讓寧大君 (양녕대군) 5
고산(高山)추천 2조회 19024.01.08 09:41댓글 13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거듭된 세자의 비행과 아버지 태종에 대한 반항
두 외삼촌을 희생양으로 삼아 양녕대군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행을 그치기는 커녕 비행을 계속하다가
급기야 태종 17년(1417) 2월에 전 중추 곽선의 첩 어리를 강간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처은 기생과 달리 엄연히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었다.
어리의 자색이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양녕은 대궐 담을 넘어 곽선의 집에 들어가 곽선의 양자 이승을
위협하며...어리를 이법화의 집으로 납치한 후 강간하고 궁중으로 끌고 갔다.
어리는 ...
" 저는 병이 있는데다 남편이 있는 몸 "
이라고 저항하였음에도 강간한 사건은 당시에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태종을 격노시켰다.
태종과 조정의 중신들은 국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대부의 병약한 첩을 납치하여 욕심을 채우는 ...
이런 인물이 즉위하였을 때 벌어질 상황을 두려워 했다.
태종은 세자의 비행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조장하던 세자의 장인 김한로를 외방에 부처시키고...
양녕과 어리를 격리시켜 파문을 가라앉히려 하였다.
태종의 이러한 조치에 양녕은 반발하며 자신이 지은 수서를 올려 항의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궁중에 받아들이면서 ...
왜 신(양녕)의 여러 첩은 내보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게 하십니까 ?
한(漢)나라 고조는 산동에 있을 때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고...
진완 광은 비록 어질다는 이름이 있었지만 즉위 후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못하십니까 ?
이 첩 어리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음대로 후궁을 들이면서 ...
자신은 왜 못하게 하느냐는 글의 내용에 태종은 폐세자를 결심하고 정승들을 불러 이 글을 보여주었다.
" 세자가 여러 날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다만
그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랬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짐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
태종의 한탄의 속 뜻이 세자의 폐위에 있음을 안 대신들은 다음 날 의정부,
육조,삼사의 모든 백관들을 모아 세자의 폐위를 간하게 되어 양녕을 세자의 자리를 잃었다.
탁질양광
양녕대군의 양녕은 곧 양보해서 편하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양녕은 스스로 세자의 지위를 포기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아버지 태종의 야망과 욕심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버지 태종, 그리고 왕위에 오르고서도 ....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등에게 죄명을 만들어 서슴없이 사약을 내렸다.
양녕은 10살에 세자가 되고 그 자신 학문에 깊은 뜻은 없었지만 그래도 군왕의 도를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는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태종의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서
양녕대군은 미친듯이 더욱 자유분방, 방종한 생활을 자행한다.
기록의 표현대로 탁질양광인 것이다.
즉, 정신병을 핑계로 미친 척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탁질양광이라 하기에는 패륜아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다.
그는 아들의 첩을 건드리고 아무리 미친 척한다 하더라도 인격파탄의 여러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6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