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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1학년 과정을 마치면서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신학대학에 합격할 자신이 없는 가운데 준비할 때에는, 공부할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었는데, 1년이 지나면서 기도제목이, 목회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학년과정을 보내면서, 계속해서 2, 3년만이라도 목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사하고 기도했다. 5, 6명이 있어도 좋고, 다른 목회자가 가기 싫어하는 곳이어도 좋으니, 목회를 통해 섬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하고 계속 기도했다. 아는 목사에게 부탁해서 내가 목회할 수 있는 적당한 목양지가 있으면 소개해 주라고도 했다.
2학년 과정을 마친 2월의 어느 날, 히브리어 공부를 도와준 학생이 순천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거기에 하객으로 참석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부탁해둔 목사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었다. 내게 적합한 교회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담양에 있는 광암교회의 전도사인 목회자가 이동을 하게 되어 공석이 되니, 그 교회 당회장을 찾아가서 부탁해 보라는 것이었다. 당회장이 신대원 교수로 평소에 나와 가끔 대화를 나눈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순천에서 돌아와, 바로 교수 집을 방문하여 의논하고, 광암교회 목회자로 부임하기로 결정했다. 교회에 1500만원의 부채가 있는 것을 껴 안아야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 정도의 경제 능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2월 마지막 주 수요일 밤 예배시간에, 광암교회 목회자의 이취임 예배가 드려졌다. 예배시간 공백이 전혀 없이 목회자가 떠나면서 바로 새 목회자가 부임한 것이다.
간단한 짐을 꾸려 아내와 이사를 하고, 2002년 3월 첫 주부터 강단에 서서 설교하며, 목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었다. 신대원 3학년이 되면서, 목회도 함께 병행하게 된 것이다. 신속하게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즐거운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목회의 모든 것은 섬기는 자로서의 삶이었다. 2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다. 광주에서 마침 교회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던 조카 부부가 나와 같이 가서, 교회에 있는 봉고차를 운행해 주며 봉사하기로 했고, 교회 전도사 노릇을 하다가 은퇴한 아내 친구가 와 주었으며, 딸 해지가 교회 반주를 맡아 주면서, 주일이면 광주에서 4명이 왔고, 그 지역 교인들로 배연심권사를 비롯해서 16명(명단이 있는 것을 적어 보면, 배연심, 양봉님, 조정인, 남말순, 박순이, 정홍기, 이승례, 유판순, 김은순, 이연순, 서도숙, 서삼숙, 황우현, 김금순, 이말순, 이인희)의 교인이 있었다. 후에 박길자 집사가 왔고, 이말순 성도는 떠났으며, 정홍기, 이인희, 서삼숙 성도는 소천하기도 했다. 외부 사람이 가끔 오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노인들인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섬겨 드릴가하는 것이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고, 야유회 등을 많이 계획하여 실천하곤 했다. 교회 성장이나 다른 목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마추어 목회였다.
2003년 2월에 신대원을 졸업하면서 목사고시를 봐야 했다. 첫 번째 목사고시에서 8과목 중 7과목에 합격하고, 설교문 작성은 불합격했다. 2004년도에 불합격한 설교문 작성 시험에 다시 응시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답안 작성을 위해 펜을 들었는데 손이 몹시 떨렸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기도하며,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글을 쓸 수가 없어, 몇 자 적어가다가 포기해야 했다. 2005년에 다시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있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목사 안수 받는 것을 포기하고, 목회를 접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대원 2학년 때에 2, 3년만이라도 목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서 목회 3년차에 이르렀으니, 기도한대로 응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를 안 할 바에야 목사 안수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때 맞춰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목회를 계속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를 혼자 계시게 할 수 없게 했다. 96세가 된 어머니는 목회 현장으로 나와 함께 가는 것을 거절하고, 계림교회 출석만을 고집하면서, 대명아파트에서 혼자 기거하고 계시면서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욕실에 수도를 틀어 놓고 주무시는 바람에 거실까지 물이 넘쳐나서 현관을 통해 흘러나가는 것을, 이웃사람들이 발견하고 밤중에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소동을 일으키신가 하면, 가스 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주무시므로 화재의 위험을 겪기도 했다. 할 수 없어, 아내가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게 하고, 담양 교회사택에는 나 혼자 있으면서, 틈틈이 집에 오가고 해야 했다. 혼자서의 삶도 불편할 뿐 아니라, 교회 일에도 아내가 없으므로 불편했다. 2005년 2월에 당회장에게 사임을 통보하고 후임자를 정하게 했다. 곧 후임자 목사가 선정되어, 4월 첫 주일을 마지막으로 목회를 접고, 광주 집으로 돌아왔다. 목회를 접으면서 출석 교회를 어디로 할 가 고심 중에 아내의 강력한 권고로 모교회인 계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목회를 마치면서 써 놓은 글이 저장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 응답하시는 하나님
1999학년도를 마지막으로 33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려고 하면서 제 2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마냔 놀기만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생각한 것이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교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평생 책을 가까이 하고 살았고 공부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중에 결정한 것이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1965학년도를 마지막으로 대학졸업장을 받고 1966학년도에 한국신학대학에 2학년으로 학사편입을 하여 서울에 가서 기숙사생활을 하며 공부를 하다가 한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집에 와 있으면서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이 막막하여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모집하는 채용시험에 응시해 놓고, 다시 서울에 가서 2학기 공부를 하고 있던 중 그해 10월 1일자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챙겨 내려와서 곧 교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하는데 필요한 돈은 군대에서 제대하면서 받아 가지고 온 퇴직금과 주변의 약간의 도움으로 했고 집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2학기는 포기 상태였는데 9월 2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예비군 훈련소집을 받아 영천에 있는 헌병학교에 가서 보름동안의 훈련에 임했더니 중위봉급 반달 분을 받게 된 것이 서울에 가서 한 달을 생활 할 수 있는 자금이 되어 다시 서울에 가서 한 달을 지낸 것이다. 그 이상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시기에 맞춰 발령이 난 셈이 되어 미련 없이 공부를 포기하고 초등학생들과의 생활을 시작으로 교직을 평생직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교직생활을 마감하면서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바로 중도 하차한 신학공부에의 미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의 진학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런데 입학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지원자가 많고 시험도 영어 등 네 과목을 치러야 된다는 것 때문이다. 광주여고에서 마지막 학년도의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든지 길을 열어 주십사 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준비는 하지 않고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간절한 기도만 했다. 그러던 중 뜻밖의 희소식을 들었다. 호신의 모집요강이 발표되었는데 신대원에 특차전형제도가 생긴 것이다. 모집 정원의 5%를 면접만으로 모집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도입하는 제도였던 것이다.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임마누엘교회 박 영식목사의 도움을 받아 당회장 추천을 받고 노회에서의 교육과 시험을 거쳐 노회의 추천을 받아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1999년 12월 1일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 학교에 갔더니 대기실에 24명의 응시생이 있었다. 5명 모집에 24명이라 어려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면접을 마치고 돌아와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 발표하는 날 전화를 했더니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 없이 감사했다.
2000년 2월 말일자로 33년간의 학교생활에서 명예퇴직하고 곧 3월 2일부터 대학원생이 되어, 배우는 학생의 자리에서 대학교수들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가르치는 교육자에서 배우는 피교육자로 하루사이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열심히 학교에 다니며 피교육자로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젊은 청년들이 대부분인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 나도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젊은이들과의 호흡이 좋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어떻게든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한 것이 기도제목이었고 입학한 다음에는 절대로 중도 낙오하는 일 없이 끝까지 공부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였다. 1년 동안 1학년과정을 마치고나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고 기도제목이 추가되었다. 공부만 해도 좋겠다는 것이 이제는 목회도 하게 해 주십시오 한 것이다. 사실 신대원에 지원할 때나 입학해서 상당기간을 지내는 동안까지 목회생각은 없었다. 옛날에 중도하차한 못다 한 공부의 꿈을 이루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욕심이 생긴 것이다. 목회자 양성과정의 공부를 했다면 목회도 해야 되는 것이 당연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 외에는 결격사유가 없겠기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섯 명만 있어도 좋고 시골 오지에, 갈려고 하는 목회자가 없는 곳이어도 좋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곳이면 가서 섬기는 자로 살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나이가 많아 오래할 수는 없겠기에 2, 3년만이라도 하게 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마 2학년과정을 보내면서 계속적인 기도제목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수요일 저녁, 비가 많이 내리는 저녁이었는데 계림교회 출신으로 담양읍 복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 종학목사를 찾아가서 목회지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 목사가 2002년 2월 24일에 목회자가 떠나는 광암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그 교회의 당회장이 호신의 차 종순교수이므로 찾아가서 의논하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학교생활에서 차 교수가 나이 많은 나에게 관심을 표시하며 더러 격려도 해 주고 하신 분이기에 알 수가 있어서 25일 아침 일찍 차 교수 자택으로 방문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며 목회기회를 주기를 부탁했었다. 차 교수는 떠나는 사람과도 의논해 보아야겠다고 하면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평소 공부하는데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려운 부분을 도와주던 최 전도사가 순천에서 결혼식을 한다기에 축하해 주기 위해 갔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차 종순 교수의 전화를 받고 급거 광주에 와서 그날 저녁 수요예배에 맞춰 광암교회에 가서 부임인사를 했던 것이다.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수요예배시간에 부임인사를 하면서 참석한 교인을 보니 주로 늙은 노인들로 14명이었다. 모든 것이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학교는 2년을 마쳤으니 1년 더 공부를 해야 했다. 2002년은 공부와 목회를 함께 해야 하는 해였다. 제법 바빴지만 재미있었다. 마음껏 시골의 노인 성도들을 섬겨드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잘 섬겨드리는 것이 될까 많이 생각을 했다. 내 수준에서 잘 섬기는 것은 첫째는 말씀으로이고 다음은 먹는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다. 시골 노인들에게 부족한 것이 많지만 고생하면서 농사일을 하고 사는 분들이 그렇게 잘 먹고 사는 편은 아니었다. 교회에 오거나 사택을 방문하면 사탕이라도, 별거 아닌 음료수라도 드실 것이 꼭 있게 노력했다. 주일에 함께하는 점심식사에 입맛에 맡는 반찬이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내가 신경을 써 가며 잘했다. 노인들이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더 잘해보려고 했다. 컵으로 섬겨드리는 것에 대해 교인들은 바가지로 퍼 오는 격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많이 섬김을 받은 것 같아 부담이 되었다. 애잔한 노인 성도들의 조금 가진 것 마저 내가 다 빼앗아 먹는 것 같아졌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주님께서 섬기는 자로 살라고 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한 것보다 훨씬 더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왔느냐고 한 노인 권사님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나에게 좋은 말은 안 잊는 것 같다.
목회경력 만 3년이 되어가면서 목회를 접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설교가 서투른 것 같고 각종 모임을 통한 젊은 교역자들과의 잦은 만남 등이 부담이 되었다. 또 어머니를 집에 혼자 있게 하는 시간이 많은 것도 부담이 되었다. 촌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사택의 형편도 좋지 않아 모시지 않고 광주 집에 계시게 했는데 그것이 부담이 되었다. 어느 날에는 혼자 계시면서 가스레인지에 무엇을 올려놓고 잊어버려 빨갛게 타게 하고, 다행이 주변에 인화물질이 없어서 화재는 나지 않았지만 위험했고, 어느 토요일은 욕실에 수도를 잠그지 않아 물이 넘쳐 거실을 지나 현관을 통해 밖으로 물이 흐르는 것을 옆집 사람이 보고 문을 두드려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까 마침 잠기지 않은 창문을 통해 이웃 젊은 분이 넘어와서 물을 잠그고 아줌마들이 동원되어 거실에 물을 치워주고 했다. 마침 욕실에 수채 구멍이 막혀 물이 위로 넘쳤기에 이웃에서 알아 본 것이고 물이 잘 빠졌더라면 아마 밤새도록 물이 흘렀을 것이다. 다음 날이 주일이기에 시골에 있는 우리에게는 알리지 않고 이웃 분들이 도와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조그만 한 선물로 보답하기도 했었다. 2, 3년만이라도 목회 하게 해달라고 기도 했더니 그 시한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정년 때까지, 아니 그 이상이라도 능력이 허락하는 한 계속 목회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더라면 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은 기도한대로 이루어주시는구나 하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 노인들도 중요하지만 상노인이신 내 어머니부터 보살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후임자를 찾도록 당회장에게 이야기하고 목회를 사임할 준비를 한 것이다.
2002년 3월 첫 주일부터 시작하여 2005년 4월 첫 주일까지 만 3년 목회를 하고 후임 목사에게 교회를 인계하고 광주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어서 나에게 목회까지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남은여생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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