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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정책에 대한 몇 가지 생각과 새로운 시도)
한국 농업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어렵다. 산악국가인 스위스나, 사막 근처에 있는 이스라엘 보다 낮은 식량자급률과 농촌경제의 낙후성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다 1997년 IMF사태 이후 한국의 종자기업 마저 외국인 손에 넘어가 한국농업은 근본까지 취약해졌다. 또한 한국은 산지 비율이 70% 정도인데 건축용 목재와 가구용 목재의 거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난방용 목재(팰릿)까지 수입을 한다. 또한 산에 가보면 껍데기는 푸르고 울창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안에는 간벌 등 관리가 거의 않아 산림자원으로서는 엉망이다. 한국의 농림업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답을 찾기 쉽지 않다.
먼저 그 흔한 신자유주의나 재벌의 탓으로 돌리기도 마땅치 않다. 농림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보호는 아주 많고 재벌의 불법하도급 같은 것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농업과 농촌지역에 대한 정부 지원은 다양하고 많다. 직불금 등의 직접 지원, 미곡 등의 수매, 농기구나 비료 농약 석유류와 전기 등의 저가 공급, 저리자금 대출, 비닐하우스, 농산물 가공시설 설치비 지원 등이 있다. 농촌에서는 땅만 있으면 가진 돈이 없어도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업 관련 지원 기관도 많다. 농림축산식품부, 산림청, 농촌진흥청, 국립수목원, 국립농림과학원 등의 정부기관, 여러 국책 연구기관, 농업정책금융보험원, 지방자치단체의 기술센터나 지역발전연구원 등등이 있다. 너무 많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여기에다 어마어마한 돈과 조직, 인원, 힘을 가진 농업협동조합도 있다. 한국 농업의 현실을 볼 때 농협도 가진 돈과 힘에 비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농업에 대해 이렇게 정책과 지원, 또한 관련기관이 많지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루과이라운드나 FTA와 같은 개방이 한국농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한 영향이 있겠지만 진짜 근본 원인은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현재 시점에서 개방을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방으로 값싼 농산물이 많이 수입되어 농업에 많은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방 이전에도 한국농업은 낙후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개방으로 인해 농업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은 더 많아지기도 했다. 또한, 네덜란드, 덴마크, 프랑스 등은 오래 전부터 개방을 해왔음에도 농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개방이라는 외부 조건이 아닌 한국의 농업이 낙후된 우리 내부의 진짜 원인을 잘 찾아 봐야 문제 해결이 조금이라도 쉬울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많이 있겠지만 일단 두 가지가 눈에 뜨인다.
첫째는 땅값이 비싸다는 것이다. 단순한 경제논리로 보면 농산물의 생산가격은 농지가격의 기회비용, 농기구 비료 농약 종자 등의 비용, 인건비와 적정마진의 합으로 구성된다. 한국은 땅값이 비싸 농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면 농지매입 대금의 은행이자 수익 이상 돈을 벌기 어렵다. 산지를 사서 임업을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60년대 독일에 광부로 갔던 분들 중에서 독일의 싼 농지 값에 놀란 사람이 많았고, 실제 싼 농지를 빌리거나 사서 농사를 지어 돈을 번 사람도 있다. 한국은 도시지역의 집값과 집세가 비싸 서민들의 삶이 어려울 뿐 아니라, 농지 값도 비싸 농업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되어 들어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농촌에 좋은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젊은이는 농촌에서 찾기 매우 어렵다. 땅값이 비싸고 교육․문화시설이 부족하고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없는 것과 농업이 낙후되는 것은 서로서로 큰 영향을 주면서 악순환을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해서든 끊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농촌은 현재에도 어려울 뿐 아니라 미래에는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큰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어렵더라도 계속 찾아야 한다. 땅값을 낮추고 적어도 농촌으로 오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료에 가깝게 농지를 빌릴 수 있게라도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농업정책의 큰 방향을 점검해 보자.
먼저 지금하고 있는 경지정리와 기계화를 통한 농업생산성 증대 방식은 보조금 지급이나 농산물의 가격지지 없이는 땅값 때문에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방식은 쌀 등 기본 농산물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 필요한 정책이다. 다음은 최근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대형 온실의 수경 재배 등과 같이 시설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늘이는 방안이다. 이는 자본투입이 많아져 땅값 차이에 따른 경쟁력이 격차를 줄일 수 있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농산물은 기상재해 등의 영향이 크고 가격 변동도 심하다. 따라서 자본 투입이 많은 농업은 잘못되었을 경우 농민이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농민의 부채가 과도하게 늘지 않은 선에서 적절히 키워야 한다. 성장의 한계가 있다. 또 이 분야에 대기업 투자를 유도하는 것은 농민들의 반대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
결국 한국 농업정책의 기본 방향은 인력 투입이 많더라도 명품 농산물을 생산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즉 농산물을 고급화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한국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쉽지는 않지만 이 방법뿐일 것 같다. 기본적으로 명품은 사람의 손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자동차, 옷, 구두, 가방, 술, 음식 등의 명품도 마찬가지다. 어떤 농법이나 방식으로 명품 농산물을 만들 것인가와 어떻게 이러한 것을 만들 우수한 인재를 유치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농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연농법이 좋은 대안일 것이다.
자연농법은 친환경을 넘어 자연 상태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무농약과 무비료는 당연하고 유기농에서 쓰는 퇴비도 쓰지 않고, 심지어 밭을 갈지 않는 무경운 방식까지 쓰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이런 농산물은 비쌀 수밖에 없다. 자연농법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부와 연구모임이 늘어나고 실제 농장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자연농법으로 생산한 농산물은 관행농법의 농산물 뿐 아니라 유기농 농산물에 비해서도 안전성과 맛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나다. 자연농법은 기술교육과 보급, 품질 기준 마련, 유통망 구축 등 준비할 것이 많다.
자연농법에 적당한 농지는 관행농법으로 계속 농사짓던 잘 정리된 농지보다는 버려졌던 땅이나 산지가 더 좋다. 4대강 난개발 이후 사용 안 하고 있는 강변 부지, 댐 상류 수몰지구로 수용된 지역 중 물이 안 차는 지역, 전방 군부대 이전지역, 산림 자원이 좋지 않은 산지 등이 자연농법에 좋은 후보지이다. 정부는 이런 땅을 자연농법을 공부하고 자연농법으로 농사짓겠다는 사람이나 단체에 아주 싼 임대료를 받고 장기 임대를 하도록 한다. 특히, 젊은이나 젊은이가 많이 포함된 단체에 임대 우선권을 주면 농촌지역에 젊은 인재를 유치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자연농법 이외에 농산물을 고부가가치화 하는 방법은 농촌형 농산물 가공산업을 키우는 것이다.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는 대표적 산업분야는 술과 식초일 것이다. 포도주의 경우 한 병에 몇 천 원부터 몇 백만 원 짜리까지 다양하다. 싼 포도주나 비싼 포도주나 들어간 포도 양이나 병 값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어떤 포도를 썼느냐,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게 나고 엄청난 부가가치가 생긴다.
한국에서 좋은 술은 위스키, 포도주, 사케 등 거의 대부분 수입산이고, 대중주인 막걸리와 소주, 맥주 등은 원료가 거의 수입산이다. 현재 한국의 술 산업은 농업과 국민경제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또한 요즘 건강 등의 이유로 관심이 커진 천연발효식초도 비싼 것은 일본 흑초나 이태리 발사믹식초 등 수입산이다. 국내에서 좋은 천연발효식초는 구하기도 어렵고 신뢰도 떨어진다. 식초는 술로 만드는 것인데 한국은 술 산업이 형편없기 때문에 식초산업도 좋을 수 없다. 술과 식초 산업을 제대로 지원․육성하는 것은 한국 농업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정책 대안이다. 술과 식초 산업은 농촌에서 젊은이에게 수익성 있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련 기자재와 원료, 가공판매 산업 등 전후방 연관효과도 크다. 술 산업 육성방안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농업정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과제는 농산물의 가격안정이다. 돼지고기와 닭고기, 양파와 배추, 마늘, 고추, 과일 등은 가격 폭등과 폭락 등 변동이 심하다. 농민은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들어도 가격 폭락으로 힘들다. 소비자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음 해에는 가격 폭등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간 농산물 가격안정을 위해 유통구조 개선, 정부의 수매와 비축, 긴급수입 등의 정책이 있었지만 효과는 크지 않고 예산낭비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산물은 생산의 계절성이 크고 기상 여건 변화에 따른 생산량 변동도 많기 때문에 가격안정이 매우 어렵다. 그래도 다음 두 가지 대안은 많은 노력과 연구가 필요한 과제이지만 농산물 가격안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이헌목씨가 추진하고 있는 전국 단위 품목별 농민의 조직화 사업이다. 고추, 양파, 사과, 오미자 등 각 품목별로 농민이 주도하는 전국에 걸친 조직을 만들어 생산 조정 등을 통해 농산물 가격안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품목 문제는 해당 품목을 생산하는 농민이 우선 해결한다는 원칙하에 정부의 품목 관련 정책도 품목 조직과 협의하여 수립․집행한다. 그리고 품목조직화 정도에 따라 정부는 정책 위임과 지원을 차등화 한다. 이러한 품목별 조직이 농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잘 운영된다면 농산물 가격안정 등의 효과는 클 것이다. 현실은 품목별 전국 조직화 작업이 쉽지 않고 앞장서 할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이지만 국내에 우리 농산물을 대상으로 한 선물시장의 활성화와 추가 도입이다. 2008년 돼지고기 선물이 도입되었으나 홍보와 지원 부족 등으로 실적이 미미한 상태이다. 추가 도입의 대상 품목은 생산과 수요가 충분하고 가격 변동이 큰 닭고기, 고추(고추가루), 양파, 배추, 사과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농산물 선물시장은 1848년 미국 시카고에서 밀, 옥수수 등의 가격 폭등과 폭락을 방지하기 위해 농민과 농산물 가공업자가 만든 파생상품시장이다. 당시 작황에 따른 곡물가격의 급등락으로 농민과 곡물 가공업자 모두 안정적인 경영이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민과 가공업자는 곡물을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사고파는 선도(forward) 거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거래를 쉽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 거래 대상 곡물의 품질과 계약 조건을 표준화 하고 증거금 제도를 도입해 선물(futures)거래로 발전시켰다. 이후 농산물 선물거래는 세계 여러 나라에 도입되었고 대상 품목도 주요 곡물, 육류, 과일, 야채 등으로 시장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농산물 선물거래에 이어 금․은 등 귀금속, 원유, 비철금속, 금융상품 등의 선물거래도 생겨났다.
한국은 농산물 시장 규모가 작아 어려움이 많겠지만, 제도를 잘 디자인하고 정책 당국 홍보와 강력한 지원이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제도화된 농산물 선물시장은 재정부담 없이 농산물 가격안정을 유도할 수 있다. 또한 실패한다 하더라도 추가적인 투자 없이 한국증권거래소, 농업정책금융보험원, 농협 등 기존 관련 조직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 한번 추진해 볼만한 정책과제이다.
첫댓글 또박또박 시간을 들여 잘 읽었어요.
이 글이 나오기까지 적지않은 농업분야 자료 탐색과,
저자의 아울러진 농업분야의 직관력이 있어야 될텐데,
하여튼 좋은 글에다 멋진 idea 같소.
참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