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政大夫行中樞院義官丹陽張錫寅先生遺墟碑銘
先生의 성은 張氏요 諱는 錫寅이고 자는 亨中이며 晩樂軒은 그 號이다. 張氏 시조는 高麗 開國에 협력한 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 太師 諱 貞弼이다. 五世孫 諱 順翼은 金紫光錄大夫 門下侍中 丹陽君인데, 이 분이 分貫祖로 후손이 丹陽을 貫鄕으로 삼고 있다. 朝鮮朝에 와서 十六代祖 諱 允和는 贈戶曹判書로 諡號가 忠翼이고, 十一代祖 諱 謹은 退溪門人으로 經書에 밝았다. 그 후로 공훈과 벼슬이 끊이지 않아 名門의 기틀을 이어왔다. 分貫祖의 二十九世孫 諱 龍汲은 조부인데, 가선대부 龍驤衛 護軍으로 흉년에 빈민을 救恤하였고, 부친 諱 宗華는 부모에 효도하고 근검하여 생활이 윤택하게 되었다. 모친은 江陵人 崔天宇의 따님으로 婦德을 갖추었다. 先生은 癸亥年 陰三月三日 경북 문경시 동로면 수평리에서 태어났다. 幼時부터 資稟이 겸손하고 근검하며 신중하고 치밀하며 후덕하였다. 辛丑年 丹陽으로 이거하여 壬寅年에 惠民署 從仕郞을 역임했다. 癸卯年에 通訓大夫 行 中樞院議官으로 승진하고 甲辰年해 通政大夫로 승급되었다. 丙申 丁未義兵 때 군자금지원문제로 倭警을 피하여 癸丑年 봄에 여주 흥천면 外絲田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매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니 속칭 새터이다. 戊寅年 十월 五일 正寢에서 하세하니 향년 七十六歲이다. 墓는 금사면 走鹿里 山 丁坐에 있다. 先生은 外絲田으로 이거 후에 학문을 강론하였다. 지평으로 錦溪 李公 根元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올리고 종신토록 사모하였다. 나라에 倭賊이 횡행하고 변고가 비길 데 없자 병신, 을사, 정미년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先生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방략이 없으니 나가서 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야 초야로 들어가서 前後에서 지원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하고 處而扶持하였다. 그리고 의병 군자금을 여러 차례 지원하였다. 의병이 계속 실패하자 “나라가 망하여 앞으로 사람이 금수가가 될 터이니 성인의 학문을 강론하고 밝혀 후생으로 하여금 三綱五倫의 이치와 尊中華 攘夷狄의 義理를 알게 할 수밖에 없다.”하고 戊申年 同門이요 의병참모였던 廣庵 李奎顯을 초빙하여 子孫의 교육을 맡겼다. 庚戌年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大夫의 冠帶를 불태우고 大聲痛哭한 후 自決시도하였으니 魯仲連에 비견된다. 庚申年에 큰 흉년이 들자 이를 기회로 일제의 수탈이 진행 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百餘戶에 救恤米를 무상 배포하기도 하였다. 丙寅 丁卯年에 장자 壽永으로 하여금 치재 李敏應과 함께 재단법인 善隣會를 조직하여 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금융사업, 빈민구제 사업, 육영사업, 농촌진흥사업으로 畿東保隣社 창립 등에 참여케 하였다. 庚午年 毅菴 柳麟錫 휘하의 敗軍之將인 李奎顯과 李炳德을 은신시키고 그 가족 전체를 돌보아주었다. 선생은 原州 邊正熙의 딸과 婚姻하여 壽永을 낳았다, 再娶 安東 權宅俊의 딸은 成婚 전에 死去하고, 다시 安東 權任鉉의 딸과 결혼하여 賴永, 達永, 孝永, 麟永, 虯永 五男과 二女를 두었다. 딸은 延日 鄭世澤과 完山 李明鎬에게 출가하였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용문산 화서연원독립운동기념비에는 선생과 그 아들 壽永 賴永이 등재되어 있다. 백절비에 등재된 손자로 遇會는 화랑무공훈장, 遇載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고, 상이용사 遇時는 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자손들이 대개 有能하고 餘裕가 있으니 선생의 끼친바라 하겠다. 아! 만락헌 선생의 厚德과 斥邪大義와 家傳忠孝 世守仁敬은 후세에 귀감이 될 것이다. 만락헌공화수회에서 崇祖敦睦하는 마음으로 유허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張遇大 회장을 비롯하여 宗人들이 誠金을 모으고 有志가 도웁고 宗孫 淇範이 터를 내놓았다. 증손 聲九 교수가 不佞에게 晩樂軒文集을 주면서 비문을 부탁하니 사양만 할 수 없었다. 銘한다.
丹陽君 精氣받아 타고난 天稟이여
지조는 보석 같아 풍진에 반짝이고
언행이 일치하기는 霍光과도 같아라
학문은 孔朱宋을 사상은 위정척사
邪徒가 난무해도 황하에 砥柱같네
仁德은 추읍산 위에 달빛처럼 밝다네
왜적이 횡행하니 丹心은 愛國愛民
의리는 處而扶持 후일을 도모했네
의병에 軍資金 지원 헤아릴 수 없구나
경술년 自決시도 魯仲連 닮았어라
廣菴을 초빙하여 자손들 충효교육
두 아들 독립운동에, 손자 둘은 전사라
흉년에 주린 백성 가산으로 救恤하고
壽永에 이르기를 선린회 동참하여
농촌을 진흥시키고 육영사업 펼쳐라
가정에 엄숙하고 근면과 검소했네
자손들 유능함은 선생의 끼친 바라
洞口에 遺墟碑 세워 무궁토록 기리리
先生易簀 八十週年 丁酉 三月 日 前경원대학교 교수 화서학회 회장 張三鉉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