驪州(여주)에 있는 "영릉"에는 "世宗大王"과 "孝宗大王"의 릉(陵)이 있다.
두 분의 릉(陵)은 "英陵"과 "寧陵"으로 한글로 쓰면 같다.
나는 이곳을 찾은 계기로 "孝宗大王"에 대해 다시 공부를 하고 마땅히 "大王"의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효종(孝宗) 영릉(寧陵) 재실(齋室).
현재 왕릉(王陵)에 남아있는 재실(齋室)로 거의 온전(穩全)한 곳은 이곳뿐이라서 현재 寶物로 지정되어 있다.
재실(齋室).寶物 제1532호.
재실(齋室)은 陵을 수호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참봉(參奉)이 상주(常住)하는 곳으로, 祭를 지낼때에
제관(祭官)들의 휴식, 제수(祭需) 장만, 祭器 保管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릉(陵)의 부속건물이다.
영릉 재실(寧陵 齋室)은 안향청(安香廳), 집사청(執事廳), 전사청(典祀廳), 참봉청(參奉廳), 행랑(行廊), 침가(砧家)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안향청(安香廳), 집사청(現 제기고 : 祭器庫), 참봉청(現 齋室), 祭器庫(現 行廊채 附屬棟), 行廊만이 남아 있다.
효종(孝宗)의 陵은 본래 京畿道 楊州郡 健元陵(현 京畿道 九里市 東九陵) 서쪽 산기슭인 원릉(元陵) 자리에 조성되었었다.
1659년 5월 9일 산릉도감(山陵都監)이 꾸려지고 6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 해 10월 29일에 산릉의례(山陵儀禮)가 거행되었다.
재실(齋室)은 7월 27일에 工事를 시작하여 8월 26일에 상량(上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릉(山陵)을 조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석물(石物)이 벌어져 현궁(玄宮)까지 물이 침투할 것을 염려하여
1673년에 현재의 이곳으로 천릉(遷陵)하고 재실(齋室)도 그대로 이건(移建)하였다.
재실(齋室)은 이듬해인 1674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를 합장(合葬)하면서
다시 한 번 자리를 이전(移轉)하게 되는데 이때 이전(移轉)된 재실(齋室)이 지금의 齋室로 추정된다.
재실(齋室)의 처음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3년에 천릉(遷陵)하며 기록한
"효종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薦奉山陵都監儀軌)를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재실(齋室)은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昇遐)하자 내청룡(內靑龍) 밖에 다시 이건하였다.
이때도 옛 재실을 철거하여 移建하였기 때문에 건축의 규모와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현재 寧陵 齋室은 안향청(安香廳), 제기고(祭器庫), 재실(齋室), 행랑채(行廊) 부속동(附屬棟), 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齋室 뒤편으로 낮은 구릉지(丘陵地)가 있어 가로로 길게 安香廳, 祭器庫, 齋室이 차례로 배치되고,
그 前面에 길게 대문이 있는 행랑(行廊)이 자리하고 있다.
1900년경 영릉의 재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능제규례"(陵祭規例)의 "재실지도"(齋室之圖)와 비교해 보면
현재 재실은 능역(陵域)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의 거처였던 참봉청(參奉廳)이었으며, 祭器庫라 부르는 건물은 집사청(執事廳)이었다.
현 행랑채 부속동이 祭器庫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 시(祭禮 時) 王과 헌관(獻官)이 머물었던 안향청(安香廳)은 재실 건물 중 가장 격식있는 건물이다.
따라서 주위에 담장을 둘러 영역(領域)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이 철거된 상태이다.
또한 안향청(安香廳) 향좌측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협문(夾門) 2.
입구로 들어가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아름다운 古木이 담을 막고 있다.
마당 오른쪽에는 옛날에 쓰던 도구인듯한데 크기가 작아 용도를 모를 돌절구가 있다.
협문 안에 있는 회양목(淮楊木 : 黃楊木).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459호.
이렇게 큰 회양목은 처음본다.
안향청(安香廳) 맞은쪽에 있는 우물.
제기고(祭器庫)와 제방(祭房)
좌측이 안향청(安香廳)이다.
영릉(寧陵)은 朝鮮 제17대 효종(孝宗 :161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陵으로,
본래 京畿道 九里市 東九陵 서쪽에 安葬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陵을 옮기면서 익릉(翼陵)에서 영릉(寧陵)으로 릉호(陵號)를 바꾸었다.
효종의 무덤은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는 英祖 무덤인 원릉(元陵)으로 정해진 후 계획대로 안장(安葬)되었다.
하지만 한창 추운 음력 10월 부실하게 조성되어 다음 해 장마 때 석물(石物)에 비틀림이 왔다.
곧바로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지나갈 무렵 다시 무너져 이듬해 陵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쳤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孝宗의 후임인 현종(顯宗)은 在位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을 수리해야 했다.
결국 현종(顯宗)은 死亡하기 1년 전인 1673년 陵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영릉(寧陵)으로 이장(移葬)을 한다.
천정(遷葬)의 理由는 石物에 틈이 생겨 빗물이 들어갈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릉(陵)을 여니 생각외로 아무 이상이 없어 책임자들이 면직되었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는 사방 2 미터 정도되는 돌로된 판이 있다.
王이 제례(祭禮)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서 여기에서 혼백(魂魄)을 부르며 4拜를 하고 들어가는 곳이다.
배위(拜位) 또는 판위(板位)라고 한다.
홍살문 앞에서 정자각(丁字閣)으로 들어가는 길은 납작한 박석(薄石)으로 만든 참도(參道)라는 길이 있다.
참도(參道)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으며 높이도 한 단 더 높다.
왼쪽 길은 神이 다니는 신도(神道)이며,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라고 한다.
영릉(寧陵)
다음 해에 王陵 앞에 인선왕후(仁宣王后)의 陵을 썼는데 좌우로 이웃한 다른 陵과 달리
王陵 아래로 陵이 있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식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조선 왕릉 가운데 경종(景宗)의 의릉(懿陵)과 더불어 2개뿐이다.
이것은 음양오행이나 어떤 특수한 형식이 아니고 지리적인 문제에서 온 것 일듯하다.
위의 陵을 보면 좌우가 좁고 가파라 쌍릉(雙陵)이나 합장분(合葬墳)을 만들기가 어려웠을듯하다.
뒤 돌아 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陵.
陵 뒤에 둘러놓는 곡장(曲牆)만 없고 石物이나 다른것은 모두 똑같다.
陵에 갖추어진 石物은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長明燈) 1좌,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각 1쌍이다.
王妃陵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다.
비각(碑閣)
효종(孝宗)하면 북벌정책(北伐政策)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당시의 朝鮮의 상황을 보면 북벌(北伐)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뒤라 國家의 財政도 무척 약했을 것이다.
또한 朝鮮의 軍隊가 그리 强한 軍隊는 아니였다고 추측이 된다.
그런데 孝宗은 어떻게 北伐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孝宗은 1619년 仁祖의 둘째 아들로 鳳林大君에 봉해졌고,
1637년 仁祖가 淸太宗에게 三田渡에서 降伏하자 볼모로 昭顯世子와 함께 宣揚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서쪽으로는蒙古 , 남쪽으로는 山海關과 錦州衛, 동쪽으로는 鐵嶺衛와 開元衛,
동북쪽으로는 如奚部까지 따라다니며 몰락(沒落)의 길을 걷는 明이 淸에 의해 亡하는 것을 본다.
그는 8년 만인 26세에 歸國하지만 또 다시 淸에 소환되어 이번에는 明의 首都 베이징이 불에 타는 場面을 參觀했다.
오랜 세월을 淸나라에서 지내며 孝宗이 본 것은 무엇일까?
또한 淸은 建國을 하면서 무엇때문에 明나라가 아닌 朝鮮부터 침략을 했을까?
淸은 明나라보다 朝鮮을 더 위협적인 나라로 본 것은 아닐까?
孝宗은 淸나라 軍隊와 다니며 그들의 長短點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孝宗은 王에 卽位하자마자 淸을 치는 北伐을 計劃한다.
孝宗의 在位후의 政策은 淸에 당한 수치(羞恥)에 복수(復讐)함이였다.
내가 학창시절에 간단하게 北伐政策을 배울 때는 당랑거철(螳螂車轍)의 무모함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孝宗大王은 직접 淸나라의 軍隊와 다니며 그들의 長短點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에서 표류해온 "하멜" 一行을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수용해
조총(鳥銃)과 화포(火砲) 등의 新武器를 改良하고, 이에 필요한 火藥用 염초(焰硝) 生産했다.
문제는 國內의 臣下들이였다.
孝宗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宋時烈)은 북벌론(北伐論)을 實現에 옮길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宋時烈은 北伐은 염두에도 없고 孝宗의 支持를 앞세워 政治的 입지를 다지는 것에 주력했다.
결국 孝宗은 大臣들의 비협조(非協調)와 재정 빈약(財政 貧弱) 등으로 北伐을 實行에 옮기지도 못하고 만다.
卽位한 지 10년 만인 1659년 41세때에 급서(急逝)를 한 것이다.
宋時烈의 속내는 孝宗이 죽자 곧바로 표면에 나타난다.
孝宗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憲宗에게 喪服을 一年만 입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나는 寧陵 踏査를 계기로 孝宗王을 孝宗大王의 稱號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비록 北伐의 꿈은 못이루었지만 大王의 稱號가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왕이다.
고구려(高句麗)이후 이 나라에 중국과 대결(對決)하려고 한 지도자(指導者)가 한명이라도 있었는가?
오직 효종대왕(孝宗大王) 한 분 뿐이지 않는가!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41歲의 건장한 나이로 급서(急逝)를 했다는 것이다.
어떤 병이나 원인으로 사망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뿐인가 孝宗大王의 兄인 昭顯世子 역시 淸나라에서 돌아오자 마자 급서(急逝)를 했다.
死亡 당시 昭顯世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昭顯世子는 독살됐으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뿐인가 조선 말의 왕이나 세자들의 죽음에 많은 의문이 있지만 그대로 파뭍히는 일이 허다하다.
이중에 제일 확실하게 대두되는 인물이 효명세자(孝明世子)다.
純祖의 아들로 純祖의 나이 38歲, 世子나이 19歲 일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한 특출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역시 22세의 나이에 아무 병없이 갑자기 요절(夭折)한다.
예나 지금이나 王과 臣下가 따로 놀고 신하의 생각이 음침할 때 國家는 쇠퇴한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