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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기도 -
모든 기도는 영적이라야 한다. 영적이지 않은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 없고 효력도 없다. 만일 오늘날 이 땅의 모든 기도가 영적인 기도라면 오늘날 믿는 이의 영적인 업적은 더 많을 것이다. 육에 속한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기도 안의 ‘자아의 뜻’은 기도의 영적인 용도를 잃게 한다. 오늘날 이들은 기도를 그들의 뜻이 이뤄지게 하는 조력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식이 약간 있다면 기도란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그분께 말해내는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 육체가 어디에 있든지 육체는 마땅히 못 박혀야 한다. 심지어 기도 안에도 육체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에는 사람의 뜻이 섞일 가능이 없다. 동기가 선하고 사람들에게 심히 유익된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이 시작하고 그분이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믿는 이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을 해야 할 뿐 그에게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지시할 권리가 없다. 믿는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 외에 하나님의 일에 무엇을 공헌할 능력이 없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자아의 뜻에서 나온 일들에 대해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다. 또한 이러한 기도를 육에 속한 기도로 만드신다.
믿는 이가 참으로 영적인 영역에 들어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사람에게 공급해 줄 만한 생명이 없으며 사탄을 대적할만한 어떤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때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근원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도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참된 기도는 간구하는 자의 헛됨과 듣는 자의 부요함을 나타낸다. 만일 육체가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참으로 비어 있는 상태‘가 되지 못했다면 그 기도는 무슨 소용이 있고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적인 기도는 다름이 아닌 그 기도가 육체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믿는 이 자신이 생각해 내거나 좋아하거나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다. 영적인 기도는 영 안의 기도로써 그의 기도가 직감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구하는 것이다. “무시로 영 안에 기도하는”(엡 6:18) 은 성경의 명령이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영 안에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육체 안에서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자마자 입 벌려 무엇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고자 하고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 안 다음 간구해야 한다. 전에 우리가 힘써 우리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지 않는가? 여기에 육체가 설 땅이 없다. 당신의 원함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을 구해야 한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된 영적 기도가 없다.
모든 영적인 기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해야 할 바를 보여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필요를 보여 주시고 그 다음 직감 안에서 그 필요를 짊어지게 하신다. 직감적인 부담이 바로 우리 기도의 근거이다. 그러나 많은 때에 우리의 부주의로 직감 안에 있는 많은 미세한 느낌들이 우리에 의해 소홀히 여겨진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직감 안에 있는 부담을 넘어설 수 없다. 직감에 의해 시작되지 않고 메아리치지 않는 기도는 믿는 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육체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의 기도가 영적 영역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육체에 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약함을 시인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줄 모르므로(롬 8:26) 성령의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그런 다음 성령께서 가르치신 대로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도할 말씀을 주셨다면 기도할 말씀도 주실 것이다. 후자의 필요는 전자와 똑같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무능함을 시인할 때만 우리 영 안에 있는 성령의 운행하심을 의지하여 그분의 기도를 발할 것이다. 육체를 의지한 일이 헛된 것이듯 육체를 의지한 기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으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생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전 14:15, 원문 참조). 기도할 때에 우리의 영은 생각의 동역이 필요하다. 믿는 이는 영 안에서 그의 기도에 대한 답을 얻지만 그 얻은 것을 생각 안에서 깨닫는다. 영은 기도에 대한 부담을 얻고 생각은 그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기도해 낸다. 영과 생각의 이러한 움직임이 있은 후에야 믿는 이의 기도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도가 생각의 사상에 지날 뿐 영의 계시가 없기 때문에 믿는 이 자신이 기도의 발원지가 되어 버린다. 진실된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한 것이고, 그들의 영 안에 느끼고 생각 안에서 깨닫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도해 내는 것이다. 사람의 영과 기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믿는 이가 영 안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 안에서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루 종일 육체를 따라 행하다가 기도할 때에 영 안에서 기도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기도할 때의 상태는 결코 생활의 상태와 너무 멀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의 영성의 상태는 그들이 영 안에서 기도할 자격이 없음을 나타내준다.
사람의 기도의 성질은 그 사람의 생활의 상태로 결정된다. 육체에 속한 사람이 어찌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다 영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도 육체에 떨어진다. 그러나 만일 영에 속한 사람이 끊임없이 영 안에서 기도한다면 그의 기도는 그의 영과 생각을 하나님과 조화된 상태로 유지할 것이다. 기도는 영을 훈련하는 것이다. 영은 훈련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만일 기도가 소홀히 여겨진다면 영은 위축될 것이다. 기도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주님의 일도 기도를 대치할 수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이 바쁜 고로 기도를 많이 못한다. 이런 사람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기도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대적을 이기게 하고 그다음 밖에서 그를 처리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대적과 싸워 본 사람은 그들이 일어나 얼굴을 맞대고 싸울 때에 대적이 이미 패한 것을 볼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훈련 속에서 점점 강해지는 사람이다. 만일 믿는 이가 늘 영 안에서 기도한다면 그의 영의 기능은 발전하여 영적인 일에 있어서 아주 예리한 느낌을 갖게 되고 모든 영성의 혼미함이 제거될 것이다.
영에 속한 믿는 이의 현재의 필요는 바로 자기 영 안에 있는 직감을 살피고 대적의 공격을 알며,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깨달아 안 다음 그 깨달은 것을 하나씩 표현해 내는 것이다. 믿는 이는 마땅히 신속히 영 안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여 즉시 기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체험은 기도로 이룬 것이 어떤 일보다 더 놀랍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기도는 또한 일종의 전쟁이다. 이는 기도가 대적과 싸우는 싸움에서의 전신갑주(엡 6:18)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영 안의 기도만이 효력이 있다.
대적을 물리치고 그의 모든 궤계를 대적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영 안에서의 기도이다. 기도는 파괴하는 일도 하고 건축하는 일도 한다. 즉 죄와 사탄으로부터 온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건축한다. 이로 보건대 기도는 영적인 일과 영적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다. 영적인 일의 성공과 싸움에서의 승리는 모두 기도로 이루어진다. 만일 믿는 이가 기도에 있어서 실패한다면 모든 것에 실패한 것이다.
- 영적인 전쟁 -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침례를 체험하기 전, 믿는 이는 엘리사의 종과 같이 영적인 세계의 실재에 대해 아주 혼미하다(왕하 6:15 - 17). 비록 그가 성령의 가르침과 지시를 받을 수 있지만 생각 속의 깨달음이 있을 뿐 영 안의 계시가 없다. 성령의 침례를 체험한 후에야 믿는 이의 영의 직감은 예민해져 다른 영적인 세계가 그의 영 안에 열리게 된다. 믿는 이가 성령의 침례를 체험할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뛰어난 능력을 접할 때이자 인격이 있는 하나님과 접촉할 때이다.
영적인 전쟁은 이러한 때에 실제적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1) 바로 이때에 흑암의 권세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성령의 인격과 일을 흉내 내려하고, (2) 바로 악령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골고다 이후에야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강론하였고 오순절 후에야 영적인 세계의 실재성을 보게 되었다. 성령 침례는 영적 전쟁의 기점이다.
믿는 이가 성령의 침례를 체험하여 인격체인 하나님과 접촉하고 영이 해방되며 자유함을 얻고 영적 세계 안에 있는 인물의 실체를 느낀 후 그에게 지식이 있다면 - 비록 영에 속한 사람이 지식이 있을지라도, 그의 지식은 한순간에 얻은 것이 아니며 많은 시험을 거친 후에야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 그는 이때 사탄과 교전하게 된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만이 영적 대적의 실체를 알아 그와 교전할 수 있다(엡 6:12). 이러한 전쟁은 혈기의 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고후 10:3~4). 전쟁이 영적인 것이라면 병기도 역시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은 사람의 영과 대적의 영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영과 영의 싸움이다.
믿는 이가 영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면 영 안의 이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의 영 안에 능력을 더 하실 때 그는 그의 영을 사용하여 대적과 '씨름'할 수 있게 된다. 오직 믿는 이가 영에 속할 때만 사탄과 그의 왕국의 실체를 보게 되고 어떻게 영으로써 그를 대적하고 공격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전쟁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적의 공격과 방해공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영에 속한 믿는 이를 여러 가지 수단으로 공격한다. 때로는 사람의 감정을, 때로는 육신을 공격한다. 믿는 이의 일과 환경을 방해하는 일이 많다. 영적 전쟁의 또 다른 면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공중에서의 사탄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의 일과 계략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는 사탄을 향해 영적 능력으로 싸우고 기도의 말로써 그의 계략과 일을 파괴한다. 비록 때때로 우리는 그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그것을 향하여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는 우리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사탄과 싸우는 데 있어서 이상의 원인 외에 또 한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고 사탄에게 속임당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다(계 33장, 38장 참고). 믿는 이가 속임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성령의 침례를 체험하고 영의 예민한 직감을 얻었다 하더라도 대적의 간계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직감 뿐 아니라 영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만일 그가 영의 인도를 모르고 피동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면 대적의 포로가 되고 만다. 믿는 이가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이때에 영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이성을 거스르는 느낌이나 체험을 좇는 것이다. 또한 이것들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믿는 이가 성령의 침례를 받은 후에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믿는 이가 자신의 연약함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서 자신은 초자연적인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속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믿는 이의 영은 두 방면의 영향을 받는데 첫째는 성령이고 둘째는 약한 영이다. 만일 믿는 이가 자기의 영의 성령의 지배만 받고 악한 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 속한 영”(고전 2:12)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한 영적인 대적이다. 만일 믿는 이가 악한 영을 향해 그의 영을 닫지 않고 그것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악한 영은 속임수로 믿는 이를 혼돈케 하고 꾸밈을 통해 믿는 이의 영을 점유하게 된다.
믿는 이가 온전히 영에 속할 때에 그는 초자연적인 세계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에 속한 것’ 과 ‘초자연적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양자를 혼돈하므로 악한 영에게 속는 믿는 이들이 많다. 영에 속한 체험은 믿는 이가 그의 영에서 가진 체험이다. 초자연적인 체험은 다 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육신의 감각 기관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혼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믿는 이는 결코 초자연적인 체험을 영에 속한 체험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믿는 이는 마땅히 자기 체험이 외부적인 감각 기관에서 비롯된 것인지 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외부적인 비롯된 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믿는 이는 결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 외에 사탄도 초자연적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 안의 느낌과 외적인 표현이 어떻든 믿는 이는 그 근원을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한다.
요한일서 4장 1절을 반드시 준행되어야 할 가르침이다. 대적의 거짓된 일은 대부분 믿는 이의 상상을 초월한다. 만일 믿는 이가 겸손히 자기 자신이 속임당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속임을 적게 당할 것이다. 대적의 속임수가 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영적인 전쟁에서 믿는 이가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고 나가서 싸운다면 대적은 들어와서 그의 영적인 힘을 억누를 것이다. 영적인 전쟁은 곧 믿는 이의 영과 대적의 영과의 싸움이다. 만일 믿는 이가 이미 속임을 당했다면 그의 전쟁은 자유를 위한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이미 자유하고 승리했다면 그의 싸움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한 대적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정복하는 태도로 사탄의 모든 계획과 일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을 영의 전쟁이다. 즉 영의 능력이 필요한 전쟁이다. 믿는 이는 어떻게 영으로써 대적과 ‘씨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를 위해 영이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대적이 어떻게 공격하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싸우길 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영의 법을 깨달았다면 그는 그가 이긴 것은 죄만이 아니라 사탄도 이긴 것을 발견헐 것이다.
강건하고 능력 있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사도가 영적 전쟁을 다룬 성경에서 이것을 가르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 영적 전쟁의 문제를 다룬다(11-18절). 그러나 능력과 강건하게 함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사도는 3장 16절에서 이미 이것을 말한 바 있다.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6:11).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속사람은 사람의 중심으로써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만일 영이 약하다면 모든 것에서 약할 것이다. 영이 약하게 될 때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믿는 이로 하여금 악한 날에 대항하지 못하게 한다. 믿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강건한 영이다. 어둠의 권세게 공격하는 것은 사람의 영이다. 만일 믿는 이가 전쟁의 성격을 모른다면 영 안에서 권세 잡은 자들을 대항할 수 없게 된다.
많은 믿는 이들은 그들의 모든 일에서 순조로울 때에 그들의 영은 아주 가볍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그의 영은 혼란되고 두려움과 근심이 생기며 침체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왜 실패했는지를 모른다. 믿는 이가 전쟁에서 사탄의 목적을 알 때 비로소 승리하게 된다. 사탄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 믿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승천의 위치를 잃게 하고 그들의 영을 침체되게 한다. 위치(지위)는 전쟁에서 핵심이 되는 역할을 한다. 믿는 이의 영이 침체될 때 그는 승천의 위치를 즉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자기의 영이 강건하게 보존되게 해야 하고 대적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믿는 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위해 영 안에 성령의 능력 주심을 허락하셨는지를 깨달을 때에 그는 대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필요성을 알게 된다. 대적을 공격하는 기도와 씨름을 통하여 그의 영은 점점 강건케 된다. 육신의 씨름을 하는 사람이 씨름할 때에 근육이 움직이듯 믿는 이가 원수와 싸울 때에도 그의 영에 힘이 더해져야 한다. 악한 영의 공격은 믿는 이의 영을 침체되게 하고 이로 인해 혼이 고통을 당하게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원수의 궤계를 알고 모든 일에서 양보하지 않고 그를 대적한다면 우리의 감정적인 혼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 영 안의 대적함은 원수로 하여금 공격하지 못하고 방어 자세만 취하게 한다.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격하는 것이다. 대적함 곧 영적 전쟁중에서의 대적함은 의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영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대적한다는 것은 압제하는 능력을 대항하여 벗어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영 안에서부터 ‘길을 막아 놓는다면’ 대적은 도망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원수를 대적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혹은 사탄이 이미 당신을 공격하였는데도 당신은 그를 대적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은 억압을 당하고 침체될 것이다. 당신의 영의 탁월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며칠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은 영은 항상 억압당하는 영이다.
우리의 대적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검이다. 믿는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영과 말씀‘으로 변한다. 이때 비로소 그는 그것을 대적하는 병기로 사용할 수 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효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원수의 모든 거짓말을 타파할 줄 안다. 오늘날 이러한 전쟁이 영적인 세계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이것을 느끼며 볼 수 없지만 영 안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인정할 것이다. 원수의 속임수로 원수에게 묶인 사람은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 죄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 외에 믿는 이를 묶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대개 초자연적인 체험에 기인한다. 믿는 이는 초자연적인 체험이 기묘하고 감정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부주의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초자연적인 체험이 믿는 이를 교만하게 하고 스스로 옳다 하게 할 뿐, 생명 안에서의 성결과 공의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고 일에 있서도 영원하고 실제적인 효력이 없게 하는 것을 모른다,악한 영의 속임수가 성공할 때 그는 믿는 이 안에서 어떠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그는 육체를 따라 행하게 된다.
묶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방할 수 없다. 믿는 이 자신이 체험적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온전히 벗어날 때만 승리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점차적으로 개인적으로 성령 안의 침례를 체험해야할 중요성을 깨딛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위험이 있다. 아마도 악영에 사로잡힌 사람도 성령 안의 침례를 체험한 사람처럼 날로 증가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영적 전쟁을 치룰 줄 알고 원수의 속임수로부터 믿는 이를 구원할 줄 아는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이다. 만일 하나님의 교회가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모르고 영으로 대적과 싸워야 하는 줄을 모른다면 교회는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는 사람들을 일으키시를 원한다.
- 영적 전쟁에서 경계해야 할 것들 -
믿는 이의 생명에서 매 단계마다 그 단계의 위험이 있다. 새 생명은 쉬지 않고 자기와 상반된 모든 것과 싸운다. 최초에 육신에 속할 때는 죄와 싸운다. 그런 다음 혼에 속할 때는 천연적인 대적과 싸우게 된다. 믿는 이가 영에 속할 때에 영적 세계의 악한 영은 그의 영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칭한다. 이는 서로 영으로써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이지 않은 믿는 이에게는 이러한 위험이 없다. 있어도 그 위험은 크지 않다.
믿는 이는 결코 영적인 한계에 이르면 어떤 문제도 없고 다시는 싸움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전쟁터에서의 생활로써 주님 앞에 가기 전까지 전신갑주를 벗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육체에 속할 때에는 육체에 속한 씨름과 위험이 있는 반면에 영에 속할 때에도 영에 속한 씨름과 위험이 있다. 광야에 있을 때는 아말렉 사람과 싸우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싸운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영에 속하기 이전에는 사탄과 그의 악한 영이 믿는 이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믿는 이가 영에 속하고부터는 이 모든 싸움과 위험이 뒤따른다.
대적이 우리의 영을 주의하기 때문에, 영적인 믿는 이는 자기 영을 정상적인 상태에 보존하고 항상 영을 사용해야 한다. 신체의 모든 느낌을 조심스럽게 취해야 한다. 초자연적인 느낌과 어떤 일에 대해 몸에서 지나치게 인식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분란하지 않고 온전히 잠잠해야 한다. 신체적인 느낌도 요동하지 않고 완전히 잠잠하게 해야 한다. 또한 영이 안식을 잃게 하는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한다. 그리고 의지로 모든 거짓된 것을 사양하고 거절하며 전심으로 영만을 좇아 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을 좇아 행한다면 이미 영적 전쟁에서 진지(陣地)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 영적 전쟁에서 전심으로 주의하지 않아서는 안 될 한 가지는 바로 우리의 영을 피동적인 상태에 두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도가 영으로부터 비롯되고 영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우리의 영이 성령의 감동받는 것을 기다리고 우리의 온 존재가 성령의 인도를 기다릴 때의 위험은 바로 우리의 영과 우리 자신이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지는 것이다. 피동적인 상태보다 더 사탄으로 일하게 아는 것은 없다. 한 면에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지 말고 성령을 순종해야 한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 혹은 온 존재의 어떤 부분이 기계화되어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영은 마땅히 온 존재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다스리게 하고 능동적으로 성령과 동역하게 해야 한다.
영이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질 때 성령은 사람의 영을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성령께서 사람의 생명 안에서 일하시는 조건은 사탄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람이 살아 있고 전적으로 그분과 동역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 그분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그분과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믿는 이의 인격을 말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이 완전히 멈추고 그가 대신해 일하기 원한다. 그는 사람이 피동적으로 자기 일을 받도록 요구한다. 그는 사람을 자기의 기계로 만든다.
영적인 교리에 대하여 우리는 극단과 오해에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육체의 일을 거절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극단적인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오해로부터 나온 결과에 대하여는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아주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에게 속하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헛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행하신 일 외에 영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모두가 진리이다. 만일 믿는 이가 온전히 이렇게 한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로 인해 생기는 극단적인 위험이 있다. 많은 믿는 이가 오해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공백’으로 만들어야 하며, 성령께서 자기 생각을 대신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에 속한 인간의 감정의 애호도 있어서는 안 되고, 성령의 기쁨만을 자기 마음속에 두어야 하며, 자기 뜻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말고 성령께서 자기를 대신해 판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어떤 일을 대하든지 잠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자신은 영을 사용하여 성령과 동역하지 않고 피동적으로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안에 어떤 움직임이 있을 때 이것이 다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체의 행위를 제하고자 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성을 소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기계로 만들어서 그분과 동역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상과 애호와 뜻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가 생각하고 애호하고 주장하는 것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주장하기를 원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사상과 애호와 주장을 대치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우리 자신은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고 좋아하며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나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이어야 한다(이 점에 대하여는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완전히 피동적인 위치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외부적인 힘이 대신 움직이게 한다면, 우리의 영은 피동적인 상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믿는 이가 자기의 영을 사용할 줄 모르고 외부적인 힘에 의해 자기 영이 ‘움직이기’를 바란다면 사탄은 그에게서 큰 이익을 취할 것이다.
성령과 악령의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령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사람이 스스로 하게 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개성을 제하지 않으신다. 악령은 사람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 그는 사람의 영을 기계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영이 피동적인 것(곧 온 존재가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짐) 은 악령이 일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은 믿는 이의 동역을 얻지 못함으로 일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도리어 악령으로 그를 공격하게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영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령과 접촉할 위험이 없다. 그러나 그기 이미 영에 속했다면 악령은 그의 영을 공격할 것이다. 육에 속한 믿는 이에게 영이 피동적이 되고 거짓 체험을 가질 위험이 없으며 오직 영에 속한 자에게만 있다.
믿는 이가 이렇게 육체를 진멸하는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므로 자기의 영을 피동적인 위치에 떨어지게 하고 악령이 성령인 척 가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믿는 이가 살펴보지도 않고 감동이 있는 것은 다 셩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령 외에 그의 영향에 영향을 주는 악령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탄에게 지위를 남겨 두고 진보하지 못하며 그들의 도덕과 두뇌와 건강은 파괴되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많은 믿는 이가 ‘성령 안의 침례’를 체험한 후에 만나는 상황이다. 이는 믿는이가 이러한 체험을 가질 때 그는 즉시 영적인 세계(귀신을 포함함)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어 그가 성령 혹은 악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성령의 침례를 체험할 때 그는 초자연적인 체험을 얻는 것이 곧 성령의 침례를 체험하는 것으로 여긴다. 물론 그것이 영의 침례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영 안에서의 침례인지를 몰랐다. 성령 안에서의 침례도 영의 침례이고 악령 안에서의 침례도 영의 침례인 것이다. 많은 믿는 이는 성령의 침례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은 그의 영의 동역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의 개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에게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때문에 그는 피동적인 위치에 떨어지게 되고 자기 뜻을 잃어버리며, 외부적인 능력에 의해 불살라지고 묶임을 당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악령의 침례이다.
어떤 믿는 이가 체험한 침례가 성령의 침례인 것은 확실하지만 침례 받은 후 영과 혼의 능력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속임을 당한다. 이때 그는 자기에게 특별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이제 성령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주장하지 않고 어떤 일에서든지 피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많은 특이한 즐거운 느낌을 그에게 주고 많은 이상과 꿈과 기타 뛰어난 체험이 그에게 임한다. 그러나 믿는 이는 자기의 영이 피동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체험을 갖게 되었음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런 체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그 영으로부터 온 자신의 느낌과 영적인 것에서 온 초자연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는 여전히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피동적인 것인 데 떨어지고 영의 분별력을 잃을 때 그는 원수의 속임을 많이 받게 된다.
믿는 이의 영이 피동적이 될 때에 그의 양심은 자연히 뒤따라 피동적이 된다. 믿는 이의 양심이 피동적일 때 그는 자신이 이제는 어떤 소리나 성경 구절을 통하여 직접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성령께서 다시는 그의 양심이나 직감에서 발한 시비(是非)를 통해 자신을 판단하고 인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제 자신이 인도받는 가장 높은 법을 터득했으므로 성령께서 친히 자기에게 하신 말씀은 무슨 성경 구절을 통해 알려 주는 것을 들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자기의 양심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을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지게 할 때에 그의 생활은 원수의 속임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는 다름이 아닌 사탄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양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성령도 그분의 일하시는 원칙에 따라 그의 양심을 사용하여 그를 돕지 않으신다. 오직 사탄만이 기회를 타서 초자연적인 음성으로 믿는 이의 양심과 직감의 인도를 대치한다.
양심이 피동적으로 악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어떤 믿는 이에게 그의 도덕 표준을 낮추고 부도덕한 일을 부도덕한 일로 여기지 않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이 더 고상한 원칙에 따라 생활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어떤 믿는 이는 전진하지 않고 생활과 일에서 주춤거린다. 그들은 그들의 직감으로 성령의 뜻을 살펴서 알지 않고,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으며, 다만 밖의 초자연적인 음성을 따라 행동하는 기계가 되어 버린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될 때에 그들은 자기의 이성과 양심 그리고 다른 사람이 해준 권면의 말을 상관하지 읺고,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다. 어떻게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데 이것은 그들이 좇아 행하는 것이 어떤 믿는 이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가 말한 “자기 양심이 화인 맞은”(딤전 4:2) 사람과 매우 가까우며 그들은 양심의 느낌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전쟁을 하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영을 항상 활동하는 상태에 두어야 하고, 완전히 성령을 순종하되 피동적으로 순종하게 두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속임수를 면할 수 없다. 또한 만일 우리의 영이 활동하지 읺는다면 비록 우리의 영이 원수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은 닫힌 상태가 되고, 사탄은 출구를 얻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을 봉쇄한다. 우리는 일할 수 없고 주님을 섬길 수 없으며 싸울수도 없으며 마치 압박을 받는 것 같다. 우리의 영은 활동적이고 밖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또한 늘 사탄을 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악한 영의 여러 가지 공격을 초래하게 된다.
영적인 전쟁에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원칙을 쉬지 않고 사탄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이 공격받지 않게 하려면 응당 공격 자세를 취해야 한다. 악령을 공격하는 것만이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 방법이다. 믿는 이가 영적인 영역에 들어갔음에도 날마다 영 안에서 원수를 대적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늘 영 안의 기도로써 사탄을 향햐 돌진하고 하나님께 사탄이 악한 영을 통해 행한 모든 일을 파괴하도록 간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하늘에서 떨어져 아주 약하게 되고 별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서는 어떤 감각도 없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날 때에는 영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믿는 이의 영이 피동적인 상태에 떨어지고 밖을 향해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지불식간에 그의 영은 사탄의 공격을 받아 닫히게 되고 포위당하게 된다. 믿는 이가 매일 매일 자기의 영이 ‘밖을 향하고’ 늘 사탄을 대적하게 한다면, 그는 자기의 영이 활동적이고 날마다 강건케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믿는 이는 반드시 영적인 생활에 대한 모든 오해를 제해 버려야 한다. 믿는 이가 영적인 영역에 이르기 전에 그는 늘 다른 형제와 같이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한다. 그는 온전히 즐겁고 종일토록 즐거워하는 생명을 소위 영적인 생활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영적인 생명에는 사람 자신을 즐겁게 할 만한 것이 없다. 영적인 생활은 날마다 싸우는 생활이다. 만일 당신이 영적 전쟁을 영적인 생활과 분리시킨다면 그런 생활이 영적이지 않은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영적인 생활은 고난 받는 생활이고 깨어 있음과 수고와 피곤과 환난과 마음 아픔과 싸움이 가득한 생활이다. 이것은 자기의 즐거움을 돌보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생활이다. 만일 당신이 영적 전쟁을 영적인 생활과 분리시킨다면 그런 생활이 영적이지 않은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영적인 생활은 고난 받는 생활이고, 깨어 있음과 수고와 피곤과 환난과 마음 아픔과 싸움이 가득한 생활이다. 이것은 자기의 즐거움과 돌보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생활이다. 믿는 이가 육에 속할 때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영적인 즐거움을 위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서 그는 참된 영적인 용도가 없다. 그는 자기의 죄와 생명에 대해 죽음의 태도를 취한 후에야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적인 생활은 영적인 유용함이 있는 생활이다. 이는 영에 속한 생활은 하나님을 위해 그분의 대적을 공격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늘 원수를 향해 싸우며, 가장 유용한 영을 피동적인 것이 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첫댓글 기도란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그분께 말해내는 것이다!
믿는 이가 참으로 영적인 영역에 들어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사람에게 공급해 줄 만한 생명이 없으며 사탄을 대적할만한 어떤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때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근원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도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참된 기도는 간구하는 자의 헛됨과 듣는 자의 부요함을 나타낸다.
영적인 기도는 영 안의 기도로써 그의 기도가 직감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 구하는 것이다.
“무시로 영 안에 기도하는”(엡 6:18) 은 성경의 명령이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영 안에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육체 안에서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자마자 입 벌려 무엇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고자 하고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 안 다음 간구해야 한다.
전에 우리가 힘써 우리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지 않는가?
여기에 육체가 설 땅이 없다.
당신의 원함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을 구해야 한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된 영적 기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