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눈알을 밝은 구슬로 삼을 것인가
<24>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③-3
[본문] 보지 않았습니까? 황벽화상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종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지식과 알음아리를 구하지 않게 하고 다만 도를 배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사람을 제접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도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도를 배우는데 있으면 도리어 도를 미혹하게 됩니다. 도에는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 이름이 대승심(大乘心)입니다. 이 마음은 안이나 밖이나 중간에 있지 아니해서 실로 방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이 알음아리를 짓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강설] 황벽화상의 말씀을 이끌어 왔다. “선불교란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도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를 배운다”라는 말도 사람들을 제접하는 방편의 말이다. 진실하게 “도란 무소득(無所得)이다” 또는 “본래로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는 “이미 완벽한 것이어서 배울 것이 없다”, “도는 도가 아니라 그 이름이 도다”라는 등으로 말하면 한 사람도 수긍하고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방편으로 “선불교는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을 따라서 도를 배우는 것에 마음을 두면 실로 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도란 우주에 두루 가득한 것이어서 따로 장소가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도를 배운다고 하면 도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道에 합당하려면
깨달음의 관문 투과해야
[본문] 다만 이것은 그대가 지금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가지고 도를 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만약 다하면 마음에 방소가 없습니다. 이 도는 천진(天眞)해서 본래 이름이나 자가 없습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 일을 설파하시기를, “그대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되어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지 마십시오.
[강설] 위의 내용을 좀 더 부연설명하면 도란 생각할 것도 아니고 설명할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도라는 말에 끌려가거나 속으면 안 된다.
[본문] 앞에서 이야기한 눈먼 사람이 사람들을 잘못 지시한 것은 모두가 고기의 눈알을 오인해서 밝은 구슬로 삼는, 즉 이름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마음에 지니어 잊지 말라(管帶)”라고 한 것은 이것은 목전의 감각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입니다.
[강설] 이하는 소견이 잘못된 선사들이 자신도 착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잘못 지시하는 예들을 들었다. 밝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볼 때, 눈이 어두운 사람으로서 다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마치 그와 같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심한 표현인가.
부처님도 도란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지고 생각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고 하였는데 다시 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리 저리 생각하고 온갖 언어를 빌려서 설명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고기의 눈알을 오인해서 밝은 구슬로 삼는 일”이다.
그러나 도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언어가 즉시 도다(言語卽是大道)”라고 하였다. 언어가 대도인데 생각하고 헤아리는 사량분별이야 더 말할 것 없이 모두 도가 된다. 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도지만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언어와 사량분별은 도와는 멀고 또 먼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사람의 삶은 어차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도에 합당하려면 깨달음의 관문을 투과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선불교의 특징이다.
깨달음의 관문을 투과한 사람에게는 심지어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요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불애보리(不碍菩提)다”라고까지 한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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