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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33> 화폐 이야기 (12) 한국의 돈 100원 주화 ⑤ / 임진왜란 육전과 권율 장군
이전 글(옹달샘 <32>)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임진왜란 육전(陸戰)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해전(海戰)만 쓰려고 했으나, 이순신의 연승으로 인해 일본군이 육전에 치중하는 바람에 얼마간 해전이 소강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개전 3개월 후에는 조선 육군이 승리하기 시작한데다 육전이 해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육전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전으로 되돌아간 이야기이지만, 1592년 7월 8일은 임진왜란 중 기념비적(記念碑的)인 날이었다. 이 날은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한산도대첩을 이룬 날인 동시에 육전에서 권율{權慄, 1537(중종 31년)-1599(선조 32년)}이 이치대첩(梨峙大捷)을 이룬 날이기 때문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고개’가 수없이 많다. 고개(pass)는 산의 언덕진 길을 의미한다. 그런 언덕진 모든 길을 일반적으로 ‘고개’라고 말한다. 고개는 대체로 네 종류로 나눈다. ① ‘영(嶺)’은 높은 산의 고갯길이다. 추풍령(秋風嶺), 조령(鳥嶺), 대관령(大關嶺), 한계령(寒溪嶺) 등이 있다. ② ‘재’는 순우리말로서 ‘영(嶺)’과 같이 쓸 수 있다. 그러나 ‘재’는 ‘영(嶺)’보다는 낮은 고개에 쓴다. ‘박달재’, ‘곰티재’ 등이다. ③ ‘현(峴)’은 ‘재’와 같기도 하고, ‘재’보다 낮은 고갯길이다. 서울 명동성당이 있는 종현동의 ‘종현(鐘峴)’은 순우리말 옛 이름으로는 ‘북고개’였다. 서울 갈현동의 ‘갈현(葛峴)’은 순우리말 옛 이름으로는 ‘칡고개’였다. ④ ‘치(峙)’는 언덕 정도의 고갯길이다. ‘이치(梨峙)’는 순우리말 옛 이름으로는 ‘배고개’였다.
권율 장군이 이치대첩(梨峙大捷, 1592년 7월 8일)을 거둔 ‘이치(梨峙)’는 ‘배티재’라고도 하는데,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 소재한다. 대둔산 자락인 이치(梨峙)를 넘으면 전남 완주군과 전주(全州)에 이르게 된다.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소조천융경), 1533-1597}가 2만 병력으로 전주를 점령하고 호남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배티재에 이르렀다.
한 달 전인 1592년 6월 5-6일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 1541-1607), 전라방어사 곽영(郭嶸, ?-?),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1537-1599)의 50,000명이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의 일본 기병 1,600명에 의해 대패했었다. 그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이광이 권율의 의견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패주하면서도 권율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권율의 뛰어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 권율이 동복현령(同福縣令) 황진(黃進, 1550-1593)과 함께 겨우 1,500명으로 배티재, 즉 이치(梨峙)에서 일본 제6군 20,000명의 진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것이 ‘이치대첩(梨峙大捷, 1592년 7월 8일)’이다.
그런데도 ‘행주대첩’은 잘 알면서도, ‘이치대첩’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알고 보면 이치대첩은 오히려 행주대첩보다 더 놀랍고 중요한 의의를 갖는 통쾌한 승리였다. 그러면 왜 우리 국민들은 이치대첩을 잘 모르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한산도대첩의 역사적 사실을 지우기 위해 한민족 말살 정책으로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건물들을 다 헐어버린 것 같이 이치대첩의 흔적도 다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한산도대첩 유적지는 1976년 성역화작업이 이루어졌으나, 금산이치대첩지(錦山梨峙大捷址)는 그동안 망각되어 있다가, 2000년 9월 20일에 겨우, 그것도 국가기념물이 아닌, 충청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육전(陸戰) 최초 승전인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의 이치대첩(梨峙大捷, 1592년 7월 8일 : 한산도대첩과 같은 날)을
기념하는 대첩비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주위 강대국들이 한 치의 땅도 넘볼 수 없는 강국이 되려면 경제에만 목을 매면 안 된다. 국방은 물론, 우리 역사도 제대로 챙겨야 한다. 역사를 잃으면 교육과 문화도 잃고, 끝내는 영토와 나라와 민족도 잃을 수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검인정(檢認定) 역사 교과서 논란을 보면 심히 염려스럽다. 한 나라의 역사 교과서와 역사 교육은 절대로 정치 논리, 진영 논리, 이념 논리로 가면 안 된다. 역사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흥정거리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야말로 국사는 양심적인 연구와 애국적인 토론을 거쳐 결정된 역사 교과서로써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덜너덜해져서 걸레처럼 된다. 한 나라, 한 국민이 한 역사를 말해야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역사를 말하면 어찌 되겠는가? 국어, 수학, 사회, 과학은 국정(國定) 교과서이다. 그런데 2003년 역사를 보는 다양한 사고, 어쩌고 하면서 국사(國史)를 검인정으로 결정했다. 역사관이 정립된 선진국에서는 자기 나라 국사를 검인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민족이 분단된 나라에서 검인정으로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역사는 국론의 뿌리이다. 그러한 자기 나라 역사가 두 개, 세 개가 되면 국론이 분열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용어 하나, 문장 하나 가지고 국론이 분열한다. 대한민국 역사가 애매하거나 분열하거나 혼란하면 좋아할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일본과 중국뿐이다. 일본의 독도(獨島) 시비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러한 증거이다. 일본과 중국은 영토를 침략하기 전에 사전작업으로 역사를 침략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무력으로, 그것도 전격적으로 남의 어떤 영토를 점령해버린다. 그것은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 빼앗기면 회복하기가 극히 어렵다. 일본과 중국은 늘 이것을 노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검인정 국사 교과서로 논란하고 있는 것을 보는 일본과 중국이 빙그레 웃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에 대해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국사 교과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 국가‧민족적인 중대사이다.
이치대첩의 의의(意義)는 매우 크다. ①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첫 육전 승리였다. ② 이치대첩 덕분에 호남 곡창을 지킬 수 있었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만으로는 호남 곡창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권율의 이치대첩만으로도 호남 곡창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날 수륙(水陸) 동시 대첩 덕분에 호남 곡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 곡창을 내줬더라면 일본은,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 쳐들어갔을지도 모른다. ③ 조선을 무시하던 명나라 장수들의 조선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④ 이치대첩을 통해 권율은 용인전투 패배를 설욕했다. ⑤ 이치대첩 이래로 육전은 권율의 지휘로 수행되어 가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권율{權慄, 1537(중종 31년)-1599(선조 32년)}은 이순신{李舜臣, 1545년(명종 원년)-1598년(선조 31년)}보다 8년 연상이다. 이순신이 문과를 준비했으나, 28세에 무과에 급제했었다. 그런데 권율은 1582년(선조 15년) 45세에야 문과에 급제했다. 늦깎이 중의 늦깎이 급제였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서 대단했던 가문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 권철{權轍, 1503(연산군 9년)-1578(선조 11년)}은 머리가 명석한 문관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여 무관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권철은 도승지(都承旨), 사은사(謝恩使, 답례로 중국에 가는 사신), 경상도‧전라도 관찰사(觀察使), 형조판서(刑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의정(右議政), 등극사(登極使, 왕의 등극과 관련해서 중국에 파견된 사신),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네 번이나 지냈다. 그가 영의정일 때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권철은 나이 많음을 핑계로 영의정을 스스로 사퇴(辭退)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에게 궤장(几杖 : 공이 많은 대신으로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왕이 내리는 명예로운 지팡이)를 하사했다. 권철은 궤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런 명재상의 아들인 권율이 왜 45세에 과거에 급제했을까?
권율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기골이 장대하고 통이 컸으며 호방(豪放)한 성품이었다. 그래서 그는 벼슬에 영 뜻이 없고 팔도를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전국을 주유(周遊)하는 한량(閑良)이었다. 아버지 권철도 그러한 아들에게 강제로 과거에 응시하게도 하지 않았다. 권철이 76세인 1578년 41세의 권율이 싸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권철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아들을 본 권철이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곧 운명(殞命)했다. 유언(遺言)이 된 그 말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그제야 권율은 크게 깨닫고, 3년상(三年喪)을 치른 후 1581년(44세) 아버지에 대한 불효(不孝)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1582년(45세) 과거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를 1년 준비하여 급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은 권율을 위해 있는 말이다. 사람이 굳은 결심을 하고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면 1년을 1,000년의 가치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권율이 보여주고 있다. 죄인(罪人)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속죄(贖罪) 받는 것이 중요하다. 속죄 받으면 과거의 죄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 속죄를 절대자(絶對者)로부터 받는다면 더욱 귀하고 확실한 것이다. 새사람이 되어 정신을 일도(一到)하면 어떤 일도 다 이룰 수 있다. 권율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문관, 그것도 45세 때 문과에 늦깎이로 급제했는데도, 임진왜란의 첫 육전을 승리로 이끌고 연승가도(連勝街道)를 달리면서 나라를 구하는 데 큰일을 한 권율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만일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권율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너무 늦게 관료사회에 나온 탓에 자기보다 젊은 상관들에 막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의 관직 이력도 보면 화려하지 않고, 밋밋했다. 권율은 그야말로 대기만성형(大器晩成型)이었다. 그것도 문관이 전투에서 첫 승리를 이룬 것이 56세였다. 그래서 문관이지만, 그를 ‘권율 장군’이라고 해도 조금도 부자연스럽지가 않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60대에, 아니 어떤 사람은 70대, 80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이순신과 권율을 보면 ‘난세(亂世)가 영웅(英雄)을 만든다’라는 말도 실감난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화백이 그린 <충장공 권율 장군(忠莊公 權慄 將軍)>(1970년작)의 초상을 한 번 보자. 이순신은 문관 같은 무관이고, 권율은 무관 같은 문관의 모습이다.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張遇聖, 1912-2005) <충장공 권율 장군>(1970년작, 종이에 전통 채색, 행주산성 충장사)
1592년 7월 8일 이치대첩(梨峙大捷)을 거둔 권율 장군의 병력은 1만 명으로 불어났다. 권율의 이치대첩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의병장(義兵長) 임희진任希進, ?-?)과 변사정(邊士貞, 1529-1596), 승병장(僧兵長) 처영{處英, ?-? : 묘향산(妙香山)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의 제자}이 합세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 휘하에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권율 장군 휘하에도 그러했다.
권율 장군의 1만 병력은 북상하여 평지에서 일본 기병대의 공격을 받은 용인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성(서울)의 길목인 지금의 경기도 오산(烏山)시의 지곶동(紙串洞)에 위치한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목적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보급로가 차단되면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평안도와 함경도로 북상하고 있는 일본군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작자 미상 <독성산성도(禿城山城圖)>(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먹과 담채, 69.5×67.6cm, 국립고궁박물관)
이 그림을 언뜻 보면 “이게 뭐야?”라고 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의 격전지답지 않게, 담채화(淡彩畵) 풍으로 가볍고 소박하게 그린 수작(秀作)이다. 왼쪽이 독성산성(禿城山城)이고, 건너편에도 험준한 산이 버티고 있다. 독(禿)은 ‘대머리 독’ 자이다.
‘독수리’라고 할 때 ‘독’은 ‘대머리 독(禿)’ 자이다. 그 ‘독(禿)’에 순우리말 ‘수리’가 합쳐져서 ‘독수리’가 되었다. ‘독수리’를 풀어 말하면 ‘대머리수리’이다. 사실 대머리독수리는 없다. 있다면 병든 수리일 것이다. 미국의 국조(國鳥)는 bald eagle이다. 북미의 새들 중에서 가장 큰 새이다. bald는 ‘대머리의, 머리가 벗겨진’이라는 뜻 외에 ‘머리가 흰’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bald eagle를 우리는 ‘대머리독수리’로 번역해버린 것이다. bald eagle은 ‘흰머리수리(white eagle)’로 번역해야 옳았다. 검은 털 머리를 가진 수리는 black eagle이다. 재미있는 것은 bald eagle을 번역하기 이전에 벌써 우리나라에서는 ‘수리’ 앞에 ‘독(禿)’을 붙여서 ‘독수리’라고 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머리수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bald eagle의 번역인 ‘대머리독수리’는 ‘대머리대머리수리’인 셈이다. ‘독수리’는 ‘수리’, ‘대머리독수리’는 ‘흰머리수리’가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미 굳어진 이 말들이 고쳐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순우리말 ‘수리’는 ‘우두머리’의 뜻이다. 그러니까 수리는 새 중의 왕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국조(國鳥) ‘흰머리수리(white eagle)’
독성산(禿城山)은 서울 향해 상행할 경우 오산에서 수원으로 들어서자마자 1번 국도(조선시대 주 통로) 서쪽에 있다. 오산에 속하지만, 오히려 수원쪽으로 쑥 들어가 있다. <독성산성도(禿城山城圖)> 그림 상단에는 ‘禿城山城(독성산성)’이 적혀 있고, 또 ‘水原(수원)’이 적혀 있다. 당시에는 독성산성이 수원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독성산은 산 위가 민둥해서 독성산이다. 이 산 꼭대기에서 남북을 살피면 멀리까지 파악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를 장악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했던 것처럼 독성산을 차지한 권율의 의도 또한 그러했다. 다시 그림을 보면, 황갈색(黃褐色) 길이 나 있다. 당시에는 이 길을 통과해야만 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의 주 통로가 골목길처럼 좁다. 사진이 없던 시절, 화가들의 그림이 아니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없으니 화가들이 고맙다. 왕조시대 우리나라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길을 넓히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년작)를 그린 김정호(金正浩, ?-1866)가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 해서 사형되었던 것이다. 위 그림에서 하얀 큰 돗자리 같은 것들은 논밭이다.
1592년 12월 한성을 책임지고 있던 제8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가 ‘목에 가시 같은’ 권율을 치기 위하여 한성을 지키고 있던 3만 명 중 2만 명을 차출하여 독성산을 공격해 왔다. 권율은 평지로 내려가 전면전(全面戰)을 하지 않고, 소수의 타격조를 편성하여 왜군의 측방을 교란하고, 밤에는 기습작전(奇襲作戰)과 매복작전(埋伏作戰)을 구사했다. 요즘 말로 하면 게릴라 작전이었다. 왜군은 ‘가랑비에 옷 적듯’ 희생자가 늘어났다. 화가 난 적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독성산성 내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고립시키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 그러면 권율이 그들을 기습하여 제방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사실 성내의 물 사정은 좋지 않았다. 이것을 안 적장이 독성산성을 에워싸고 장기전(長期戰)을 펼쳤다. 그러자 권율은 밤에 야음을 이용해 소수의 타격조로 적을 기습했다. 일본군 쪽에만 희생자가 자꾸 늘어갔다. 그리고 낮에는 권율이 그들에게 물로 말을 씻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이 곡식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원무(圓舞)를 추게 해서 군대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그것이 ‘강강술래’가 되었다고 함]처럼…. 사실 독서산성 내는 물이 부족했었는데, 말을 씻어주는 것을 보고는 소득 없이 많은 병력을 잃기만 하고 남은 병사들을 철수했다. 실제로는 말 밑 땅바닥에 가마니를 펴고, 한 사람이 물동이, 아니 쌀동이로 쌀을 붓고, 다른 한 사람이 말을 닦아주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물이 햇빛을 받으면 하얗게 보인다. 그러니 왜군들은 그 하얀 쌀이 물인 줄로 속은 것이다. 망원경이 없던 시절이니 그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병법(兵法), 즉 전술전략(戰術戰略)에 통달한 점에서도 권율은 이순신과 닮았다. 병법에 있어서 56세의 권율은 21세의 우키다 히데이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언제나 한 수 앞서 있었다.
결국 적장 우키다{宇喜多(우희다) : 정확한 일본어 발음은 ‘우끼다’}는 정말 ‘웃기는’ 짓거리만 하다가 야금야금 많은 병력을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것이 ‘독성산성전투(禿城山城戰鬪, 1592년 12월 말)’이다. 권율 장군의 두 번째 승전이었다. 아군의 희생 없이 이긴 전투였다.
권율의 승전(勝戰)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적이 퇴각하자 독성산성에서 나와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여 1만여 병력을 둘로 나누어, 부장 선거이(宣居怡, 1550-1598)에게 대부분의 병력을 주어 금주산(衿州山 : 지금의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에 걸쳐 있는 산)에 진 치게 하고, 권율은 2,800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갔다. 여기서 거둔 승리가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이다. 2,800여 명의 병력으로 3만여 일본군의 9차례 공격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왜적 사상자 1만여 명, 노획 무기 727점이었다. 이 행주대첩은 중요하지만, 아주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전투상황도와 그림을 게재한다. 이 행주대첩 이후부터 ‘행주치마’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맞지 않다. ‘행주치마’라는 말은 그 전에도 있었다.
▲권율 장군의 세 번째 승전인 행주대첩(1593년 2월 12일) 전투상황도
파란 선은 권율군 이동로이고, 빨간 선은 한성에서 나온 일본군의 이동로이며, 빨간 점선은 일본군이 패배하여 퇴각한 이동로이다. 한강에 보이는 섬은 난지도이다.
▲문학진(文學晉, 2014- )의 서양화 벽화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1978년작, 캔버스에 유채, 행주산성기념관)
오른쪽 흰옷 입은 군대가 권율 장군의 조선 육군이고, 왼쪽이 일본 육군이다. 일본군은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쓰러지고, 언덕을 기어오르다가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 혁혁한 전공으로 왜군은 안절부절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신이 났다. 권철을 무한히 신뢰했던 선조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명재상 아버지의 얼굴을 먹칠을 하고 돌아다니던 그 망나니 권율이 큰일을 했으니 말이다. 1592년 4월 문관(文官)인 광주목사(光州牧使 : 목사는 지금의 지방 시장)였던 권율은 채 1년도 되기 전에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都元帥, 총사령관)가 되었다. 권율은 이순신보다 더 초고속승진을 하게 되었다. 권율의 초고속승진에서 선조의 기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제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권율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권율의 벼슬이 도원수인 줄로만 안다. 그렇지 않다. 권율은 한성판윤(漢城判尹) 겸 도원수(都元帥)가 된 것이다. 도원수는 문관이 전쟁 시에 군권을 맡는 임시직이다.
여기서 조선의 군제(軍制)를 조금만 알아보자. 조선의 군제는 크게 중앙군(中央軍)과 지방군(地方軍)으로 나누되, 육군(陸軍)과 수군(水軍)으로 나누지는 않았다. 전쟁 상황에 따라 육군이나 수군으로 결정되었다. 군역(軍役)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양인개병(良人皆兵)’이란 천인(賤人, 노비)이 아닌 양반(兩班)과 평민(平民), 즉 모든 양인(良人)은 16세에서 60세까지 일정기간 또는 전쟁 발발했을 때 징집(徵集)되는 것을 말한다. ‘병농일치(兵農一致)’란 국가가 토지를 제공하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삼되, 전쟁이 일어나면 곡식을 군량미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농민이 군인으로서 참전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무관보다 문관이 우대받은 조선에서는 군대 고위직을 문관이 맡고, 무관은 전장 일선(一線)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군대 고위직을 맡은 문관이 무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문관도 평소에 무술과 병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군제(軍制) 중 주요 직급(職級)은 다음과 같다.
① 병조판서(兵曹判書) : 정2품.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
② 도제조(都提調) : 정1품, 지금의 참모총장 해당, 의정(議政, 3정승)이나 의정을 지낸 사람이 맡으며,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는
자문 명예직.
③ 제조(提調) : 종1품(때로는 종2품, 정2품). 판서 또는 판서를 지낸 사람이 군사 관계 업무를 지휘‧감독.
④ 도총관(都摠管) : 정2품. 중앙군에 5위로 조직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가 있는데, 그 군무를 총괄하는 으뜸 관직. 대개 왕의
종친(宗親), 부마(駙馬, 왕의 사위), 삼공(三公, 3정승)이 겸직. 성격상 도원수보다 상위에 있음.
⑤ 도원수(都元帥) : 정2품(또는 종2품). 전시에 부여되는 지방군을 지휘하는 임시 관직. 팔도도원수라고도 함. 한성(중앙군)을
제외한 팔도의 육군과 수군 모두를 총괄 지휘하는 총사령관임.
이하에서는 몇몇 주요 직급만 언급한다.
⑥ 관찰사(觀察使) = 감사(監司) : 종2품. 각 도(道) 행정 책임자로서 지금의 도지사임. 지금의 육군 중장. 전쟁이 나면 그 도의
군사를 지휘하여 참전하고, 타 도를 지원도 함.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병사(兵使) : 종2품. 도의 육군 최고 책임자임. 지금의 육군 중장. 각 도에 2-5명의 병마절도사가
있음.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줄여서 경상우병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즉 경상좌병사). 품계는
같아도 서열은 관찰사(감사) 아래임.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 통제사(統制使) :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임. 지금의 해군 중장. 삼도수군통제사는
도원수의 지휘를 받음.
⑦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 절제사(節制使) : 정3품.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군사 책임자. 지금의 육군 소장.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수사(水使) : 정3품. 각 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군사 책임자로서 해군 소장. 8도의 수군절도사 숫자는
변동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임(專任) 6명(경상도 2명, 전라도 2명, 충청도 1명, 경기도
1명), 관찰사 겸직 4명(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이었음.
⑧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 첨사(僉使) : 종3품. 군사 책임자. 지금의 육군 준장.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첨사(僉使) : 종3품. 군사 책임자. 지금의 해군 준장.
병마우후(兵馬虞候) = 병우후(兵虞候) = 아장(亞將) : 종3품. 군사 책임자. 지금의 육군 준장.
도호부사(都護府使) = 부사(府使) : 종3품. 도호부 최고 책임 관직. 지금의 육군 준장.
⑨ 수군우후(水軍虞候) = 수우후(水虞候) = : 정4품. 군사 책임자. 지금의 해군 대령.
수문장(守門將) : 정4품. 궁궐, 성의 문지기. 지금의 육군 대령.
⑩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 종4품. 각 진(鎭)의 장(將). 지금의 육군 중령.
만호(萬戶) : 종4품. 각 진(鎭)의 장(將). 지금의 육군‧해군 중령.
편의상 이 아래는 생략한다.
수군 이순신의 8연승째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7월 8일), 16연승째인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1592년 9월 1일)과, 계속 패배와 후퇴만 거듭했던 육전에서 권율이 거둔 이치대첩(梨峙大捷, 1592년 7월 8일), 독성산성대첩(禿城山城大捷, 1592년 12월 말),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과,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년 10월 5일-10일)으로 인해 일본군은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임진왜란의 육전(陸戰)의 분수령(分水嶺)은 평양전투(平壤戰鬪, 1-4차)였다. 이 평양전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 2월 12일) 이전으로 돌아가 육전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92년 5월 2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1534-1602 : 권율의 전임)이 이끄는 조선 육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 선봉장}가 이끄는 18,000여 병력의 일본 제1군에게 한성(수도)을 맥없이 내주었다. 일본군이 한성을 무혈입성(無血入城)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성전투(漢城戰鬪)’는 용어조차 없다.
1592년 4월 30일 한성을 떠나 개성(開城)으로 몽진(蒙塵 : 임금의 피란)한 선조는 곧 궁궐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맹렬한 기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란했다. 1592년 6월 1일 일본군이 개성 역시 싸우지 않고 점령하자, 1592년 6월 11일 선조는 다시 평양을 버리고 의주(義州)를 향했다.
1592년 6월 13일 제1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6월 13-14일)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해전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덕분에 날짜가 정확한데, 육전은 서로 다른 기록들이 있거나 달은 있으나, 날짜가 없는 기록도 있다. 제1차 평양전투의 날짜가 6월 18일, 심지어는 5월 13일인 것도 있다.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지휘한 제1차 평양전투도 다소 버티기는 했으나, 끝내 패배했다. 그렇게 개전 18일 만에 수도 한성이 맥없이 점령되고, 60일 만에 평양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평양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일본의 조선팔도 점령을 의미한다. 이 임진왜란 동안에 당한 유린, 수모, 방화, 약탈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삼천리강산에 흥겹고 행복한 노래 소리는 사라지고, 눈물과 탄식의 호곡(號哭) 소리만 가득하게 들리는 것 같다. 겨우 400년 전 일이다. 패배와 후퇴를 거듭한 임진왜란 초기 육전을 보면 조선의 국방이 얼마나 허술하고 허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의 불같은 기세를 본 중국 명(明)나라도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참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1592년 6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던 길에서 선조는 평양 함락(1592년 6월 14일) 소식을 들었다. 선조의 몽진 대열이 정주(定州)에 이르렀을 때 이항복과 함께 선조를 호종(護從)한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1592년 6월 22일 선조 일행은 의주에 도착했다. 명군(明軍)의 조선 파병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선조의 몽진, 명군의 조선 파병과 평양전투(제2-4차)는 조금씩 나누어서 이야기하겠다.
1592년 7월 명(明)은 1차 원군(援軍)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럼으로써 임진왜란은 국제전(國際戰)이 되었다. 임진왜란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부총병(副摠兵 : 요동 지역을 지키는 장수로서 최고 장수는 아니었음) 조승훈(祖承訓, ?-?)이 겨우 3,000명을 이끌고 파병되었다. 그러한 명군과 패잔병 같은 조선군이 연합한 조‧명(朝明) 연합군이 제2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7월 15일)에서도 패배했다. 그 때문에 조승훈은 중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러한 기세로 밀어붙이면 쉽게 의주까지 수중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일본군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첫째, 이순신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7월 8일)과 권율의 이치대첩(梨峙大捷, 1592년 7월 8일), 이 두 해전과 육전의 일본군 대패(大敗)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해로를 통한 호남 곡창 확보가 좌절된데 이어, 육로를 통해 호남 곡창을 확보하려 했으나, 방어가 강한 진주성을 피해 충청도로 우회하여 목적을 이루려 했으나, 그마저 권율에 의해 차단된 것이다. 거침없이 북상 중이던 일본군은 이 두 대패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대첩만으로도 이순신과 권율은 구국영웅(救國英雄)으로서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둘째, 선조를 호종(護從)하던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주청에 의해 내린 교서(敎書)에 호응한 백성들의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왜군의 후방을 교란했기 때문이다.
셋째, 일본군이 의주까지 점령하면 명(明)이 본격적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명군이 1차 원군에서 3,000명만 파병한 것은 무성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경고의 성격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당한 조선을 온통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온통 부정적인 나라였기만 했다면 조선은 멸망했어야 했다. 나라가 분열되어 국난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쏟아져 나와서 나라를 구한 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선조는 명군(明君)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선조는 인복(人福)을 타고난 분이었다.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정기룡(鄭起龍, 1562-1622)과 같이 처음부터 무관으로서 전장(戰場)에서 활약한 인물들, 곽재우(郭再祐, 1552-1617),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조헌(趙憲, 1544-1592) 등이나 휴정(休靜, 1520-1604), 유정(惟政, 1544-1610) 등과 같이 초야나 사찰에 숨어 있다가 의병이나 승병으로 활약한 인물들, 권율(權慄, 1537-1599)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같이 문관이면서 무관으로서 전공을 세운 인물들, 그리고 문관으로서 임금을 호위하거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많았다. [다음 호에 계속 / 2014.1.11.(토). 조귀채]
첫댓글 영웅이 시대를 만들기 보다,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 맞는 것같군요.
평화시에는 숨어지내는 사람도 위기가 닥치면 그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수년내에 통일한국의 시대가 분명히 올 것이므로 실력과 내공을 반드시 쌓으면 기회가
오리라 봅니다. 격동기에 맞이할 영웅들의 출현을 기대합니다.
한때 잘 나가다가도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서 멸망한 나라가 많잖아요. 인물이 없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반성할 점이 많기도 하지만,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현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인물이 정말 많다고 생각해요. 인물이 많으면 이웃 나라가 건드리지 못하고, 인물이 많으면 땅은 작아도 강국이라고 생각해요. 인물을 만드는 어른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