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6337]逸翁일옹崔希亮최희량-歎老[탄로] 二首
늙은 장군의 탄식
늙음을 탄식하다[歎老] 2수
서른 살에 동쪽 왜적을 평정했는데 노쇠한 지금 북쪽 오랑캐를 어찌할꼬 오래된 검 한 자루 어루만지며 나라 걱정에 눈물이 강을 이룬다
세상일에 분개하다 병이 되어 미친 듯 또 바보 된 듯하네 이 늙은이 무공 쓸 데가 없어 밤낮으로 시간만 보내는구나
三十東倭定(삼십동왜정) 老衰北狄何(노쇠북적하) 手摩一古劒(수마일고검) 爲國淚成河위국누성하
憤世仍成疾(분세잉성질) 如狂又如癡(여광우여치) 老將無用武(노장무용무) 日夜占天時(일야점천시)
- 최희량(崔希亮, 1560~1651), 『일옹문집(逸翁文集』 권1
• 해설 최희량은 27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활약한 무장이다.명도(鳴渡), 첨산(尖山), 예교(曳橋)를 비롯해 여러 곳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전사한 후, 그는 고향인 나주로 돌아와 대박산에비은정(費隱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한다. 그곳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며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보내고 있었다. 46세에는 공신으로 녹훈되기까지 하며 남부럽지 않은 여생을 보내던 그는70대에 또다시 전란을 마주하게 된다. 정묘·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이다.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지자 몸속에 흐르는 무인의 피가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칠십 노쇠한 몸으로는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숱한 전투에서 함께했던 오래된 검을 어루만져 보지만이젠 검을 휘두르기도 힘든 나이였다. 그저 위태로운 나라를 걱정하며 홀로근심하고 눈물지을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기 마련이다. 젊은 시절보다 신체 기능은 저하되고 과거 아름답던 모습도 하나둘 잃어 간다.이 장군도 이러한 자연의 법칙 앞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 역시 늙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상실감에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그런데 그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늙음 그 자체보다 늙음으로 위태로운 나라를구할 수 없는 무인으로서의 절망감이었다.
이 작품은 난삽한 고사를 끌어온다거나 시어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지 않았다.오히려 자신의 심정을 투박하리만큼 진솔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노쇠한 장군의 탄식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비애와 숭고한 애국심은 결코 옅지 않다.후대 사람이 그의 시를 평가하며 ‘기상과 절의가 있는 사람은 한마디 짧은 말을 하더라도그의 말을 아끼고 사랑하여 보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했는데,바로 이러한 점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 김준섭(金俊燮) 제공처: 한국고전번역원
최희량崔希亮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조부는 영릉참봉(英陵參奉) 최영(崔瀛), 부친은 승지(承旨) 최낙궁(崔樂窮) 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큰 체구에 용모가 뛰어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당시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1604년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일옹문집』 2권 1책이 있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원문=逸翁文集卷之一 / 詩○五言絶句 歎老 二首 三十東倭定。老衰北狄何。 手摩一古劒。爲國淚成河。 憤世仍成疾。如狂又如癡。 老將無用武。日夜占天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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