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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얘기44) 1903년 癸卯는 인간에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대로 분류된다.가장 중요한 변화로 약 300만 년 전 남?북아메리카 대륙이 파나마지협에서 서로 연결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대서양 적도지방의 더운 해류가 그대로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이제는 파나마지협의 장애로 따뜻한 해수가 북아메리카대륙의 동쪽 해안을 따라 북진하기 시작하며, 이 멕시코만류는 동토의 땅 유럽을 따뜻하게 데우기 시작하였다. 바다가 지구 기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이로 인해 북위 51.5도에 위치한 런던이 북위 37.6도의 서울과 비슷한 겨울날씨를 갖게된 것이다.
360만년전의 지구는 새로운 변화를 하는데 바로 카스피해와 흑해의 바다가 좁은 바닷길로 연명해왔는데 여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담수호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동아프리카 지하에 지구내부에서 엄청난 열수공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기어다니는 동물이 마침내 직립하여 생활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즉 동아프리카의 엄청난 열수공 에너지는 바로 인간을 들뜨게 하여 마침내 지구대지를 생물체가 파서 뒤엎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바닷길은 닫아버리고 소금끼 없는 세상을 열게 된 것이다.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 약 440만년 전부터 420만년 전에 살았던 화석이다. 이것은 초기 두발걷기로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1992년 12월 20일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 팀 화이트는 에티오피아 아와쉬 강 에서 발견되었다. 이 종은 숲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들은 이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분류한다. 키는 약 120 cm 이고 몸무게는 약 54kg이다. 팀 화이트 교수에 따르면 아르디는 직립보행을 했다고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신생대 신제3기 마이오세부터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살던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형태를 가진 멸종된 화석인류로 400만년 전에서 50만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서식한 것으로 보인다. 발원지는 동부 아프리카로 추정되며 남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동부 아프리카 일대에서 생존한 것으로 추정됨.남방고원(南方古猿) 또는 남방사람원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루시라고도 불리는데 대퇴골이 다른 뼈들과 다른 지층에서, 그것도 3km가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는 두팔로 주로 이동하다가 과일을 먹기위해서 쪼그리고 앉아야 했다.그러기 위해선 골반의 변형이 왔고
척추가 길고 바로세우게 되었다. 두발은 쭈그리기 적합하게 편평해지고 손은 자유로와 졌다.
이로 인해 지상에 내려갔을때 두발로 움직이게 되고 뇌의 용량을 키우게 된다.당시는 침팬지와 뇌용량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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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고종은 서양의 자동차를 가지게 되어 조선최초의 드라이버가 되었고(운전기사 생김) 최초의 비행기가 라이트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다. 조선에는 각종 기차들이 준설되기 시작하며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1. 귀츨라프와 윌리암슨 그리고 토마스 목사의 한국 복음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해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고, 이수정과 서상륜에 의해 만들어진 이 땅의 토양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그 꽃을 피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피는 씨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더불어 복음이 시작되었고 민족의 수난기인 청일 전쟁(1894-5)과 노일 전쟁(1904-5), 그리고 1910년의 한일 합방은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을 가져왔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895년에 2백명 미만이던 세례교인이 1896년 이후 2000명 이상으로 10배 이상의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1906년 이후는 5만명 이상이 되게 된다. ¹
그러면 이러한 급격한 장로교의 부흥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부흥과 더불어 나타나는 교단의 분열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의 부흥과 발전
1) 1903년 원산 회개운동
동학란. 청일전쟁. 甲午更張은 한국인에게 심각한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 사건이었다.
1895년 무어(S.F.Moor)선교사는 “한국의 실정은 변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무관심하던 백성들은 이제 각성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였고
또 평양의 그래함 리(Graham Lee, 李吉成)선교사는 “전쟁은 한국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어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고
삶의 참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한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왔다.
그러므로 선교부는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야한다”고 애타게 호소하였다.
1895년 마포삼열(馬布三悅)선교사는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²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여러 선교사들의 말을 통해 우리는 교회성장의 기반이 마련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국을 휩쓴 최대의 불길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었다. 이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데는 遠因과 近因이 있다. 먼저 遠因을 살펴보면 19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도 원산지방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화이트(Miss M.C. White)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된 때에 맞추어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이 기도회는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 교인들도 참여하는 연합기도회로 확대되어 그 곳의 倉前교회에서 매일 밤에 집회가 일주간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기도회에 남감리교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수년간 선교 활동을 하였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하디(R. A. Hardie)가 자신의 무력을 깨닫고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린 것이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 앞에서 솔직히 자기의 실패와 그 원인을 고백하였으며, 기도 중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재해 오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였다.³
이런 사경회는 1904년 원산에서, 1906년 하디를 강사로 초빙한 평양에서 계속되었다.
평양에서 열린 사경회를 통해 길선주 장로가 큰 은혜를 받았다.
1903년 태어난 인물은 김령랑시인과 양주동 선생이 있다
양주동(梁柱東, 1903년 8월 16일(음력 6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남해(南海)이며 호는 무애(无涯)로,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 장연에서 자랐다.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해방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는데, 양주동은 그의 학문적 깊이에 탄복해서? 오체투지 절까지 했을 정도라고?한다. "장자가 다시 살아?돌아와 자기 책을 강의 하더라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학력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 수료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명예 박사 학위
연세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활동
1950년 2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행위에 대해 자수한 바 있다.
양주동은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가리켜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에는,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 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
건국실천원양성소
단국대학 설립시 김구와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李承晩), 소장에 김구(金九), 이사장에는 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양주동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엄항섭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1948년 9월 홍익대학교가 인수했지만 김구가 암살된 후, 해체되었다
첫댓글 해방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스님으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는데, 양주동은 그의 학문적 깊이에 탄복해서? 오체투지 절까지 했을 정도라고?한다. "장자가 다시 살아?돌아와 자기 책을 강의 하더라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