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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사회당의 성공 비결
장광열 진보신당 유럽 당원
2008년 03월 23일
바야흐로 진보정당 경쟁 시대다. 문국현의 창조한국당, 그리고 얼마 전까지 진보의 대표정당을 자임하던 민주노동당, 마지막으로 노회찬과 심상정 두 스타 의원을 앞세우고 민주노동당에서 딴 살림 차려 나온 진보신당이 누가 진짜 진보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 눈에는 셋 다 민생 얘기하고, 양극화 얘기하고, 운하 반대하고, 비정규직 얘기하니 별 반 차이 없게 보인다. 물론 당사자야 부정하겠지만 말이다.
누가 진보의 대표주자가 될까?
이제 총선 선거운동이 불붙고 있는 가운데, 창조한국당은 당의 얼굴인 문국현이 이재오와 은평에서 대운하 반대를 정면에 내걸고 승부를 걸고 있다. 일단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전농의 배타적인 지지를 업고 가장 많은 후보를 내고 있다. 외형상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이제 당을 만들며 선거도 하는 수준이다. 피우진 중령을 비례대표 3번에 올린 것에서 보듯이 발상의 참신함이 쓸 만한 무기다.
그러나 물질적 자원은 역시 부족하다. 이번 총선에는 세 당이 척박한 진보 표밭에서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바야흐로 진보정당 경쟁 시대가 올까?
필자가 사는 네덜란드는 다당제의 나라다. 앞으로 한국의 진보정당의 경쟁을 보기 전에 네덜란드의 경쟁 관계를 참고해 볼 만하다.
네덜란드에서는 지역구가 없고, 백퍼센트 정당명부제를 하기 때문에, 열 개 정도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2006년 11월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좌 비슷한 사회당이 난데없이 제 3당으로 등장했다. 사회당은 2005년 6월 유럽헌법 부결을 이끌었고,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점령 반대 뿐 아니라, 미국의 요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네덜란드 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있는 당인데, 그런 당이 150석 중 25석(17%)을 얻어 제3당이 되었다는 건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노동당이 좌파의 표를 빨아들이는 구도를 깨고 사회당(Socialistic Party)은 어떻게 성장한 걸까?
사회당은 대단한 족보를 가진 정당은 아니다. 노동당(Party of the Workers)은 19세기 말부터 성장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족보를 이어 받은 정당이다. 그리고 좌파의 또 다른 주자인 녹색 좌파당(Green Left)는 90년대 초 평화주의 정당, 기독 사회주의 정당, 공산당이 합당하여 진보의 재구성 기획을 가지고 만들어진 당이다.
그에 비해 사회당은 1972년 유럽에 노동운동이 전성기였고, 68혁명의 영향으로 좌파정당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던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변두리에 속하는 남동부의 작은 도시 오스(Oss)에서 모택동주의를 내걸고 창당했다.
94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2석을 얻어 의회에 턱걸이로 들어가고, 그후 5석, 9석으로 점점 늘다가 2006년 25석으로 비약적으로 의석을 늘렸다. 사회당은 지금까지 각종 선거 때마다 의석이 느는 연승 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좀 자세히 보자.
사회당은 모택동주의에 입각해 대중 속으로를 외치며 중앙정치판이 아니라 지역에서 대중들의 요구를 모으는 전략을 구사한 지역연합정당 형태를 가지고 당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89년 동구권 사회주의국가들이 망한 후 마르크스-레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당의 이념을 인간 존중, 평등, 연대로 좀 더 유연하게 바꾸고, 대중적인 의회정당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 당은 의회와 거리의 두 공간을 2대 활동공간으로 삼고, 민주노동당이 창당 초에 보여준 것과 같이 지역에서 활발한 일상대중활동을 전개한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이 94년 처음 2석으로 의회에 진출한 후 네덜란드 정치의 우경화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좌파의 대표주자인 노동당의 지위를 넘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표에서 보듯이 사회당은 1994년 의회 진출 후 불과 12년 만에 제 3당에 올랐다. 전통적으로 노동당을 지지하던 좌파성향의 표가 대거 사회당으로 이동한 것이다. 아래 그래프에 보면 주황색의 노동당이 하락추세를 그리는 동안 사회당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좌파정당으로서 신자유주의에 가장 단호하게 반대하는 제도권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래프로 볼 수 있듯이, 같은 좌파라도 노동당(주황색)이나 녹색좌파당(녹색)은 지난 10년간 하락추세에 있다. 이 시기는 1999년 시애틀의 WTO반대 시위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제적인 저항이 급증한 시기이며,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중동침략이 시작된 후의 시기이다.
사회당은 초국적 자본이 시장 쟁탈을 위한 국경 없는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현 체제는 잘못된 체제이기 때문에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과 이라크 침략에 확고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회당은 제도권 정당으로는 유일하게 나토의 유고전쟁에 반대했다. 노동당이나 녹색 좌파당은, 전쟁은 안 좋지만 유고 정규군의 코소보인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인권을 위한 전쟁론을 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당시에도 유럽의 대다수 좌파 정당들은 탈레반의 여성 억압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전쟁 반대를 일관되게 주장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 반대, 전쟁 반대를 가장 분명하게 밝히는 정당으로 네덜란드의 유권자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당의 성공은 네덜란드의 좌우연정, 노사 합의 모델의 해체 덕분이기도 하다. 2002년 총선에서는 우파 돌풍이 불었고, 가장 우파적인 연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우파 연정의 욕심은 너무 컸다. 노조에게 일방적으로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조기 연금제 폐지, 연금 연령 상향, 기업이 해고하기 쉽게 노동법 변경 등을 시도하다가 2004년 노동자들의 강한 저항을 받는다.
정부가 노사합의의 전통을 깨고, 기업 편을 노골적으로 들자, 네덜란드 3대 노조가 단결하여 2004년 가을을 뜨거운 거리 투쟁으로 이끌었다. 최고조로 잡은 10월 2일 암스테르담 시위에는 전국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30만이 넘는 노동자,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인구 천 6백만의 나라에서 30만이면, 한국에선 90만이 모인 거나 마찬가지다. 백만 민중대회를 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백만 민중대회
우파 바람에 대한 좌파의 역 바람이 분 것이다. 2006년 11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점점 유명무실해지는 네덜란드의 의료, 교육, 노인 복지, 주택 등 복지국가의 위기를 쟁점화하면서 좌파 연정을 주창하였다.
노동당과 사회당, 녹색좌파당 3당이 좌파 연정을 하자는 주장은 좌파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역사상 한 번도 보지 못한 좌파 연합정권이 들어설지 모른다는 기대를 낳은 것이다.
아쉽게도 노동당은 좌파 연정에 미지근했다. 사회당의 성장이 두려웠고, 기업들과 안정 성향의 중간층의 표를 의식해서 연정 파트너는 선거 결과를 보고 정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결국 좌파 3당은 과반수를 못 얻었고, 독일과 비슷하게 기독민주당이 제1당, 노동당이 제2당을 차지하여, 두 당 주도로 6석의 소수당 기독연합을 끌어들여 연정을 구성하였다.
사회당의 강점은 무엇일까? 사회당은 서민정당이다. 노동당이 좌우의 중간지대로 넓히는 득표전략을 구사하는 데 반해서 사회당은 날로 악화돼가는 복지체제의 사각지대에 놓은 저소득층, 저임금 노동자를 주요 지지층으로 삼았다. 이미 10%대에 이른 극빈층의 문제를 선거 쟁점화하면서 세계 10대 부자나라에서 10%가 빈곤 속에서 사는 현실을 고발했다.
또 서민정당답게 서민의 눈높이에 맞는 말을 썼다. 사회당의 선거구호는 항상 간단했다. 1994년에는 “STEM TEGEN! STEM SP!(반대표를 던질 겁니까, 그럼 사회당을 찍으세요)” 2002년에는 정반대로 “STEM VOOR! STEM SP!(찬성표를 주세요. 사회당을 찍어주세요)” 2006년에는 “NU SP(이제는 사회당)”을 구호로 내걸었고, 노동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표를 흡수했다.
선거 구호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사회당 당수 얀 마라이니슨은 십대에 이미 정치운동에 뜻을 품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용접공으로 일했고, 소시지 공장라인에서도 일했다. 그의 말은 항상 쉽다. 먹물 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처럼 말을 돌리지 않고, YES OR NO를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여러 차례 책으로 냈다.
서민의 눈높이, 서민의 말, 확고한 입장
유럽의 대다수 좌파처럼 네덜란드의 노동당이나 녹색좌파당은 신자유주의는 대세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 범위 내에서 신자유주의의 고통을 완화하고, 사회안전망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런 논리에서 이들은 유럽연합 헌법을 지지하고, 유럽연합을 통해서 사회보장체제를 지켜나가려 한다.
사회당은, 유럽연합은 단일시장을 위한 구상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이 체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삼는다. 2005년 6월 네덜란드에서 유럽헌법안이 국민투표로 부결되었을 때, 사회당은 적극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보기 좋게 유럽헌법을 부결시켰다.
또 다른 강점은 일사 분란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당은 당원수로도 제 3당이다. 그리고 다른 당들과는 다르게 선거 때 말고도 길거리에서 각종 캠페인을 벌인다. 아래에는 주요 정당의 당원 수 변동이 표로 나타나 있다.
사회당에도 단점은 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회당이 요 근래에는 지지율이 떨어졌다. 여론조사에서 20석 미만의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년 지방선거 후의 당내 분란이 주요 원인이었다.
먼저 배경을 보자. 사회당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다. 공직에 임용된 사람은 평균노동자의 급여만 받고 나머지는 특별당비로 납부한다. 국회의원은 혹독한 학습을 받아야 한다. 당수인 얀 마라이니슨의 권위는 대단하다. 그래서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결국 당을 떠나야 했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은 선전했다. 2006년 총선에 이어 제3당의 지위를 굳혔다. 그런데 문제는 지방선거와 겸한 상원선거 결과 때문에 일어났다. 모든 선거에서 정당명부제를 하는 네덜란드에서는 정당명부에서 좋아하는 후보를 찍는다. 그래서 명부 하위권에 있는 후보도 표를 많이 받으면 당선될 수 있다. 아랍계 출신의 한 상원후보가 표를 많이 받아 당선되게 되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후보들이 선거 전에 정당명부 순서대로 임명되기로 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후보는 당의 규정에 따라 상원의원이 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런 분란을 좋은 기사거리로 삼은 언론이 대서특필했지만, 당은 당의 규율을 내세워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얀 마라이니슨의 확고한 지도력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당의 구조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당의 지지가 떨어졌다.
당수의 카리스마가 강하면 의원들이나 간부들은 당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내의 건강한 토론 풍토가 살아나지 못하고, 내부 민주주의도 정체될 우려가 있다. 소수정당일 때는 이런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내 제 3당이 된 마당에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반영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과제가 되었다.
사회당의 알짜는 무엇인가? 사회당이 의회에 진출한 지는 이제 고작 14년밖에 안 되었지만, 사회당 창립부터 계산하면 역사가 36년이다. 당수인 얀 마라이니슨은 한 평생을 사회당 건설에 바쳐왔다.
처음에는 모택동주의에서 출발하여,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폐기하고, 반세계화 운동이 활발해진 상황 변화에 맞춰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 사회당은 시대의 변화 흐름을 잘 잡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생존했고, 성장했다.
사회당이 진보적인 유권자들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좌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근접한 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동당이 중간 성향의 표심 잡기에 치중하고, 녹색좌파당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언제 올지 모르는 원대한 꿈을 접고, 가장 합리적인 정치세력이 되려는 와중에, 사회당은 투박하지만 선명하게 좌파의 길을 걸어왔다.
투박하지만 선명한
어설픈 중간층 끌어안기보다는 좌파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지지층을 확대하는 전략이 다른 좌파정당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회당은 2006년 총선에서 네덜란드의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냉전 시절 소련에 맞선 서방국가들의 집단안보체제) 탈퇴 공약을 나토의 개혁으로 바꾸고, 왕정을 공화정으로 바꾼다는 공약을 핵심공약에서 빼면서 지지층 확대에 나섰다. 그리고 경제기획원에 의뢰해 당의 공약이 재정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음을 입증해서 좌파정당은 무조건 선심을 베푼다는 선입견을 깼다.
한국에서는 세 당 중 누가 살아남을까?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진보정당 하면 대부분 민주노동당을 꼽았다. 4년 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빈련 등 대중단체와 학계, 법조계, 영화계, 문화계의 연이은 지지선언과 후원을 받으며 진보세력의 시민권을 획득했었다.
그러나 그 후의 모습은 열린우리당이 지갑 줍는 사이에 흘린 돈 주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지자들의 높은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4년이 지나고 다시 총선이 오고 있다. 누가 앞으로 살아남을까? 네덜란드 사회당이 보여준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근접한 답을 제시하는 세력이 살아 남을 것이다.
한 가지 예로 통일방안이 있다. 통일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최고의 목적은 평화여야 한다. 평화는 또 군축과 연결된다. 그래서 진보정당은 한반도에 전쟁위협을 없애고, 핵전쟁 위기를 완전히 해소하고, 한반도 평화가 주변국들까지 확산되어 동북아 지역 전체를 평화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의 불평등이 지역 갈등을 낳고 평화를 위협하는 점을 생각해서 낙후된 북한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하고, 주변국을 경쟁 상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를 함께 푸는 동반자로 보고 상생하는 길을 찾기 위해 진보정당의 독특한 경제, 외교 정책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중국-북한-남한-일본-러시아가 다 얽혀 있는 이주노동자 문제나 환경오염 문제, 자원 문제 같은 지역의 공동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서민의 이해를 대변하면서도 연대의 범위를 국경 너머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참 진보정당의 성장을 고대해본다.
네덜란드 총선, '해리 포터의 승리'는 틀렸다
[기고] 좌파 사회당 약진에 주목할 때
최현주 네덜란드 통신원
2006년 11월 28일
지난 22일 네덜란드 총선 결과에 대해 한국 언론들은 주로 우파 진영의 승리에 주목하는 듯하다. 외신을 인용해 '네덜란드의 해리 포터 총선 승리'(<조선일보>), '네덜란드 총선 반이슬람 극우정당 돌풍'(<한겨레>) 등을 주요 제목으로 뽑아 해리 포터라는 별명을 가진 기독민주당 소속 총리 발컨엔더의 승리와 '이슬람 쓰나미'의 도래를 자극적으로 전하며 신당 창당 2년 만에 9석으로 의회에 입성한 자유의 당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니 말이다.
관심사야 제 각각일 수 있지만 한국 언론들의 반응은 네덜란드 국내 분위기와는 확실히 동떨어진 것이다. 네덜란드 언론들은 이번 총선의 최대 승자를 사회당으로 꼽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노동당보다 좌파 성향이 훨씬 강한 정당으로 정치 스펙트럼 상 가장 왼쪽 정당으로 분류되는데 이번 총선을 통해 9석짜리 소수당에서 25석으로 단숨에 성장해 제3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돌풍 치고는 조용한 편이라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회당은 선거기간 중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1, 2위를 달리며 돌풍을 예고해 왔다.
네덜란드, 유로 쟁점이 부글대는 정치적 용광로
한국의 독자들은 서유럽의 한 나라 선거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네덜란드는 현재 유럽사회의 정치쟁점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나라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년 6월 1일, 유럽헌법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네덜란드 국민들은 61.6%가 반대표를 던져 유럽헌법을 냉장고 속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2002년으로 올라가면, 대화와 타협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네덜란드 사회는 당시 총선에서 반 외국인 정서를 부채질하며 혜성 같이 등장했던 우파 논객 핌 포르타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유럽사회를 충격으로 몰아 넣기도 했다. 핌 포르타운이 총선 9일 전 암살된 사건은 평화로운 섬 같던 네덜란드 정치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가 총선 직전 출범시켰던 우파 신당은 26석을 얻어 단숨에 제2당이 되는 기염을 토하며 네덜란드 정치를 급격히 우경화 시켰다.
그 이후 네덜란드 사회 저변에 잠복해 있던 외국인과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소수인종 전반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이 증가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런 혼란은 이슬람에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영화감독이자 신문 칼럼리스트였던 테오 반 고호가 이슬람교의 여성 억압을 고발한 서브미션(복종)이라는 영화를 만든 후, 한 회교도 청년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극에 달했다. 당시 그의 죽음에 분노한 백인 청년들이 이슬람교계 학교를 불태우고, 이슬람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인종주의적인 행동이 급속히 퍼져 사회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 비판의 선봉에 섰던 인사들이 삼엄한 경호를 받게 되었고, 이슬람 테러에 대한 공포가 광범하게 퍼져 나갔다.
현 네덜란드 정치를 규정하는 키워드, '포크'
이처럼 2002년과 2006년의 두 번의 총선거를 거치며 네덜란드 사회를 이전 사회와 구분되게 가르는 키워드는 '포크(volk)'라고 말할 수 있다.
'포크'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volk)은 엘리트(elite)과 대별된다. 핌 포르타운은 2002년 당시 네덜란드를 좌지우지하는 헤이그의 엘리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인민이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지적했었다. 정치가 인민들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2002년 당시만 해도 정치적 망명객이 너무 많이 들어오고 있다든가, 모로코계 청소년들이 문제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인종주의적인 발언으로 치부돼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했었다. 2차대전 당시 안네 프랑크를 비롯해 유태인들이 제일 많이 잡혀가 수용소에서 죽었던 나라라는 점 때문에 인종주의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얘기였던 것이다.
인민들은 이런 문제들에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정치인들은 인종주의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아무도 그 문제를 꺼내지 못했던 상황이 계속되던 가운데 핌 포르타운은 외국인 난민 수의 제한, 모로코계 청소년 범죄문제 해결 등을 전면에 내걸고 정치 무대로 나왔던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당연히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런 공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인기는 상승했고, 네덜란드의 총리가 되겠다는 그의 호언장담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실현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 9일 전 한 환경운동가의 총격을 받아 숨지고, 그는 정치적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당 핌 포르타운당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제2당이 됐다. 비록 수장이 없어진 가운데 제1당 기독민주당(CDA) 및 전통의 자유당(VVD)과 함께 우파연정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 뒤 당내 주도권을 놓고 내분을 벌이다 타당의 신뢰를 잃고 연정출범 석 달 만에 연정에서 축출되긴 했지만 말이다.
2006년, '포크'의 선택은?
2006년 선거 역시 인민은 다시 선거 결과를 좌우한 키워드가 됐다. 그러나 2002년 인민의 목소리를 대표한 것이 핌 포르타운의 신우파였다면, 2006년 선거에서는 얀 마라이네스의 사회당(SP)이다.
사회당은 보통 유럽의 좌파를 대표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그간 좌파를 대표해온 당은 노동당(PvdA)이었다. 이 당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대표하고, 2차대전 이후 좌파를 대표하여 우파의 기독민주당이나 자유당과 함께 연정의 파트너로 여러 차례 집권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사회당은 94년 처음 단 두 석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에 속한다. 이 당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중적인 신자유주의 반대시위가 있었던 이탈리아 제노바의 G8 정상회담에 의원을 파견하고, 신자유주의 유럽에 대항하여 '사회적 유럽' 건설을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든 유럽사회포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사회당은 90년대 이래 지속돼 온 사회보장제도 축소에 반대하고, 대기업과 시장 주도의 유럽통합에 반대하고, 나토와 미국이 주도한 유고전쟁(199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년), 이라크 전쟁(2003년)에 반대하며, 우경화된 노동당에 실망한 인민들의 표를 얻으며 계속 성장해 왔다. 특히 기성정당들과 달리 의회 내에서뿐 아니라 거리에서 인민들에게 직접 다가가 대중적 저항을 조직하면서 '좌파다운 좌파' 정당의 등장을 바라던 좌파 성향의 활동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2002년 이후 정권을 장악한 우파정부의 강도 높은 우파 정책도 사회당의 성장에 일조했다.
2004년 초반, 우파정부는 연금, 해고요건, 노동시간, 산재보험, 임금인상 억제 등 노동부문 전반에 우파식 개혁을 밀어붙였다. 정부의 개혁안은 그 규모와 폭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고, 노조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노사간의 신뢰 속에서 지켜 온 사회적 합의모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사회적 합의 모델은 노사간의 대화와 협력기구인 사회경제협의회(SER)에서 노사 간의 타협과 합의방안을 내고, 정부는 이런 방안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유지돼 왔다. 정부가 노사 간의 자율적인 합의를 최대한 존중했던 것이다.
그런데 2004년에는 달랐다. 정부는 노동정책 전반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을 들고 나왔고, 사측은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노조들은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정부는 개혁을 밀어붙인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제는 대화의 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승부가 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네덜란드의 3대 노조는 예고했던 대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0월 2일 노조는 최대의 조직동원을 목표로 하고, 지역별 간담회와 도시별 파업을 조직하며 투쟁 수위를 높였다. 10월 2일 노조 집회에는 30만 명을 동원했다. 이는 네덜란드 노조 역사상 최대의 인원동원이었다. 노동조합은 과거의 조직이고, 퇴직을 앞둔 소수의 노동자들밖에 조직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던 정부와 언론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네덜란드는 거리를 덮은 노동자들의 물결로 '뜨거운 가을'을 연출했다.
결국 정부는 노조의 힘 앞에 굴복해 일부 사안에서 양보하게 됐고 네덜란드 사회는 우파와 좌파로 격하게 양분됐다. 노조를 압박한 우파와 노조를 지지한 좌파 간의 불신의 골은 심했고, 노조의 저항 속에 좌파정당들은 여론조사에서 우파정당을 압도했다. 역사상 최초로 좌파 단독 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2005년의 유럽연합 헌법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 역시 인민들의 우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보여줬다. 우파정당뿐 아니라 노동당, 녹색좌파당, 노조들 모두 찬성 입장을 표했다. 미국에 맞서는 하나의 유럽, 강력한 경제블록 건설을 위해서 유럽헌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인민들은 이런 장밋빛 청사진을 믿지 않았다. 유럽연합의 관료주의, 자신들의 찬반의견에 관계 없이 급격히 늘어나는 회원국들, 인민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의 등장,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유럽연합의 부정과 비리 소식은 지금 식대로 유럽연합이 계속 가면 불행한 결과가 올 것이라는 판단밖에는 서지 않게 만들었다.
국민투표에서 네덜란드 인민들은 61.6%가 반대표를 던졌다. 사회당은 기성 정당 중 유일하게 유럽헌법 부결을 위해 반대운동을 벌였다. 물론 터키의 EU가입에 반대하는 반이슬람 정당 '자유의 당'의 빌더스 역시 반대운동을 했지만, 유럽헌법 반대는 터키 가입 문제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에 대한 인민들의 반대 성격이 강했다.
어정쩡한 좌파에 염증 난 인민,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2006년 3월의 지방선거는 이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파 정당들은 지방선거에서 대패했고, 좌파정당들은 선전했다. 총리 발컨엔더의 지지도는 30%대로 떨어지며, 2차대전 이후 가장 인기 없는 총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좌파가 총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우파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2001년 9.11 이후 지속되어 온 불경기가 끝나고 경기 회복이 시작된 것. 발컨엔더 총리는 드디어 구조조정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2006년 선거는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흘러갔다. 강도 높은 우파 개혁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다. 인민들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했던 사회보장제도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빈곤층이 10%에 이르렀다. 저소득 노동자, 서민들에게 미래는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암울해 보였다. 반면에 회복되는 경제는 우파정권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고, 우파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인민들은 자신의 의지를 표출할 당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노동당에 기대가 모아졌다. 노동당은 전통적인 좌파당이고, 정부의 노동정책에 반대입장을 보였으며, 반(反) 외국인적이고 반(反) 이슬람적인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소수인종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우파에 대한 확실한 반대입장을 지키지 못했다. 노동당의 젊은 당수 바우터 보스는 새로운 노동당의 상으로 블레어의 제3의 길에 기울어져 있었다. 노동당은 제1당이 되기 위해서는 중산층의 지지 확보가 필요하다고 보고 방향 수정에 나섰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파식 연금제도 개혁안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네덜란드 정치에서 연금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다. 연금은 65세가 되면 누구나 받는 노인연금(AOW)과 급여에서 적립한 근로연금(Pension)의 두 가지가 있어, 노인연금을 기본으로 하고, 근로연금이 덧붙여지는데, 바우터 보스는 고령화 사회에 나타날 연금 재정 부족문제 해결을 위해 근로연금을 많이 받는 소위 '잘 사는 퇴직자들'도 연금 기금 일부를 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주장은 노동당의 주요지지기반인 노동조합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고령화에 따른 연금 재정 부족은 우파들이 90년대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온 단골 메뉴였지만, 노동당은 그 동안 그런 우려는 근거 없는 것이라면서 반박하는 입장이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우파와 마찬가지로 연금 고갈 문제를 인정하자, 노동자들은 노동당이 우파와 다를 게 없다고 보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노동당의 전략적 실수는 좌파연정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네덜란드는 좌우의 구분이 분명해져 있었다. 선거의 관심 역시 우파 연정이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좌파로 바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좌파 소수당인 사회당과 녹색좌파당은 좌파연정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노동당에게 좌파연정을 제안했지만, 노동당은 중산층 표를 얻기 위해서는 좌파 색채를 너무 강하게 표시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으로 좌파연정에 미온적인 입장을 표하고, 선거 결과가 나온 다음에 좌파연정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노동당이 제1당이 되더라도 우파정당과 연정을 구성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파정책에 질린 인민들은 노동당을 찍어도 좌파정부가 들어서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사회당의 당수 얀 마라이네스는 '노동당을 찍으면 기독민주당과의 연정이 기다린다, 그걸 막으려면 사회당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투표를 호소했다.
네덜란드 정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002년과 2006년 사이 네덜란드 정치판의 변화를 인민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해 보았다. 민주주의 제도가 잘 발달된 나라에서는 인민의 의사는 여론이나 선거를 통해 반영되고 그 결과 사회가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제도 하에서도 실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엘리트들이고 인민들은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기 십상이다.
특히 유럽사회에서는 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시장경제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데 우파나 좌파 모두 이견이 없었다. 그런 합의를 기초로, 유럽통합이 가속화돼 유럽 단일통화가 도입되고,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속속 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있으며,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토에 가입하면서 유럽화의 길을 걸어 왔다. 서유럽 자본은 보다 좋은 생산기지를 찾아 동유럽으로, 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으며, 유럽 내부에서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유럽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변화 와중에 인민들은 갑작스런 대량해고, 사회보장제도의 지속적인 축소, 저임금의 동유럽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 유로화 도입 이후 소비자 물가의 급격한 상승 등과 같은 경제적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낙관론보다는 비관론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이런 불안과 불만은 반 외국인 정서와 인종주의에 기대 성장하려는 극우적 정치세력에 의해 이용될 수도 있지만, 우파적인 세계화, 신자유주의 공세에 피해를 보고 있는 인민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좌파정당들의 성장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근래 4년 여 간의 네덜란드 정치판 변화는 우리들에게 이런 생동적인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