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32> 임승택
“윤회 벗어나고자 하는 삶의 통찰이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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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나무 밑에 앉아 수행하고 있는 인도인의 모습. |
불교가 발생하던 당시 인도에는 이미 수많은 종교.사상가들이 출현해 있었다. 초기불교의 〈범망경(梵網經, Brahmajlasutta)〉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에만 62종류 이상의 외도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속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상키야(Skhya)라든가 요가(Yoga) 등의 정통 6파 철학과 함께 유물론(Cravka)이라든가 자이나교(Jainism) 등의 비정통 학파들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불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성립된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는 고통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목적적 성향을 지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필자는 이러한 인도철학의 모든 유파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 개념을 업(業, karman).윤회(輪廻, sasra).해탈(解脫, moka).요가(yoga)라는 4가지로 파악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성격을 달리하는 모든 유파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 전제로서, 인도철학의 전 영역으로 통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업이란 ‘특정한 행위 혹은 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응보적 힘(retributive power)’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인도철학의 여러 유파에서는 형이상학적 입장에 따라 이것의 해석을 달리하였다. 예컨대 상키야라든가 요가 학파에서는 업의 개념을 물질세계의 변화 원리로 수용하였고, 자재신(vara)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파들에서는 신의 섭리라는 형식을 빌어 설명하였으며,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va)에 달라붙은 미세한 물질입자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업을 과거세와 미래세에 적용시킬 때 요청되는 개념이 윤회이고, 윤회의 속박을 벗어난 이상향이 해탈이며, 해탈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 수단이 요가이다. 따라서 이들 역시 업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설명되었다.
즉 상키야와 요가 학파에서는 윤회의 속박을 물질적인 법칙의 지배로 보았고, 그것을 벗어난 ‘순수 존재(purua)’에 대한 인식(viveka-khyti)에 요가 수행의 초점을 모았다. 또한 자재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여러 유파에서는 개인 행위의 도덕적 공과와 신의 섭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나아가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에 달라붙은 물질입자로서의 업을 제거하는 방법에 주력하여 고행주의로 나아갔다.
초기불교에서도 업.윤회.해탈.요가는 교리와 수행의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고통스러운 현실 삶의 원인을 진리에 대한 무지(avijj)로 보았다. 또한 업과 윤회를 물질적 원리라든가 절대자의 섭리가 아닌 미혹된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의식적 차원의 문제로 보았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수행은 현실 삶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근원인 무지의 제거라는 심리적 관점을 견지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업에 의한 조건으로 다가오는 실존상황을 통찰함으로써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무지의 제거를 통해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혜의 길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수행체계를 망라하는 계(戒, sla).정(定, samdhi).혜(慧, pa)의 삼학(三學)은 맨 마지막의 혜에 무게중심을 둔다. 요컨대 계와 정은 혜를 얻기 위한 조건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내면의 전환’에 있어
고원한 삼매 체험보다 늘 깨어있는 상태가 중요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yathta)’에 대한 통찰을 통해 탐욕과 집착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내면적 전환을 유도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수행은 ‘순수 존재(purua)’의 인식을 위한 고원한 삼매 체험의 요가적인 방법과 구분되며, 절대자의 섭리와 은총에 의지하는 유신론적 구원관과도 다르며, 혹독한 고행에 의해 모든 업을 완전히 소진시켜야만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이나교의 그것과도 맥락을 달리한다.
물론 초기불교에서도 통찰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삼매(samdhi)라는 마음의 안정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지혜의 개발과 마음의 안정이 유기적인 상관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는 2가지가 곧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이다. 지(止)와 관(觀)으로 한역되는 양자는 초기불교 이래로 수행을 이끌어 가는 양 날개 구실을 하였다. 이들을 계(戒).정(定).혜(慧)의 삼학에 배대하면 정과 혜가 곧 그것이다.
사마타란 특정한 대상 혹은 절대적 존재에 몰입하여 들뜸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수행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위빠사나란 일체의 현상에 대해 무상(無常).고통(苦).무아(無我)로 통찰함으로써 무지를 타파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위빠사나는 몸(身)과 마음(心)에서 발생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대한 지속적인 알아차림(pajnti)을 그 방법으로 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최근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혹자는 위빠사나를 위해 상수멸정(想受滅定)과 같은 고원한 삼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다른 혹자는 위빠사나의 수행에서 사마타는 배제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위빠사나의 실천에서 삼매는 필요한 것이지만, 기민한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낮은 단계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초기불교의 이상향인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의 순간에 요구되는 삼매가 곧 첫 번째 선정(初禪)이라는 〈빠띠삼비다막가(PS. vol.1. pp.168-170)〉의 구절을 통해서 뒷받침되었다. 나아가 〈선정에 관한 경전(AN. vol.4. pp.422-426)〉에서도 고원한 삼매의 상태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과 상수멸정(想受滅定)에서는 지혜의 통찰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초기불교의 수행이 위빠사나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관계는 다음의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마음이 들뜬 상태에서는 안팎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일차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이 지나쳐 한 방향으로 몰입되고 나면 일상에 대한 기민한 알아차림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고원한 삼매 체험보다는 항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가 더욱 중요하다. 나아가 삼매에 집착하여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통찰을 놓친다면 그러한 수행은 더 이상 불교적이라 할 수 없다.
앞에서 거론한 4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karman, kamma)이란 인과적 조건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특별한 섭리라든가 물리적 법칙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분히 심리적인 것으로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게 될 때에 그 구속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실존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을 통해 그것의 허울을 간파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실체성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셨다.
윤회(sasra)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의해 고통의 굴레를 스스로 붙잡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실존상황은 스스로에게 그 원인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이러한 윤회 또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무게에 비례할 뿐이다.
이와 같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해탈(moka, vimutti)이다.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이러한 해탈의 가능성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의 고원한 어느 시점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이다.
요가(yoga)란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실천적 지평이다. 초기불교 이래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실천은 요가짜라(yoga-cra)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요가는 외도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일상적인 사유와 분별의 절멸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혹독한 고행에 의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르침도 아니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현실 삶의 통찰을 통한 윤회로부터의 벗어남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필자가 파악한 깨달음이란 바로 이러한 맥락이며, 그 이후의 문제는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임 승 택/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88호/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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