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19 중등교육(中等敎育)의 시작(도쿄)
(글 이상영)

- 도쿄조선중학교 1기생들과 교원 -
빛나는 그 이름, 도쿄조선중학교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 후, 재일조선인에 의해 중등교육이 시작되어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일본 각지에서 재일조선인의 중등교육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먼저 도쿄조선중고급학교의 초창기를 알아보자.
높아지는 요망에 답하여
도쿄조선중고급학교의 전신인 도교조선중학교는 46년 10월 5일, 현재와 같은 장소인 기타구 쥬죠다이(十条台) 일각에서 개교했다. 개교로부터 현재까지 70년 동안 중급부 8천명, 고급부 2만 2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중등교육관으로서는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학교의 초창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있다. 56년 10월, 도쿄조선중고급학교창립 10주년 기념 연혁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발행된 책자 「도쿄조선중고급학교 10년사」(이하 <10년사>)이다. 이 책자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 학교의 요람기 역사를 알아본다.
도쿄에 조선중학교를 만들자는 의견이 재일조선인연맹중앙총본부(이하 조련 중총) 안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을 46년 초반.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46년 6월에 열린 조련 제2회 전국문화부장회의였다. 그 자리에서 도쿄본부의 문화부가 도내에 중학교 및 야간중학을 설치하는 문제를 제안했다. 당시 조선학교에서는 학년과 연령의 구별도 없이 모든 학생을 한 장소에 모아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또 일본의 중학교는 조선인 학생 입학에 배타적이어서 조선인학생들의 진학의 길은 막혀 있었다. 학생들과 보호자들의 중등교육에 대한 요구는 절실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조련 중총 문화부는 도쿄의 각 지부 위원장과 유지들의 간담회를 개최한다. 기금 모집을 위해 관동지방 일대의 도움을 줄만한 사람들을 초대해 회합을 열었다.
조국의 신학년도에 맞춰 9월 개교를 목표로 했으나 커다란 난관이 막아서 있었다. 자금은 부족했고, 중학교를 운영했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교원을 구하는 일과 물자, 부지, 학교 건물을 확보하는 일 등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일단 개교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 또한 있어서 지역 유지들이 모여 8월 18일에 도쿄조선인중학교 설립 기성회를 발족시켰다.
학생 모집은 9월 중순부터 시작했다.
모집기한까지 불과 열흘밖에 없었지만 입학시험 당일까지 300명 이상이 원서를 제출했다. 장소는 조련 중총 문교국의 사무소에서 치러졌다. 시험은 면접뿐이었고, 시험관은 문교국의 젊은 직원들이 담당했다. 「10년사」에서 우여곡절로 진행되었던 개교까지의 과정과 그 과정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어려움을 읽을 수 있다.

- 창립 당시 학교 모습과 제 1회 입학식-
가장 힘들었던 학교 부지 찾기
도쿄중고의 부지가 일본군의 병기창고 자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 학교 부지를 찾는 일이 몹시 어려웠는데, 문제해결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이 당시 조련 이타바시(板橋) 지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윤덕곤(尹德昆)씨였음을 전하고 있다.
학교로 사용할 건물을 찾기 위해 분주했던 윤씨는 이타바시 구청에 ‘학교 건물을 알선해주기 바란다’고 여러 차례 요청을 반복했다. 어느 날, 이전에 일본군의 병기 창고로 쓰인 부지가 있다며 구청 직원으로부터 낭보가 전해졌다. 그 토지는 일본의 대장성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패전 후 도쿄도로 이관되었고, 도쿄도는 관리를 이타바시구에 맡기고 있었다. 토지 사용 허가 또한 도쿄도가 위임 받은 상황이었다. 교섭을 한 결과 도쿄조선중학교의 부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부지는 매우 넓었는데, 수목과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였고, 이끼가 낀 목조 화약저장고 몇 개 가 있는 곳이었다. 곳곳에는 깊은 물웅덩이가 있고, 부지 안쪽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다. 학교 건물로 정비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우선 개교일까지 창고 두 개 동을 강행 공사해 교실 5개를 준비했다. 여기에 교직원실을 추가한 것이 학교 창립 시기에 있던 시설의 전부였다.
46년 10월 5일, 드디어 입학식 날을 맞았다. 당시 학교부지 면적은 6,700평으로 신입생이 329명, 교원은 11명이고, 초대 교장은 조련 중총의 윤근(尹槿) 위원장이 겸임했다. 그밖에 사무주임으로는 이흥열(李興烈, 4대 교장)씨가 임명되었다.

- 신문부원 학생들-
불꽃같은 정열과 신뢰감
‘명칭만 학교지 칠판도 책상도 의자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선생님과 학생들의 불꽃같은 정열과 신뢰감이었다. 잡초를 베고, 나무뿌리를 파내고, 부지 내에 있던 언덕을 깎아내 운동장을 만드는 등 학교 정비에 구슬땀을 흘렸다. 학생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학교를 만들어 간다는 굳은 의지와 희망에 넘쳐 있었다.’
<10년사>에는 창립 초기의 교내 분위기를 위와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중학교에서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조선인끼리 차별 없이, 서로를 도우며, 마음이 통한다는 것.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가 학교의 주인이 되었다. 학교는 내게 조선민족의 한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제1기 졸업생, 양병영(揚柄榮)씨)
그 후 46년 11월 5일에 학부형회가 만들어졌다. 11월 8일에는 도쿄도지사로부터 각종학교로 인가를 취득. 11월 11일에는 기성회가 해산되어 학교운영위원회로 새로 만들어졌다. 이듬해 47년, 운영위원회와 학부형회가 통합되어 학교관리조합이 되는 등 학교는 하나씩 모양을 갖춰 갔다.
48년 6월, 학교관리조합은 1기생들의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병설을 결의했다. 도쿄 도지사에게 도쿄조선고교 설치 인가신청서를 제출했고, 신청서는 이틀 만에 수리되었다.
10월 4일, 기념적인 중학교 제1회 졸업식이 열린 후, 역사적인 고교 제1회 입학식도 거행되었다.
학생수 또한 빠르게 늘어갔다. 48년도 신입생은 422명, 학급수는 7개, 전교생 숫자는 880명이었다. 이듬해 49년 9월에는 1,000명을 넘었다.(1,136명)

- 학교 자치위원회, 도쿄조선중학교 1기생 졸업식 -
*월간 <이어> 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