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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교수의 체계불학
 
 
 
카페 게시글
불교학습자료 PDF책(무료 배포) - <비판불교의 파라독스>
관리자 추천 2 조회 603 23.07.01 21:33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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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7.01 23:14

    첫댓글 그동안 읽어보고 싶었는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을 읽어보진 못했어도 수록된 교수님 논문은 진작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정독해보겠습니다. 심재관 교수님이 여기에도 참여하셨군요. 랑카중심주의 비판에도 나서시고, 상대주의자적 면모가 강하신 분 같았습니다.

    마츠모토 시로 교수님의 개설서 외에 티베트 불교 철학, 특히 쫑카파 대사의 중관사상을 소개하는 저서가 아직까지도 국내에 드물다는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비판불교의 프리즘을 거치지 않은 정통 학술서가 발간되길 기대해봅니다. 하지만 비판불교적 시각을 배제하고서라도, 티베트 불교의 중관사상은 여전히 논쟁적일 것 같습니다.

  • 23.07.01 23:29

    예전에 마츠모토 교수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비판불교 논쟁도 정말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옳고 그름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논쟁을 생산할 수 있었던 과거 불교계의 역동성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아무튼 올려주신 자료 감사히 잘 읽고 균형있는 시각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작성자 23.07.03 20:50

    @보리심 1999년 고려대장경 주최의 학술 세미나에 마츠모토 시로 교수님이 참석했었는데, 종료 후 모두 함께 공양하는 자리에서 마츠모토 교수님과 마주 앉아 식사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츠모토 교수님은 1999년 개최했던 백양사 무차대회에서도 만난 적이 있기에 구면이었고요.) 그때 마츠모토 교수님이 제 논지를 반박하면서 <중론>에 '진제(Paramartha satya)'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기에, 제가 Tattvatas가 진제를 의미한다고 대답했던 적이 있습니다. Tattvatas는 자립논증 중관파인 청변이 <중론>을 주석하면서 삼지작법의 추론식을 작성할 때 주장 명제 앞에 붙이는 단서로, 후대의 현장 스님은 진고(眞故)라고 한역하였습니다. 원효 스님이 <판비량론>에서 유식비량을 작성할 때, 주장명제 앞에 붙인 '眞故'라는 단서입니다. '진고'는 '승의에 있어서' 또는 '진제에서는'이라고 풀이됩니다. 위의 책에 실린 제 논문 <중관 사상에 대한 마츠모토의 곡해>에서 마츠모토 시로 교수님의 <중론> 범어 문장 해석의 잘못을 제가 지적할 때, 핵심이 되는 내용이 'Tattvatas'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마츠모토 교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 작성자 23.07.03 21:09

    @관리자 그리고 위의 책 말미의 논문에서 마츠모토 교수님이 쫑카빠 스님의 중관사상을 거론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쫑카빠 스님의 중관사상 가운데 몇 가지는 그 타당성을 다시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의 의미에 대한 설명입니다. 쫑카빠 스님은 '공'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해설합니다. 그러나 <중론> '관행품' 제5게(한역)의 후반 게송을 보면 '자성이 없음'을 공의 의미라고 보는 것 역시 문제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제5게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모든 존재가 그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는가? 만일 모든 존재가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는가?" 쫑카빠 스님은 주석에서 이 게송의 전반과 후반을 구분하여 전반은 용수의 생각, 후반은 논적의 생각이라고 설명하지만, <중론> 전체의 저술 방식을 염두에 두면, 모두 용수의 생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자성 없음'도 비판됩니다.

  • 작성자 23.07.03 21:12

    @관리자 또, 쫑카빠 스님은 <중론> 제18장을 통해 '아공'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제18장은 '현실적 자아'가 아니라 '법으로서의 자아'를 비판하는 장이기에, 이 장 역시 <중론>의 다른 장들과 마찬가지로 '법공'을 가르치는 장입니다. '아공'은 실천 수행을 통해 체득되어야 합니다. 쫑카빠 스님의 <중론> 해석에서 한 가지 더 문제가 되는 게 있는데, 지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런 문제점을 논문으로 완성하게 되면 소상히 밝히겠습니다.

  • 23.07.03 22:07

    @관리자 마츠모토 교수님과 그런 일화가 있으셨군요.. 교수님 논문 읽을 때 참조하겠습니다. 비판불교도 모든 연구가 그러하듯 功過가 존재하리라 봅니다. 저도 비판불교 관련 논문이나 저서 읽을 때 절반 이상은 거르거나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판불교처럼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이 절반 정도의 설득력을 담보할 수 있는 것도 굉장히 준수한 성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비판불교를 옹호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고 다만 문제의식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참조하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23.07.04 02:07

    @관리자 저는 쫑카빠 대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정도가 못되는 말학 중의 말학이라 교수님 의견에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그래서 일단 저같은 말학을 위해, 연구자 개인의 주관적 시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쫑카빠 대사 사상을 객관적으로 심도있게 소개하는 학술서들이 나왔음 좋겠다고 생각해봤습니다..

    다만 관행품 제5게는 교수님께서도 역주하신 중론의 각주에서 밝히셨듯이, 무외소, 불호주, 반야등론 등에서 이미 전반게송(쁘라산나빠다 범문 기준)은 반대자의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 보면 쫑카빠 대사만의 독자적인 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관행품 게송과는 별개로, 자성에도 크게 세간자성과 승의자성이라는 두 의미로 분류되는데 중론 독해할 때 자성의 용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중론에서도 자성이 꼭 한 가지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닌 걸로 압니다. 쫑카빠 대사께서도 이미 자성의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하신 바 있으신 걸로 알구요..

  • 23.07.04 02:13

    @관리자 그리고 중론18장에서 '현실적 자아'가 아닌 '법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므로 아공이 아닌 법공을 다룬다고 말씀하셨는데, 교수님이 말씀하신 '현실적 자아'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론18장은 자아가 오온의 측면에서 성립하는지 여부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색수상행식 오온 외에 자아를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별다른 요소가 존재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현실적 자아'와 '법으로서의 자아'를 굳이 구분하는 것이 저로서는 크게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색수상행식 같은 대상이 너무 교학적 냄새를 풍긴다 싶으면 마음, 생각, 느낌, 감정, 의지, 머리카락, 눈, 간, 심장, 발톱 등등 실생활에서 인지하는 구체적인 대상들로 대체하면 됩니다.

  • 23.07.03 23:54

    @관리자 또한 중론 18장이 아공의 실천 수행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간주하시는 커멘트는 저로서는 제일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아시다시피 티베트 불교에서는 분석명상 혹은 위빠사나에 중론 18장의 논리를 포함한 여러 논리를 활용합니다. 이런 논리들을 단순히 문제집 문제 풀듯 한번 듣고 이해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수행자 본인의 현실에 적용하면서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명상해서 문혜를 사혜, 수혜로 발전시키는 것이 곧 공성에 대한 직접적 실천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인도-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가 바로 이것이구요. 저는 선불교의 간화선 화두도 좋지만, 공성, 아공에 있어서만큼은 중론 18장을 참구하는 것이 공성에 대한 바르고 직접적인 인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탈과 성불로 나아가는 길도 별다른 "깨달음"이 아니라 오직 이 공성에 대한 바른 인식 뿐입니다.

  • 23.07.03 23:01

    @관리자 교수님께서 장문의 댓글을 남겨주셔서, 저도 아는 바는 없지만 개념없는 말학의 만용으로 솔직한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저도 책이나 논문만 보고 덩달아 휩쓸려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름 여러 불교 전통의 선지식들도 만나보고 수행도 해보면서 깊이 고민해본 적 있는 내용이기에 솔직담백하게 말씀드렸다는 점을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이와 관련한 논문 내신다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읽어보겠습니다_()_

  • 작성자 23.07.04 11:15

    본 카페 게시판 다른 곳에서도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보리심님께서 앞으로 전문 불교학자의 길을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긴 글 쓰기 힘들기에, 위에 올린 '(감히) 쫑카빠 비판'을 하게 된 근거에 대해, 이곳에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1. <중론> 제18장의 산스끄리뜨문 제목이 원래 아뜨만[自我]의 검토(ātmaparīkṣā)라는 이름의 제18장입니다. 즉, '관아품(觀我品)'입니다. 그런데 구마라습 스님의 한역 <중론>에는 '관법품(觀法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문이 제18장을 '법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논파'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입니다.

    2. "'공'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티벳불교의 통설에 대한 저의 비판은, 일단 <중론> 청목소 제13장 관행품 제5게의 전후 맥락에 근거합니다. '자성이 없음'이 공을 의미한다고 도그마처럼 내세울 경우, 청목소의 제4게 바로 앞의 문답에서 보듯이 "자성이 없는 존재가 있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공을 설하지만 나중에는 '공'조차 파기하는 '공공'의 가르침, 경우에 따라 '무아'조차 침묵으로 대처하신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이런 제 생각의 근거가 됩니다.

  • 23.07.04 11:03

    외람된 말씀이지만, 무자성을 도그마처럼 내세운다는 주장은 상대방 입장에 대한 곡해가 아닌가 싶습니다..쫑카파 대사도 '무자성'에 '자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는 없으니까요..쫑카파 대사의 입중론 주석서인 우마공빠랍쎌에 나오는 '공성을 포함한 일체법이 승의로 존재하지 않고 언설로만 존재한다'는 테제로 '무자성의 무자성'이 충분히 해명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역으로 부처님의 침묵이나 공공을 도그마로 삼을 때의 폐해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용수보살은 단지 침묵이나 공공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법을 설하셨습니다. 단지 침묵과 공공이 공성이고 승의라면 부처님과 용수보살은 선사들의 표현처럼 개구즉착開口卽錯의 실수를 하신 셈입니다. 과연 그분들이 진리에서 멀어진 실수를 하신 걸까요

  • 23.07.04 11:04

    침묵, 공공처럼 어떠한 견해도 내세우지 않음을 공성이라 여기는 주장의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서 쫑카파 대사는 자세히 논한 바 있고, 그러한 문제점들이 단순히 가정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발생함을 불교사적 사실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도 익히 아실 것이고 댓글의 한계도 있어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공성을 자성이 없음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쫑카파 대사나 티벳불교만의 주장이 아니고 찬드라키르티의 중관사상에 대한 티벳불교의 계승 내지 재해석에 해당하므로, 교수님이 청목소로 논의를 환원하셨듯 이를 티벳불교만의 주장으로 국한하지 말고 인도불교에서의 중관 논의와 연계시켜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23.07.04 13:33

    어찌됐건 아무것도 모르는 말학의 댓글에 친절히 답해주시고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댓글달다보니 쫑카파 대사의 충실한 지지자?처럼 옹호하게 되는데 사실 람림 기준에서 보면 불자라고도 보기힘든, 되먹지 못한 종자인지라 부끄럽고 낯뜨거워집니다

    기회가 되면 쫑카빠 대사의 사상적 대척점에 있던 고람빠나 고람빠의 영향을 받은 닝마, 까규의 학자들, 그리고 동아시아의 반야사상까지 공부해보고 싶은데 금생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공부하면서 교수님의 관점도 참고하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 24.09.11 10:17

    2024.09.11.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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