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레미야서 개관- 세 가지의 자료
할렐루야! 자비와 사랑으로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예레미야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지혜를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늘 주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성도는 예수님께 배웁니다. 절대로 이 진리를 잊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게 하소서! 주님의 크신 위로와 자비가 이 코로나 등으로 어려운 때 이 민족에게 임하여 온갖 역경을 다 극복하고 모든 백성이 평안하게 살게 하소서! 우리 모두 예수님께 예레미야서를 잘 배워서 이 시대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향한 말씀을 듣게 하시고 회개하고 올바르고 정직하며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샬롬! 예레미야서의 이해 첫 시간에는 운전자 10계명을 성경의 십계명을 보면서 10가지로 설명을 드렸고 이 중요한 운전자의 계명을 어길 경우에 도로상에서 생기는 사고와 피해에 대해서 생명과 재물로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과 국가적인 천문학적인 손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참고해서 운전에서의 가장 큰 계명이 되는 양보운전과 방어운전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다른 분들이 정리한 개관을 그대로 보면서 예레미야서를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청지기님의 글
열왕기하 제3부 제18-25장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는 남유다 잔존 시대의 역사와 남유다의 멸망에 대하여 다룬다.
이중 전반부 제18-20장은 남유다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하여 다룬다. 이어 중반부 제21-23장은 남유다 제14대 왕 므낫세부터 제18대 왕 여호야김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끝으로 후반부 24,25장은 전 4차에 걸친 바벨론의 유다 침공과 그에 따른 유다의 멸망 및 멸망 직후의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이러한 제24,25장의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24:1-7의 문단은 여호야김 시대에 발생하였던 바벨론의 2차에 걸친 유다 침공에 대하여 다룬다. 바벨론의 제1차 유다 침공은 B.C. 605년에 있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B.C. 605-562년)은 메소포타미아의 서북부 하맛 지역으로 쫓겨가 있던 앗수르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뒤늦게 앗수르를 돕기 위해 온 애굽 왕 느고를 격퇴한 다음 계속 남하하여 팔레스틴까지 장악하게 된다. 당시 유다의 왕으로서 애굽의 봉신의 지위에 있있던 여호야김은 즉시 항복하고 느부갓네살을 섬기기로 하였다(la절).
이때 바벨론은 다니엘을 비롯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 집안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은 물론 성전의 기구들 중 일부도 탈취하여 갔다(단 1:1-7). 이것이 그 유명한 역사적 사건인 제1차 바벨론 포수이다. 그 이후 여호야김은 3년 동안은 느부갓네살을 섬겼으나 B.C. 602년 친애굽파의 의견을 좇아 바벨론을 배반한다(1b절).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아람, 모압, 암몬 등 바벨론 속국의 군대로 편성된 연합군으로 다시 유다를 치게 한다. 이것이 바벨론의 제2차 침공이다. 이 당시 유다는 크게 유린된 것 같지는 않지만 여호야김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대하 36:5-7). 그러나 성경에 그의 통치가 B.C. 598년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다시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24:8-17의 문단은 바로 남유다 제19대 왕 여호야긴 시대에 있었던 바벨론의 제3차 침공과 제2차 바벨론 포수에 대하여 다룬다.
바벨론의 제3차 침공은 B.C. 597년에 있었다. 이 바벨론의 제3차 침공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호야김의 배반에 그 외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침공의 근본 원인을 여호야긴의 악행에서 찾고 있다(8,9절).
여호야긴은 바벨론이 침공하여 오자 즉각 느부갓네살에게 투항하였는데, 이때 바벨론 군대는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고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많은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10-16절). 이것이 소위 제 2차 바벨론 포수이다.
이때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방백과 용사들 일만 명을 비롯하여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 등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 모두였다. 선지자 에스겔과 에스더의 삼촌인 모르드개도 이때 포로로 잡혀갔다(에 2:6 ; 겔 1:2).
한편 느부갓네살은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삼촌이자 요시야의 셋째 아들인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라 개명하고 남유다의 제20대 왕으로 앉혔다(17절).
다음으로 24:18-25:21은 남유다 제20대 왕 시드기야 시대의 바벨론의 제4차 침공과 남유다의 멸망에 대하여 다룬다.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시드기야는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11년간(B.C. 597-586년) 다스렸는데, 성경은 그가 여호야김의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하여 진노하시기를 그들을 당신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24:18-20).
이는 결국 유다의 멸망의 표면적인 원인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한 데 있다 할지라도 그 근본 원인은 유다 말기의 왕들과 백성들의 타락에 있음을 시사하여 준다.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배반한 것은 B.C. 592년경의 일이다. 당시 암몬, 페니키아, 모압, 에돔 등의 유다의 주변 국가들은 반바벨론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저항하였는데(겔 21:18-23), 시드기야도 예레미야의 경고(렘 27:1-22)에도 불구하고 이 반바벨론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을 배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제9년 곧 B.C. 588년 전격적으로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유다는 1년 6개월 동안 필사의 항전을 하였지만 B.C.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끝내 멸망하고 만다.
이때 바벨론 군대는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유다의 핵심 인물들을 처형하였으며, 성전과 왕궁을 완전히 파괴하고 성전 기물을 약탈한 다음 유다 백성들 중 하층민만을 남겨두고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25:1-21). 이것이 소위 제 3차 바벨론 포수이다.
끝으로 25:22-30의 문단은 유다의 멸망 이후에 있었던 두 주요 사건인 바벨론이 세운 유다 총독 그달랴의 피살 사건과 여호야긴의 석방 및 복권에 대하여 다룬다.
여기서 여호야긴의 석방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본서의 일차 독자들로서 암울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당시의 유다 백성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심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대할 때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선민(選民)의 자손인 남북 이스라엘 왕국이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마저도 죄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언약’이라는 기초 위에 설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같은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파송하여 언약을 지켜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으며 도리어 더 큰 악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은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는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바닥없는 타락을 계속하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먼저는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제는 유다까지도 망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백성 됨의 정체성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가운데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바이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또한 다른 한편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빌 2:12).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인치심과 인도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우리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고 성령을 근심케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주장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을 강조하신 바 있다.
다음으로 왕국(kingdom)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어도 민족(nation)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민의 자손인 남북 이스라엘 왕국이 당신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의 죄를 범하자 앗수르와 바벨론 퉁의 주변 강대국을 통하여 그들을 멸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세운 이스라엘 왕국은 특별한 족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국을 심판하고 멸하시는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만은 멸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여 주시고 또 포로에서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백성이 범죄 하면 징계는 하시되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한 번 당신의 백성으로 택한 자들을 결코 버리시는 법이 없다. 비록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를 통하여서라도 돌이키게 하심으로 반드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설령 범죄 하여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알고 인내하며 구원의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의 의의에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사회적 구심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매개물이었다. 더욱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유다 백성들은 성전이 있는 한 유다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그들 자신들을 죄를 범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성전도 파괴되게 하심으로 지상 성전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보여지는 성전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차대한 하나님 당신의 언약과 진노 가운데서도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 당신에게 집중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다. 지상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 구원의 보증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은 성전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그 자체이다.
한편 지상 성전의 파괴는 그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은 성전을 대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지상의 성전은 그 성전의 실체이시며 성전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마 12:6)의 예표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지상의 성전을 통해서는 구원의 하나님께 온전히 다가갈 수 없었다. 오직 1년에 한차례 대속죄일에 그것도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상의 성전에 세워진 것은 실상 인간으로 하여금 성전의 한계를 깨닫고 성전의 실체로서 누구나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대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지상 성전의 의의를 모르고 그것을 마치 구원의 보증물처럼 여기고 심지어는 숭배하기까지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성전을 파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러한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 성도들 중에는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를 구원의 보증처럼 여겨 교회를 숭배하며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 교회 밖에만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주는 교훈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물에 지나지 않는 성전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악을 일삼다가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출처] 왕하-10, 바벨론의 침공과 유다의 멸망(왕하 24,25장)|작성자 청지기
출처:『관주 톰슨 성경』
저자: 예레미야
기록 연대: B.C.627~585년
예레미야의 메시지
그는 눈물의 예언자(예레 9:11, 13:17), 또는 고독의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강한 권고로 그 직분을 맡게 되었다(예레 1:6) 아나톳(아나돗)의 사제 힐키야(힐기야)의 아들인 그는, 20세 때인 요시야 왕 13년(B.C.627년)에 예언자로 소명(召命)을 받았다. 그는 40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갖은 반대와 박해를 무릅쓰고 변절(變節)한 남유다를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예레 11,18~23; 12,6; 18,18; 20,1~3; 26,1~34; 37,11~38,28)
젊은 사제였던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남유다의 마지막 선왕(善王) 요시야의 나라 재건 운동은 이미 막을 내렸다. 남유다의 파멸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구원(救援)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審判)의 선포이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하느님을 배반한 나라는 신명 28~30장에 예언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바빌론은 곧 남유다를 점령할 것이며, 백성들은 목숨을 위하여 항복(降伏)하는 것이 현명(賢明)한 일이었던 것이다.
극단적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에 의해서, 이 메시지는 즉각 배척(排斥)을 당했다.
예레미야는 곧 간섭자와 반역자로 낙인(烙印)이 찍혔고, 왕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까지도 그의 목숨을 노렸다. 그가 끝까지 자신의 소명에 성실했다는 것은, 인간의 신념(信念)과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서의 시대적 배경
1. 바빌론 제국의 1차 침입 전까지
솔로몬 사후(死後),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래, 남유다 왕국의 역사는 4회에 걸친 종교적 위기와 그 사이 3회에 걸친 재건 운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시야 왕(B.C.640~609년)은, 최후의 종교 재건을 주도했으며, 그의 치세 중에 성전에서 율법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요시야 왕 이후, 바빌론 유배로 파국(破局)에 이를 때까지, 유다의 정치, 종교, 윤리는 모두 쇠퇴일로(衰退一路)에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활약했다.
B.C.612년, 수도 니네베(니느웨)가 함락(陷落)된 후, 아시리아 제국은 곧 붕괴되고 바빌론 제국이 뒤를 이어 패권(覇權)을 차지했다. 그렇게 되자 예루살렘 왕실은 두 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두 파 중 하나인 친이집트파들은, 이집트가 다시 재기(再起)해서 세계를 재패(再敗)할 것이므로, 바빌론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이집트 제국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 파인 친 바빌론 파들은, 민족의 생존(生存)을 위해서 바빌론에 투항(投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집트나 바빌론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할 것을 경고하였다. 예레미야는 B.C.627년(요시야 왕 13년)에, 그의 예언 활동을 시작했으며, 5년 뒤에는 율법서 발견과 우상 파괴 등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예레 11,1~8) 그는 바빌론 유배 이후까지 활약했다. B.C.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그는 이집트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요시야 왕은 위기에 처한 아시리아 제국을 도우러 올라가는 파라오 느코(바로 느고)를 무모(無謀)하게 저지(沮止)하다가, B.C.609년에 므기또(므깃도)에서 전사(戰死)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여호아하스)가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랐다. 파라오 느코(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즈(여호아하스)를 친 바빌론 파로 단정하고, 재위한 지 3개월 만에 그를 이집트에서 잡아가고, 대신에 여호야킴(여호야김)(B.C.609~598년)을 왕위에 앉혔다.
요시야가 죽은 후, 예레미야에 대한 배척이 더욱 심해졌다. 그는 붙잡혔다가 벌거벗은 채로 도망가기도 했으며, 또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는 예언 말씀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의 서기 바룩을 대리(代理)로 임명해야만 했다. 강력하고 난폭(亂暴)한 왕이었던 여호야킴(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억압(抑壓)했다. 그의 치세 중에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바룩이 기록하여 백성들 앞에서 낭독(朗讀)하였다.
예레미야가 처음 구술(口述)한 책은, 여호야킴(여호야김)이 불살라 버렸다.(예레 36,25) 그래서 예레미야는 후에, 예언 말씀을 더 첨가하여 바룩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한편 여호야킴(여호야김) 당시 B.C.605년에는, 카르크미스(갈그미스) 전투가 발생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이집트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게 크게 패하였다.
2. 바빌론 유배까지
그 후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은, 곧 팔레스타인 지방 정복을 시작했다.
이에 다니엘을 포함한 일부 유다인들이 바빌론 제국으로 끌려갔다. 그후 여호야킴(여호야김)이 바빌론 제국에 반역하자, 남유다 왕국은 숱한 고난을 당했으며, 또한 이 혼란의 와중(渦中)에서 여호야킴(여호야김)이ㅡ아마도 궁중 세력 간의 알력(軋轢)으로ㅡ재위 11년 만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아들 여호야킨(여호야긴)(콘야(고니야), 또는 여콘야(여고니야)라고도 부름/예레 22,24.28; 24,1; 27,20; 29,2)이 왕위를 계승했고, 석 달(3개월) 뒤에는 바빌론이 두 번째 침입을 하여 여호야킨(여호야긴)과 상류층 유다인 인사들, 그리고 장인(匠人)들을 끌고 갔다. 여호야킨(여호야긴)은 바빌론에서 37년간의 감금(監禁) 생활이 끝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은 여호야킨(여호야긴) 자리에, 그의 삼촌인 치드키야(시드기야)를 임명했다. 11년 동안 치드키야(시드기야)는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봉신(封臣)으로, 왕위에 있었다. 그는 나약(懦弱)한 성격이었지만, 목숨을 노리는 귀족들로부터 예레미야를 보호했다. 그리고 비록 실천할 능력은 없었지만, 언제나 예레미야의 자문(諮問)을 받아들였다.
대세에 몰리자, 그도 어쩔 수 없이 바빌론에 반기(反旗)를 들게 되었다. 따라서 치드키야(시드기야) 재위 제9년(B.C.588년)으로부터 바빌론의 마지막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엔 B.C.586년에 포위된 예루살렘 도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치드키야(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수많은 유다인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역사를 전해주는 자료로는, 예레 40~45장의 기록이 유일하다.
예레미야와 대부분의 평민들은, 유다에 남아서 바빌론 제국의 앞잡이였던 그달야(그달랴)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 후 남아있던 친이집트 파들이 내란(內亂)을 일으켜, 꼭두각시 총독 그달야(그달랴)를 암살하고, 이집트로 도주(逃走)했다. 이때 예레미야도 강요에 못 이겨 이집트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예레미야의 죽음으로, 히브리 민족의 왕정(王政)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 후 유다인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키루스(고레스)의 조서(詔書)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의 첫 장을 열게 된다.
3. 예레미야서의 배경이 되는 주요사건 연대표
B.C.627년: 젊은 사제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소명을 받다. 남유다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에게 조공(朝貢)을 바침.
B.C.622년: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함.
B.C.612년: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니느웨)를 점령함.
B.C.609년: 요시야 왕이 파라오 느코(바로 느고)를 대항하다가, 므기또(므깃도)에서 전사함.
(2열왕 23,29~30)
B.C.609~598년: 여호야킴(여호야김)이 이집트의 봉신으로 남유다 왕국을 다스림.(예레 22,13~17)
B.C.605년: 카르크미스(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이 이집트를 대파.(예레 46,2)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팔레스타인 지방 제1차 침입.
다니엘과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여호야킴(여호야김)은 바빌론 제국의 봉신이 됨.
B.C.601년: 여호야킴(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고, 다시 이집트와 동맹을 맺음.(예레 22,13~17)
B.C.597년: 여호야킴(여호야김) 사망(B.C.598~597년 사이). 바빌론 제국의 제2차 침입.
여호야킨(여호야긴)이 폐위(廢位)되고, 치드키야(시드기야)가 왕이 됨.
B.C.586년: 바빌론 제국의 3차 침입과 예루살렘의 함락, 남유다의 통치자로 임명됨. (2열왕 25,22~26) 그달야(그달랴)가 암살, 예레미야는 이집트로 끌려감.
예레미야서의 내용
이 책의 예언들은 연대기 순서로 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은 남유다 왕국을 통치하던 왕의 순서에 따라, 각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예언들을 정리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요시야: 예레 1~6장
여호아하즈(여호아하스): (살룸/1역대 3,15), 예레 22,10~12
여호야킴(여호야김): 예레 7~20장; 25,26,35,45장; 46,1~12; 47~49장
여호야킨(여호야긴): (콘야(고니야), 여콘야(여고니야)/2열왕 24,6.8), 예레 22~23장
치드키야(시드기야): 예레 21,2; 27~34장; 37~39장
그달야(그달랴): 예레 40~44장
죄와 심판에 대한 경고가, 이 책 전체를 일관(一貫)하여 강조된다.
그러나 동시에 소망(所望)과 회복(回復)의 말씀도 선포되고 있다. 중요한 예언으로는 콘야(고니야)에 대한 저주(예레 22,30), 메시아의 예언(예레 23,5~6), 바빌론 포로의 기간(예레 25,11), 그리고 새로운 계약에 대한 계시(예레 31,31~34)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다른 성경 전체에서 언급한 것보다도, 더 많은 양의 바빌론에 대한 언급이 있다.(164회)
출처:『간추린 비전성경사전』472~473페이지
예레미야의 예언 말씀과 그의 생애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52장)으로, 12권의 소예언서를 합한 것보다 더 길다.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비교적 예레미야 자신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전기적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의 성격도 기도문과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다.(예레 1,6; 4,10; 14,13; 16,14~15)
예레미야서의 저자
힐키야(힐기야) 사제의 아들 예레미야에 의해 기록되었다.
여호야킴(여호야김) 왕 제4년(B.C.605년)에, 예레미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요시야 왕 시기부터 지금까지 환시로 받은 모든 예언 말씀들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예레 36,1~2) 그는 그의 서기관이자 벗이었던 바룩을 불러, 이 모든 예언 말씀들을 받아쓰게 하였으며, 바룩은 성전으로 가서 그 글을 낭독하였다.(예레 36,8)여호야킴(여호야김) 왕 제5년(B.C.604년) 9월, 예루살렘과 모든 성읍들에 단식(斷食)이 선포되었을 때, 바룩은 다시 그 예언 말씀들을 백성들에게 낭독했다.(예레 36,9~10) 이 사실이 대신(방백)들에게 보고되어, 바룩은 두루마리를 갖고 대신(방백)들에게 호출되었으며, 그 두루마리는 여호야킴(여호야김) 왕에게 보내졌다.(예레 36,20~21)
그러나 여호야킴(여호야김) 왕은 낭독되는 내용을 듣자마자, 작은 칼로 조각해 화롯불에 던져 버렸다.(예레 36,23) 그러나 그 내용들은 다시 기록되었으며(예레 36,28), 그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추가되었다.(예레 36,32) 이후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내용들이 추가되었음을 쉽게 짐작(斟酌)할 수 있다. 이것은 예레 26장에서와 같이, 예레미야가 3인칭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
예레미야가 예언 활동을 펼칠 당시(B.C.627~586년),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내부 문제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시리아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이를 계기로 이집트가 자연스럽게 남유다를 장악(掌握)하게 되었다.(예레 2,18) 그 결과, 남유다에는 친이집트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남유다가 멸망할 당시, 예레미야는 강해져 가는 바빌론 제국을 예견하면서, 친바빌론 정책을 주장했다.(예레 27,17) 하지만 이미 이집트와 우호 관계를 가졌던 남유다는, 친이집트 정책을 고수(固守)했다.(예레 2,18)
한편,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기에, 근동 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던 나라는, 바빌론 제국이었다.(예레 32,4) 신 바빌론 제국의 왕으로 등극한 나보폴라살(B.C.625~605년)이, 메디아(메대/칼데아)와 연합국을 형성하여 아시리아를 공격, 수도 니네베(니느웨)를 함락시키더니(B.C.621년), 드디어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이 카르크미스(갈그미스)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연합군을 이겨,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장악(掌握)하게 되었다.(B.C.605년)
이렇게 강성(强盛)해진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은, 반바빌론 정책을 펼치던 남유다 왕국을 침입하여(B.C.605년) 여호야킴(여호야김) 왕 때 남유다 국민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남유다를 속국(屬國)으로 삼았다.(예레 39,2~3)
남유다 마지막 왕 치드키야(시드기야)가 친이집트 정책을 펼치며 에돔, 모압, 티로(두로), 암몬, 시돈과 동맹 세력을 형성하여, 반바빌론 정책을 펼치자(2역대 36,13),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버렸다.(B.C.586년)(예레 52,27~30)
예레미야서에 담긴 핵심 메시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죄악을 저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필연성(必然性)을 선포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출처:『칼라Good 라이프 성경』
주제: 범죄로 인한 심판과 새로운 계약으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의 선포하심.
저자: 예레미야.
기록 장소: 남유다 땅.
기록 연대: B.C.627~586년 추정.
대상: 남유다 왕국 백성들.
사제 가문의 젊은이였던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약하던 때는, 남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암울(暗鬱)했던 시대였다. 국내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신앙 재건 운동을 주도했던 요시야 왕이 죽은 이후, 정치/종교/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멸망을 향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바빌론이, 카르크미스(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격파(擊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 가운데, 예레미야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정 사실로 되고 말았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죄악을 저지른 것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미 확정(確定)된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이었다. 즉 예레미야는, 바빌론 제국의 침입과 예루살렘(당시 남유다 수도) 함락을, 죄를 저지른 남유다 왕국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우신 심판이라는 뜻에서 이해하였기에, 백성들이 순순히 바빌론 제국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은 예레미야를 즉각, 민족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붙였으며, 심지어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하였다. 자기 백성들의 파멸을 선포하는 일만 하더라도 뼈를 깎는 아픔이었을 터인데, 거기다 매국노(賣國奴)라는 수치스러운 누명(陋名)마저 감수(甘受)해야 했던 예레미야는, 실로 눈물의 예언자요 고독의 예언자였던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서는 크게 3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예레 1~45장: 남유다를 향한 예언이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12편의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심판의 불가피하심과 회복의 새로운 계약을 반복하여 선포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며 한편으로는 희망을 갖도록 유도(誘導)하였다.
예레 46~51장: 이방 민족들을 향한 예언으로, 죄악을 저지르는 나라는, 하느님의 심판의 손길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을 강조한다.
예레 52장: 남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이 실제로 함락되었으며, 유다인들이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여 주는 역사적 보충 자료로서, 예레미야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의 예언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진실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본서에서 우리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예언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의 소명을 꿋꿋하게 감당해내었던 예레미야를 통하여, 참된 신앙적 용기와 인내를 기억함은 물론,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는 현대인들에게, 믿는 성도들이 소신(所信) 있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숙고(熟考)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출처:『가톨릭대사전』
만일 성경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유다인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정신적 틀)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本質)을 아주 달리했을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B.C.650~588년)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主唱)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B.C.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힐키야(힐기야)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경은,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보다 상세히 보도(報道)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예레미야서의 다음 장들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예레 19,1~20,6; 26장; 36장; 45장; 28~29장; 51,59~64; 34,8~22; 37~44장
(이 본문들은 시대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또 다음의 구절들은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를 수 있으니, 예언자가 체험한 내적(內的)인 갈등(葛藤)을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 11,18~12,16; 15,10~21; 17,4~18; 18,18~23; 20,7~18.
이 <고백록>은 예언자의 은밀(隱密)한 체험에서 터져 나온 외침으로써, 시편의 탄원詩의 문체(文體)와도 비슷하다.
예레미야는 B.C.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 예견(豫見)뙤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수도)의 몰락(沒落)을 초래(招來)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과 주권 회복은, 남유다의 많은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B.C.609년에 그 왕이 므기또(므깃도)에서 전사(戰死)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니느웨)가 B.C.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 제국이 세력을 구축(構築)하게 되었다. 바빌론 제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은 팔레스티나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남유다 왕국을 사주(使嗾)하여, 바빌론 제국의 지배에 항거(抗拒)하도록 하였으니,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은 B.C.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들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남유다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 B.C.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 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坐視)한 것은 아니었다. 이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代辯者)로 나서서 맹렬(猛烈)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남유다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煽動)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拷問)하며 투옥(投獄)시키기까지 하였고,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 기슭에 유배지에 있던 사람들(시편 137편)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亡命)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당시 남유다)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 사람들이 임명한 총독 그달야(그달랴)였다. 하지만 유다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 사람들의 보복(報復)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人質)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險難)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모든 생애가 일종의 비극(悲劇)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뽑고 허물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예레 1,10) 사명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예레 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예레 15,10)인 것이다.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地境)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했다고 고백하고 있다.(예레 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對話)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治癒)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예레 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告白論)의 절정이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예레 20,14)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淨化)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內密)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成文化)시켜 예고하기에 앞서(예레 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深化)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마음의 중심이 콩팥에 있다고 여겼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예레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다.(예레 31,29~30)
하느님과의 우정(友情)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所産)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예레 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 말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 왕의 개혁(改革)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無能)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종교적 삶을 변혁(變革)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改造)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看破)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 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에스겔)서와 제2이사야서(이사 40~55장)와 시편 말씀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內密)한 관계를 밝힌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 53장의 ‘주님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모상)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예레미야의 영향은 막대(莫大)하였으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또 해석하였다. 하여 그의 책, 예레미야서는 단번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는 시문(詩文)으로 쓰여진 하느님의 신탁(神託)과 전기적(傳記的) 이야기들 뿐 아니라, 신명기와도 비슷한 문체로 쓰여진 산문(散文)의 연설들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중의 어떤 본문들은 예레미야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유배 이후의 신명기적 경향을 띤 편집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이, 예레미야의 신학과 설교의 사상(思想)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으니, 신명기를 알고 있던 예레미야의 제자들과 청중들이 수집(收集)한 예언자의 전언(傳言/Message)임이 확실하다.
문제는, 예레미야적 전승(傳承)이 하나의 형태로 전수(傳受)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은, 맛소라 사본(본문)보다는 1/8 가량 짧게 예언자의 말씀을 수록하고 있으니, 그 세부 묘사도 서로 차이가 있다. 쿰란 사본의 발견(1947년)은, 원래 예레미야서의 2가지 대본(비교되는 번역본)이, 히브리말로 쓰여 졌음을 전제(前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본은 예레 25,13 뒤에 수록한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을, 히브리 성경의 순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의 끝부분 예레 46~51장으로 옮겨 배치시키고 있다.
이 예언들이, 처음에 특수(特殊)한 문집 안에 수록된 것 같다.
어떻든, 그 문집의 전체가 예레미야의 전승(傳承) 안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가령 모압과 에돔에 관한 신탁들은, 해석의 흔적(痕迹)이 매우 뚜렷하며, 또 바빌론에 대한 긴 신탁, 예레 50~51장은 유배 시대 끝에 가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예레 52장은 2열왕 24,18~25,30에 병행(竝行)하는 내용으로서, 일종의 역사적 부록(符籙)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작은 문헌들이 예레미야서에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과 새로 탄생한 유다이즘의 공동체들이, 얼마나 예레미야를 존중했는가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예언을 이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시대에 대한 지시사항을 많이 기록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로 연대기의 순서에 따라 그 본문들을 정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책의 무질서(無秩序)한 배치는, 오랜 시간 동안의 편집 작업이 낳은 결과이다. 또 그 편집 과정을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예레 36장은, 매우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B.C.605년,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시켜 자신의 소명 초기(B.C.626년)부터 발설한 신탁들을 받아적게 하였다.(예레 36,2) 이 신탁들이 적힌 두루마리를, 여호야킴(여호야김) 왕이 불태웠기 때문에, 예언자는 불타버린 신탁들을 다시 보완하여 썼다.(예레 36,32)
이 문집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가설(假說)에 불과(不過)하다.
그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문집은, 예레 25,1~12을 서문으로 삼고, 예레 1~18장 안에 들어 있는 B.C.605년 이전의 신탁들을 묶었을 것이다. 예레 36,2에 따르면, 예의 문집은 예레 26,13~38이 암시하고 있듯이, 민족들에 대한 옛 신탁들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다. 또 보충 문헌들이 문집에 첨가되었으니, 그 내용은 B.C.605년 이후의 문헌과 민족들에 관한 다른 신탁들이다. 또 거기에 ‘고백론’이 삽입(揷入)된 것 같다. 그 다음에 따로 수집(收集)한 문헌으로서, 왕들(예레 21,11~23,8)과 예언자들(예레 23,9~40)에 관한 소책자가 거기에 삽입되었다.
예레미야서는 다음의 장들로 구분시켜 볼 수가 있다.
제1부: 예레 1~20장
제1부는 전반적으로 시대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예레 25,1~13ㄷ로 연장된다.
이 연장 부분은 예레 1~20장의 결론이다. 예레 20장과 예레 25장 사이에, 예레 21,1~10과 예레 24장은 왕들(예레 21,11~23,8)과 예언자들에 관한 소책자(예레 23,9~40)들을 끼어들게 하고 있다.
제2부 예레 25,13ㄱ~38에서 시작되는 민족들의 관한 신탁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2부는 예레 46~49장에 와서 다시 연장되며, 또 여기에 바빌론에 관한 신탁(예레 50장~51,58)이 첨가되었고, 또다시 전기(傳記)책의 작은 단위(예레 51,59~64)가 부연(敷衍)되었다.
제3부
편집자가 ‘구원의 약속’으로 간주한 본문들(예레 26~35장)을, 순서없이 수록한 것이다.
제4부
전기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본문은 예레 36~45장에 이른다. 예레 45장은 전기책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서 바룩의 결론이다.
예레 52장은 예레미야서의 부록에 해당되며, B.C.587~586년의 참변(慘變)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 여호야킴(여호야김) 왕이 유배에서 해방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출처] 구약성경 제30권: 예레미야서(52장) 개관|작성자 다큐포엠
이상 세가지 설명을 보시면서 예레미야서의 개관을 정리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모든 자료가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미리 누군가가 공을 드려서 잘 정리한 자료를 참고하는 일은 성경의 이해에 있어서 참좋으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를 바탕으로 읽고 정리를 하겠습니다. 같이 힘을 내어서 정리를 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