다.
마귀가 달리 있습니까? 내 마음이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태가 안 되는 것,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이 바로 우는 사자에게 먹히는 것이지요. 우는 사자에게 먹히는 겁니다. 이 마음을 지켜내야 하나님을 만나지요.
오늘 잠언이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31장 마지막 장입니다. 이 마지막 장에서 해주는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르무엘이 나오는데 이방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방의 경건한 왕, 그리고 솔로몬의 별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솔로몬의 별명은 아닌 것 같고 단지 추정할 뿐입니다. 이방의 어떤 경건한 왕이 아니겠나하는.
'르무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에게 속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르무엘은 이방의 어떤 왕을 가리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자 전체를 향하여 잠언을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훈계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에 주는 훈계가 1-9절까지 무엇입니까?
바로 0.03초 만에도 반응하며 붙잡혀 사로잡혀갈 수 있는 범의 아가리에 물려서 끌려갈 수 있는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속한 자, 르무엘들에게. 르무엘이 왕입니다.
왕이 잠언에서 지혜와 연관해서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왕은 이 땅에서 귀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왕이 들어야 될 만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들어야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들을 만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들어야만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은 결정의 첫 번째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참고로 듣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갈 때에 우리는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왕 같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내가 행동해야 될 것에 대한 지침을 줄 분이 안 계세요.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들으려면 마음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특징은 마음을 지켜내는 겁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물려서 잡혀가면 안돼요. 그런데 끊임없이 0.03초 만에도 잡혀 끌려갈 수밖에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뭐예요? 혹시 물려가게 되더라도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범에게 물려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어떤 범에게 물려갑니까?
오늘 르무엘의 어머니가 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의 마음을 0.03초 만에 물어서 잡아 끌어가는 이 세상의 호랑이들을 세 종류로 나누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여자요. 두 번째 왕에게 있어서 정복입니다. 정복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먹게 되는 것,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포도주를 이야기 합니다.
“여자에게 마음을 쓰지 마라. 왕들을 물리치려고 애쓰지 마라. 포도주를 즐겨하지 마라.”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범주는 대표적인 호랑이의 종류를 말합니다.
여자는 남자인 르무엘에게 있어서 인간관계의 대표가 바로 여자 아닙니까? 아담에게 하와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기 전에 제일 먼저 여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창세기에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관계를 총 망라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이빨과 힘을 가지고 0.03초 만에 물어서 잡아가는 것이 내 마음을 뺏어 가는 사람인 것이에요. 여자라고 대표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물고 잡아가는 것은 누구였습니까?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자니까.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삭을 바쳐버립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는 가장 무서운 호랑이였던 모양입니다. 형제, 자매, 부모, 모든 자들.
그리고 다윗에게는 누굽니까? 밧세바요. 압살롬입니다. 진짜 여자 밧세바요. 그리고 압살롬. 내 아들 압살롬아! 이스라엘 온 나라 안에 압살롬처럼 잘 생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이 사로잡히지요? 그의 탁월한 능력이 있는 아들입니다. 결국은 그 아들이 처참하게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게 바로 범들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 마음을 뺏어 가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범은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자들, 다윗의 눈에 이쁘게 보였던 밧세바로 밖에는 범은 나타나지 않을 까요? 아니요. 내가 미워하는 자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내가 원수로 생각해서 그를 생각하며 밤새 원한의 이빨을 갈고 있는 그런 사람도 내 마음을 잡아가는 호랑이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들어야 되니까. 하나님께 듣는 마음이 바로 지혜입니다. 잠언의 전체 주제인 지혜가 바로 하나님께 듣는 마음입니다. 레브 소메아, 듣는 마음.
자, 두 번째 호랑이가 어떤 종류의 호랑이요? 정복, 성취의 호랑이입니다. 성취에 마음이 사로잡혀 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년에는 승진하고 내가 내년에는 입학하고 내가 내년에는 일류대학에 합격하고 요번 2.4분기에는 어떻게 판매량을 늘리고 등등의 이런 성취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 성취에 사로잡히는 게 하나님을 못 만날 만큼 마음을 물고 잡혀 가도록 하는 것이에요. 성취에 사로잡히는 자체가 물리는 겁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고 있는 것을 이것을 빨리 알자는 겁니다.
‘아, 내가 지금 승진하고 싶어 몸살이 났구나. 내가 지금 내 아들을 서울대에 들어가게 하려고 안달이 났구나. 내 아들놈도 서울대에 들어가려고 이를 갈며 애를 빡빡 쓰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는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이 먼저예요. 하나님이 그 아이의 마음과 만나져야 진학이라고 하는 문제가 그 아이의 인생에 행복으로 정해놓은 가나안복지를 향하여 그 진학의 문제가 결정되고 해결되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나안복지, 복된 땅과 복된 삶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 우선 우리가 할 것은 어느 대학에 마음을 뺏기고 어떤 성취에 마음을 뺏기고 어떤 판매량에 마음을 뺏기고 징기스칸처럼 정복사업,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처럼 그런 정복사업에 마음을 뺏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것에 붙잡혀 있는 것을 모른다면 그냥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호랑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서울대 들어갔다고 합시다. 서울대, 서울대 ,서울대에 마음이 붙잡혀 있다면 서울대 때문에 꼬일 겁니다. 아마 서울대 졸업장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간다면? 그냥 하나님께 마음을 붙였더니 공부하는 마음을 주셔서 공부하게 해서 서울대 들어갔다. 그래야 복이지요. 아이에게 공부하는 마음보다 다른 것을 하도록 마음을 허락하시면 그대로 가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은 대학을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우리 아이가 사회인으로서 정상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이상 바라지 말고.
어느 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그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서 어느 정도 공부하고 어느 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고요.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까 대한민국 학교를 다니면서 고등학교까지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한다는 정도의 바람으로 끝내자고요.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세 번째 포도주가 뭡니까? 여자라는 존재로 대표되는 사람관계의 호랑이가 있습니다. 또 정복으로 대표되는 성취라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잡아가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로 대표되는 기호, 골프에 미쳐버립니다. 자동차 돈 좀 있는 남자들, 여유 있는 남자 분들 자동차에 미쳐버립니다. 새 차를 사서 다 뜯어 고치고 튜닝이라고 하지요? 난리가 납니다. 바퀴도 다 바꿔버리고 외관도 다 바꾸고 그리고 고속도로 몰고 나가서 200km로 달려버립니다. 그리고 또 뭐가 안 맞는다고 또 다르게 바꾸어 보고, 또 스포츠, 운동중독도 있지요. 등산, 낚시, 술, 여자들 계모임, 모여서 맛있는 것 먹는 날, 쇼핑, 영화감상, 이런 것들 다 0.03초 만에 우리 마음을 잡아가는 호랑이입니다. 물렸습니다.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땅위에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식이든지 이렇게 마음이 끌려 버리면 삶은 이제 꼬이기 시작합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 말이 아주 진리에요. 물릴 수밖에 없을 만큼 마음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보이고 들리는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가족이라든지, 배우자, 자식에 마음이 끌려가고 잡혀갈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알아야지요. 알고 끊어내야 돼요. 이게 바로 십자가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잡혀가는 겁니다. 0.03초만 우리 마음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놔도 우리는 잡혀가게 돼 있어요. 잡혀가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텐데. 우리가 하도 악하니까, 그럴 때 정신 차려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내가 잡혀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고 매사에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는 죽었다.’라고 인정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잠언의 마지막에 10-31절까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숙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로 지혜에 관해 위대한 책인 잠언이 끝이 납니다.
현숙한 여인이 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현숙한 여인에 대한 진술이 잠언이라고 하는 정말 대지혜서에 대단원의 마무리를 짓는 내용이 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잠언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그 여호와를 경외함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그러면 이 지혜가 뭐라고요? 듣는 마음, 하나님께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내 마음이 지켜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호랑이들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취라는 호랑이에 붙잡혀서 승진이라는 호랑이에 붙잡혀서 판매량을 늘려야 된다는 호랑이에 붙잡혀서 가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만남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만남인 것이에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기도가 내가 지어낸 하나님과의 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죽어야 됩니다. 지켜져야 됩니다. 어느 곳에서도 이 세상에 묶이지 않고 물려가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일어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사업이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 있는데 내가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뭔가 액션을 취할 때지 죽을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드는 상황이 너무나 많아요. 뭔가 해야지요? 어떻게 죽고만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로 이어집니다. 부활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죽기만 잘 죽으면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부활이 뭐예요? 이제 내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와 사시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내 안에 성령님께서 사신다. 내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신다. 이때에 우리가 걱정이 될 수 있어요.
‘야, 우리 가정에 문제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죽기만하고 있으면 도대체 제대로 될까?’라고 걱정이 되잖아요? ‘뭐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될까? 이러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그냥 십자가에 죽고 있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 일이 더 악화되면 어떻게 하지? 뭐 전문가를 찾아가야 되는 것 아닐까?’라는 염려가 생길 수가 있는데 잠언이 그 결론을 내려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고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실 때, 그 하나님의 마음과 응답의 성격, 응답의 질이 어떤 것이냐? 현숙한 아내, 현숙한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질로 응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숙한 어머니, 현숙한 아내는 어떤 마음가짐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참 여러 가지 말로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진술의 전체 내용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뭐냐?
여러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생산성에 있습니다. 생산성. 창조적인 생산성에 있어요.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 생산성밖에 없을까요? 꼭 마치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하면 무능한 남자가 마누라 앞세워서 먹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내가 나가서 사업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생산적인 일을 해내고 삼과 베로 옷을 만들어내고 먹을 것을 먼 곳에서 상인이 갖고 오듯이 가지고 오고 맨 생산성에 대한 얘기만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보면서 내 말과 내 생각과 내 의견을 정말 다급하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은 일들 앞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현숙한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일들을 처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가장 두드러진 하나님의 역사의 특징이 무엇이냐? 생산성이라는 겁니다. 창조적인 생산성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날마다 오늘의 번제를 드리니까, 우리는 사회를 비판해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개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내 기준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버리고 그리고 기뻐하며 감사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지켜낸 자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창조적인 생산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이세요.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진정한 창조와 진정한 생산적인 삶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된다는 것을 오늘 잠언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네가 너의 생각과 너의 경험과 너의 판단과 너의 의견을 죽이고 하나님께 듣기로 하고 나올 때에 뒤가 켕기고 염려가 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대로 하다가는 너무 차가운 일이 벌어지거나 너무 무서운 일이 벌어지거나 너무 모진 일이 벌어지거나 너무 괴상한 일이 벌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염려가 되느냐? 하나님께 듣는 마음으로 살 때에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기르고 양육하고 종들을 잘 다스리고 가정을 평화롭게 이끌어 가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너의 삶에 들어와 어머니의 마음으로 현숙한 아내의 마음으로 따듯한 주인의 마음으로 너의 삶을 다스려 가실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르무엘은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은 이 세상 그 어떤 호랑이에게도 물려서 잡혀가지 않고 혹시 잡혀가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정신 차리고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마음을 지켜내고 나를 물어가는 호랑이를 끊어내는 겁니다.
그 호랑이가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취미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 끊어내시고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자, 이게 하나님께 속한 자요. 이렇게 만나질 때에 걱정될 수도 있는 이 세상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현숙한 아내의 마음으로 현숙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현숙한 여주인의 마음으로 내 삶에 들어오셔서 그 따뜻하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당면한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호랑이에게 물려가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노심초사, 걱정근심, 불안초조, 공포에 떨 것이 아니라 정신 차리고 나의 마음을 물어가는 범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그 범의 입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서 현숙한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준비한 복지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잠언의 결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각자가 르무엘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순간순간의 과제가 0.03초 만에도 우리 마음을 물고 잡아가는 세상의 호랑이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어떤 순간도 잊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마음에 기억하며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며 사는 동안에 하나님 만나게 해주시고 만나진 하나님께서 현숙한 여인처럼 가정을 돌보듯이 내 삶을 돌보시는 복된 하루가 경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