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과 라면의 사회사 / 양세욱의 “짜장면뎐”
1.자장면과 라면에 대한 뭉클한 기억
나는 어릴시절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것은 라면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달콤 쌉싸름한 검은 유혹을 받아보지 못했다. 졸업식에 부모님이 참석하는 일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주변에 그 흔한 자장면집도 없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장면 만드는 것을 본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20리쯤 떨어진 면소재지에는 아주 작은 중식당이 있었다. 간판도 없는 식당 입구에는 ‘중화요리’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화요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체구가 컸던 주방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두 팔로 쓱~ 닦으면서 뽑아내는 면발만 신기했을 뿐이다. 자장면을 처음 먹어본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다. 일찍이 대처에서 자장면을 즐겨 먹었던 자취방 파트너는 입학기념으로 자장면을 먹자고 하였다. 처음 먹어본 자장면 맛은 참 불편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생선찌개 또는 어머니께서 즐겨 만드셨던 팥칼국수와도 다른 검은 소스의 국수는 혀끝에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랫동안 자장면을 즐기지 않았다. 중국집에 가서도 얼큰한 짬봉이나 쌀이 들어간 볶음밥을 즐겨 먹었다.
라면을 처음 맛본 것은 중학교시절이다.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동네 주막집 고모가 손님들과 라면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형편에 라면은 언감생심이었다. 중학교시절 라면이 좀 더 보편화되자 어머니는 국수를 삶으면서 라면을 한 두 개씩 넣어 끊였다. 맹맹한 국수에 넣은 라면은 음식맛을 확 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형제들은 국수가닥 천지에서 라면줄기를 찾느라 온 그릇을 뒤적였다. 라면을 신물나게 먹기 시작한 것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다. 가난한 자취방의 쌀자루와 김치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친구와 나는 라면을 끊였다. 우리는 한 번에 라면 5~6개씩을 끊여서 먹어치웠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식성을 라면 한 두 개로는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라면은 주식이 되었다. 일당 2,200원짜리 공장노동자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라면을 먹어가면서 모은 돈으로 고향 부모님 내복도 사서 보내고 처음으로 구두도 사서 신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내 손으로 벌어야 했던 대학시절에는 라면도 귀한 음식이었다. 동아리방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며 쪼그려 자다가 배가 고프면 쿠커에 라면을 끊여 먹었다. 친구들이 가져다준 김치와 식은 밥이라도 한 덩이 있으면 식탁은 풍성해졌다.
군대를 강원도 화천으로 갔다. 철책사단이었던 우리부대는 한 해 전에 전방 철책근무를 마치고 나왔기 때문에 훈련이 많았다. 군대의 훈련 중에는 5주 야외훈련도 있었고, 공포의 유격훈련, 화생방 훈련도 있었지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행군이었다. 강원도에서의 행군은 고개넘기 훈련이다. 고개를 서너 개 넘으면 50㎞였고 다섯 개를 넘으면 72㎞, 여섯 개 넘으면 84㎞, 화천군 파로호를 돌아서 오면 120㎞였다. 신병 때는 너무 힘이 들어 출발부터 끝날 때까지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하지만 서 너 번 완주를 하면서 이력이 붙자 출발 신호와 함께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사실 앞사람 발꿈치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밤에 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졸다 지쳐서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첫 휴가 나가서 무엇을 먹을까 상상하였다. 어머니가 만든 김치에 하얀 쌀밥,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 여름 날 마당에 깔아 놓은 돝자리에서 먹엇던 팥칼국수, 아버지가 잡아온 고기로 회를 친 생선회... 그럴 때마다 생각의 끝자리를 차지하는 음식이 있었다. 자장면, 신기하게도 별로 친하지 않았던 자장면이었다.
2.자장면과 라면, 서민들의 식탁에서 사라질 것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자장면은 약 6백만 그릇이라고 한다. 라면은 연간 소비량이 34억 개, 1인당 평균 75개씩을 먹는다고 한다. 밥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이 자장면과 라면인 셈이다. 라면의 고향은 1958년 8월 28일 일본의 닛신공장이다. 2차대전 뒤 일본에서는 돼지나 닭 뼈를 고아서 만든 육수에 갖은 양념을 넣어 튀긴 면을 말아서 먹는 라멘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인스턴트식으로 만든 것이 라면이다. 인스턴트 라면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63년이다. 한국라면의 원조 삼양식품이 일본의 기술과 설비를 도입하여 만든 ‘삼양라면’이 그것이다. 삼양라면은 1960, 70년대 경제발전과 함께 불티나게 팔렸다. 1971년에는 컵라면까지 출시되면서 판매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하루 세끼를 먹고 돈을 모아 고향에 송금을 하기위해 분투하였던 노동자들에게는 싸면서 조리가 간편한 라면은 거부할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던 고학생에게도, 돈을 아껴 책을 사려던 학생들에게도, 밤늦게 일하는 서민들에게도 라면은 가장 친근한 음식이었다.
자장면의 고향은 중국 산동성이지만 우리가 즐겨 먹는 한국식 자장면은 한국이 고향이다. 일반적으로는 1905년 인천의 중국음식점 공화춘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졌지만 1882년 임오군란 뒤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들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중국식 자장면은 삶은 면에 볶은 면장을 살짝 얹고 오이, 숙주, 콩, 파, 셀러리 등을 넣어 먹지만, 한국식 자장면은 춘장(면장)에 돼지고기와 양파, 감자 등을 볶아서 면(麵)에 풍성하게 비벼 먹는 음식이다. 우리나라 자장면에 넣는 춘장도 중국의 면장 또는 총장과는 엄연히 다르다. 면장이나 총장이 밀가루와 콩으로 만든 메주만을 발효시켜 만들지만 춘장에는 캐러멜 소스를 넣는다. 총장에 캐러멜 소스가 들어가면서 짠맛이 강한 총장의 맛은 달콤 쌉사름한 맛으로 일대 변혁하게 되었다. 총장에 캐러멜을 넣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 ‘영화장류’라는 식품회사에서 사자표 춘장을 만들면서라고 한다. 캐러멜을 섞은 춘장의 맛은 순식간에 온 국민의 눈과 입맛을 사로잡았다. 1950, 60년대 미국의 밀가루 무상원조와 정부의 분식장려도 값싸고 맛있는 자장면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70, 80년대의 경제발전에 따라 크게 성장한 외식문화도 자장면을 대중들의 입맛에 연착륙시켰다. 부자들처럼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로 외식을 할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 자장면은 적은 돈으로 가장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음식이었다. 요즘에는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들참이나 서민가정의 야참도 자장면이 점령하였다.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달고 ‘자장면 시키신 분’을 외치며 달리는 풍경은 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올해 초 중국학자 양세욱 교수가 ‘짜장면 뎐’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시대를 풍미한 검은 중독의 문화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지난 100년 동안의 서민문화사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衣), 주(住)와 함께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식(食)이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식(食)을 위해 노력하였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하였다. 더 많은, 더 좋은 식(食)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말처럼 음식은 문화를 넘어 정치적이다. 자장면과 라면은 가장 친근한 서민들의 음식이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는 가장 정치적인 음식이었다. 월급날 노동자들이 박봉을 쪼개서 큰맘 먹고 먹었던 대표적인 외식(外食)이었으며, 졸업식이나 생일날 아이들의 가슴을 심하게 떨리게 하였던 추억의 음식이었다. 최근 경제난과 식재료 가격의 인상으로 자장면 가격이 인상되었다. 라면도 한봉지에 800원, 1,000원을 호가한다. 부자들을 위해 달동네가 재개발되었듯이,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의 친근한 벗이었던 자장면과 라면도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식탁에서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나 보다. (2009.7. 김해규 / 평택한광중학교 교사, 향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