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K.갬블"(Foster Kirk Gamble. 甘保利:1880~1969)선교사는
1880년 앨라배마에서 태어나 남 버밍햄대학과 밴더 빌트대학 신학 대학원을 나와 고향에서 수년 간 목회했다.
1908년 10월, 아내와 함께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개성, 춘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10월부터 1913년까지 남감리회 연회 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개성 북부교회에 시무하고
춘천지방 전도 사업을 담당하다가 1915년 일시 귀국하였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과 중국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다가
1908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이 열기도 급격하게 쇠잔해 갔다.
이런 위기의식이 다시 한 번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부흥 운동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이에 따라 부흥 운동이 재개됐는데 이 운동이 "백만명 구령 운동"(The Million Souls for Christ)이다.
1909년 7월 12일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남 감리교 개성 선교부의 몇 명의 선교사들인,
"갬블"(F.K.Gamble), "리드"(C.F. Reid), "스톡스"(M.B. Stokes)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염원하는 기도모임을 함께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1915년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부에서 활동한 후 1921년 다시 내한하여
경성지방 감리사와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의 통합을 위한 합동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아내 "베아트리스" 선교사가 사망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목회자로서 문서 선교와
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부에서 간사로 활동했는데, 1940년에는 미국 감리교 본부 산하에 해외 구제 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국 감리교 재건에 기여했다.
갬블 선교사의 부인(Jenkins Beatrice Aurora 1879.8.5~1927.1.14)의 묘.
아내 "젠킨스"(Jenkins, Beatrice Aurora)선교사는 1877년 미국 "North Carolina 州 " Granville County"에서 출생하였다.
"리틀톤" 대학과 "내슈빌 감리교 선교사 훈련 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8년 9월 "갬블" 목사와 결혼한 후 그 해 10월
남편과 함께 미국 남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27년까지 20년간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담당하였다.
한국에서 선교 활동 지역은 개성과 서울이었다.
1912년 6월에는 개성에서 남편과 함께 살면서 여성 선교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1924년에는 서울 사직동에서 남편과 5 자녀가 함께 거주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27년 1월 14일 49세의 나이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하여
종교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1927년 2월 2일자 기독신보 기사에는
“18년 전에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개성에서 몇 해 동안과 서울에서 몇 해 동안 살면서
그는 신앙이 견고하고, 품행이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여 교인뿐 아니라
비교인(非敎人)들 까지도 그 부인과 한번 교제하면 과연 이상적 여자라고 칭송하였다.
그런고로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말하기를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나는 가기로 준비하였으며,
이번에 나의 병이 낫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 범사가 다 잘 될 줄 안다."고 하면서
고통가운데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다가 영면하였다고 한다.
묘비 아래에는 6.25때 50mm 기관총탄의 상흔인듯한 큰 상처가 있다.
그곳에는 "젠킨스"부인의 기도문이 있는데 훼손되어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