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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연합에서 비대위 영입 문제로 불거져 나오는 말들이 트위터로 대안방송들로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서 지난 8월에 출간된 강준만의 책은 참으로 시의 적절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보의 최후 집권전략’을 말하며 스스로 ‘싸가지 없음’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말을 하는 강준만은 ‘싸가지 있는 진보’에게 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쏟아 놓는다. 평소에 정치 문제에서 야당이 제 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답을 찾아가는 길이 지난하던 중에 진보의 가치를 언급하는 이들의 성찰과 고뇌가 절실함을 만난다.
그의 지적처럼 지난 7.30 재보궐 선거 결과는 진보를 향한 막연한 기대심리마저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세월호참사가 153일째인 오늘까지 적잖이 누적되고 있는 분노에는 대상도 없다. 슬픔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비인간적인 일들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에서 공감대의 상실감은 울분을 낳는다. 이 책은 섬세하지 못하고 참으로 안목이 없는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건네었다. 혹여 의식하지 못한 채 진보만 나불거린 것은 아니었던가. 정치적인 현상들을 짚어내는 강준만의 말들에서 공감하는 것들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오락가락 나를 휘젓는 동안 떠오르는 주변의 1인이 있었다.
오랜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게 규정당한 그는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조차 이미 떨어져 나갔다. 저자가 간곡하게 말한 ‘타협’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싸가지 없음이 건넨 채찍과도 같은 이성 자극도 사라졌다. 그의 분노도 대중에 대한 증오로 눈이 멀어버린 듯하다. 그렇기에 나에게 ‘타협’은 역시 부정적인 면이 우선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정치에서 ‘타협’은 그야말로 현실이라는 만병통치약쯤으로 이용되는 상황에서 조급증을 다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론으로 해석되었다.
대중을 향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잠시의 공감이라도 이끌어 낼 역량이 될 수도 있겠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중략-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진보의 제 살 뜯어먹는 말들의 거친 남용은 대중에게 정치인의 꼴사나운 모습으로 각인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한다.
진보의 가치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정치 영역에서 일관된 성향으로 표현되곤 하는 ‘~빠’는 대상을 규정하는 것에 익숙해진 한국사회의 학습된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고 그것으로 삶의 두려움을 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불관용으로 둘러싼 사회 환경에서 제 살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것으로도 졸지에 기회주의자로 규정된다. 그래서 더 열렬하게 과격한 발언을 하는 모습들은 정당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시작되는 편 가르기는 한국사회를 잠식해 왔기에 집단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홀로서기는 필수이다. 강준만은 삿대질만 하는 ‘울타리 안의 진보’에서 운동권의 정서는 대중의 욕망을 읽는 데에도 둔감하다고 말한다. 이성만을 강조하며 합리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달려온 현대인들은 그에 반하는 모든 선택이 원천봉쇄 되거나 경계 밖으로 내던져지곤 한다. 선동가들만 있고 말의 힘은 사라졌다. 한국사회의 편가르기 정치는 공동체의 소통과 조화를 꾀하는 노력들을 철저히 깔아 뭉갠다.
“우익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말하고 있고, 좌파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물에게 말하고 있다.”고 노명우의 말을 인용하며 진실이건 거짓이건 진보의 기본 자세는 인간지향적이라기 보다는 사물지향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개인적 욕망을 논리와 이성으로 옹호하기 어렵다는 걸 아는 보수는 대중에게 감정으로 접근한다는 감준만의 말이 낯설지 않다. 때로 똑똑한 이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이 저 잘난 맛에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도 모자라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놓는다는 것, 정치가의 등장은 꿈이나 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