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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을 먹고 살듯, 시선을...
(신31:1-1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해서 <이슬을 먹고 살듯, 시선을> 이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합니다.
'
이슬을 먹고 산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 술 이름 중에서도 참이슬이라고 하는 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지로 반딧불이의 성충이나 하루살이, 매미 이런 곤충들은 이슬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근데 이러한 곤충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슬이라고 하는 것이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비치는 깨끗함, 순수함 그런 이미지를 띠고 있어서 우리가 보통 주로 여배우들한테 이런 말을 잘 사용하는 것 같아요. 여배우가 아주 청순가련하고 피부도 곱고 얼굴도 예쁘면 특별한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여겨져서 이슬을 먹고 산다고 하는 그런 표현들을 여배우에게 잘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근데 어느 여배우의 인터뷰하는 기사를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특강을 하면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봤는데 한 여자 대학생이 일어나서 자신이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언제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그 여배우가 지금처럼 화장하고 옷도 아주 멋진 것을 골라서 입고 그냥 완전히 다 치장을 했을 때가 그래도 제일 예쁘다. 보통 때 예쁜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배우들에 대한 환상들을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데 여배우가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안다. 근데 여배우도 똑같이 여러분하고 김치찌개에다 밥 먹고 화장실 다녀오고 보통 때는 전혀 꾸미지도 않는 그런 흐트러진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슬 먹고 사는 게 아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이슬을 먹고 살듯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선을 먹고 사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분이 우리의 시선을 드리지 않으면 그러면 하나님은 죽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삶에 오셔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 사이에 머무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복된 삶을 허락하시고 복지를 이루어가실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시선을 먹으면서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삶에서 없어지고 마십니다. 사라지고 마십니다. 우리가 시선을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 복지를 직접 수행해나가시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120살이 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되는 차제에 자기의 지도작적 자리를 물러나고 그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리고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 번씩이나 우리가 읽은 8절까지 부분에서 두 번 반복하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너희보다 앞서서 건너가신다 하는 얘기를 자꾸 하십니다. 그리고 앞서 가시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실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뒤를 따라가라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는 말들이 나와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는 말을 계속 합니다.
이 말 뜻을 살펴보면 좋겠다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레' arey:(3372) 라는 말인데 여러분 다 얼마든지 생각하실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의 위세와 권위에 눌려서 위압감을 느끼는 그런 상태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애레라는 뜻은 상대방의 어떤 위세와 권위와 능력 앞에 눌려서 기가 죽는 거지요. 위압당하고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놀라지 말라는 것은,
넓어진다는 단어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패망이나 파괴 따위가 내게 올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
강하게 하라 하는 말은,
꽉 잡다, 달라붙다 라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를 강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 나를 어떻게 힘세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에 꽉 달라붙는다는 얘기에요. 꽉 붙잡는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사자가 사바나 들판에서 먹이를 가로채서 꽉 쥐듯이 그렇게 꽉 쥐는 그런 마음가짐을 강하게 하라는 '하자크' qz"j;(2388) 라고 말합니다.
담대히하라는 이 말은 또 무엇이냐?
마음을 풀어놓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강하게 하라와 붙여서 얘기하면 뭔가에 마음이 꽉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거기서 절대로 마음을 풀어놓지 말라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되는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하는 말이 너무 심리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말이에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전부 심리적인 상태만을 고려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가나안 땅의 지형이 산이 있고 이렇기 때문에 그 산의 지형을 네가 잘 이용하라 그래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 이런 말이 아니고 너무나 추상적이고 너무나 맥 빠지고 너무나 의례적이고 상투적으로 보이는 전쟁을 치러야 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이게 다 뭐예요?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상을 당해서 아주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울지마세요, 울지마세요 그런 것과 똑같은 거 아닙니까? 울어야지 왜 울지 마요? 펑펑 우세요, 우세요 그래야지. 그래야 속도 좀 시원하지 않겠어요? 근데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나 마나 한 소리..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헨리 블랙커비(Henry T. Blackaby)라고 하는 사람이 <영적 리더십>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4장에 보면 '리더의 비전'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쓰여 있어요. 여기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영적 리더는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리더와 비전을 자꾸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 사람이 지적하는 말은 영적 리더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어떤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세계선교를 이루어야지 이런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업인 이 목회를 위하여 내가 일년 안에 금년이 끝날 때까지 5천명 교인을 모아야지 이런 비전이 이것이 영적 리더들의 몫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는 얘기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선봉에 서야한다는 뜻 깊은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선봉이 되는 것이지 내가 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한다 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속이 시원한 표현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게 아주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근데 좀더 인격적으로 계시를 이해한다 그러면 마치 길 안내자 길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에 좀더 나아가서 좀더 확실하게 오늘 이 여호수아에게 리더적 자리에 서있는 그에게 모세가 주는 말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을 쫓아간다는 겁니다.
너희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따라가게 되는데 앞에서 행하시니까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포지션 자체가.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가져야 될 마음이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뭐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이런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앞에서 행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행하실 수밖에 없어요. 앞에서 행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시선을 떼지 말라는 거예요. 가장 확실하게..
여러분, 강하게 하라.
이게 맹수가 자기의 먹이를 채듯이 아주 강하고 집요하게. 실수가 없게 하기 위해서 표범 같은 거 보면 살금살금 기어가지 않습니까? 사슴이 있을 때 못 알아채게 살금살금 기어가다가 사슴일 알아채고 막 도망가면 막 뛰어가서 그냥 발로 물고 입으로 꽉 물어서 확 잡아채지 않습니까? 이 확 잡아챌 때에 이 다부진 마음으로 앞에 가신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쫙 주라. 시선으로 하나님을 꽉 움켜쥐라는 겁니다.
여기서 담대히 하라는 말.
방심하지 말라. 이 시선을 절대 하나님에게서 떼지말라는 겁니다. 마음을 풀어놓지 말라는 겁니다. 시선을 딴 데를 보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 여러분.
두려워말라는 것도 상대방의 위세와 권위에 눌려 위압당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을 거꾸로 얘기하면 상대방을 보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말, 그 상대방을 계속 보고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계속 보고 있어요. 남편을 계속 보고 있고, 자식을 계속 보고 있고, 아내를 계속 보고 있으면 그 자식이 나가서 사는 세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식으로 인해서 마음에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앞에 가신 하나님을 쫓아가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앞에 가신 하나님을 맹수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꽉 붙잡고 이 시선으로 꽉 붙잡고 절대로 놓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자꾸 자식을 보지 말고 남편을 보지 말고 이 세상의 경제 형편을 보면서 사업을 하지 말고, 사업장에서 복지를 얻으려면 가정에서 복지를 얻으려면 자식과의 관계에서 복지를 얻으려면 학교 생활에서 복지를 쟁취하고 누리려면 어떻게 하든지 그 경제 형편 보거나 이러지 말고 그것에 위압당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맹수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하나님을 움켜쥐어야 된다는 겁니다. 시선으로 하나님을..
그래서 여러분,
내가 복지를 차지하는데 원수가 누군지 아십니까?
돈 뺏어가는 자가 원수가 아니에요. 돈 뺏긴다고 해서 복지가 안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를 때린다고 해서 복지가 안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복지를 못 이루게 하는 원수냐?
내 마음의 시선을 뺏어가는 자들이 그들이 바로 원수요 내 복지를 뺏어가는 자들이고 내놓지 않는 자들입니다. 내 마음의 시선을 뺏어가는 자들이에요.
언제나 말씀드리지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되 지속적으로 바라보라. 이걸 모르는 거예요. 이 시선의 지속성을 모르면 십자가를 모르는 겁니다. 아무리 십자가가 대속의 사건이고 구원의 사건이고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고 있어도 이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봐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면 모르는 겁니다.
호적상에 한 여자가 내 아내가 돼서 그 여자가 내 아내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지속적인 시선을 주지 않고 자꾸 딴 데를 바라보면 그 여자가 실지로 아내가 아닌 것처럼 - 실지로 아내가 아닌 거지요. 호적으로만 아내이지 - 하나님을 향해 지속적인 시선을 주고 있지 않은 상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어질 때라야만 하나님은 신바람이 나셔서 우리에 앞서 가시면서 복지를 이루어가신다는 거예요.
여배우들이 이슬을 먹고 산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요새는 또 뭐 너무나 깨끗하게 나와요. 뽀샵이라고 그러죠? 사진을 찍어놓고는 이 얼굴에 기미, 곰보 같은 거, 점 이런 거 다 없앨 수 있어요.
저희도 사진 찍었는데 저희 집사람 얼굴에 뭐가 이렇게 났어요. 나이가 먹어가니까 아이는 어린데 나이가 먹으니까 뭐가 자꾸 나거든요?
사진을 찍었어요. 근데 제 사진이 있고 집사람 사진이 있고 아이 사진이 있어요. 야, 정말 차이 나더만요. 뭐가 차이나냐면 아이 사진을 가운데다 놓고 양쪽에 제 사진과 아내 사진을 놓고 보니까 피부가 피부가 아닌 거예요. 왜 아이의 피부는 그렇게 깨끗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다 사진으로 아이 피부처럼 만들어 드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사람 사진은 다 지워서 집사람 여권을 보면 자기가 무슨 아홉 살 짜리 아이와 똑같은 피부를 갖고 있어요. 뽀샵을 다 해서.. 그 가짜 사진인데도 여자들 마음은 그걸 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저는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생긴 대로 살다 죽을라고.. 제 사진은 그렇게 뭐가 그렇게 났는데 아이하고 뽀샵을 한 집사람은 깨끗해요.
여배우들 사진을 그렇게 만들어놓으니까 진짜 별 세계 사람 같지 않겠어요? 그러니 이슬 먹는다는 말이 맞지요.
여러분!
이슬 먹고 사는 여배우들처럼 우리 하나님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봐드릴 때 하나님도 힘이 나십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잖아요. 그렇죠? 머무는 장소에서 완전히 격리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아담과 하와가 사는 곳이 따로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에덴을 잃어버린 거예요. 기쁨의 동산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려면 하나님이 에덴을 이루시고 복지를 이루시지요. 아무리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정말 지옥을 이루시겠습니까? 황폐한 삶을 이루시겠습니까? 슬픔의 삶을 이루시겠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굉장한 일을 우리 삶 속에 들어와서 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지속적인 시선이에요. “아버지! 아버지!”하는 그 시선 그리고 그 아버지를 진짜 만나려면 그 외아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들에게 다 가 있지요.
근데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 십자가에 있는 아들을 보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로 고맙고 황송하고 나 때문에 저렇게 달리신 그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따뜻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바라보는 겁니다. 그 시선만 드리면 아버지가 우리의 삶에서 앞서 가시면서 복지를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거예요. 진짜 아주 복된 삶을 복으로 꽉꽉 찬 삶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그 시선을 못 드려요. 계속해서 자식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는 마음, 걱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겠어요.
여호수아에게 부탁하는 말이 그거에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쫓아가면서 너, 두려워하지 마라. 다시 말하면 적들을 보지 마라. 하나님만 봐라.
그리고 놀라지 마라. 놀라지 말라는 것이 뭐라고요? 넓어지는 거예요. 뭐가 넓어져요? 시야가 자꾸 넓어지는 거예요. 시야가 넓어지면 안 돼요. 그냥 아버지만 보면 돼요.
그리고 강하게 하라. 강하게 하라가 뭐라고요? 맹수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하나님만 시선으로 꽉 잡아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차타고 오다 보니까 수지에서 판교로 빠져나오는 길에 왼쪽으로 보니까 복집이 생겼어요. 복어로 탕 끓여주는 복집이. 근데 복하고 집을 크게 쓰고 가운데 작은 글씨로 주는 이렇게 썼더라고요. 복 주는 집^^ 복어를 팔면서 축복할 때 그 복을 주는 집이라고 그렇게..
복 주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복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앞서서 쟁취해가십니다.
우리의 복지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처럼, 이슬을 먹고 사는 아리따운 여배우처럼 오직 우리의 시선만을 먹기를 원하십니다.
시선 드리세요. 돈 들어요? 여러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까? 시장에 가든, 학교에 가든, 무엇을 하든지 마음 속으로 주님의 십자가에 시선을 드리는 겁니다.
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와 계시니까. 내 아들이 가 있는 곳에 내 마음이 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이 계신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와 있으니까.
하나님을 본다함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것이에요.
그냥 십자가를 제해놓고 하나님 하나님 찾으면 일반 종교와 다를 게 없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 그 시선을 먹으시고 우리의 삶에서 앞서 가시며 복지를 이루어가시고, 당장 오늘 살아가실 때 계속 마음으로 24시간 주님의 십자가에다 시선을 주세요. 그러면 마음이 복 복 복 복 뽀글 뽀글 뽀글 뽀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거예요. (0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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