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1. 아잔타 석굴 ②
첫 굴원서 만난 초전법륜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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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외벽 조각> |
2002년 3월10일 새벽 5시. 아잔타 석굴 부근 투어리스트 방갈로 호텔에서 눈을 떴다. 밖은 아직 컴컴했다. 어제(3월9일) 해질 즈음에 본 ‘아잔타의 황홀한 모습’ 때문에 일찍 일어난 것이다.
아침 식사로 나온, 향내가 진한 전형적인 인도 카레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아잔타 전망대’(인도 정부가 최근 만든 곳)로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려 석굴을 찬찬히 살폈다. 찬란한 아침 햇빛아래 자태를 드러낸 아잔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국 장교 존 스미스가 제10굴을 발견한 전망대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올라가 계곡을 건넜다. 아잔타 석굴 위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존 스미스 전망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매표소로 가지 않고 석굴 뒤 쪽으로 간 것. 나무와 풀들이 초봄을 맞아 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차이탸굴인 19·26굴 압권
28굴 위 구릉부터 차례로 돌아 1굴 쪽으로 나아갔다. 아름다운 아잔타 석굴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느긋하게 구릉 위를 걸었다. 석굴 뒤 쪽 구릉을 40분 정도 걸어 제1굴 앞에 있는 매표소에 도착했다. 1인당 250루피(약 5달러 = 6,000원. 1달러 = 47루피)를 주고 입장권을 샀다. 인도 돈으로 치면 거금인 셈이다. 검표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굴원(窟院) 구역에 첫 발을 내디뎠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발끝에 느껴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1굴로 들어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입구에 차양이 쳐져 있었다. 연꽃을 들고 있는 유명한 ‘연화수(蓮華手) 보살’(파드마파니)과 금강저를 쥐고 있는 ‘집금강(執金剛) 보살’(바즈라파니) 등 벽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란다. 들어가는데 검표원이 “절대로 카메라 후레쉬를 터뜨려서는 안 된다.”며 강한 주의를 줬다. 차양 때문인지 굴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대신 참배객과 관람객들을 위한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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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여신상> |
시계방향으로 굴 안을 돌았다. 언뜻 보니 엘로라 석굴과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볼수록 “과연 대단하다” “아잔타는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굴은 그만큼 정교하고 거대하고 웅장했다. 불교사의 전개 및 개착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영광’이라 할만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잔타 석굴은 조성 시기에 따라 보통 3기로 나눠진다. 제1기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속하는 것들로 중앙의 제8굴~13굴까지의 6개굴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제9굴과 제13굴은 차이탸굴(내부에 스투파가 있는 예배당)이고, 나머지는 비하라굴(僧院窟)로 스님들이 살았다. 4세기에 시작된 굽타왕조(기원후 320 ~ 500) 당시 개착된 제2기 아잔타 석굴은 제6굴, 제7굴, 제14굴~제20굴 등 9개 굴. 이 중 제19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이탸굴이다. 나머지 제1굴~제5굴, 제21굴~제29굴은 제3기 즉 굽타시대 이후 조성된 석굴들이다.
아잔타 석굴들은 본래 기원전부터 조성됐지만, 제3기 석굴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굴원(窟院)이 만들어지고 조각과 벽화도 제작됐다. 굽타왕조와 인척관계에 있던, 당시 데칸고원 일대를 지배한 바카타카 왕조의 보호가 굴원 개착에 큰 힘이 됐다. 특히 6세기 이후 석굴 개착 기술이 진전되고, 대승불교가 정착하여 많은 불·보살상이 대두됐다. 동시에 힌두계의 여러 신들도 불교에 도입되는 등 ‘불교 판테온’이 확립돼 갔다. 불교 판테온(원개건축)이 확립되자 승원(僧院) 구조도 표준화됐고, 승원 입구나 내부에는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의 벽화·조각이 조성됐다. 아잔타 제1굴은 그런 굴을 대표하는 실례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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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위치도> |
시계방향으로 제1굴을 계속 돌았다. 사각형으로 배치된 기둥들에 의해 내실·외실로 구분된 중앙 홀이 보였다. 넓은 홀의 세 방면엔 승방이 있고, 정면 벽 중앙에 전실(前室)과 불당(佛堂)이 자리 잡고 있다. 홀에서 전실을 거쳐 불당 내부를 바라보았다. ‘가르침을 널리 펴는 손 모양’(전법륜인)을 한 부처님이 그곳에 계셨다. 대좌 아래쪽에 법륜이 있고, 법륜 주변에 사슴과 신자가 새겨져 있다. 사르나트에서 첫 가르침을 펴는 초전법륜(初轉法輪) 장면을 조각한 것이 분명했다.
6세기 이후 석굴기술 크게 발전
홀 중앙에 무릎을 꿇고 삼배 드렸다. 부처님의 첫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찌 불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불교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까지 전래될 수 있었겠는가. 초전법륜은 따라서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아잔타 제1굴에 첫 설법을 펴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불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금줄이 쳐져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서는데, 좌우 벽에 ‘연화수보살’과 ‘집금강보살’ 벽화가 보였다. 너무나 선명했다. 조명에 비친 두 보살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했다.
제2굴로 가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훨씬 따가워져 있었다. 동선(動線)을 따라 2굴부터 10굴까지 연이어 돌았다. 들어가는 석굴 마다 벌어지는 것은 입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감탄뿐이었다. “이렇게 성스러운 예술을 인간이 조성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만 들었다. 벽면과 기둥에 그려진 벽화도 눈길을 붙잡았다. 천불동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부처님을 그려놓은 석굴도 있고, 기둥마다 부처님을 묘사해 놓은 석굴도 있었다. 모든 굴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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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석굴 벽화> |
11굴, 12굴, 13굴, 14굴, 15굴, 16굴, 17굴, 18굴을 거쳐 아잔타 제일의 차이탸굴인 19굴에 들어섰다. 순간 숨이 막혔다. 화려한 조각의 스투파, 스투파 전면에 두드러지게 조각된 불입상(佛立像), 스투파를 중심으로 주변에 세워진 기둥들 등 전형적인 차이탸굴이었다. 기둥 돌을 손으로 만졌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1,400년 전 기둥을 만든 석공의 불심(佛心)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중앙 홀에서 스투파 전면에 두드러진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가사를 두 손으로 잡고, 천진한 미소를 띤 부처님이 거기에 서 있었다. 기둥들을 시계방향으로 돌아 20굴로 향했다.
1400년전 석공의 불심에 감동
감탄은 계속됐다. 21굴 ~ 25굴을 지나 26굴에 들어서는 순간 또 한번 크게 숨이 막혔다. 스투파와 전면에 두드러지게 조각된 불의좌상(佛倚坐像), 기둥으로 구분된 측랑 벽에 조각된 열반상이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불의좌상의 나발은 살아있는 듯하고, 감겨진 눈은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 미남이었다. 보고 또 보아도 지겹지 않았다. 스투파를 돌아 측랑으로 갔다. 열반상이 그곳에 있었다. 쿠시나가라에서 입적한 부처님을 묘사한 열반상.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오른 손을 머리 밑에 대고, 왼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입적한 부처님을 조각한 세계 최고 걸작의 하나. 무수한 제자들이 입적한 부처님 앞에서 오열하고,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다 존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28굴을 지난 다시 1굴 쪽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에 들어왔는데 태양은 어느 새 서쪽에 가 있었다. 인도 불교 석굴을 대표하는 아잔타. 마하라슈트라주 아우랑가바드에 속하며, 데칸고원 북서쪽 끝에 자리 잡은 아잔타.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에서 106㎞, 잘가온 역에서 50㎞ 지점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사이에 조성된 인도 불교석굴을 대표하는 석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어둠에 묻혀가는 와고라강을 쳐다보며 아잔타가 영원하기를 기원했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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