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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혹시 종교 있어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병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습니다. 그것은 개구쟁이 같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다운 웃음이었습니다.
-나도 종교 같은 건 다시는 안 믿어요. 지긋지긋해요. 군대 교회, 군대 법당, 다 지겨워요. 개 같은 것들.
어째서 갑자기 종교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개 같은 것들’이라고 씹어 뱉듯 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그는 소주를 단숨에 비우고 오징어를 북 찢어 입 안에 쑤셔 넣었습니다.
-아저씨, 혹시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습니다. 애국가도 부르지 않습니다. 군대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수혈도 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어가는데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을 거부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쫓아 다니느라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 마누라 때문에 화가 난 남편이 그 사람들이 다니는 ‘왕국회관’이라는 이름의 교회에 불을 질러서 사람들이 여럿 타 죽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났습니다.
-그게 다는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군에 입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병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습니다. 그의 눈이 더욱 미끈미끈하게 번들거렸습니다. 그 눈은 점점 더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유리나 수정 같은, 반짝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닌, 죽은 물질을 닮아 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난 태어날 때부터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셈이지요. 보통 기독교에서 세례받는 것하고 비슷한 것이 여호와의 증인들한테는 침례받는 거예요.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침례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만일 내가 어렸을 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우리 부모님도 아마 수혈을 거부했을 거고, 그 바람에 나도 그때 죽어 버렸겠지요.
그는 소리내어 웃어댔습니다. 그 웃음은 어딘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혹은 부모를 비웃는 것도 같았고, 자신이나 부모에 대해 슬퍼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난 배교를 한 셈입니다.
그는 다시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나는 그가 웃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이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배교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군에 입대하면 훈련소로 가잖아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가 그것까지 막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총이지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문제지요.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총은 왜 잡느냐는 거죠. 살인을 하면 안 되는데, 총 쏘는 연습은 왜 하느냐는 겁니다. 사실 군대에서 배우는 게 사람 죽이는 방법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은 총을 쥐기를 거부해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총을 받기를 거부해야 하니까요.
물론 나도 총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는 철저한 여호와의 증인이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듣고 배워서 내 머릿속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야말로 단 하나의 가치체계였습니다. 세계와 인간을 보는 유일한, 의심할 여지없는, 완전무결한 방법이었지요. 의심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답이 있었습니다. 평화스럽고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스무 살이 되어 입대하기 전까지는요. 내무반장이 총을 내주었습니다.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내무반장이 나를 쳐다보더니,
-찡인이가?
하더군요. 여호와의 증인이냐는 말입니다. 내무반장은 벌써 증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내무반장은 즉시 부대에 보고를 했고, 나는 곧 영창으로 끌려갔습니다.
하사관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한 시간쯤 뒤였습니다. 김명철 하사였습니다. 그는 느물느물 웃으며 나를 영창에서 끌어냈습니다. 너 오늘 나하고 춤 한 번 춰보자. 그는 내무반장에게서 내 화기, 아니, 내가 수여받기를 거부한 화기를 받아들었습니다. 묵직한 M16 소총이었습니다. 그는 M16 총구로 내 엉덩이를 찔렀습니다. 구보, 이 자식아, 구보도 몰라?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 뒤쪽에서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이 아니라 흐누아 두아, 흐누아 두아 수아 누아, 하고 소리치며 따라 달렸습니다.
연병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유월의 햇살이 뜨겁게 부서져 내렸습니다. 나는 연병장에 죽처럼 가득 들어찬 햇살을 떠밀며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제자리에 섯, 나는 우뚝 멈춰 섰습니다. 김 하사는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총 받아, 하면서 총을 내게 던졌습니다. 나는 나에게 던져진 그 총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쳐들었습니다. 하마터면 총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습니다. 총은 내 가슴에 맞고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 새끼 봐라. 이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화기다. 6·25때는 이런 총이 없어서 우리 선배 국군 아저씨들이 빨갱이 새끼들한테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냐? 그런 소중한 총을 니가 안 받아? 땅바닥에 내던져? 망할 새끼. 그가 발을 쳐드는가 싶었는데, 이미 군화발이 내 얼굴을 걷어찼습니다. 나는 연병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군화는 거듭해서 내 옆구리를 걷어찼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서. 나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어느새 그는 다시 총을 쥐고 있었습니다. 받아. 그가 또 총을 던졌습니다.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총은 내 얼굴에 맞고 떨어졌습니다. 한순간 눈앞이 빙글 회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개새끼. 그가 다시 내 가습을 걷어찼고, 나는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는 거듭 나를 걷어찼습니다. 연병장의 흙먼지 속을 나는 그가 걷어차는 대로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일어서. 총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나는 총 있는 곳으로 달려가 멈춰 섰습니다. 그가 다시 총을 집어 나에게 던졌습니다. 나는 총을 받지 않았고, 총은 내 입술에 맞았습니다. 입술이 터졌습니다. 그가 다시 발길질을 했고, 나는 쓰러졌습니다.
하루 온종일 그것이 계속되었습니다. 김 하사에게 걷어차여 떼굴떼굴 구르며 연병장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받아, 하며 총을 던집니다. 총은 내 얼굴이나 이마, 코에 맞고 떨어집니다. 그는 나를 걷어차고 나는 약속처럼 쓰러집니다. 쓰러진 나를 그는 계속해서 걷어차고, 나는 땅바닥 위를 떼굴떼굴 구릅니다. 총 앞으로 달려가. 나는 일어나 달려갑니다. 나중에는 달려갈 수가 없어서 절룩거리면서 갔고, 기어서 갔습니다. 그가 다시 총을 집어 나에게 던지고, 그리하여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하루 종일 같은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매일 반복된 같은 일에 대해서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며칠 후에 거울에 비춰 보았을 때에 내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피와 멍과 부기로 흉악한 괴물 같은 몰골이었습니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슬펐으나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습니다. 만군의 주이신 나의 여호와가 이것을 다 보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베드로처럼 부정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라도 여호와를 긍정할 것입니다. 나는 얼굴과 온몸의 통증을 오히려 즐기며 세수를 했습니다. 일부러 물을 움킨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문질러댔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도 살아났습니다. 여호와가 그를 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천군만마의 추격을 물리치고 나일을 건넜습니다. 여호와가 저들을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나 역시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살아 남아 여호와의 이름을 빛낼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나에게 총을 잡을 것을 강요하면 할수록,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그럴수록 나의 마음에는 자부심과 평안함이 더욱 크고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고, 내가 옳다는 확신도 햇빛처럼 더욱 명료하고 밝아졌습니다. 나의 확신을 뒤흔든 것은 그들의 군화발이나 구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몇 마디 말이었습니다. 실로 사람의 말이란 어떠한 물리적 강제력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지고 보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나의 확신 역시 말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니까요. 물론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누누이 들은 가르침 역시 큰 역할을 했겠지만 성인이 된 나에게 그 엄청난 구타와 병역 기피, 내지는 국방의 의무를 거부하는 죄목으로 교도소에 갇히는 일까지를 각오하게 만든 확신은 말과 글을 통하여 획득된 것입니다.
사흘 뒤였습니다. 훈련소의 군종 목사 장 대위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보통 기독교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사교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하면 기독교나 가톨릭은 이미 여호와가 버린 종교입니다. 회칠한 무덤이지요. 오직 여호와의 증인만이 진정한 기독교도입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장 대위는 사탄의 하수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성서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호구지책을 도모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살인과 전쟁터로 내모는 악인이었습니다. 나는 그 역시 나에게 집총을 강요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의 자식인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나에게 집총을 하라는 말도, 여호와의 증인이 사교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위로했습니다.
-힘들지요?
훈련소에 들어와서 처음 들어 보는 존대말이었습니다. 대위가 일개 훈련병에게 존대말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어이구, 이런 나쁜 놈이 있나.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다니.
그는 김 하사를 불러들이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호통을 쳤습니다. 김 하사는 비실비실 웃으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내가 위에 부고해서 혼구멍을 내줄 테니 그리 알아. 당장 없어져. 보기 싫어.
장 대위는 김 하사를 내보내고는 빵과 아이스크림을 내놓았습니다. 나는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장 대위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나는 이복기 씨에게 뭐든 강요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해요.
장 대위는 나를 데리고 영창을 나섰습니다. 훈련소의 교회로 가는 동안 나는 몇 차례나 비틀거리다가 쓰러졌고 그때마다 장 대위는 내 어깨를 붙잡거나 팔을 잡아 나를 부축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장 대위는 나에게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해 물었습니다. 나는 장 대위를 진정한 신앙으로 이끌 기회는 지금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기둥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는 물론이요 기독교도까지 모두 어기고 있다는 것, 천국도 지옥도 없다는 것, 영혼도 없다는 것, 사람이 죽으면 그 몸과 더불어 영혼도 죽는다는 것, 죽은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하여 부활하는 것이요, 부활한 사람들이 바로 이 땅, 바로 이 지구에서 낙원을 이룩하여 살아가게 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장 대위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래요. 옳은 얘깁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참 훌륭합니다.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이나 깜빡 잊었던 것까지 이 형제의 얘기로 오늘 새롭게 깨우치게 되었어요. 정말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군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교리를 세웠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장 대위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장 대위가 이렇게 물었을 때에는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이 형제,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가 옳듯이 다른 교회의 교리도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영생불멸 따위의 교리가 옳을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도 성경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다른 기독교파의 교리도 성경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이구요. 한 가지 해석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맹목이 아닐까요? 하나의 사물을 해석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 해석이 완전무결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지구가 네모지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그러나, 그것 역시 새로운 해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완전무결한 지식,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니까요. 하나의 사물,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천만 수억만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사물에 관한 해석도 이러할진대 하나님 자체에 대한 해석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나는 반박했습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물론 믿지요.
-성서가 하나님의 말슴이라면 성서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럿이라고 한다는 것은 모독이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형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여 교리로 만들어 낸 것은 인간입니다. 따라서 어떤 해석만이 옳고 어떤 해석만이 완전무결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모독이지요. 불완전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무결하게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것 말입니다. 해석은 완전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또한, 해석은 변합니다. 서로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같은 기독교도, 같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해도 각인 하나하나의 해석이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해력이 다르고 분석력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열만큼 이해하는 것을 다른 한 사람은 둘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두 사람의 해석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시는 겁니까?
-천만에요. 객관적 진리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에 대한 어떠한 해명이나 어떠한 해석도 완전무결할 수 없고 유일무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뿐입니다. 그 불완전한 해석, 끊임없이 변해가는 어떤 한 가지의 해명 때문에 젊은 일생을 진흙 속에 던져 버리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과자가 되어 평생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창으로 돌아와서 나는 장 대위의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라 하나님이 만든 것인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완전한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장 대위의 말에 옳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인 20년 동안 그 교리가 바뀌는 것을 몇 차례인가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 교리가 어떻게 변해 갈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웬일인지 그날도, 이튿날도 김 하사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영창에 쪼그리고 앉아 장 대위의 말을, 그리고 내가 이제껏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도 수천 수만 가지의 해석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사흘 뒤에 다시 나타난 장 대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더라도 인간의 해석은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늘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해야지요.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 믿음 때문에 국가와 역사와 친구를 배신하고 자신의 평생을 스스로 시궁창에 던져 버리는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되겠지요.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나는 그때에 생애 최초로 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알았던 모든 것, 믿었던 모든 것,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 살아온 그것,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것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제까지 그에 대한 의심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것인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지요. 의심은 지식의 어미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의심은 지식이 아니라 타락의 어미입니다. 비록 틀린 가치라 할지라도 어떤 가치를 믿고 있을 때에 사람은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틀린 가치라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계몽적 효용성은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일단 의심이 시작되면 그것으로 그런 효용성은 끝입니다. 그래서, 며칠 뒤에는 나는 스무 살 나이까지 나 자신이나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의심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첫댓글 제 아들도 군대 입대전까지 현실에서 갈등하고 괴로워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고맙고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힘든 인생을
안겨 준것이 가슴아프고 후회 막심합니다
단지 창조주를 잊지말고 이웃사랑하는 맘만 변치않길 바라지요
이런 글은 처음봤네요 세상에나 사람을 저런식으로 폭행하다니 ㅜ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라 하나님이 만든 것인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완전한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장 대위의 말에 옳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인 20년 동안 그 교리가 바뀌는 것을 몇 차례인가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 교리가 어떻게 변해 갈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 본문중에서.
절대적 진리...
무한하고 유동적인 우주에서 과연 진리가 절대적일 수 있는가?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모든 진리는 유한하고 소멸되는 것을...
이 단편의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의 증인 2세로써 소위 중립을 지켜려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세부적인 사항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답답합니다..
어린애들의 삶을 통째로 말아먹게 만드는 집총거부...중립의 정의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인데..
총은 총알이 없으면 살상도구가 되지 못합니다. 칼은 언제든지 살상의 도구가 됩니다. 총은 맞아도 안죽는 경우 많습니다. 칼에 맞거나 큰 혈관이 잘리면 과다출혈로 죽습니다. 과연 뭘잡는 것이 살인도구를 잡는 것일까요? 총에 칼을 매달아 감자 썰순 없다구요? 그럼 사람 죽이기 쉽게 만든 회뜨는 칼은 뭐죠? 정말 방어냐 공격이냐를 구분못하는 여증의 교리는 정말 한심하단 말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