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비극과 웅진 백제 이야기
공산성 금서문
아들아
공산성을 찾아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며 걸어보며 금강과 어우러진 풍경도 보고..
이 공산성에 얽힌 역사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아들아, 백제의 옛 왕도였던 고도, 충남 공주의 중심이었던 공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한번 해볼테니 잘들어 보거라.
공산성 공북루
공산성은 충남 공주의 중심..금강(錦江)을 끼고 솟은 110m의 야산에 축조된 백제의
산성으로 골짜기를 품고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지.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던 것을 후에 돌로 고쳐 쌓아 석성(石城)의 모습을
갖추었고, 백제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고도이자
큰 읍이었던 공주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란다.
공산성의 백제시대 옛 이름은 웅진성(熊津城), 백제의 두번째 왕도였다.
아들아, 약 2천년전부터 1천4백년전까지 만주에서부터 한반도까지 우리 한민족의
영역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서로 통일을 위해 다투고 있었지.
그중에서도 백제는 한반도의 중부부터 남서부 일대를 지배하고 서해바다를 통해
중국과, 남해바다를 통해 일본까지 진출하는 해상강국이었고,
삼국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대국이었단다.
소서노 (드라마 근초고왕 中)
백제의 시조로 우리는 온조왕을 얘기하는데 실은..백제를 있게 한 사람이 따로 있단다.
그는 국조모(國祖母).. 소서노(召西奴)였지.
소서노, 그녀는 원래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왕비였으나
그녀의 아들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祖)가 추모성왕이 부여에서 떠나올때 두고온
부인 예씨의 소생, 아들 유리(琉璃)에게 밀려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추모성왕과 갈라서서 그녀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향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서울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백제의 시초였단다.
비류와 온조가 각자 무리를 이끌고 나라를 세웠으나 비류가 자리잡은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이 나라를 세우고 키우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 실패하고 그 무리를 다시
온조가 흡수하였하여 나라를 키웠지.
원래 삼한(三韓) 중 가장 강한 마한(馬韓)의 한 소국으로 출발했지만, 온조왕 이후
차츰 세력을 키우고 고이왕과 근초고왕(近肖古王)같은 훌륭한 임금이 나와
백제는 강국으로 성장을 거듭하며 마한을 결국 복속시키고 강국으로 성장했단다.
비류왕과 근초고왕 (드라마 근초고왕 中)
이 시기..백제의 서울은, 지금 서울이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던 자리였고
우리는 이때의 백제를 한성백제(漢城百濟)라고도 부른다.
아들아, 백제는 고이왕때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고,
이후 근초고왕 때는 남으로 마한을 정복하고, 아라가야 등 가야제국들을 복속시켰으며..
왜에 문화를 전파하고, 세력권을 넓히면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근초고왕이 제후인 왜왕에게 내린 하사품, 칠지도(七支刀)
북으로는 고구려를 공략하여 371년 평양성에서 고구려의 고국원태왕(故國原太王)을
전사시키며 황해도까지, 충주와 청주 등 한반도의 중심을 장악하였고,
중국의 요서(遼西)와 산동성(山東省) 일대, 양자강(揚子江) 하류지역에 진출하는 등
이때가 백제의 황금기였단다.
아들아, 그러나 해는 뜨면 지는 법이고, 달은 차면 기우는 법이다.
하늘을 찌르던 근초고왕 때 백제의 기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곧 기울게 되지..
북방의 강국, 고구려에서 새로운 영웅인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등장했거든.
힘을 축적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란 영웅을 만나 국운을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되지.
광개토태왕은 왕위에 오르자 마자..남쪽 백제부터 공략했고, 백제의 중심부 한수 이북의
여러 성읍을 공략하고, 중요한 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빼앗았으며..
결국은 백제의 왕성인 한성을 포위하고 백제의 아신왕을 굴복시켰지.
백제는 그 수모를 갚고자 수차례 고구려를 여러 차례 공략했지만 번번히 패배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단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복수는..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태왕이 완성하였지.
475년, 장수태왕은 대로인 제우와 함께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남하하여
백제를 치고 백제의 왕성을 함락시킨 후,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단다.
개로왕의 최후 (한국사기 中)
장수태왕의 백제 침공전은 그전에 오랫동안 사전작업이 있었단다.
간자인 도림(道林)을 보내 백제의 내정을 훤히 읽어 내었고,
개로왕을 충동질하여 국고가 비고, 백성을 고단케 하여 민심이 흩어져..
강국인 백제가 힘을 잃고 틈을 보일때까지 기다린 세월이
장수태왕이 재위 62년 동안.. 그의 나이 82세였으니 오랜 기다림이었지.
실로 그 기다림, 그 끈기가 경이롭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아들아, 여기서부터 공주 공산성인 웅진성(熊津城)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단다.
475년, 전면적인 장수태왕이 친정한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백제의 왕도인 한성이 위기에 처한 그 시각 개로왕은 왕성을 사수하며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을 생각을 했고, 태자인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청하도록 파견했단다.
문주(文周)는 신라에서 구원병 1만을 지원받아 개로왕을 구원하고자
한성으로 향하는 도중에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왕은 죽고 수많은 신료와 왕족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더 나아갈 수 없었지.
문주는 고구려에 함락된 한성 대신..웅진(熊津)을 새로운 왕도로 삼고,
개로왕(蓋鹵王)의 뒤를 이어 백제의 22대 왕으로 즉위하였단다.
웅진에서 새출발하는 백제..웅진백제(熊津百濟)의 시작이었다.
그러나..아들아, 백제는 여전히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단다.
왕도를 빼앗기고 쫓겨 내려와 왕의 권위는 추락했고, 기존 진(眞)씨와 해(解)씨 등
8대성씨의 귀족과 새롭게 떠오르는 웅진지역과 마한출신의 귀족들이 서로 연합하고
대립하며...정치의 혼란이 극심했었다.
그런데 왕은 힘이 없으니 이런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귀족들에게 휘둘렸지.
문주왕은 재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477년 사냥에 나섰다가,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지.
문주왕이 피살되자 그의 아들인 삼근(三斤)이 13세의 나이로 이어 즉위하였고,
삼근왕은 부왕을 죽인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위세가 강하여 그에게 국정을 맡겼지.
하지만 병관좌평 해구의 욕망이 끝이 없어 반란을 일으켰고 또다른 귀족 진씨들의
도움으로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삼근왕 그도 역시 다음해 47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해.
역사에서는 그 전말을 전하진 않지만..아무래도 그의 죽음에도 역시 귀족세력 특히
진씨들이 개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들 있지.
아들아, 백제의 두번째 수도인 웅진성은..공산성의 시작이었다.
웅진성은 22대 문주왕부터 26대 성왕때까지, 4대(代)에 걸쳐 시기상으로는
백제의 왕도인 한성이 점령된 475년부터 성왕이 사비(泗沘,충남 부여)천도를
단행하기까지 63년간 백제의 두번째 왕도로 역할을 하였고,
이후로도 백제의 행정구역인 5방(方) 중 북방(北方)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단다.
웅진백제시대가 짧게 끝이 난 것은..
원래 나라의 수도를 새로 정하고 옮길 때는 면밀한 검토와 오랜 준비 끝에, 장기간의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 지는 것이지만,
백제의 새로운 왕도 웅진성은 고구려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면서,
별다른 준비없이 급박한 상태에서 급히 정해진 것이고..
계속되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고 한성 등에서 도망쳐 남하해온 유민을 수용하는
임시수도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더 나은 입지를
가진 곳으로 천도(遷都)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봐야 할 것이야.
게다가..침체된 나라의 분위기를 바꾸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지배층을
키울 필요가 있었지. 또 계속해서 여러 선왕들이 비명에 갔던 기억이 있는 곳이라
백제의 왕들이 웅진성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어.
아들아, 충남 공주..
백제의 두번째 왕도였던 옛 웅진성은..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그 첫 역사를
이렇게 험난하게 시작하고 있었단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