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반 제2회 백일장 수상작품
빨 래
최 홍 순
오늘도 일어나 하룻밤을 잘 지켜준 ‘검둥이’와 ‘소파에게 가서 두 놈이 저질러놓은 오물을 치우고 사료와 새물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둥이는 꼬리를 치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꼬리를 치는데 소파는 내 앞으로 엎드려 살살 기며 아침을 반긴다.
아내는 조반준비에 바삐 움직인다. 부엌쓰레기를 수거하다 보니 화장실 앞에 어제 벗어놓은 양말이 눈에 거슬린다. 오늘은 복지회관의 수필반 야외행사가 있는 날이라 아내의 일손을 덜어줘야 하겠다. 세면을 하기 전에 더운물을 받아서 세제를 풀어놓고 양말은 물론 속내의를 빨기로 하고 밖에 있는 수도가 세면장으로 세탁물을 들고 나갔다. 실내화장실보다 활동공간의 여유가 있어 힘있게 빨래를 하여 빨랫줄에 널었다.
아내는 내가 늘 그러했기에 당연한 듯 쳐다보면서도 말도 꺼내지 않는다. 조금은 야속했지만 아내의 조반준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적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소양강 빨래터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어머니가 빨아놓은 세탁물을 강변 자갈 위에 널 때 도와드렸던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성장하면서도 빨래해주시는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커녕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한 일로 무관심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타향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 내 옷을 누가 빨아주나 생각하다가 하숙집 아줌마에게 내의까지 벗어드려야 했던 때의 홍당무가 되어 감사하기도하고 송구스럽던 일이 생각난다.
그땐 세탁소가 드물었던 시절이라 그래도 넘어갔지만 본격적으로 빨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군에 입대하여 본격적으로 내의를 세탁했어야 했다. 내 것을 빤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고참들이 휙휙 집어 던지며 깨끗이 빨아 건조하여 가져오라고 했던 때는 누구에게 원망도 못하고 빨래를 했어야 했다.
내가 고참이 되었을 때 후배에게 세탁을 시키지 않고 내 것은 내가 세탁하며 군생활을 하였다.
제대 후 또다시 객지에서 하숙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주인아주머니한테 빨래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깨끗이 빨아준 하숙집 아주머니께 가끔씩 답례를 해드렸지만 지금 생각해도 찜찜하기 그지없다.
고향집에 돌아와 여동생도 있었지만 내가 입는 옷은 어머니께서 해결해주셨다.
장가를 간 후 첫 번째 빨랫감 내의를 신혼 아내에게 내놓았을 때 얼굴이 붉어지며 안절부절 미안해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내는 뻔질나게 빨랫감을 내놓으라고 하였지만 게으른 나는 산뜻하게 내놓지 못했다. 그때의 내 주제를 나무라본다.
어느 집이나 가정일중에 빨래에 대한 비중도 음식 만들기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세탁기가 생기며 아내의 힘든 빨래는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아내에게는 늘 고맙다는 마음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다.
지금화 생각해보니 낳아주신 어머님께 빨래에 대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없다. 뭐라고 변명도 못하고 잇다. 어머니에 대한 평생은혜에 감사하며 살뿐이다.
내 세탁물을 해결해주는 아내에게 이 순간이라도 ‘고맙고, 감사하며,사랑한다’는 말을 아름다운 가평 자라섬 가을단풍편지를 맑고 푸른 하늘위로 보낸다.
빨 래
박 수 광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근무를 할 때 일이다. 하루는 현지인 친구가 자기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그 친구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밖으로 나와 화장실을 찾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자고 있는 친구를 깨웠다.
“야 화장실이 어디 있어? 그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더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면서 뒤에 타라고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대변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후에 그가 데려다 준 곳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였다. 그리고는 여기서 대변을 보라는 것이다. 아니 여기서 어떻게 대변을 보란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냇가 위쪽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두 여자가 보였다. 아니 빨래를 하는 곳에서 어떻게 대변을 보라는 것인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고 하는 수없이 하의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았다. 그들은 소변만 집에서 보고 대변은 동네 사람모두가 냇가에서 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이 냇물이기 때문에 토이렛빤장(긴화장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자카르타 근교를 차로 지나다 보면 개울이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여자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목욕을 하고 있는데 그 아래서는 대변을 보기도 하고 한마디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비위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은 우리와 달라서 빨랫감을 물에 적시어 돌이나 시멘트 바닥을 때리는 것이다. 한번 물에 적시어 때리고 다시 한번 적시어 때리는 것이 그들의 빨래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들이 빨래하는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혼자 웃은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우리나라에는 많은 미군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휴일이면 외출을 하여 우리나라의 풍습이나 신기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곤 했는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집 앞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계셨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흑인병사가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기에 겁이 나서 빨랫감을 팽개쳐 둔 채로 집으로 뛰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인니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과 같이 그 흑인병사도 어머니의 빨래하는 모습을 찍으려 했을 것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 어머니는 빨랫감을 모아 두셨다가 날을 잡아서 큰 냇가에 나가서 빨래를 하시곤 하였다. 요즘에는 옷감들이 대부분 합성섬유이기 때문에 삶는 빨래를 하지 않지만 그때의 빨랫감은 대부분 광목으로 만든 이불호청이나 치마저고리여서 빨래를 한 후에는 양잿물을 넣고 삶아야 하는데 워낙 빨랫감이 많다 보니 삶는 솥과 장작을 가져가서 삶고, 삶은 빨래는 모래밭에 널어 말려가지고 오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점심까지 싸가지고 가서 빨래 가는 날이면 소풍 가는 기분으로 신이 나서 어머니를 따라가곤 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어서 아무리 많은 빨래라도 손에 물 한 방울 무치지 않고 빨래를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냇가에서 손 시린 줄도 모르고 빨래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 야외로 나갔을 때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 “이런 곳에서 빨래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우리 아내는 지금도 잔잔한 것은 손빨래를 한다. 아무리 세탁기가 빨아준다고 해도 손빨래가 제일이라는 것이다.
하루는 아내가 “당신도 세탁기 돌리는 법을 배워두라”고 한다. 만일에 혼자 있게 되면 세탁기를 돌려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미리 배워두지 않아도 닥치면 할 수 있을 것이고 안되면 손 세탁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가 을
용 영 옥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
온 산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번 가을은 다른 어떤 가을보다도 가슴이 설레인다. 왠지 어디로 멀리 떠나보고 싶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나를 소녀처럼 마냥 재잘거리게 만들고 사색에 잠기게도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가을하늘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하늘이 아닌 것 같다. 더 높고 푸르며 둥실 거리는 뭉게구름과 새털처럼, 양떼처럼 떠다니는 구름은 파란 하늘과 어울려서 내 가슴을 더 들뜨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직장이란 테두리에 갇혀서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 같은 마음이 절로 자리해서 더욱 그런가 보다.
그래서 가을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42년을 같은 길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통영의 사량도를 다녀왔고, 인제 자작나무 숲과 인제군이 자랑하는 백담사 계곡도 가보았다.
물론 남편과는 가을이 깊어간다고 서둘러야 한다는 방송이야기에 우정 가을 단풍구경을 준비했었다. 아니 가을맞이가 늦을세라 미리 서둘러보았다.
정말 어느 결에 가을은 내 앞자락까지 와있었다. 수줍은 색시처럼, 곱디고운 여인네처럼 내 친구들과 나와 내 남편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춘천을 벗어나서 홍천과 인제로 가는 아홉살이 고개를 넘어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백담사계곡을 지나 봉정암과 오세암이 잇다는 백담사 위쪽의 오솔길은 모두에게 아름다운 가을이 잇기에 기쁨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빨간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나무, 울긋불긋 치장한 벚나무와 온갖 나무들은 온통 산을 불태우고 깊어가는 가을을 실감나게 하였다.
‘아! 이래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행복한 시간들을 이번 가을에 한껏 가져보았다.
다른 때보다도 가을의 멋진 풍광을 고스란히 느껴본 이번이었지만 가을은 항상 아름다움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바쁘게만 지나온 지난 긴 세월들 괜히 서글프고 쓸쓸하고 그리움도 밀려온다는 것이 나이 탓일까? 아니면 부족하고 서툴렀던 지난 일들이 안타깝고 후회스러워서 그럴까?
떨어져 내리는 잎새들과 발 아래에서 뒹구는 누런 나뭇잎들이 내 마음을 시리게도 만들고 스산하게도 만듬은 어쩔 수 없다.
이 가을이 지나면 나도 한 살이 더 늘고 잔디 위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서서히 나도 모르게 황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난 이 가을이 좋다.
낙엽을 태우면서 깊어져 가는 가을 냄새를 만끽하고 구르몽의 시를 읊조리면서 멋지게 타오르는 가을을 노래할 것이다.
‘시몬’ 너는 아느냐
‘시몬’ 나뭇잎 떨어지는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그리고 어느 가수가 부르는 노래도 구성지게 아니 신명 나게 불러도 볼 것이다.
이 가을이 지나고 더 멋진 내년의 가을을 꿈꾸기 위해서 오늘을 더욱 사랑하고 내일을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가을의 나뭇잎이 다 아닌, 이번 가을은 내게 더욱 기쁨을 주고 내 앞으로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도 본다.
그리곤 노년을 같은 취미로 함께하는 동호인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물론 내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