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2004. 9. 30): 立山山莊→立山역→알펜루트 관광→ 산악박물관 관람→立山山莊
앞서 밝혔듯이, 태풍으로 인하여 마지막 날에 계획되었던 다테야마(立山)ㆍ구로베(黑部) 알펜 루트(Alpine Route) 관광을 먼저 하기로 하였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차림으로 전세버스에 오르니, 앞서 소개된 山 雜誌 기자일행들이 미리 타고 있었다. 간단하게 목례로서 인사를 나눈 후,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달려 알펜루트의 시작점인 다테야마 역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해 표를 구입한 뒤, 대원들은 간단한 식품과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에 들러 이리 저리 살피면서 산악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기 직전 산장 주인 노운석씨가 가이드를 맡았던 한국인 관광객 5명을 우리 팀에 떠맡기는 바람에 식구가 늘었다.(물론 공짜는 없었다. 숙소에 돌아오면 생맥주 한 쪼기 씩을 돌린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의 2쌍의 노부부와 여자 쪽 사촌여동생이 합세한 팀이었다. 한 여자 노인네의 고희기념으로 자식들이 보내주었다고 한다.
다테야마는 일본 혼슈의 중북부, 도야마현에 소재하고 있는데, 일본을 상징하는 후지산과 '일본의 몽블랑'으로 불리는 하쿠산과 함께 일본의 3대 영산으로 꼽히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산악관광지이다. 구로베는 수량도 엄청나고, 물살도 급한 강을 막아 댐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나 공사의 난이도 등을 감안하면 미국의 후버(Hoover) 댐에 비견되고 있다. '알펜루트'는 도야마현의 다테야마(立山)역에서 나가노(長野)현의 오기사와(扇澤) 역까지 장장 87km에 걸쳐 연이어진 3천m급 고봉에 도로를 내고, 수많은 터널을 뚫어, 때론 산과 산을 케이블카로 연결해 만들어진 코스이다. 특히 터널이 긴 것도 긴 것이지만, 우리의 터널과는 달리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도 각종의 교통신호기가 설치되어 있어 마치 시가지 도로처럼 좌우회전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알펜루트를 관광하기 위해선 궤도열차, 고원버스, 트롤리버스, 공중케이블카 등으로 6번이나 교통편을 바꿔 타야 한다.
첫 번째 이용한 교통수단은 궤도열차로서 해발 475m의 높이인 다테야마 역에서 해발 977m에 위치한 비조다이라(美女平)까지 1500m의 거리를 약 7분 동안 5°~7°의 경사진 산길을 올라간다. ‘비조다이라(美女平)’는 원래 禁女 지역이었는데 한 여승이 들어가려다 신의 노여움을 사 삼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비조다이라에서는 고원버스를 이용해 해발 2450m에 위치한 무로도(室堂)까지 이동하게 되어 있는 데, 그 소요시간은 약 50분이 걸린다. 이 코스를 지나는 동안 몇 아름씩이나 되는 나무들이 쭉쭉 벋어 있어 나무들이 산을 꽉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특히 봄(4월) 무렵에는 겨울 내 내린 눈이 18m 정도 높이로 다져지고 다져져 길 양쪽으로 눈 벽이 형성되는데, 이 가운데로 고원버스가 다닌다니, 상상만 해도 가벼운 흥분이 느껴질 정도이다. 또한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도 계속 달라져 전혀 지루한지 모르는데다가, 버스 안 관광객들이 이곳저곳에서 질러대는 탄성에 고개를 돌리기가 바쁠 정도이다. 고원버스를 타고 길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낙차 350m의 4단 폭포인 쇼묘다키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이 폭포는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로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다. 이 폭포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해발 2천m에 펼쳐진 미다가하라(弥陀ヶ原)고원을 지나게 되는데, 이 곳의 단풍은 특히나 아름답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많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버스 안에 보조 좌석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의자들이 안정감이 없어 체중이 조금 많이 나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의자가 부셔질까 두려운 마음이 들고, 더욱이 산길을 꼬불꼬불 올라가다보니 가벼운 멀미증세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고원버스 종착역에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분화에 의해 생긴 주위 약 600m, 깊이 약 15m의 신비로운 다테야마 최대의 칼데라 호수인 미꾸리가이케(みくりか池)에 다다른다. 안내판을 보던 영일이가 이 호수의 이름을 재치 있게 ‘미꾸라지가 있게 (없게)?’ 라고 부르는 바람에 머리가 나쁜 나도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아름답게 단풍이 든 나무들 사이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약 15분쯤 내려가면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지코쿠계곡(地獄谷)에 이른다. 계속 뿜어내는 수중기와 유황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대원들은 오버트러우져를 입고 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관광을 즐겼다. 버스에서 내려 호수로 내려 왔을 즈음 규한이와 창호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버스 종점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나머지 대원들만 다녀왔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동안 못 피었던 담배도 피우고, 시장기가 느껴져 간단한 요기를 하였다고 한다. 단체 활동에서 이 같은 무단이탈이나 개인행동은 안된다는 것을 학교 졸업한지가 어언 30년이 되어가니까 잊어버린 것 같기에,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하였다. 혹시 학교 다닐 때도 그랬나? 아마 그랬을 걸.
무로도에서는 트롤리버스를 타고 3.7 km의 터널을 지나 산의 반대편 다이칸보(大觀峰)로 이동하였다. 시간은 약 10분 정도 걸렸다. 날씨 때문에 제대로 조망할 순 없었지만, 전망대에 그려져 있는 안내 그림만 보더라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점심을 먹으러 매점으로 들어가는 순간 노인네 팀 5명이 보이질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는 동안, 사색이 된 강철원 대장이 오던 길을 돌아가, 모시고 왔다. 덴부라 우동으로 통일해 주문을 하였고, 준비해 간 소주를 꺼내 한기를 느끼던 몸을 덥혔다. 우리가 먹는 소주에 계속 침을 흘리면 보고 있던 기자 팀에게 몇 병 놓아 주었더니, 반색을 하며 좋아한다. 평소 남의 불편이나 어려움을 모른 채 하지 못하지 않는 나 아닌가?(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구로베다이라(黑部平)까지 로프웨이(공중케이블카)로 타고 이동한다. 7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구름을 타고 떠다니면서 단풍 구경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구로베다이라에서 다시 10 여분 정도 궤도열차를 타고 내려가면 구로베 댐이 나온다. 구로베댐은 일본에서 가장 규모(높이 186m)가 큰 댐으로 보는 이들을 순간 압도한다. 댐 위에는 약간 넓다 싶은 2차선의 차도와 보행자를 위한 인도가 양쪽으로 나 있었다. 온갖 색으로 단장한 겹겹의 산줄기들과 구로베댐으로 생긴 인공호수의 짙푸른, 보다 詩的으로 표현한다면 에메랄드 그린 빛의 거센 물줄기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댐 위를 걷기 시작할 때, 작년 코타키나발루 등정 때에도 그랬듯이, 산에서부터 호수로 내리뻗은 무지개가 우리를 맞고 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지고 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무지개를 보고 우리 대원들은 내일은 맑을 것이고, 또한 우리의 산행은 성공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는 등의 내용으로 한마디씩을 빼놓지 않았다.
다테야마(立山) 연봉과 후시로다테야마(後立山) 연봉 사이에 있는 구로베(黑部)협곡은 원시림에 가까운 자연이 그대로 남아있는 일본 최대의 협곡이다. 이곳을 흐르는 구로베강은 그 풍부한 수량과 큰 낙차로 인해 일찍이 수력발전소의 적지로 주목받아 왔으나, 많은 비와 눈, 그리고 험준한 지형 때문에 좀처럼 실현되지 못하다가 2차대전 패전이후 일본 경제 부흥책의 일환으로 關西地方 전력공급을 위하여 건설된 댐이다. 이 댐은 간사이(關西)전력 회사에 의해 1956년 건설이 착수되었는데, 무려 7년의 기간과 당시의 금액으로 513억엔의 공사비, 연인원 1,000만명분의 노동력을 투입한 끝에 1963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구로베댐은 전력 생산의 역할은 물론 자연환경 보호 및 경관유지의 목적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구로베 댐 기념관에서 건설과정을 담은 단편영화를 관람하고, 다시 트롤리버스를 타기 위하여 터널로 이동하였다. 터널 안에서 부는 바람은 걷기 힘들 정도이었으며, 몹시 쌀쌀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뚱뚱한 것이 흐뭇하게 생각된 적이 아마도 이 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옆을 걷고 있는 승일이의 배낭에는 우리의 몸을 덥혀 줄 비장의 무기 소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맛이 마치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도시락을 먹는 맛 이상이었고, 그 스릴 역시 오랜 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터널 안에도 자그마한 기념품 가게들이 있었는데 홍수에 상류에서 떠 내려와 댐에 몰려있는 나무들을 건져 올려 간단한 작업을 거친 뒤, 상품 또는 작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 매우 이채로웠다.
댐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트롤리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여 약 10분후에 다테야마․구로베 알펜루트의 동쪽 관문격인 오기사와 역에 닿았다. 도착해 보니, 산장 주인인 노운석씨가 직접 운전하고 온 버스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 가까이 국도와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노사장님의 구수한 안내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깔끔하게 정리가 된 일본의 농촌풍경을 즐겼다. 그러는 가운데, 분명한 농가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집에나 예외없이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는 점에 놀랐고, 거리를 달리는 차나 집 앞에 세워진 차들이 거의 전부 우리나라의 마티즈 정도의 크기였다는 점에 또 놀랐다. 그리고 오가는 길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통제 요원이 서 있었고, 또한 교차 통행을 해야 하는 곳에서는 얼마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알리는 전광판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일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재난을 많이 겪는 일본이라 그런지 안전에 관한 높은 의식도 엿볼 수 있었다.
숙소인 하쿠바로 다가갈수록 하늘이 맑아지더니, 마침내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비가 내린 탓인지 하늘이 무척이나 맑고 근처의 산들이 너무나도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던 길에 오마치(大町)에 위치한 市立大町山岳博物館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입구는 도로공사중이라 버스에서 내려 약 10분간 걸어 올라갔다. 박물관 1층에는 옛날과 현재의 등산장비 및 북알프스의 소개, 에베레스트의 주변 지형 모형도, 이층에는 북알프스의 생태계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간단한 정리를 마친 뒤, 노인네 일행들과 함께 맛있게 차려진 저녁식사를 하였다. (참, 같이 관광을 하였던 기자 팀들은 텐트 트랙킹을 위해 중간에서 헤어졌다). 간단하게 소주 한 잔씩하고, 쉬면서 앞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노인네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과천에서 과수원을 하고 계신단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척이 되자, 자식들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들 좋은 대학을 나와 내 노라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며, 지치지도 않으신다. 하도 자랑을 하시길래 화제를 바꾸려고 그랬는지, 김응구 회장이 “어떻게 주무세요? 여자 셋에 남자가 둘인데?“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주무신단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데 오셔서 신혼여행 때처럼 보내셔야지 그러면 되겠는가 하고 거들었다.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시더니 팔을 걷어붙이시고, 설거지를 시작하시는 것 아닌가? 우리도 앉아 있다가 그릇들을 챙겨 주방으로 날랐다. 손님인 할머니가 주인을 도와 설거지 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런 성품을 가지신 분이기에 자식들이 잘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강철원 대장으로부터 결전의 내일을 위하여 배낭을 꾸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살피고 또 다시 챙기면서 배낭을 꾸렸다. 본시 남을 많이 배려하는 김회장이 개나리 봇짐같은 배낭을 가지고 오신 김관수 선배님을 걱정하여 배낭을 점검하였더니,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오버트라우져도 없으시고, 워킹을 도와줄 스틱 등도 없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산장 주인에게 빌려 챙겨드리고 나니 다소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는 몰라도, 영옥이가 꼭 챙기라던 1.8리터 참이슬 병을 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마신 뒤, 잠을 청했다. 이 날도 역시 규한이는 김회장으로부터 이번에는 진짜 수면제를 얻어먹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규한이만의 수면제인 맥주를 몇 병 더 마신 뒤, 독방에서 쓸쓸히 잤다고 한다.
- 세째 날(10.1) : 立山山莊→가미고지(上高地)→요코오(橫尾)산장→호다카다케 산장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인 북알프스 등반에 나서는 결전의 날이 밝았다. 새벽 4:00에 일어나 간단한 세면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05:00 경 전세버스에 올라 산행 시작점인 가미고지로 향하였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시각이 이른 탓도 있겠지만, 각 대원들은 마치 좌석에 기댄 채 성공적인 등정을 비는 듯한 자세이다. 날이 밝아지면서 맑게 개인 하늘과 따뜻한 열기를 퍼뜨리는 태양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고, 차창을 통해 맑은 공기, 깨끗하면서도 단정한 거리 풍경, 질서와 양보가 넘쳐나는 도로 등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더욱 더 놀란 것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양수발전기 시설의 규모와 자연의 지형을 최대로 살리기 위하여 S형 자 혹은 구불구불하게 뚫려져 있는 터널이었다.
우리 대원들이 탄 버스는 남쪽을 향한 158번 국도를 계속 달렸는데, 24번 지방도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釜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 터널은 자연의 보호와 안전을 위해 4월 하순부터 11월 중순까지만 개방이 되며, 그것도 자가용 승용차가 아닌 관광버스, 택시, 셔틀버스만의 통행을 허용하고 있단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가미고지" 주차장은 해발 1500 m에 위치한 곳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설악동에 해당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관광시즌에는 셔틀버스만이 주차가 허용되며, 주차장의 모든 버스는 정차 중 시동을 걸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이 환경보호에 쏟는 정성을 엿볼 수 있어 일본은 이미 선진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미고지는 일본인들에게 연말연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눈 내린 가미고지에서 산책하는 것을 꼽히고 있으며, 소설 '빙벽' 의 공간적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 "가미고지"에는 "다이쇼이케" 호수가 있는데,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숲으로 이루어진 길이 나 있고, 호수가로 나무로 만든 다리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산행 시작에 앞서 강철원 대장의 지휘 아래 간단한 몸 풀기를 했으며, 산행에 있어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들었다. 각 지역마다 산장이 설치되어 있고 위급시 연락할 수 있는 구조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한 중간 중간 가파른 산행 길에는 쇠사슬 등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만, 북알프스는 부석들이 퇴적된 산이며, 역층의 岩凌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낙석이 자주 발생하며, 암릉 자체의 기복도 비교적 심한 편이어서 바위를 오르내릴 때 많은 주의와 높은 집중력이 요구된다는 점과 3000m가 넘는 고산이기에 갑작스런 기후변화에 대비한 준비도 철저히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08:10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각 대원들은 전가의 寶刀를 빼듯이, 등산용 스틱들을 적당한 길이로 조정해 리드미컬하게 집으며 걷기 시작하였다. 이 때 김병태 사장의 스틱에 문제가 있는 발견되었다. 스틱은 적당한 길이로 조정한 뒤,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계속 헛돌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평탄한 길이지만, 약 30분 동안 3km를 걸어야 나오는 매점이 딸린 메이신여관(明神館)에 도착할 때까지, 끙끙 매며 스틱을 만지고 있었다. 이 때 많은 산행 제자들을 키워 냈고 있던 현경이의 손길이 닿자 해결이 되었고, 현경이의 진단으로는 우중 산행 후 말리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물도 마시고, 용변도 해결하면서, 다시금 배낭을 정비하였다.
다시 출발을 하여 너무나 잘 정비되었기에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등산로를 따라 1시간 여 만에 도꾸사와(德澤) 야영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고도는 천천히 높아지고 있었다. 이 구간에서 다소 몸을 만들지 못한 채 등반에 참여한 창호와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갖고 있던 규한이가 경쾌한 몸짓으로 다른 대원들의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다소 의아해 했지만, 컨디션이 매우 좋은가보다 라며 은근히 그들을 걱정을 해 왔던 몇몇 사람들을 다소 머쓱하게 만들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속 전진한 끝에 요코오(橫尾) 산장에 도착했다. 가미고지에서 요코오 산장까지의 거리는 대략 5km. 시간으로는 2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요코오 산장까지 이르는 길 양옆으로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뻗어 있어 삼림욕으로 즐길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하이킹 코스이었지만, 본격적인 산행은 이제부터라는 대장의 말에,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일어서 배낭을 추스르면서 다시금 긴장을 하려는 의도로 고개를 들어 우리의 목표지점을 쳐다보니 호다카다케 연봉이 저 멀리 구름사이로 잠시 모습을 보여주며,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요코오대교(橫尾大橋)를 건너 산죽 우거진 길을 지나서 울창한 일본 삼나무, 아름드리 소나무, 전나무와 주목나무 등이 우거진 수림대를 지나면서 싱그러운 공기와 함께 온갖 야생화가 하늘거리는 요코오계곡을 따라 오르고 또 올랐다. 1시간쯤 오르니 本谷橋에 다다랐다. 본곡교는 폭이 좁은 출렁다리여서 일방통행식으로 건너야 했다. 발판 틈 사이로 보이는 계곡물은 시릴 정도로 맑았으며, 수량이 많은 탓인지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본곡교 아래 계곡에서 휴식과 식사를 하려는 등산객들로 북새통이다. 버너를 사용하여 식사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출발 시 산장에서 마련해 준 일본식 도시락을 먹었는데, 도시락에 담긴 내용들이 대원들마다 달랐기에, 여러 가지 맛과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본래 다소 싱겁게 먹는 탓인지, 짜고 입에 맞질 않아 규한이가 준비해 온 휴대용 고추장에 의존해 점심을 해결하였다.
시장기를 면하고, 다소 여유가 생겨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일본인들을 보니,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산행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산행하다가 물만 만나면 족탕이다 알탕이다 하면서 등산복은 물론 속옷까지 훌러덩 벗어 제치고, 물에 몸을 담는 것을 산행의 커다란 즐거움으로 삼아 왔는데, 이들을 달랐다. 간혹 물에 손을 씻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손수건을 적셔 자신의 땀을 닦고 있었고, 발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있다면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러한 문화도 자연보호의 일환인가 하는 의문도 가고, 만약 우리가 여름 철 산행에 족탕, 알탕하는 재미를 즐기지 못한다면 산행의 재미가 반감될 것 같아, 감히 이 점을 교훈으로 삼자는 말은 하지 않겠다.
햇빛의 따사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며 바위 위에서 눕거나 앉아 즐긴 휴식과 소화 시간이 제법 흘렀음을 인식한 대원들은 슬금슬금 대장의 눈치를 보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달콤한 시간은 조만간 닥칠지도 모르는 고산증세에 대비하기 위한 대장님의 배려였음을 나중에나 알게 된 나를 포함한 대원들은 산행에도 짠 밥이 있으며, 유능한 산행 리더에게는 무계획한 행동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낙석에도 주의를 기우려야 하지만, 급해지는 경사와 높아지는 고도 덕분에 호흡은 점차 가빠지기 시작을 했다. 이제부터는 산행 경험의 길고 짧음이 영향을 미쳐 대원들 간에 선두그룹, 후미그룹 등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그 간격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선두에는 산행 리더인 강철원 대장, 김병태 사장, 휘공회의 신동 조명하, 그리고 김관수 선배님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필자와 영일이, 현경이가 그룹을 이루고 있었고, 후미에는 창호와 규한이, 그리고 이들을 격려하고 챙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뒤로 처진 김응구, 윤승일, 그리고 이유는 확실히 모르지만, 내 동생 유홍석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작년에 키나발루 산행시 경험한 고소를 의식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산행을 계속하였지만, 옮기는 발걸음은 계속 무거워진다. 이런 때에는 동료 대원들끼리의 상호간 격려와 재치 있는 농담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어 준다. 때 마침 영일이가 지금껏 자신이 등반한 최고 높이의 산이 한라산이므로 자신을 Halla Lee라고 불러 달라면서 앞으로 내딛는 자신의 한 발자국마다 기록갱신이 이루고 있다면서 옆에서 고통을 견디며 걷고 있는 나와 현경이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를 ‘코타 柳’, 현경이를 ‘히말 Kim’으로 부르는 재치를 보여 주었다. 영일이 덕에 다시금 힘을 얻은 우리는 어느 새 고도 2400m에 위치한 가라사와 산장에 도착하였는데, 그 시각은 오후 2시 30분쯤 되었다. 도착을 하자, 대원들은 용변을 해결하려는 사람, 물을 먹는 사람, 그리고 담배를 집어 드는 사람, 주저앉아 쉬는 사람 등으로 나뉘었다. 일본말과 글을 아주 조금(?) 아는 척했던 현경이가 급한 김에 먼저 화장실을 다녀온 뒤, 여유가 생겼던지, 화장실 앞에 설치된 안내문을 읽고 나더니, 묘한 웃음을 짓는다. 연유를 물으니, 화장실을 사용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100엔을 내 달라는 안내문이라면서, 다음 번 사용할 때부터 꼭 내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아마도 100엔을 벌었다는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건 순전히 나의 판단이다. 화내지 마. 현경아!
고개를 돌려 산장 주변을 살펴보니, 마치 노천카페가 차려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늘 그 산장에서 묵을 등산객들은 지극히 편한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손에는 보기만 해도 목젖을 요동치게 하는 생맥주 잔을 잡고 있으면서, 총천연색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주변의 풍광들을 음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방으로 탁 트여 있어 어느 방향의 어디를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가라사와 산장 주변에는 야영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야영장에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설치 미술가가 텐트들을 쳐 놓은 것처럼 한 점의 작품을 보는 듯 하였다. 경치도 그러 하였지만, 며칠 금욕 생활을 한 탓인지, 여성들이 생맥주 잔을 들고 담배를 피우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에서 눈을 떼기에는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집 사람 이외의 여자를 돌처럼 여기던 내가 그럴 지언데, 나보다 훨씬 강한 동물적 본능을 지닌 ○○○, ○○○ 대원들은 오죽 힘이 들었을까? 아무리 우리는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이지만, 우리의 홈페이지를 대원들의 가족들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안하여 구체적인 거명은 하지 않으려 한다. 가정의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이 무렵부터 영옥이에 대한 원망이 다시금 거세지기 시작했다. 영옥이가 일정을 축소해 놓지만 않았으면, 우리도 이 산장에서 묵으면서 생맥주를 즐기다 잘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평소 이해심이 너무 많다는 비난까지 들어왔던 나마저도 영옥이에 대한 원망을 거들고 말았으니, 그 비난의 도가 얼마나 강했는지 영옥이는 알아야 할 것이다. [미안해 영옥아. 나 고해성사를 볼게.] 이 글을 읽고난 영옥이로부터 시원한 생맥주 한 잔 사겠다는 연락이 오겠지 하고 기다리는 내 마음은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연락이 올 때까진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꺼내 한 잔 가득 채운 뒤, 컴퓨터 다시 앞에 앉았다. 소련의 행태 과학자 Pavlov의 실험결과가 맞긴 맞나보다.)
선두와 중간 그룹이 도착한 지가 상당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거의 사색이 된 표정으로 후미그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덕분에 좀 더 휴식시간은 길어졌지만, 맥주잔들이 눈에 아른거려 오히려 고통스러웠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래도 씩씩한 우리 대원들은 생맥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늘의 목표 지점인 호다카다케 산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출발에 앞서 이 코스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하라는 당부와 함께 결의를 다지는 기념촬영을 하였다. 호다카다케 산장은 가라사와 산장에서 직선거리로 뚜렷이 보이기는 하지만, 거의 경사 40도에 가까운 등산로로 이어져 있기에 함께 운행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배기량 및 체력에 맞게 각개전투로 호다카다케 산장에 도착하기로 하였다. 물론 산행경험이나 체력단련이 안 되어 있는 모 대원에게는 승일이가 따라 붙어주기로 했다. 이 때 시각이 15:00시 쯤 되었다.
세 걸음 정도 옮기고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의 연속이지만, 앞뒤에서 운행하고 잇는 대원들의 격려성 멘트나 구호가 의지를 불태우게 했고,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챙겨주며, 위험한 지점에서는 기다려 반드시 확인을 시킨 뒤, 떠나는 동지애를 발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특이한 점이라면 등산로에 그 흔한 안내판이나 산악회 리본조차 없다는 점이다. 단지 국제공인 마크라 할 수 있는 ○ X를 하얀색 페인트로 표시 해 놓아 누구나 쉽게 자신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위험하거나 틀린 길은 아닌지 알려주고 있었다는 사실과 주위에는 더 이상 식물들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그 만큼 고도도 높고 바람도 세기 때문일 것이다.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너덜지대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갈之자 등반로를 지루하게 통과하였다. 제일 빠른 그룹이 16시 15분쯤 도착하였고, 나머지 대원들이 5분, 10분 간격으로 속속 도착하였고, 필자가 도착한 시간은 17:00시를 조금 지난 무렵인 것으로 기억된다.
미리 도착한 대원들의 안내를 받아, 입구에서 준비되어 있던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등산화와 배낭을 들고 우리에게 배정된 오른쪽 통로의 가장 왼쪽 구석방을 가보니 바닥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단정하게 정돈된 침구들이 놓여져 있었다. (방 배정에는 한국 사람들의 질서의식이나 공중문화 수준이 감안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드니 기분이 약간은 상하였다). 그 방의 절반을 나누어 한 쪽 컨으로는 2층으로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다미 한 장에 번호표가 두개씩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등산객이 많을 경우에는 한 다다미에 두 사람씩 자야하나보다. 나 같은 원통형 체형은 칼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는 순간, 아래쪽 입구에서 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김관수 선배님과 조명하 대원을 볼 수 있었다. 약간의 고소증세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짐작은 하였지만, 명하한테 거센 항의를 받는 것이 심히 우려가 되어 단정적인 표현은 피하려고 한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 팀에게 배정된 식사시간인 5시 30분이 되었다. 승일이와 창호가 아직 도착하진 않았지만, 우리에게 배정된 시간과 식탁이 있기에 먹으면서 자리를 잡아둘 요량으로 식당으로 향하였다. 식당에 가보니 이미 밥과 일본식 된장국을 비롯해 몇 가지 반찬이 차려져 있었는데, 여기에다 한국에서 공수해 간 마늘장아찌, 김, 그리고 복은 고추장 등을 곁들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리의 대원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하자, 강 철원 대장이 직접 마중을 나가 데리고 오기로 하고 산장을 나섰다. 몇몇 대원들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자, 산장종업원들이 눈치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튿날 아침식사준비를 위하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종업원들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식하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자,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직원이 와서 부족한 것이 없느냐? 다 먹었느냐? 하는 식으로 말을 건다. 그래도 친구들을 위해 차를 더 달라, 물을 달라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6시 5분이 되자 후미그룹이 도착을 했고, 배낭을 비롯 다른 장비들은 일부 동료들이 대신 나르기로 하고, 일부 동료들은 밥과 국을 떠 주면서 위로하는 동료애는 도저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누구 그랬는지 몰라도, 일본에 원정등산을 보면, 철저한 자연보호 의식, 그리고 과도하다 할 정도의 산행준비, 그리고 잘 갖추어진 산장시설에 놀란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자연보호의식에 대해선 이미 간간히 소개한 바 있는 그 대로이다. 그리고 산행하는 동안 거의 모든 등산객들은 평소 우리들이 만지락만 거렸지, 선뜻 사지 못했던 최고급품의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등산 경력이 제법 되는 나도 처음 보는 신기한 장비들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그래서 우리는 귀국길에 시간을 내어 등산장비점에 들르기로 마음을 먹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산장에는 화장실, 세면실, 자료실, 그리고 건조실 등을 비롯해 간단한 간식과 기념품을 파는 매점, 식당, TV, 전화, 난로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1박 2식에 일만엔을 받고 있는데, 다소 비싼 느낌이 든다.
산장에서 보여준 일본인의 질서의식과 남을 의식하는 조심성(그 정도가 너무나 지나쳐 배려한다는 말을 쓰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걸어 다녀도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고, 세면실에서 양치질을 할 때나, 세면을 하는 것을 보아도 한 방울의 물이라도 절약하려고 노력을 하는 모습이 역역했다. 특히 그들이 하는 세면은 내가 볼 때 손가락에 물을 묻혀 눈 꼽을 떼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세면실에서 용무가 끝나면 자기가 사용한 세면기에 자기가 가져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모습도 흔히 보였다. 한 가지 더 소개한다면 세면실과 화장실은 별도의 문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소변기와 대변기에 올라서려면 계단 하나 높이의 턱이 있었고, 용무를 보려면 복도에서 신고 다니던 녹색의 슬리퍼를 벗어 놓고 거기에 놓여 있는 빨간 색의 슬리퍼들을 신어야 했다. 그리고 그 높은 산장에서도 화장실은 수세식이며, 물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는 모습은 오히려 나를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을 정도였다.
난로가에서 온기를 흠뻑 느끼면서 커피 한잔씩을 마신 우리들은 방으로 돌아왔다. 고소증세를 느껴 속이 불편하거나, 어지러운 일부 대원들은 일찍 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기도 했고, 이 곳까지 오는 데 가장 많은 고생을 했던 창호가 몸살 기운까지 보여 두개의 침구를 합쳐 깔아 주고 덮어 주며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배려하는 teamwork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고, 술을 싫어하지 않는 김응구, 김규한, 윤승일, 이영일, 그리고 필자는 둘러앉아, 비축해 왔던 소주를 풀어 내일의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였다. 몇 순배의 잔들이 돌아가고 있는데, 옆에서 자고 있던 창호가 덮고 있던 두툼한 이불과 담요가 살며시 들리더니, 방구를 뀌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습관인지, 피곤해 죽겠는데 옆에서 희희덕거리는 우리들이 미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한 바탕 소란과 함께 웃음이 퍼져 나갔다. 그 사건이 벌어진지 잠시 후에 술자리는 정리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들 피곤하다는 이유와 내일의 산행은 오늘보다 더 험난하다는 사실도 있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8시 30분 예비 소등, 9시 완전 소등되는 산장의 규정 때문이었다. 그토록 피곤하건만 규한이는 잠이 안 올 것 같다며, 응구로부터 수면제를 또 얻어먹고, 승일이를 부추겨 불이 꺼진 깜깜한 방 안에서나마 몇 잔 더 먹자는 부탁을 하니, 순하고 마음이 약한 승일이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응하고 만다. 그 순간 나는 몇 명씩 나누어 자도 코고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는데, 이렇게 한 방에 몰려 자니,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겠다는 얄팍한 생각에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2시간 정도를 잤을 무렵,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나, 헤드랜턴을 이마에 걸치고, 일어나자 영일이가 몇시야 하고 말을 걸며, 밖에 나갔던 규한이가 들어와 잠을 청한다. 다들 깊이 자지 못했나보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온 사방에서 코고는 소리, 피곤해서 내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 등이 크고 작게 그리고 길게 짧게 내면서 각자의 특성을 나타내려는 노력 덕분에 잠은 오질 않는다. 이불을 덮고 있으면 답답하고, 제치면 춥고 하여 이러한 동작을 반복하고, 소리가 덜 들리는 쪽으로 몸의 방향을 틀면 그 쪽에서 금방 알아차리고 본격적인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자는 것을 포기했다. 그 시각이 새벽 3시쯤 되었다. 조금 더 지나면 세면실과 화장실에 사람들이 몰릴 것 같기에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다시금 방을 나섰다. 이 대목에서 밝혀야 할 커다란 비밀이 있다. 우리의 산행 스승이기를 바라는 현경이에 관해서이다. 현경이는 며칠이 걸리든 박 산행에는, 그것도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세수는 물론 양치를 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대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양치 좀 하라고 채근하면 산에 와서 뽀뽀할 일 있어 하면서 뽀뽀할 사람만 닦으라고 한다. 현경이의 징크스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참아야 할지 다른 동기들이 판단을 내려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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