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16-18, 등불을 밝힌 이유, 24.10.13, 박홍섭 목사
예수 믿는 가장 큰 유익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성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나라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모습과 내용으로 와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뿌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으로 반응하여 거부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병 고침과 귀신 축출의 여러 기적을 보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기성으로만 반응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완악한 마음이 기경되어 좋은 밭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합니다.
이것은 밭이 스스로 자신을 경작한 결과가 아닙니다. 농부의 경작으로 좋은 밭이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성도는 그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만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곧바로 등불의 비유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다시 16-18을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비유가 아니라 교훈이나 설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18절의 경고까지 있어서 내용파악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흐름을 참고하면 전체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묵은 땅을 기경하여 열매 맺는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신 이유가 등불을 켜서 빛을 보게 하려 하기 위함과 같다고 밝힙니다. 17절은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감추어졌고 숨겨진 비밀스러운 모습과 내용으로 와 있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감추어졌고 숨겨졌던 영광과 생명과 권능이 다 드러나고 알려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은 그때가 오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생명으로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경고와 더불어 권면합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잘 보이는 곳에 두어 여러 곳을 비취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통치로 임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욕심과 염려와 세상을 향한 유혹으로 거절하고 외면하고 왜곡하면서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계속되는 은혜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완악함과 미련함이 기경되어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어집니다. 입술로 시인이 됩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지키고 인내로 순종하여 결실이 맺힙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이런 결과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쳐줍니다.
이어진 등불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함이라고 일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생명과 구원의 은혜로 살려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 등불을 켠 것과 같습니다. 그 은혜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릇으로 덮지 말아야 합니다. 말 아래 두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등불은 어둠을 비추기 위해 존재하고 빛의 목적은 어둠을 밝히고 몰아내기 위해서인데 그런 의미의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밑에 두는 것은 존재 목적에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마 5:13-16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누가복음의 본문이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에 위치하여 팔 복의 말씀 뒤에 나옵니다. 팔 복은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해서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로 끝이 납니다.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이 납니다. 천국을 허락받은 자들의 내면에 생기는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특징이 바로 팔 복입니다. 이 특징은 우리가 구도하여 얻고 쌓아서 쟁취한 결과가 아닙니다. 은혜로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원문은 “복이 있도다. 너희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훨씬 직관적입니다. 이런 특징이 있음을 보니 너희가 복 있는 천국 백성이 분명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그 뒤에 너희가 이런 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니 그 독특한 맛과 기능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그 의도대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 문맥 안에 등불을 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빛은 억지로 감추지 않는다면 산 위의 동네와 등경 위의 등불처럼 비치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가 세상의 빛입니다. 좋은 땅으로 기경 되는 은혜를 입어서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지고 믿어져서 그 말씀을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면 그런 존재 자체가 빛이고 소금입니다. 등불입니다. 우리가 굳이 빛을 비추려고 거창한 목적을 갖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하는 성도의 일상 자체가 짠맛을 내는 소금처럼 너무나 독특한 맛을 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너무나 소중한 기능을 합니다. 성도의 존재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말 안에 자신을 감추지 않는 이상, 이런 맛과 기능을 드러냅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등불입니다.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해서 말씀이 들리고 믿어지며 그 말씀의 영향으로 팔 복의 내면적인 성품과 인격을 열매로 소유하고 있다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독특한 맛과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씀합니다. 개인적인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크기와 정도가 다르겠지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독특한 맛을 내고 독특한 기능을 합니다.
그 독특한 맛과 기능이 착한 행실로 드러납니다. 마 5:16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도는 윤리와 도덕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행위와 윤리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아 좋은 밭과 좋은 땅이 되어 팔 복의 성품과 인격을 열매로 맺어가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윤리와 도덕의 결과보다 더 착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그래야 합니다. 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착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인격적인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착하지 않을 수 있고 인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팔 복의 특징을 지니지 않을 수 있고, 말씀을 듣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혜는 그렇게 그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모습으로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감출 수 없는 성도의 맛과 기능으로 세상 속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빛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속에 감추어 놓을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하냐며 강하게 도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금이라고 하는데 짠맛이 없고 빛이라고 하는데 빛이 비추어지지 않고 성도라고 하는데 착한 행실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도 세상 사람들이 별로 욕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세상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된 줄을 알고 어둠을 비추지 못하는 빛이 된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소금이 맛을 내고 등불이 빛을 드러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녹고 타야 합니다. 착한 행실을 위해서는 손해 보고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싫어서 주님이 밝혀주신 등불을 그릇으로 덮고 스스로 숨기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런 우리의 미련함을 아시고 강한 경고가 동반된 권면으로 등불의 비유를 마무리합니다. 눅 8:18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성도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미련함과 완악함으로 그러한 존재의 사명을 잊고 맛을 잃은 소금과 빛을 감춘 등불 같은 삶이 살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말씀을 잘 듣고 삼가야 합니다. 어떻게 들을지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무엇을 들었는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사람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 잘 삼가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먼저 비추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부터 몰아내고 자신에게 있는 썩고 부패한 부분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숨겨진 죄악과 드러나지 않은 완악함이 말씀으로 폭로되어 스스로 인식되고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허락된 하나님의 나라가 은혜 가운데 생명으로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않는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들의 운명은 있는 줄로 아는 것도 빼앗기는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경고가 포함된 이 강한 말씀의 권면 앞에서 우리 자신을 잘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귀를 잘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들을지, 무엇으로 들을지 삼가면서 순종과 인내로 인격과 성품에 소금의 맛과 빛의 역할을 하는 열매를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