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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성도로 잘 성장하라(2377.2026.8.2)
벧전2:1-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년 여름에 휴가를 다녀오셧습니까? 아니면 휴가를 가셔야 합니까? 내가 휴가를 떠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내 집이 가장 편하고, 이곳이 천국이니 하고 보내시면 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기 때문에 집을 떠나서 생활하는, 물론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는 것도 아닌, 종교적인, 인종적인 박해를 피해서 어쩔 수 없이, 각국에 흩어져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벧전1:1-2절‘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라고 하지만, 고통과 박해가 점철되는 상황에서 그들이게 용기를 주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베드로는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굳굳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을 일컬어 9절‘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벧전 1장에서 하늘의 산소망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이므로 항상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모든 삶의 기준입니다. 말씀 안에 살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생명으로 알고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순종할 때 우리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영혼이 더러워진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아 평강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떠나면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왠지 답답하고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말씀 안에서 살면 깨끗함입니다. 성결해집니다. 거룩해집니다. 이 거룩함이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가 우리속에 뿌려져서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어서 생명의 양식이 되고 우리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관심이 되고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이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교회는 신앙적으로 말하면 밥상공동체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날마다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마음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상주감리교회 가족이 되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않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변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소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쇠하는 것입니다. 낡아지고 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그 진리 위에 서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하니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면에서 골고루 균형을 맞추어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자라기 위해서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그 중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건강의 적과 같이 생각하는 ‘지방’도 우리가 자라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영양분입니다. 물론 지방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비만이나 동맥경화, 고혈압 같은 성인병을 유발하게 되지만 지방을 적당하게 섭취하지 못하면 어린이의 성장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지방만이 아니라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공급되어야 우리 몸이 균형있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몸과 정신적인 면에서만 자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에서도 자라가야 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믿음이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라가야 할 목표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엡4:15절‘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우리가 자라가야 할 최종적인 목표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주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거듭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듭난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10개월 동안 엄마의 배속에 있다가 태어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만,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태어난 아이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가야 합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라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은 거듭남의 구원을 넘어서 우리 주님이 오실 때 완성될 미래의 구원입니다. 완전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 성도의 영적인 목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구원받기 이전, 예수 믿기 이전에 가졌던 모든 삶과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1.탯줄을 끊어주어야 새로운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엄마의 배속에서 살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탯줄을 끊는 것입니다. 탯줄을 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엄마 배속에서 있었던 모든 것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탯줄을 끊는 것처럼 과감하게 끊어야 합니다. 1절‘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깨끗이 청산해야 할 옛사람이 갖고 있는 기질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구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옛 것을 버리는 결단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새벽기도 마치고 북천을 뛰는데 비가오거나 눈이 와서 북천을 뛰지 못할때에는 사무실에서 혼자 베드민턴을 칩니다. 배드민턴공에 줄에 매달아 놓고, 베드민턴 채로 칩니다. 그러면 맞은 공은 멀리 날아갔다가, 매어져 있는 줄 때문에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무리 힘껏 공을 쳐도 날아갔던 공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베드민턴 채로 힘껏 때렸는데도 왜 공이 되돌아옵니까? 공에 달려 있는 줄 때문입니다. 줄이 공에 달려 있는 한 아무리 힘껏 공을 쳐도 공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공을 멀리 보내기 위해서는 공에 매달려 있는 줄을 끊어야 합니다. 줄만 끊으면 공은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옛 생활이나 옛 습관들이 우리에게서 포기되지 않으면, 줄이 달린 배드민턴공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항상 제자리일 뿐입니다. 얼마쯤 성장한 것 같아 보이다가도 결정인 순간에는 처음 자리로 돌아와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알기 이전의 모습 잘못된 것들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생활의 줄을 끊지 않으면 제대로 새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13:12절에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했습니다. 엡4:22-25절‘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고 말씀합니다. 이런 옛생활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줄에 달린 공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의 아름다운 비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즐거움과 영광을 맛보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신앙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신앙의 깊은 맛을 느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을 마음 속 깊이에서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믿음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능력과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짜릿함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세상이 주는 쾌락보다도 더 깊고 오묘한 신앙의 감격을 가슴속에 품고 기쁘게 살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우리가 그런 깊은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성품과 옛 사람의 삶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굳게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면서 얻게 되는 놀라운 은총의 세계도 맛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하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신앙의 깊이와 은총을 모르기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을 보면 ‘꼭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 알지 못했을 때 가졌던 모든 삶과 즐기던 것들을 과감하게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새롭게 태어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악독’입니다. 악독이라는 말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독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남을 해치려는 심사를 말합니다. ‘기만’이라고 하면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되고 간사한 말로 남을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이 외식인데 외식이란 위선을 말합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요,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다른 것입니다. 시기하는 것도 버리라고 합니다. 시기란 내가 갖기를 원하지만 갖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여 속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없을 때 그 사람의 약점이나 결점을 들어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욕, 악담, 중상모략, 험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릴 것을 잘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탯줄을 짤라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가만히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끊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단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오랫동안 몸에 배어있고 습관에 배어있는 것을 어찌 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반항입니다.
하나님은 버리라고 말씀하지만 나는 그런 죄악을 버리기 싫다는 반항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막3:5절에 보면 손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 손이 말라붙었는데 어떻게 내밀라고 하십니까라고 반항하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네 그 손마른 자가 주님의 명령앞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리라고 할 때 버리겠다고 결단하고 미련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버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졌을 때 우리가운데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2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젖입니다. 이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성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이 겨자씨와 같다고 하신 것이나, 가루 서말 속에 섞어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하신 것 등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앞의 1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나서, 여기서는 새로이 태어난 생명이 끊임없이 자라나는 성장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랐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4:15절‘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의 성장은 주님의 교회 성장의 토대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2.거듭난 성도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성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성도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듭남이 영원토록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밝히 말한 후 본문에서는 거듭난 사람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해야 함을 말합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갓난 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영적 자세를 가지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서 성장을 말하는 것은 모순됩니다. 우리 심령이 깨끗해지면 영적인 갈망이 강하게 생깁니다. 우리가 육신이 배고플 때 생기는 식욕처럼 우리 영혼의 갈망이 생깁니다.
2절‘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기들’이란 말은 갓 태어난(newborn) 아이들을 말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은 엄마의 젖 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분유가 잘 나와서 엄마의 젖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의 몸에서 나온 엄마의 젓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아기에게 엄마 젖을 먹이면 엄마의 신체에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이 호르몬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몸을 원상태로 회복시켜줄 뿐 만 아니라 아이에게는 면역력이 높아져서 잔병치레를 적게 하고 성장에 필요한 가장 좋은 영양소를 공급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 엄마와의 충분한 접촉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므로 엄마의 젖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있어서 본 교회에서 먹는 영의 양식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조금은 담백하고 컬컬해도 말씀을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비유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먹어야 할 가장 적절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젖은 순결해야 어린아이가 그걸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젖은 상하지 않는 젖을 말합니다. 갓난 아이는 순전하고 아이에게 적합한 젖을 먹어야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영성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신령한 복음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알고 그를 믿어 거듭나게 되면, 세상에 갓 태어난 갓난 아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갓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시간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아먹는 것입니다. 먹을 때마다 똥을 싸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고민입니다. 아이가 왕성하게 먹고 왕성하게 배설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도는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세 번씩 일손을 멈추고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식사를 거르거나 라면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우고 일하기를 거듭한다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정규적으로 말씀을 먹지 않고는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이 배고픔을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것을 더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권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갓난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이는 엄마의 젖이 없으면 건강을 잃게 되거나 죽게 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듯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죽는다’라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엄마의 젖 만으로 살아가는 갓난 아이의 심정으로,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의 영혼은 먹는 말씀 하나 하나가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무럭 무럭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시19:7-10절‘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우리의 신앙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간절히 바란다’는 뜻입니다. 마치 배고픈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겠다고 엄마의 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자 하는 갈급함과 집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먹을 때에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도 더욱 달고 맛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먹을 때에 우리의 심령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거듭나게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바로 앞인 벧전1:23절‘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를 거듭나게 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우리 안에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히4:12절‘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 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의 권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보다도 더 예리합니다.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설 때에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볼 수 있고, 그 죄와 허물을 도려 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쳐서 물리치는 성령의 검과 같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갖 유혹으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그런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도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마귀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딤후3:16-17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말씀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면 신령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28:2절‘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 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신29:9절‘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형통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함으로 신령하고 순전한 젖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말씀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4-5절‘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여기 ‘산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산 돌’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 산 돌로써 신령한 집, 곧 성전이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 돌’이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고, 나아가 어떻게 성도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돌’이란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 무덤을 봉인하는 둥글고 커다란 돌을 가리킵니다. 이 ‘산 돌’이라는 용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미지가 담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 역시 ‘산 돌’ 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이미 죄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었으며 장차 부활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그 상태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신령한 집’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원문에서 ‘산 돌’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신령한 집’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성도의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여러 성도들이 하나의 신령한 집, 곧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을 드리기 전에는 결코 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성전(=교회)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개념은 여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3:16-17절‘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6:16절‘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엡2:20-22절‘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없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을 만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표현한 ‘산 돌’은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우리를 표현한 ‘산 돌’은 복수로 표현되었습니다. 성도는 홀로 그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성도 서로 서로가 연합하여 ‘우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집은 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연합할 때, 교회도 성장하고 성도 개개인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답답한 생각을 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했다든지, 큰 일을 했다든지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합함이 없다면 신령한 집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분량을 따라 최선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집은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신앙이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공동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예배하는 것으로 신앙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적인 신앙운명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성도의 삶은 결코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성도, 사람과 사람이 모두 산 돌이 되어야 신령한 집, 즉 교회가 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더욱 영적인 성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 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버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기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감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얻어서 영적으로 승리하여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