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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가운데 계신 하나님(2204.2023.8.13)
습 3:14-2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용문산기도원에서 부흥단주관 연합성회를 은혜로 마치게 되어서 후원하신 분들과 순서를 맡으신 분들에게 일일이 다 카톡으로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을 하신분들이 많았는데 단장님이 강사 세분을 잘 모셔와서 은혜받았다고, 그리고 상주교회 여선교회 식사 너무 맛있게 잘해주셔서 감사인사가 많았습니다. 어떤 감리사님은 단장님 내년에도 기대합니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ㅎㅎㅎ 내년에 또 하라면 하실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순서는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상주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진심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너의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은 스뱌냐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은혜를 받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들어 쓰셨는지 그 배경을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바냐1:1에 보면 히스시야 왕의 4대 손으로 그가 활동할 당시는 유다 왕 요시아 시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왕족의 일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선지자로 쓰시는데 스바냐 선지자가 바로 그 다양한 사람들 중 가장 지체가 높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약 7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유다에는 그 어떤 선지자도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왜 유다에 75년간이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선지자가 활동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을 바꿔 말하면, 왜 하나님께서 75년간의 침묵을 깨셔서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을까?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다시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수의 남은자들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시아 왕의 개혁이 있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그때 당시의 시대적 혼란상을 습2:1-2절‘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습3:1-2절‘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스바냐 당시 사람들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또한 성읍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었다고 스뱌냐 선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꿈을 꾸고 계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스바냐의 청중들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 그들이 사는 성읍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사람들, 그래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비열하고, 참혹한 그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꿈을 꾸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바로 남은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하시겠다는 작정이었습니다. 12-13절‘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회복과 축복을 꿈꾸고 계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꿈은 ‘남은 백성들을 통해서 원대한 일을 이루실 꿈’을 스바냐가 전하고 있습니다.
스바냐의 청중들은 하나같이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었고, 그들이 사는 성읍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 몇 명 남은 자들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이어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남은 자들이 훗날 메시아를 기대하는 백성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에게 선포한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가 바로 스바냐 선지자의 청중들과 같이 참혹한 성읍에 사는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 사이에서 ‘남은 자들을 선별하셔서 하나님의 꿈을 꾸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하나님의 꿈이 바로 저와 여러분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15절‘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라고했고, 17절‘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130년 전에 북이스라엘의 교만과 패역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타락한 삶을 살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백성들도 똑같은 죄를 범하자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만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절박한 환경에 처해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처럼 성결의 복음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하나님은 나의 가운데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13절‘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어떤 자가 남은 자입니까? 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가운데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언제나 여호와 이름을 의탁하기 때문에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가 남은 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남은 자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운’, ‘운 좋은’이란 단어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데 사용합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들의 성공을 ‘운이 좋아서’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람들에게 바로 ‘행운’,‘운 좋은’이란 면이 나타났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왜 그러한지 이제부터 살펴보면서 우리도 동일함을 인정하는 귀한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방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교회의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구원이라는 차원은 당연한 것이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존재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는 아름다운 축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시온의 딸들이라고 불러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꿈을 꾸고 계신지 한번 본문을 볼까요? 본문 14절‘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시온의 딸’,‘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은 바로 하나님안에서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지킨 그들에게 스바냐선지자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딸처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니까 기쁘게 노래를 부르며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14절의 핵심 단어는 ‘기뻐하라! 노래하라!’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시온의 딸,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꿈인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인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꿈이요, 축복이요, 남은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형편이 어렵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힘들어 지쳐 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열심히 기도 하고 있으나, 응답은 없고, 상황은 더 꼬여만 가느냐? 그래도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질병 때문에 고민하냐? 네가 아이들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구나? 네가 터무니 없이 오른 집값 때문에 대출이 막혀서 힘들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할 일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절박한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지 기뻐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들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고, 또 지쳐 있을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기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즐거워해야만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어떤 큰 기쁨, 넘치는 즐거움의 복된 소식이 있다면 기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뻐할 수 없는 유다 백성들, 결국에는 심판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결국 어떤 환경과 형편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몇몇 남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꿈을 꾸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지라도 반드시 우리는 그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딸처럼 언제나 우리를 아끼시고 돌봐 주십니다. 믿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심을 다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무엇 앞에서도 두려워 떨지 말고 당당히 믿음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하나님은 나의 가운데 계셔서 나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라고 스바냐의 청중들인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가 15-16절입니다. 절망의 환경, 저주의 환경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형벌을 제거하였고, 원수를 쫓아 냈으니,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라. 그리고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두려워합니까? 인간이 겪는 두려움 네 가지입니다. 상실, 고난, 실패,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맨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 천사들이 처음으로 한 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정복을 앞 두고 있었던 여호수아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누누이 약속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합니까? 혼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뭐라고 약속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습니다. 15절‘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하나님은 유다의 모든 형벌을 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은자에게는 어떤 형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분한과 진노의 심판에서 형벌을 받지 않고 남은자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부족하여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형벌을 내리지 않고 형벌을 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형벌을 제하여 주십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너희 죄를 눈보다 더 희게 양 털보다 더 희게 하리라’, ‘너희 죄를 도말 하리라’, ‘너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겨 놓으리라’, ‘너희 죄를 등뒤로 던지리라’, ‘너희 죄를 기억도 아니하리라’는 등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말소하시고 지워 없애버리시고 기억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단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했을 때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두손들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습니다. 15절‘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니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쫓아내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쫒아내어 주셨기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세 가지 교훈을 찾게 됩니다.
첫째, 원수를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마귀를 말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귀는 직접공격보다는 간접 공격법을 사용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최상의 공격법은 죄를 짓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마귀와는 이웃이 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보면 귀신을 내쫓으셨고 병을 내쫓으셨고 죄를 내쫓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왕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내쫓기까지는 마귀가 왕 노릇하고 나를 지배했지만 원수마귀를 내쫓은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왕으로 우리와 함께 하 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두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지배를 받느냐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느냐 입니다. 같은 지배가 아닙니다. 마귀의 지배는 파멸이요 하나님의 지배는 생명과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면 통치자이시며 주님이심을 기뻐하고 찬송합시다.
셋째,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화는 사람의 실수로 오는 것 도 있고 천재지변으로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오든지 막아주 시고 지키시고 면케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육체가 당하는 화를 질병, 실패, 아픔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당하는 화는 절망, 고통,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복과 화를 주시는 절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예고 없이 닥치는 화를 막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내가 겪고 있는 화를 복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과 화는 나하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일방적 은혜이며 사건입니다만 복과 화는 행위의 결과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말하는 원수는 유대를 침략해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많은 백성을 죽이고 포로 잡아가고 성전 기물들을 탈취해 가지고 가게 될 바벨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을 사용하셨는데 이 바벨론이 교만하여 너무나 잔인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교만을 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한과 억울함을 갚아 주시고 원수를 갚아주십니다. 롬12: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히10:30‘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상이 원수였고 바벨론이 원수 였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떤 원수가 있습니까?
마13:39절‘우리의 마음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롬8: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이러한 원수들을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엡2: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우리들의 모든 원수들을 십자가로 소멸하여 주셨으니 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데 감히 누가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시온의 딸들입니다. 저 시온성까지 하나님은 반드시 안전하고도 무사히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매일매일 기쁘고 즐겁게 찬송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좁게는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 영혼의 구원이 있고, 넓게는 내 삶 속에서 건지심을 받는 삶의 구원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된 사건도 구원이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건도 구원이고,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도 구원인 것입니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술을 끊고 줄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도박을 즐기던 사람이 도박을 끊는 것도 구원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남편이 변화되고 자식이 변화되어지는 것도 구원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받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는 것도 구원입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기도의 응답도 일종의 구원입니다.
3.기운을 내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바냐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을 늘어 뜨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손을 늘어뜨리고 있는 이들에게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손을 늘어 뜨린다’라는 말 ‘라파’는 ‘저물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물다’는 것은 지레포기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손을 늘어뜨리는 것은 지레 포기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들도 그들의 손을 늘어뜨리고서 절망하고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말씀은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16절‘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기운을 내라고, 용기를 내라고, 힘을 내라고, 말씀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왜 기가 죽었습니까? 기운을 내십시오. 우리는 적어도 요1: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 백성들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만 계신분이 아니고, 바로 우리 가운데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늘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험란한 인생도 능히 극복해 내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힘을 내시고 기운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영적은혜를 주시려고 하십니까?
기운을 내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현재의 삶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잘 참고, 현재의 삶에 기죽일 일이 많더라도 ‘기죽지 말고 힘을 내세요’ 다시 도전하세요. 주님이 항상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 옆에 계셔서 도우십니다. 여기 시온이란 유다를 의미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했으며 메시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믿음의 백성을 의미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아 기운을 내라’ 이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아!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지금은 어두움이지만 앞으로 잘 될 것을 바라보고 힘을내라, 기뻐하라, 즐거워 하라’고 하십니다.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네게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삶 속에서 나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볼 수 있겠습니까? 렘 33:3절‘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나를 건지시는 주님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28:20절‘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나 낙심될 때, 우리 앞에 고난이 있을 때나 염려가 생길 때,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내릴 형벌을 제하여 주시고 원수를 쫓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끝없는 격려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는 그 잘못을 그냥 덮어두지 않고, 지적하고 훈계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까지 합니다. 히12:7-8절‘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입니다. 잘못을 보고도 마냥 덮어두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식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잘못을 지적해 주고 징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부모가 징계할 때 그 징계를 받을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할 때 바른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17절에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소리없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죽지 말고 오히려 기운을 내야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나를 볼 때, 가슴 부풀어 하시고, 따뜻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OOO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OOO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OOO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라’ 이 얼마나 가슴뛰는 말씀입니까? 여기 OOO 대신 여러분의 소중한 이름을 넣어도 확실한 진리의 말씀임을 여러분 믿습니까?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한번 해봅니다. 하나님이 OOO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못하며--할렐루야 하나님이 여러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계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고 계신데 왜 기가 죽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정말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 사랑은 초막을 궁궐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고 이 사랑은 지옥을 천국으로 변화시킵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주위사람들에게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소중한 가치있는 존재이다’ 사랑받고 사는 그 얼굴을 보이십시다. 이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여러분! 부부지간에도 고기반찬은 지금 어려워서 못먹고 살아도 서로가 기운을 내라고 격려하며 삽시다. 자녀들 우리 부모님들이 잘 못해주어도 무지하게 많이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먹고 힘을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보통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로 즐거워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아무리 내 자신을 잘 봐주려고 해도, 별 볼일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구별된 것이 없습니다. 나은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쉽게 화를 냅니다. 손해보고 희생하려고 하기보다는 항상 내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면서도 인생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하고, 내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 놓을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알면 우리가 얼마를 알고, 가진 것이 있으면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연약한 것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요일 4:8절‘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잠잠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세미한 음성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살펴주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믿는 성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잠잠한 사랑을 받고 사는 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는 실패가 두려웠고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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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은혜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