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청주한씨 안양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골든배
始 祖 篇 위양공 휘·란(威襄公:諱·蘭)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始祖)이다.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忠淸北道 永同郡 黃澗面 蘭谷里)태생으로 지원(諱·智原)의 三子요,그 선계(先系)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系出)하였다.공(公)은 중년(中年)에 청주 방서동(淸州 方西洞)에 이거(移居)하였다.태봉왕·궁예(泰封王·弓裔)가 죽고 왕건 태조(王建 太祖)가 918년 6월 15일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卽位)하는데 공의 공(功)도 있었다고 전한다.태조(太祖)2년 10월 배현경(裵玄慶)이 평양(平壞)에 축성(築城)하는 이점(利点)을 의논하니 王이 한 란(韓 蘭)과 염 상(廉 湘)에게 영(令)을 내려 현지(現地)에 가서 독려케 하였다.염 상 이 중도에 병이 나서 강윤형(康允珩)을 대신 보내 평양성을 완성케 하니 태조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그후 청주 방서동에 내려와서 수년동안 농사를 지며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農土)를 개척(開招)하여 부호(富豪)가 되있더니 태조 11년(928)후백제 견 훤(後百濟 甄 萱)을 치려갈 때 정벌군(征伐軍)에게 군량미(軍糧米)를 대주고 종군(從軍)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삼중대광 개국벽상공신(三重大匡開國壁上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벼슬은 문하태위(門下太尉) 에 올랐으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事績(蹟)略記) 始祖府君(諱 蘭)墓 忠淸北道 記念物 第72號(1987.3.31 指定) 所在地:忠淸北道 淸原郡 南-面 駕山里 乾坐巽向 歲享日 음 10月 1日 시조부군 휘·란(諱·蘭)의 묘(墓)는 배위(配位)송씨(宋氏)와 합조(合兆)이다.가산 (駕山)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이며 속리산(俗離山)이 갑방(甲方:正東에서 北으로 15도의 方位를 中心으로 한 15도안의 方向)인고로 이르기를 회룡고조(回龍顧祖:山의 地脈이 뺑돌아서 本山과 맞섬)라 하여 길지(吉地)라 한다.중간에 실호(失護)되어 추모 (追慕)하는 후손들이 단(壇)을 쌓고 비를 세워 세일제(歲一祭)를 받들기도 하였다.잘못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고 자손이 있으면 반드시 조상을 찾게 마련이다. 숙종 14년(1688) 묘하(墓下)에 고용되던 한모(韓某)가 탐문한 바 그동네에 사는 모인(某人)이 공의 산소를 파헤치고 묘갈을 동강내어 우물 바닥에 묻고 산소 전후면에 투장(偸葬)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후손 성헌(聖憲)에게 告하니 다시 청주병사 근(淸州兵事 根)에게 제보하여 조사한 바 중절(中絶)된 비(碑)의 자획(字劃)이 완연함에 곰 묘임을 확인하고 이듬해 후손 성우(聖佑), 형(형), 숙(塾)등이 제소하여 확인을 얻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다시 묻고 개봉축(改封築)하여 표석(表石)도 세웠다. 묘비는 숙종 30년(1704)에 개수(改竪)하고 신도비(神道碑)는 영조 (英祖)44년(1768)에 세웠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룰 제72호이다. 비문(碑文)은 후손 좌의정 익모(左議政 瀷모)가 짓고 형조판서(刑曹判書) 광회(光會)가 썼으며 한성좌운 덕필(漢城左尹 德弼)이 전(篆)했다. 【역문】태위공의 휘(이름)는 란(蘭)이요 성은 한씨(韓氏)이니 본관(本貴)은 상당(上黨:淸州 古號)이다.상당 한씨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한 바 기자의 세대가 쇠퇴하여 마한 (馬韓)이 되었고 그 자손이 상당현에 살면서 한씨라고 칭하였으니 그 사실이 위지(魏誌)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다.태위공께서 여조(高麗朝)를 보우하여 삼한을 통합하시니 그 훈명 높은 사적이 사서 (史書)에 찬란하게 조영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갑족이라 칭하게 되었다.상당은 청주의 구호(舊號)이며 청주읍에서 동남으로 무농정이 있는 방정리는 즉 태위공의 유허이고 또 거기서 남쪽으로 7·8리쯤에 가산(駕山)이 있으니 이곳이 태위공 묘소가 계신 곳이다.옛날에 삼중대광 태위 한이라는 일곱 자가 각자로 된 표석이 있는 것을 읍내에 사는 노인이나 사대부들이 목견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자손으로서는 아는 이가 없었 다.마침 군민 중 노 봉(盧 峰)이란 자가 있어 효종 10년(1659)에 제 아비를 태위공 묘소 후측에 투장하고 노 봉이 사망하니 또 태위공묘 전면에다 도장(盜葬)하였다. 숙종 14년(1688)에 후손 장령 형(형)과 지평 성우(聖佑)가 처음으로 이 사실을 듣고 알게되어 제종들과 더불어 회덕현감에게 제소하였더니 노봉의 족속들이 감히 은피하지 못하고 고노(古老)들의 전설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노봉의 자식은 그 부조 양대의 무덤을 발굴하여 갔다.동년 10월에 절도사 근(根)등이 태위공 묘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옛 봉분을 헐고 개봉축하였는데 광중(壙中)에 삼층 석축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니 고려시대의 석장제도(石葬制度)였던 것이다. 마침내 구제대로 봉축하니 주위가 32척이요 높이가 9척이었다.그 다음 해 가을에 간악한 천민 재관(再寬)이가 법관을 선동해서 임금의 총문을 속이여 광중을 파보니 거기서 삼연석(三鍊石)과 사철정(四鐵釘)을 보게 되었다.재관이는 임금 속인 죄로 벌을 받고 경조랑(京兆郞)은 범광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왕이 군수에게 명하여 분묘 를 개봉축하게 하였다.아-원통함이다.태위공의 지하에까지 미치는 화변은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개광(開壙)할 것을 요청한 자는 경조윤 이자정(京兆尹 李字鼎)이요 일을 맡아본 자는 참군 민광로(閔光魯)였다.태위공의 내외 자손들이 그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산소를 실전(失傳)하였다가 다시 심득(尋得)한 사유를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고 지석(誌石)을 매장하여 후인들의 고증(考徵)이 되도록 하련다. 황명숭정경오(1690)8월 일 후손 생원 숙(塾)근지 位 置:忠北 淸州市 方西洞 방정(方井)은 무농정(務農亭)아래 동리(洞里)앞에 위치(位置)하고 있다.태위공(太尉公)께서 처음으로 이 터를 점거(占居)하시면서 음료(飮料)와 용수(用水)로 쓰시던 샘 이니 정방형(正方形)으로 축조(築造)하였으므로 方井이라 이름하고 因하여 里名도 方井里로 호칭(號稱)하게 된 것이다.수질(水質)이 청신(淸新)하고 풍미(風味)가 감미(甘美)로워서 양생(養生)에 최적(最適)이며 수원(水源)이 길어서 큰 가뭄에도 용출량(湧出量)이 감소(減少)되지 않고 항상(恒常)풍요(豊饒)한 것도 좋거니와 그 보다도 애음(愛飯)하던 主人公이 희세(稀世)의 위인 태위공(偉人 太尉公)이시기에 더욱 有名하게 된 것이다.청주읍지 고적조(淸州邑誌、古蹟條)에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견 훤(甄 萱)을 정벌(征伐)하러 가는 行軍이 마침 이 門前을 지나가게 되자 太尉公이 이를 맞이하여 十萬大兵을 호궤(호饋:배불리 먹인다)하는데 이 井水를 汲用한 바 조금도 水量의 不足 함이 없었다 하여 方井이라는 정호(井號)를 받았다는 사실(事實)이 기재(記載)되어 있다.(忠淸北道 지방기념물 84호,1990,12,14 지정) 시조부군(휘 란)의 무농정(始祖府君(諱 蘭)의 務農亭 所在地:忠淸北道 淸州市 方西洞 108-4 務農亭은 東北方에 웅장(雄座)한 상당산(上黨山)을 등에 지고 南西편으로 展開한 三十里 大野 務農과을 향하여 금반옥안형(金盤玉案形)으로 유명한 승지 방정리 후록(勝地 方井里後麓)에 자리잡고 있다.太尉府君께서 이 정자(亭子)를 창건(創建)하시고 여기서 기거(起居)하시면서 농업(農業)을 권장(勸裝)하시고 제세경륜(濟世經輪)을 연마(練磨) 하시던 道場이요 方井과 아울러 公의 여향(餘香)이 연면히 흐르고 있는 유적(遺蹟)인 것이다.이후 천여년(爾後 千餘年)에 사물(事物)의 소장성쇄(消長盛쇄)가 무상(無常)한 지라 方井里가 일시폐허(一時廢墟)로 황량(荒凉)한 처지(處地)에 있게되니 務農亭의 所在를 더구나 알 길이 없게 되었다.이조 숙종년간(李朝 肅宗年間(1688))에 後孫 根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本州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자 우선 方井里에 찾아와서 무농정 구지(務農亭 舊地)를 찾아 비석(碑石)을 세워 표증(表徵)을 하여 두었고 光復後 己丑年(1949)에 方井里 宗中의 발기(發起)로 全國 宗門이 성의(誠意)를 모아 亭子를 重建하였다.그러나 6·25動亂으로 인한 관리소흠로 원형보전(原形保全)이 어렵게 되어 지난辰辰(1988)年에 中央宗親會가 主管하고 淸州市가 고려건축양식(高麗建築樣式) 에 따라 원형(原形)대로 설계(設計)하여 정부보조금(政府補助金)과 後孫들의 성금(誠金)으로 재중건(再重建) 하였다.(충청북도 기념물 제85호,1990,12,14 지정) ※務農享 0| 원위치(原位置)에 보전(保全)된 경우(經繹) 현재의 무농정(務農亭)은 시조부군(始祖府君)이 창건(創建)할 때의 원위치(元位置)이다.오랜 세월을 거치는 사이 혹은 허물어지고 또 다시 세우고 고치기 를 몇번이나 거듭해 왔다.그러다가 지난 1992년 청주시 도시개발확장에 따라 토지개발공사가 주관한 택지 조성에 일팔 포함되었을때 강력한 유보운동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보전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는 후손으로서 각별히 노력한 鳳錫宗人이 있음을 첨기하여 둔다. 이 碑石은 조선 숙종 14년(단기 4021·서기 1688)이름만 전해오는 무농정 옛터에 후일의 고증(考徵)할 신표(信標)로 삼고자 세워진 것이다. 시조부군(始祖府君)의 묘소(幕所)를 실호(失護)한 지 오래되어 봉심(奉審:보살핌)할 길이 없던때에 구암공 백겸(久菴公·諱·百 讓)이 선조(宣祖)38년(단기 3938·서기 1605)에 청주목사 (淸州收使)로 도임(到任:부임) 하여 시조유기(始祖遺基)를 성의 를 다해 찾아 단(壇)을 쌓고 비 (碑)를 세우고 제전(祭田:位土)를 사들여 매년 세일제(歲日祭:歲享)를 봉행(奉行)할 기틀 을 마련하였고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이 광해(光海)9년(단기 3950·서기 1617)에 서원현감 (西原縣監·淸州)으로 부임(赴任)하여 단(壇)을 수축(修築)하고 상구(床具:祭祝器具)를 마련하여 세사(歲祝:歲享)봉행(奉行)에 만전(萬全)을 기했다. ※그러나 이곳은 方井里(方西洞)의 이웃 동네인 월오동(月午洞·運動洞)으로 단(壇)은 훼실(毁失)되고 비석(碑石)만 月午洞 뒷산 아래 밭가운데 서 있다.(충청북도 유형문 화재 제169호,1990.12.14 指定)) 始祖府君(諱·蘭)의 遺墟碑 所在地:忠淸北道 永同郡 黃澗面 蘭谷里(吐蘭里) 시조부군 휘·란(始祖府君 諱·蘭)은 황간면 난곡리(黃澗面 蘭谷里)에서 탄생(誕生)하셨다.부군이 탄생시에 근처 토산(土山)이 땀을 흡린 토한리(吐汗里)라고 하니 지금의 난곡리(蘭谷里)이다.중년(中年)에 몽득(夢得)청주 용개평(淸州 龍開坪)하야 청주 방서동(淸州 方西洞)으로 이거(移居)하여 이곳에 무농정을 짓고 향학을 일으키고 농토를 개간하여 권농하며 고려 건국(高麗 建國)에 힘썼다.자손만대(子孫萬代)의 복(福)을 누리게 될 후손들이 시조부군의 유업(遺業)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니 1986년 10월인데 전 충청북도 도지사,국회의원 김종호(金宗鎬)가 비문을 짓고 후손인 서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文學博士)상갑(後孫 相甲)이 썼다.-유허버(遺墟碑)가 세워진 이 터는 1986년 11월 30일 중앙종친회가 매입(買入)한 전 (田)2,145㎡중 앞쪽 부분이며 뒷쪽에 남은 받은 도조(賭租)를 받고 있으며 농지 (農地)는 현지에 거주하는 자라야 취득이 가능함으로 황간면 남성리 585에 사는 한 영수 일가 명의(名義)로 위임(명의신탁)조치한 형편이다.따라서 종친회 임원 명의 로 가등기 처리되어 있음. 위치: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575-1 재실(齋室)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14년(朝鮮 肅宗 14年·단기 4021·서기 1688)에 실호(失護)했던 시조묘소(始祖墓所)를 다시 찾아 모시고 재사(齋舍)를 건축하며 묘하에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세향일(歲享日)을 음 10월 초정일(初丁日)로 정할 때의 일이고 그후 단기 4121·서기 1788년에 중건(重建)하여 비로소 세일재(歲一齊) 라고 현판(懸板)하였다.이후 여러 차례 중수(重修),중건(重建)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위선조(四位先祖)추모단(追募壇) 四位先祖는 시조하(始祖下)二世祖 용호군 교위공(龍虎軍 校尉公)휘(諱)영(潁)三世祖 별장 동정공(別將 同正公)諱 상휴(尙休)四世祖 상의 직장공(尙衣 直長公)諱 혁 (奕)五世祖 신호위 상장군(神虎尉 上將軍)諱 희유(希愈)이다.위 四位先祖의 유택(幽宅:墓所)을 실전(失傳:失護)한 연대(年代)는 살필 길 없으나 이후 오랜 풍상(風霜) 속에,겹치는 세란(世亂)으로 오직 휘자(諱字:이름)와 직함(職啣)만이 보책(譜冊)에 기전(記傳)될 뿐이고 배위(配位)또한 실전(失傳)되어 성씨(姓氏)마저 부전(不傳)하므로 시조(始祖)영내(塋內:墓域)동록(東麓)아래 선조(先祖)四位의 추모단(追慕壇) 을 모으고 매년(每年)음 10월 1일 시조 세향일(始祖 歲享日)에 향화(향火:時享)을 드리고 있다.忠北 淸原郡 南一面 駕山里 歲一齊 左便 ※단기(檀紀)4318년(서기 1985)음 10월 1일 이곳에 추모단(追慕壇)을 모으기 전 (前)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영광(靈光)에 모신 六世祖 예빈경공(禮實卿公:光胤) 세향일(歲享日)에 추원재(追遠齋)에 四位神位를 모시고 제수(祭需)를 드려 먼저 제사(祭祝)한 후에 예빈경공(禮實卿公)의 세향(歲享)을 드렸다. 韓 穎(한 영)2世遺 事 :龍虎軍校尉高麗官制西班有鷹揚龍虎二軍용호군 교위로 고려의 관제로는 서반에 해당되며 용호2군으로 추측됨. 예빈경공 한 광 윤(禮寶卿公 韓 光 胤) 6세고려 때의 문신(文臣)으로 公의 휘(諱)는 광윤(光胤)이다.公이 고려 의종(高麗 毅宗)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관작(官爵:벼슬)이 조정대부예빈경(朝正大夫禮寶卿)을 역임(歷任)하고 원나라(元)에서 금자광록대부수사공좌복야(金紫光綠大夫守司空 左僕射)의 증직(贈職)을 받았다.묘소(墓所)는 전남 영광군 진량면 지장산하 신사동 임 좌병향(全南 靈光郡 陳良面 支藏山下 新寺洞 壬坐丙向)인데 中間世代에 실호(失護:잃어버림)되어 오랫동안 吳,姜,金 等 民間人들이 모점(冒占:저희들 것인양 점유하고 있음)하고 있었다.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인 영조 17년(1741)에 후손인 세구,희맹,일주,중언(世龜,希盟,日周,重彦)등이 묘소를 찾아 묘비(墓碑)의 13字 즉 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朝正大夫行禮實卿韓光胤之墓)라는 글자와 뒷면에 나주 진씨(羅州 陳氏)외에 아들 누구,관직이 무엇 등등(子某,官某 等等)문자가 확인되므로 다음해(壬戌:1472)관(官)에 제소(提訴:確認、을 求하는 訴事)하여 판결(判決)을 받은 후 산소(山所)를 개봉축(改封築)하고 위토(位土)를 마련하였으며 전라감사(全羅藍司)로 재임(在任)한 익모(翼暮)가 재각(齋閣)을 짓고 위토(位土)를 더 마련하였다.또 한 계진(啓震)은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와서 표석(表石:墓表)을 세웠고 후에 용구(用龜)는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로 와서 성묘(省墓)하고 제수(祭需)를 더욱 풍성하게 조력(助力)하고 화수회(花樹會)를 설립(設立)하여 일가간의 우의(友誼)를 두럽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 종친회(宗親會)의 효시(曉失:始初)이다.公의 배위(配位)는 통의군부인 나주 진씨(通儀郡夫人 羅州 陳氏)인데 호장(戶長)각 (慤)의 따님으로 公과 合兆이다. ※세향(歲享)은 음 3월 1일이다.公의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되었다가 다시 찾았으나 비석에 새긴 글자가 얇아 없어지고 또 깨어진 데가 있어 원비(原碑:舊碑)는 그대로 두고 신비(新碑)를 세우기로 하고 1745년(英祖 21年)에 후손인 원진(元震)이 지은 비문(碑文)을 1746년 7월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부임한 계진(啓震)이 묘소 좌측(墓所 左側)에 세웠다. 예빈경부군(禮寶卿府君)휘 광윤 (諱 光胤)基碑銘 역문(譯文) 종인,한기,명현,철증(宗人,韓琦,命玄,喆增)이 나 원진(元震)에게 서신(書信)을 보냈는데 사연인즉 선조예빈경부군(先祖禮寶卿府君)의 산소(山所)가 벌써 世代가 구원 (久遠)하여 그 소재(所在)를 알 길이 없어 언제나 子孫들의 수치(羞恥)가 되어왔던 바 호남 영광군 진량면 지장산하 선사통(湖南 靈光郡 陳良面 支藏山下 薪寺洞)에 한 고총 (古塚)이 있으되 옛날부터 한정승묘(韓政丞墓)라고 傳하여 왔다.辛西(檀紀 4074·西紀1741)秋에 호남(湖南)사는 宗人,德潤,重彦,希孟,世龜,宗聖,希秀,日周가 가서 찾아본즉 墓所에 碑石이 있는데 이끼가 끼어서 文字를 식별(識別)할 수가 없게 되었다.모래로 닦고 물로 씻어보니「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朝正大夫行禮實卿韓光胤 之墓)」라는 13字가 써 있고 또 後面에 음기(陰記)가 있으되 각자(刻字)가 甚하게 부서 졌고 돌 끝부분이 흙에 묻힌 곳에 나주 진씨(羅州 陳氏)와 子某某라는 약간(若千)의 글자와 官職名,姓,諱,配位,子某라는 文字가 한결같이 보첩(譜牒)의 기록(記錄)과 부합(符合)되었다.府君께서 松京에서 官職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後에는 南部地方에 基所 를 모시게 되었으니 그 당시(當時)의 일은 고증(考證)을 잡을 道理가 없다.그러나 墓下에 사는 住民들의 전설(傳說)에 따르면 정승공(政丞公)이 이곳에 좌천(左遷)당하여 오셨다가 이곳에서 下世하셨기에 因하여 이곳에 장례(葬禮)를 모시게 된 것이라 하니 事理가 그럴 듯한 일이요,시골에서는 재상(宰相)을 통칭 정승(通稱 政丞)이라고 하는 例도 있다.湖南 여러 종인들이 宗人 한 사람을 보내서 묘갈(墓碣)의 印本을 한 張 떠 가지고 와서 서울 사는 여러 宗中에 통보(通報)하였다. 다음해 壬戌年 봄에 宗中에서 철증(喆增)을 有司로 定하여 墓所의 개수(改修)와 수호책(守護策)에 關한 일을 주간(主幹)하도록 하였는데 때마침 그곳 郡守가 先祖의 외예 (外裔)가 되는 사람이어서 官力으로써 墓所를 개봉축(改封築)하고 세사(歲事)를 修行하 게 되었고 또 湖南 宗人들이 金錢을 거두어 祭田을 마련하였으며 官에 제소(提訴)하여 모장(冒葬)한 십여 민총(十餘 民塚)을 굴거(擺去)하였다.墓所를 失護한 지가 몇백년 되었는지 알 길이 없거니와 이제 갑자기 찾아서 墓域을 重修하고 첨모(瞻慕)하며 성소 (省掃)할 곳을 가지게 되니 子孫된 道理에 多幸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다.구갈(舊碣) 은 퇴락(頹落)이 극심(極甚)하여 不過 數年에 또 다시 연몰(煙沒)할 우려(憂慮)가 있으 니 이제는 의당 표석(宜當 表石)을 세워야 하고 분묘(慣墓)를 찾은 事由도 記錄하여 밝혀두어야 할 것인즉 碑文을 쓰는 일은 그대가 責任지라 하여서 나는 이 書信을 받고서 꿇어앉아 감탄(感歎)한 끝에 그 書信에 적힌 사연대로 이 글을 썼다. 곰곰히 생각하건대 크게 공덕(功德)이 있는 사람은 그 墓所가 반드시 傳하는 法이다. 始祖太尉公墓所도 한때 失傳되었으나 肅宗 己巳年에 다시 찾아서 香火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공덕(功德)의 여광(餘光)이라 아니할 수 있는가.예빈경부군(禮實卿府君)의 사적(事蹟)은 年代가 멀어서 소상(昭詳)히 알 수는 없으나 그 墓所가 失傳되었다가 다 시 심득(尋得)한 事實만으로도 그 功德이 偉大하심을 可히 알만한 일이다. 유구(悠久)한 세월(歲月)속에 흥폐(興廢)가 무상(無常)한데 이제 찾았으니 또 다시 실호(失護)되는 일이 없을까 예기(豫期)를 난측(難測)이라 그렇기에 이 돌을 不可不 세워야 하고 오래되면 또 새것으로 개체(改替)하여 또다시 永遠히 이어가기를 바란다. 崇禎再甲子(檀紀 4077·西紀 1744)仲冬日 17代孫 元震 撰 입비전말(立碑顚末:비를세우게된 경위) 이 墓碑는 英祖 17年 辛酉에 실호중(失護中)이던 예빈경 부군(禮實卿 府君)의 墓所 를 섬득(尋得)하고 3年 後 甲子에 남당 원진(南塘 元震)이 이 碑文을 찬술(撰述)하였으나 그 當時 立石까지 완수(完遂)치 못하고 다시 2年 後인 丙寅에 후손 계진(後孫 啓震) 이 本郡郡守로 來任하여 새로 단갈(短碣)을 墓左에 建立하였을 뿐이었다.그로부터 190餘年後 庚辰(檀紀 4273·西紀 1940)에 宗中의 공의(公議)가 府君의 현달(顯達)하신 사적(史蹟)은 宜當 神道大碑가 있어야 한다고 決定하고 前記 南塘 先生이 지은 碑文 을 序로 하고 참판 긍호(參判 肯鎬)가 지은 명(銘)을 추록(追錄)하되 寅洙의 글씨와 翼敎의 전자(篆字)로 新碑에 입각(入刻)하여 翌年 辛巳 5月에 墓所 入口에 건립(建立)하였다. 추원재기(追遠齋記)재각(齋閣)의 이름을 추원재(追遠齋)로 정함은 증자(曾子)의 귀후(歸厚)의 뜻을 取한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 예빈경 부군(先祖 禮實卿 府君)께서 고려 고종(高麗 高宗)과 원종년간(元宗年間)에 급제하여 위계(位階)가 조정대부(朝正大夫)에 이르시고 또 사공 좌복야 (司空 左僕射)에 추봉(追封)되셨다.그 위열(偉烈)과 훌륭한 공적(功績)으로는 반드시 세상에 드러났어야 할 것이나 문헌(文獻)이 무징(無徵)하여 이제 상고할 수 없다. 山所가 옛날 永光郡 즉 今世의 靈光郡은 또한 세대가 유구(悠久)하여 실전(失傳)된지 오래이다. 英祖 辛西年(檀紀 4074·西紀 1741)後孫 世龜 等이 多幸히 墓碣石을 本部 陳良面 支藏山下에서 발견하고 翌年 壬戌(檀紀 4075·西紀 1742)에 여러 후손들이 官에 송사 를 제기하여 봉분을 개축(改築)하고 제전(祭典)을 마련하였다. 丙寅年(檀紀 4079·西紀 1746)後孫 啓震이 郡守로 와서 묘갈(墓碣)을 세워 그 전말을 기록하였고 四年이 지난 庚午年(檀紀 4083·西紀 1750)後孫 全羅道 觀察使로 在任한 익모(翼暮)가 재각(齋閣)을 창건(創建)하고 墓道의 의문(儀文)이 비로소 대략 갖추어졌다. 不肯 光近 前 朗州 郡守로 있을때 몇 이랑의 位土를 마련하여 제수(祭需)에 보조(補助)하고 다만‘재사(齋舍)가 비좁고 또 쓰러질 날이 가까와짐을 염려하여 重建할 것을 발의하고 가을에 돌아왔다.그 後 2年이 못되어 本郡의 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자금 (資金)과 힘을 모아 옛터에 재우(齋宇)를 개축(改築)하고 때를 넘기지 않고 준공하니 전당청사(前堂廳舍)가 육영(六楹:五間)左右 협실삼영(夾室三楹)이다.앞에서 보니 前建物보다 약간 높고 크게 보였다. 아!이제 府君의 時代는 約 500年이 지났다.後孫이 번성(繁盛)하고 고관훈작(高官 勳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歷史에 혁혁히 빛나 內外의 派는 거의 全國에 파급(播及)하였으니 진실로 우리 先祖 깊이 쌓은 仁德이 아니었다면 이같은 후손의 여경(餘慶)이 있겠는가. 무릇 四代가 넘으면 1年에 한 차례 墓祭를 올리는 것이 예의(禮儀)이다.그 해 祭享 에 즈음하여 이른 아침과 깊은 밤의 風雨에 어찌 애연하고 숙연한 정이 없겠는가.그리 고 혹 보았는가?이 祭舍는 멀리 先祖를 추모하고 根本에 보답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다.棟宇의 성훼(盛毁)를 보면 가히 후손들의 흥쇠를 알수 있으니 계속하여 앞으로 우리 할아버지를 위해 後孫들은 모두 끊임없이 수리하고 단청하고 송백(松柏)을 보호하고 향기를 이바지할 지니라. 길이 효사(孝思)하여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면 南國의 人士로 우리 재사(齋舍)를 지나는 者는 모두 某公은 後孫이 있어 추원보본지성(追遠報本之誠)이 可히 귀후(歸厚)하였다고 할것이다.모든 우리 同祖의 後孫들은 어찌 힘쓰지 아니하리오? 문혜공 한 강(文惠公 韓 康) 1228~? 7세 문혜공은 고려 고종 원종 충렬왕 (高麗 高宗 元宗 忠烈王)때의 문신(文臣)으로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初名)는 경(璟)이다 예빈경공 광윤(禮賓卿公 光胤)의 아들이요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에 의장부별장(儀仗府別將)을 지낸 희유(希愈)의 손자(孫子)이다. 고종계묘(高宗癸卯)에16세에 장원급제(長元及第)하여 화려한 관직(官職)과영예(榮譽)를 입고 문혜(文惠)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다. 다음은 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실린 사적을 소개한다. 문혜공 한 강 (文惠公 韓 康)사적 (史蹟)고려사본전(高麗史本傳) 번역문(譯文)공(公)의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다. 고려 고종 16년戊子(檀紀3561, 西紀1228년) 생하고 고종 30년 계묘(癸卯)에 16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과거(科擧)에 급제 하셨다. 여러 차례 승진(昇進)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외직(外職)으로 金州郡守로 부임(赴任)하였는데 卽 지금의金海府 이다. 그 前부터 이 고을에는 토지(土地)에 부과된 세금이 항상 배정된 세액을 충당하지 못하게 되여 군수가 즉결 처분으로 파면 당한 예가 많이 잇었다. 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잘 운용하여 2천여석의 穀物을 收穫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 소정 세액을 충당(充當)하는데 항상 여유가 있어서 이속(吏屬)들도 일손을 거두게 되고 백성들도 가사(家事)에 安定을 찾게 되었다.이런 선정(善政)의 공적으로 예부랑중(禮部郞中)에 발탁(拔擢)되시고 판삼사사 로 승진전임 하였다.이 당시에 의정양부(議政兩府)에서 국사(國事)를 의정(議定)하는데 있어 피차가 간망(看望)하는 태도로 서로 주재(主宰)하는 자가 없었다. 이 까닭에 처음으로 재추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사존직(司存職)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또다시 중찬(中贊)으로 승진하시고 연로하시어 사임하시었다. 충열왕 22년(단기3629, 서기1296년) 丙申(갑신)에 王(왕)이 公(공)에게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王位(왕위)에 오른지가 오래되어 이제 還甲(환갑)을 당하니 송구한 심사가 더욱 간절하오.경(卿)은 내가 할 일을 일일이 밝혀 말씀하여 주오" 하시었다.公은 하나하나 조목(條目)을 들어서 진언(進言)하셨는데 "종묘제사(宗廟祭祀)는 先王(선왕)을 받들어서 유덕(遺德)에 보답하는 일인 즉 지금 묘사(廟舍)가 황폐하여 비가 새고 제사 때 쓰는 樂器(악기)가 산실(散失)되었으니 有司(유사)에게 下命(하명)하여 廟舍(묘사)를 수리하고 樂器(악기)를 備置(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수토록 하실 것이요. 工商(공상)은 器物(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요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인데 지금 정부 각 기관에서 수용하는 물품을 모두 시정(市井)에서 구입하는데 혹은 그 가격을 억지로 깎고 혹은 그 외상값을 보상하지 않아서 상공인들의 괴로움이 많은 즉 이것을 금하시고 잡아온 생물을 놓아주시어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이것이 증수(增壽)하는 방법이니 청하옵건데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렵(狩獵)을 행락(行樂)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기름지고 맛 좋은 음식을 절약하여 심한 추위와 더위에 토장죽이라도 장만하여 의탁할 곳도 없이 기갈(飢渴)이 심한 백성을 구호하시고 有司(유사)에게 하명하여 임자없는 시체라도 잘 매장하여 줌으로서 음덕(陰德)을 쌓게 하소서" 하였다. 이 때의 왕이 혼암(昏暗)하기 때문에 公(공)께서 이같이 실랄하게 말씀하셨으나 왕은 이대로 시행치 못하였다. 충열왕 29년(단기 3636, 서기1303년) 계묘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다.公은 천성이 인자하시어 재상직(宰相職)에 있을 때도 온공(溫恭)하시고 근검하여 유학(儒學)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열왕을 보좌하여 훈업을 세웠고 사기(謝奇)와 보(譜: 일명 謝譜) 두 분의 아들을 두셨다. 사기(謝奇)의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악(渥)과 영(泳)의 두 아들을 두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두루하치(禿魯花:독로화: 質子)에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였으며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官)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같이 영달(榮達)함으로 원조(元朝)에서 부친인 사기(謝奇)에게는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를 증직(贈職)하고 조(祖) 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 고양현백(僉太常禮儀院事 高陽縣伯)을 증직(贈職)하였다. 보문각제학공 한 사 기(寶文閣 提學公(韓 謝 奇) 8세 공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문혜공 강(文惠公 韓 康)이요, 조정대부행 례빈경(朝正大夫行 禮實卿 韓光胤)에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光綠大夫守司空 左僕射)에 추증된 광윤의 손자이다. 고려사약전에 있는 유사를 실어서 후인이 항상 살필수 있는사료로 삼고자한다. 사적(史蹟) (번역문) 고려사(高麗史)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忠烈王) 원년 乙亥(단기3608, 서기1274)년 6월 甲子에 새로 禿魯花(독로화: 두루아치 즉 중국어로 인질을 뜻함)를 선정하는데 3계급을 특진 발령한 관직을 주어서 내 보내기로 하였다.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된 한사기(韓謝奇)는 강(康)의 아들이요, 추밀 이분희(樞密 李汾禧)의 사위니 나이 20미만으로 품계(品階)를 초월(超越)해서 八品에 배명(拜命)하게 되었다.同 5년 己卯 3월 丁巳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派遣)하여 독로화를 인솔하고 원(元)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欣)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 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타)와 허공(許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 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 검(薛公 儉)의 아들 지충(之沖)과 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심(深)등으로서 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월등(越等)한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 문혜공(文惠公) 본전(本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아들 사기(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아들 악(渥)과 영(泳)이 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독로화로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管)에 이르렀다. 영(泳)이 이렇게 영달(榮達)함으로서 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로 사직(賜直)하였다.홍규열전(洪奎列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이 양가(良家)의 예쁜 여자를 선발하여 원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추밀부사 홍규(樞密副使 洪奎)의 딸도 마침 선발되어 대열 속에 있었다. 규(奎)가 한사기(韓謝奇)에게 이르되 "나는 내 딸의 머리를 깍아서 이번 選出을 免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떨지요" 하니 사기(謝奇)가 그러면 그 화(禍)가 귀공에게 미칠까 두려우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규(奎)가 듣지 아니하였다 한다. 가정 이곡(稼亭 李 穀)이 지은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행장(行狀)에는 아버지 사기(謝奇)는 본국(本國)에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조정대부우사의대부지제고(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고 公(泳)의 영달(永達)로 因하여 한림직학사아중대부경차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되었으니 어머니 채씨(蔡氏)와 정씨(鄭氏)는 모두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으로 추봉(追封) 되었다. 公은 鄭氏의 所生이다. 처음에 本國에서 세도(勢道)집 子弟들 중에서 질자(質子:인질)를 뽑아 보내는데 公의 부친이 역시 선출된 인질 중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가권(家眷)을 인솔(引率)하여 왔다고 하였다.공의 묘소(墓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후에 실호(失護:잃어버림) 되었다가 다시찾아 모신 경위를 소상히 알아야 되겠기에 내력(內歷)을 소개함이다. 특징(特徵)은 고려장의(高麗葬儀) 표본(標本)으로 四角 長方形의 석장(石杖) 호석(護石)의 분묘(墳墓)이다. 묘소(墓所) (보문각 제학공)공의 묘소는 광주읍 서쪽 소지면 서봉동 지금의 광산군 송정읍 서봉동 천등산 즉금 어등산 자좌 이다. 임진 병란 후 실호되여 묘하의 주민 오 성이 비갈을 깨어 버리고 투장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가 한정승 묘라는 전설이 인근에 구전 되어 옴을 단서로 하여 순조 3년 계해 단기4136 서기1803년에 후손 영의정 용구 가 해익 등 종인을 현지에 파견하고 광주 나주 양군수에게 서신을 보내어 산하 주민들과 함께 묘역 일대의 땅을 파고 믿을 만한 자취를 찾아보았더니 묘하에 부서진 비석 한 조각에 우리의 성 인 韓 字가 분명하고 공의嗅자인 謝 자는 오른쪽 가에 才는 파락 되고 윈쪽편에 言과 중간의 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 그아래 亞中 두 字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벌견 하였다. 이리하여 아중대부 휘 사기 라고 각자 된 부분임이 명백 하야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묘하에 거주하는 태중 이라는 사람을 산직으로 정하여 수호 하도록 하고 훗일 다시 개봉축 하였다. 순조33년 계사(단기 4166 서기1833)에 4월 후손 사신 군수 낙철이 경향 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여 묘하에서 종회를 열고 묘소의 개봉축 비석의 건립, 재실과 입사의 설비 등을 속의 하였으나 중론이 구구하여 뜻한 바 일을 성취 하지 못하고 비분한 속에 세월만 흘러 가고 있었다. 광복후 4년 무자(단기 4281 서기1948)에 후손 복리, 진환, 근섭, 제종의 발의로 각처에서 후손 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합심협력 하여 다음해 기축년에 봉분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입토를 매입 하였으며 제실를 건축하고 매년 3월3일에 세일제를 봉행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남양홍씨(南陽 洪氏)족보에는 삼사좌사주(三司左使澍)의 배 상당군 부인 한씨(配上黨郡夫人韓氏)의 조(祖)는 선수한림직학사 아중대부경차도사(宣授翰林直學士 亞中大夫經車都尉)로 고양현후에 추봉되시고 고려조(高麗朝)의 관직으로는 은청광록대부 도첨의좌사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고 (銀靑光祿大夫都僉議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製誥)이신 사기(謝奇)라고 적혀있다. 신도비명(神道碑銘)(譯文)(德股,宋 在晟 撰) 光州邑 西便 30里 地点인 서봉동 어등산하 축간룡 자좌오향사파판국(樓鳳洞 魚登山 下 丑艮龍 子坐午向巳破版局)자리가 바로 고려조정대부보문각제학고양현후한공사기(高 麗朝靖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謝奇)의 墓所이다.임진병란 후(壬辰兵亂 後)에 실전 (失傳)되었더니 傳하여 오는 말에 따르면 여기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 함으로 正廟辛亥(正祖 15年·檀紀 4124·西紀 1791)에 後孫되는 대신 용구(大臣 用龜)가 여러 宗人 을 現地에 파견(派遺)하고 羅州,光州 兩郡守에게 郡民들을 징발(徵發)하여 신적 (信蹟)을 찾아보도록 위촉(委囑)하였더니 墓下에서 파손(破損)된 碑조각이 發見되었는 데 姓字인 韓 字는 分明하고 휘자(諱字)인 사 자(謝 字)좌변(左邊)의 言과 身은 完在 하니 우변(右邊)의 재(才)가 박락(剝落)되었고 또 작호(爵號)中의 一部인 亞中이란 2 字가 있으므로 드디어 이를 신빙(信憑)하고 봉분(封墳)만은 즉수(卽修)하였으나 미처 수호대책(守護對策)까지는 마련하지 못하였다.그 後 純祖 癸巳(檀紀 4166·西紀 1833)에 경향제종(京椰諸宗)이 碑石을 세울 것과 재실(齋室)과 位土를 설치(設置)하려고 상의(相議)하였으나 의론(議論)이 합치(合致)되지 않아서 時日만 끌어오다가 成事치 못하였음은 甚히 유감(遺憾)된 일이었다.多幸히도 數年 前 癸巳(檀紀 4286·西紀 1953)에 各 宗中의 議論이 統一되어 墓域을 미화 (美化)하고 표석(表石)을 건립(建立)하며 재각(齋閣)을 창건(創建)하고 山直을 두고 位土를 마련하여 歲一祀를 行하게 되었으니 이제야 명명지중(冥冥之中)에 계신 영령(英靈)께서나 後孫들의 영모지정(永慕之情)에 多少나마 마음 놓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묘 의(墓儀)를 완비(完備)코자 하면 의당(宜當)격(格)에 맞는 신도대비(神道大碑)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 後孫 기흥(基興)이 여사열전(麗史列傳)과 가장(家藏)인 승첩(乘牒)을 提示하면서 無能한 나에게 碑文을 要請하는데 이번일은 後孫 在根이 전체비용 (全體費用)을 독담(獨擔)한 것이라 한다. 提學公의 配位(배위)는 세 분이 계시는데 延安 李氏는 密直事 汾禧의 따님이요 高陽郡夫人에 追封된 平康 蔡氏는 中贊을 지내고 諡號가 良淸公인 仁撥의 따님이고 또한 高陽郡夫人에 追封된 鄭氏는 宰相을 지낸 仁貴의 따님이다. 사숙공 한 악(思肅公 韓 渥) 9세 원종15년(1274)~충혜왕3년(1342) 공은 고려 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왕조 때의 문신이다.휘(諱)는 악 (渥)이요 자(字)는 자포(子布)요 호(號)는 성재(誠齋)또는 적선문(積善門:門下生이 지어준 號)이다.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사기(謝奇)의 아들이요 첨의중찬(僉議中贊)문혜공(文惠公) 강(康)의 손자이다. 公은 고려 원종(元宗)15년(1274)에 탄생한 명문 출신으로 몇년 있다가 충렬왕(忠烈王)5년(1279)3월에 독로화(充魯花:두루아치란 豪古語로 元來 人質로 고려에서는 人質로 간 王子와 高官의 子弟를 가리켰다)로 부(父)사기(謝奇)가 뽑혀 원에 가족을 거느리고 대방공(帶方公)징(徵)을 따라 가는데 아들 악(渥)과 영(泳),준(浚)을 데리 고 갔다.여러해 머물다 영(泳)만을 천자(天子)가 거주하는 경사(京師)에 맡겨놓고 가족이 환국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현관(顯官)을 역임(歷任)하였다.충선왕(忠宣王)2년(1310)9월에 우대언(右代言)이 되고 밀직사 좌승지(密直司 左承旨)를 거쳐 충숙왕(忠肅王)7년(1320)12월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월 지밀직사자(知密直司事)로 삼고 4월 왕이 원나라에 가는데 사경(四更: 새벽 2시경)에 양선문(陽善門)으로 나갔으므로 조정의 관원들은 전송 못하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오 잠(吳 潛)과 公 등 대신만 몇 데라고 갔다. 당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왕(瀋王)고(暠)가 분수밖의 욕망으로 허위로 여러 가지 트집을 꾸며 괴롭히므로 公이 그 장소에 꼭 지켜 서서 일행(一行)을 안심케 하고 동행 대신(同行大臣)들과 함께 성심성의(誠心誠意)로 보호하고 기발(奇拔)한 계략(計略)으로 왕에 미치는 위급한 화난(禍難)을 막아냈다.원나라에서 돌아와 10월 公을 첨의평리 (僉議評理)로 삼았다.동왕 11년(1324)3월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마음을 두 가지로 갖는 것은 나의 신하가 아니다.3품(品)치사(致仕)이상으로서 원나라 서울에 글을 올려 심왕 고(暠)를 세울 것을 청한 자는 모두 녹봉(綠俸)을 정지하라”하였다. 왕이 보낸 찬성사(贊成事)인 公이 와서 노자(路資)로 짤과 베(布)를 거뒀다. 동왕 14년(1327)11월 무자(戊子)에 교(敎)하기를“과인(寡人)이 재도(在都:元) 5년에 간신(奸臣)이 국조(國祚:位)를 옮기려고 꾀하는데 시종(始從)한 신하들이 절 (節)을 다하여 보좌(輔佐)하기를 시종(始終)한 마음으로 하였으니 그 공(功)을 가히 채록(采錄)할만 하도다”하고 첨의정승(僉議政丞)윤 석(尹 碩),상당군(上黨君)인 公 등 30여명에게 일등공신(-等功臣)을 찬성사(贊成事)정방길(鄭方吉),검교판서(檢校 判書)한 영(韓 泳)등 50여명에게 이등공신(二等功臣)을 삼고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주고 부모 처자에게도 작(爵)을 사(賜陽)하되 차등(差等)있게 하였다. 그리고 철권(鐵券:天子가 功臣에게 주는 割付의 一種)에 기록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으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封)하고 선력좌리공신(宣力住理功臣)에 서훈(敍勳)되었다. 충혜왕 즉위년(忠惠王 卽位年 1330)4월 삼사사(三司使)로 삼았으며 이듬 해 중찬 (中贊)으로 삼았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왕위(王位)의 계서(繼序)가 있을 때 또 다시 간모배(奸媒輩) 의 소란(騷亂)이 있었으므로 公은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중신(衆臣)들을 거느리고 계략(計略)을 책정(策定)하여 국난(國難)을 극복(克服)하였으며 충혜왕 복위 1년 (1340)4월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에 올랐다. 公은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고 만년(晩年)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私邸)에서 동왕 3 년(1342)69세로 졸하니 시호(諡號)를 사숙(思肅)이라 하였으며 충목왕(忠積王)2년 (1346)5월 대행왕(大行王)을 대묘(大廟)에 부제(附祭)하고 정승(政丞)인 公과 참리 (參理)이규(李揆)를 배향(配享)하였다. 천성(天性)이 근엄(護嚴)하고 신중(愼重)하며 대인(大人)으로서의 기량(器量)이 있어 매사를 반드시 세번 생각하여본 연후(然後)에야 시행(施行)하였고 몽고어(豪古語),한 어(漢語)에도 능통(能通)하였고 시(詩)에도 능(能)하였다. 배위(配位)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下韓國大夫人 原州 元氏)는 밀직사사 경(密直司事 卿)의 따님이고 후배(後配)송씨(宋氏)는 정윤(正尹)의 따님이다.아들은 일곱인데 첨의공 대순(僉議公 大淳),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계성군 중례(繼城君 仲禮),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서원군 방신(西原君 方信),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이다.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공묘(公墓)에 옛비석(碑石)이 있었으나 모두 자획(字劃)이 훼손되었으므로 순조(純祖)8년(1808)8월 후손(後孫)이조판서 만유(吏曹判書 晩裕)가 짓고 좌의정 용구(左議政 用龜)서(書)로 개수(改竪)하기에 이르렀는데 명(銘)에 이르기를「위대(偉大)하신 사숙공(思肅公)은 고려조(高麗朝)의 명신(名臣)일쎄.이 세상(世上)을 다스리어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하오.연경(燕京)의 사지(死地)에서 왕(王)의 화(禍)를 막아내니 범의 꼬리 밟고 넘어 인각(麟閣)에 공(功)세웠네.님을 위(爲)한 일편단심(一片丹心)거듭거듭 수훈(殊勳)일쎄.군국(君國)에 는 진충(盡忠)하고 만민(萬民)에게 시혜(施惠)로다.남긴 풍도(風度)오 래건만 아직까지 새로워라.성녀(聖女)도 탄육(誕育) 하고 현량재상(賢良宰相)많이 낳네.의연(依然)한 저 묘소(墓所)는 오백년(五百年)이 되었는데 빗돌에 글을 새겨 천년만년(千年萬年)전(傳)하리라」하였다. 公은 충혜왕 3년(1342)69세로 졸하니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유좌묘향(西坐卯向)에 배위,변한국대부인원주원씨(配位下韓國大夫人原州元氏)와 후배,송씨(後配宋氏)의 삼합조(三合兆)로 안장되었다. 자손들이 늘 봉사 (奉祀)하여 왔으나 1950년 6·25전란 으로 휴전선 완충지 대(休戰線 緩衝地帶)에 놓이게 되니 성묘(省墓)길이 막혀 1988년 이곳 고양시 내유동 대내산 하(高陽市 奈遊洞 大奈山下)에 제단 (祭壇)을 설치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思蕭公(諱渥)壇碑 단비 전면(前面)은 高麗右政丞諡思肅韓公渥之壇 配 下韓國大夫人原州元氏 配宋氏合設 “고려우정승시사숙한공악지단.배변한국대부원주원씨 배송씨 합설”0|다. 세향일 4월13일 都僉議 大淳 系 첨의공 한 대 순(都僉議 韓 大 淳) ?~공민왕4년(1355) 10세 고려 말기의 문신,충혜왕묘 배향공신(忠惠王廟 配享功臣)인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사 숙공 악(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思肅公 渥)의 큰 아들이며 제학공(提學公)사기(謝奇)의 손자이다.일찍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충정왕 원년(1349)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이듬 해 판밀직사사가 되고,동왕 3년(1351)추충협찬공신(推忠協贊功臣) 에 책록되어 광정대부 지도첨의사사(匡靖大夫 知都僉議司事)에 올랐다. 충정왕이 폐위되고 공민왕이 즉위하자 섭정승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가 된 이제현(李濟賢)이 전왕조의 권신(權愼)을 숙청할 때 公(공)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펌직(펌職)하였다.그때 왕이 원나라에 갔다가 12월에 돌아와 즉위할 때까지 조정이 비었는데 이제현의 조치가 적의(適宜)하였음으로 사람들이 힘입어 편안하였다. 공이 졸하니‘만장(輓章)에 이르기를“가문의 충의를 뜻대로 못이루고,뜬 세상 공명 (功名)은 꿈 같도다.뜰 앞에 시(詩)를 듣는 리(鯉:孔子의 아들.孔子가 일찍이 혼자 있을 때 鯉가 主唱하여 뜰을 지나니 孔子가 묻되“詩를 배웠느냐 하였다)야 있지마는 언덕에 난(難)을 구할 영(영:척령(척령)할미새는 兄弟에 비한다.詩經에 兄弟를 할미새에 비하면“할미새 언덕에 날듯이 兄弟는 환난(患難)을 서로 구하네”라는 귀절이 있다)누가 보리 애달퍼라 맑은 인품 찾을 길이 없으니 수풀에 가득한 가을빛을 차마 못보리”라 하였다. 배위(配位)천안 전씨(天安 全氏)는 대제학공 신(大堤學 公信)의 따님이고 아들은 고려말에 대제학(大堤學)을 지낸 천(藏)이다.. 서제공 한 천(恕齋公 韓 藏) ?~태종3년(1403) 11세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 악(渥)의 손자로,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대순(大淳)의 아들이다.1365년(공민왕 14)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 (古賦)로 민안인(閔安仁)등 55인,십운시(十韻詩)로 임 한(林 翰)등 41인을 뽑았으며,1371년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었다.1391년(공양왕 3)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이듬해 예문관 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瓚)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유배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후 1393년(태조 2)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장관공신녹권(張寬功臣錄券에 실려 있음)이 되어 원종공신전(功臣田)15결(結)과 노비(奴婢)2명 을 받았다. 1400년(정종 2)권 희(權 禧)등과 함께 판삼사사로 치사(致仕)하였다.그리고 1403년(태종 3)검교시중(檢校待中)으로 졸하였다. 배위(配位)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대제학 진(大堤學 진)의 따님으로 무후(无后)이다. 평간공 한 공 의 (平簡公 韓 公 義) 충렬왕33년 1307~공민왕14년1365 10세 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으로 자는 의지(宜之)요 호는 백당(相堂)이니 충혜왕묘 배향공신(忠惠王墓 配享功臣)인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사숙공 악(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思肅公 渥)의 둘째 아들이요 제학 사기(提學 謝奇)의 손자이다.처음에 선조(先祖)의 음보(陰補)로 녹남부사(錄南部事)가 되었더니 일씩이 충혜왕의 신임을 받아 계급을 초월하여 호군(護軍)에 제수(除授)되고,여러번 승진하여 대호군 (大護軍)·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천품이 안정하여 함부로 망동(妄動)하지 않으므로 세상을 좌우하는 집권층의 비위에 거슬려 전주목사(全州收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善政)을 베푼 공을 인정받아 충목왕 (忠穆王)때 소부시(小府寺)·위위시(衛尉寺)·선공시(繕工寺)의 판사(判事)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어 충정왕(忠定王)때 대언(代言)에 발탁되었는데 왕이 손위(遜位)하던 날에 백마산(白馬山)아래로 달려가서 음식물을 바치고 사사로이 사람에게 말하기를,“임금과 신 하는 모름지기 시종(始終)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니,공민왕(恭愍王)이 충성(忠誠)이 있다 하여 그 재능을 오래 시험하고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시행하면서 公을 신임하고 드디어 산기상시(散騎常待)에 임명하였다.얼마 후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는데 송사처리(訟事處理)가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좋아하고 원망하는 말이 없어졌다. 공이 조정(朝廷)에 있을 때 관리(官吏)가 성안(成案)을 가지고 와서 결재를 청하면 그 중에 옳지 못한 것을 보았을 경우 반드시 반복하여 그 뜻을 보인 뒤에야 서명하였으 니 그 치밀한 성품이 이와 같았다. 공민왕 13년(1364)11월,벌써부터 거론되어온 이듬해 원(元)나라 황제를 하례할 정조사절(正朝使節)의 결정을 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 재신(宰臣)들이 입대(入對) 하여 말하기를,“지금 원나라 승상(丞相)이 궁전 뜰에서 개갑(鎧甲:투구와 갑옷)으로 천하를 호령하여 조근(朝觀:朝見)이 타일에 비할 바 아니니 선들은 실로 이에 보낼 사람의 적격자(適格者)를 선정하기 곤란하오니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하니 그날 로 전지(傳旨)가 내리기를,“한공의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하고는 그를 불러들여 친히 보고 유시(諭示)하기를“정유년(T西年:1357)에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 무난히 잘 갔고,오는 데도 잘못되었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짐(朕)은 가상(嘉尙)히 여겨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이제 공이 또 가되 공정히 할지어다 하니,세 번 절하여 사례하면서 말하기를,“신과 같이 불초(不肖)한 자가 추부(樞府)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사옵고 다른 아무런 재능이 없사와 성은(聖恩)의 만분지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터 이온 즉 어찌 감히 사명(死命)으로 가는 것을 피하오리까 하고 유시를 받들고 11월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원나라에 가서 하정(賀正)하고 다음 해 초 돌아오니 과연 왕의 뜻에 상부(相副)한 바 있었다. 그후 밀직사(密直事)가 되고,얼마 안되어 삼중대광 보조공신(三重大匡 補祚功民)에 책훈(策勳)되고,6월에 청성군(淸城君)으로 봉(封)해졌다. 이 때 왕은 신돈(辛旽)에게 국정(國政)을 맡기고 가로되,“사(師)는 짐(朕)을 구(救) 하고 짐은 사를 구하여 사생(死生)간에 이것으로 사람의 말에 미혹(迷惑)함이 없을 것 을 불(佛)과 천(天)은 증명하리라”하고,함께 국정을 의논한 바,신돈이 용사(用事)한 지 3개월에 대신들을 참소(讒訴)하여 영도첨의 이공수(領都僉議 李公遂),시중 경천흥 (待中 慶千興),밀직 한공의(密直 韓公義)등 여러명을 파직케 하니,그가 봉군되던 14년(1365)6월의 일이었다. 公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래지 않아서 다시 기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병환 으로 이 해 겨울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9요 시호(諡號)는 평간(平簡)이다. 장차 12월 갑신일(甲申日)에 임진현 서곡(臨律縣 瑞谷)남쪽 산기슭에 장사(葬事)하려 하는데 큰 아들 수(修)와 세째 사위 염흥방(廉興邦)이 이색(李穡)을 찾아가 묘명(墓銘)을 구하니,“공의 아들과 사위는 다 나의 벗이다 벗의 아버지의 묘에 명(銘)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하고 드디어 묘명(墓銘)에 이르기를,“공은 자상(慈詳) 근검(動檢)하였고 일체의 행동을 예법(禮法)에 따라 하였으며 마음 속에 온축(蘊蓄: 마음속에 깊이 쌓아 둠)한 포부를 펴지 못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구(才具)로서 하루도 국정을 전담(專擔)함을 얻지 못한 것은 역시 하늘의 뜻인 것이다.그러나 비록 몸에는 버릴만한 행실(行實)을 가려낼 수 없고 아들을 가르쳐서 모두 출세시켰으며 죽은 뒤에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족히 그 뒷 세상에 전할 것이 니 또한 가히 유감(遺憾)이 없을 것이다”하고 명(銘)하기를“제학공(提學公)의 손자요 사숙공(思肅公)의 아들로서 어질고 후한 그 형제들이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도 다.公이 총능(聰陸:忠惠王)을 섬겨 시종 한결같음이 있으매 금상(今上:현재 王位 에 있는 임금)은 그의 충성을 묻지 않고 먼저 재능을 시험하였다.두 번 원나라에 가서 조근(朝觀)하고 돌아오니 마음에 들게 하였다고 반드시 칭찬하셨다. 이에 여러 사람들은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공은 물러가고 말았다. 이때의 높은 공도 이보다 더할 리 없었거늘 필경 이에 그치고 말았으니,누가 저 하 늘의 이치를 징험(徵驗)할 것인가?내 여기서 시를 지어 이것을 오는 세상에 물으리라 하였다. 공은 4대임금을 섬기면서 오직 충성을 다하였으니 세인들은 희세(稀世)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배위(配位) 청주 경씨(淸州 慶氏)는 대언 사만(代言 斯萬)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후덕 부사 문경공 수(判厚德 府事 文敬公 脩) 와 이부상서 충간공 리(吏部尙書 忠簡公 理), 호부판사 제(戶部判事 濟) 이다. 公이 공민왕 14년(1365)10월에 졸(卒)하여 동년 12월에 임진현 서곡(臨津縣 瑞谷:長湍郡 津東面 瑞谷) 남쪽 산록(山麓)에 장사(葬事) 하고 목은 (牧隱) 이색(李穡)이 비문을 지어 묘비(墓碑)를 세웠으나 오랜 풍상(風霜)을 거치고 난세병화(亂世兵禍)로 퇴멸(頹滅)되어 1993년 청명절(淸明節)에 개수(改竪:다시세움) 하였다.배위(配位) 청주경씨(淸州慶氏)는 공과 합폄이다.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세곡 . 문경공(유항공)한 수 (文敬公(柳巷公) 韓 脩) 충숙왕2년(1333)~우왕10년(1384) 11세 公은 고려의 문신이다.휘(諱)는 수(脩)요 자(字)는 맹운(孟雲)이요 호(號)는 유항(柳巷)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밀직사(密直事)를 지낸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의 아들이며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사숙공 악(思罵公 渥)의 손자이다.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목은 이 색(牧隱 李 穡)과 대귀(對句)하였다.충목왕(忠穆王)3년(1347)이색의 부(父)이곡(李穀)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공 (公·脩)을 과거에 뽑으니 15세였고 사람들이 다 놀랐다.문음(門蔭)으로 진전직별장 (眞殿直別將)을 지내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경전(經典)을 배우고 좌전사한(左傳史漢) 을 읽고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써서 묘경(妙境)에 이르렀다.충정왕(忠定王)때 정방 팔도치(政房 必 치)에 임명되고 왕이 손위(遜位:임금이 자리를 사양하여 내놓음)하고 강화(江華)로 쫓겨날때 시종(待從)하였다.공민왕(恭愍王)2년(1353)전의 주부(典儀:主簿)와 팔도치가 되고 전리좌랑(典理住郞),성균사예(成均司藝),비서소감(秘書少監),국자좨주(國子祭酒)등을 지내고 공민왕 10년 (1361)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을 안동(安東)으로 호종(扈從:王駕를 모시고 감)하였으며 다음 해 위계(位階)가 중정대부(中正大夫)에 이르렀다. 이듬 해 환경(還京)한 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공민왕 14년(1365)왕에게 신돈(辛旽)이 바른 사람이 아니니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義判書)로 폄직(貶職:職을 낮춤)되었으나 곧 물러났다.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쳤으나 신돈의 직언(直言)때문에 임용되지 않았다. 동왕 20년(1371)선돈이 주살(誅殺)되자 왕은 公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 하여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에 발탁하고 곧 승선(承宣)에 임용됨으로서 전선(銓選)을 관장 하게 하였다.우왕(禑王)원년(1375)밀직제학,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 에 관련한 한 안(韓 安)의 친척이란 이유로 일시 유배(流配)되었으나 동왕 4년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대제학(大堤學)이 되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음 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지고 중대광(重大匡)이 되었다.우왕(禑王)9년 (1383)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宰相)에 이르고 다음 해 졸하니 나라에서 시호(諡號) 를 문경(文敬)이라 내려 公의 학식과 행의(行儀)를 세상에서 중(重)히 여겼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여 명나라까지도 이름을 떨쳤으며 왕희지(王羲之:품의 名筆家)를 이었다고 했다.공의 아들인 출척사(黜陟使)상질(尙質)이 한산군(韓山君)이색(李穡)에게서 묘지명(墓誌銘)을 받았는데 묘명에 이르기를 “옥병(玉甁)에 넣은 어름처럼 공(公)이 청아(淸雅)하고 먼지 낀 갑(匣)속에 거울처럼 공이 밝다. 公은 호화롭게 자랐으나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시서(詩書)만 즐겼으며 아무리 적더라 도 이곳에는 마음을 끊고 효성(孝誠)과 우애(友愛)와 충성(忠誠)과 신의(信義)와 청렴 (淸廉)과 관용(寬容)과 화목(和睦)을 일삼았으므로 의당 수(壽)를 누려야 했을 것인데 하늘이 그만 앗아갔으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아드님들이 재주도 있고 미행(美行)도 있으니 公의 명성(名聲)이 전하여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그 부자의 묘지명을 지으니 어찌 마음이 슬프지 않으랴!그 여운(餘韻)이 영원히 전하여 자손들이 번창하기 바란다.” 이는《고려 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도 실려 있다.유필(遺筆)로는 노국대장 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경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신륵사보제전사사리석종비(新勒寺普濟禪師舍利石鍾碑)등은 유명하다.배위(配位)는 정녕택주 안동 권씨(靜寧宅主 安東 權氏)로 길창부원군 적(吉昌府院君 適)의 따님이며 아들은 부윤공 상환(府尹公 尙桓)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참판공 상덕(參判公 尙德)이다. 公은 고려 우왕(高麗 禑王)10년(1384)졸(卒)함에 서곡리 세곡자좌(瑞谷里 細谷 子坐)에 안장했고 배위 정녕택주 안동 권씨(配位 靜寧宅主 安東 權氏)와 쌍조(雙兆)이다. 시초에 세운 묘비가 퇴훼(頹毁)되었는데 公의 5대손 청백리 효헌공 형윤(淸白吏 孝憲公 亨允)이 약 475년 전에 전향우측(前向右側)그리고 공의 12대손 금천군수 숙(金川郡守 塾)이 약 290년 전에 전향좌측(前向左測)에 세운 단갈비(短碣碑)가 현존하고 있으며 1993년 청명절(淸明節)에 여섯 자(6尺)크기의 묘비를 개수(改竪)하였다.효헌공(孝憲公·亨允:副正公(절)의 아들)은 文襄公 繼美의 손자이며 公의 5대손 으로 중종(中宗)27년(1532)에 졸했다. 중종 중기~후기(中期~後期)로 추측(推測)되는 해(약 475년전)에 문경공(文敬公: 修)의 묘비(墓碑,短碣碑)를 전향우측(前向右測)에 초서(草書)로 썼다.석질(石質)은 화강석(花崗石)이다. 송월당 숙은(松月堂:塾)五奎의 아들이요 혜(惠)의 손자로 夷襄公(明진)의 9대손이 며 公의 12대손으로 숙종(肅宗)36년(1710)졸.금천군수(金川郡守)로 있을 때(約 290年 前)효헌공 형윤(孝憲公 亨允)이 세운 비의 비문이 마소(磨消)상태에 이르니 새로 전향좌측(前向左測)에 같은 크기의 단갈비(短碣碑)를 세웠으며 문경공(文敬公: 脩)의 둘째 아들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의 단갈비도 같은 크기로 같은 연대(年代)에 세웠다.모두 석질(石質)은 화강석(花崗石)이다.고려 재상 문경공 수(高麗 宰相 文敬公 修)와 배위 정녕택주 안동 권씨(配位 靜寧宅主 安東 權氏)의 묘비를 1993년 청명절(淸明節)에 여섯 자(6尺)크기로 개수(改竪)하였다.아들 四兄弟 中 둘째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은 경신과(庚申科 1382)3인에 셋째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은 임술과(壬戌科 1382)3인에 넷째 참판공 상덕(參判公 尙德)은 을축과(乙丑科 1385)9인에 합격하니 국제(國制)에 따라(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모친(母親)은 종신(終身)토록 나라에서 녹(祿)을 주게 되어 있다)公의 配位를 정녕택주(靜寧宅主)에 봉(封)하고 종신(終身)토록 녹(祿)을 내렸다. 문경공 수(文敬公 脩)의 장인 권 적(權 適)은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삼중대광길창군(三重大匡吉昌君)에 봉(封)해 졌다.장모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그의 부는 추충보절익대공신(推忠保節翊戴功臣)이었는데 유항공(柳巷公:文敬公)께서 정당문학예문관제학(政堂大學藝文館提學)때 글씨를 썼다.공민왕 12년(1363)경 원운(原韻)을 차운(次韻)하여 목은 이색(牧隱 李 穡)선생에게 화답함 1.남쪽 변방은 오랑캐와 인접하고 있어 먼 송경(松京:開城)과 소식이 끊기고 있도다. 저는 살아서 유항(柳巷)으로 돌아왔는데 어찌 이 폼에 헛 명예가 있기를 바라리요. 2.보다 기쁜 것은 공께서 우리 이웃에 사시어 저는 세상을 등지고 당신을 따랐도다. 우리 마을은 찾아오는 속객(俗客)도 없어 구름 덮힌 산들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도다. 神勒寺普濟禪尊者 石鍾碑(寶物第229號) 位置:京畿道 驪州郡 北內面 千松里 山282 神勒寺 境內 나옹(懶翁)은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인데 지공(指空)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수덕을 많이 쌓은 세사람의 승(僧))인데 신라 때의 절(寺)인데 신륵사 (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한 나옹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墓搭)으로서 이 석종(石鍾)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石燈)이 있고 우측에 탑비(塔碑)가 있어 사역(寺域)의 서 북방 남한강(南漢江)이 굽어 보이는 이 언덕 일대(一帶)가 묘역으로 정해졌다.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229호)는 고려 우왕(禑王)5년(1379)에 건립된 것으로 회색의 대리석으로 세워졌는데 목은(牧隱)이 색(李 穡)이 글을 짓고 문경공 수(文敬公:柳巷公· 脩)이 이 글씨를 썼다. 석종비는 나옹대사의 생애와 사상 등의 기록을 목은(牧隱)이색(李穡)이 찬하고 문경공(文敬公 韓 脩)이 글씨를 썼는데 높이 1.2m 폭 61cm로 앙연(仰蓮)과 복연안상(覆蓮 眼像)을 새긴 기단(基壇)위에 세워진 비석이며 두공양식(枓拱樣式)을 새긴 개와(蓋瓦) 를 본뜬 옥개석(屋蓋石)을 덮고 있으며 지금도 나옹대사의 묘비문은 선명(鮮明)한 편이다. 양주 천보산(天寶山)하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 충숙왕(忠肅王)15년(1328) 인도(印度)의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한다.이곳의 부도(浮屠:이름난 중 즉 지공대사의 사리나 유품을 안치하여 두는 둥근 돌 탑으로 절 근처에 설치) 는 선사(禪師)의 묘탑(墓搭)으로 이의 앞에 절과 선사의 유래를 표상(表象)하는 탑비를 세웠는데 문경공(文敬公 韓 脩)이 글씨를 썼다.약 600여 년이 지났어도 글씨가 선명함이 특이하다.화면은 부도가 제일위에 있고 석등 앞에 탑비가 우뚝 서 있다. 고려 때 유항공(柳巷公·韓 脩)은 아우 충간공(忠簡公·理)이 광주(光州)에 좌천되었을 때 시(詩)를 지어보냈다. 보낼 때 일찍이 서리 올까 걱정 했더니 지금 벌써 꽃잎이 반이나 떨어졌네.하늘가에 소슬히 지내는 자네 어느 때나 모여서 효성(孝誠)을 함께 해볼까?하였다. 文敬公(韓 脩)묘: 位置:京畿道 坡州市 津東面 瑞谷里 細谷子坐. 歲享日:淸明日.유황선생의교서와문집의서 부윤공 한 상 환 (府尹公 韓 尙 桓) ?~태종조 12世 公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다.휘(諱)는 상환(尙桓)이요.초휘(初諱)는 우복(佑復)이 고 자는 백환(伯桓)이다.판후덕부사 문경공 수(判厚德府事 文敬公 脩)의 큰 아들이요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의 손자이다.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조선 태조(太祖)초 간관(諫官:司諫院,司憲府의 官史)에 이르렀다. 태조 4년(1395)3월 18일의 언록(言錄)에 임금이 장차 평주(平州),온천(溫川)에 거동하려 하므로,간관(諫官)한상환(韓尙桓)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신등은 전하께서 장차 온천에 거동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온데‘병을 고치려고 하시는 것이오니 중지하시기를 바랄 수는 없사오나,신등은 생각하옵건대‘온천이 신도 (新都)에서 3백여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황무한 들판에서 연(輦)을 멈추어야 하오니,병을 고치는 방법에도 좋지 못할까 하오며,더구나,농사철이 한창이온데, 거동하시는 곳마다 아무리 간략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임금이 장무(掌務)인 보궐(補闕)윤수(尹須)를 불러 말하였다. “이번의 거동은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다만 민폐만 말하고 내 병은 걱정하지 않으니,무슨 말이냐?”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이 해 5월 18일 간관(諫官)한상환(韓尙桓)등이 군대를 강하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요점(要点)을 올려서 말하였다. 태종 15년(1415)한성부윤(漢城府尹)그리고 상의의정부사(商議議政府事)에 이르렀 다.배위(配位)파평윤씨(坡平尹氏)는 충간공 승순(忠簡公 承順)의 따님으로 이녀(二女)를 두었으나 아들은 없다. 예문관대제학 문열공 한 상 질 (藝文館大提學 文烈公(韓 尙 質)?~정종2년(1400) 12세 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휘(諱)는 상질(尙質)이요 초휘는 선복(善復)이고 자는 중질(仲質),호는 죽소(竹所)이다.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문경공 수(文敬公 脩) 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길창군 권 적(吉昌君 權 適)의 따님이다.그리고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의 손자이다.일찍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공민왕 23년(1374)대군시학(大君侍學)을 거쳐 우왕 (禑王)6년(1380)좌랑(佐郞)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그후 요직을 거쳐 형조판서(形曹判書)에 오르고 그 해 상소하기를 지금 대성(臺省)에서는 대간(臺諫)들이 언사(言事)로 외부에 폄출(貶黜:모략하여 벼슬을 떨어뜨림)되어 있으니 청컨대 이들에게 경관(京官)을 주어 언로(言路)를 여소서 하였다.그 후 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등을 역임하였다.공양왕(恭讓王)2년(1390)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 이(尹 彛),이 초(李 初)의 무망(誣忘)을 변명하고 돌아와,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 兼 兵馬節度使)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 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하여 명 나라에 가서 국호의 결정을 요청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이듬 해 2월 에 돌아왔다.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 에 모여 국호를 의논하였는데,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단군·기자·위 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이라는 두 개의 칭호를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품의한 결과,‘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선정하였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 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하였으나, 조선측에서 생각하는‘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의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명 군주(受命君主)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時祭)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이 공으로 전지(田地)50결(結)을 하사(下賜)받았다.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이 해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가 되었으나 정종(定宗)2년(1400)1월 10일 졸하니 예장(藝葬)하고 시호(諡號)를 문렬(文烈)이라 내리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창화군부인 경주 이씨(昌化郡夫人 慶州 李氏)는 충렬공 성림(忠烈公 成 林)의 따님이고 창화군부인 청주 송씨(昌化郡夫人 淸州 宋氏)는 도사공 신의(都事公 臣議)의·따님이다.아들은 감찰공 기(監察公 起)이고 손자는 충성공 명회(忠成公 明澮)와 이양공 명진(吏襄公 明진)이다.公은 정종(定宗)2년(1400)1월 10일 졸하니 서곡리 남록(瑞谷里 南麓)에 안장하였다.상묘(上墓)는 배위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配位 昌化郡夫人 慶州 李氏)묘이고 하묘(下墓)는 公과 배위 창화군부인 청주 송씨(昌化郡夫人 淸州 宋氏)묘인데 십이지신상 (十二支神像)의 고려 고분벽화(高麗 古墳壁畵)로 장식(裝飾)되었다.약 290년 전에 금천군수 숙(金川郡守 塾)이 세운 단갈비(短碣碑)가 퇴훼(頹毁)상태에 이르니 종의(宗議)에 따라 묘비를 개수(改竪)하기로 하고 1997 년 4월 5일에 세웠다.상석(床石)도 큰 것으로 교체하였다.1950년 6.25전란이 휴전됨에 따라 공의 묘역은 민통선(民統線)내에 있게 되고 출입이 금지(禁止)되었으나 1980년 4월 5일 민통선 출입의 완화로 종인들이 성묘(省墓) 하기에 이르니 묘가 도굴(盜掘)되고 부장묘(副葬墓)로 알려진 하묘(下墓)에서 아련히 벽화(壁畵)가 보였다.모든 절차(節次)를 거쳐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에서 1991 년 4월 10일 이 묘를 발굴(發掘)하니 석실(石室)내부의 길이 2.82m,넓이 1.18m, 높이 1,35m의 무덤은 고려양식인 횡구식(橫口式)이며,중앙(中央)에 주인 좌상(坐像) 을 좌우에 각각 5인의 인물입상(人物立像)과 입구의 낮은 벽엔 시종(侍從)으로 보이는 인물입상을 배치(配置)하고 관모(冠帽)위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천정(天井)엔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삼태성(三台星)의 성숙도(星宿圖)가 묘사조각(描寫彫刻)되어 있고 앞가리개가 특이(特異)하며 색채(色彩)와 조각 등이 선명(鮮明)하였다.고증작업(考證 作業)과 모사(模寫)를 마치고 동년 8월 28일 봉분(封墳)을 마쳤다.상묘(上墓)도 확인 하였다. 화상찬(畵像贊) 양촌 권 근(陽村 權 近:文烈公 尙質의 外從叔)이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의 화상 (畵像)에 대하여 찬(贊)하기를 역문(譯文) 정당한공(政堂韓公)은 국초(國初)에 천자(天子)에게 들어가 아뢰어 나라의 칭호(稱號)를 변경(變更)할 것을 청(請)하여 조선(朝鮮)이라는 좋은 칭호를 얻은 사람이다.지금 그의 화상(畵像)을 보고 다음과 같이 경건(敬虔)히 찬(贊)을 짓는다.옥처럼 깨끗하고 대처럼 굳은 절개(節介)하늘에서 타고난 바탕이요 학문(學文)으로 닦은 덕(德)이로다.푸른 머리로 재상(宰相)이 되었으며 조정(朝廷)에 충심(忠心)을 바쳤도다.은혜(恩惠)는 백성(百姓)에 미쳤고 공적(功績)은 나라에 남아 있도다.영민(英敏)한 그의 명성 (名聲)과 거룩한 그의 공적은 조선이란 좋은 칭호와 함께 영원(永遠)히 남으리.천계(天界)를 나타내는 커더란 원(圓)이 표현(表現) 되어 있고 그 안쪽에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삼태성(三台星),북극성(北極星),이 묘사(描寫) 되어 있으며 북두칠성의 좌우(左右)에는 두 무더기 구름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외 깊은 뜻이 담겨져 있으나 약하다. 당초(當初)에 공의 묘비가 있었다고 전하나 장구(長久)한 세월과 난세병화(亂世兵禍)로 없어지니 약 290년 전에 공의 11대손 금천군수 숙(金川郡守 塾)이 단갈비(短碣碑)를 세웠 다.전면은 문렬공 한상질지묘 (文烈公 韓尙質之墓)로,후면 은 사적(事績)을 292자로 각 자(刻字)하였다.문경공 수(文敬公 脩)의 단갈비도 같은 연대(年代)에 세웠다고 전한다. 公이 정종(定宗)2년(1400) 1월 10일 졸함에 서곡리 남록 (瑞谷里 南麓)에 예장(藝葬)하였다.묘비(墓훌碑)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다고 전(傳)하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과 난 세병화(亂世兵禍)등으로 퇴훼 (頹毁)되어 없어지고 약 290 년 전에 금천군수 숙(金川郡守 塾)이 세운 단갈비(短碣碑)도 퇴훼 상태에 이르니 1997년 4 월 5일 중앙종친회 상임고문 상대 찬(相大 撰)과 서울대학교교수 문학박사 상갑 서(相甲 書)로 후손이 세우고 상석(床石)도 개수(改竪)하였다.당초(當初)에 신도비가 있었는데 다음의 글이 있었다고 전한다. 부모 덕에 의존하여 살아온 버릇,임금님의 신임 또한 얻을 길 없어,벼슬길에 나가 는 것이 달갑지 않아, 단념하자 망설임도 진정인가봐. 한공께서 이태조와 서로 만나니, 문무겸비 그 임금에 그 신하로다.효도없이 그 충성이 어찌 있으며, 총애없이 그 은덕 을 어찌 얻으리. 효와 충과 은애로써 누린 부귀가 장하도다. 누구와도 견줄 이 없어, 물도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 높은 자리 위험한 것 알고 있지만,공의 경우 이 들과는 본시 판이하여, 멸사봉공 극기복례(克己復禮:제 욕심을 누르고 예의 범절을 쫓음) 견지하면서,임을 향한 일편단심 뜨거운 불 길,만만세가 지나가도 변함없으리. 이 명문을 돌에 새겨 신문에 세워 영원토록 후인에게 알려드리오.(이의 傳文이나 古老들의 傳說을 探求하며 記迷하며 日後의 博識君子의 考按이 있기를 바란다.) 묘: 位置:京畿道 坡州市 津東面 瑞谷里 南麓(山112) 歲享日:淸明日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남록 산112 사헌부 감찰공 한 기(監察公 韓 起) 13세 公은 조선조 태조(太祖)2년(1393)에 출생하였다. 문렬공 상질(文烈公 韓尙質)아들이고 판후덕부사 문경공 수(判厚德府事 文敬公 脩) 의 손자이다.문음(門蔭)으로 공신도감녹사(功臣都監錄事)에 제수(除授)되고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과 승의랑사헌부감찰(承議郞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세종(世宗)11년 (1429)37세로 졸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오른 아들 명회(明澮)의 봉증(封贈)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 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사상당부원군(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上黨府院君)이다. 배위(配位)증정경부인 여주 이씨(贈貞敬夫人 驪州 李氏)는 제학공 적(提學公 적)의 따님이며 아들은 충성공 명회(忠成公 明澮),이양공 명진(夷襄公 明진)이다. 公은 세종(世宗)11년(1429)37세로 졸하니 신곡동 둔야미(新谷洞 芚夜味)에 혼자 안장(安葬)되었다.전향(前向)묘의 35m 우하측(右下側)에 묘표(墓表)인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공이 졸할 시는 큰 아들 명회(明澮)는 나이가 어렸다. 약 55여년 뒤인 성종(成宗)16년(1485)통정대부예조참의지제교(通政大夫禮曹參議知製敎)이숙감 찬(李淑감 撰)으로 아들 상당부원군 명회(上黨府院君·明澮)입표(立標)이다.배위(配位)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贈 貞敬夫人 羅州 李氏)는 2남 1녀를 생하여 다 출세(出世)시키고 졸하니 의정부시 용현동 세곡 후등 건좌(議政府市 龍峴洞 細谷 後嶝 乾坐)에 홀로 안장(安葬)되였다.묘표(墓表)인 신도비(神道碑)는 묘의 전향(前向)35m 우하측(右下側)에 있다. 公의 배위 증정경부인 여주 이씨(配位 贈貞敬夫人 驪州 李氏)의 신도비(神道碑)는 수충정사공신정헌대부여주군이몽가(輸忠靖社功臣正憲大夫驪州君李蒙哥)찬(撰)이고 아들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明澮)입표(立標)이다. 충성공 한 명 회 (忠成公 韓 明 澮) 태종 15년 조선 태종1415 ~ 성종 18년 1487 14世 公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태종(太宗)15년(1415)에 태어났다.자는 자준(子濬)호 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감찰공(監察公 起)의 아들이오 문렬공 상질 (文烈公 尙質)의 손자이다.일찍이 부모를 여윈 후 종조부(從祖父)인 상경(尙敬)과 상덕(尙德)에게 의지하여 자랐는데 항상 비범한 인재(人材)로 생각했고 자라면서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과 길창군 권 람(吉昌君 權 擥)과 교우(敎友)하였다.문종(文宗)2년 (1452)경덕궁직(敬德宮直)에 나가니 38세 때였다.문종 다음 단종(端宗)은 나이 어리 고 김종서(金宗瑞)의 세력이 조심스러울 때 권 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초청을 받아 공과 함께 반정(反正)의 뜻을 꾀하였다. 公은 무사(武士)인 홍달손(洪達孫)등 30여 인을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단종 1년(1453)계유정난(癸西靖難)때에는 수양대군의 심복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서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수충위사 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 協策靖難功臣)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고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고 그 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세조 2년(1456)성삼문(成三問)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데 공이 있어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오르고 왕곁에서 정사(政事)를 도우니 왕은 나의 자방(子房)이라 하였다.이듬 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동왕 5년(1459)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지내고 동왕 7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이듬 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권람,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치정에 크게 기여하였다.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 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피체,신문을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같은 해 남이(南治)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1등에 책록되고,1469년(예종1)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으며,이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성종(成宗)2년(1471)좌리공신(住理功臣)1등에 책록되고 그해 영춘추관사로서 최 항(崔恒),신숙주 등과 함께《세조실록》을 완성하였으며,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하였고,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하여 경사(經史)관계의 서책을 많이 인출하여 비치하게 하고 사재(私財)를 많이 내놓았다. 동왕 14년(1833)세자책봉(世子策封)을 주청하고 연경(燕京)에 갈 때 69세였으니 명황제는 노한(老韓)이 다시 오셨다고 환대하였다.다음 해 70세로 사임하려 해도 윤허하지 않고 궤장(궤杖)을 하사하였다. 동왕 18년(1487)환후(愚候)가 심하니 왕은 어찰(御札)을 보내 위로케 하고 도승지 (都承旨)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음에“성왕(聖王)께서는 모든 왕보다 뛰어나시니 밝은 성대(聖代)를 떠나게 되어 오직 이를 못잊을 뿐이라”하였다.끝내 운명(殞命)하 니 향년(享年)이 73세였다.왕은 부제(賻祭)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충성(忠成)이라 하였으며 세조묘(世祖廟)에 배향(配享)되었다.아들은 낭성군 보(낭城君 堡)외 여러분 이고 딸 둘은 장순왕후(章順王后)와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公의 배위(配位)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는 증 우의정 대생(贈 右議政 大生)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생하니 남 보(堡)는 좌리공신에 낭성군(낭城君)이요 여장은 봉례 신주(奉禮 申주),차는 영천군 윤 번(鈴川君 尹 磻),차는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비)니 공릉(恭陵)에 안장하고 차는 공혜왕후(恭惠王后:성종비)로 순릉(順陵)에 안장하였는데 모두 홀로이다. 公은 성종 18년(1487)11월 14일 졸함에 철조(轍朝:政事를 휴무함)하고 조제(弔祭)하여 예장(禮葬)하기를 전례(前例)와 같이하였다.다음 해 1월 11일 장명등(長命嶝)임좌병향(壬坐內向)에 안장하였다.이 해 11월 16일 좌승지(左承旨)한 언(韓 堰)이 왕에게 아뢰기를 백부(伯父)한명회의 상장(喪葬)에 수용(需用)되는 바는 국가에서 이미 갖추어 주었으니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다만 백부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죽은뒤에 반드시 평생의 일을 기록하여 묘곁에 돌을 세워서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누대 (累代)의 은총(恩寵)을 지극하게 받은 것을 보게 하라 하였습니다.그런데 비석을 운반 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경유(經由)하는 여러 고을에서 운반하게 하라 하였다.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빈소에 제사(祭祀)하니 부의(賻儀)를 많이 내리라 하였다.왕(王)이 평소에 공(公)에게 사패지(賜牌地)를 내리고자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황려부 부인 민씨(黃驪府 夫人 閔氏)가 성종 21년(1490)1월 28일 졸한 후 성종 23년(1492)4월 3일 노비(奴비)8구와 전지(田地)60결(結)을 사급(賜給)하였다.아들 낭성군 보(낭城君 堡)가 이를 이었다.황려부부인 민씨의 묘는 상조(上兆) 인데 성종22년(1491)6월에 입비(立碑)하였다. 선도비(神道碑)가 풍화작용 (風化作用)으로 마멸(磨滅)되어가니 문화재(文化財)를 보호하기 위해 천안시(天安市)에서 1997년 10월 비각(碑閣)을 세웠다. 신도비의 비각을 세우기 위해 비 2m 사방(四方)을 파니 동(東)쪽에서 지석(誌石)이 나 왔는데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하절(夏節)에 왕세자를 왕(王)께서 허락(許諾)하여 온양천(溫陽泉)에서 목욕하고 제주정(濟州亭)에서 왕세자(王世子·世祖)를 전송하고 길주(吉州)의 이시애(李施愛)의 반역(反逆)을 선동(煽動)하여 살해(殺害)하고 모든 백성(百姓)이 유언(流言)비어를 만들어 공(公)을 모함 했으나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의 고명(高明)함을 의심치 아니하고 난(亂)이 평정(平定)되어 이미 끝나 주상(主上)께서는 무고(誣告)가 거짓임을 알게 되어 용서하시고 친(親)히 어찰(御札)을 보내오셨다. 공(公)의 충섬(忠心)을 하늘도 알고 주상(主上)도 알았으니 크게 기뻐하셨다. 공의 배위(配位)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는 공묘의 상조(上兆)에 안장(安葬)하고 다음 해(1491)6월에 입비立碑)하였다.(황려(黃驪)는 고려 초의 여주(驪州)의 이름이다.) 신도비는 성종(成宗)19년 (1488)5월 일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이 찬(撰)하여 입석(立石)하였다.공 묘의 우측 30m 되 는 곳에 있다. 신도비는 1994년 11월 4일 충청남도 문화재(忠淸南道 文化財) 제332호로 지정(指定)되고 천안시 (天安市)에서는 비각(碑閣)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공의 사당(祀堂)인 부조묘(不 廟)를 1938년에 서천 주항 종중 (舒川 酒缸 宗中)에서 건립하고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음 11월 13일(忌日)향사하여 왔으나 거리 관계로 운영이 어렵더니 1993년 7월 28일 충성공파 총회에서 공묘 장명등하에 충성공 사당 건립을 결의하고 1995년 11 월 29일 준공식(竣工式)을 갖게 되니 본당(本堂)은 25평이고 부속 건물이 10평이다. 건축재원은 전국직방계손(全國 直傍系孫)의 헌성(獻誠)에 의했다.사명(祀名)은 충모사(忠慕祀) 로 하였다.그 외 묘역정화(墓域 淨化)등 모두를 충성공파 회장 희현(忠成公派 會長 喜炫)이 주관 (主管)하였다. 墓:忠南 天安市 修身面 涑倉里 長命燈 歲享日:양 4月 6日,음10월 2일,음 11月 14日(卒日) 한 경 기(韓 景 琦)1472(성종 3)∼1529(중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 영의정 명회(明澮)의 손자이다.1489년(성종 2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대과에 응시하지 않다가, 할아버지 명회가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원훈(元勳)이었기 때문에 음보(蔭補)로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에 등용되어 그뒤 돈녕부정이 되었다.할아버지의 행적을 수치스럽게 여겨 요직을 회피하고 한직에만 머물렀다. 절의로 이름이 높은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 등과 어울려 시를 읊었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시명(詩名)이 높았으며, 저서로 《향설당시집》이 있다. 판윤공 한 억 호 (判尹公 韓 億 虎) ?~조선 숙종조 正憲大夫 漢城判尹(정헌대부 한성판윤)22세 공은 조선 숙종(肅宗) 때의 문신으로 휘(諱)는 억호(億虎)이다.증 통정대부 좌승지 단(贈 通政大夫 左承旨 단)의 아들이며, 판관공 의길(判官公 宜吉)의 손자이며, 양무공 교(襄武公 嶠)의 증손(曾孫)이다.유년(幼年) 부터 영민(潁敏)하여 15세에 경사(經史)에 능통(能通)하고, 문학(文學)에 숙달(夙達)하더니 일찍 문과에 급제하였다.크고 작은 여러 벼슬을 지내다 숙종조(肅宗朝)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한성판윤(漢城判尹 正二品)을 지내며 선정(善政)하니 백성(百姓)들의 마음이 편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의 붕당(朋黨:理解나 主義 따위를 함께하는 사람끼리 뭉친 당파 동아리) 상쟁(相爭)으로 연로(年老)에 향리(鄕里)로 돌아와 향학(鄕學)에 힘쓰다 졸하셨다.(年代 未詳)배위(配位)는 정부인 경주김씨(貞夫人 慶州金氏)이고, 아들은 참봉 언복(參奉 彦福)이다. 공이 숙종조(肅宗朝)에 졸하니 호서지남(湖西之南)에 진당산(鎭唐山)이 위연숭고(위然崇高)하여 보령(保寧)의 진(鎭)이 되었다.남(南)으로 일강지허(一崗之許)에 산수가려(山水佳麗)한 관창리 향양 명계 후록 자좌(寬昌里 向陽 鳴鷄 後麓 子坐)에 안장(安葬)하고 배위(配位) 정부인 김씨(貞夫人 慶州金氏)는 도원 인좌 (同原 寅坐)로 쌍조(雙兆)이다. 동묘역은 지세(地勢:今鷄抱卵.닭이알을 품고 이는 형국)로 인(因)하여 석물(石物)을 못 쓰게됨에 따라 자손들이 안타까워 했다.수 년 동안 종의(宗議)에서 거론(擧論)된 바 묘에서 한참 아래인 고속도로 위에 신도비(新道碑)를 세우자는중론(衆論)에 따라 1997년 5월에 그 숙원(宿願)을 풀게됐다.1997년 5월 양무공 십삼세손 성균관 전학 진호찬 (襄武公 13世孫 成均館 典學 震鎬 撰)과,서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서울大學敎授 文學博士 相甲 書)로 청주한씨 판윤공파 종친회(淸州韓氏 判尹公派 宗親會 竪立)이다. 이양공 한 명 진 (夷襄公 韓 明 진) 조선 세종8년(1426) ~ 단종2년(1454) 14세 公의 휘(諱)는 명진(明진)이요 자(字)는 영숙(盈叔)이다.감찰공 기(監察公 起)의 둘째 아들이고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의 손자이다.세종(世宗)8년(1426)에 태어나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선공녹사(線工錄事)가 되었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추충위사정난공신(推忠衛社靖難功臣)3등훈(勳)이 되고 계공랑(啓功郞)을 거쳐 전구서승(典구暑丞)에 올랐다.단종(端宗)2년(1454)8월 11일 29세로 졸(卒)하니 나라 에서 부의(賻儀)를 내리고 수양대군이 조제(弔祭)에 참석하고 벼슬을 올려 정헌대부병조판서(正憲大夫兵曹判書)에 서원군(西原君)을 봉(封)하고 시호(諡號)를 이양(夷襄)이라 하였다.배위(配位)고녕현부인 권씨(古寧縣夫人 權氏)는 문경공 제(文景公 제)의 따님이고 아들은 청평군 언(淸平君 堰)이다.초시(初諡)는 양도(讓悼)였는데 예종(睿宗)의 시호가 양도임에 성종(成宗)에 이르러 이양(夷襄)으로 개시(改諡)되었다.시법(諡法)에 안심(安心)하고 정숙(靜寂)을 좋아함을 이(夷),일에 따라 공(功)이 있음을 양(襄)이라 했다. 공이 단종 2년(1454)8월 11일에 졸하니 단종이 10월 양주 옹암리(楊州 瓮岩里.지금의 옥정리)에 장사를 내렸다.그후 장수(長壽)한 배위(配位)고녕현부인 권씨(古寧縣 夫人 權氏)와 합조(合兆)이다. 갑술년(서기 1454년) 8월 11일 에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졸하니 사람들이 다 알고 한숨 쉬며 애석해 했다. 세조가 조제에 친히 참석하고 魯山(노산: 단종)이 유사를 명하여 장사를 갖추어 10월에 양주 옹암리에 안장하니 정헌대부 병조판서 서원군을 증작하고 시를 이양이라 하였다.공이 소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우아하며 지기가 쾌활준수하며 총명이 범인에 뛰어나 한번 보면 기억하고 입지가 구차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다 기대하더니 마침내 크게 시용이 못되고 갑자기 이렇게 되니 오호 애통하도다.공이 좌찬성 권제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사헌부대사헌 언(司憲府 大司憲 堰)이요, 딸은 찬의 김맹성(贊儀 金孟誠)에 출가하였다.대사헌의 장남은 군수 홍윤(郡守 弘潤)이요, 둘째는 별좌 홍택(別坐 弘澤)이요, 셋째는 선전관 홍주(宣傳官 弘澍)요, 넷째는 사직 홍연(司直 弘演)이다. 장녀는 판관 이수겸(判官 李守謙)에 출가하고, 둘째 딸은 현감 신수견(縣監 辛壽堅)에 출가하였고, 다음은 현감 권응형(縣監 權應衡)에 출가하고, 다음은 사직 이창의(司直 李昌義)에게 출가하였다.찬의 김맹성의 장남은 직장 호(直長 豪)요, 둘째는 현감 미(縣監 湄), 다음은 현감 엄(縣監淹)이요, 다음은 직강 형(直講 泂)이요, 다음은 찰방 홍(察訪 洪)이며, 장녀는 장사랑 정윤충(將仕郞 鄭允忠)에 출가하고, 다음은 봉사 이주신(奉事 李周臣)에 출가하니 내외 제손이 70여명이 된다.묘비(墓碑)는 중종(中宗)17년(1522)2월에 입표(立標)하였다.夷襄公(諱 明진)墓 位置:楊州郡 檜泉邑 玉井里 山73 歲享日:음10월 4일 縣監公 韓 學 大)(현감공 한 학 대) 32세 순조 27년~ ?(1827~ ? ) 公은 드문 효자(孝子)이니 휘(諱)는 학대(學大)요 자(字)는 사오(士五)이다.참봉(參奉)득철(得喆)의 아들이고 인수(仁守)의 손자이다.이양공 명진(夷양公 明진)의 18대 손이다.부(父)득철이 60이 넘어서 학질에 걸려 오랫동안 신음(呻吟)하다 약의 효능이 없어 사경(死境)을 헤멜 때 아들학대(學大)가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달여 바침으로 서 낫게 하고 그 후 철종(哲宗)7년(1857)에 목뒤에 부스럼이 생겨 7개월동안 신음하 다 또 사경을 헤매게 되니 이때 며느리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입으로 부스럼의 근(根)을 빨아 낫게 하였다.이 효렬(孝烈)스러움을 안 유학(幼學)이필림(李弼林),정지흠(鄭之欽)등이 성주합하(城主閤下:三公,大臣)에게 1860년 포상 (褒賞)상서문(上書文)을 올렸다. 공은 고종(高宗)4년(1867) 서창도감(西昌都監)으로 있다가 발탁되어 다음해 현감(縣監)으로 나갔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배위(配位)는 숙부인 인동 장씨(淑夫人 仁同 張氏)이고 아들은 일관(日寬), 성관(性寬),도관(道寬)이다.현감공 학대(縣監公 學大)와 배 인동 장씨(配 仁同 張氏)에 대한 효행(孝行)에 감탄한 유생 (儒生)들이 포상상서문(褒賞上書文)을 성주합하(城主閤下)에게 올혔다. 縣監公(諱 學大)配淑夫人 仁同張氏에 對한 褒賞上書文 所藏者:서울 江南區 淸潭洞 134 漢陽아파트 1 棟 605 韓相洛. 縣監公(諱 學大)와 夫人仁同張氏와 美擧 答通 답통문(答通文)을 풀이하면 미거(美擧)는 윤리(倫理)망상(網常)이 퇴폐(頹廢)한 근세(近世)에 실로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이 사람과 그 부인이 효행이 없는 바 아니나 이 두 사람의 효행이 어찌 탁월 하다 아니하리오.그 부친에 그 아들이요 이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니 보통 있는 예사로 운 일로 삼을 일이 아니요 이를 속히 밝혀 높히 칭송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르침으 로 널리 사람들에게 일깨워 권하되 분기(奮起)하게 하고 이와같은 미행(美行)이 없어지 지 않고,이어져 나가게 하면 다행 다행이겠나이다.···경인(庚寅)1890년 2월 金山鄕校 典校 金在源 掌議 曺順默 李弼世,朴喜紹,金漢圭,姜晋植. 需林 鄭毅鎔, 白樂頀 知禮校中 僉座下 판서공 한 여 직 (判書公 韓 汝 직) 20세 선조 8년~인조 16년(1575~1638) 公은 조선 인조(仁祖)때의 문신이다.자는 중안(件安)이요 호는 십주(十洲)이다. 정익공 준(靖翼公 準)의 아들이며 돈녕부정 수경(敦寧副正 守慶)의 손자이고 이양공 명진(夷襄公 明진)의 6대손이다.선조(宣祖)37년(1604)생원(生員)으로 유능참봉(裕陵參奉)에 처음 제수되었고 광해군(光海君)2년(1610)34세때 명경갑과(明經甲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문학(文學)등을 지내고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당하여 외직(外職)에 보임되어 재령현감(載寧縣監)을 지내고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귀향하였다.1613년 해주옥사에 연관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 에는 10여년 동안 은거하였다.인조(仁祖)1년(1623)인조반정(反正)이 일어나자 동부승지(同副承旨)탑에 이어 좌부 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경기도 관찰사로서 난을 평정하고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1628년 형조참판(形曹參判)으로 동지의금부도사(同知義禁府都事)를 겸하여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事)를 선치(善治)함으로 정2품 에 올랐다.이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그 뒤 좌참찬(左參贊),대사헌 (大司憲)을 거쳐 예조 형조 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인조 16년(1638)9월 14일에 졸하니 10월에 계곡(桂谷)선영(先瑩)하에 예장(禮葬)되었다.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으로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명필(名筆)이었다.배위(配位) 정부인 능성 구씨(貞夫人 綾城 具氏)는 정랑 곤원(正郞 坤源)의 따님이며 아들은 사복 정 혜(司僕正 혜)와 첨지 박(僉知 樸)이다. 배위 정부인 능성 구씨(配位 貞夫人 綾城 具氏)는 公과 합조(合兆)이다.묘비는 현종 (顯宗)12년(1671)2월 통훈대부 행 삼척부사(通訓大夫 行 三陟府使)허 목(許 穆) 이 짓고 전하다.관악산(冠岳山)에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位置: 京畿道 富川市 素砂區 桂壽洞 山15 寅坐 歲享日:음 10月 5日 송월당 한 숙 (松月堂 韓 塾) 인조 24년(1646)~숙종 36년(1710) 23세 공은 조선 숙종(肅宗) 때의 문신이다.호는 송월당(松月堂)이며, 오규(五奎)의 아들이고 혜의 손자이다. 인조(仁祖) 24년(1646)에 태어났다. 공은 문재(文才)가 뛰어 났으며 20대에 계곡 선산(桂谷先山)의 묘정화(淨化)에 힘썼다.현종(顯宗) 14년(167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6년(1680)에 휘능참봉(徽陵參奉), 동왕 27년(1710)에 사마별제(司馬別提), 금부도사(禁府都事),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용안현감(龍安縣監)에 나가 선정(善政)을 베푸니 용안 선비들이 흥학비(興學碑)와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치적(治積)을 기렸다.숙종(肅宗) 34년(1708)에 형조정랑(形曹正郞)이 되었으나 다시 금천군수(金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함이 용안현감 때와 같았으며 한 때 해주병마절제사(海州兵馬節制使)로 나갔으나 동왕 36년(1710) 7월 26일 65세로 졸하였다.보학(譜學)에 능하여 갑신보(甲申譜)간행에 힘 썼으며, 금천군수로 있을 때 시조(始祖) 묘소의 심득(尋得)에 따라 숙(塾), 성우(聖佑), 형(형) 등이 제소하여 확인을 얻고 광중을 열어 보니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다시 묻고 개봉축하는 등 선조묘의 정화에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증가선대부 이조참판(贈嘉善大夫 吏曹參判)이시다. 배위(配位) 증정부인 은진 송씨(贈貞夫人 恩津 宋氏)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기상(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耆相)의 따님이며 아들은 생원 덕흠(生員 德欽), 부사 성흠(府使 聖欽), 익흠(益欽), 동지중추 용흠(同知中樞 龍欽), 기흠(夔欽)이다. 공은 숙종(肅宗) 36년(1710) 7월26일 송월당(松月堂:자택)에서 졸하였다.배위(配位)인(贈貞夫人 恩津 宋氏)는 숙종 17년(1691) 11월 28일에졸하니 합조(合兆)하였다. 공은 선조묘를 정화하는 과정에서 비를 많이 세웠다. 그러나 공은 내가 죽거든 아무 한 일도 없는 사람한테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공의 우인(友人) 가선대부 호비사직 권규(嘉善大夫 虎비司直 權珪)가 행장(行將)을 지었다.약 290여년이 흐르면서 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新道碑)를 세우자는 종의(宗議)에 따라1980년 문학박사 한갑수(文學博士 韓甲洙)의 서(書)로 묘 좌하단(左下段)에 세웠다. 17세기의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을 수습하던 시기이고 학문적으로 實學(실학)이 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부천도 두 외란이 끝나 혼란이 수습되던 때이고 고강동. 계수동. 부천뜰에서는 꾸준히 역사적 흐름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이다.특히 계수동 청주한씨들의 '대를 이은 효행과 충성 제일'의 흐름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韓塾(한숙)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인조 24년(1646)에 청주인 오규(五奎)와 한양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한숙은 자를 수이(受而), 호를 소월당(松月堂)이라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인품과 뛰어난 재질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으나 6세 때 어머니를, 7세 때 아버지를 여위는 등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고 진외가의 종증조부(從曾祖父)고강동의 오정공 변삼근(梧亭公 卞三近)의 후실 우씨(禹氏) 등의 손에서 자라났다. 변삼근의 능력에 대해서는 사후 왕이 제문을 내려 슬퍼할 정도였으니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송월당도 오정공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송월당은 어린시절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항상 면학과 수신을 게을리 하지 앟아 조용주(趙龍洲)는 송월당의 시(詩)와 부(賦)를 읽고 글재주에 크게 놀라 극착을 아끼지 앟았다. 더욱이 현종 5년(1664) 삼척부사를 그만두고 향리인 연천에 있던 미수 허목(眉搜 許穆)을 만나자 미수는 '그대 선친인 오규가 재주있고 글이 뛰어났으면서도 일찍 세상을 떠나 슬퍼했으나 그 아들이 성장하여 뛰어난 글재주로 나를 대하니 회고하여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구나' 하였다.송월당은 16세 때 은진송씨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른 후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돌아와 계수동 선영을 둘러보니 묘 앞에 표석이 없음을 보고 비석과 신도비를 마련하였으며 한편으로 가세를 일으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현종 14년(1673) 28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응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榜中(방중) 선비들의 추천으로 성균관, 향교, 사학 등에 거처하던 임원인 色掌(색장)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번 大小科(대소과)에 응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진사가 되었다.숙종 6년(1680) 조정에서 숙종 때 처음으로 간행된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고쳐 편수코자 할 때 그를 편수관으로 추천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고, 그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과거에도 응하지 앟았다. 그 후 판서 沈梓는 송월당이 족보편찬에 조예가 깊음을 알고 다시 조정에 추천하여, 주위 선비들도 강력히 천거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숙종 24년(1698) 휘릉참봉(徽陵參奉)이 되어 부임해 보니 능 위에 있는 풀들이 충해로 인해 말라 가는데도 전임들이 일의 방대함 때문에 손대지 않았음을 알고 곧바로 봉심대신(奉審大臣 - 왕명을 받들어 능을 보살피는 대신)에게 강력히 말하여 사초를 갈아 원생대로 회복하였다.선대의 묘를 보살피는 데는 역시 그와 같은 정성을 보여 원상을 회복하였다. 참봉을 지낸 후 어린이들을 위해 각 군에 두었던 동몽교관(童蒙敎官 - 일명 동몽훈도)이 되었다가 숙종 27년(1701) 사마별제(司馬別提)와 의금부(義禁府)의 종5품 도사(都事), 공조좌랑 (工曹佐郞- 정5품)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 탐관오리들이 쇠부스러기를 거두어 사사로이 재산으로 부리는 폐단이 심하므로 관에서 쓰는 용기가 부족하였다. 이를 알고 쇠로 그릇과 솥 등을 많이 주조하여 창고에 보관해 놓고 공공기물로 쓰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그 이듬 해(1702) 용안현감(龍安縣監 - 전북 익산군에 있는 지명)이 되어 학교와 사당을 모두 가지런히 정리, 보수하고 윤리도덕의 기강을 크게 바로 잡았다. 선정을 베푸는 한편 옛 풍습을 일으키는데 힘을 다하고 長幼의 질서를 바로잡아 경로의 미풍을 진작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용안을 떠난 후 용안 지역의 선비들이 흥학비(興學碑)와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그의 치적을 기리었다. 숙종 34년(1708)에 형조정랑이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다시 금천군수(金川郡守 - 황해도 동남에 위치)가 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병환으로 인해 사직하고 귀향하여 요양하던 중이던 숙종 36년(1710) 여름 6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효심과 선정을 인정하여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추가로 증여하였다.묘는 계수동 함박산에 선영들의 묘와 함께 있는데 비문은 가선대부를 지낸 權規(권규)가 '금천군수한공행상(金川郡守韓公行狀)' 이라 써 전한다.운명하던 날 송월당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을밀대에 옛날 와서 청산은 끝하는 바가 없고 물은 동을 흐르네. 곁에 있는 이들아 예사로운 일일랑 묻지를 마오, 지팡이에 기대어 강남의 수많은 누각이나 찾아볼까 하네.' 여기에서 우리는 송월당의 초현실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순진무구한 노장사상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송월당은 현종 5년부터 미수 허목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미수 사후 그의 유고를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미수가 삼척부사로 있는 동안 동해비(東海碑)를 세우고 만년에 비문 한 부를 다시 베껴 송월당에게 보내 주었다. 미수 사후 비석이 부셔져 당시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와 송월당의 둘째 아들로 당시 강원도 울진군 평해현감(平海縣監)으로 있던 성흠(聖欽) 등에게 부탁하여 재건케 했다. 송월당은 살결이 희고 용모와 수염이 아름다웠다. 남을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있고 성품이 온화하며 간결하여 담소하는 모습이 가히 군자라 할 만 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조상 모시기를 잘하였고, 禮記(예기)에 밝고 문장에 능했으며, 필법은 힘이 있어 마치 진인(晉人)의 서체(書體)와 비슷하다고 일컬어졌다. 송월당은 어려운 이웃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이 없으면 주위의 여러사람을 설득하여 이를 돕게 하였으며, 외로움으로 곤경에 빠진 이가 있으면 반드시 구제책을 마련하여 도와 주었다. 유년 시절 스승에게 자주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호기심 있는 이상한 질문으로 하여 스승을 놀라게 하였으며 허약한 체질이 그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함을 늘 개탄하였다. 그는 병환으로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성인의 글로 가득 찼다. 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에 두 번이나 등정했으며 그곳을 샅샅히 답사하였다. 그는 대학자 退溪 李滉(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그를 배향한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의 정경이 꿈에 늘 보였는데 실제로 도산 그림을 보고 꿈 속의 그림과 너무 흡사해 기뻐하기도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그가 현종과 숙종 연간(1660∼1710)에 지은 필사본시문집《복부》(자기의 시문을 낮추어 부르는 말 : 질자 주) 1책(60장, 25.7 X 17.5cm, 담황색으로 두껍게 배접하였고 황사로 철하였음)이 전하고 있는데 목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詩 : 立春日 奉呈日强兄案下求和 內寅(1686),奉送申督郵金泉之行 乙丑(1685)八月 十三日. 謝夢賚詩. 奉呈申兄. 衍韻成律奉呈申兄求和. 鄭成悅大夫人 挽. 黃漫浪夫人挽. 韓進士世輔挽. 次聖瑞韻奉賀好伯. 李囊陽而遠挽. 辛 洪原子挽. 洪兵使時疇挽. 洪正字査濟挽. 韓進士挽. 姜進士楡挽. 謝申兄 惠穀詩. 送藥료申兄. 送申公美之任. 聞吳三桂之將 李姓 人爲淸人所殺其 妻楊氏 爲淳失仇 聚兵入茅鹿山 日淸人相全 淸人甚患云云 聞而義而壯之遂 賦一絶 祭韻弟洪重明文. 祭妹兄鄭公文 東岳. 祭內弟趙悅卿文. 祭眉垂許先生文. 韓龍二墓書. 申玧墓書. 平山申錫夏墓誌 등.묘: 경기도 소사구 계산동 산 15 세향일: 음 10월5일. 萬海 韓 龍 雲 先生(韓 貞 玉)(만해 한 용 운 한정옥)33세1879~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이다.본명은 정옥(貞玉),아명은 유천(格天),법명은 용운 (龍雲),법호는 만해(萬海:卍海).충남 홍성(洪城)출신으로 도사공 응준(都事公 應俊)의 아들이며 첨정공 영우(僉正公 永祐)의 손자이다.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4세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16세 되던 해 동 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菴)에 입산하여 처 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 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섬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력 하였다.27세 때 다시 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 關心)을 가지고,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즉 불 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 유신론》을 저술하였다.36세 때《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채근담 菜根譚》주해본을 저술하였다.30세 되던 해에 안 중근(安重根)의 장거가 있었는데,그해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였다.주로 동경(東京)과 경도(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 하였다. 일본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 린(崔 麟)등과 교우하였다.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그는 국치 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월간《유심’|품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관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 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41세 때 3·1 독립운동이 있었는데,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충돌이 있었다.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42세 때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출 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 다.47세 때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님의 침묵》을 발간하 였다.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49세 되던 해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추진되었다. 52세 때《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그 전까지는 권상로 (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전력을 기울였다.특히,고 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 불교 등을 제창하였다.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57세 때《조선 일보》에 장편소설〈혹풍 黑風〉을 연재하였고,이듬해에는《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 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단체인 만당 사건(卍黨 事件)이 일어났고,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1939년 회갑 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입적(入寂)하였다.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회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묘지에 유골이 안장되었다.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 광(朴 珖),홍명희(洪命憙),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등이 있었으며,신채호의 비문 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었다.배위(配位)천안 전정숙 (天安 全貞淑)은 도사(都士)의 따님이며 이의 아들은 보국(報國)인데 1950년 6·25전란시 행방불명(行方不明)이며 배 기계 유씨(配 杞溪 兪氏)의 따님인 영숙(英淑)이 성북동(城北洞)의 심우장(尋牛莊)을 지키고 있다. 만해선생(萬海先生)은 1944년 5월 9일 성북동(城北洞)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入寂)하였다.미아리 사설 회장장에서 다비(茶昆:시체를 火葬하는 일)된 뒤 망우동 묘지(忘憂洞 墓地)에 유골이 안장(安葬)되었다.후배 기계 유씨(後配 杞溪 兪民) 가 1965년 6월 25일 졸함에 우측에 안장(安葬)하였다.1962년 건국공로 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 고 동작동 국립묘지(鋼雀洞 國立墓地)로 이장(移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유족(遺族)은 명당(明堂)자리임 을 내세워 사양하고 있다. 묘위치:서울 중랑구 망우동 산57 망우동묘지 정상동향 이며,선생을 모신 만해사(卍海洞)는 先生의 생가(生家)에서 150m 우상측(右上側)에 있다.1995년에 건립(建立)되었는데 본당(本堂)이 17.15평,삼문(三門)이 7.18평,담장 90m이며 부지(敷地)는 500여평이다. 만해사 위치: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에 있으며, 동상은 승려이고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사(萬海 韓龍雲 禪師)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동상(銅像)인데 홍성읍 남장리(洪城邑 南長里) 언덕에 있다.만해 한용운 선사 동상건립추진위원회(銅像建立推進委員會)가 주관이 되어 1985 년 12월 2일 준공되었다.2,745 평의 부지에 3.2m 높이에 조국 의 행복,승려,시인임을 상징하 는 3개 날개 그리고 3·1운동 민 족대표 33인 중 한 분임을 나타 내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동상 면우측에는《님의침묵(沈默)》 그리고 좌측면에는 독자(讀者)에 게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선생의 생가(生家)이다‘집은 심우재(尋牛齋)와 전대법윤 (轉大法輪)으로 되어 있고 앞의 게시판(揭示板)은 생가의 설명 그리고 옆의 표석(表石)은 생가지 기념물 표시이다.선생은 고종(高宗)16년(1879)8월 29일 도사 응준(都事 應俊)의 둘째 아들로 이곳 성곡리 박철동(城谷里 박鐵洞)에서 태어났다.독립운동(獨立運動)에 힘쓰고 불교문화(佛敎文化)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웠던 애국자(愛國者)의 생가를 성역화(聖域化)하기 위하여 1992년 3월 6일 복원(復元)하였다.충청남도 기념물 (忠淸南道 記念物)제75호로 1992년 3월 6일 지정되었다. 선생은 1933년 성북동(城北洞)222-1번지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다.남향(南向)으 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마주보게 된다고 하여 북향(北向)으로 지었다.선생은 1944년 6월 29일 이곳에서 66세로 입적(入寂)하였다.심우장에는 약간의 유물(遺物)이 있고 딸(英淑)과 사위 정택근(鄭宅根)의 집은 좌편에 있는데 이들이 심우장을 관리하고 있다.본당(本堂)은 17평이고 부지면적(敷地面積)은 113평이다. 심우장 은 서울시 기념물(記念物)제7호이다.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면서 국내·국외를 막론하고 저지운동이 일기 시작 하였다.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하기로 하고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글을 맡았다.드디어 3월 1일 33인의 이름으로 오후 2시 종로(鍾路)의 인사동 명월관(仁寺洞 明月館)에서 한용운(韓龍雲)의 낭독으로 선언(宣言)되었다.이로써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삼천리(三千里)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되고 특히 탑골공원에서의 함성은 컸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1980년 독립선언서탑(獨立宣言書塔)을 세웠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선생 의 불교사상(佛敎思想)과 그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그리고 시인(詩人)임을 기리기 위해 용운당만해대선사비건립추진위원회 (龍雲堂萬海大禪師碑建立推進委 員會)위원장 김경봉(委員長 金鏡峰)외 여러분이 1967년 10월 에 유서(由緖)깊은 탑골공원 후 문편에 세웠다. 3·1절 78주년을 맞아 중랑구청(中浪區廳)에서는 선생이 33 인의 한분으로 망우묘지(忘憂墓地)에 안장(安葬)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7년 2월말 선생의 묘하(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에 연보비(年譜碑)를 세웠다. 절도사공 한 근(節度使公 韓 根) 인조 11년(1633)~숙종 16년(1690) 21세 公은 현종(顯宗)숙종(肅宗)조의 무신(武臣)으로 휘(諱)는 근(根)이요 자(字)는 회 경(晦卿)이다.부사 여윤(府使 汝尹)의 아들이고 좌랑 양(住郞 瀁)의 손자이다. 公은 인조(仁祖)11년(1633)생으로 천성(天性)이 무예(武藝)를 좋아하여 현종(顯宗)6년(1665)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누진(累進)하더니 남도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를 지내다 숙종(肅宗)14년(1688)에 청주 병마절도사(淸州 兵馬節度使)로 있을 때 제광공 한성헌(霽光公 韓聖憲)과 합심전력(合心全力)하여 청주 가산(淸州 驚山)에서 시조유기(始祖遺基)를 심득(尋得)하였으니 그 공적(功績)은 영세불망(永世不忘)이리라. 공은 숙종 16년(1690)에 졸하였다.배위(配位)정부인 전의 이씨(貞夫人 全義 李氏) 는 여빈(沈彬)의 따님이고 아들은 도사 세위(都事 世緯)이다. 공이 숙종(肅宗)16년(1690)졸함에 남양읍 관종리 선영하(南陽邑 冠宗里 先瑩下)에 안장(安葬)되었다.배위(配{立)정부인 전의 이씨(貞夫人 全義 李氏)는 公과 합조(合兆) 이다.처음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에 마멸(磨滅)되어 1987年 3月에 묘비를 방후손 상대(傍後孫 相大)가 글을 지어 개수(改竪)하였다. 位置:京畿道 華城郡 南陽邑 冠宗里 先瑩下 歲享日:음 10月 10日 문간공 한 상 경 (文簡公 韓 尙 敬) 1360~1423 12세 公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文臣)이다.자(字)는 숙경(叔敬)이요 또 중경(仲敬)이요 호(號)는 신재(信齋)이니 문경공(文敬公)수(脩)의 아들이요 평간공(平簡公)공의(公義)의 손자이다.어머니,정녕택주(靜寧宅主)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길창부원군 (吉昌府院君)권 적(權 適)의 따님으로 공(公)은 四兄弟中 셋째이다.고려 우왕(高麗 禑王)8년(1382)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의좌랑(禮義佐郞)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공양왕(基讓王)2년(1390)1월에 비로소 경연(經筵)을 열고 공 을 검토관(檢討官)으로 삼고 진강(進講)에 힘썼다.1392년 4월에 빌직사좌부대언(密直事左副代言)이 되었을 때 국체(國體:나라가 成立한 상태:國家의 性格)가 바뀌니 곧 조선(朝鮮)이 개국(開國)(1393)함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중추원 도승지(中樞院 都承旨),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임(任)할 때 서원군(西原君)에 봉(封)해졌다. 다시 경기,황해,강원(京畿,黃海,江原)감사(監司)를 지내고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호조,공조 (戶曹判書)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右議政)이 되고,太宗 18년(1418)영의정(領議政) 에 이르렀다.세종(世宗)5년 (1423)64세로 졸(卒)하니 王은 3일간 조정(朝廷)을 휴무(休務)케 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시호(諡號)를 문간 (文簡)이라 하였다.풀이해 말 하면 문간(文簡)의 문(文)은 근학호문(勤學好文)의 뜻이고, 간(簡)은 일덕불해(一德不辦) 의 뜻이다. 아들은 함길도 도관찰사 겸 함홍부윤(咸吉道 都觀察使 兼 咸興府尹)을 지낸 청산군 (淸山君)혜(惠)이다.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에 보면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하여 공(公)에 게 이르되“내가 큰 왕업(王業)을 이어 받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 모르겠소.이 때문에 실로 생각이 난감하기만 하네 하니 공(公)이 대답하길 古人이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이어 받아 그 전에 왕업을 받기 어렵다고 했습니다.전하(殿下)께서는 능히 왕업 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복된 일입니다.그러나 그 알 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실행(實行)하기가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 임금은 이와 같은 말을 가상히 받아 들였다 한다. 公이 64세에 졸(卒)하니 太宗이 제문(祭文)을 내렸다.王이 이르기를,어진 신하 (臣下)의 개국(開國)의 공훈(功勳)은 고금(古今)없이 막중하고 임금의 보공지전(報功之典)은 살아 생전과 죽은 뒤가 어찌 다르겠는가”하고 경(卿)은 사조(四朝)의 귀감(龜鑑)이라 찬탄(讚嘆)하였다.中,下略 함. 문간공이 世宗 5年(1423)음 3월 7일에 졸하여 나라에서는 부의(賻儀)로 예(例)에 따라 미두(米豆)共히 七十石과 한지(紙)150卷을 내렸고 초장지(初葬地)는 광릉(光陵)이었으나 후일 세조(世祖)임금이 승하(昇遐)하여 국장지(國葬地)로 택정(擇定)되어 지금의 위치로 천묘(遷墓)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있을 뿐이다.公에게 시호(論號)를 문간(文簡)이라 내리고 영세부조(永世不조)의 전례(典禮)를 내리니,바로 지금의 사당이 문간공을 모시는 사우(祠宇)이나 원래(元來)의 사당은 퇴훼하여 광복(8·15 光復)후에 후손이 성금을 모아 중건(重建)하고 문간공과 배위 (馬韓國大夫人)해주 오씨(海州 吳氏)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사당(祠堂)제사(祭祀)는 문간공의 기일(忌日)음 3월 7일과 배위의 기일인 음 4월 17일에 그리고 정월 1일에 다례를 드린다. 《조선인호부(朝鮮人號簿)》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씨(王氏)자손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자 公이.구(救)하여 사면(赦免)케 하여 주어 이로써 전조(前朝:高麗朝)에 보답하였다.이는 문간공이 고려 우왕(禑王)때 등과하여 조선조에 와서 개국공신이 되어 행한 바다.또한 이 첨(李 詹)이 문간공의 호(號) 신재(信齋)를 풀이한 글에서 한공(韓公)은 마음 가짐이 성신(誠信)하고 돈독(敦篤)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정직하고 성실하며 웃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어거하는데 성의와 의리(義理)를 다하였다.신(信)을 지켜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 서재 편액(書癡 扁額) 에 信字를 썼으니 그 심지(心志)가 독실하고 그 강학(講學)이 정근(精勤)하고 그 실행 (實行)이 지처(至處)하였다고 찬사하였다..公의 신도비(神道碑)는 광릉(光陵)에서 이곳 양주로 천묘(遷墓)할 때 뗏목으로 옮기다가 가까운 여울목에서 급류로 인해 유실(流失)되었다는 전설(傳說)이 있으나 고증(考證)할 길 없고 광복후 갑자(1984)에 후손 한욱동(韓旭東)이 비문을 짓고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配位 馬韓園大夫人 海州 吳氏와 上下兆 이다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126번지. 청산군 한 혜(淸山君 韓 惠) 1403~1431 13세 公은 조선조 태종(太宗)세종(世宗)때의 문신(文臣)으로 호(號)를 송재(松齋)라 한다.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선조 개국공신(朝鮮朝開國功臣)상경(尙敬)의 아 들이요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호(號)유항(柳巷)수(脩)의 손자이다.12세에 초시(初試)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종부서령(宗簿暑令)으로 15세에는 대과(大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전사시 소윤 보문각지제교(典祀寺 小尹 寶文閣知製敎)에 제수(除授)되고,세종 2년에 사간(司諫)우부대언(右副代言),동 5년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는데,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는 사이 한번도 외출한 적이 없다.병오(며午:1426)에 병조참의(兵曹參議),무신(戊申:1428)에 예조참판(禮曹 參判)에 오르고 청산군(淸山君)에 봉군(封君)되어 동년 10월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總制)가 되어 명(明)나라에 동지(冬至),하절(賀節)사신(使臣)으로 갈 때 세종대왕 (世宗大王)이 모관(毛冠)과 면의(綿衣)를 내려 추운 눈길에 잘 다녀오라고 했으니 公이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만 하다.1429년에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되고 이듬 해 12월에 함길도(咸吉道:咸鏡道)관찰사 겸 함흥부윤(觀察使 兼 咸興府尹)에 임명 되었다. 公이 함경도민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변방(邊方:地方의 요새)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 슬프게도 29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뜨니 王이 부음(訃音)을 듣고 특사를 보내 부의(賻儀)를 전하고 조문(弔問)하였다.公의 묘소를 금곡리에 정하고 장례(葬禮)를 치를때 함경도 백성들이 公의 선정(善政) 을 감사하여 흙 한줌씩을 가지고 와서 봉분(封墳)을 쌓고 위령(慰靈)의 예를 다하였다. 청산군의 초배(初配)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요 계배(繼配)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로 초배 성주 이씨(初配 星州 李氏)는 처음 적성 (積城)에 장례(葬禮)하였는데 1986 년 청명절에 청산군 (淸山君)묘(墓)에 합폄(合 )천묘(遷墓)하고 계배(繼配)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公의 묘(墓)계하(階下)독묘(獨墳)이다. 公의 묘비(墓碑)가 오랜 풍진(風塵)속에 심히 마모(磨耗)되어 1996년 3월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세웠다. 公에게는 五男 三女가 있는데 長男는 원종공신(原從功臣) 검교참판(檢校參判)계윤(繼胤)이고 次는 문양공 계미(文襄公 繼美)요,次는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요,次는 호조판서 계선(戶曹參判 繼善)이요 季는 양평공 계순(襄平公 繼純)이다.次子 文襄公이 받은 단서 철권교지(丹書 鐵券敎旨)에 依하면 文襄公의 功으로 청산군(淸山君)에게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서원부원군(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西原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고 되어 있다. 公의 신도비(神道碑)는 본래 없었으나 1987년 후손이 성금을 모아 문간공 사우 (文簡公 祠宇)앞 뜰에 세웠다.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125번지 시향(時享):음 10월 3일. 참판공 한 계 윤 (參判公 韓 繼 胤) 조선 태종1415 ~ 성종1475 14世 公의 諱는 계윤(繼胤)이요 號는 유암(柳岩)이다.公이 태종(太宗)5년(1415)에 탄생 (誕生)하니 고위(考位)는 함길도 도관찰사 겸 함흥부윤(咸吉道 都觀察使 兼 咸興府尹) 혜(惠)요 비위(비位:어머니)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동지총제(同知摠制)수(穗)의 따님이요 계비(繼비)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판중추 양혜공(判中樞 襄惠公)따님이다. 조고(祖考)는 태종조(太宗朝)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간공(文簡公)상경(尙敬)이다.公의 配位 慶州 崔氏는 대사헌(大司憲)문손(文孫)의 따님이다. 公이 일찍이 공신(功臣)의 후예(後裔)로 문음출사(門陰出任)하여 주부(主簿)때에 좌 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통훈대부 천녕현감(通訓大夫 川寧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가선대부 검교참판 겸 경연 참찬관(嘉善大夫 檢校 參判 兼 經筵 參贊官)에 이르렀다.公이 성종(成宗)6년(1475)5월 4일 별세(別世)하니 수(壽)가 61이요 子女는 二男 三女로 長男은 형조정랑(刑曹正郞)준(峻)이요 차 (次)는 通任郞)우(우)이다.公의 유택(幽宅)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廣州郡 中垈面 梧琴里:現 서울 松 坡區 梧琴洞)건좌원(乾坐原)이었고 배위(配位)경주 최씨(慶州 崔氏)는梧琴里 公墓白虎合局이었으나 現世에 와서 도시 확장계획에 의하여 1971년 4월 2일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파곡 인좌원(南楊州市 棒接邑 金谷里 波谷 寅坐原)에 兩位 合폄으로 면봉 (緬奉)하고 立標하였다. 公이 별세(別世)후 500여년인 1989년 국추절(菊秋節)에 後孫이 성금(誠金)을 모아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비문(碑文)은 문화공보부 서기관(文化公報部 書記官)을 지낸 공의 十六代孫 重錫이 짓고 文學博士 相甲이 썼으며 參判公 宗中이 세운 것이다.公을 爲한 齋室은 文簡公 祠堂境外에 있고 26平型 煉瓦造 平家建이다. 시향(時享)은 음 10월 3일이다. 文襄公 韓 繼 美(문양공 한 계 미) 14세 조선 세종1421 ~ 성종1471公의 諱는 繼美요 字는 공보(公甫)이니 함길도 관찰사 혜(咸吉道 觀察使 惠)의 아들 이요 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상경(尙敬)의 손자로 세종 신축(世宗 3年 辛丑:1421) 5月 27日 生이다. 公이 18세에 공신(功臣)의 아들로 층의위(忠義衛)가 되어 부사직(副司直)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겸하였다.형조 도관좌랑(刑曹 都官佐郞)이 되었을 때 明나라 사신 의 수행을 했고 사복시(司僕寺)소윤(小尹)을 거쳐 세조 즉위(世祖 卽位)때 좌익공신 (佐翼功臣)이 되어 左右承旨를 역임하고 이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서원군(西原君)이 되었다. 1461년에 平安,黃海,江原道 안집도 순찰사(安集都 巡察使)로 임명되고 1463년에 돌아와서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가 되었다.1465년 정헌대부 사복시정 (正憲大夫 司僕寺正)이 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 都總管)으로 옮겼고 1467 년에는 숭정대부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崇政大夫 平安道 兵馬水軍 節度使 兼 寧邊大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는 地理的으로 명(明)나라와 접해 있고 산적(山賊)들이 출몰(出沒)하는 험지(險地) 이므로 위중대신(威重大民)으로 보임(補任)한 것이다.이 해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 (版亂)을 일으켜 함경도(咸鏡道)가 병란(兵亂)에 휩싸이자 公이 스스로 6천 기(六千騎 :말탄병사 6천명)를 모아 반란군(叛亂軍)을 격퇴(擊退)하였다. 그 공(功)으로 적개공신(敵慨功臣)을 삼고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崇綠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五衛都總府 都總管)을 제수(除授)하고 부친(父親: 惠)은 순충적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예문춘추관홍문관관상감영사세자시강원사서원부원군(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待講院師西原府院君)에 추증(追贈)하였으며 公의 配位 城平 尹氏는 安城郡夫人을 封했다. 1469년에 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이조판서(輔國崇綠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吏曹判書)가 되고 1471년에 좌리공신(住理功臣)에 책봉(策封)되어 순성명양경제(純誠明亮經濟)라는 호(號)가 하사(下賜)되었고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471년 12월에 公이 51세에 하세(下世)하니 조정(朝廷)에서 하룻동안 정사(政事)를 휴무하고 상장(喪葬)을 갖추어 다스리게 하고 문양(文襄)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그 리고 다음 해 1472년 12월에 사패지지(陽牌之地:나라에서 내린 땅)인 現在의 墓域에 다 禮에 따라 安葬하였다.配位인 貞敬夫人 封安城郡夫人 坡平 尹氏와 合폄이다.墓 의 封墳에는 本來 護石이 없었으나 現世에 와서 이미 오래 전에 잃었던 長明燈復元과 함께 이룩한 것이고 長台石도 一 部 改石한 것이다.墓祀는 寒食節과 秋夕節에 奉行한다. 位置: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시묘동) 公의 眞影은 壬辰倭亂 時에祀宇와 함께 燒失되어 1982년(壬戌)에 王朝實錄,政院日記,與地勝覽 肖像大典等에서 考證하여 秋峯 金進龍 畵伯이 摹寫하여 奉安하였다.公의 祀宇인 文襄祀는 永世不 廟이나 壬亂때 燒失되어 位牌는 그동안 宗孫의 家廟 에 奉安하여 오다가 1980년 9월에 重建하여 移侍奉安하고 있으며 廟祀는 文襄公 忌日 인 음 12월 23일과 配位 尹氏의 忌日인 음 9월 23일에 奉行하며 正月初一日에는 茶禮 를 드린다. 碑面刻 上部에 두른 象에는 墓碑銘이라고 되어 있고 이 碑文은 영산부원군 김수온(永山府院君 金守溫)이 撰하여 墓下階左測에 세웠던 것을 이곳에서 百步쯤 直方向 下測에 옮긴 것이다.齊室앞 언덕에 새로 세운 碑는 當碑가 風磨雨洗하여 字劃을 分看하기 어려워서 세운 것이다.비문에는 公은 용모가 괴위(魁偉:체격이 크고 훌륭함)하고 기우(氣宇:기개와 도량)가 관홍(寬弘:마음이 너그럽고 큼)하였으며 말과 웃음은 많지 않았으나 대인(對人)에는 늘 화기(和氣)가 감돌아 환심을 샀다고 한다. 11세 때 부친이 별세(別世)하여 어머님의 영(令)을.어김이 없었고 형제(兄弟)가 우애(友愛)하였으며 친척과는 돈목(敎陸)하게 지냈다.지위(地位)가 있어도 교만하지 않았고 전형(銓衝:吏曹判書)을 두 번이나 했어도 항상 공평하게 인사(人事)를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다.지방관장(地方官長:평안,황해,강원(平安,黃海 江原))을 맡고는 토지를 개간케 하고 제방을 쌓고 도랑을 쳐가며 농사가 풍년들게 하여 고향을 떠났던 유민(流民)들이 돌아오니 수만(數萬)에 이르렀다.平生에 집안일을 염려해 본 일이 없고 王이 國事를 처리함에 있어 公에 의지함이 많았으니 公은 충국대신(忠國大臣)이라 하였다.명(銘)에서 공훈(功勳)이 혁혁(赫赫)하여 선친(先親)도 몽은(豪恩)하고 황무지 (荒蕪地)를 개간(開刊)하여 民生을 도왔으며 公事에 臨하여는 德으로 다스리니 훌륭한 명망(名望)은 千年토록 傳하리라 했다. 本來 재실(齋室)은 종가(宗家)별채를 썼으나 이 별채와 宗家 全體가 철물(鐵物)을 일체(一切)쓰지 않고 순수한.木材에 싸리나무 못을 主針으로 한 평가초개(平家草蓋) 건물로 500여 년을 손색없이 문화재(文化財)로서의 가치(價植)가 높은 유물(遺物)이었으나 현세인(現世人)의 무지(無知)로 철거한 자리에 1980년 9월에 신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파평 윤씨 묘지(城平 尹民 基誌) 城平 尹氏는 西原府院君 文襄公(韓繼美)의 배위(配位)이다.고려 중엽(高麗 中葉)에 시중(待中)에 올라 地方을 토평(討平)하여 큰 공(功)을 세운 윤 관(尹 權)의 12대 손녀(孫女)로 증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贈 領議政府事 領經鐘書雲觀事)를 지낸 정정공(貞靖公)번(번)의 따님인데 세조대왕비(世祖大王妃)정희왕후(貞憙王后)의 여형(女 兄:언니)이다.이 지석(誌石)은 묻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묘역 개사초(墓域 改涉草) 시에 묘정(墓庭)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면 도굴(盜掘)하다가 떨어뜨린 지석편(誌石片)으로 짐작된다.城平 尹氏는 文襄公의 地位에 따라 貞敬夫人에다 安城郡夫人이 封해졌다. 문양공 한계미(文襄公 韓繼美)에게 내린 단서철권교지(丹書鐵賽敎톱)해석문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신하(臣下)된자 정성을 다하여 제왕(帝王)을 보위하고 덕을 높이면 그 공을 보답하는 것이니 이는 국가의 떳떳한 경륜이요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오직 경(卿)의 도량(度量)이 하해(河海)를 안은 듯한고 성품(性品)은 충양(忠良)을온포(蘊泡:가슴속에 재주를 품음)한 것 같이 일찍이 향화지성(向化之誠)을 기울였으며 나라 지키는 데에 계속한 정성은 과인이 실로 소중히 여기는 바다. 어느 날 적신(賊臣)이시애(李施愛)가 역적을 모의,장재(將宰)를 살해하고 사졸을 구류하며 군사와 함께 발호(跋扈:제 멋대로 날띔)하여 죄가 충천하거늘 특별히 귀성군(龜城君)이 준(浚)과 제장을 파견하여 토벌하니 경(卿)과 선산군(善山君)김교(金嶠) 가 합심하여 추적하는데 먼저 삼군기병(三軍奇兵)으로 출동하여 대첩(大據)하니 원흉(元兇:李施愛)의 머리를 베어 삭방(朔方)이 평정되었다. 그 공이 심히 크므로 과인이 그 공훈을 못잊어 경(卿)에게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책(策)하고 각(閣)을 세우고 영정(影幀)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처자(父母妻子)에겐 삼계위(三階位)를 올리고 적장자(嫡長子)는 대대(代代)로 그 녹(綠)을 계속 주며 자손(子孫)은 적개이등공신 한계미(敵愾二等功臣 韓繼美) 의 후손으로 비록 죄(罪)가 있어도 영세(永世)토록 사죄(赦罪)한다 하고 아울러 반당 칠인(伴당 七人:從者),노비 십구(奴婢 十口),구사 오구(丘史 五口:官奴),전 팔 십결(田 八十結),은 삼십량(銀 三十兩),의 일습(衣 一襲),안구내구마 일필(鞍具內廐馬 一匹)을 줄 것이요 자손이 없는 자가 있으면 생질여서(甥姪女壻)에게도 일계위(一階位)를 가작(加爵)할 것이며 같은 공이 있는자는 후에 병록토록 하라 기록하였다.어희라(슬프도라).산하에 맹세코 그 꽃다운 이름과 그 업(業)은 후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하라 하고 이에 교시(敎示)를 내려 그 공을 다 알게 하노라. 성화삼년(成化三年 1467)10월 일 掌令公 韓 형(장영공 한 형) 21세 1633~1689 21세 公의 휘(諱)는 형(형)이요 字는 千一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하고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한 후기(後琦)의 아들이요 촉체(蜀體)로 글씨에 뛰어나 당대(當代)의 명필(名筆)로 성망(聲望)이 높았던 참봉(參奉)철(哲)의 손자이다.公은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했고 대과문과(大科文科)에 급제 (及第)하여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장영(掌令)을 역임(歷任)하고 숙종 기사(肅宗 己巳:1689)에 별세(別世)하니 수(壽)가 57세이다. 묘소(墓所)는 고양시 대자동 선영하(先瑩下)용복원 해좌(龍伏院 亥坐)이다. 公의 배위(配位)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公보다 二年 上으로 壽 61하고 별세하니 公과 合폄으로 安葬하다.슬하(膝下)에는 장남 세명(世嗚),차남 세정(世貞),세성(世成),금화(錦화)이다.掌令公이 사헌부 장영(司憲府掌令)으로 있을 때 시조부군(始祖府君)의 묘소(墓所)가 실호(失護)되어 타인(他人)이 모장(冒葬:몰래 장사함)한 사실(事實)을 관(官)에 제소 (提訴)하여 결정적으로 봉심(奉審)하는 기쁨을 누렸으니 이는 한문(韓門)의 경사(慶事) 였음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고 더욱 시조의 유적(遺蹟)과 유물(遺物)을 영세(永世)토록 보전(保全)해야 한다는 정신교육(精神敎育)의 근원(根源)이었다.이에는 참판(參判) 성우(聖佑)와 군수(郡守)숙(塾)이 주역(主投)했음도 명찰(明察)해야 할 것이다.(때는 숙종 기사(關宗 己巳:1689)).. 文靖公 韓 繼 禧 (문정공 한 계 희) 조선 세종1423 ~ 성종1482 14세 공은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계희(繼禧l)이고 字는 字順(자순)이다.함길도 관찰출척사(咸吉道 觀察黜陟使)를 지낸 청산군 혜(淸山君 惠)의 셋째 아들이고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의 손자이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창녕 성씨(贈 貞敬夫人 昌寧 成氏)는 양혜공 달생(襄惠公 達生)의 따님이다. 공은 세종(世宗) 5년(1423)에 태어나 세종 23년(1441)에 진사(進士)가 되고 세종 2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숭문원 정자(崇文院 正字)에 보임 되었다가 집현전 정자(集賢殿 正字)에 뽑혀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세종이 장서각(藏書閣)을 세우고 중국 등 사방 각처(四方 各處)에서 양서(良書)를 수집(蒐集)하여 비치(備置)하니 공이 빠짐 없이 다 읽고 머리 속에 넣고 다녀 사람들이 탄복(歎服)하고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秘書 虞世南)과 같다 하여 세남비서(世南秘書)라 칭(稱)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비서(秘書: 국가에서 가장 아끼는 소중(所重)한 책(冊) 혹은 서류(書類)를 칭할 때 쓰는 말)라고도 했다.성종실록(成宗實錄)에 세조가 문종께 말씀 드리기를 계희가 경서(經書)에 밝고 처신(處身)을 잘하여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고 적고 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잠저(潛邸:왕이 되기 전에 머문 사저)에 있을 때부터 공의 학문(學問)과 인품(人品)을 인정해 보도교수 겸 우문학(輔導敎授 兼 右文學)을 제수 받고 세자(世子)인 덕종(德宗)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쳤다.이어 좌필선(左弼善)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거쳐 세조 2년 정축(丁丑)에 예문관 직제학 겸 지제교(藝文館 直提學 兼 知製敎)와 세자우보덕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옮기고 예종이 세자로 책봉 되자 다시 내전에서 세자를 가르쳤다. 1458년 무인(戊寅)에 세자좌보덕 병조참의(世子左輔德 兵曹參議)가 되었고1460년에 우승지(右承旨)로 옮겼다가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중추원부사(嘉善大夫 工曹參參判 兼 中樞院副使)가 되고 1462년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세자우빈객(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世子右賓客)이 되고 이 때 흥천사 신종명(興天寺 神鐘名)을 지었다.1463년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고 1465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세자좌빈객(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世子左賓客)에서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1466년 선부(選部)를 관장하시며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고 146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공은 임무(任務)를 수행할 때 공정무사(公政無私)하여 청백(淸白)을 보전(保全)하고 늘 겸양(謙讓)하여 일체(一切)모나는일이 없었고,대사(大事)를 처리함에도 정확하여 아무도 이의나 시비를 걸지 못하였다.성종실록에는 공에 대하여, 세조를 만나 은총(恩寵)이 극진하였으나 마음이 늘 유백(愈白)하고 지위(地位)가 높되 의지를 더욱 낮추어 임금이 후대(厚待)하고 위로함이 더하였으며 명예와 절조에 힘써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젊어서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동료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聖人)이라는 분을 우리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한공(韓公) 같은 이와 비슷하지 않겠느냐며 어려워하고 존경하였다 한다. 1468년 세조께서 병(病)이 위독해지자 공을 급하게 내전(內殿)으로 부르시어 독대(獨對)한 자리에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한다 하여 공이 적극 만류하였으나 재차 명(命)하여 대보(大寶: 옥새)와 곤면(袞冕: 곤룡포)를 세자에게 전수(傳受)하는 일을 주관케 하였다.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장군등의 모반(謨反) 사건을 다스린 공(功)으로 추충정난 익대공신(樞忠定亂 翊戴攻臣)에 책록(策錄)되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졌다.그리고 숭록대부(崇錄大夫)로 예종의 상빈(上賓)이 되고 성종이 즉위(卽位)하니 책훈(策勳)되어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영릉(英陵)보호사찰(保護寺刹)로 신륵사(神勒寺)를 중창하여 보은사(報恩寺)로 개명하는데 도제조(都提調)로 참여하고 경국대전을 찬술, 간행하는데 제조가 되었다. 1470년 낙산사기(落山寺記)를 지었으며 1471년 성종 2년에 순성명량 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 經濟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후 간경사업(刊經事業)의 중심이 되어 능엄경(楞嚴經), 법화경 육조해(法華經 六祖解), 금강경 삼가해(金剛經 三家解), 원각경 심경(圓覺經 心經),영가집(永家集)등의 경인보급 (經印普及)에 진력하였다. 공의 가문(家門)은 조선 초기의 명문거족(明門巨族)으로서 가문의 배경보다는 세종 때 집현전 장서각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講記)로 쌓은 학식(學識)이 큰 바탕이 되었다. 풍부한 학식과 단정한 성품은 주위로부터 추중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徐巨正)과 교분이 두터웠다. 공이 병에 걸려 여러 번 위독하자 성종이 걱정하여 손수 기도문을 지어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어 주고 병이 낫자 불러 들여 『경(卿)은 나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오, 나는 경(卿)의 얼굴을 불쌍히 여기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경이 나를 도와 주었으므로 경이 병들었을 때 나도 걱정이 되오. 걱정이 지나쳐 경의 이름을 듣기 싫을 정도였는데 오늘 뜻밖에 경의 얼굴을 보게 되어 대단히 기쁘오.』하였다. 성종은 공의 청백리 지정을 권유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흉년에 백성들은 한 끼도 못 먹는데 내 어찌 세끼를 다 먹을 수 있으리요 하고 조석(朝夕) 두 끼만 식사하는 것도 밥과 죽(粥)으로 연명하였다. 그리하여 대소일가(大小一家)가 모여 상당부원군 한명회(上黨府院君 韓明澮)의 제안(提安)으로 문서를 작성하여 흥인문(興仁門) 밖 고암리(鼓岩里:현재 안암동 고려대 근처)의 논 10섬지기를 억지로 받게 하였는데 논은 받았으나 이 곳에서 나오는 소출(所出)은 집에 못들여 오게 하고 인근에 가장이 병든 집이나 가난한 선비, 과부,고아 등 살림이 어려운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공의 뜻이 유업(遺業)으로 가문에 계승되어 인근이 편안히 살게되어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이름을 편안할 안(安)자로 바꾸어 지금도 안암동(安岩洞)으로 부르고 있다.공은 일품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궁색(窮色)하기가 극(極)에 달하여 자녀의 혼수걱정을 하였으며, 집에는 언제나 책만 가득하였고 공의 책 읽는 소리만 들릴 뿐 항상 조용하였다 한다. 성종은 공에게 사패지(賜牌地)를 내리려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고 서평군의 봉작도 사양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성종의 끈질긴 사패지 하문으로 말년에서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신다면 대왕의 태실(胎室) 옆 한자리를 주심이 어떠냐고 말하니 성종은 쾌히 응낙(應諾)하고 태실을 광주군 태전리로 옮기고 율리(栗里:성남시 율동,)일대를 사패지로 내려 주어 현재의 능침(陵寢) 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공은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라에서 내리는 예장품은 일체 받지 말라고 한 유언(遺言)이 있었으니 청백리의 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성종 10년 의정부 좌찬성이 되어 성종이 선정치민(善政治民)하는데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성종 13년(1482) 윤(潤) 8월 19일 향년(享年) 60세로 졸(卒)하니 성종은 사흘간 조회를 폐하고 극진한 예우로 장사토록 하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 문정공(贈 大匡補國 崇錄大夫 議政府 領議政 諡 文靖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배위(配位) 정경부인 함양 여씨(貞敬夫人 咸陽 呂氏)는 좌랑 계(佐郞 稽)의 따님이며, 세조 1년(1455) 5월15일 졸하였다. 공의묘는 하조이고 배위묘는 상조 이다.사가서거정신도비명찬(四佳西居正神道碑銘撰)이고 영모제(永慕齊)가 있다. 아들은 서천군 사문(西川君 斯文), 판관 사무(判官 士武), 현령 사신(縣令 士信), 부사 사개(府使 士介), 사수(士粹), 사준(士俊), 이다. 고종 9년(1872) 부조지전 을 입었다.묘:경기도 성남시 율동 추현령장산 신좌 세향일: (음)10월5일. 西川君 韓 斯 文 (서천군 한 사 문)1446(세종 28)∼1507(중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예(子藝).좌찬성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계희(繼禧)의 아들이다. 공신의 자제로서 1462년(세조 8) 음보(蔭補)로 문소전직장(文昭殿直長)에 임명된 뒤 세자익위사세마 겸 선전관(世子翊衛司洗馬兼宣傳官)·이조정랑·군기시첨정·부정(副正)을 거쳐, 부평·철원·강화의 부사를 역임하였다.1478년(성종 9)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이 되고, 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통례원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를 거쳐, 1492년 우부승지·좌승지를 역임하였다.1495년(연산군 1) 가선대부가 되고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물려받아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이듬해 개성부유수,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고, 1498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500년 대사헌이 되고, 이해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1506년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이 되었다. 이해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判官公 韓 士 武(판관공 한 사 무) 15세 공은 조선 전기 문신이다.좌찬성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계희(繼禧)의 둘째 아들이다.문종(文宗)임신년(壬申年)에 출생하여,공은 한성부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하고 성종(成宗)임인(壬寅)년 9월10일 졸(卒)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을 증직받으셨다. 묘소는 성남 분당구 분당동 추현(秋峴)이며, 배위(配位)는 원주변씨(原州卞氏) 현감(縣監) 보(保)의 여식이고 자녀는 6남3녀를 두었다. 旌善公 承元(정선공 승원)牧使公 承亨(목사공 승형)遯庵公 承利(둔암공 승리)大司諫公 承貞(대사간공 승정)護軍公 承仁(호군공 승인)處士公 承義(처사공 승의)이며,사위朴明堅(박명신)鄭繼明(정계명),許紳(허신)이고,판관공의 후손으로 인조대왕비 인열왕후(仁熱王后)가 있으며, 백겸(百謙),문익공 준겸(文翼公 浚謙)형제등,정승이 두분 (효순,흥일)그외 종사에 공이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三登公 韓 士 信(삼등공 한 사 신) 15世 文宗2年壬申~燕山4年戊午9月4日1452~1498.9.4 공은 조선 전기의문신이다.자(字)는덕조(德祖)이며,좌찬성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계희(繼禧)의 셋째아들이고 어머니는정경부인 함양 여씨(貞敬夫人 咸陽 呂氏)는 좌랑 계(佐郞 稽)의 따님이다.공은 성종조 선략사맹 통훈대부 삼등현령 증통례원좌통례(成宗朝 宣略司猛 通訓大夫 三登縣令 贈通禮院左通禮)을지냈으며 향년47세로 졸하였는데.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율동 저수지공원위(廣州 突馬面 栗里 文靖公墓外 靑龍子坐 雙兆 有石儀)서평릉내의 문정공묘외 청룡자좌에 위치하며 배위 숙인경주이씨(淑人慶州李氏 中宗壬申卒 1512년졸하였으며)와 쌍조이다.부:직장 정견(父:直長 釘堅)이고, 자녀는 3남6녀를 생육 하였다. 영:옥천군수(永:沃川郡守)석:훈련원도정(碩:訓鍊院都正)상:좌충위부호군(常:左忠衛副護軍) 永興公 韓 士 介(영흥공 한 사 개) 15세 端宗癸酉~中宗辛巳(1453∼1521) 공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字:士廉(사렴)이며시호는 영흥이고 영흥부사(永興府使)와 해주, 광주, 진주목사를(海州,廣州,晉州牧使) 역임하였다.中宗辛巳7月6日卒(壽69)세로 졸(卒) 하였다.배위 贈貞夫人 慶州李氏(증정부인 경주이씨) 忌日:正月19日父:大司憲 有仁 (부:대사헌 유인) 의따님이다.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묘.廣州 突馬面 栗里 文靖公墓下 辛坐 合兆 (광주 돌마면 율리 문정공묘하 신좌 합조)이고,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술하에3남2녀를두었다.胤熙(윤희)胤昌(윤창)胤興(윤흥)南世則:宜寧人(남세칙:의령인)李玖:載寧人 進士(이구:재령인 진사) 栗軒公 韓 明 勖(율헌공 한 명 욱)19세 명종 22년~효종 3년(1567~1652) 知中樞府事 資憲大夫(지중추부사 자헌대부) 공은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문신(文臣)이다.휘(諱)는 명욱(明勖)이요, 자(字)는 욱재(勖哉), 호는 율헌(栗軒)이다.도곡공 술(陶谷公 述)의 아들이요, 청연공 지원(靑蓮公 智源)의 손자로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5대손 자이다.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贈 貞敬夫人 全州李氏)로 감찰 운(監察 韻)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22년(1567) 생으로 선조 39년(1606)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충의위사과(忠義衛司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현감(縣監)이 되고 광해군(光海君) 4년(1612)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1614년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고 이듬해 사서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이 때 소북파(小北派)의 영수(領袖) 남이공(南以恭)을 탄핵(彈劾)하여 파직(罷職)되어 평산(平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후에 장령(掌令)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歷任)한뒤 1618년 군자감정 봉상시정을 거쳐 이듬해 양서어사(兩西御使)로 파견(派譴)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파(大北派)가 실각(失脚)하여 관직(官職)에서 물러 났다가 다시 기용(起用)되어 인조 8년(1630) 동지사(冬至使) 겸(兼)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인조 20년에 호군(護軍)이 되었고 그 뒤 (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1646년 기노사(耆老社)에 시입(始入)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낙향(落鄕)하여 호(號)를 율헌(栗軒)으로 하고 광주율리(廣州 栗里) 선영(先塋)에 한거(寒居)하다가1650년 淸蓮(청연), 陶谷(도곡), 苔巷(태항) 三夫子의 시문(詩文)을 모아 <삼체집三體集>을 간행(刊行)하였다.<삼체집三體集>은 영의정(領議政) 김상헌(金尙憲)과 대제학(大堤學) 이민구(李敏求)가 서문(序文)을 썼다.(鄭松江)송강 정철, 성우계(成牛溪) 두 분 선생으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공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장의(掌議) 때 장계곡(長溪谷)과 더불어 우계, 율곡(牛溪 栗谷)의 재차(再次) 무고(誣告)를 천하명문(川下名文)으로 소변(疎辯)한 상소문(上疏文)은 사림(士林)에 유명(有名)하다.효종 31년(1652)에 86세를 일기로 졸(卒)하니 묘갈(墓碣)을 자찬(自撰)하였으며, 배위(配位) 정부인 고령박씨(貞夫人 高靈朴氏)는 증 판서 양 (贈 判書 梁)의 따님이고, 계비 정부인 동래정씨(貞夫人 東萊鄭氏)는 좌랑 상의(佐郞象義)의 따님이다.아들은 감역 항(監役 亢)과 상(商), 장(章)이다. 묘소는 배 정부인 고령박씨(貞夫人 高靈朴氏), 동래정씨(貞夫人 東萊鄭氏)와 함께 고 도곡공 묘전 자좌 품자(考 陶谷公 墓前 子坐 品字) 삼조(三兆)이다.전향(前向)에서 제일 위 의묘가 공묘(公墓)이고 좌측(左側)이 배 정부인 고령박씨(配 貞夫人 高靈朴氏)묘이며 우측(右側)이배 정부인 동래정씨(配 貞夫人 東萊鄭氏)의 묘이다. 判書公 韓 致 應(판서공 한 치 응)26세 영조 36년~순조 24년(1760~1824) 兵判, 判義禁府思兼 漢城判尹(병조판서, 판의금부사 겸 한성판윤)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휘(諱)는 치응(致應)이고 자(字)는 계보(溪甫))또는 계부(溪夫)이고 호(號)는 병산( 山)이다.증 찬성공 광적(贈 贊成公 光迪)의 아들이고 증 이판공 세장(贈 吏判公 世章)의 손자 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7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여홍 민씨(贈 貞敬夫人 驪興 閔氏)로 참판 명인(參判 命寅)의 따 님이다.공은 영조(英祖)36年(176O)9월 9일 생이다. 정조(正祖)8년(1784)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바로 초계문신(抄啓文臣:당하관 가운데 문학에 뛰어나 시험관으로 뽑힌 문신)으로 뽑힌 뒤 1792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같은 해 지평이 되고 1795년 관동 암행어사로 나가 원주,영춘 등지의 창곡(倉穀)·전정(田政)·군정(軍政)의 부패상과 관리들의 비위 사실을 낱낱 이 폭로하였다.1797년 수찬,교리를 거쳐,집의를 역임한 뒤 1799년 진하 겸 사은사 (進賀 兼 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순조(純祖)6년(1806)신유사옥 때 관직을 추탈당한 채제공(蔡濟恭)의 신원(伸寃)을 청한 승지 심규로(沈奎魯) 에 동조,윤필병(尹弼秉)등과 함께 연합상소한 사건으로 하여 삭출되었다.1808년 다시 기용되었으나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무뢰배들의 난동사건이 있어 그들을 처벌한 결 과 10여명이 곤장에 맞아 죽은 불상사가 발생하여 파직당하였다.그뒤 1812년 이후 비변사제조와 대사성,대사간,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817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이듬 해 돌아와서 한성판윤이 되고,1820년 형조판서가 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1821년 판돈녕부사,병조판서,빈궁당상(嬪宮堂上), 우참찬,판의금부사 겸 한성판윤을 지낸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 임지에서 세상을떠났다.시문(詩文)이 뛰어나 이유수(李備修),홍시제(洪時濟),윤지눌(尹持訥),정약전(丁若銓),채홍원(蔡弘遠)등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시로써 교유하였다. 저서(著書)로는《병산집(병山集)》이 있다.순조(純祖)24년(1824)10월 12일 65 세로 졸하니 사림(士林)들이 회장(會葬)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선산 김씨(貞夫人 善山 金氏)는 전적 명흠(典籍 明欽)의 따님이고 정부인 여산 송씨(貞夫人 礪山 宋氏)는 지상(之상)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서 진정(判書 鎭庭)이다. 공은 화도면 묵계 자좌(和道面 墨溪 子坐)에 안장(安葬)되었는데 배 정부인 선산 금씨(配 貞夫人 善山 金氏)와 합조(合兆)이다. 공의 배 정부인 여산 송씨(配 貞夫人 礪山 宋氏)는 순조(純祖)7년 (1807)3월 23일 졸함에 화도면 묵계(和道面 墨溪)공묘와 상하조(上下兆)이다.묘: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묵계자좌 文翼公 韓 浚 謙(문익공 한 준 겸)19 세 명종 12년~인조 5년(1557~1627) 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仁烈王后 父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인열왕후의 부친) 공(公)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휘(諱)준겸(浚謙)요 자(字)는 익지(益之) 이고 호(號)는 유천(柳川)이다.유음공 효윤(柳陰公 孝胤)의 셋째 아들이고 군수공 여필(郡守公 汝弼)의 손자이다.그리고 어머니는 시정공 신 건(寺正公 申 健)의 따님이 다.공은 명종(明宗)12년(1557)한성(漢城)에서 태어났다.선조(宣祖)12년(1579)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장원이었다. 선조 18년(1585)태능 참봉(泰陵 參奉)에 제수되고 이듬 해 별시문과(別試文科)병 과(丙科)로 급제하고 이해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날렸다.주서(注書),봉교(奉敎),전적(典籍)을 거쳐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는데 선조가 그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고 사가독서(陽暇讀書) 하게 하였다.이 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각되자,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수개월 만에 풀려나 원주로 이사하였다.1592년 다시 서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강원도도사,사서를 역임하고 원주목사가 되어 유망민 (流亡民)을 초집(招集),진휼(軫恤:가없이 여겨 동정함)하는 데 힘썼다.1595년 내직으로 지평,필선,정언,교리를 역임하고,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이어 검상(檢詳),사인(舍人),부응교,사간,집의를 지냈다.1597년 좌부승지에 올라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馬草)와 병량(兵糧)의 보급에 힘 썼다.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우승지,경기감사,대사성을 거쳐,다음 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다음 해 병조참판을 거쳐,내외의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고,그뒤 대사헌, 한성부판윤 및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특히,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소학》·《가례》등의 책을 간행,보급하여 학문을 진홍시켰다.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고,1617년 충주에 부처(付處)되 었으며,1621년 여주에 양이(量移:刑을 減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김)되었다. 이 해 오랑캐 침입의 위험이 있자 이에 대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 에 임명되었고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국경수비에 힘썼다.1623년(인조 1)인조반정으로 공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서평부원 군(輔國崇綠大夫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 돌아와 지 춘추관사(知 春秋館事)로《광해군일기》편찬에 참여하였다.1627년 정묘호란 때 배위대장(陪衛大將)으로서 왕자를 전주(全州)에 시종하였다.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공은 인조(仁祖)5년(1627)7월 17 일 71세로 졸하니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왕 세자(王世子)가 와서 조상했다.증 영상(贈 領相)이며 시호(諡號)를 문익(文翼)라 내렸다.함흥(咸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저서(著書)로《유천유고 (柳川遺稿)》가 있다.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행장(行狀)을 짓고 관해 이민구(觀海 李敏求)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배위(配位)회산부부인 창원 황씨(檜山府夫人 昌原 黃氏)는 좌랑 성(佐郞 珹)의 따님 이고 아들은 좌윤 회일(左尹 會一)소일(昭一)이다. 공의 따님 세 분 참판 여이징(參判 呂爾徵)의 배위(配位),참판 정백창(參判 鄭百昌) 의 배위(配位),진원군 이세완(珍原君 李世完)의 배위(配位) 공의 측실(側室)과 같이 네 분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강화도(江華島)가 함락(陷落)됨에 자결순절(自決殉節)하였다. 공은 인조 仁祖 5년(1627) 7월 17일에 졸하니 이 해 9월 임오(壬午)에 원주 음지촌(原州 陰地村)경향(庚向)언덕에 즉 선조(宣祖)27년(1594) 8월 13일 졸한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配 檜山府夫人 昌原 黃氏)묘에 입장(入葬)합조(合兆)하였다. 位置;京廳道 始興市 君子面 去毛里 上龍山 良坐 歲享日:陰 7월 17日.묘:경기도 시흥시 군자면 거모리 상룡산 간좌 判書公 韓 致 範(판서공 한 치 범) 20世 선조 17년~효종 3년(1584~1651) 資憲大夫 兵曹判書(자헌대부 병조판서) 公의 諱 소(塑)요 字는 방서(邦瑞)요 초휘(初諱) 치범(致範)이니 문과(文科)급제(及第)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지낸 흥길(興吉)의 아들이요 사맹(司猛)을 지낸 건(楗)의 손자이다.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고 가사(家事)를 도와 둔거지(遁居地)에서 숨어 살았다.그 연유(緣由)는 아버지가 선조(宣祖)때 벼슬하다가 광해군(光海君)의 정사가 어지러워 영광(靈光)으로 낙향(落鄕) 때문이다.公이 영민(英敏)하여 선현(先賢)의 학문(學問)을 익혀 명망(名望)이 사위(四圍)에 떨치니 오히려 학행(學行)이 앞서는 바 되었다.인조반정(仁祖反正)후 갑자년(甲子)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올랐다.公은 아름다운 미덕으로 믿음과 충성으로 군주(君主)에 은혜를 갚으면서 나라일에 힘쓰고 아래로는 물건(物件)을 아껴 쓰며 대중을 사랑하며 선(善)을 베풀면서 어두운 백성을 가르치고 혹 한가로운 때는 덕(德)이 있는 사람과 도의(道義)로써 친교하니 만년 (晩年)에는 벗을 따라 경남 사천(慶南 泗川)으로 낙향(落鄕)하여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효종(孝宗)2년 10월 13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68세이요 묘지(墓地)는 사천군 북면 구암리 강성곡(江城谷)입오산(立午山)병좌(內坐)이다. 배위(配位)정부인 연안 차씨(貞夫人 延安 車氏)는 이조판서 천로(吏曹判書 天輅)의 따님이다.효종(孝宗)3년 임진(壬辰)에 졸(卒)하여 公과 합폄(合폄)이다. 公에게는 아들 三兄弟가 있으니 起世,仁世,吾世이다.公이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영광 진석산(靈光 陳石山)아래 둔거지(遁居地)를 거쳐 경남 사천(慶南 泗川)에 낙향(落鄕)하여 여생(餘生)을 마쳤으므로 이곳에 유적비(遺蹟碑)를 세워 公의 행적(行蹟)을 기리고 있다. 재실은 판서공(判書公 諱 致範)이하 열위(列位)의 교훈(敎訓)과 덕행(德行)을 영모(永慕:오래도록 잊지 않고 사모함)하고자 후손이 뜻을 모아 길지(吉地)에 지은 재사(齋舍)이다. 1996년 봄에 세우다. 判書公 韓 致 肇(판서공 한 치 조)26세 순조 8년~고종 26년(1808~1889) 工曹判書(공조판서)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으로 생부(生父)는 참판공 익상(參判公 益相)이다. 휘(諱)는 치조(致肇)요 자(字)는 긍숙(肯叔),호(號)는 자애(紫崖)이다. 이판공 제권(吏判公 濟權)의 아들이고 참판공 명간(參判公 命간)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2대손이다.어머니는 증 정부인 은진 송씨(贈 貞夫人 恩律 宋氏) 로 직필(直弼)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8년(1808)4월 23일 생이다. 헌종(憲宗)15년(1849)생원(生員) 이 되고 오군부사(五郡府使)를 역전(歷典)하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고종 (高宗)26년(1889)9월 11일 82세로 졸하였다.유고(遺稿)가 있다.배위(配位)정부인 청송 심씨(貞夫人 靑松 沈氏)는 승지 계석(承旨 啓錫)의 따님이며 아들은 진회(鎭繪)이다.공의 배 정부인 청송 심씨(配 貞夫人 靑松 沈氏)는 고종(高宗)18년(1881)10월 8 일 졸하니 귀여리 가지동 사좌(歸歟里 加支洞 巳坐)에 안장(安葬)하였다. 判書公 韓 鎭 庭(판서공 한 진 정)27세 정조 23년~철종 27년(1799~1862) 兵曹判書(병조판서)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으로 생부(生父)는 치익(致益)이다.휘(諱)는 진정 (鎭庭)이고 자(字)는 언학(彦學)이며 참찬공 치응(參贊公 致應)의 아들이고 찬성공 광적(贊成公 光迪)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8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3대손이다.어머니는 정부인 선산 김씨(貞夫人 善山 金氏)로 전적 명흠 (典籍 明欽)의 따님이다. 정조(正祖)23년(1799)7월 29일 생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철종(哲宗)13년(1862)윤 8월 18일 64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초계 정씨(貞夫人 草溪 鄭氏)는 겸선(謙善)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서 경원(判書 敬源),학관 기원(學官 崎源)이다.공의 배정부인초계정씨(配貞夫人草溪鄭氏)는 철종(哲宗)7년(1856)3월 20일 졸함 에 부론면 손곡리 자좌(富論面 蓀谷里 子坐)에 합조(合兆)되었다. 所在地:江原道 原州市 富論面 蓀谷里 子坐 判書公 韓 敦 源(판서공 한 돈 원)28세순조 20년~고종 19년(1820~1882) 刑曹,工曹判書(형조, 공조판서)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휘(諱)는 돈원(敦源)이고 자(字)는 공윤(公允)이다.판서공 진정(判書公 鎭庭)의 아들이고 판서공 치응(判書公 致應)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華公 百謙)의 9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4대손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초계 정씨(貞夫人 草溪 鄭氏) 겸선(謙善)의 따님이다.공은 순조(純祖) 20년(1820)12월 27일 생이다. 철종(哲宗)9년(1858)정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에 홍문관 관원으로 발탁되었다.고종(高宗)4년(1867)성균관 대사성,1868년 이조참의,1871년 대거승지 (對擧承旨)를 역임하였다.아산현감(牙山縣監)때 송덕비(頌德碑)가 섰고 1872년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부임할 때 성역(城投)을 잘 수행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 의하여 포장(포奬)됨으로써 가자(加資)되었고 개성남문(開城南門)앞에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또한, 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다 되었으나 송도민이 간청하여 유임되기도 하였다.1873년 정사 이근필(李根弼),서장관(書狀官)조우희(趙宇熙)와 함께 부사의 직책으로 중국에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또한,1876년에 공조판서에 올랐는데 진하 겸 사은사(陳貨 兼 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1880년 다시 공조판서로 부임하여 부묘도감제조(부廟都 監提調)를 겸직,공역(工役)을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었다.고종(高宗)19년(1882) 7월 13일 63세로 졸하였다.만인산(萬人傘)은 지금도 자손이 보존하고 있다.배위(配位)정부인 한양 조씨(貞夫人 漢陽 趙氏)는 승지 석구(承旨 錫龜)의 따님이고 정부인 남평 문씨(貞夫人 南平 文氏),정부인 선산 김씨(貞夫人 善山 金氏)이며 아들은 정자 석동(正字 晳東),형동(馨東 系崎源后),승동(承東)이다.공(公)의 배 정부인 한양 조씨(配 貞夫人 漢陽 趙氏)가 고종(高宗)14년(1877)2월 4일 졸함에 부론면 홍호리 월봉계좌(富論面 興湖里 月峰癸坐)에 公과 합조(合兆)되었다.位置:江原道 原州市 富論面 興湖里 月峰 癸坐 判書公(韓 敬 源)(판서공 한 경 원)28세순조 17년~고종 27년(1817~1890) 工曹判書, 漢城判尹, 大司憲(공조판서, 한성판윤, 대사헌) 공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생부(生父)는 진우(鎭寓)이고 휘(諱)는 경원(敬源),자(字)는 공수(公授)호(號)는 유파(柳坡)이다.현감공 진서(縣監公 鎭序)의 아들 이고 참의공 치영(參議公 致永)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9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4대손이다.순조(純祖)17년(1817)11월 5일 생이며 헌종 (憲宗)6년(1840)진사(進士)되고 이듬해에 제술시(製述試) 표(表)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나아갔으며 184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46년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발탁된 이후 주로 홍문관 관원으로 일하였다.철종 (哲宗)9년(1858)청북 암행어사(淸北 暗行御史)이건필(李健弼)이 이전에 그의 의주 부윤 때의 문제를 조정에 보고하여 죄를 받았다.고종(高宗)7년(1870)진하예방승지 (陳賀禮房承旨),성균관 대사성,규장각 직제학을 두루 거쳤고,1873년 진하 겸 사은 사행(陳賀 兼 謝恩使行)에 정사 이건필과 함께 부사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874년 대사헌,1875년 이조참판,1877년에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879년 사은 겸 동지사행에 정사로서 수행하였으며 그뒤 공조판서를 거쳐,1881년 한 성부판윤,대사헌을 지냈다.또한,‘이만손(李晩孫)의 상소내용을 문제삼아 그를 귀양보내는 데에 앞장섰는데,경기도 유생 신 섭(申섭)등이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곤란에 빠지기도 하였다. 1887년에는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에게 아직 체포령이 내려져 있으므로,그와 내통한 지석영(池錫永),지운영(池運永)을 국문하도록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과 함께 상소를 올혔다. 고종(高宗)9년(1872)주안(奏案)을 임금이 허가하여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부조지전(不 之典: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의 神主를 永久히 祠堂이나 齋室에서 제사지내게 하던 은전)을 입었다.공은 고종(高宗)27년(1890)6월 1일 74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진주 유씨(貞夫人 普州 柳氏) 군수 상림(郡守 相林)의 따님이고 정부인 광산 김씨(貞夫人 光山 金氏 재구(在九)의 따님이며 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는 도정 석윤(都正 錫胤)의 따님이다.아들은 찬정 기동(贊政 耆東)이다. 공의 배 정부인 진주 유씨(配 貞夫人 晋州 柳氏)는 광무(光武)7년(1903)6월 15일 에 졸하고 배 정부인 안동 권씨(配 貞夫人 安東 權氏)는 광무 l년(1897)2월 9일에 졸하니 노림리 율계 곤좌(魯林里 栗溪 坤坐)에 삼합조(三合兆)되었다. 贊政公 韓 耆 東(찬정공 한 기 동)29세헌종 11년~광무 6년(1845~1902) 議政府 贊政, 宮內府 特進官(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 공(公)은 조선 말기(末期)의 문신으로 생부(生父)눈 계원(啓源)이다.휘(諱)는 기동 (耆東)이고 자(字)는 경회(景會),호(號)는 유미(柳渼)이다.판서공 경원(判書公 敬源)의 아들이고 현감공 진서(縣監公 鎭序)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5대손이다.헌종(憲宗)11년(1845)9월 17일 생이다.고종(高宗)7년(1870)정시별시(庭試別試)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奎章閣 待敎)에 나갔다. 이조참의(吏曹參議),검교대교(檢校待敎)등을 거쳐 고종 31년(1894)법무대선(法務大臣),탁지협판(度支協辦)에 이르렀다.다음 해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의 외직에 나갔 다가 이후 광무(光武)2년(1898)의정부 찬정(議政府 贊政),1900년 궁내부 특진관 (宮內府 特進官)을 역임하였다.광무(光武)6년(1902)3월 1일 졸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기계 유씨(貞夫人 杞溪 兪氏)는 부사공 치장(府使公 致長)의 따님 이고 계배(繼配)는 정부인 은진 송씨(貞夫人 恩律 宋氏)이다. 아들은 참봉 경우(參奉 경愚)이다. 공이 졸함에 강천면 부평리 건좌(康川面 釜平里 乾坐)에 사림(士林)들이 회장(會葬) 하였다. 공의 배 정부인 기계 유씨(配 貞夫人 杞溪 兪氏)는 고종(高宗)1년(1864)3월 20일 졸함에 강천면 부평리 안산 간좌(康川面 釜平里 安山 良坐)에 안장(安葬)되었다. 參判公 韓 繼 善 (참판공 한 계 선)14세 조선 세종(1426) ~ 성종(1487) 嘉善大夫 戶曹參判 韓公(諱 繼禧)(가선대부 호조참판 휘 계선) 公은 세종 8년(1426)12월 28일 생이다.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혜(惠)의 넷째 아들이고 태종(太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의 손자이다.公이 천자(天資:타고난 성품)가 영오(穎悟:남보다 뛰어나게 영특함)하고 재주와 지혜(智慧)가 총민(聰敏:슬기롭고 민첩함)하여 어려서 능히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알고 자라서는 서사(書史:經書와 史書)에 마음이 독실하여 경전(經典:經書)을 연구하고 성리(性理:人性의 原理)를 속깊이 연구하는 것으로써 평생(平生)의 사업으로 삼고 있다가 성종조(成宗朝)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歷任)하고 돌아와서 이르되‘벼슬길에 나돌며 이름을 구하고 재능(才能)을 자랑하는 것은 고결(高潔)한 선비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향리(鄕里)에서 살며 서사(書史)를 벗삼아 세상을 보냈다.또 한 집을 다스림에 법도(法度)가 있어서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警戒)하기를 무릇 몸을 망치고 집을 허물어 뜨리는 이는 모두 만족함을 알지 못하고 지나친 욕심에서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만족함을 아는 자는 마땅히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근본으로 하여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으로써 날마다 부신(符信)으로 삼으면 만사(萬事)가 안전하리라 하고 의기(意氣)가 서로 맞는 친구들과 함께 자연(自然)을 벗삼아 아무 구애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성종 정미(成宗 丁未:1487)에 62세에 졸하니 사림(士林:선비들)이 애석해 하였다.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 126번지 公의 墓所는 本來 配位 貞夫人 南平 文氏와 上(配位)下兆(50步 相距)였으나 1996년 4월에 配位 文氏를 公과 合폄으로 緬奉하였고,따라서 墓碑도 公墓前에 雙立으로 移竪 했다. 公의 墓表가 오랜 歲月에 풍마우세(風磨雨洗)하여 配位의 墓를 옮겨 公과 合폄하고 새로 이 개수(改竪)하였다.碑文은 公의 19代孫 긍희(肯熙)가 짓고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개수비(開竪碑)는 1982년 10월 3 일 공의 時享日에 세웠다. 公에게는 4男 3女가 있으니 長男이 通訓大夫 行燕岐縣監 珽 이요 次는 司憲監察을 지낸 송화현감 근(松禾縣監)瑾이요 次는 통정대부 행진위현령 개(通政大夫行振威縣令 (王+介))이고 季는 통훈대부 행상운도찰방 침(通政大夫 行祥雲道察訪 深)이다. 襄平公 韓 繼 純 (양평공 한 계 순)14세 조선 세종1431 ~1486 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 崇政大夫 淸平君 諡襄平韓公(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총평군 시 양평한공) 公의 휘(諱)는 계순(繼純)이요 자(字)는 수옹(粹翁)으로,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를 지내고 후에 서원부원군 영의정(西原府院君 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청산군(淸山君 惠)의 아들 오형제(五兄弟)중 막내이다.조부(祖父)는 조선조 개국공신(朝鮮朝 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휘 상경(諱 尙敬)이다.公은 나면서 재능(才能)이 뛰어나고 성숙하면서 경사(經史:四書三經과 歷史)를 익혀 문음(門蔭: 선조의 공훈)으로 충의위(忠義衛)에 보(輔)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공조정랑 (工曹正郞)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에 올랐을 때 남이(南怡)의 반란(反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補社秉幾定難 翊戴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철권(鐵券)을 내렸으며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청평군(淸平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좌승지(左承旨)때 예종(睿宗)이 승하(昇遐)하자 성종(成宗)으로 대통(大統)을 잇는데 정희왕후(貞憙王后)를 도왔다.곧 자헌대부 공조판서 (資憲大夫;工曹判書)가 되고 순성명양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오위도총관(五衛都聰管)을 겸하였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들어와 인사행정(人事行政)에 조금도 사(私)가 없었다.정헌 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기고 도총관(都聰管)을 겸하였다.이때 나라에서 창경궁(昌慶宮)을 짓는데 公이 선공감도제조(繕工監都提調)로서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마친 공(功)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했다.公이 성종 병오(成宗 16년:1486)2월에 56세로 졸하니 나라에서는 2일간 조회(朝會)를 걷고 예를 갖추어 양주군 동쪽 금굴리(楊州郡 東便 金掘里(현재 의 묘소 위치)에 부인 안동 권씨 (夫人 安東 權氏)와 같은 자리이다. 광(壙)은 따로 예장(禮葬)하고 양평 (襄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公은 長身으로 옥(玉)과 같이 밝 고 아름다워서 풍채(風彩)가 준수 (俊秀)하며 고관(高官)에 부귀(富貴)를 누렸으되 교만하지 아니 했고 대인(對人)을 극진히 하였으며 모가 나지 않아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公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참판 (參判)김유(金유)가 지었는데 그 명(銘)가운데 공훈(功勳)을 종(鍾) 에 새겨 공(公)의 지위(地位)더욱 더 높았으나 公의 마음은 더욱 공손 하여 사람을 대함에 용납함이 있었으니 장수(長壽)강녕(康寧)함을 누릴줄 믿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빼앗으니 누가 이를 말리겠는가라고 하였다. 公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장은 무과(武科)급제(及第)하여 상호군(上護軍)을 한 곤 (崑)이고 차(次)는 부호군(副護軍)강(崗)이다.묘: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126번지 府尹參判公 韓 尙 德(부윤 참판공 한 상 덕)12세 公은 조선(朝鮮)초기(初期)의 문신(文臣)으로 公의 諱는 상덕(尙德)이요 자(字)는 계덕(季德)인데 이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先生)이 지은 한씨사자설(韓氏四子說) 에서 볼 수 있다.公은 학문(學問)높기로 이름난 유항(柳巷)문경공(文敬公 脩)의 넷 째 아들이요 고려 공신(高麗 功臣)평간공(平簡公 公義)의 손자이다. 음사(陰仕)로 종부시승(宗簿寺丞)이 되고 1385년에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태종 9년 (1409)사간원 지사(司諫院 知事),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를 거처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치사(致仕)하였으나 간관(諫官)과 승지(承旨)의 자리에 있을 때 남긴 실록(實錄)이 특별(特別)하므로 전재(全載)하여 후일(後日)의 참고(參考)가 되기를 바란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太宗 9년 太宗이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갔는데 사간원 지사 한상덕(司諫院 知事 韓尙德)이 나아가 아뢰기를“순(舜)임금은 성인(聖人)이었으나 호도(扈陶)는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며 당 태종(唐 太宗)도 영명(英明)한 임금이었으나 위증 (魏徵)이 수 양제(隋 煬帝)처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는데 지금 신(臣)도 신우(辛禑)처럼 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싶습니다.전하(殿下)께서 오래도록 정사를 보지 않으셨는데 신의 생각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여깁니다”하니,太宗이 말하기를“나 는 이 철만 되면 늘 안질(眼病)이 발생하였는데 올해도 마찬가지이다”하였다.韓尙德 이 말하기를“정성으로 大國을 섬기고 위엄으로 왜구(倭寇)를 막음으로써 太平時代로 불리고 있습니다.그러나 항상 스스로 경외(敬畏)하여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사방의 말 을 널리 들어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不肖)한 사람을 물리칠 것이며, 편안해도 위태로움 을 잊지 말고 잘 다스려져도 어지러움을 잊지 마소서.그렇게 하면 오늘날의 치정(治政)이 三王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太宗이 기뻐하며 말하기를“三王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하였다.韓尙德이 말하기를“殿下의 正心과 성의(誠意)가 天地의 덕(德)과 합치(合致)되었으니‘내가 불민(不敏)하다’고 말하지 않으시면 옛날의 성인(聖人)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韓尙德이 밖으로 나가자 太宗이 말하 기를“한상경(韓尙敬)의 말은 매우 절실하였는데 그의 아우도 마찬가지이다.내가 王位 에 오른 뒤로 간관(諫官)중에 韓尙德처럼 경계의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하였다. 後日 太宗이 정사(政事)를 볼 때 韓尙德이 또 나아가 말하기를“지금 찌는 듯한 여름 에 기후가 고르지 않아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은 채 가을처럼 쓸쓸한 바람만 불고 있습니다.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이 失德하여 그러한 것입니까?지금의 政事가 잘되어 그런 것입니까?”하니,太宗이 말하기를“政事의 잘못은 간관(諫官)이 의당 스스로 알 것이다”고 하였다.韓尙德이 말하기를“명령을 내리면 政府에서는 받들어 이행 하므로 臣等이 비록 들은 바가 있더라도 이미 시행된 뒤였습니다.전일에 課官을 政府 에다 붙여두자고 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고 하였다.太宗이 그에 유사한 어떤 고사(故事)가 있는지 묻자,황 희(黃 喜)가 말하기를“건국(建國)초기에 李文和와 윤 사수(尹思脩)가 모두 課官으로 경력(經歷)을 겸직(兼職)하였습니다”고 하니,太宗이 말 하기를“이는 좋은 법이 아니다. 經歷이 비록 중한 임무이기는 하나 재상(宰相)에게 예 속된 관리이다.임금의 동정(動靜)과 政事의 득실(得失)을 모두 바로잡는 것은 諫官이 다.그런데 諫官으로서 經歷을 兼職시킨다는 것은 조정을 존중하고 諫官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韓尙德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대간(臺諫)이 모두 사안을 말하였다가 파직(罷職)되어 쫓겨났습니다.그리고 그들만 처벌한 게 아니라 서로 의논한 사람들까지 국문(鞠問)하였습니다.그래서 사림(士林)들이 간관(諫官)의 문 앞을 지나가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고 있습니다”하였다.또 말하기를“전하(殿下)의 言行이나 정사(政事)의 시행이 바로 잡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그러나‘政事는 이미 다스려졌고 백성은 이미 편안해졌다’고 하지 말고 한가하게 혼자 계실 때마다‘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 중에 어떤 것이 하늘에 어긋났으며, 시행한 政事 중 어떤 것이 백성의 마음을 거슬렸는가? 하고 스스로 깊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항상 앞으로도 그렇게 될까 생각한다변 화(禍)를 소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옛날의 성현(聖賢)들이 모두 이와같 이 하였습니다”하니 태종(太宗)이 말하기를“좋은 말이다”고 하였다. 한상덕이 물러가지 않자 太宗이 말하기를“또 말할 것이 있는가?”하니,韓尙德이 말 하기를“지난 해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데 유정현(柳廷顯)이 충청도 (忠淸道)관찰사(觀察使)로 있으면서 세금을 많이 매기고 독촉하여 백성을 거둡 괴롭혔습니다.신등(臣等)이 이미 그를 탄핵하여 문초(問招)하였으나 때마침 사면령(赦免令) 을 내린 바람에 처벌하자고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듣건대,《大學》에‘세금을 많이 거두는 신하보다는 차라리 도둑질 하는 신하가 더 났다’고 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국가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것은 重한 것 같고 백성의 재물을 많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경(輕)한 것 같으니,古人이 경계한 뜻이 깊습니다 하자,太宗이 말하기를“나의 좌우 에 있는 승지(承旨)도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하고 즉시 도당(都堂)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太宗 11년.太宗이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 말하기를“작금 國家에 일이 없 으니 내가 혹한(酷寒)을 당할 때마다 매일 조정에 나와 일을 봄으로써 경등(卿等)과 같이 부지런하여 태만함이 없도록 하고 싶다”고 하니,韓尙德이 말하기를“政事를 부지런히 보는 것은 제왕(帝王)의 美德이고 안일(安逸)에 빠질까 봐서 古人이 경계하였으니,비록 일이 없더라도 매일 조정에 나오시는 것은 정말 미덕(美德)입니다”하였다. 太宗이 승지(承旨)들에게 말하기를“대학연의(大學衍義)의 글 중에 덕정(德政)과 형정(形政)에 대한 先後의 구분과 백성의 고락(苦樂)에 대한 실상을 말한 것이 특히 긴요 하다”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韓尙德을 명하여 大戰의 벽에다 크게 써서 君臣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太宗 13년.太宗이 承旨 韓尙德에게 말하기를“形房 承旨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니 경(卿)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고 하니,韓尙德이 대답하기를“전하(殿下)께서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萬物)을 다스리므로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만, 臣도 밤낮으로 신중히 하여 한 사람이라도 무고(無辜)하게 처벌을 받아 잘리기를 좋아 하시는 殿下의 德에 누(累)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하니,太宗이 말하기를“내가 판결을 잘못 내렸을 경우에는 경(卿)이 숨김없이 직언(直言)하도록 하라”하였다. 太宗 14年 한산부원군 조영무(漢山府院君 趙英茂)가 죽었는데 太宗이 承旨 韓尙德을 명하여 대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世宗 7년.世宗이 말하기를“옛날에는 태평시대(太平時代)인데도 불구하고 임금의 옷 자락을 붙잡고 간절히 간(諫)한 사람이 있었다.지금 비록 소강(小康)상태이기는 하나 필시 옛날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面前에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그것은 지금 사람이 古人보다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한 선제(漢 宣帝)시대 엔 안에는 관리와 백성이 편안하고 밖에는 흉노(匈奴)가 번신(藩臣)이라고 일컬었으나 후세의 평론가(評論家)는 화근(禍根)을 만든 임금이었다고 하였다.宋나라 王安石이 재상이 되어 스스로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히 하였다고 하였으며,신종(神宗)도 정신을 가다듬어 治政을 꾀하였으나 후세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 는가?”하니,韓尙德이 말하기를“殿下의 오늘 하신 말씀은 사실 종사(宗社)와 백성(百姓)의 복입니다”고 하였다. 公의 배위(配位)는 이길생(李吉生)의 따님인데 양위묘소(兩位墓所)가 실전(失傳)되고 더욱 公에게는 후손(後孫)이 없어 전(傳)해 오는 문적(文籍)도 살필 길이 없다. 忠簡公 韓 理(충간공 한 리)11세 忠簡公(韓 理) ?~태종 17년(1417)공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며 휘(諱)는 리(理)이다.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 의 둘째 아들이며,충혜왕묘 배향공신(忠惠王廟 配享功臣)인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사숙공 악(三重大匡 都僉議 右政丞 思肅公 渥)의 손자이다. 공민왕 11년(1362)10월,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로서 문과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제17인으로 급제한 후 우왕(禑王)1년(1375)7월,시중 이인임(待中 李仁任)이 김 의(金 義)와 공모하여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도 죄를 면하였다는 등 네 가지 죄목을 들어 간관 이첨(諫官 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상소하므로 한리가 친종호군(親從護軍) 으로서 옹양군 상호군 우인열(鷹楊軍 上護軍 禹仁烈)과 함께 이인임의 뜻에 호응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간관(諫官)이 재상을 논핵(論劾)하는 일은 작은 것이 아니오니 변 백(辯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이에 이 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 다. 일찍이 공민왕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더니 급기야 사건이 발생하자 우왕(禑王)2 년(1376),한 안(韓 安)의 족(族)이라 하여 공을 먼 고을에 유배하었다. 공양왕(恭讓王)3년(1391)7월,세자를 명나라에 조현(朝見)하려고 함에 한 리가 예조판서(상서)로서 상소하여 이르기를“지금 세자로 하여금 조현케 하려 하오나 신 등이 그윽히 생각컨대 전하께서 즉위하신지 3년에 명나라 조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말(馬)만필(萬匹)을 구입하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낸 것은 2천 필에도 달하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세자로서 입조(入朝)케 하였다가 만약에 명나라에서 늦어진 것을 책망하게 되면 세자가 무엇으로서 대답하오리까.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소서”하니 왕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이를 의논케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吏部尙書)가 되었으며 이에 앞서 공은 한 천(韓 薦)과 우성범(禹成範),강준(姜準)과 함께 벼슬하여 매우 교분이 돈후(敦厚)하였으며,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도 사생을 맹서한 친우로서 사돈을 맺었고,문장덕행(文章 德行)으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혈족간(血族間)의 비호(庇護)로 유배를 면하고 조선조(朝鮮祖)가 건국된 뒤에는 태조(太祖)의 명으로 고려 왕실인 왕씨의 제사를 총관하였으며 태조 3년 7월 17일에 왕이 왕씨의 명복(冥福)을 천(薦)하여 전예의판서(前禮儀判書:尙書)한 리에게 명하여 법화경(法華經)4부를 금(金)글자로 써서 각 사(各 寺)에 분치(分置)하게 하였다.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폄직(폄職)된 후 태종(太宗)5년(1405)노비변경(奴婢辯正)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양인인 박상문(朴尙文)등을 민 제(閔 齊), 권 홍(權 弘)등이 천인으로 만들어 사역시켰던 사실이 알려졌다.태종은 사헌부(司憲府)와 형조(刑曹)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시켰는데 전 계림부윤 한 리(韓 理)도 이 일에 연루(連累)되어 안성(安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몇년 후 풀려나 집에 기거 중 태종 17년 (1417)11월 13일에 졸하니 태종은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이라 내렸으며 장례품 일체를 하사하는 후대(厚待)를 베풀었다.이는 왕의 총애가 지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광산 김씨(貞夫人 光山 金氏)로 충정공 속명(忠靖公 續命)의 따님이고 아들은 문과총제(文科聰制)로 정포은(鄭圃隱)의 서(增)인 승안(承顔)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청성군(淸城君)인 승순(承舜)이다. 공은 고위 평간공 묘하 청룡 하단(考位 平簡公 墓下 靑龍 下端)300m 쯤의 계좌(癸坐)에 안장(安葬 上兆)하였고 배 정부인 광산 김씨(配 貞夫人 光山 金氏)는 하조(下兆) 이다.공 졸후(公 卒後)102년인 중종(中宗)14년(1519) 5대손 영의정 효원(領議政 效元)이 갈명(碣銘)을 짓고 406년이 지난 1925년에 18대손 참정대신 규설(參政大臣 圭卨)이 지은 묘표(墓表)도 6·25전란으로 훼상(毁傷)되니 제손(諸孫)이 신비(新碑)를 도모하여,1993년 4월 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경부 기념사업회장 조경한(臨時政府 國務委員 臨時政府 紀念事業會長 趙擊韓)찬(撰)으로 개수(改修)하였고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세일제(歲-察)를 드린다.忠簡公(諱 理)配貞夫人 光山金氏 墓 位置:京畿道 坡州市 津東面 瑞谷里 癸坐 歲享日:淸明日 摠制公 韓 承 顔 (총제공 한 승 안)12세 公의 諱는 승안(承顔)이다.보익공신 이부상서(輔翼功臣 吏部尙書)충간공(忠簡公) 리(理)의 아들이요 보조공신 청성군(補祚功臣 淸城君)평간공(平簡公)공의(公義)의 손자이다.公의 유사(遺事)가 일실(逸失)되어 보첩(普諜)에 홍무병자(洪武丙子)에 등과 (登第)하여 가선대부 총제(嘉善大夫 摠制)로만 있을 뿐이다.公이 포은(圃隱)정몽주 (鄭夢周)의 따님과 결혼(結婚)하였으나 슬하(膝下)에는 무육(無育)이다.묘소(墓所)도 傳해 오는 기록이 없으니 후정(後情)이 아쉬울 뿐이다. 淸城君(韓 承 舜)(청성군 한 승 순)12세1380~1448 세종30년 中樞院副使 贈順忠補祚功臣 兵曹判書 淸城君 諱 承舜(중추원부사 증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청성군 휘 승순) 공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휘(諱)는 승순(承舜)이고 충간공 리(忠簡公 理)의 둘째 아들이며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의 손자이다.공은 고려 우왕(禑王)6년(1380)에 출생했다.태종(太宗)10년(1410)무과에 급제 하여 세종(世宗)9년(1427)상호군(上護軍)이 되고 동왕 21년(1439)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왕 23년(1441)완산부윤(完山府尹)때 진남루(鎭南樓)를 고쳐 지었다. 동왕 29년(1447)가선대부 중추원 부사(嘉善大夫 中樞院 副使)에 오르고 동왕 30년 (1448)6월 26일 졸하였다.향년(享年)이 69세였다. 공의 3자 정란공신 서구(靖難功臣 瑞龜)의 책훈(策勳)에 따라 순충보조공선 병조판서 청성군(純忠補祚功臣 兵曹判書 淸城君)을 증직(贈職)받았다. 배위(配位)고성군 부인 이씨(固城君 夫人 李氏)는 판중추 근(判中樞 懃)의 따님이고 후배 정부인 해풍 장씨(後配 貞夫人 海豊 張氏)는 목사 대유(收使 大有)의 따님이며 아 들은 판서 서룡(判書 瑞龍),.이조정랑 서봉(吏朝正郞 瑞鳳),시 양이 서구(諡 襄夷 瑞龜)이다. 공은 교하리 능곡 축좌(交河里 陵谷 丑坐)에 안장(安葬)되었고 배위(配位)고성군 부인 이씨(固城君 夫人 李氏)의 묘는 공묘하(公墓下)에 있다.배위(配位)정부인 해풍 장씨(貞夫人 海豊 張氏)의 묘(墓)는 교하면 능곡 동록 계좌(交河面 陵谷 東麓 癸坐)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산하근촌(山下近村 支石里)에 거주하는 이 준(李 峻)이 란 자가 자기 숙부(叔父)이 휘(李 徽)를 용미(龍尾)육,칠보상(六,七步上)에 암장한 일이 있어서 후손 택수삼대조(鐸洙三代祖)인 후능참봉 지(后陵參奉 芷)가 관아(官衙)에 진정(陳情)하여 굴이(掘移)케 하였다.(記錄現在保有)공의 재실(齋室)인 경선재(景先齋)는 1992년 10월 10일 건립(建立)되고 건평(建坪) 25평이다.淸城君(諱 承舜)墓 位置:京畿道 坡州市 交河面 交河里 陵谷 丑坐 歲享日 陰 10月 3日. 判書公 韓 瑞 龍 (판서공 한 서 룡) 조선 태조7년(1398)~세조7년(1461) 13세 同知中樞院事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諱 瑞龍 (동지중추원사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휘 서룡)공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서룡(瑞龍)이요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 의 아들이고 충간공 리(忠簡公 理)의 손자이다. 공은 태조(太祖)7년(1398)출생하여 선조(先祖)의 음덕(蔭德)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 監察),공형양조좌랑(工刑兩曹佐郞)을 지내고 함길도관경력(咸吉道官經歷),영암군사(靈巖 郡事),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옮겨 여러 치적(治績)이 있고 가선(嘉善)의 품계(品階) 로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를 지냈으며 국가(國家)에서 5자 (子)가 무과에 등과(登科)하였기에 해마다 미록(米綠)을 지급했다.공은 세조(世祖)7년 (1461)3월 18일에 졸하였다.부문(訃聞)이 조정에 들리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고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공은 천성(天性)이 청검 정직(淸儉 正直)하여 위관(爲官)엔 근민(動敏)으로써 하고 위민 (爲民)엔 제해(除害)로써 하여 주군(州郡)을 역임하면서 치적(治蹟)이 많아 백성들의 마음 이 편안하였다.배위(配位)정부인 청도 김씨(貞夫人 淸道 金氏)는 호강공 점(胡剛公 漸)의 따님이며 아들은 찬성 장손(贊成 長孫),절제 중손(節制 仲孫),안양 종손(安襄 終孫), 첨지 천손(僉知 千孫),절도사 만손(節度使 萬孫)이다.(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교하리 능곡(交河里 陵谷)*朽栗山 先瑩下 東麓 丑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배 정부인 청도 김씨(配 貞夫人 淸道 金氏)와 쌍조(雙兆)이다. 묘비(墓碑,新)는 1973년 10월 일 세웠다. 判書公(諱 瑞龍)墓 位置:京畿道 坡州市 交河面 交河里 陵谷 歲享日:陰 10月 3日. 贊成公 韓 長 孫 (찬성공 한 장 손)14세 조선 세종1422 ~ 연산1497 議政府 左贊成 諱 長孫(의정부 좌찬성 휘 장손) 公의 휘(諱)는 장손(長孫)이고 자(字)는 윤보(亂南)이다.판서공서룡(判書公:瑞龍)의 큰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承舜)의 손자이다. 세종(世宗)4년(1422)에 태어났고 세조(世祖)원년(1453)가을에 사마(司馬)에 올랐다.동왕 5년 가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5형제가 모두 무과에 올랐기에 나라에서 는 해마다 그 어버이에게 세미(歲米)를 주어 포상(褒賞)하였다.공이 처음 전구서 녹사(典廐暑 錄事)로 시작해서 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중종(中宗)을 섬겨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이르렀고 인제(麟提),양근(楊根),상원(詳原),삼척(三陟)의 사읍 (四邑)을 다스려 명성(名聲)이 높았다.그후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선공감(繕工監)등의 부정(副正)을 역임했고 사도시(司도寺),예빈시(禮賓寺),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두루 역임하고 벼슬을 마쳤다. 연산군(燕山君)3년(1497)10월 27 일에 졸하니 수(壽)76세였다. 중종(中宗)28년(1533)에 손자 효원(效元)이 귀함으로 인하여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아들은 사도시정 증(司 寺正 曾)과 지평 구(持平 구)이다. 공은 졸년(卒年)12월 6일에 화접리(花蝶里)평량동 계좌 정향(平凉洞 癸坐 丁向)의 언덕에 안장(安葬)되었고 배위(配位)증 정경부인 평택 임씨(贈 貞敬夫人 平澤 林氏)는 성종 (成宗)7년(1476)5월 27일에 공에 앞서 54세로 졸하니 8월 27일 묘하 계좌(癸坐)에 안장하였다.贊成公(諱 長孫)의墓. 位置:京畿道 南楊州市 別內面 花蝶里 平凉洞 後麓癸坐 節制公 韓 仲 孫 (절제공 한 중 손)14세 조선 세종1425 ~ 성종1491資憲大夫 忠淸左右道都節制使 (자헌대부 충청좌우도 절제사) 공은 조선 전기(前期)의 무관(武官)이다.휘(諱)는 중손(仲孫)이고 일작(一作)중륜 (仲倫)이다.판서공(判書公 瑞龍)의 둘째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承舜)의 손자 이다.공은 세종(世宗)9년(1425)에 태어났다.성품(性品)은 강개심(慷慨心)에 불타 무예 (武藝)에 뛰어났다.그리고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충성(忠誠)을 다하였다. 단종(端宗) 원년(145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내자시정(內資寺正)어모(御侮)겸 토포사(討補使)와 홍주목사(洪州收使)를 역임하여 선정(善政)으로 특별제수(除授)되어 자헌 대부(資憲大夫)충청좌우도 절제사(忠淸左右都 節制使)에 올랐으며 성종(成宗)22년 (1491)에 졸하니 67세였다.공의 오형제(五兄弟)는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니 나라 에서는 이를 포상(褒賞)하기 위해 녹곡(祿谷)을 내렸다. 공은 생존(生存)에 권세(權勢)있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으로써 사람을 등용 (登用)하니 이를 말리고자 애썼는데 분기(憤氣)에 상(傷)하여 조카인 진산군수 희(珍山 郡守 曦)와 창원부사 석(昌原府使 晳),그리고 셋째 아들인 판윤 질(判尹 질)을 거느리 전라도 남원 어은동(全羅道 南原 漁隱洞)으로 내려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 고부군 답내면(古阜郡 畓內面 井邑市 梨坪面)산매리 천태산(山梅里 天台山)아래로 옮겨 살면서 오직 경서(經書)에 독실(篤實)하였고 은사(隱士)로서 천수(天壽)를 다한 까닭으로 자손들이 이곳에 잉거(仍居)하게 되었다. 아우인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이 젊어서 졸하니 그 식구(食口)들을 극진(極盡)히 도왔음을 세인(世人)들이 칭찬하였다. 아들은 진사 오(進士 晤),진사 기(進士 耆),판윤 질(判尹 질),참봉 소(參奉 昭)이다. 공은 성종(成宗)22년(1491)에 졸하니 천태산 유좌묘향(天台山 酉坐卯向)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청주곽씨(貞夫人 淸州郭氏)는 사직 적(司直 績)의 따님으로 공묘 (公墓)와 쌍조(雙兆)이다.묘비(墓碑)가 있었는데 마멸(廳滅)되어 1983년 춘(春)3월 에 묘비(墓碑)를 개수(改竪)하였는데 방손(邦孫)한글학자 문학박사 갑수(甲洙)가 글을 짓고 썼다.영모재는 1986년 2월준공 되고 본당20평, 부속건물 12평에 부지300평이다. 歲享日:음 10月 13日. 判尹公(韓 질(日+至))(판윤공 한 질)15세 세종 32년(1459)~성종조(?) 資憲大夫, 漢城判尹(자헌대부, 한성판윤) 공은 조선 성종(成宗)때의 문신이다.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셋째 아들이고 판서공 서룡(判書公 瑞龍)의 손자이다.세종(世宗)32년(1450)생이고 성종조(成宗朝)에서 음사(蔭仕:蔭職,科擧를 거치지 않고 祖上의 惠澤으로 얻던 官職)로 사복시 첨정(司僕寺 僉正)을 지내고 역전사군 (歷典四郡:네 고을을 다스리다)하고 성종(成宗)때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한성판윤(漢城判尹) 을 지냈다.절제공 문중(節制公 門中) 에서 후손이 가장 번창(繁昌)하고 입 신양명(立身揚名)도 많았다. 아들은 진사 순년 (進士 舜年),부사 순명(府使 舜命)이다. 공은 천태산 고묘하(天台山 考墓下 考 節制公 仲孫)에 배위(配位)정부인 함풍 이씨(貞夫人 咸豊 李氏)와 유좌(西坐) 에 합조(合兆)이다. 判尹公(諱 질) 墓 位置:全羅北道 井邑郡 梨平面 山梅里 天台山下 歲享日:陰 10月 13日. 安襄公(韓 終 孫)(안양공 한 종 손)14세 조선 세종 10년 1428 ~ 세조13년1468 推忠佐翼功臣 嘉靖大夫 兵曹參判 淸城君 (추충좌익공신 가정대부 병조참판 청성군) 공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종손(終孫)이다.판서공 서룡(判書公 瑞龍)의 셋째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며 충간공 리(忠簡公 理)의 증손(曾孫)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청도 김씨(貞夫人 淸道 金氏)로 참찬 호강(參贊 胡剛)의 따님이다. 공은 세종(世宗)10년(1428)생이며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가 동왕 29년 (1447)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5兄弟가 모두 武科에 합격하니 國制에 따라 어버이에 게 歲米를 주어)단종(端宗)1년(1453)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世祖)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뒤 동교(東郊)에서 군대를 검열할 때 중위장(中衛將)으로서 군율(軍律)을 엄중히 한 것으로 포상(褒賞)을 받았다. 지병조사(知兵曹事)로서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왔고(1455),동왕 3년(1457)경상 우도 처치사(慶尙右道 處置使).다음해 6월 추충좌익공신(推忠住翼功臣)3등에 책훈 (策勳)되고 많은 사전(陽田)과 노비(奴婢),백금(白金)등을 받았다.그리고 청성군(淸城君)에 봉(封)해졌다. 동왕 5년(1459)5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첨지 중추부사(했知中樞副使)에 이르렀다.공이 세조(世祖)13년(1467)3월 21일 40서1로 졸하니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贈)하고 시(諡)를 안양(安襄)이라 내렸다.조정(朝廷) 에서는 부조지전(不조之典)을 명하여 연산 모촌사(連山 茅村祀)에 향사(享祝)하였다가 계묘년(癸卯年,1723)에 다시 세거지(世居地)인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任實郡 三溪面 漁隱里)에 이봉(移奉)하였다. 공은 천품(天稟)이 학식(學識)과 먼 앞날을 도모(圖謀)하는 도량(度量)이 있어 세인 (世人)들이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큰 인물이라고 추앙(推仰)하였다. 공의 후손(後孫)규복(圭復)은 묘명(墓銘)에 이르기를“가문(家門)에서 칭송(稱頌)함 은 행실(行實)이 아름다워서요,세상에 현연(顯然)함은 덕(德)이 훌륭함이요,사기(史記)에 저명(著名)함은 공업(功業)이 위대(偉大)함이요,후세(後世)에 길이 전함은 모훈 (護訓)이 많음이로다”하였다. 배위(配位)청양현부인 광산 김씨(靑陽縣夫人 光山 金氏)는 현령 이석(顯令 以石)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사 희(府便 曦),절제사 절(節制使 절)이며 유년시(幼年時)임실(任實)로 내려가 살았다. 공은 연다산리 연대산 임좌(煙多山里 運坮山 壬坐)에 안장(安葬)되었다.묘전(墓前) 의 구비(舊碑)가 오래되어 마훼(磨毁)되니 1936년 8월 후손 규복 찬(後孫 圭復 撰)으로 묘비(墓碑)틀 개수(改竪)하였다.묘지(墓地)는 명당(明堂)으로 연화지명당(運花之名堂)이라 한다. 공의 배 청양현부인 광산 김씨(配 靑陽縣夫人 光山 金氏)가 연산군(燕山君)9년 (1503)7월 19일에 졸함에 임실군 어은리 후록 계좌(任實那 漁隱里 後麓 癸坐)에 안장(安葬)하였다.사손 대연 비문 찬(嗣孫 大淵 碑文 撰)이고 후손 상준 입비(後孫 相駿 立碑)이며 후손 영상 규설 재기 찬(後孫 領相 圭卨 齋記 撰)이 있다. 공의 부조지전(不조之典)을 명하여 연산 모촌사(連山 茅村祠)에 향사(享祀)하였다가 어은리(漁隱里)에 이봉(移奉)하였다.동내(洞內)라 시끄러워 1937년 동북(洞北)쪽 배 청양현부인 광산 김씨 묘(配 靑陽縣夫人 光山 金氏 墓)옆 재각 후편(齋閣 後便)으로 재 이건(再移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청성군(淸城君)의 군호(君號)를 따서 청성군 사우(淸城君 祀宇)라 한다.귀후재(歸厚齋)의 삼문(三門)을 수덕문 (修德門)이라 하였으며 안에 귀후재(歸厚齋)본당(本堂)이 있다. 귀후재(歸厚齊)는 공의 후손(後孫)들이 제향(察享)과 제숙 (察宿)하는 곳으로 헌종(憲宗)11년 (1845)에 창건(創建)하고 참정대선 규설(參政大臣 圭卨)이 재기(齋記)를 찬(撰) 하고 1970년 중건 (重建)하였다.본당 (本堂)30평,부속 건물 10평 등 삼문 (三門)을 갖추었다. 경덕재(敬德齋)는 1996년 10월에 준공 (埈工)하였는데 건평 (建파)40평이다.安襄公(諱 終孫)配 靑陽縣夫人光山金氏 墓 位置:全羅北道 任實郵 三溪面 魚隱里 後麓癸坐 歲享日:음 3月 21日.安襄公(諱 終孫)墓 位置:京畿道 坡住市 交河面 煙多山里 運坮山壬坐 歲享日:陰 10月 11日. 忠肅公(韓 圭 稷)(충숙공 한 규 직)29세헌종 11년~고종 21년(1845~1884) 工曹判書, 贈 佐贊成(공조판서, 증 좌찬성)공은 조선 말기(末期)의 무신이다.휘(諱)규직(圭稷)이고 자(字)는 순좌(舜佐),호 (號)는 다옥(茶玉)이다. 부사공 승렬(府使公 承烈)의 아들이고 절제사공 의식(節制使公 義植)의 손자이며 안양공 종손(安養公 終孫)의 15대손이다.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주 오씨(贈 貞敬夫人 海州 吳氏)로 부총관 치현(副摠管 致賢)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11년(1845)생이다.고종(高宗)1년(1864)19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뒤 중추부 경력(中樞府 經歷),함안군수,상주진영장(尙州鎭營將), 경홍부사,금위영 천총(禁衛營千摠),길주목사,경상우수사 및 좌수사 등 외방의 무관직을 역임하고,1881년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된 뒤 곧이어 좌변 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1882년 초에는 잡아들인 용의자 5인을 혹독하게 다스려 치사하게 한 죄로 한때 순안에 천배되었으나 때마침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국왕의 특명으로 풀려나 탕척(蕩滌: 죄명을 아주 씻어줌)되고 다시 좌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우포도대장에 개임되었다가 곧이어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융단(戎壇)에 오른뒤,다시 어영대장에 임명되어 사대당 내각의 중진으로 그 자리를 굳혀갔다.같은 해 9월 권지협판(權知協辦)이 되고 다시 공조판서,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군무사(軍務司)를 거쳐 신설 교련소인 친군전영(親軍前營)의 감독까지를 겸임하였다. 1884년 초에는 다시 기기국(機器局)과 혜상공국(惠商公局)총판을 겸하고,8월에는 전영사(典營使)가 되어 이전에 별도 설치된 연융대(練戎臺)를 통하여 모든 군사훈련을 통할,그동안 박영효(朴泳孝)에 의하여 양성되어오던 신식군대를 친군전영에 편입시킴 으로써 개화파로부터 군권을 빼앗으니 이때부터 개화당과 반목하게 되었다.같은 해 12월 개화당이 우정국 낙성충하연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우정국에서 피선, 병졸로 변장하고 창덕궁에 이르러 국왕을 만나려 하였으나 김옥균(金玉均)의 방해로 퇴궐하다가 경우궁(景祐宮)문전에서 이규완(李圭完)등에게 고종(高宗)21년(1884)10 월 18일 순절(殉節)하였다.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 시호하였다가 충숙(忠肅)으로 고쳤다.배위(配位)증 정경부인 함안 윤씨(贈 貞敬夫人 咸安 尹氏)는 절제사 석만(節制使 錫萬)의 따님이고 아들은 시종관 긍호(侍從官 肯鎬)이,며 동생은 대신 규설(大臣 圭高)이다.공의 배 증 정경부인 함안 윤씨(配 贈 貞敬夫人 咸安 尹氏)는 고종 23년(1886)7월 21일 졸하니 의왕시 청계동 선영 좌록 임좌(儀旺市 淸溪洞 先瑩 左麓 壬坐)에 합조(合兆)되었다. 僉知公(韓 千 孫)(첨지공 한 천 손) 14세 공은 세종(世宗)때의 무신(武臣)이다.휘(諱)는 천손(千孫)이고 판서공 서룡(判書公 瑞龍)의 넷째 아들이며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다. 공은 형(兄)인 장손(長孫),중손(仲孫),종손(終孫)이 무과(武科)에 급제함에 힘입어 무과에 급제하였다.오형제(五兄弟(동생인 萬孫)도 무과급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니 國制에 따라 어버이에게 해마다 세미(歲米)로 포상(褒賞)하였다.성종(成宗)때 첨지(僉知)를 지냈다.생몰년(生歿年)은 미상(未詳)이다. 배위(配位)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며 철권(鐵拳)의 아들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후(后)이다.아들은 첨사 고(僉使 晧),명(明,계后)이다. 묘(墓)는 경상북도 김천(慶尙北道 金泉)에 합조(合兆)이다. 節度使公(韓 萬 孫)(절도사공 한 만 손)14세 ? ~ 연산군 9년1503 兵馬節度使淸州韓公(諱萬孫)(병마절도사공휘만손) 공은 조선조 성종(成宗)때의 무신(武臣)이다.휘(諱)는 만손(萬孫)이고 자(字)는 윤언(胤彦)이다.판서공 서룡(判書公 瑞龍)의 다섯째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 의 손자이다.공은 타고난 성품(性品)이 고상(高尙)하여 범인(凡人)보다 뛰어났다. 형 인 장손(長孫),중손(仲孫),종손(終孫),천손(千孫)이 무과에 급제함에 힘입어 무과에 급제하니 국제(國制)에 따라 어버이의 품계(品階)를 올려주고 해마다 세미(歲米)등을 지급받는 영광을 입었다.공은 상국 허종(相國 許琮)이 추천하여 득별히 호군(護軍)으 로 임명되어 첨지(僉知)를 거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이는 성종(成宗)때였다. 연산(燕山)이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무도(無道)한 일을 많이 하고 경기지역(京畿地域) 을 유원지(遊園地)로 만들 때 교하(交河),양주(楊州)의 선영(先瑩)의 묘소가 금지구역 (禁止區域)으로 들어감에 차마 어버이를 잊고 관록(官綠)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성주(星州)로 가서 숨어 살았다.무오사화(戊午士禍:燕山君 4年(1498)金日孫 등 新進士類가 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는 事件)때 내외형제(內外兄弟)인 한훤당 김선생(寒暄堂 金先生)이 희천(熙川)으로 귀양가자 좌의정 한치형(左議政 韓致亨)에게 편지를 보내 강직(剛直)한 말을 하였으나 다행히 화(禍)를 면하였다.그러나 이 때문에 당국자(當局者)의 저지를 더 받았다.연산(燕山)9년(1503)12월 13일 졸하였다. 아들은 현감 휘(縣監 暉),판관 성(判官 晟),현영 돈(縣令 暾)그리고 영(暎)이다. 공이 가암리 관동 장등(加岩里 冠洞 長嶝,舊雲谷坊 冠洞)자좌(子坐)에 안장(安葬) 되었다.처음에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난세병화(亂世兵禍)와 오랜세월로 마멸(廳滅)되니 융희(隆熙:純宗의 年號)후 18년(1927)한식절(寒食節)에 16대 방손(傍孫)가선 대부,궁내부 특진관,전 성균관 대사성 한긍호(嘉善大夫,宮內府 特進官,前 成均館 大司成 韓肯鎬)가 찬(撰)하였다. 묘명(墓銘)에 이르기를“궁마(弓馬)가 빛나고 시례(詩禮)에 독실하다.현상(賢相)이 천거하니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네.세상이 무도함에 국록을 부끄러워 하였네.혼연히 성주에 내려와서 채식으로 만족하다.누구와 이웃했는가,한훤당(寒暄堂)선생이로다. 진심으로 교분하니 도의가 더욱 깊다.정국(靖國)도 못보시고 갑자기 영면하셨네.포부를 못다 펴니 후인들이 슬퍼 애석하다.운곡(雲谷)이라 옛터에 고목만 푸르도다.이 글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노라.”공의 배위(配位)숙부인 성주 이씨(淑夫人 星州 李氏)는 대사헌 흥문(大司憲 興門)의 따님으로 연산(燕山君)8년(1502)6월 2일 공보다 1년 전에 졸하였다. 배위의 묘소(墓所)는 공묘(公墓)의 바로 후측(後側)에 있다.절도사공 만손 경모재(節度使公 萬孫 敬募薺)는 공묘하(公墓下)에 있으며 신유년(辛西年,1921)10월에 준공되었는데 8평이다. 節度使公(諱 萬孫)墓位置:慶尙北道 星州郡 碧珍面 伽岩里 冠洞 長嶝 歲享日:陰 10月 15日. 吏郞公(韓 瑞 鳳)(이랑공 한 서 봉) 13세 조선 태종 12년 1412 ~ 세조2년 1456 通善郞吏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통선랑이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공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서봉(瑞鳳)이고 자(字)는 응진(應辰)이다.청성군 승순(承舜)의 둘째 아들이고,어머니는 이근(李勤)의 딸이며, 충간공 리(忠簡公 理)의 손자이다. 태종(太宗) 29년(144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세종대(世宗代)에서 기사관(記事官),한림검열(翰林檢閱),선무랑(宣撫郞),수원감수국사관(輸苑監修國史官),예문봉교(藝文奉敎)를 역임하였다.단종(端宗) 3년(世祖 元年 1455)에 감찰(監察)로써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제수(除授)되고, 1455년(세조 1) 그가 감찰로서 이조정랑에 제수되자 이는 구례를 어긴 것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이해 12월에 정랑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세조(世祖) 2년(1456)에 45세에 졸하였다.. 아들은 목사언륜(牧使 彦倫)이다. 공은 선산(先山)인 파주시 교하면 교하리 능곡 후율산 선영 하 서록(先塋 下 西麓)에 안장되고 배위(配位) 공인 안동 권씨(恭人 安東 權氏)는 판사 소(判事 紹)의 따님으로 공묘(公墓)와 쌍조(雙兆)이다.오랜세월에 묘비(墓碑)가 많이 훼마(毁磨) 되어서 개수(改竪)하게 될때 후손 준구(駿求),정구(廷求)가 비문(碑文)을 청(淸)하여 공의 종(從) 17세손 중석(重錫)이 묘지명(墓地銘)을 지어 1940년 4월에 후손(後孫)태현 (台鉉)이 개수(改竪) 하였다.세향일:음)10월3일. 牧使公(韓 彦 倫)(목사공 한 언 륜) 14세 通政大夫 驪州牧使(통정대부 여주목사)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휘(諱)는 언륜(彦倫)이며 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다. 공은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하여 일 처리(處理)를 잘하였다.중종(中宗)의 어명(御命)으로 삼남안찰사(三南按察使)가 되어 충청도 탐색 순행 중(忠淸道 探索 巡行 中)에 기묘사화(己卯士禍:조선조 중종14년 1519년)홍경주(洪景舟),남애(南哀),심정(沈貞)등 사장파(詞章派)의훈구재상(勳舊宰相)이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등 젊은 신진파(新進派)를 몰아낸사건)로 화록지중(禍錄之中)에 인형(姻兄)인 영상 허종 (領相 許琮)의 음호(蔭護)로 간득면탈(艱得免脫) 하였다. 이에 앞서 연대미상(年代微詳)이나,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낸바 있다.공은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가솔(家率)을 이끌고 시조 양위공 복거지 청주(始祖 襄威公 卜居地 淸州)로 은거(隱居)하게 되였다.배위(配位)는 숙부인 능성 구씨(淑夫人 綾城 具氏)로 능성군 문신(綾城君 文信)의 따님이다.아들은 내금위 민(內禁衛 愍)과 감무 무(監務懋)가 있다. 목사공 언륜(牧使公 彦倫)과 배위 숙부인 능성 구씨(淑夫人 綾城 具氏)의묘와아들 내금위 민(內禁衛 愍)과 배위 정부인 씨(貞夫人 氏 未詳)감무 무(監務懋)와 배위 숙인 고성 이씨(配位 淑人 固城 李氏)의 단(壇)이 청주시 수곡동(淸州市 秀谷洞)에 있었는데 시(市)의 개발 정책(開發 政策)으로1992년 3월 남일면 송암리(南一面 松岩里)에 이설(移設)하고 음력 10월 10일에 세일제를 봉행(歲一祭 奉行)하고 있다.위치: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송암리 산18-1 한 치 상(韓 致 相)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군거(君擧), 호는 은탄(隱灘). 종손(終孫)의 후예이다.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생활보다는 성리학연구에 뜻을 두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고, 또 사람들이 함부로 사당(祠堂)을 세우는 것을 철거하도록 청하였다.연천의 돈암사(遯巖祠)에 배향되었다 縣監公(韓 華 山)(현감공 한 화 산)17세 通訓大夫 行 抱川縣監 兼 楊州鎭管節制都尉 (통훈대부 행 포천현감 겸 양주진관절제도위)공의 휘(諱)는 화산(華山)이다.현감공 이사(縣監公 二四)의 아들이고, 감무공 무(感務公 懋)의 손자이다.통훈대부(通訓大夫) 포천현감 겸 양주진관절제도위(抱川縣監 兼 楊州鎭管節制都尉)를 지내니 민심(民心)이 좋았다.공은 가족을 인솔하고 고향(故鄕)인 청주(淸州)에 돌아와 시조 태위공 유허(太尉公 遺墟)와 누백년(累百年) 실전(失傳)한 묘소(墓所)를 찾을 길이 막연하고 다만 서저(書字)와 견문(見聞)으로만 전할 뿐이었다.이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자손들에게 그 정신(精神)을 심어줬다.공은 청주에 복거(卜居)하면서 숙원(宿願)을 후세(後世)에 알린 채 혼연(渾然)히 행락(行樂)하다 졸하였다.(공의 6代孫 진영(震英)이 유허(遺墟)를 찾고자 비로서 태위공(太尉公)의 유허(遺墟)인 方井里(今 方西洞)에 卜居하니 中間에 洞名이 변경되어 죽촌(竹村), 대촌(臺村)이라 하였고 지금은 淸州市에 편입되어 방서동 (方西洞)이라 한다. 결국 8대손 성헌(聖憲)이 태위공 산소를 심득(尋得)하여 지금까지 수호(守護)하고 있다.이는 공의 영향력(影響力)이라 믿어진다) 아들은 어모장군 태(禦侮將軍 態)이다.공의 묘가 (淸州市 水谷洞 山)공의 12의 임좌(壬坐)에 합조(合兆)였는데1990년, 5월17일 청원군 남일면 송암리 산 18-1로 이장(移葬), 합조(合兆)하였다.세향일:음)10월10일. 襄夷公(韓 瑞 龜)(양이공 한 서 구) 13세 조선 태종 ? ~ 성종 ?資憲大夫 大司憲 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淸原君 (자헌대부 대사헌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청원군) 공은 조선 초기(初期)의 무신(武臣)이다.휘(諱)는 서구(瑞龜), 자(字)는 응천(應天)이다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셋째 아들이고, 충간공 리(忠簡公 理)의 손자이다.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고 제세(濟世:세상을 구제함)의 재능(才能)이 있었다.단종 1년 (1453) 이른바 계유정난(癸酉政難) 때 공헌으로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2등에 훈록(勳錄)되면서 많은 하사품(下賜品)을 받았다. 세조(世祖) 원년(1455)에 통례문봉례랑 (通禮門奉禮郞)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사복시 소윤(司僕寺 小尹)이 되고 동왕 7년(1461)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와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동왕 10년(1464)에는 청원군(淸原君)에 봉(封)하였다.성종 14년(1483)에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고 동왕 19년(1488)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시호(諡號)는 양이(襄夷)이고 배위(配位) 영춘현 부인 안동권씨(永春縣 夫人 安東權氏)는 길창부원군 권람(吉昌府院君 權擥)의 따님이며,아들은 참봉 정륜(參奉 正倫)과 무진(戊辰)이다. 공의묘소(墓所)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신촌리 선영(先塋) 아래 계좌(癸坐) 언덕에 배위(配位) 영춘현 부인 안동권씨(永春縣 夫人 安東權氏)와 쌍조(雙兆)이다. 공의 묘비(墓碑)가 마멸(磨滅) 상태에 이르러 1974년 후손(後孫)인 중석(重錫)이 찬(撰)하고 장현(長鉉)이서(書)하다. 세향일 음10월4일. 參奉公(韓 正 倫)(참봉공 한 정 륜) 14세 공의 휘(諱)는 정륜(正倫)이고,양이공 서구(襄夷公 瑞龜)의 큰아들이며, 청성군 승순 (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다.일찍이 참봉(參奉)을 지냈다. 아들은 우(佑)와 계년(繼年)이다.묘는 실호(失護)되었다. 判尹公(韓 聖 根)(판윤공 한 성 근) 29세 순조33년(1833)~광무9년(1905) 兵曹參判 漢城判尹 中樞院議官 宮內府特進官 (병조참판, 한성부윤, 중추원 의관, 궁내부 특진관) 공의 휘(諱)는 성근(聖根)이고, 자(字)는 원집(元執)이며, 증 호판공 용철(贈 戶判公 用喆)의 아들이고, 증 가선호참공 영표(贈 嘉善戶參公 永彪)의 손자이며,양이공 서구(襄夷公 瑞龜)의 16대손이다. 공은 순조(純祖) 33년(1833) 8월 3일생이고 철종(哲宗) 14년(186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종 3년(1866) 병인양요(兵寅洋擾) 때 순무영(巡撫營)의 초관(硝官)으로 집사(執事) 지홍관(池弘寬)과 함께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지키다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한 대부대를 산성 남문에서 격파하였으나 결국 병력이 부족하여 패(敗)하고 말았다.그 후 같은 해 봉상시 봉사(奉常寺 奉事), 병조좌랑(兵曹佐郞), 은산현감(은山縣監), 지평(持平), 좌승지(左承旨) 통진부사(通津府事),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고종 18년(1881)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정령관(正領官)으로 좌부령관(左副領官)인 윤웅렬(尹雄烈)과 함께 신식훈련에 힘 썼다. 같은 해 안기영(安驥永) 등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자(庶子)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윤웅렬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그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동왕 30년(1893)에 한성판윤(漢城判尹),1896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1899년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을 역임하였다 광무(光武) 9년(1905) 12월 28일에 졸하였다.배위(配位) 정부인 밀양 박씨(貞夫人 密陽 朴氏)는 해일(海一)의 따님이고 아들은 감찰 정렬(監察 鼎烈) 주사 응렬(主事 應烈), 등제 창렬(登第 昌烈), 참봉 영렬(參奉 永烈)과 무렬(武烈)이다. 判事公(韓 齊)(판사공 한 제)11세 고려충정1349~ 조선태조1398 高麗戶部判事韓公(諱齊)(고려 호부판사) 고려 말의 문신으로 휘(諱)는 제(齊)이고 호(號)는 춘당(春塘)이다.평간공(平簡公) 공의(公義)의 셋째 아들이고 충혜왕묘(忠惠王廟)배향공신(配享功臣)삼중대광도첨의 우정승(三重大匡都僉議 右政丞)사숙공 악(思關公 渥)의 손자이다.공은 천품(天稟)이 이범(異凡)하여 관후(寬厚)하고 묵중(默重)하여 효우(孝友)하고 자인(慈仁)하여 기환 (綺執:富貴)자제(子弟)로서 성장하였다.공은 백씨(伯氏)수(脩)와 중씨(仲氏)리(理)의 교양(敎養)에 힘입어 우왕조 초(禑王朝 初)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각부 요직(要職)을 역임하면서 충근선력(忠動宣力)함은 근우(近手)20성상(星霜)에 호부판사(戶部判事)에 승진(昇進)되었으나 여말(麗末)의 역성혁명(易姓草命)은 응천명(應天命)하고 순민심(順民心)하는 자연의 귀취(歸趣)임을 달관(達觀)하고 묵묵히 전원(田園)에 은둔(隱遁)하여 영적(影跡)을 감추고 오직 구주(舊主)를 향한 충절(忠節) 을 고수(固守)하다 조선조(朝鮮朝)를 맞게 되었으나 조선 태조(太祖)7년(1398)에 졸 하였다. 배위(配位)현부인 남양 홍씨(縣夫人 南陽 洪氏)는 부윤 유구(府尹 有龜)의 따님이며 아들은 중랑장 승양(中郞將 承讓)그리고 승홍(承洪)이다.공은 서곡 선영하(瑞谷 先瑩下)에 배위 현부인 남양 홍씨(配位 縣夫人 南陽 洪氏)와 합조(合兆)이다. .공이 연관(捐館)한 지 594년에 묘안(墓顔)에 현각(縣刻)이 상궐(尙闕)되었음을 통탄한 후손(後孫)들이 1992년 족후손(族後孫)상대 찬(相大 撰)으로 여 섯자(尺) 의 묘비(墓碑)를 청명일(淸明日)에 세웠다. 位置:京畿道 坡州市 津東面 瑞谷里 細谷 歲享日:淸明日 監察公(韓 乙 富)(감찰공 한 을 부) 14세 세종 24년~중종 3년(1442~1508) 司憲府 監察(사헌부 감찰)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으로 휘(諱)는 을부(乙富)이다.전서공 서붕(典書公 瑞鵬)의 둘째 아들이고 낭장공 승양(郞將公 承讓)의 손자이며 판사공 제(判事公 齊)의 증손(曾孫)이다. 세종(世宗)24년(1442)생이며 성종조(成宗朝)에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다.공은 경사(經史,經書와 史記)에 능통(能通)하였으며 문여필(文與筆:文筆,著書)이 있다. 중종(中宗)3년(1508)65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공인 해주 오씨(公人 海州 吳氏)는 중종 7년(1512)에 졸하였는데 연천(漣川)에 합조(合兆)되었으나 실호(失護)되었다.아들은 참봉 안례(參奉 安禮),정례 (定禮)이다. 繼城君 仲禮 系 繼城君(韓 仲 禮)(계성군 한 중 례)10세政堂文學 繼城君 韓公(정당문학 계성군 한공)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며 휘(諱)는 중례(仲禮)이다.충혜왕묘(忠惠王廟) 배향공신(配享功臣)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사숙공(思關公)악(渥)의 셋째 아들이고 제학공(提學公)사기(謝奇)의 손자이다.충혜왕(忠惠王)때 문과에급제하였다. 충목왕(忠穆王)원년(1345)6월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좌정승(左政丞)한종유(韓宗愈),우대언(右代言)인 공 등 50여인이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번갈아 시독(待讀)케 하였다. 충정왕(忠定王)원년(1349)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제수받았으며 다음 해 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계성군(繼城君)에 봉해졌다‘공민왕(恭愍王)원년 (1352)11월 왕이 공의 집에 옮겨 담론(談論)하였다. 공민왕 21년(1372)정당문학인 공이 임의로 난수산(蘭秀山)도적인(盜賊人)의 명나라 배를 샀더니 명나라 황제(皇帝)가 이 말을 듣고“재상(宰相)으로 도적배를 사는 것 이 온당치 못하니 마땅히 빨리 돌려 보낼 것이다”하였는데 배는 이미 파괴(破壞)된지 라 공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배를 수리(修理)토록 하였다.배위(配位)해평 윤씨 (海平 尹氏)는 좌정승 석(左政丞 碩)의 따님이며 무후(无后)이다. 政堂公(韓 公 衍)10세(정당공 한 공 연)고려 공민왕조에 등재曺溪寺 住持, 政堂文學(조계사 주지, 정당문학) 공의 휘(諱)는 공연(公衍)이고 호(號)는 각성대사(覺星大師)이다.도첨의 우정승(都僉議 右政丞)을 지내고 시는 사숙(諡 思肅)이며 충혜왕묘(忠惠王廟)에 배향(配享)된 악 (渥)의 넷째 아들이고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사기(謝奇)의 손자이다. 소년시절(少年時節)부터 불법(佛法)을 좋아하였고 조계사(曹溪寺)의 주지(住持)에 이르렀는데 공민왕 조(恭愍王朝)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고 여러 벼슬을 지내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아들은 부사 주(府使 柱)이다. 府使公(韓 柱)(부사공 한 주)11세 蜜直府使(밀직부사) 공(公)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휘(諱)는 주(柱)이고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아들이며 사숙공 악(思肅公 渥)의 손자이다.고려 말에 밀직부사(密直府使)로 치사(致仕) 하였다. 배위(配位)영천 최씨(永川 崔氏)는 극평(克平)의 따님이며 아들은 판관 홍보(判官 洪甫)이다. 判官公(韓 洪 甫)(판관공 한 홍 보)12세 興復都監 判官(흥부도감 판관) 공(公)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휘(諱)는 홍보(洪甫)이고 부사공 주(府使公 柱)의 아들이며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손자이다.어머니는 영천 최씨(永川 崔氏)로 극평 (克平)의 따님이다.공은 고려 말에 홍부도감 판관(興復都監 判官)을 지냈다.배위(配位)상당 고씨(上黨 高氏)는 윤 온(允 溫)의 따님이고 아들은 서원군 복(西原君 復), 부정공 정(副正公 鼎)이다. 西原君(韓 復)(서원군 한 복)13세 進賢館 大提學, 大匡西原君(진현관 대제학, 대광서원군) 고려 말의 문신이다.고려에서 원(元)나라에 귀화(歸化)하였다가 다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였다.판관공 홍보(判官公 洪甫)의 아들이며 부사공 주(府使公 柱)의 손자이다.순제(順帝)의 지정(至正)원년(1341)에 진사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추밀원 부사 (樞密院 副使)에 이르렀다. 공민왕(恭愍王)19년(1370)이성계(李成桂)가 올랄산성(兀刺山城)을 쳐서 성이 함락 함에 무너진 담 가운데서 우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사람이 벗은 폼으로 서서 가리고 울거늘 잡아서 물으니 이에 말하기를“나는 원조(元朝)에서 장원한 배주(拜住)인데 귀국(貴國)의 이인복(李仁復)은 나와 동년(同年:同傍及第)이다” 하니 이성계가 그 말을 듣고 곧 이성계의 옷을 입히며 말(馬)을 주어 태우고 드디어 함께 오니 왕이 후하게 대우하여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삼고 성명을 한 복(韓 復)이 라 사(賜)하였다.왕이 적전(籍田:天子가 祖廟에 進供할 米穀을 親정하는 田地)에 행차할 무렵 먼저 신 돈(辛 旽)을 명하여 가서 보게 하거늘 신 돈이 여락(女樂)으로써 스스로 따르게 함을 보고 미워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성계를 섬기기를 극진히 하고 이인복,이 색(李 穡)과 함께 서로 글로써 창화(唱和)하였고 과거보는 사람들이 많은 정문(程文:試驗場에서 쓰는 一定한 法式을 갖춘 文章)의 하정(賀正)을 받았다. 판서(判書)를 지내다 누천(累遷)하여 대광서원군(大匡西原君),진현관 대제학(進賢館 大堤學)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운봉 박씨(雲峰 朴氏)이며 아들은 감사 암 (監司 巖)이다. 공은 전의면 관정리(全義面 觀亭里)산 에 안장(安葬)되었는데 배위 운봉 박씨(配位 雲峰 朴氏)와 합조 (合兆)이다.묘 둘레 에 돌을 쌓은 것은 그 때의 풍습(風習)에도 있었거니와 유언(遺言)에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位置:忠南 燕岐郡 全義面 觀享里 山45-1 歲享日:陰 10月 6日. 監司公(韓 巖)(감사공 한 암) 14세 嘉善大夫 江原監司(가선대부 강원감사) 공(公)은 세종(世宗) 때의 문신으로 휘(諱)는 암(巖)이다.서원군 복(西原君 復)의 아들이고, 판관공 홍보(判官公 洪甫)의 손자이다.세종(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처음 벼슬 길에 오르고 누진하여 홍문관 부수찬(洪文館 副修撰)과 부교리(副敎理)에 나갔다.그후에 강원감사(江原監司)에 나가 선정(善政)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배위(配位) 정부인 죽산 송씨(貞夫人 竹山 宋氏)는 전의현 북면 관장동 후우록 유좌(全義縣 北面 官丈洞 後右麓 酉坐)에 공과 합조(合兆)이다.아들은 감찰 온(監察 溫)과 세량(世良), 선략장군 세공(宣略將軍 世恭)이다.세향일은 음력 10월 6일. 副正公(韓 鼎)(부정공 한 정)13세 奉善大夫 書雲 副正(봉선대부 서운 부정)공(公)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휘(諱)는 정(鼎)이며 판관공 홍보(判官公 洪甫)의 둘째 아들이고 부사공 주(府使公 柱)의 손자이며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증손(曾孫) 이다.판서(判書)와 대제학(大堤學)을 지낸 서원군 복(西原君 復)의 동생으로 공이 벼슬길에 오르더니 급기야 봉선대부 서운 부정(奉善大夫 書雲 副正)에 이르렀다. 배위(配位)숙인 김씨(淑人 金氏)는 판서 의린(判書 義燐)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호군 자강(副護軍 自强)이다. 공과 배위(配位)숙인 김씨(淑人金氏)의 묘(墓)는 합폄(合폄)으로,忠南 燕岐郡 西面 高福里 山陽洞 子坐이다 副護軍公(韓 自 强)(부호군공 한 자 강) 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무신이다.휘(諱)는 자강(自强)이요 부정공 정(副正公 鼎)의 아들이며 판관공 홍보(判官公 洪甫)의 손자이고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무관으로서 벼슬을 쌓아 용양위부호군(龍讓衛副護軍:五衛는 조선조 때의 군대 조직이다)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공인 직산 조씨(恭人 稷山 趙氏)이고 아들은 감찰 지(監察 智),정란공신 종손(靖亂功臣 從孫)이다. 공과 배위(配位)공인 직산 조씨(恭人 稷山 趙氏)의 묘(墓)는 고복리 산양동 선영하 (高福里 山陽洞 先瑩下)에 무오년(戊午年)에 합조(合兆)되었다. 西原君 方信 系 贊成事(韓 方 信)(찬성사 한 방 신) 10세 ? ~고려 우왕 2년( 1376)贊成事西原君韓公(諱 方信)(찬성사 서원군)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의 문신(文臣)이요 무신(武臣)이다.우정승(右政丞)을 지내고 충혜왕묘(忠惠王廟)에 배향(配享)된 사숙공(思關公:渥)의 아들로 제학공(提學公:謝奇)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原州 元氏)이니 동지밀직사사 경(同知密直司事 卿)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형을 공경(恭敬)하고 따르며 아우를 부호(扶護)하여 사랑하는 우애 (友愛)가 습성화(習性化)하고 겸양(謙讓)과 예의(禮儀)바른 미덕(美德)의 인물로 성장 하였다.그리고 장수(將帥)다운 기국(器局:재간과 도량)과 지략(智略:슬기있는 꾀) 이 있었고 일찍이 학업에 정진(精進:정력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씀)하여 경사(經史)와 시문(時文:중국의 팔고문)에 통달(通達)하였으며 공민왕 4년(1355)과거에 급제하였다.이로부터 여러 관직에 누진(累進)하여 동왕 7년 상장군(上將軍)으로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추밀원 직학사(樞密院 直學士)로서 동왕 9년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진사시(進士試)를 취하고 정몽주(鄭夢周)등 33인을 시취(試取: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하였다. 동왕 10년 직학사로서 다시 동북면 병마사로 나갔다.그런데 이 해 10월에 홍건적 (紅巾賊)의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반(破頭潘) 등이 20만 대군을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에 침구(侵寇:침범하여 도둑질 함)하여 계속 남하하는 적병을 맞아 방어전(防禦戰)을 폈으나 끝내 이를 감당(勘當)치 못하고 패(敗)하여 왕은 안동(安東)에 파천(播遷: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난 감)하고 경도(京都)는 함락(階落)되었다. 동왕 11년 공은 안우(安佑),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김득배(金得培)등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경도를 탈환(奪還:도로 빼앗음)코자 사면(四面)으로 맹공(猛攻)하여 적의 괴수(魁首:악인의 두목)사유,관선생 등을 참살(軟殺) 하니 적들이 저희끼리 서로 밟아서 죽고 얼어서 죽는 등 시신(屍身)이 성내에 가득하였고 참수(軟首)된 자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으며 적들이 원제(元帝)로부터 탈취(奪取)하였던 옥새(玉璽),금보(金寶),금은동인(金銀鋼印),병기(兵器),등을 노획하고 경도를 수복(收復)하였다. 이듬 해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錄勳)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陞進)되었으며 부모,처에게는 삼계급(三階級)을 초월(超越)한 관작(官爵)을,아들 1인에게는 7 품직을 선수(宣授)하고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서임(敍任)하며 전(田)일백 결(結) 과 노비(奴婢)10구(口)등을 하사받았다.이 해 원(元)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왕을 삼고 요양성(遼陽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공은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서 동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김 귀(金 貴)와 더불어 화주(和州)에 주둔(駐屯)하여 동북 방(東北方)을 수비(守備)하고 있는데 그때 또 여진(女眞)이 변방(邊方)을 침략하였으므로 공이 홀면 병마사 전이도(全以道),이 희(李 熙),이용장(李用藏)등을 파견(派遺) 하여 이를 격퇴(擊退)하였다. 북변(北邊)사람 김방괘(金方卦)는 이성계(李成桂)의 고모부(始母夫)이다.삼선(三善)과 삼개(三介)라는 두 아들이 있으니 여진(女眞)에서 성장하였고 체력과 용력이 범인(凡人)보다 뛰어났다.덕홍군의 군병(軍兵)이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선주(宣州)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키 위하여 이성계가 급히 진군하게 되었다.평소에는 이성계를 감히 접근(接近)도 못하던 삼선과 삼개가 이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여진을 유인(誘引),화주 이북(和州 以北)이 모두 함락(階落)되었다. 그 당시는 국가가 좌우로 적군을 맞게 되고 연전연패(連戰連敗:싸움할 때마다 짐) 하니 장사(壯士)들이 전의(戰意)를 상실(喪失)하였다.그러나 공은 군력(軍力)을 재정무(再整武:다시 전쟁 준비를 갖춤)하여 부하장병(部下將兵)을 진격(進擊)케 하고 이 성계도 김 귀 등과 함께 삼면(三面)으로 진공(進攻)하여 적을 대파(大破)하고 화주,함주 등 실지(失地)를 완전 수복(完全 收復)하였다.삼선과 삼개는 여진으로 달아난 후 돌아오지 못하였다.왕은 이성계를 신뢰(信賴:믿고 의지함)하는 의지(意志)가 더욱 두터워졌고 공에게는 비단을 하사하여 그 공훈(功勳)을 포상(褒賞)하고 개환(凱還:싸움에 이기고 돌아옴)할 때는 내전(內殿)에서 연회(宴會)를 베풀고 축하하였다. 곧 이어서 서원군(西原君)을 봉(封)하였고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봉훈 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 秘書監丞)을 선수하였으며 후일에 또 찬성사(贊成事)에 제수 (除授)하였다. 동왕 20년 공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이 색(李 穡)을 정당문학으로 이성계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으니 신 돈(辛 旽)이 주살(誅殺)되었을 때인지라 조정(朝廷)의 면모가 쇄신(刷新)되었다.왕은 흡족(洽足)하여 측근신료(測近臣僚)들에게“요사 이 일반민중의 조정에 대한 평론(評論)이 어떠하던가”라고 하문(下問)하니 신료들은 “지금 국민들은 국정(國政)에 가장 적당한 인물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라고 주답(奏答)하니 왕은 기뻐 웃으면서 이르되“문관이나 무관을 모두 일류명사(一流名士)를 선택 하여 재상(宰相)을 삼았는데 뉘라서 감히 이론(異論)이 있으랴”하였다. 동왕 23년 자제위(子第衛)의 홍 륜(洪 倫)이 익비(益妃)와 통정(通情)하여 임신(姙娠)되었음을 내시(內待)최만생(崔萬生)이 왕에게 밀고(密告)하니 왕은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어감을 은근히 기뻐하면서 말하되“내일은 홍 륜을 죽여 이 비밀을 엄폐(掩蔽: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김)할 것인데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구나”하였다. 최만생과 홍 륜은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 선수(先手)를 써서 그날 밤 왕 을 시해(弑害)하였다.그 뒤 체포되어 국문(鞠問)에서 한 안(韓 安),권 진(權 瑨),홍 관(洪 寬),노 선(盧 瑄)등도 동범(同犯)이라고 고백하니 한 안은 공의 둘째 아들이요 모두가 자제위소속이다. 한 안은 가혹(苛酷)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가담한 바 없다고 끝까지 불복(不服)하였으나 홍 륜 등의 일방적인 증언에 따라 동범이라 취급받고 홍 륜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공은 먼 곳으로 귀양가고 친속들도 유배되었다.우왕 2년(1376)집의 김승득(金承得)과 헌납 안 정(安 定)등이 한 안과 노 선도 홍 관과 권 진 등과 동일하게 부모 처 자에게까지 극형(極刑)에 처하자고 주장하니 시중 이인님(李仁任),찬성사 목인길(睦仁吉),평의 변안렬(邊安烈),정당문학 홍중선(洪仲宣),문하시중 경복홍(慶復興)등은 그 당시 한 안과 노 선은 범행에 간여한 바 없다고 불복하였음에도 주살하였고 그 친속 을 원류(遠流)로 집행한 것을 이제 또 극형을 가중(加重)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 (力說)하였으나 왕은 이에 따르지 않고 체복사 이 영(李 英)을 보내어 공을 참화(慘禍) 케 하고 장남 호군공 휴(護軍公 休)삼남 녹사공 녕(錄事公 寧),사남 렬(烈)등도 모두 참하게 하였다. 공은 입조(立朝:벼슬을 함)20여년에 홍건적,여진 등의 침구와 우왕난정(禑王亂政)등의 내우외환(內憂外愚:나라안의 근심과 나라밖의 근심)이 격심(激甚)한 와중 (渦中:분란한 사건의 가운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이를 극복(克服)하고 누누(屬屬:여러번)히 큰 공을 세웠으나 일장춘몽(一場春夢:꾼 그때 뿐이고 꾼 후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봄 밤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이 불우(不虞:미쳐 생각지도 못 함)의 참화(慘禍)를 당하였으니 천도(天道)가 무심(無心)치 않은가?다만 불행중(不幸中)에도 장남 호군공 휴(休)과 3남 녹사공 녕(寧)의 후손들이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현달(顯達)하여 두 왕후 소혜,안순(昭惠,安順)가 탄생하고 부마(駙馬)가 두 분이며 경위재상(卿位 宰相)이 수십인(數十人)에 이르니, 이 모두 공의 적덕행의(積德行義)에 따른 응보(應 報)로 생각된다. 공은 당시 사문(斯文:유학)의 태두(泰斗:그 방면의 권위자)인 이색 목은(李牧隱), 정몽주 포은(鄭圃隱),이초은(李樵隱)등과 문교(文交)하였으니 유시(遺詩)도 많으리라 생각 되지만 전래(傳來)한 것은 일구절(一句節)뿐 별로 없다. 배위는 교하군 부인 노씨(交河郡 夫人 盧氏)이니 판서공(判書公:신일운재신이信一云宰臣怡)의 따님이다.슬하에 5남 3녀를 생육하였으나 장남,차남,삼남,사남은 화를 입었고 오남 판윤공 임(判尹公:任)만이 연소(年少)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공의 묘소(墓所)는 장단(長湍) 세곡산 소재(細谷山 所在)사숙 공묘(思肅公墓)안산(案山)에 있다 혹은 실호(失護)되었다 등 전후구보(前後舊譜)의 기록이 모두 다르다.장단 세곡은 현재 완충 지대이므로 이를 확인할 수도 없고 하여 고양시 내유동(13세 참의공파 한 전)단역내(壇域內)에 제단 (祭壇)을 설치(設置)하고 음 4월 13일에 제사를 봉행한다. 判書公(韓 休)(판서공 한 휴) 11세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公의 諱는 휴(休)요 일휘(一諱)휴(烋)이니 서원군(西原君)방신(方信)의 맡아들이고 사숙공(思關公)악(渥)의 손자이다. 일찍이 선음(先蔭)으로 출사(出仕)하여 봉선대부(奉善大夫)감문위호군(監門衛護軍) 하고 고려우왕(高麗禑王)시 병진(丙辰)에 화를 입었다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묘(墓)는 부전(不傳)되어 오다 정묘(丁卯)년(1989) 5월에 고양시 내유동 참의공(參議公)한 전 단역내(壇域內)에 추모단(追慕壇)세우고 음 4월 13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드린다. 배위(配位)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양효공(良孝公)호(鎬) 의 따님으로 公과 합설단위(合設壇位)이다. 贊成公(韓 季 復)(찬성공 한 계 복)12세 中訓大夫 知古阜軍事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諱 季復) (중훈대부 고부군사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公의 諱는 계복(季復)이니 봉선대부 감문위호군(奉善大夫 監門衛護軍)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증작(贈爵)된 휴(休:一諱 烋)의 아들이요 정당문학 수문전 태학사 서원군(政堂文學 修文殿 太學士 西原君)방신(方信)의 손자이다.公은 중훈대부 고부군사(中訓大夫 古阜郡事)를 지내고 후에 손자인 양혜공(襄惠公:伯倫: 右議政:睿宗大王의 장인)의 영귀(榮貴)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증작(贈爵)되었다.오랜 세월(歲月)정란(政亂)을 겪고 더욱 병란(兵亂)으로 유사,유록(遺事,遺錄)이 산실(散失)되니 생몰(生沒)을 살필 길이 없다.다만 公의유택(幽宅)이 龍仁의 內四面 植金里 였는데 국군(國軍)이 용지(用地)로 수용(收用)한 까닭에 현재는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구석현(安城郡 古三面 月香里 龜石峴)에 配位 곡성 염씨(曲城廉氏와 합폄)으로 면봉(緬奉)되었다. 아들은 증 영의정 창(贈 領議政 昌)이다. 公의 墓表는 8·15광복 후 46년 경오(庚午:1990)년 봄에,公의 19대손 흥종(興淙) 이 表文을 짓고 종중(宗中)이 세웠다. 監司公(韓 昌)13세(감사공 한 창) 江原觀察使 贈 補祚功臣 議政府 領議政(諱 昌) (강원도 관찰사 증 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 公의 諱는 창(昌)이요 자(字)는 성망(聖望)이요 호(號)는 관수정(觀水亭)이다.찬성 공 계복(贊成公 季復)의 아들이요 증 병조판서(贈 兵曹判書)인 휴(休)의 손자이다. 公이 42세에 타계(他界)하기까지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마지막으로 지내고 아들 양혜공(襄惠公:伯倫:右議政)의 영귀(榮貴)로 보조공신 의정부 영의정(補祚功臣 議政府 領議政)에 증작(贈爵)되었다.아들은 우의정 백륜(右議政 伯倫)과 현령공 숙륜(縣令公 叔倫)이다. 휘 계복,휘 창(諱 季復 諱 昌)두 분의 산소(山所)가 용인군 내사면 식금리(龍仁郡 內四面 植金里)에 있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 일제(日帝)가 등기법(登記法)을 제정,시행시 구한말 세도가 이지면(制定,施行時 舊韓末 勢道家 李志冕)이 불법 (不法)으로 山所 및 石物을 파손,묘역의 흔적(破損 墓域 痕迹)을 없애고 韓氏門中의 임야(林野)를 이씨 개인 소유(李氏 個人 所有)로 등기(登記)한 것을 諱 昌 17代孫 在綠 在烈,18代孫 東秀가 소송(訴認)을 제기(提起),승소(勝訴)하여 山所를 보수(補修) 하는 수난(受難)을 겪은 바 있다.1987년 국토방위(國土防衛)를 위한 국가사업(國家事業)으로 임야전답(林野田畓)이 수용(收用)됨에 門中의 뜻에 따라 1988년 3월 22일 京畿道 安城郡 古三面 月香里 龜石峴으로 移葬되었으며 매년 陰 10월 첫째 일요일에 歲 祝를 올린다. 公의 史錄이 傳해 오는 바 없어 후손인 우섭(友燮)이 수집(蒐集)한 자료(資料)를 모아 유사(遺事)를 짓고 후인(後人)의 참고(參考)로 하였다. 襄惠公(韓 伯 倫)(양혜공 한 백 륜)14세 세종 9년 ~ 성종 5년(1427~1474 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領經筵事 淸川府院君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령경연사 청천부원군) 公의 諱는 백륜(伯倫)이요 자(字)는 자후(子厚)이다.감사공 창(監司公 昌)의 아들이요 찬성공 계복(贊成公 季復)의 손자이다.公은 어려서부터 비범(非凡:뛰어남)하여 경술(經術:經書에 관한 학문 또는 統治方法)을 통달(通達)하고 기국(器局:재능과 도량)이 크고 활달(豁達)하였다. 처음에는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 直長同正)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번 전근(轉勤)하여 의빈부도사(儀實府都事)가 되었다.성화 무자(成化 戊子:1468)에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올랐다.처음 창릉(昌陵:睿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지금 의 王大妃를 선(選)하여 소훈(昭訓)을 삼았는데 이때에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고 公은 보국숭록대부 청천군(報國崇綠大夫 淸川君)으로 진계(進階)하고 오위 도총관(五衛 都摠管)까지 겸하였다. 이윽고 역당(逆黨)이 일어 난(亂)을 일으키거늘 公이 左右에서 힘을 다하여 제거(除 去)하니 이로 인(因)하야 익대공선(翼戴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고 기죽 (己丑:1469년)에 대광(大匡)을 더하고 겨울에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今上께서 대통 (大統)을 입계(入繼)하고 王大妃를 높여 母后로 삼고 公의 대우(待遇)를 더욱 후(厚)하게 했다.경인(庚寅:1470)년에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에 제수되고 경연(經筵)도 公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하였다.신묘(辛卯: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下賜)받고 겨울에는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리고 甲午(1475)년 5月 丁亥日에 병(病)으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8이라.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애통해하여 조회를 파하고 누차 내신을 보내 사제(賜祭)를 하고 부의(賻儀)를 등(等)에 넘게 했으며 장례(葬禮)는 외조고(外祖考)를 대우(待遇)하던 고례(故例)대로 하고 시호(論號)를 양혜(襄惠)라고 했다. 公은 관후(寬厚)하고 화평(和平)하여 늘 선세(先世)의 미덕(美德)을 계승하였고 몸이 국구(國舅)가 되어 문벌의 경사(慶事)가 더욱 컸지만 마음 갖기를 더욱 겸손하게 하였으니 公의 높은 복덕(福德)으로 보아 마땅히 그 영화(榮華)를 누릴 터이요,장수(長壽) 도 할 터인데 갑자기 이지경에 이르니 천도(天道)가 어찌하여 이렇게 박(薄)하였을까? 아,애통하도다.公의 病이 위독할 때에 유명(遺命)하기를 모든 상제(喪祭)를 일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하라고 했다 하니 여기에서 더욱 公의 平日의 수양(修養)한 바를 알 수 있도다.甲午年 7月 己卯日 손시(巽時)로 금릉현=김포군(金陵縣=金浦郡)의 남쪽,지금의 음단리(音段里)에 예장(禮葬)하였다.夫人은 서하부 부인 임씨(西河府 夫人 任氏)니 公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고양군(高陽郡)에 장사(葬事)하였다가 이제 옮겨서 公墓에 부장(부葬)하였다. 夫人은 바로 감찰(監察)휘 유(諱 柔)의 따님이니 監察도 王大妃 때문에 의정부 우의 정(議政府 右議政)을 증(贈)하였다.夫人은 얌전하고 아름다워 현행(賢行)이 있어서 능 히 덕문(德門)의 배필(配匹)이 될만하여 王大妃를 出生했으니 땀의 순차(順次)로 長女 인것이다.男의 長은 환(歡)이니 통정 돈영부도정(通政 敦寧府都正)이요,次는 열 항 순(悅 恒 恂)이요.女는 종실 귀성군 준(宗室 龜城君 浚)에게 갔고 次는 돈영부직장 남효원(敦寧府直長 南孝元)에게 갔고 次는 문소전참봉 원재(文昭殿參奉 元재)에게 갔고 次는 어리다.王大妃의 아들 현(현)이 제안대군(齊安大君)이요,女의 長은 貞淑公主요, 次는惠順公主이니 먼저 卒했다.直長이 一男을 生하니 걸(傑)이다.葬禮를 모신지 3個月만에 도정(都正)이 그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請하므로 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서(序)하고 銘해주노니 德도 주었거니와 福도 주었는데 그 壽에 대하여는 어찌 인색하였는고 울창한 저 뫼뿌리여 차가운 저 강물 여기서 公의 유당(幽堂)임을 銘하여 영원히 傳하노라. 첨지중추부사 김 유(僉知中樞府事 金 유)가 짓다. 추기(追記) 아!우리 선조 청천부원군 양혜공(先祖 淸川府院君 襄惠公)의 墓에 옛 碑가 있었으니 첨지중추 김공(僉知中樞 金公)의 대필(大筆)이었다. 글은 비록 간략하지만 公의 벼슬한 이력(履歷)과 사행(事行)의 훌륭함과 문벌(門閥)의 혁혁함을 모조리 진술했다고 할만하다.그런데 碑의 체제(體制)가 격(格)에 틀릴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니 風雨에 닳고 일그러져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21代孫 承基(-名 在鎔)가 이를 개탄하고“우리 祖考같이 벼슬도 높고 업적(業績)도 偉大한 분의 墓域이 이렇게 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하고 스스로 큰 돈을 내어 좋은 돌을 깎아 위의(衛儀:石物)를 고치고 따로 신도비(神道碑) 를 세워 그 글을 옮겨 각(刻)하기를 右와 같이 하였다. 다만 이 글이 公이 작고한 數月 뒤에 나왔지만 그 生年 당호(堂號)며 부조(不조)를 命한일 또는 次男의 관직 여서(官職 女壻)가 모두 빠지고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左와 같이 추록(追錄)하여 참고에 자(資)한다. 公은 世宗 丁未(西紀 1427)年에 出生했고 號는 의암(毅庵)이요,成宗朝에 부조(不조:廟에 神主를 永遠히 奉安하고 祭祀지냄)를 命하였고 2男의 官은 府使요,3男은 郡守 요,四男은 諡號가 襄平이요,5女는 判書 신수영(愼守英)에게 갔다. 檀君紀元 4314년 辛西 春 2月 하순에 18代孫 賢燮 삼가 기록하고 21代孫 敬南 삼가 쓰다. 淸原君(韓 慶 錫)16세(청원군 한 경 석) 戶曹判書 淸原君(호조판서 청원군) 公의 諱는 경석(慶錫)이요 字는 중대(仲大)이며 창녕부사(昌寧府使)를 지낸 열(悅)의 아들이요 양혜공(襄惠公)백륜(伯倫)의 손자이다. 公이 세조(世祖)계미(癸未:1463)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중종(中宗)정묘(丁卯:1507)에 황해감사(黃海監司)를 지냈다. 중종(中宗) 갑술(甲戌:1514)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올라 청원군(淸原君)에 봉(封)해졌다. 이 때(戊寅:1518)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관직(官職)을 사임하고 금릉 향교동(金陵 鄕校洞)에 내려와 도의(道義: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로 향민을 교화하니 세상 사람들이 운림선생(雲林先生)이라 칭송하였다. 이 사실이국가 기록이나 금릉(金陵)고을의 기록에 실려있다 配位 정부인 나주 라씨(貞夫人 羅州 羅氏) 는 승지(承旨)윤길(允吉)의 따님이고 公의 墓는 당진군 병영면 삼인리(唐津郡 兵營面 三仁里)後乙 坐이다. 判尹公(韓 後 琦)(판윤공 한 후 기) 21세漢城判尹(한성판윤) 公은 조선 중기(朝鮮 中期)의 문신(文臣)으로 휘(諱)는 후기(後琦)요 자(字)는 덕규 (德圭)이다. 양혜공(襄惠公 伯倫)의 후손으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문해(文海) 의 아들이요 어모장군(禦侮將軍)중의(重義)의 손자이다.선조(宣祖)무신(戊申·1608)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함흥판관(咸興判官),경원부사(慶源府使)를 역임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이 때 폐비 반대(廢妃 反對)상소(上疏)에 동참(同參)하고 후일의 재앙을 염려하여 성주 이공(星州 李公)과 함께 친구 우산 안문강공(牛山 安文康公)방 준(邦 俊)을 따라 남하,전남 보성군 복내면 탑동마을에 은둔(隱遁)생활로 생(生)을 마쳤다.公이 여생 (餘生)을 보내는 동안은 도의(道義)로 교우(交友)하고 후진(後進)의 면려(勉勵)에도 각 별(恪別)하였으며 초계(草溪)지방에는 公의 선정비(善政碑)가 있으니 죽산(竹山)안은순(安恩淳)이 지은 행장(行狀)과 월성(月城)김종가(金種嘉)가 짓고 연창(延昌)안종선 (安鍾宣)이 쓴 묘표(墓表)가 있으며 화산 권순명(花山 權純命)이 짓고 광산 이문수(光山 李紋秀)가 쓰고 연창 안종선(延昌 安鍾宣)이 전(篆)한 묘갈명(墓碣銘)이 있다.公의 배위(配位)남평 문씨(南平 文氏)는 公墓와 上下兆로 癸坐이다. 아들은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낸 진청(振淸)과 준연(俊淵)이경(利京)이다. 縣令公(韓 叔 倫)(현령공 한 숙 륜) 14세 通訓大夫 金浦縣令(통훈대부 김포현령) 公의 諱는 숙륜(叔倫)이다. 고려 31대 공민왕(高麗 31代 恭愍王)때 홍건적(紅巾賊)과 여진족(女眞族)을 평정 (平定)한 공(功)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임(封任)되고 봉훈대부 비서감 승(奉訓大夫 秘書監 丞)을 지낸 휘 방신(諱 方信)의 증손(曾孫)이 되는 휘 창(諱 昌)은 의정부 좌찬 성 휘 계복(議政府 左贊成 諱 季復)의 아드님이다.휘 창(諱 昌)은 강원관찰사 증보조 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江原觀察使 贈補祚功臣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좌리공신 우의정(住理功臣 右議政)을 지내고 조선조 8대(朝鮮朝 8代 睿宗)왕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따님으로 둔 양혜공(襄惠公 諱 伯倫)과 휘 숙 륜(諱 叔倫)두 아드님을 두었다. 휘 숙륜(諱 叔倫)은 통훈대부 김포현감(通訓大夫 金浦縣監)을 지냈으며 공(公)이 재임 중 선정(在任 中 善政)을 베풀다.젊은 나이에 애석(哀惜)하게도 타계(他界)하여 뜻 을 펴지 못하였다.배위 진주 소씨(配位 晋州 蘇氏)는 부호군 신(副護軍 辛)의 따님이다.公이 자손(子孫)들을 잘 교육(敎育)시키고 큰 아들 휘 흔(諱 흔)은 별좌관직(別坐官職)을 지냈으며 작은 아들 휘 변(諱 변)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명 황제의 명(明 皇帝 命)을 받아 중국(中國)에서 관직(官職)을 지냈고 공(功)을 세워 명황제 헌종(明 皇帝 憲宗)이 상장군 작위(上將軍 爵位)를 내렸으며 휘 흔(諱 흔)의 아들 휘 경면(諱 慶綿)은 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을 지냈으며 公의 후손(後孫)들은 代代로 관직(官職)에 등용(登用)되어 국사(國事)에 일익(一翼)을 담당(擔當)하였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임진란(壬辰亂)으로 실호(失護)되었던 것을 후손(後孫)들이 뜻을 모아 경기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구석현(京畿 安城郡 古三面 月香里 龜石峴)에 위패(位牌)를 안장(安葬)하고 묘소(墓所) 봉축(奉築)하여 매년 음력 10월(每年 陰歷 10月)첫째 일요일 세사(歲祝)를 올리고 있다. 奉翊公 韓壽府(봉익공 한 수 부)13世 공의 휘는 수부(壽府)이다. 공은 고려 공민왕때에 자제위소속 한안의손자이며,아버지는한익창(韓益昌)이고,어머니는 부공조참판(父工曹參判)을지낸 청도 김씨(淸道金氏)이다.공의의유사를 살필길 없으나, 고려공민왕조속자제위홍윤지란피화(高麗恭愍王朝屬子弟衛洪倫之亂被禍)때에 유사실기(遺事實記)하여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공의묘는지곡촌현치일동후산범어등신좌합폄(墓:智谷村現治日洞後山泛漁嶝辛坐合貶)이며,배위(配位)는봉익대부경기안렴사 득림(奉翊大夫京畿安廉使 得霖)의 따님인충주최씨(忠州崔氏)이다. 슬하에 연(옥이름 연字)두었으며,부친은 홍윤난시유사실기한거양지피거신령현지곡촌무보급갑자대동보사적(洪倫亂時遺事實記韓居陽地避居新寧縣智谷村戊譜及甲子大同譜事蹟)墓 는신녕현북습지곡촌후산범어등신좌합폄쌍분(新寧縣北習智谷村後山泛漁嶝辛坐合貶雙墳)이고, 청도김씨 부공조참판 계, 묘합폄쌍분 配 : 淸道金氏 父工曹參判 啓, 墓合貶雙墳 이다.공의 조부는 韓 安(한안)이고,공민조속자제위홍윤지란피화 恭愍朝屬子弟衛洪倫之亂被禍)되어 墓는失傳하였으며, 京畿道 高陽郡 碧蹄邑 奈遊里山戊辰春設壇(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내유리산 무진 춘설단)이며,배위는 용성이씨(龍城李氏)이며, 부양성고호시중 춘부(父陽城古號侍中 春富)의 따님이다.墓與公合設壇(묘여공합설단)이며, 음 4월 13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錄事公(韓 寧)(녹사공 한 녕)11세 神虎衛錄事 贈 兵曹判書(신호위녹사 증 병조판서) 고려 말기의 무신,서원군(西原君:方信)의 셋째 아들로 사숙공(思關公:渥)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교하군부인 노씨(盧氏)이다. 공은 일찍이 등사(登仕:벼슬길에 올라)하여 신호위녹사(神虎衛錄事)가 되었더니 공민왕 23년(1374)에 홍 륜(洪 倫)이 공민왕을 시해(弑害)한 사건으로 자제위(子第衛) 전원이 극형(極刑)에 처형(處刑)됨에 따라 공의 둘째 형 휘(諱) 한 안( 韓 安)이 자제위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그 화(禍)가 공의 아버님과 맏형 호군공 휴(護軍公:休),어린 아우까지 연좌(連坐:한 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처벌 받음)되어 화를 입었다. 이와같은 불의(不意)의 참변(慘變)을 겪은 탓인지 공의 생졸(生卒)과 관직연조(官職 年條)의 전기(傳記)도 볼 수 없다.다만 세조 원년 손자인 양절공 확(襄節公:確)의 현달 (顯達)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그리고 묘소도 족보(族譜) 에는 장단세곡(長湍細谷)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 현재는 실호(失護)되었으니 진실로 애석한 바이다.그리하여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에 참의공 한 전(參議公:韓 石+眞)의 단역(壇域) 과 동역에 제단을 설치하고 음 4월 13일에 제사를 드리 고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니 영의정 문절공 중화(文節公:仲和)의 따님 이다.슬하에 1남 2녀를 생육하니 남은 서성부원군,증 영의정 순창공 영정(淳昌公:永 石+丁)이다. 城府院君(韓 永 )(서성부원군 한 영 정)12세 淳昌郡事 贈 領議政府事 西城府院君(순창군사 증 영의정부사 서성부원군) 공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녹사공 녕(錄事公:寧)증 병조판서의 아들로 찬성사 서원군(西原君 方信)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니 영의정 문절공 중화(文節公:仲和)의 따님이다. 공은 가문(家門)이 불의지변(不意之變:뜻밖의 변고)으로 참화(慘禍:참혹한 재앙 과 화난)속에서 생장(生長)하였다.그리고 이때는 이태조(李太祖:李成桂)가 고려를 타도(打倒)하고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던 혁명시기(革命時期)였다.그후 조선조에 와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순창군사(淳昌郡事)에 이르렀다.이것이 바로 가운(家運)을 만회(挽回:바로 잡아 돌이킴)하는 계기(契機)가 된 것이다. 공의 생졸(生卒)과 관직년조(官職年條)는 전기(傳記)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장남인 양절공 확(襄節公:確)의 현달(顯達)에 따라 참판,판서,찬성,영의정에까지 추증되고 서성부원군에 추봉된 사실만을 알 수 있다. 공의 묘소도 보첨(諸牒)에는 장단세곡(長湍細谷)으로 기재(記載)되어 왔으나 실호(失護) 되어 고양시 내유동 에 서원군 방신(西原君:方信)녹사공 녕(錄事公:寧)과 함께 설단(設壇)하고 음 4월 13일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義城 金氏)이니 의성군 양소공 영렬(襄昭公 :英烈)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생육(生育)하니 장남은 양절공 확(義節公:確)이고 차남은 참의공(參議公: 전)이며 3남은 증 영의정 청성부원군 정랑공 질(正郞公:질)이다. 장녀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여비 (麗如)가 되어 중궁(中宮)의 내정 (內政)을 전담(專擔)하였고 차녀는 세종 9년(1427)에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後宮)으로 궁중에 들어가 성종 14년(1483)에 별세하니 명나라 헌종(憲宗)은 몹시 슬퍼하고 탄식하며 사제(賜祭)와 시호(諡號) 를 공신(恭愼)이라 내렸다. 襄節公(韓 確)(양절공 한 확) 13세 조선 조선 정조 2년~ 세조2년(1400~1456) 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大匡補國崇錄大夫 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 西原府院君 贈諡襄節韓公(諱 確)(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사 서원부원군)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柔),호는 간이재(簡易齋),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증 영의정 순창공(淳昌公:永정)의 아들로 증 판서 녹사공 녕(錄事公:寧)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의성군(義城君)인 양소공 영렬(義昭公:英烈) 의 따님이다.태종 18년(1418)공의 나이 19살 때 명황제의 소명(召命)을 받고 명나라에 들어가 봉의대부 광록시소경(奉議大夫 光錄寺少卿)에 제수되었다. 때마침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게 되자 명조(明朝: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책봉(冊封)하는 명 황제의 정사(正使) 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온나라가 공의 풍채(風采:인품)를 선망(羨望:부러워함) 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7년(1435)자헌대부 중추원부사,동왕 21년 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정헌대부중추원사,동왕 22년 병조판서,함경도관찰사,동왕 25년 동지중추원사,한성부판윤,동왕 26년 다시 병조판서 겸 지중추원사,동왕 27년 이조판서,동왕 28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여 문무관직을 통할(統轄)하였다. 동왕 32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召還)되었고 문종 2년(1452)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단종 원년(1453)정란공신(靖難功臣)으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탁승(擢昇:발탁하여 승진시킴)되었으며 세조 즉위 초에 좌의정에 승진,좌익(左翼)공신 호를 내리고 서성부원군을 서원부원군으로 개봉 (改封)하였다. 세조 원년(1455)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북경(北京:명나라 수도)에 들어가 사명 (使命)을 완수하고 동왕 2년 환국 도중 단주 사하역(湍州 沙河驛)에서 원로 피로(遠路 疲勞)에 의한 병환으로 여사(旅舍)에서 별세(別世)하였다. 세조는 3일간의 조례(朝禮)를 철폐하여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며 부의(賻儀)를 하사 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영구(靈柩:시체를 넣은 관)를 맞이하도록 하고 당시 도승지(忠成公 韓明澮)에게 하명하여 호상일체(護喪一切)를 관장케 하여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양절(襄節)이라 내렸다.그 뒤 부조지전(不조之典)의 특전을 내리고 성종 원년(1470)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동왕 2년 선세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 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사후에 존호를 올림)함에 따라 공은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국구(國舅)로 추봉(追封)되었다.배위는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니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문양공 여방(文良公:汝方)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6녀를 낳으시고 장남은 공안공(恭安公:致仁)이요 차남은 장도공(章悼公:致義)이며 3남은 장간공(莊簡公:致禮)이다.1녀는 첨지중추부사공 이계녕(李繼寧),2녀는 계양군 증(桂陽君 增),3녀는 현령공 김자완(縣令公:金自琓),4녀는 동지중추부사공 최 정(崔 정), 5녀는 사직공 권집(司直公:權輯)에게 각각 출가하고 6녀는 덕종대왕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이시다.부실(副室)에서 6남을 낳으니 장남 은 사직공 류산(榴山),2남은 어모장군공 유산(柚山)이고 3남은 어모장군공 감산(柑山)이며 4남은 시산(枾山),5남은 이산(梨山),6남은 사과공 도산(桃山)이다.모두 명나라에서 성장(成長)하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까지 올랐으나 다시 명나라에 돌아가 그 후손들이 중국에 살고 있다고 전하여 온다.位置:南楊州市 鳥安面 陵內里 歲享日:寒食日 秋夕節 忌察祀. 증 남양부부인 홍씨(贈 南陽府夫人 洪氏:태종 4년(1404) ~세종 32년(1450)) 부인(夫人)은 양절공(襄節公:韓 確)의 배위(配位)이다.성(姓)은 남양 홍씨(南陽 洪 氏)이니 명성(名聲)이 높은 가문(家門)이다.고려조 때부터 대대(代代)로 공경 재상(公卿 宰相:고위 고관과 제왕을 도와 정무를 총리하는 대신)이 이어져 왔고 도덕(道德) 과 문장(文章)이 당대(當代)에 제일 높았던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堤學)문양공 여방(文良公 汝方)의 따님으로 조선조 개국공신(朝鮮 開國功臣)이요 남양군(南陽君)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堤學)문경공 길민(文景公:吉旼)의 손녀이며 부윤공(漢陽府尹:鄭符)의 외손녀다.부인은 나면서부터 자질(資質)이 범인(凡人)들과는 특이(特異)하고 어려서부터 안색 (顔色)이 온화(溫和)하고 기품(氣品)이 유순(柔順)하며 장성(長成)해서는 언어(言語)가 과묵(寡默:침착하고 말이 적음)하고 행동이 근엄(謹嚴:조심스럽고 엄숙함)하며 부모에게도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과 동온하정(冬溫夏정:겨울에는 따뭇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말)하는 효도(孝道)에 태만함이 없었으며 스승의 교훈(敎訓)을 받지 않고도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예절(禮節)에 어긋남 이 없었으므로 문양공이 사랑하고 귀중(貴重)하게 여기더니 양절공의 배위가 되었다. 오한(吾韓)에 오시어 공순(恭順)하고 근검(勤儉:부지런하고 알뜰함)하게 처신(處身)하고 구고(舅姑: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기며 제사(祭祀)를 받드는데 존경(尊敬)과 정성(精誠)을 극진(極盡)히 하고 친척간에 화목하며 노비(奴婢)를 은애(恩愛)로 써 거느리고 자녀(子女)들로 하여금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겸비(兼備)한 인품(人品)으로 성장(成長)하도록 교훈(敎訓)하였다.양절공께서 소시(少時)에 명나라 조정(朝廷)에서 광록시소경(光錄寺少卿)이란 벼슬을 받고 황제(皇帝)의 부름을 받고 여러 차례 에 걸쳐 명나라 서울에서 체류(滯留:머물러 있음)한 바 있었으나 가정사(家庭事)에 구애(拘애:거리낌)됨 없이 지낸 것은 부인께서 내조(內助)의 임무(任務)로 제반가사 (諸般家事)를 능숙(能熟)하게 처리(處理)했기 때문이다.이런 까닭에 양절공이 대단히 애경(愛敬)하였다. 불행하게도 미미(微微.*작은 모양)한 병환(病愚)으로 인하여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47세이다. 성종 2년(1471)선세자(先世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함에 따라 왕비의 어머니가 되므로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으로 추봉(追封)하고 남양군을 남양부(南陽府)로 승격(昇格)시켰다. 슬하에3남6녀를 생육(生育)하였다.연산군 3년(1497)3월 16일 판돈녕부사 서릉군(西陵君 諱 致禮)께서 인수대비(人粹大妃)의 명(命)을 받들어 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짓고 병서(竝書)토록하여 같은 해 6월에 세웠다. 우리나라 여성(女性)의 신도비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묘: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세향일:한식,추석,기제사. 恭安公(韓 致 仁)(공안공 한 치 인) 14세 세종 3년 ~ 성종 8년(1421~1477)純誠佐理功臣 崇政大夫 判敦寧府事 西城君 贈諡恭安韓公 (순성좌리공신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서성군) 조선조 초기의 문신 양절공(襄節公:確)의 큰 아들로,순창공(淳昌公:永정)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은 대제학 문양공 여방(文良公:波方)의 따님이다.세종 26년(1444)우세마로 음보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4년(1458)사재감정 (司宰監正),동왕 7년 첨지중추원사,동왕 8년 공조참의,동왕 12년 가선대부로서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하루도 휴식하지 아니하고 진심 갈력(盡心 竭力:마음과 힘을 다 함)하여 성실하게 집무(執務)하니 측근들이 건강에 해가 될까 염려하여 휴식정양(休息 靜養)할 것을 누차 권하여도 듣지 아니하고“내가 신하로써 국록(國綠)을 먹으면서 어찌하여 직무를 태만히 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이렇듯 정무의 과로로 인하여 신병이 심하여 동왕 13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정의 강한 권유로 예종 원년(1469)호조참판으로 배수되고 성종 원년(1470)가정대부로 가자(加資)되며 서성군(西城君)에 봉해졌다.동왕 2년‘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중추원사로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왕 3년 지돈녕부사와 도총관을 역임하였다. 동왕 5년 다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왕 6년 숭정대부 판돈령부사로 승진되었으나 숙환(宿愚:오래된 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왕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당분 간 조용히 휴양할 것을 권하였다. 동왕 8년 졸하니 왕은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하사하며 장례는 예장(禮葬:국장)으로 하라 하고 시호를 공안(恭安)이라 내렸다. 배위는 정경부인 백천 조씨(白川 趙氏)니 참찬공 서안(參贊公:瑞安)의 따님이다.슬하에 4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참판공 한(參判公:한)이요 2남은 우윤공 찬(右尹公: )이고 3 남은 참판공 건(參判公 健)이며 4남은 시정공 종(寺正公:宗)이다.묘:경기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산 21번지 세향일:음)10월5일 西原君(韓 好 問)(서원군 한 호 문) 20세 知中樞府使 兼 五衛都摠府都摠官 知訓鍊院使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지훈련원사) 조선 중기의 문신.자는 선경(善卿),동지중추부사 서천군 강(西川君:絳)의 아들로 서림군 창서(西林君:昌緖)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우계 이씨(牛溪 李氏)니 참판공 전(參判公:전)의 따님이다.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지중추부사 겸오위도총부 도총관 지훈련원사에 이르렀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배위는 두 분이다.초배는 정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니 부사공 여성(府事公:汝誠)의 따님이고 계배는 여산 송씨(礪山 宋氏)이다.슬하에 아들 하나를 낳으니 목사공(收使公 求+頁)이다. 判書公(韓 仁 及)(판서공 한 인 급) 20세선조 16년~인조 22년(1583~1644) 知中樞府使 刑曹判書(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서화가,자는 원지(元之),호는 현석(玄石),서석(瑞石),충정공 응인(忠靖公:應寅)의 아들로 사직공 경남(司直公:敬男) 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정경부인 전주 리씨는 현감공 담령(縣監公:聃齡)의 따님이다.선조 34년(1601)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光海君)1년(1609)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에 들어가고 다음 해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으로서 춘추관 기사 관을 겸하여《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그 뒤 정언(正言),사서(司書),수찬(修撰)등을 역임하다가 광해군 5년(1613)충정공이 계축옥사(癸丑獄舍)에 연루(連累)되자 사직하였다.이듬 해에 충정공의 상(喪)을 당하여 지성으로 상기를 마친 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외인(外人)들의 출입도 사절하였다. 인조 1년(1623)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누진(累進)하여 종성부사(鍾城府使),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지중추부사,형조판서,개성유수 등을 거쳐 인조 21년(1643) 에 관직을 물러났다.세자 책봉 주청사(世子 冊封 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고 이 괄(李适)의 난 때는 삼도독향어사(三道督餉御使)가 되어 군량을 조달하였고 지돈녕부사로 진향부사(進香副使)가 되어 인평대군(麟平大君)을 따라 심양(瀋陽)에도 다녀왔다.공은 서예에 뛰어나 당시 태학(太學)의 장소(章疏),비문(碑文),나라의 신주(神主)등을 많이 썼다.그리고 정사(靖社:인조반정을 결행한 공),소무(昭武:이인거가 일으킨 난을 적발 한 공)원종공신(原從功臣)1등에 각각 녹훈되기도 하였다. 배위 정부인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부솔공(副率公:拉俊)의 따님이다.슬하에 2남 2녀를 생육하니 장남은 감역공 진원(監投公 振遠)증 좌참찬이고 차는 예천공 명원(醒束公 命遠)이다. 淸恩君(韓 配 夏)(청은군 한 배 하) 23세효종 1년~경종 2년(1605~1722)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 世弟二師 知經筵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思 五衛都摠府都總官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세제이사 지경연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하경(夏卿),호는 지곡(芝谷),판관공 증 판서 성익(判官公 贈 判書:聖翼)의 아들로 청원군 성보(淸原君:聖輔)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었으며 청흥군 수원(淸興君:壽遠)의 손자가 되고 친어머니 증 정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참봉공 준성(參奉公 畯成)의 따님이다. 명재(明齋; 尹拯)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고 숙종 19년(1693)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사간원 정언(正言)등을 거쳐 동왕 32년(1706)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에 제수 되었으며 동왕 34년(1708)동래부사(東來府使).이듬 해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동왕 45년(1719)에 청평부원군 응인(淸平府院君 應寅)의 작위를 이어받어 청은군(淸恩君) 에 습봉(襲封)되었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이어야 했다)에 들어갔다.이어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거쳐 경종 2년(1722)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알성문과 독권관(讀券官:시험을 감독하고 글장을 채점하는 등의 시험관)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1월 3일 별세하니 왕(王)은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세제이사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弟二師知經筵弘文館大堤學藝文館大堤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總管)에 추증하였다. 공은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관으로서 명성이 높았다.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백성들이 선정(善政)의 혜택(惠澤)에 흡족(洽足)하여 생사당 (生祠堂)을 지어 초상(肯像)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모시면서 공의 명예(名譽)를 후세 (後世)에 전하도록 하였다.지금은 도시개발(都市開發)로 철거(撤去)되었으나 동래읍지 에는 지금까지도〈동래부사의 잊어버린 젖가락〉이란 전설이 있고 KBS방송국에서도 전설의 고향에서 방영한 바 있다.전설의 내용은 생략한다. 배위는 세 분인데 증 정경부인 연안 이씨(贈 貞敬夫人 延安 李氏)는 참봉공 오(參奉公: 悟)의 따님이고 전주 리씨(全州 李氏)는 사과공 유일(司果公:惟一)의 따님이며 밀양 박씨 (密陽 朴氏)는 호군공 찬업(護軍公:纘業)의 따님이다.6남 5녀를 생하니 장남은 문과 주 서공 사맹(文科 注書公:師孟)이요 차는 현감공 사철(縣監公:師喆)이고 차는 문과 대사간공 사선(文科大司諫公:師善)이며 차는 사경(師敬),차는 첨지중추부사공 사근(僉知中樞府事公:師謹),차는 심원공 사원(心原公: 師愿이다)1982년 8代孫 甲洙 父子(相宰,相彦)의 헌성(獻誠)으로 建造하였다. 정읍 종중(井邑 宗中)에서는 이런 갑수의 성의를 보고 홍석(洪錫),현석(玄錫),종석(宗錫),옥석(玉錫)을 위시하여 전종중이 자진하여 1982년 공 의 신도비(神道碑)를 수립(竪立)하여 같은 날 제막식(除幕式)을 거행(擧行) 하였다 묘위치: 청양군 정산면 광생리. 세향일: 음)10월13일. 判事公(韓 師 得)(판사공 한 사 득) 숙종 15년~영조 42년(1689~1766) 24세 崇政大夫 判敦寧府事 致仕奉 朝賀(숭정대부 판돈녕부사 치사봉 조하)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계능(季能),호는 유촌(柳村),진사공 증 찬성 배상(進士公 贈 贊成:配商)의 아들로 판관공 증 판서 성익(判官公 贈 判書:聖翼)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해평 윤씨(海平 尹氏)는 증 승지공 세위(贈 承旨公:世衛)의 따님이다.경종 2년(1722)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 제일인자(乙科 第一人者)로 급제하여 동왕 4년(1724)에 설서(說書),정언(正言)등을 거쳐 정랑(正郞),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집의(執義),사간(司諫)등 요직(要職)을 역임하였고 그 후 동부 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영조 27년(1751)병조,호조,형조참판 등을 거쳐 동왕 36년(176O)에 한성부판윤, 동왕 38년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진하였는데 이때 왕은 도승지로 있던 공의 아들 을 시켜 교지를 전하도록 명하니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동왕 39년(1763)에 숭정대부 판돈녕부사(崇政大夫 判敦寧府事)가 되었는데 다음 해 치사(致仕: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함)하여 봉조하(奉朝賀)의 칭호를 받고 종신(終身)토록 그 품계(品階)에 알맞는 녹봉(錄棒)을 받았으며 국가적인 의식에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였다.또 공은 나이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는데 후일에 아들인 판서공 광계(判書公: 光계)도 기로소에 들어가니 부자(父子)기사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공은 일씩이 영조대왕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정성을 다하여 보필한 인연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는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동왕 42 년(1766)에 별세 하니 향년 78세이다.왕은 두 차례 나 제문을 지어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배위는 세 분인데 초배는 증 정경 부인 반남 박씨(潘南 朴氏)니 필선공 태창(弼善公:泰昌)의 따님이다.슬하에 2남을 생하니 맏아들은 현감공 (縣監公:光啓)이요 차는 충정공광조(忠貞公:光肇)이다.계배는 증 정경부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니 식(식)의 따님이다.생 1남하니 판서공 광계(判書公 光계)인데 당숙부인 증 이조 판서공 사일(贈 吏曹判書公:師一)에게 계후 입양(系后入養)되었다.초배 반남 박씨는 향년 34세,계배고령선씨는 향년 29세 에 요서 (夭逝:나이가 젊어 일찍 죽음)하였다. 삼배 순천 김씨(順天 金氏)는 첨지중 추부사공 중득(僉知中樞府事公:重得)의 따님이다.5남을 생하니 장남은 만호공 광교(萬戶公:光敎)이고 2남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공 광선(通政大夫中樞府事公:光敾)이고 3남은 자눌공 광민(子訥公:光敏) 이며 4남은 자륜공 광휘(子倫公:光徽)이고 5남은 자헌공 광목(子輯公:光牧)이다.공의 삼촌숙인 청은군 은 효성과우얘가 지극 하였다. 어린조카들을 친 아들보다 더 사랑 하였다. 그 중에서도 7살에 아버지를 잃은 공을 더욱 사랑 하여 아들 3형제가 있었음에도 아들을 제쳐 놓고 숙종35년 (1709)공에게 대가 케 한교지가 있으며,영조39년(1763)에 공의 연세가 75세에 이르자 왕이 공의 행적을 높이 평가 하여 정헌대부에서 숭정대부로 승진 시키며 내린 은전 의 교지도 있으며,영조42년(1766) 음 12월12일 공이 별세 하자 영조가 직접 지어 내린 제문은 보전 하지 못하였고 영조49년과50년2차에 걸쳐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내한 제문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위치:충남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팔지교좌位置:忠南 舒川郡 文山面 支院里八芝交坐 歲享日:陰 10月 16日. 靖惠公(韓 師 直)(정혜공 한 사 직) 숙종 21년~정조 2년(1695~1778) 24세 大司憲 漢城判尹 判義禁府事 知中樞府事(대사헌 한성판윤 판의금부사 지중추부사)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여온(汝溫),호는 소곡(巢谷),정선공 배후(旌善公:配厚)의 아들로 증 참찬공 배연(贈 參贊公:配淵)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어 증 참판공 성구(贈 參判公: 聖龜)의 손자가 된다.이 재(李 縡)의 문인으로 경종 1년(1721)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하다가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정선군수(郡守),정랑(正郞)등을 역임하였다.영조 30년(1754) 60세의 고령(高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병과(丙科) 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고 이어 사간원 헌납(獻納),사헌부장령(掌令)등을 역임한 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이 때 관동지방(關東地方)에 대기근(大飢饉:흉년으로 곡식이 없어 굶주림)이 들자 공의 녹봉(綠俸)에서 진휼(賑恤: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와줌)하는 등 성력 (誠力)을 다하여 수천 명의 기민(飢民)을 구제한 바 있어 그 치적(治述)을 인정받아 승 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동왕 39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나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경연(임금의 학문을 닦기 워하여 신하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학문을 강론하게 하던일)에 불참하였다 하여 원주(原州)에 유배되었으나 이듬 해 풀려나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고 그 뒤 사헌부 대사헌(大司憲),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등을 역임하였으며 80세에 기로소(著老所)에 들어가는 등 영조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정조 2년(1778)졸하니 향년 84세다. 왕은 부음(計音: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기별)을 듣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으로 내렸다가 후 일에 정혜(靖惠)로 개시(改諡)하였다. 배위 증 정경부인 전주 리씨(全州 李氏)는 전산군 심(全山君:深)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생하니 아들은 중고공 태모(仲皐公 泰모)이다. 忠貞公(韓 光 肇)(충정공 한 광 조) 25세 숙종 41년~영조 44년(1715~1768) 都承旨 大司憲(도승지 대사헌)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자시(子始),호는 남애(南厓),봉조하공 사득(奉朝賀公:師得)의 아들로 진사공 증 찬성 배상(進士公 贈 贊成:配商)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필선공 태창(弼善公:泰昌)의 따님이다.영조 14년(1738)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9년(1743)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壯元)으로 급제하여 곧바로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어서 지평(持平),사서(司書)를 역임하였다. 동왕 23년(1747)영남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재물을 함부로 사용한 경상좌수사와 진제곡(振濟穀:구제양곡)을 지나치게 허비한 전 경주부윤 정모(鄭某)와 소를 사사로이 매입한 홍해군수 김모(金某)등의 죄상(罪狀)을 보고하고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는 사천현감 이사순(李思順)에게 포상(褒賞)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왕 25년(1749)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수찬,지평,교리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호서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세금이 불공평하게 징수되고 있음을 보고하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동왕 29년(1753)도청(都廳)을 거쳐 경기우도 심휼사(京畿右道 審恤使)가 되어 백성들의 억울한 옥살이와 기근 상황 등을 살피고 돌아왔다.이듬 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나라에 진상하는 삼(參)의 양(量)이 과중함을 들어 경작하는 밭의 평수에 따라 징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왕 32년(1756)에 승지(承旨),동왕 36년에 대사간(大司諫),이듬 해 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 때 왕세자 장헌세자(王世子 壯獻世子)를 죽이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곧 홍산(鴻山)으로 옮겼다.동왕 38년(1762)에 풀려나 다시 승지에 기용(起用) 되었으며 이듬 해 도승지가 되고 동왕 42년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동왕 44년에 공이 별세하자 영조는 지난 날의 일을 후회하고 탄식(歎息)하는 내용의 제문(祭文)을 내려 애도하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공의 상기(喪期)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아들을 기용하여 공의 혼을 위안하도록 명하였다. 정조 13년(1789)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배위 정부인 동래 정씨(貞夫人 東英 鄭氏)는 군수공(郡守公:錫徵)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을 생하니 장남은 대흥공 증 이조판서 중유(大興公 贈 吏曹判書:重裕)요 2남은 옥천공 홍유(沃川公:弘裕)이며 3남 첨지주중추부사공 도유(僉知中樞府事公:道裕)이요 4남 증 참의공 충유(贈 參議公:忠裕)이다. 判事公(韓 光 會)(판사공 한 광 회) 25세숙종 41년~정조 16년(1715~1792) 輔國崇祿大夫 判義禁府事(보국숭록대부 판의금부사)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문숙(文叔),호는 우헌(愚軒),청산공 사덕(靑山公:師德)증 찬성의 아들로 진사공 배상(進士公:配商) 증 찬성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전주 리씨 (全州 李氏)는 대사간공 언경(大司諫公:彦經)의 따님이다.영조 14년(1738)식년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수찬,사서(司書),지평(持平),헌납(獻納),필선(弼善),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司諫)등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29년 동부승지,동왕 33년 대사성,동 왕 34년 이조참의,동왕 38년 한성부좌윤,동왕 39년 동부승지,동왕 41년 대사헌, 동왕 42년 경기도 관찰사,동왕 44년 형조판서,동왕 45년 이조판서,대사헌,동왕 46년 예조판서,대사헌,동왕 47년 한성부판윤,동왕 48년 대사헌,동왕 49년,이조 판서,대사헌,동왕 50년 이조판서,동왕 51년 함경도 관찰사,동왕 52년 의정부 우참 찬,정조 2년(1778)판의금부사,동왕 6년 숭록대부 판의금부사,동왕 8년 다시 판의 금부사가 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著老所)에 들어갔다.그 뒤에 형조판서,판의금부 사·의정부 좌 우참찬을 지내고 동왕 14년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판의금부사를 지내다 가 병으로 사직하고 동왕 16년(1792)에 졸하니 향년 78 이다.조정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예관을 보내여 치제(致祭)하였다. 공은 영조 및 정조조에 76세 노령에 이르기까지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면 서 공무에 바쁜 중에도 대소종사(위선사)에 참여하고 시조부군의 신도비문도 공이 썼다. 배위는 정경부인 동래 정씨(東來 鄭氏)이니 봉사공 석부(奉事公:錫敷)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생육하니 장남 여량공 최유(汝良公:最裕)은 백부(伯父)진사공 광세(進士公:光世)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었고,2남은 여철공 명유(汝哲公:明裕)이며 3남은 판사공 만유(判義禁府事:晩裕)이다.묘는 판사공 광회 정경부인 동래정씨 합폄이다.위치 충남 청양군 청양면 흥산리 세향일: 음)10월30일. 判書公 韓 光 경(판서공 한 광 경) 25世 영조1년(1725)~정조21년(1797)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자긍(子肯),판사,봉조하공 사득(判事,奉朝賀公:師得)의 아들 로 증 판서공 사일(贈 判書公:師一)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니 증 참판공 배한(贈 參判公: 配漢)의 손자가 되며 어머니 증 정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대사헌공 (大司憲公: 0)의 따님이다.영조 29년(1753)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42년 호조정랑(正郞)에 올랐다.동왕 50년 식년 시문과(式年 詩文科)에 갑과 제2인자 (甲科 第2人者)로 급제하니 탁월(卓越)한 실력(實力)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 承旨)에 등용(登用)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조 17년(1793)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직하였다.이듬 해 다시 형조판서에 복직하여 동왕 19년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 사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工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등을 역임하였고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배위 정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는 도사공(都事公:復陽)의 따님이다.슬하에 3남 을 생하니 장남은 효중공 증유(孝件公:曾裕)이고 차는 회중공 성유(晦仲公:聲裕)이며 차는 참판공 기유(參判公:耆裕)이다.공은 오한(吾韓)의 대동족보(大同族諸:四校己酉諸)를 편찬(編纂)하였고 정조 17년 (1793)양절공(襄節公:確)의 신도비 대석(神道碑 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솔선(率先)하여 이를 추진(推進)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많은 노력(努力)을 한 분이다.묘위치:충남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산12번지 세향일 음:10월17일 判事公 (韓 晩 裕)(판사공 한 만 유)26세 영조22년(1746)~순조12년(1812)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여성(汝成),호는 성암(誠菴),판사공 광회(判事公:光會)의 아들로 청산공 증 찬성 사득(靑山公 贈 贊成:師德)의 손자이며 어머니 정경부인 동래 정씨 (東來 鄭氏)는 봉사공 석수(奉事公:錫數)의 따님이다.영조 44년(1768)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동왕 49년(1773)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 을 거쳐 정조 2년(1778)정언(正言)이 되고 이듬 해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은산현감(殷山縣監)등을 역임하였다.동왕 17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승정원 승지(承旨),이조참의(參議)등을 지냈다. 동왕21년 예방승지(禮房),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순조 3년(1803)형조판서(判書)가 된 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등을 거쳐 동왕 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동왕 5년 대왕대비(大王大妃: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 提調)가 되고,숭정대부(崇政)로 가자된 뒤 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병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동왕 7년 숭록대부(崇綠)로 가자 되어서도 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이조판서,병조판서,예조판서,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등을 역임 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풍양 조씨(貞敬夫人 豊襄 趙氏)는 대사헌공 재홍(大司憲公:載洪)의 따님 이다. 슬하에 2남3녀를 생하니 장남은 참봉공 용필(參奉公:用弼)이고 차는 국언공 용빈(國彦公: 用彬)이다. 공은 정조 17년(1793)양절공(襄節公:確)의 신도비 대석(神道碑 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발기인(發起人)의 한 분으로서 많은 노력과 성의를 보인 바 있고 또 순조 4년 (1804)사숙공묘소중심수호(思肅公墓所重尋守護)할 때 발기인의 한 분이요 사숙공 묘갈명(墓碣銘)을 지은 분이다. 靖獻公(韓 用 鐸)(정헌공 한 용 탁) 27세 영조35년(1759)~순조17년(1817)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여로(汝路),호는 단산(丹山),대흥공 증 판서 중유(大興公 贈 判書 重裕)의 아들로 충정공 광조(忠貞公:光肇)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반남 박씨(贈 潘南 朴氏)는 금안군 성원(錦安君 成源)의 따님이다. 정조 13년(1789)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듬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 로 급제하여 동왕 15년 충청도 도사(都事)로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에서 의 난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罷職)되었다.동왕 17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복직되어 이듬 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곧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재정을 확충할 것과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는지 두루 살팔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동왕 22년 홍문관 응교(應敎)로서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순조 즉위년(180이 가선 (嘉善)에 가자(加資)되었다.이듬 해 경상도 창원,하동 등지에서 괴서(怪書)를 쓴 범인과 그 관련자에 대한 처리의 임무를 맡아 안핵사(按핵使)로 나갔다.이듬 해 동래부사(東來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전일에 안핵사로 나갔던 그가 관찰사 휘하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우의정 서용보(右議政 徐龍輔)의 주장에 따라 취소되고 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로 임명되었다. 때마침 기근이 혹심하였으나 공의 노력으로 많은 기민을 구제하였다. 동왕 4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 해 예조참판에 이어 다시 이조참판을 거쳐 동왕 6년 공조판서,형조판서가 되었다.그 당시 맹인으로 사형수가 된 김대성(金大成)이 폐질인임을 들어 감형(減形)할 것을 진언하여 유배(流配)하게 하였다.동왕 9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나갔다가 동왕11년 황해도 관찰사로 옮겼다.동왕 13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0월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동왕 14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 해 한성부판윤,호조판서,이조판서 다시 대사헌 등을 역임 하였다. 동왕 16년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임지에서 별세하니 왕은 부음(計音)을 듣고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시호(論號)를 정헌(靖獻)이라 내렸다. 공은 정조 17년(1793)양절공(賽節公:確)의 신도비 대석(神道碑 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발기인 중의 한 분이고 순조 4년(1804)사숙공묘소중심수호(思肅公墓所重尋守護)할때도 발기인 중의 한분이며 사숙공의 묘갈명(墓碼銘)을 전(篆)하는 등 위선사에 지성을 다하였다. 배위 증 정부인 기계 유씨(贈 貞夫人 杞溪 兪氏)는 목사공 한돈(收使公:漢敦)의 따님이 다.슬하에 1남 1녀를 생하니 아들 우서공 홍리(羽瑞公:鴻履)은 여민공 용석(汝民公:用錫)에게 계후 입양되었고 동지돈녕공 붕리(同知敦寧公:鵬履)을 계후입양(入養)하였다. 계배 정 부인 남양 홍씨는 정명(鼎明)의 따님인데 자손이 없다. 孝靖公(韓 正 敎)(효정공 한 정 교)29世 순조 10년~고종 5년(1810~1868) 判義禁府事 漢城附判尹(판의금부사, 한성부 판윤)조선 말기의 문신.자는 순칠(淳七),대사성공 긍리(大司成公:兢履)의 아들로 판관공 증 찬성 경리(判官公 贈 贊成 景履)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니 익정공 용구(翼貞公:用龜)의 손자 가 된다.공은 순조 17년(1817)구촌숙(九寸叔)인 경리(景履)가 무후로 졸하니 공의 나이 불 과(不過)8살의 어린 나이에 입양하여 집상(執喪)하게 되었다.또 상기가 지나자 11살 때 양어머니 증 정경부인 보성 오씨(寶城 吳氏)가 졸하였고 이듬해 조비(祖 )정경부인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졸하였으며 19살 때 조고(祖考)인 익정공이 졸하니 공은 20세 미만에 네 분의 상을 당하였으나 그 집상하는 예절(禮節)이 매우 완벽(完璧)하여 예법(禮法)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고 자품(姿品)이 온후(溫厚)하며 성행 (性行)이 단결(端潔)하고 학문(學文)에만 열중(熱中)하니 익정공이 대단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헌종 10년(1844)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일찍이 음보(蔭補)로 고위관직을 역임한 바 있어 이듬 해 대사간(大司諫),동왕 14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진되었고,정사 이계조(正使 李啓朝)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철종 2년(1851) 이조참판,동왕 5년 충청도 관찰사,동왕 7년 다시 이조참판,동왕 8년 형조참판,동왕 9년 다시 이조참판,동왕 10년 대사간으로 옮겼고 정경(正卿:상대부중에서 선발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조선조에 정2품이상의 관직)에 뽑혔다.동왕 13년 2월 예조판서,10월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고종 2년(1865)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듬 해 의정부 좌참찬(左參贊),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한성부 판윤 (漢城府 判尹)등을 역임하였다.고종 5년(1868)에 졸하니 향년 59세 이다.왕은 공의 부음을 듣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시호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하여 효정 (孝靖)이라 내렸다. 배위 정경부인 우봉 이씨(牛峰 李氏)는 이조판서 문간공 광문(文簡公:光文)의 따님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현령공 창석(昌錫)을 계후입양하였다. 提學公(韓 光 洙)(제학공 한 광 수)31世 철종 9년~일제 1913(1858~1913) 資憲大夫 行 奎章閣 提學(자헌대부 행 규장각 제학)조선 말기의 문신.자는 경온(景溫),호는 기정(杞井),문간공 장석(文簡公:章錫)의 아들로 참판공 증 찬성 필교(參判公 贈 贊成:弼敎)의 손자이며 어머니 정경부인 한산 이씨 (韓山 李氏)는 이조판서 효헌공 겸재(孝憲公:謙在)의 따님이다.고종 15년(1878)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동왕 1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에 발탁(拔擢)되었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예문관 검열(檢閱),병조좌랑(佐郞),정랑(正郞)등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27년 형조참의(參議)가 되고 그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승정원승지(承旨),이조참의,자헌대부 행 규장각 제학(提學),영희전 제조(永禧殿 提調)등을 역임하였다. 배위 정부인 전주 리씨(全州 李氏)는 판관공 병운(判官公:秉雲)의 따님이다. 슬하 에 1남 2녀를 생하니 아들은 박사 상의(相儀)이다. 章悼公(韓 致 義) (장도공 한 치 의) 14세 純城佐理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淸陽君 贈諡章悼韓公(諱 致義) (순성좌리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청양군 증시 장도) 조선 초기의 문신.자는 의지(誼之),양절공(襄節公:確)의 둘째 아들로 순창공(淳昌公:永정)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남양부부인 홍씨는 대제학 문양공 여방(文良公:汝方)의 따님이다.단종 3년(1455)음보로 사정 겸 녹사(司正 兼 錄事)가 되었고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안동대도호부사가 되어 남방(南方)제일의 치적(治績:정치상의 공적)을 세웠으며 다시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1년(1470)부호 군 겸 오위장,동지중추부사,한성부 좌윤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 왔다.이듬 해 공조참판에 배명되고 순성좌리공신에 녹훈되고,청양군(淸陽君)에 봉해 졌으며 동왕3년 병조판서에 배명되었다.그러나 신병(身病)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떠나 사택(私宅)에서 치료 중 성종께서 의약을 하사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께서는 좋은 약 과 음식, 또 기도 등 여러가지로 치료방법을 다 하였으나 모두가 무효로 돌아가고 향년 34에 졸하니 조정에서는 2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를 장도(章悼)라 내리며 부조묘 (不조廟)의 특전을 내렸다.배위는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와 합폄이며, 군사공 항전(郡事公 桓全)의 따님이다.슬하에 2남 1녀를 생하니 장남은 청원군 위(淸原君:偉)지중추부사요 다음은 평해공 탁(平海公:倬)이다. 位置:軍浦市 山本洞 歲享日:不조廟 寒食외 2回 恭平公(韓 偉)(공평공 한 위)15世 세조 11년~중종 6년(1465~1511) 資憲大夫 淸源君 兼 都摠府 都摠官, 知中樞府事 (자헌대부 청원군 겸 도총부 도총관, 지중추부사) 조선 전기의 문신.자는 굉부(宏父),장도공 치의(章悼公:致義)의 아들로 양절공(襄節公 :確)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 李氏)니 군사공 항전(郡事公:桓全)의 따님이다.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24년(1493)첨정,연산군 2년(1496)상례, 동군 4년 강화도호부사,동군 8년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냈다.동군 9년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에 올랐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청원군(淸原君)에 습봉(襲封)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군 10년 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중종 1년(1506)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상기를 마친 후 동왕 3년 자헌대부 청원군 겸 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이듬 해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동왕 6년 졸하니 향년 47세이다. 중종은 부음을 전하여듣자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며 예관을 파견 하여 치제(致祭)하였다.시호는 공평(恭平)이다. 공은 관리로서 청근(淸勤:청렴하고 결백하며 부지런히 힘씀)하였으며 부귀(富貴) 한가문의‘출신이었지만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겸허(謙虛:겸손하고 허심탄회함)하였으므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배위는 두 분이다.초배는 증 정부인 진주 강씨(晋州 姜氏)니 목사공 자정(收使公:子正) 의 따님이고 계배는 정부인 순흥 안씨(順興 安氏)니 부사공 우삼(府使公:友參)의 따님이다. 계배에서 아들 4남을 생하니 장남은 별좌공 수선(別坐公:守善)이고 2남은 정로공 수충(正老公:守忠)이며 3남은 봉사공 수신(奉事公:守信),4남은 정랑공 수도(正郞公:守道)이다.位置:軍浦市 山本洞 修理山, 歲享日:陰 10月 3日. 莊簡公(韓 致 禮)(장간공 한 치 례) 14세 세종23년(1441)~연산군5년(1499) 純誠佐理功臣 輔國崇錄大夫 領敦寧府事 西陵府院君 贈諡莊簡 (순성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서릉부원군 증시장간) 조선 초기의 문신이요 무신으로 자는 자절(子節),양절공(襄節公:確)의 셋째 아들로 군사공(郡事公:永정)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남양부부인 홍씨는 대제학 문양공 여방(文良公:汝方)의 따님이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도정,병조참지 첨지중추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 고 성종 2년(1471)순성좌리공신에 녹훈되며 서릉군(西陵君)에 봉해졌다.동왕 4년 병조참판을 배임하고 동왕 8년 사은사로,2년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동왕 11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 해 좌참찬이 되었다. 동왕 16년 판중추부사,그 뒤 호조,병조,공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연산군 (燕山君)1년(1495)도총관, 동5년 영돈녕부사로서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에 진봉 (進封)되었다. 공은 풍채(風采:인품)가 장려(壯麗:장대하고 화려함)하고 처신범절(處身凡節: 몸을 가지는 일과 모든 일)이 단아(端雅:단정하고 아담함)하여 관복(官服)을 갖추고 조정(朝廷)에 오르면 그 고상(高尙:거룩한)한 인품이 진선(眞仙:도교의 깊은 진리 를 깨달은 사람)을 대한 것 같이 우러러 보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문무(文武)를 통하여 내외요직(內外要職)을 두루 역임하며 오직 충성과 근고(勤苦:애를 써가며 부지런히 일함)로서 지력(智力:슬기의 힘)을 다하여 봉공(奉公:나라를 위하여 진력함)40여년에 그 공명(功名)이 능연각(陵煙閣:당태종이 공신 24인의 얼굴을 그려 걸어두었던 높은 집.여기에서는 나라에 공로가 많은 신하를 표창하는 집으로 쓰임)에 오르고 위계(位階:벼슬의 등급)가 일품(一品)에 이르렀다. 향년 59세에 졸하니 시호는 장간(莊簡)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죽산 안씨(竹山 安氏)니 연창위 양효공 맹담(延昌尉 良孝公:孟聃)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생하니 남은 서성군 익(西城君:翊)으로 증 병조참판이다.배위는 정경부인 죽산 안씨(竹山 安氏)와 합폄이며 位置 : 서울 道峰區 放鶴洞 歲享日:陰 10月 3日 參議公(韓 )(참의공 한 전) 13세 조선 태종 8년(1408) ~ 세종29년(1447)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 遺 事 :字 子珣 號 建文戊子生, 佐翼原從功臣, 黃海全羅監司歷, 戶曹參議贈戶曹參判, 世宗二十九年二月十五日卒 墓: 京畿道 高陽郡 碧蹄面 奈遊洞 大乃山 案山 卯坐(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내유동 대내산 안산 묘좌) 配 貞夫人平山申氏建文壬子生父掌令丁理祖判典農事彛曾祖典理判書집外祖永禧君開城王玹景奉甲申十一月二十日卒墓與公上下兆 墓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대내산 안산 묘좌) 공(公)은 조선 세종(世宗)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이요 ,字는 子珣(자순)이고, 아호는 유안( ) 이다.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영정(西城府院君)(永 )의 둘째 아들이고 녹사(錄事)를 지낸 증 판서공(贈 判書公 寧(녕)의 손자이며, 양절공(襄節公) 確(확)의 차제(次弟)이시다. 공은 태종(太宗) 8년(1408)에 출생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정직하고 형제지의(兄弟之誼)가 돈후(敦厚)하였으며 학덕(學德)을 쌓아 장차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世宗) 원년(1419)년 01월 17일(임술)에 의영고승(義盈庫丞)에 임명, 세종 22년(1440)(경신:庚申) 11월 12일 32세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승진(陞進)되고 세종 24년(1442)(임술:壬戌) 10월 24일에 (동반외관직 종2품)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전임되어 선정(善政)하니 백성(百姓)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 때가 공의 나이 34세 가 되시던 해 이다. 세종 26년(1444)(갑자:甲子)2월 22일에 형조참의(形曹參議)로 옮겼으나 ,이 해 다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로 나갔다가,세종27년(1445)(을축:乙丑) 7월 1일 37세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전임되었다.세종 29년(1447)년(정묘:丁卯)1월 16일 공조참의(工曹參議)로 나갔으나, 다음 달인 2월 15일에 졸하니 향년 39세 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후(厚)한 부의(賻儀)(쌀과 콩米豆 10석과 관곽棺槨)를 내리고 가선대부 호조판서(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에 증직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8월12일에 좌익원종공신이등(佐翼原功臣二等)에 녹훈(錄勳)되었다.배위(配位)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는 장령(掌令) 丁理(정리)의 따님이고,아들은 7명으로 兵使 忠仁(병사 충인), 副正 忠義(부정 충의), 副正 忠禮 (부정 충례),參議 忠智(참의 충지), 參判 忠信(참판 충신), 僉使 忠常(첨사 충상), 都正) 忠順(도정 충순)이다.공의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대내산 아래 묘좌원(奈遊洞 大奈山下卯坐原)에 안장(安葬)하였고 배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는 태종6년 (병술:丙戌) (영락:永樂4년)에출생 하시어,세조 (世祖)10년(1464)(갑신:甲申) 11월 20일 향년 59세에 졸하여, 공묘계하(公墓階下)에 안장(安葬) 하였다.시초(始初)에 묘갈(墓碣)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과 난세병화(亂世兵禍)로 비(碑)가 마멸(磨滅)되니 ,후손 魯洙(노수)와 厚福(후복)과 明洙(명수)가 힘을 합하고,魯洙(노수)가 비문(碑文)을 지어 묘비(墓碑)를 수립(竪立)하여 신도비(新道碑)를 세웠다. 永慕齋(영모재)는 참의공 전( )과 배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의 향사(享祀) 또는 종친회(宗親會)나 혹은 향학(鄕學)등으로 쓰이며 1963년 4월에 건축(建築)한 목조건물(木造建物)이다.2001年4月30日,參議公先祖님齊室境內 에서 회의(각)종중에 齋室再建築費獻誠金配定(재실재건축비헌성금배정)하여,2001년10월 아들일곱분이신(각)종중에서 힘을합하여, 再建築(재건축)하였다. 본당(本堂)은 15평, 부속 건물(附屬建物)이 20여평, 부지면적(敷地面積)은 220평이다. 세일제는 매년 10월5일(음력)봉행한다. 子 女 : 忠仁. 忠義. 忠禮. 忠智. 忠信. 忠常. 忠順.*가계도* *국역왕조실록 사위 成 健: 文吏判 父順祖 子成景溫正郞贈副提學
兵使公 (韓 忠 仁)(병사공 한 충 인) 세종15년1433년~? (通政大夫 全羅兵馬節度使 贈 資憲大夫吏曹判書) (통정대부 전라병마절도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墓: 京畿道 高陽郡 碧蹄面 奈遊洞 大乃山 配: 貞夫人 安東金氏, 父 知敦寧 仲淹 공 (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으로 휘(諱)는 충인(忠仁)이다. 참의공(參議公) 전( )의 큰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永 (영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掌令) 정리(丁理)의따님이다. 세종(世宗) 15년(1433년)에 출생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 전라수사(全羅水使)에 올랐으며,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 兵馬節度使) 벼슬을 지내다가, 이시애 난 의 출정하여 평정 하시고, 성종때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 왔으며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를 재수받으셨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지돈녕(知敦寧) 仲淹(중엄)의 따님이시며 三男三女 를 두시었다.장남은 증 승지 훈(贈 承旨 訓)과 차남은 첨정 근(僉正 謹), 감역 겸(監役 謙) 이다.장녀는 이형령 현감,차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 ,(중종대왕비인 단경왕후의 모후)이시기도 하며 ,삼녀는 성중온이다. 공은 천품(天稟)이 신근(愼勤) 하고 매사(每事)에 신중 하였으며 청렴했다.공의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내유동 대내산(奈遊洞 大奈山下 巳坐)사좌 상조(上兆)에 있는데 부인과상하조(上下兆)이다. 세일제는 매년 10월5일(음력)봉행한다.참고자료:현재 공의 묘소 우측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 兵馬節度使) 묘비가 있다. 집성촌:청양(인양리).청양(대흥리).장성(長成).광산(光山).곡성(谷城).고창(高敞).고양(高陽).여주(驪州).양평(楊平).*국역왕조실록. 副副正公(韓 忠 義)(부정공 한 충 의) 14세 副正(부정) 공(公)의 휘(諱)는 충의(忠義) 이다. 참의공(參議公) 전( )의 둘째 아들이고,순창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 (영정)의 손자이다.공(公)은벼슬을 쌓아 부정(副正:조선 조의 종친부(宗親府). 봉상사(奉常寺), 사복사(司僕寺), 군기사(軍器寺), 내자사(內資寺), 군자감(軍資監) 등에 1명을 두었는데 각각 그부서의 부책임자이다)을 지냈다.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벼슬이 올라 부정을 지냈다.배위(配位) 봉화 금씨(奉化 琴氏)는 목사 이영(牧使 以詠)의 따님이고.아들은 직장 백(直長 白) 이다. 집성촌:김화(金化).*국역왕조실록 副正公(韓 忠 禮)(부정공 한 충 례) 14세 副正(부정) 공(公)은 참의공(參議公) 전( )의 셋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 (영정)의 손자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천성이 무예(武藝)를 좋아하여 무속(武屬)의 부정(副正)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고 아들은 판관 담(判官 潭)과 등제 급(登第 汲) 그리고 부장 문(副將 汶)이다.공 과 안동권씨(安東權氏) 양위(兩位) 의 묘는 합조(合兆)로 선영하(先塋下) 에 있다.집성촌:영광(靈光)부안(扶安).*국역왕조실록
參議公(韓 忠 智)(참의공 한 충 지) 14세 吏曹參議(이조참의) 공(公)은 참의공(參議公) 전( )의 넷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西城府院君)永 (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문관으로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숙부인 경주 김씨(淑夫人 慶州 金氏)는 병마사 유속(兵馬使 有粟 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관 숙(判官 琡)과 우(佑), 현령 륜(縣令 倫) 그리고 현감 좌(縣監 佐)와 만호 준(萬戶俊)이다. 묘(墓)는 시초(始初)에 광주 해천 고덕리 (廣州 蟹川 古德理 丁坐)에 배 경주김씨(配 慶州金氏)와 합조(合兆)였는데 묘갈(墓碣)이 있었는데 성남시의 도시계획(都市計劃) 으로 충남 공주시 이인면 용성리 인좌(忠南 公州市 利仁面 龍城里 寅坐)에 이장(移葬), 합조(合兆)되었다.집성촌:공주(公州).안산(安山).
參判公(韓 忠 信)(참판공 한 충 신) 14세 嘉善大夫 參判(가선대부 참판) 공(公)은 참의공 전( )의 다섯째 아들이고, 순창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 (영정)의 손자이다,공(公) 가선대부 참판(嘉善大夫 參判)을 지냈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남양 홍씨(貞夫人 南陽 洪氏)는 집의 연(執義 演)의 따님이고, 묘(墓)는 선영 하(先塋下) 쌍조(雙兆)이다.아들은 승지 讚(찬)이다.집성촌:나주(羅州)
僉使公(韓 忠 常)(첨사공 한 충 상) 14세 僉使(僉節制使) 공(公)은 참의공 전( )의 여섯째 아들이고,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 (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첨사(僉使:僉節制使의준말)를 지냈다. 배위(配位) 남양 홍씨(南陽 洪氏)는 도사 서(都事 瑞)의 따님으로 묘(墓)는 선영하(先塋下) 상하조(上下兆)이다.아들은 별좌 회(別座 澮)와 참의 결(參議 潔)이다.집성촌:진도(珍島).*국역왕조실록
都正公(韓 忠 順)(도정공 한 충 순) 14세 敦寧都正(돈녕도정) 공(公)은 참의공 전( )의 일곱째 아들이고,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 (西城府院君) 永 (영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돈녕도정(敦寧都正: 조선조때 종친부(宗親府),돈녕부(敦寧府)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장단세곡(長湍細谷) 에 묘가 있었다. 아들은 동지 추(同知 樞)와 동(棟) 그리고 친위 기(親尉 機)이다.집성촌:당진(唐津).*국역왕조실록 正郞公(韓 )(정랑공 한 질)13세 大匡輔國崇祿大夫 補祚功臣 贈 領議政 淸城府院君 (대광보국 숭록대부 보조공신 증 영의정 청성부원군) 조선조 초기의 문신.순창공 영정(淳昌公:永 )증 영의정 서성부원군의 아들로 녹사공 녕(錄事公:寧)증 병조판서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義城 金氏)니 의성군 양소공 영렬(襄昭公:英烈)의 따님이다.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좌랑 (戶曹佐郞),중추부도사,공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30세에 종친부 부정겸 상의원 첨정이 되었는데 세종 23년 6월 11일 에 있었던 사헌부 지평 홍원용과 사련원 우정원 신후갑 등의 탄핵사건에 호조판서 김맹성, 참판 황치신과 호조좌랑 한질 등의 문제되어 판서 김맹성과 판서 황치신은 문책 되었으나 공은 무사 하였다.세조 원년(1455) 좌익원종공신 (住翼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영의정을 지낸 아들 질경공 치형(質景公:致亨)의 현달 (顯達)로 영의정 청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니 도총제공 서(都摠制公:敍)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을 생육(生育)하니 장남은 첨정공 치원(僉正公:致元)증 이조판서이고 2남은 질경공 치형(質景公:致亨)이며 3남은 회양공 치량(淮陽公:致良)이요 4남은 봉사공 치미(奉事公: 致美)이다.贈 貞敬夫人 漢陽趙氏와合兆이며,墓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13 長興面 三上里 山60番地 歲享日:陰曆10月3日 . 僉正公(韓 致 元)(첨정공 한 치 원) 14세 遺事(유사) 조선 초기의 문신.정랑공 질(正郞公: )증 영의정의 아들로 순창공 영정(淳昌公:永정) 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도총제공 서(都摠制公 :敍)의 따님이다.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군자감 첨정에 이르고 중종 때 손자 공간 공(恭簡公:世桓)의 현달(顯達)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배위 증 정부인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세양공 강(世養公:薑)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낳으니 큰 아들은 첨정공,증 판서 운(僉正公 贈 判書:運)이고 다음 황간공 증 승지 적(黃潤公 贈 承旨:迹)는 질경공 치형(質景公:致亨)에게 계후입양되었으며 다음은 별검공 선(別檢公 選)별좌공 달(別坐公 達),승지공 우(承冒公 遇)이다. 所在地: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59-1 歲享日:陰 10月 3日 恭簡公(韓 世 桓)(공간공 한 세 환) 16世 성종 2년~중종 17년(1471~1522)戶曹判書 知中樞府事(호조판서 지중추부사) 조선 전기의 문신,자는 공서(公瑞),첨정공,증 판서 운(僉正公 贈 判書 運)의 아들로 첨정공,증 판서 치원(僉正公 贈 判書 致元)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예안 이씨(禮安 李氏)는 찰방공 신(察訪公 愼)의 따님이다. 성종 23년(1492)사마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년(1495)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연산군 5년(1499)춘추관 기사관이 되어《성종실록》편찬에 참여 하였다.그 뒤 천추사(千秋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도정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이 심해지자 바른 말을 자주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승진하지 못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중종 2년(1507)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이조참의가 되었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그때 도내에는 흉년이 들어서 많은 도민이 아사(餓死:굶주려 죽음)지경에 있는지라 공은 국가의 곡식을 풀어 이재민(罹災民)구호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전부 소생(蘇生)케 하였다.그 뒤 한성부 우윤,이조참판,한 성부 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 겸 도총관,지돈녕부사,경상도 관찰사,한성부 판윤,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호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경상도 관찰사 재임시부터 정무에 지나치게 노고(勞苦:애쓰고 고생함)한 것이 병이 되어 병세가 위중하자 왕은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였으나 끝내 회춘(回春)하지 못하고 돌아가니 향년 52세이다.왕은 2일간의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 (致察)한 뒤 시호를 공간(恭簡)이라 내렸다.공은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고 겸손 (謙遜)하여 평생에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고 벼슬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느 사람이든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사랑하고 공경(恭敬)하였다.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여 조석문안(朝夕問安: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여쯤)을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막(廬幕:상제가 무텀 근처에 거처하는 오두막집)살이를 하며 집상(執喪:부모의 상사에 있어서 예절을 지킴)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 이씨(慶州 李氏)니 전직공 영령(顧直公:永齡)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니 큰 아들은 전부공 헌(典簿公:헌)이요 차는 참판공 두(參判公:두)이다. 所在地:楊州郡 長興面 三上里山59-1 歲享日:陰 10月3日 . 한 두(韓 두)1501(연산군 7)∼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앙(士仰).아버지는 이조판서 세환(世桓)이며, 어머니는 전직(殿直) 이영령(李永鈴)의 딸이다.1526년(중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자가 되고, 저작·정언에 이르러 잠시 물러나 있다가 정유삼흉이 처벌된 이후 재기용되어 전적이 되었고, 수찬·장령 등을 지냈다.1544년 집의, 1546년(명종 1) 전한·직제학·부제학·동부승지 등에 이르렀고, 이듬해 좌승지가 되었다.1548년 도승지에 올랐다가 1549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이때 기생을 데리고 여러 읍을 순유(巡遊)하여 민폐를 끼친 죄로 파직당하였다.1551년 첨지중추부사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개성부유수가 되었으며, 1554년 형조참판, 이듬해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質景公(韓 致 亨)(질경공 한 치 형)14세 세종16년(1434)~연산 8년(1502)純誠明亮佐理功臣 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淸城府院君 贈諡質景 (순성명량좌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렬경연 홍문관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遺事(유사) <참고문헌; 성종실록, 연산군 일기, 중종실록, 국조인물고>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통지(通之),시호는 질경(質景),정랑공 질(正郞公:질)증 영의정의 아들로,순창공 영정(淳昌公:永정) 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도총제공 서(都摠制公:敍)의 따님이다. 문종 1년(1451)호위청 기사(扈衛廳 記事)로 음보된 뒤 직장,감찰,지평,장령,소윤,판결사,승지,참판,동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종 2년(1471)좌리공신(佐理功臣)3등에 녹훈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그 뒤 개성부유수,경기도관찰사,한성부판윤,도총관,공조와 호조,병조 판서,판의금부사,평안도 관찰사,좌우참찬과 찬성을 역임하였고 연산군 2 년(1496)우의정에 올라 동군 4년 좌의정,이어 동군 6년 영의정까지 올랐다.동군 8 년 천수(天壽:타고난 목숨)를 다하니 모든 백성들의 애도(哀悼:사람의 죽음을 서러 워함)속에 예장(禮葬:국장)하고 나라에서 시호를 질경(質景)이라 내렸다. 성종 때에 주청사(奏請使),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등으로 다섯 차례나 명 나라에 다녀오고 명 황제로부터 正一品만이 차는 서대(犀帶:물소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받았으며 명나라와의 외교에 많은 공(功)을 세웠다.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의 명절과 경사 때마다 사신을 보내고 그때마다 금은보화(金銀寶貨)와 인삼(人參),호피(虎皮)등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까지도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많은 공물(員物)을 바쳐왔다.이로 인하여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생활고는 도탄(塗炭:몹시 곤란함)에 빠질 지경에 이르렀다.공은 명 황제에게 이 실정을 설명하고 공물을 감소(減少:줄여 적게 함)하여 줄 것을 상소하여 그 뒤부터는 절반 이하로 감소되었다.연산군이 등극하여 폭정이 시작되자 그 일거일동에 대하여 수시로 충간(忠諫:충성 을 다하여 간함)하고 무능 또는 신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코자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그 뒤 공과 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등 공동 명의로 낸《10조 상소문》을 비롯하여 수백 차례 충간하였으므로 연산군도 감히 폭정하지 못하고 멈추거나 주저하다가 공이 돌아가자 이때부터 폭정이 더욱 심하였고 공이 자기의 의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불충(不忠:임금을 배반함)한 자로 몰고 또 자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하였다고 허구(虛構:사실이 없는 일을 얽어 만듦)하여 삭탈관직과 일가가 몰살 당하는 등 불행한 일을 당하였으나 중종반정 즉시 중종은 공을 복관작하고 부조지전의 특명을 내렸다.공은 홀로 되신 어머니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왕으로부터 누차 포상을 받은 바 있다. 배위는 두 분인데,초배(初配)정경부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는 양녕대군 제(讓寧大君:제)의 따님이고 계배(繼配)정경부인 단양 우씨(판陽 禹氏)는 부사공 연(府使公:延)의 따님인데 두 분 다 자녀를 못 낳고 부실(副室)에서 아들 사자(獅子)가 있다.고로 황간 공 적(黃潤公:迹)을 계후입양하였다. 所在地:楊州郡 長興面 三上里 歲享日:春秋節祀 및 陰 10月 3日 淮陽公(韓 致 良)(회양공 한 치 량)14세 세종18년(1436)~중종20년(1525)淮陽都護府使(회양도호부사) 조선 초기의 문신,정랑공 질(正郞公:질)증 영의정의 아들로,군사공(郡事公:永정) 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도총제공 서(都摠制公:敍)의 따님이다. 세조 9년(1463)의학훈도(醫學訓導)로 음보된 뒤 황해도사,김제군수,전설사수(典設司守)부정 등을 역임하고 성종 19년(1488)서흥부사로 부임하였다가 동왕 23년 좌 통례·연산 3년(1497)회양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두분이다.초배는 숙부인 단양 우씨(丹陽 禹氏)니 원정공 해(院正公:垓)의 따님이고 계배는 숙부인 원주 변씨(原州 邊氏)니 남부령공 상조(南部令公:尙朝)의 따님이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다섯을 낳으니 장남은 평창공 우창(平昌公:禹昌)이고 2남은 부윤공 순(府尹公:巡)이며 3남은 적(迪),4남은 규(逵),5남은 현감공 도(縣監公:道)이다.소재지:김포군 대곳면 약암리 사통 산108의 1 세향일:陰 10月10日 監司公(韓 德 遠)(감사공 한 덕 원) 19世 명종 5년~인조 8년(1550~1630) 贈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조선 중기의 문신.자는 의백(毅伯)호는 홍암(紅岩)으로 송재공 곤(松齋公:곤)증좌참찬 겸 지의금부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이니 참판 후 (參判 厚)의 따님이며 진사공(進士公:去非)증 호조참판 겸 통지의금부사의 손자이다.선조(宣祖)6년(1573)진사시에 합격하고 동왕 15년(1582)식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 해 예문관검열로 제수된 뒤 대교,응교 등을 지냈으며 동왕 25년 임진 (1592)에 기복(起復)하여 장단(長湍)부사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동 27년 6월 전주부윤 같은 해 겨울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그 후 강원감사,인천부사,함경감사 겸 명장(明將)접반사를 역임하고 동 32년에는 다시 동지사로 사행(使行)했으며 33년 2월 경기감사 36년 2월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38년 1월 강원도 관찰사,같은 해 12월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동 39년 10월 의 주부윤,광해군(光海君)원년(1609)충청감사,동 2년 1월 호조참판(戶曹參判),동년 왕세자 책봉사은부사(王世子冊封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동 3년 8월 전라감사,동 5년 3월 평안감사,동 8년1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동 9년 1월 조도사 (調度使),동 10년 2월 정헌대부 지돈녕부사겸동지춘추관사(正憲大夫知敦寧府事兼同知春秋館事)를 역임했으며 동 11년 기로소(耆老所: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중 에서 70세 이상된 분을 예우하기 위한 곳이다)치사(致仕)하였으며 인조(仁祖)8년 (1630)5월 28일 별세하니 수가 81세이다. 조정에서는 생전에 문과급제한 후 40여 성상을 중앙과 지방의 행정요직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국무(國務)에 진력한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좌찬성(左贊成)겸 판의금부사에 증직(贈職)했다. 所在地:金浦郡 歲享日 陰 10月10日 . 奉事公(韓 致 美)(봉사공 한 치 미)14세 세종22년1440~? 공은 정랑공 질(正郞公:질)증 영의정의 4남중 막내 아들로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니 도총제공 서(都摠制公:敍)의 따님이다.공은 천성(天性:타고난 성품)이 온후(溫厚:따뜻하고 조용함)하고 단아(端雅:단정하고 아담함)하며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있어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학문에 힘써 20세 미만에 이미 경사(經史:경서 와 사서)에 통달(通達:막힘이 없이 환히 통함)하여 공을 아는 사람들은 장차 큰 인물 이 될 것을 믿고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에 응시하지 아니하였다.또 음보로 누차 기용된 바 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중형(仲兄)인 질경공 치형(質景公:致亨)의 현달(顯達:높은 지위에 오름)로 성종의 특명에 의하여 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배위는 전주 리씨(全州 李氏)이다.슬하에 아들 하나를 낳으니 승지공 종손(承旨公:從孫)이다. 學士公 公瑞 系 學士公(韓 公 瑞)(학사공 한 공 서)10세 충숙왕11년(1324)~우왕14년(1388) 공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휘(諱)는 공서(公瑞)이고 자는 공등(公登)또는 공서(公敍)이다.우정승(右政丞)인 사숙공 악(思肅公 渥)의 여섯째 아들이고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의 손자이다. 충숙왕(忠肅王)11년(1324)생이며 공민왕(恭愍王)3년(1354)등과(登科)하고 여러 벼슬을 지내다 옥문학사(玉門學士:나중에 提學으로 바뀌었다)에 이르렀다.우왕(禑王)14년(1388)10월 17일에 졸하니 향년(享年 65세었다.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고 아들은 당진부사 경(唐津府使 慶)이니 후손들이 이곳에 잉거 (仍居:代代로 오래 살음)하게 되었다. 공은 안성군(安城郡)0 0산에 우왕(禑王)13년(1387)3월 17일에 졸한 배위(配位)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합조(合兆)이다.장구(長久)한 세윌과 난세병화(亂世兵禍)로 실호(失護)되니 광적면 비암리 해유령(廣積面 比嚴里 蟹踰領)에 1962년 여름 판서공 숙(判書公 淑)의 신도비(神道碑)를 옮기고 1988년 3월 23일 후면에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와 부사공 경(府使公 慶)의 설단(設壇)을 하고 향사(享祀)하고 있다.정면 좌측(左側)의 비는 세장비(世葬碑)이다.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廣積面 比嚴里 蟹踰領 歲享日:陰 10月 첫째 일요일 府使公(韓 慶)(부사공 한 경)11세 공(公)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문신이다.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의 아들이고 우정승(右政丞)인 사숙공 악(思肅公 渥)의 손자이다.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충목왕(忠穆王)3년(1347)생이고 우왕조(禑王朝)에서 등과(登科)하였다.상서원 판관(尙書院 判官)을 역임하고 여러 벼슬을 지내다 태종조(太宗朝)에 당진부사(唐津府使) 로 나갔다. 그후 태종(太宗)13년(1413)9월 18일 졸하였으며 배위(配位)는 숙부인 여홍 민씨 (淑夫人 驪興 閔氏)이고 아들은 부정 척(副正 陟)으로 자손들이 대대(代代)로 당진지방 (唐津地方)에서 살아왔다.공과 배위(配位)의 묘가 고묘하(考墓下)에 합조(合兆)되었는 데 실호(失護)되니 고위(考位)와 같이 광적면 비암리 해유령(廣積面 比嚴里 蟹踰領)에 설단(設壇)하기에 이르렀다 副正公(韓 陟)(부정공 한 척)12세 공(公)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휘(諱)는 척(陟)이니 부사공 경(府使公 慶)의 아들이 며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의 손자이다.어머니는 숙부인 여홍 민씨(淑夫人 驪興 閔氏)이다.세종(世宗)4년(1422)제용감 부정(濟用監 副正:조선 때의 관청.모시,皮物,麻布,人參 등의 進獻 및 衣服 과*실, 그물, 비단, 포목 등을 맡아 본 벼슬)을 지냈다.배위(配位)공인 한산 이씨(恭人 韓山 李氏)는 목은 이 색(收隱 李 穡)의 후(厚)이며 아들은 계공랑 윤우(啓功郞 允祐)이다. 공과 배 숙인 한산 이씨(配 淑人 韓山 李氏)는 능내해유령 선영하사 좌(陵內蟹踰領 先瑩下巳坐)에 합조 (合兆)로 안장(安葬)되었다.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廣積面 陸內蟹踰領 歲享日:陰 10月 첫째 일요일 參議公(韓諱 允 祐)(참의공 한 윤 우)13世 공의 휘(諱)는 윤우(允祐)요 부정공 척(副正公 陟)의 아들이고 부사공 경(府使公 慶) 의 손자이며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의 증손(曾孫)이다.어머니는 공인 한산 이씨(公人 韓山 李氏)로 목은 이 색(收隱 李 穡)의 후(厚)이다.공이 벼슬길에 올라 중종(中宗)33년(1538)계공랑(啓功郞:조선조 文官의 官階)으로 재임하고 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배위(配位)증 숙부인 안성 이씨(贈 淑夫人 安城 李氏)는 고려안렴사 원장(高麗按廉使 元長)의 후(厚)이며 아들은 세마 근(洗馬 瑾)이다. 공이 졸함에 배 증 숙부인 안성 이씨(配 贈 淑夫人 安城 李氏)와 해유령선영하사좌 (陵內蟹踰領先塋下巳坐)에 쌍조(雙兆)이고 묘갈(墓碣)이 있다.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廣積面 陵內蟹踰領 歲享日:음 10月 첫째 일요일 洗馬公韓 瑾)(세마공 한 근)14세 ? ~중종조 世子翊衛司左洗馬 贈 兵曹判書(세자익위사좌세마 증 병조판서) 공(公)의 휘(諱)는 근(瑾)이고 자(字)는 치규(稚圭)이다.참의공 윤우(參議公 允祐)의 아들이며 부정공 척(副正公 陟)의 손자이고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의 현손(玄孫)이다. 효성(孝誠)이 출천(出天)하여 가묘(家廟)에 행사를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쫓아 매기일(每忌日)을 당함에 반드시 육선(肉膳)으로 행제(行祭)하고 3년을 여묘(廬墓)에서 살았다.천성(天性)이 고매(高邁)하여 사관(仕官)에 절의(節意)하고 음재(蔭才)를 시험치 않으니 친구(親舊)와 자제(子弟)의 모범이 되며 만년(晩年)에 효행(孝行)으로 추천 을 받아 중종(中宗)7년(1512)에 세자익위사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王世子의 待衛 를 맡은 관청의 職)로 재임중 졸하였다. 중종 33년(1538)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贈)하였다.배 증 정부인 고성 이씨(配 贈 貞夫人 固城 李氏)는 서령 평(暑令 평)의 따님으로 자품(資稟)이 명숙(明淑)하여 제자(諸子)를 교양(敎養)하되 법도(法度)가 있었다. 아들은 판서 숙(判書 淑).집의 호(執義 灝).사인 주(舍人 주)이다. 공이 광적면 능내 선조 백호 묘좌(廣積面 陵內 先兆 白虎 卯坐)에 안장(安葬)되고 배위(配位)증 정부인 고성 이씨(贈 貞夫人 固城 李氏)는 공묘(公墓)와 쌍조(雙兆)로 안장되었다.묘비(墓碑)가 있는데 선조(宣祖)24년(1591)8월에 세웠다.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廣積面 陵內蟹踰領 歲享日:陰 10月 첫째 일요일 判書公(韓 淑)(판서공 한 숙)15世 성종 25년~ 명종 15년(1494~1560)工曹判書 贈 禮曹判書(공조판서 증 예조판서)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선이다.휘(諱)는 숙(淑)이고 자(字)는 자순(子純)이 며 호(號)는 간이당(簡易堂)이다.세마공 근(洗馬公 瑾)의 아들이며 참의공 윤우(參議公 允祐)의 손자이다. 공은 성종(成宗)25년(1494)에 태어났으며 중종(中宗)8년(1513)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중종 20년(1525)식년문과(式年文科)의 병과(內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사간(司諫)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중종 36년(1541)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나갔다. 동왕 38년(1543)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使臣.賀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듬해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이 되고 명종 즉위년(明宗 郞位年,1545)고부 겸 청승 습사(告訃兼請承襲使)로 다시 명나라에 파견되었었다.그러나 이해 을사사화(乙巳士禍:明宗 卽位年(1545)王室의 外戚인 大尹,小尹의 反目으로 일어난 士林의 禍獄으로 小尹이 大尹을 몰아낸 事件)가 일어나자 대윤(大尹)의 일파(一派)로 몰려 파직되고 다음해(1546)이산(理山)에 안치(安置)된 뒤 배소(配所:罪人을 귀양보낸 곳)에서 명종(明宗)15년(1560)67세로 졸하였다. 그러나 인조(仁祖)5년(1627)복관(復官)되어 예조판서(贈 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정부인 인천 채씨(貞夫人 仁川 蔡氏) 는 부위 유손(副尉 裕孫)의 따님 이고 아들은 별제 열(別提 說) 이다.을사사화 때 형제(兄弟)의 일기(日記)에 의하면 제현(諸賢) 72인이 화를 입었다고 한다 공은 능내 해유령 선고세마공조 북록 묘좌(蟹踰領 先考洗馬公兆北麓 卯坐)에 안장 (安葬)되었다. 배위(配位)정부인 인천 채씨(貞夫人 仁川 蔡氏)는 공묘(公墓)와 합조(合兆)로 묘비 (墓碑)가 있다.신도비(神道碑)는 판결사 최간이(判決事 崔簡易)가 비명(碑銘)을 짓고 제검 이섭(提檢 李섭)이 글씨를 썼다.공의 신도비(神道碑)는 선조(宣祖)8년(1575)8월 일에 공묘(公墓)에서 100m 아래에 세워졌는데 공의 고손(高孫)인 수군절도사 간(水軍節度使 간)이 지리적 사정 (地理的 事情)에 따라 공묘로부터 200m 아래 소천(小川)위에 이비(移碑)하였다.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에 신도비(神道碑)의 보존(保存)이 어렵더니 1962년 여름 해유령(蟹踰領)에 다시 비를 옮기고 후측(後側)에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 부사공 경(府使公 慶)의 설단(設壇)을 하게 되었다.신도비문은 대리석(大理石)에 각자(刻字)되었는데 지금도 글씨가 선명(鮮明)하다.양주군 광적면 해유령(楊州郡 廣積面 蟹踰領)에 설단(設壇)또는 안장(安葬)된 조상(祖上)을 위한 재실(齋室)을 1994년 10월 10일 건립하였는데 건평 (建坪)30평 부지 (敷地)800평이다. 所在地:京畿道 楊州郡 廣積面 陵內蟹踰領 歲享日:陰 10月 첫째 일요일 忠靖公(韓 方 道)(충정공 한 방 도)10세 ?~공민왕23년(1374)西海道 副元帥 推忠協贊功臣(서해도 부원수 추충협찬공신) 公의 諱는 방도(方道)이니 고려(高麗)공민왕(恭愍王)때의 문신이다. 충혜왕묘 배향공신(忠惠王 配享功臣)으로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 사숙공 악(三重大匡 都僉議 右政丞 思肅公 악)의 일곱째 아들이며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의 손자이다. 일찍이 과거에 등제하여 무장(武將)으로 경상도 저곡촌(慶尙道 楮谷村:지금의 慶尙 北道 倭館邑 錦山里 닥실)에 살았다.공민왕 23년(1374)4월 부사(副使)에 재임 중 서해도 부원수(西海道 副元帥)로 삼아 서해의 도서(島嶼)를 방비케 하였다. 이 때 왜적(倭敵)은 유례없는 대병력(大兵力)을 이끌고 전 국토를 유린하여 경상도 합포 마산(合浦.馬山)에서는 왜선(倭船)350척이 침범하여 우리의 병선(兵船)을 불태우니 전사한 병졸도 무려 5,000여명이나 되었다 공은 서해를 침구한 왜적과 목미도 강화군(木尾島,江華郡)에 있음)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마침내 서해도 만호 이 성(西海道 萬戶 李 成)과 최사정(崔思正)과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니 때는 공민왕 23년(1374)이다.공은 추충협찬공신(推忠協贊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시호(諡號)를 평정(平靖)이라 내렸다. 배위(配位)는 순홍 안씨(順興 安氏)로 밀직사 경(密直事 璟)의 따님이며 아들은 중훈 대부 지(中訓大夫 祉)이다. 中訓大夫(韓 祉)(중훈대부 한 지)11세中訓大夫 贈議政府左贊成(중훈대부 증의정부좌찬성) 공(公)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휘(諱)는 지(祉)이며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의 아들 이고 사숙공 악(思關公 渥)의 손자이다.어머니 순홍 안씨(順興 安氏)는 밀직사 경(密直事 璟)의 따님이다. 공은 고려 말에 중훈대부 증 의정부 좌찬성(中訓大夫 贈 議政府 左贊成)이다. 배위(配位)경주 최씨(慶州 崔氏)는 경력 환(經歷 煥)의 따님이고 아들은 어모장군 종후(禦侮將軍 宗厚),봉례 종선(奉禮 宗善)이다. 奉禮公(韓 宗 善)(봉례공 한 종 선)12세通禮門 奉禮(통례문 봉례) 공(公)의 휘(諱)는 종선(宗善)이며 중훈대부 지(中訓大夫 祉)의 아들이고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의 손자이다.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 崔氏)로 경력 환(經歷 煥)의 따님이고 조선 초에 통례문 봉례(通禮門 奉禮)를 지냈다. 배위(配位)의령 심씨(宜寧 沈氏)는 참봉 우경(參奉 于慶)의 따님이고 아들은 생원 중보(生員 仲甫),집의 중유(執義 仲由)이다. 生員公(韓 仲 甫)(생원공 휘 중 보)13세 生員(생원) 공(公)의 휘(諱)는 중보(仲甫)요 자(字)는 한세(翰世)이다.봉례공 종선(奉禮公 宗善)의 아들이고 중훈대부 지(中訓大夫 祉)의 손자이며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의 증손(曾孫)이다.어머니는 의령 심씨(宜寧 沈氏)로 참봉 우경(參奉 于慶)의 따님이다. 공은 조선 세조(世祖)6년(1460)생이며 생원(生員)이었다.배위(配位)성산 이씨 (星山 李氏)는 진사 이항(進士 以恒)의 따님이고 아들은 건(健),순(順)이다. 執義公(諱 仲 由)(집의공 한 중 유) 13세 세조10년(1464)~중종10년(1515) 禦侮將軍 司憲府 執義 贈 資憲大夫 知義禁府事(어모장군 사헌부 집의 증 자헌대부 지의금부사)遺事(유사) 공(公)의 휘(諱)는 중유(仲由)이고 자(字)는 사행(士行)이다.봉례공 종선(奉禮公 宗善)의 둘째 아들이고 중훈대부(中訓大夫)지(祉)의 손자이며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 의 증손(曾孫)이다. 공은 세조(世祖)10년(1464)에 태어났다.천성(天性)이 순수(純粹)하고 무예(武藝) 를 좋아하였다.훈련원 사직(訓練院 司直)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도 나갔으나 중종(中宗)10년(1515)2월 5일 52세로 졸하니 자헌대부 지의금부사(資憲大夫 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하였다.아들은 진사 두문(進士 斗文)이다. 공은 노곡방대지예곡계좌(盧谷坊大知禮谷癸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배위(配位)증 정부인 팔거 도씨(贈 貞夫人 八宮 都氏)는 진사 이공(進士 以恭)의 따님으로 중종 23년(1528)에 졸함에 공묘(公墓)와 합조(合兆)되었다. 묘비(墓碑)는 대사성 이철균 (大司成 李鐵均)이 지어 세웠고 세월이 오래되어 문자(文字)가 마멸(磨滅)되니 정묘년(丁卯年. 1987)에 성산인(星山人)이헌주(李憲柱)가 짓고 합천인(陜川人)이증필서(李增必書)로 중수 (重竪)하였다. 所在地:慶北 倭館盧谷坊大知禮谷癸坐 進士公(韓 斗 文)(진사공 한 두 문)14세 成均館 進士(성균관 진사)공(公)의 휘(諱)는 두문(斗文)이고 자(字)는 자고(子古)이며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집의공 중유(執義公 仲由)의 아들이고 봉례공 종선(奉禮公 宗善)의 손자이며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의 현손(玄孫)이다. 성종(成宗)19년(1488)생이며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 있었다.공은 행(行)함 에 실적(實績)이 있어 회재 선생(晦齋 先生)과 더불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답시(答詩),율시한(律詩翰)을 기증(寄贈)받았다.명종(明宗)10년(1555)10월에 졸 하였다.아들은 감찰 구(監察 駒)와 부(駙),기(驥),주(駐),린(麟)이다. 공은 낙산동 배태북산 임좌(洛山洞 背太北山 壬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배위(配位)성산 전씨(星山 全氏)는 공조참판 증(工曹參判 贈)의 따님으로 공묘(公墓)와 쌍조(雙兆)이다. 正惠公(韓 泳)(정혜공 한 영) 9세 有元故亞中大夫河南府路摠管兼 本路諸軍奧摠管 管內勤農事知河方事 贈集賢直學士經車都尉高陽侯諡正惠韓公(諱 泳)遺事(유사) 공(公)은 충숙왕조(忠肅王朝)와 원(元)나라의 문신이다.휘(諱)는 영(泳)이고 일명 (一名)영(永),자(字)는 정보(貞甫)로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의 둘째 아들이며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손자이다. 충렬왕(忠烈王)5년(1279)3월 고려의 세신대가(世臣大家)의 자제들을 독로화(禿魯花:人質)로 원나라에 파견할 때 아버지 사기(謝奇)도 25인에 선발되어 형 악(악)과 함께 따라갔다. 영(泳)은 나이 어려서 황제가 있는 곳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곳에서 글을 배우다가 충렬왕 29년(1303)에 선발되어 숙위(宿衛:皇帝를 보호하는 親衛兵)에 충군(充軍)되고 4년 후 인종(仁宗)잠저(潛邸:임금이 오르기 전에 살던 邸宅)에 입시(入侍)하여 이듬 해 승무랑자무고제점(承武郞資武庫提點)이되고,황경(皇慶)원년(1313:충선왕 5 년),수무고사(壽武庫使)를 거쳐 이기고사(利器庫使),금주자사(歸州刺使)를 역임하고 지치(至治)2년(1322:충숙왕 9년)에 고주자사(高州刺使)가 되어 고을을 다스렸는데, 특히 고주는 변방에 이족(夷族)의 침략이 빈번하여 백성이나 물건들이 텅 비었고 생산 이 없어 도둑이 만연하였다. 공(公)은 스스로 검속(儉束)하고 덕으로 이들을 정성껏 감화(感化)시키고,그래도 도둑질을 고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법으로 가차없이 다스리니 드디어 고을에 평화가 이룩되었다.충숙왕이 원에 오래 있었는데 간선 권한공(權漢功)이 왕위를 심왕 (瀋王)에게 옮기려고 꾀한지라 시종하는 신하들이 절의(節義)를 다하여 보좌하기를 시조 한 마음으로 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채록(採錄)할만하다 하고,동왕 14년(1327) 11월,교지를 내려 정승 윤석(尹碩),상당군 한 악(上黨君 韓 악)등 26인에게 1등공신을,찬성사 정방길(贊成事 鄭方吉)검교판서 한영(檢校判書 韓泳)등 54인에게 2등 공신을 책훈(策勳)하고 전토(田士)와 노비를 주고 그 부모 처자에게 작(爵)을 미치게 하였다. 천력(天歷)원년(1329:충숙왕 16년)의주(懿州)로 전임하였다가 어사대(倒史臺)의 천거로 하서농북도 첨렴방사사(河西농北道 僉廉訪司事)가 되고,2년후 아중대부 합서 성원외랑(亞中大夫 陜西省員外郞)을 거쳐 또 2년(1333)후,하남부 총관(河南府 摠管) 에 임명되었다.공(公)은 비록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었지만 백성의 병되는 것을 물어서 이로운 것은 일으키고,해로운 것은 제거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은폐된 것을 검사하고 잘 살펴서 실정(失政)을 파악하여 빈약한 사람에게는 조세를 면제해 주고 풍부하게 도와주었으며,또 관사(官舍)를 새롭게 하며,지방의 도로를 깨끗이 하고 마을에 문을 세웠으며,농사와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고 약국을 세워 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천문 관측기를 설치하여 기상을 관측케 했다.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학교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하여 묘학(廟學)을 일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무릇 원근의 백성들이 오래토록 해결을 보지 못한 원통하고 억울한 일들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조사하여 모든 일이 정상(正常)을 얻었다.(至元)2년(충숙왕 복위 5년 (1336)관직에서 졸하니 집현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集賢直學士 亞中大夫 輕車都尉)에 중직되고 고양현후(高陽縣候)에 추봉(追封)되었으며,시호는 정혜(正惠)이다.이렇듯 공이 귀하게 되자 원나라 순제(順帝)가 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候)를,조부 강(康)에게는 첨태상 예의원사 고양현백(僉太常 禮義院事 高陽縣伯)을 추증(追贈)하였다.아들은 감찰어사 효선(監察倒史 孝先)과 무공고부 사 중보(武功庫副使 仲輔),급사동궁 문헌(給事東宮 文獻),이부상서 중평(吏部尙書 仲平)이다. 尙書公(韓 仲 平)(상서공 한 중 평) 10세 元 門下省 吏部尙書(원나라 문하성 이부상서)遺事(유사) 공(公)은 원(元)나라의 문신이었다. 휘(諱)는 중평(仲平)이요 일작(一作)효정(孝貞)이며 자(字)는 정부(貞夫)이다.독로화(充魯花)로 원(元)나라에 갔었던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의 손자이고 원나라에서 귀하게 된 하남로 총관(河南路 摠管)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넷째 아들이다. 공은 아버지(泳)와 같이 원나라에서 성장하여 벼슬길에 올라 감무(監務)에 오르고 누진(累進)하여 문하성(門下省)의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얼마후 고려인 본국 (本國)으로 돌아왔다.배위(配位)는 무송 유씨(茂松 庾氏)로 정랑 충좌(正郞 忠佐)의 따님이다.아버지(泳)는 충숙왕(忠肅王)복위 4년(1336)에 졸하였는데 고려의 우수성 (優秀性)을 발휘(發揮)하였다.아들은 해지관 후우(解紙官 候瑀調)와 충렬 휴우(忠烈 烋瑀)이다. 解紙官公(韓 侯 瑀)(해지관공 한 후 우)11세 承訓郞 通禮門 解紙官(승훈랑 통례문 해지관)遺事(유사) 공(公)의 휘(諱)는 후우(侯瑀)이다. 상서공 중평(尙書公 仲平)의 아들이고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무송 유씨(茂松 庾氏)로 정랑 충좌(正郞 忠佐)의 따님이다. 고려 말에 승훈랑통례문해지관(承訓郞通禮門解紙官)을 지냈다. 아들은 부사정 강(副司正 剛)이다. 敎導公(韓 尙 禮)(교도공 한 상 례)13세 成川敎導(성천교도)遺事(유사) 공(公)의 휘(諱)는 상례(尙禮)이고 호(號)는 눌수(訥수)이다.부사정공 강(副司正公 剛)의 아들이고 해지관공 후우(解紙官公 候瑀)의 손자이며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현손(玄孫)이다.조선조 태종(太宗)13년(1413)생이고 성천교도(成川敎導)를 지냈다. 공은성품(性稟)이 온유(溫柔)하며 평소에 어질고 말을 삼가하여 신중을 기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졌으며 저서(著書)도 많았다.글이나 명(銘)에는 경계하였고(箴.잠)친척 과 더욱 가까움에 힘썼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항상 웃고 즐겁게 살았기에 성종(成宗) 17년(1486)74세까지 장수(長壽)하였다. 공은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 이성산하 재궁동 경좌(忠淸北道 塊山郡 道安面 二聖山下齋宮洞 庚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배위(配位)신풍 최씨 (新豊 崔氏)는 사직 보 (司直 普)의 따님으로 공묘(公墓)와 쌍조(雙兆)이고 단갈비(短碣碑) 가 있다. 아들은 현감 우신(縣監 友信)이다. 歲享日:음 10月 2日. 縣監公(韓 友 信)(현감공 한 우 신)14세 通訓大夫 延豊,光陽 縣監(통훈대부 연풍,광양 현감)遺事(유사) 公의 휘(諱)는 우신(友信)이요 자(字)는 가립(可立),호(號)는 인곡(忍谷)이다. 공은 교도공 상례(敎導公 常禮)의 아들이며 부사정공 강(副司正公 剛)의 손자이고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5대손이다.어머니는 신풍 최씨(新豊 崔氏)로 사직 보(司直 普) 의 따님이다.천성(天性)이 글을 좋아하였다. 성종(成宗)25년(1494.弘治 甲寅)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공(功)이 많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연풍(延豊),광양(光陽)의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공신(功臣)의 문음(門蔭)으로 항상 집을 나서도 재물(財物)에 있어서 풍부(豊富)하고 어려움이 없었다.중종(中宗)21년 (1526)3월 5일에 졸하였다.배위(配位)숙인 해주 정씨(淑人 海州 鄭氏)는 현감 빈 (縣監 濱)의 따님이고 아들은 감찰 계기(監察 繼琦)이다. 공은 재궁동 남록 손좌(齊宮洞 南麓 巽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배위(配位)숙인 해주 정씨(淑人 海州 鄭氏)와 합조(合兆)이고 단갈비(短碼碑)가 있다.所在地:忠淸北道 塊山郡 道安面 二聖山下齋宮洞 南麓巽坐 歲享日:음 10月 2日 忠烈公(韓 烋 瑀)(충렬공 한 휴 우)11세 翰林學士 贈 吏曹判書(한림학사 증 이조판서) 공(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휘(諱)는 휴우(烋瑀)이고 자는 복여(福汝)이며 호는 취재(醉齋)또는 취헌(醉軒)이다. 이부상서(吏部尙書)중평(仲平)의 아들이고 하남부총관(河南府摠管)영(泳)의 손자이다.공민왕(恭愍王)19년(1370)생으로 정포은(鄭圃隱)선생에게 수학(受學)하고 19 세나 위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과 교유(交遊)하였으며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길야은과 더불어 동방(同榜)에 등과(登科)한 것이다. 공은 1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세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사사(仕事)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왕이 혼군(昏君)으로 난정(亂政)하는 제회 (際會)인지라 상소(上疏)를 올려 지성(至誠)으로 충간(忠諫)하다가 금주 김해(金州 金海)로 귀양갔더니 얼마되지 않아서 귀환(歸還)하여 바로 사직(辭職)하고 향리(鄕里)에 귀거 (歸居)하였다. 그러나 공은 공민왕의 선정(善政)을 추앙(推仰)하여 공민왕묘를 성묘(省墓)함을 잊지 않았더니 조선 태조(朝鮮 太祖)가 건국(建國)하여 그를 징소(徵召)하여 사간(司諫)을 제수(除授)하였으나 고려의 충절(忠節)로 취임하지 않았으며 공민왕 묘하에 주거(住居) 하면서 조석(朝夕)으로 성묘하였다. 세종(世宗)2년(1420)에 졸하니 왕이 특히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승지(承旨)최 보 (崔 潽)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 를 충렬(忠烈)이라 증여(贈與)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서 그 충절을 표창하였다. 배위(配位)는 한양 조씨(漢陽 趙氏)로 삼사좌사 인벽(三司左使 仁璧)의 따님과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의안대군 화(義安大君 和)의 따님이다. 아들은 덕산군수 지민(德山郡守 之民)이다. 郡守公(韓 之 民)(군수공 한 지 민)12세 德山郡守 贈 承政院 左承旨(덕산군수 증 승정원 좌승지) 공(公)의 휘(諱)는 지민(之民)이다. 충렬공 휴우(忠烈公 烋瑀)의 아들이고 상서공 중평(尙書公 仲平)의 손자이며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증손(曾孫)이다. 공은 음사(蔭仕)로 덕산군수(德山郡守)로 나갔으며 증 승정원 좌승지(贈 承政院 左承旨)이다. 배위(配位)숙부인 의령 남씨(淑夫人 宜寧 南氏)는 영의정 재(領議政 在)의 따님이고 아들은 진사 중현(進士 仲賢),군수중명(郡守 仲明),참봉 중성(參奉 仲聖)이다. 參奉公(韓 仲 聖)(참봉공 한 중 성)13세健元陵 參奉 贈兵曹參判(건원능 참봉 증병조참판)공(公)의 휘(諱)는 중성(仲聖)이고 자(字)는 여실(汝實)이다. 군수공 지민(郡守公 之民)의 셋째 아들이고 충렬공 휴우(忠烈公 烋센瑀)의 손자이며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의령 남씨(淑夫人 宜寧 南氏) 로 영의정 재(領議政 在)의 따님이다.태종(太宗)17년(1417)생원(生員)이 되고 그후 건원능 참봉(健元陵 參奉)이 되었다.증 병조참판(贈 兵曹參判)이다. 배위(配位)여산 송씨(驪山 宋氏)는 효손(孝孫)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사 부(府使 溥),연(淵)이다. 府使公(韓 溥)(부사공 한 부)14세 江界府使(강계부사) 공(公)의 휘(諱)는 부(溥)이다.창봉공 중성(參奉公 仲聖)의 아들이고 군수공 지민 (郡守公 之民)의 손자이며 충렬공 휴우(忠烈公 烋瑀)의 증손(曾孫)이다.어머니는 여산 송씨(驪山 宋氏)로 효손(孝孫)의 따님이다.공은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배위 (配位)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며 아들은 통덕랑 경춘(通德郞 景春),경기(景基)이 다. 平章事公(韓 浚)(평장사공 한 준)9세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공의 휘(諱)는 준(浚)이며, 초휘(初諱)를 섭(涉)이라 하였고, 다시 자희(自熹)라고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서 조정대부 보문각제학(朝靖大夫 寶文閣提學)을 지내고 아들 영(泳)의 영귀(榮貴)로 元나라에서 고양현후(高陽縣候)에 증봉(贈封)한 사기(謝奇)의 셋째 아들이고, 문혜공(文惠公) 강(康)의 손자이다.일찍이 학문을 익히고 원나라에 가서아중대부 행대어사 하남로총관(亞中大夫 行臺御使 河南路摠管)을 지내고 집현전 직학사(集賢殿 直學士)와 고양후(高陽候)에 추봉(追封)되신 정혜공(正惠公) 영(泳)이 공의 중형(仲兄)이다.공이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여 사서(史書)를 익히고 경서(經書)를 통달하여 (兄)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벼슬길에 오르니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에 올랐다.장차(마침내) 본국(本國)에 돌아와서는 면천부원군(沔川府院君)에 봉군(封君) 되었다.오랜 세월 병란(病亂)을 겪고 전해 오는 유사(遺事)나 세록(世錄)이 산실(散失)되니 공(公)의 생몰(生歿:나고돌아감)을 알길 없고.수년(壽年)을 헤아릴 수 없다.공의 배위(配位)는 여씨(呂氏)로 금자광록대부 전(銓)의 따님이다.묘는 公墓同原 이고 계배 밀양박씨(繼配 密陽朴氏)는 공과 합조(合兆) 이다.아들은 군기시감사(軍器寺監事) 경선(敬善)과 충득(忠得), 충인(忠仁),충길(忠吉)이다. 묘: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口水洞) 監事公(韓 敬 善)(감사공 한 경 선) 10세 軍器監事(군기감사) 공(公)의 휘(諱)는 경선(敬善)이요, 字는 충효(忠孝)이니 평장사공(平章事公) 준(浚)의 아들이요,제학공(提學公)사기(謝奇)의 손자이다.전해 오는 유록(遺錄)이 없고 다만 군기감사(軍器監事)의 관작(官爵)만을 확인할 수 있고.배위(配位)는 능성 구씨(綾城 具氏)와 파평 윤씨(坡平 尹氏) 두 분인데 후배(後配)인 坡平 尹氏의 墓가 면성세곡이(沔城細谷)라고 기록에 있을 뿐이고,감사공의 묘소위치도 전(傳)해 오는 것이 없으므로 약기(略記)하는 바이다. 沔城君(韓 洪 瑞)(면성군 한 홍 서) 11세 戶曹判書 都僉議中贊 沔城君(호조판서 도첨의중찬 면성군)공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휘(諱)는 홍서(洪瑞)이며, 감사공 경선(監事公 敬善)의 아들이며,평장사공(平章事公) 준(浚)의 손자이다.고려 충선왕조(忠宣王朝)에서 문과(文科)에 등재(登第)하여 벼슬길에 올라 누천(累遷)하여 판도판서(判圖判書고려 中첩의 관직의 하나 판도사의 으뜸 벼슬.공민왕 11년(1362)호부상서로 고쳤다.그뒤 호조전서,조선조 태종때 호조판서로 됨)을 거쳐추밀원 직학사(樞密院 直學士)로 있으면서 하정사절(賀正使節)로 원(元)나라에 들어갔다.연저(燕邸:天子의 邸宅)에서 졸하니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과 면성군(沔城君)에 추봉(追封)하였다.배위(配位) 해주 최씨(海州 崔氏)는 군수공 광준(郡守公 光俊)의 따님인데,공과 같이 당진군 면천면 세곡(唐津郡 沔川面 細谷)에 묻혔다.아들은 판서 정덕(判書 正德)과 참판 정수(參判 正粹)이다.공의 묘는 옛 기록에 당진군 면천면 세곡 으로 되어있으나 실전(失傳)된 현실(現實) 이다. 判書公(韓 正 德)(판서공 한 정 덕)12세判書(판서)공(公)의 휘(諱)는 정덕(正德)이니,면성군(沔城君) 홍서(洪瑞)의 아들이요, 군기감사(軍器監事)경선(敬善)의 손자이다.유록(遺錄)이 없어 공의 생몰(生歿) 년대(年代)와 수년(壽年)을 알수없고 배위(配位)의 성씨도 알 길이 없다.다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묘소(墓所)도 실전(失傳)된 것으로 傳 한다.아들은 사보(謝補)이고.손자는 기(奇),선(善)이다. 參判公(韓 正 粹)(참판공 한 정 수)12세 禮曹參判(예조참판 ) 公은 諱는 정수(正粹)인데, 초명(初名)은 정송(正松)이다.도첨의 중찬 면성군(都僉議 中贊 沔城君) 호서(洪瑞)의 二子로, 군기시 감사(軍器寺 監事)경선(敬善)의 손자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는 기록이 보책(譜冊)에 있을 뿐이니.公의生卒 年代를 알 수 없고 배위(配位) 정부인 (貞夫人)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두원(斗元)의 따님이나.묘가 공과 합폄인지는 확실치 않고 다만 당진군 면천면 세곡(唐津郡 沔川面 細谷)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식별(識別)이 불가(不可)하다.아들은 이조정랑(吏曹正郞)표(彪)이다. 正郞公(韓 彪)(정랑공 한 표) 13세 공의 휘(諱)는 표(彪)이다. 예조참판(禮曹參判) 정수(正粹)의 아들이고 도첨의 중찬(都僉議 中贊)에 면성군(沔城君)으로 추봉(追封) 된 홍서(洪瑞)의 손자 이다. 공은 세종(世宗) 때 이조 정랑(吏曹 正郞)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을뿐 난세(亂世)를 겪는사이 문적(文蹟)이 산일(散逸) 하여 유사(遺事)를 살필길이 없다. 공은 배위(配位) 서산 정씨(瑞山 鄭氏)와 합폄으로 원래(元來)의 묘소(墓所)가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사장동(瑞山郡 聖淵面 梧沙里 沙場洞) 이었는데 근년(近年)에 예산군 봉산면 옹안리(禮山郡 鳳山面 雍安里 山 17~3호) 에 이장(移葬) 하고 묘비(墓碑)도 개수(改竪) 했다. 佐郞公(韓 克 類)(좌랑공 한 극 류)14세 吏曹佐郞(이조좌랑)공은 조선 세조조(世祖朝)초의 문신이고 휘(諱)는 극류(克類)이다. 정랑공 표(正郞公 彪)의 아들이고 참판공 정수(然判公 正粹)의 손자이며 평장사공 준 (平章事公 浚)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천재(天才)의 기질(氣質)을 보였으니 조선 문종조(文宗朝)에 16세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19세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한림(翰林)에 이르고 20세에 이조좌랑(吏曹左郞)에 올라 관(官)의 전도(前途)가 밝더니 향년(享年) 23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진사 원(進士 源)의 따님인데 양위(兩位)의 묘(墓)는 서산 탄동 건좌지원 무석리(瑞山 炭洞 乾坐之原 茂石里)에 안장(安葬)되었다가 예산군 봉산면 옹안리(禮山郡 鳳山面 雍雁里)산 17의 3으로 이장,합조(移葬,合兆) 되었다. 아들은 현감공 서정(縣監公 瑞貞)과 서문(瑞文)이다. 典校公(韓 謝 譜)(전교공 한 사 보)8세 忠烈王朝等第官至典校寺令淸州牧使有行錄及阡道碑銘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문신이다.휘(諱)는 사보(謝譜)이고 문혜공 강(文惠公 康) 의 둘째 아들이며 예빈경공 광윤(禮賓卿公 光胤)의 손자다. 충렬왕 때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벼슬길에 올라 누천(累遷)하여 전교시령(典校寺令: 고려 때 經書나 祝文,上疏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을 지내다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행록(行錄:사람들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글)이 있으며 세장(世葬) 비명(碑銘)이 있다.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 묘(墓)는 영광읍 연성리 제봉산 건좌(靈光邑 連城里 祭奉山 乾坐)에 합조(合兆)되었다.아들은 부안군 홍시(扶安君 弘時)이다. 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와 자손(子孫)의 실호묘(失護墓)에 대하여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연성리 제봉산 하(全羅南道 靈光郡 靈光邑 連城里 祭奉山 下)에 설단비(設壇碑) 를 세우려 한다. 扶安君(韓 弘 時)(부안군 한 홍 시)9세 공의 휘(諱)는 홍시(弘時) 이고 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 의 아들이며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손자 이다. 고려 충선왕조(忠宣王朝)에 세자사(世子師)로 있었으며 부안군(扶安君)으로 봉(封)했다고 전한다.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 양위묘(兩位墓)가 실전(失傳)되니, 고 묘하 (考墓下)에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아들은 판정 진운(判正 臻雲),부사 천(副使 ),장령 장(掌令 장)판윤 유구(判尹 有龜),낭장 유룡(郞將 有龍)이다. 判正公(韓 臻 雲) (판정공 한 진 운)10세 공(公)의 휘(諱)는 진운(臻雲)이고 부안군 홍시(扶安君 弘時)의 아들이며 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의 손자이다.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서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여 의금판정(義禁判正)을 지냈다.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 양위묘(兩位墓)가 실전(失傳)되니 제봉산 하(祭奉山 下)에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아들은 상서 재(尙書 梓)이다. 尙書公 (韓 梓)(상서공 한 재)11세 공(公)의 휘(諱)는 재(梓)이며 판정공 진운(判正公 臻雲)의 아들이고 부안군 홍시(扶安君 弘時)의 손자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때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여 관(官)이 예부상서(禮部尙書) 까지 이르렀다.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 양위묘(兩位墓)가 실전(失傳)되니 제봉산 하(祭奉山 下)에 설단(說壇)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아들은 찬성(贊成) 인보(仁輔) 이다. 贊成公 (韓 仁 輔)(찬성공 한 인 보)12세 공(公)의 휘(諱)는 인보(仁輔)이며 상서공 재(尙書公 梓)의 아들이고 판정공 진운(判正公 臻雲)의 손자이다.고려 충목왕(忠穆王)때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고 관(官) 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예부상서(禮部尙書)도 지냈다. 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양위묘(兩位墓)가 설전(失傳)되니 제봉산 하(祭奉山 下)에 설단(設壇)하여 享祀하고 있는데 근안공 육대손 벽계당기(謹按公 六代孫 碧溪堂記)가 었다. 아들은 찬성 문유(贊成 文裕)와 군수 우(郡守 瑀)이다 贊成公 (韓 文 裕)(찬성공 한 문 유) 13세 공(公)의 휘(諱)는 문유(文裕)이며 찬성공 인보(贊成公 仁輔)의 아들이고 상서공 재 (尙書公 梓)의 손자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과거(科擧)에 등제(登第)하여 관(官) 이 좌우위보승 낭장(左右衛保勝 郞將)을 지내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나 양위묘(兩位墓)가 실전(失傳)되니 제봉산 하(祭奉山 下)에 설단(設壇)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아들은 절제사 이(節制使 彛)와 군수 륜(郡守 倫)이다. 府尹公(韓 彛)(부윤공 한 이)14세 공(公)은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이(彛)요 찬성공 문유(贊成公 文裕)의 아들이고 찬성공 인보(贊成公 仁輔) 의 손자이다.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조선 태조(太祖)5년(1396)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등제(登第)하여 승녕부 판관(承寧府 判官)에 이르렀고 나아가 전주부윤 겸 수군 병마첨절제사(全州府尹 兼 水軍兵馬僉節制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하니 백성(百姓)들 의 마음이 편안(便安)하였다.공(功)을 쌓고 졸하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贈)하였다. 배위(配位)정부인 의령 남씨(貞夫人 宜寧 南氏)는 한림 원한(翰林 元翰)의 따님인데 양위(兩位)의 묘(墓)가 실전(失傳)됨에 제봉산 하(祭奉山 下)에 설단(設壇)하고 향사 (享祀)하고 있다.아들은 계공랑 갑선(啓功郞 甲善)과 녹사 중선(錄事 仲善),숙선(叔善)이다. 軍守公(韓 倫)(군수공 한 륜)14세 공의 휘(諱)는 륜(倫)이다.찬성공 문유(贊成公 文裕)의 둘째 아들이고 찬성공 인보 (贊成公 仁輔)의 손자이다. 공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며 아들은 절제사 계선(節制使 季善)이다. 묘가 실전(失傳)되니 영광군 염산면 옥슬리 장고산 노승봉 하(靈光郡 鹽山面 玉瑟里 長鼓山 老僧峰 下)에 설단(設壇)하였다. 郡守公( 韓 瑀) (군수공 한 우)13세 公의 휘(諱)는 우(瑀)이며 찬성공 인보(贊成公 仁輔)의 둘째 아들이고 상서공 재(尙書公 梓)의 손자이다. 통훈대부행 덕산군수(通訓大夫行 德山郡守)였다. 배위(配位)는 숙인 전주 이씨(淑人 全州 李氏)이며 아들은 군수 처량(郡守 處良)이다. 軍守公(韓 處 良)(군수공 한 처 량)14세 公의 휘(諱)는 처량(處良)이며 군수공 우(都守公 瑀)의 아들이고 찬성공 인보(贊成公 仁輔)의 손자이며 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의 6대손이다. 벼슬길에 올라 정포만호(井浦萬戶)에 올랐다가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갔으며 어모 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유곡 조씨(楡谷 趙氏)이며 아들은 어모장군 승중(禦侮將軍 承重)이다. 登第公(韓 謝 壽)(등제공 한 사 수) 8세 공(公)의 휘(諱)는 사수(謝壽)이고 일작(一作)은 사겸(謝謙)이다.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셋째 아들이고 예빈경공 광윤(禮賓卿公 光胤)의 손자이다. 형(兄)인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가 문과에 등제(登第)함 에 힘입어 고려 충렬왕조(忠列王朝)에서 과거에 등채(登第)하였다.그 후의 사적(事績) 은 미상(未詳)이며 아들은 예빈시경 옥(禮賓寺卿 沃),담(澹),택(澤)이다. 禮賓卿公(韓 沃)(예빈경공 한 옥)9세 공(公)은 고려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옥(沃)이며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아들이요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손자이다. 벼슬길에 올라 낭장(郞將)을 지내고 예빈시경(禮賓寺卿)을 지냈다. 아들은 전서 방우(典書 方佑),지정 중효(至正 仲孝)이다. 典書公(韓 方 佑)(전서공 한 방 우)10세 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방우(方佑)이며 예변경공 옥(禮賓卿公 沃)의 아들이고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손자이다. 벼슬길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호조전서(戶曹典書)을 지냈다. 아들은 병판 형(兵判 馨)이다. 判書公(韓 馨)(판서공 한 형)11세 공(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휘(諱)는 형(馨)이며 전서공 방우(典書公 方佑)의 아들이고 예빈경공 옥(禮賓卿公 沃)의 손자이고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증손(曾孫)이다. 고려 말에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내고 조선조 초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아들은 직장 흥소(直長 興紹)이다. 生員公 (韓 逑) (생원공 한 구)우왕2년(1376)~세종29년(1447) 13세 공(公)의 휘(諱)는 구(逑)요,호(號)는 낙도당(樂道堂)이다. 직장공 흥소(直長公 興紹)의 아들이요 판서공 형(判書公 馨)의 손자이며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5대손이 다.우왕(禑王)2년(1376)에 나서 장차 생원(生員)으로 있었고 세종(世宗)29년 (1447)에 72세로 졸하였다. 공은 천성(天性)이 효행(孝行)함을 제일로 삼았다. 크면서 생원(生員)에 있으면서 삼강(三鋼:임금과 신하,어버이와 자식,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道理로 서 곧 君爲臣綱,父爲子綱,夫爲婦綱)을 잘지켜 효(孝)를 다하니 정려(旌閭:忠臣,孝子,烈女들을 그가 살던 동네에 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기렸다. 아들은 문창(門昌),부사 문영(府使 門榮),참의 문로(參議 門老).부사 문윤(府使 門潤)이다. 배위(配位)경산 이씨(慶山 李氏)는 낭장 구룡(郞將 龜龍)의 따님이고 배위(配位)영해 박씨(寧海 朴氏)는 사재경 동기(司宰卿 東奇)의 따님이며 배위(配位)삼화 박씨(三和 朴氏)는 중랑장 천흥(中郞將 天興)의 따님으로 묘(墓)는 광주군 귀천(廣州郡 龜川)에 있다.조선 세종 29년(1447)에 72세로 졸하셨으며.광주군 구천면 시묘동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실전되어1775년에 용인군 원삼면 독성리 고사동에 정려문을 봉건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府使公(韓 門 榮) (부사공 한 문 영)세종23년(1441)~?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문영(門榮)이고 자(字)는 자화(子華)이다.생원공 구(生員公 逑)의 둘째 아들이고 직장공 흥소(直長公 興紹)의 손자이며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6대손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고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배위(配位)광주 이씨(廣州 李氏)는 영손(靈孫)의 따님이며 양위(兩位)의 묘(墓)는 광주군 선동 손좌(廣州郡 仙洞 巽坐)이며 참의 이국(參議 李國)이 비문(碑文)을 지어 비를 세웠다.아들은 진사 덕흥(進士 德興),덕양(德讓.系門老后),덕홍(德弘)이다. 參議公(韓 門 老)(참의공 한 문 로) 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문로(門老)이고 자(字)는 자기(子耆)이다.생원공 구(生員公 逑)의 셋째 아들이고 직장공 흥소(直長公 興紹)의 손자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다 음사(蔭仕)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배위(配位)숙부인 합천 이씨(淑夫人 陜川李氏)는 참의 인문(泰議 仁文)의 따님이며 양위(兩位)의 묘(墓)는 광주군 실촌면 부항리(廣州郡 實村面 釜項里)에 있다. 아들은 현감 덕양(縣監 德讓)이다. 府事公(韓 文 潤)(부사공 한 문 윤)세종30년(1448)~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휘(諱)는 문윤(門潤)이고 자(字)는 자삼(子三)이다.생원공 구(生員公 逑)의 넷째 아들이고 직장공 흥소(直長公 興紹)의 손자이다. 세종(世宗)30년(1448)생이며 읍사(蔭仕)로 부사(府使)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배위(配位)숙부인 광주 이씨(淑夫人 廣州 李氏)는 부사 귀손(府使 龜孫)의 따님인데 양위(兩位)의 묘(墓)는 광주군 귀천면 선영하 자좌(廣州郡 龜川面 先瑩下 子坐)에 합조 (合兆)이다. 아들은 부사 덕수(府事 德秀)이다. 寺事公(韓 仲 孝)(시사공 한 중 효)10세 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중효(仲孝)이고 자(字)는 백원(百源)이다.예빈시경 옥(禮賓寺卿 沃)의 둘째 아들이고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5년(1313)생이고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치사(致仕:관직을 내 놓고 물러남.(辭職)하였으나 그 후로 정갑(正甲)에까지 이르렀다. 양위(兩位)의 묘(墓)가 장단(長湍)에 있는데 실호(失護)이다.아들은 유(攸),계(桂) 이다. 郡守公(韓 大 基)(군수공 한 대 기)세종2년(1420)~성종4년(1473)14세 공(公)의 휘(諱)는 대기(大基)이며 대호군공 설(大護軍公 卨)의 아들이며 도복(道復) 의 손자이고 시사공 중효(寺事公 仲孝)의 현손(玄孫)이다.세종(世宗)2년(1420)생이 며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고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냈다. 배위(配位)숙인 창녕 성씨(淑人 昌寧 成氏) 현감 재민(縣監 載敏)의 따님이며 양위(兩位)의 묘(墓)는 양주 장대동(楊州 長大洞)에 있었는데 실호(失護)되었다. 아들은 진사 치명(進士 致明)이며 5대손에 천하명필 석봉(天下名筆 石峯.護)이 있다. 書聖 韓石峯(韓 濩)(서성 한석봉 한 호)19세 중종 38년(1543)~선조 38년(1605)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때의 서예가(書藝家)이다.휘(諱)는 호(護)요,자는 경홍(景洪)이요,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증 부사공 언공(贈 府事公 彦恭)의 아들이고 정랑공 세관(正郞公 世寬)의 손자이다. 명종(明宗)22년(1567)진사시에 합격하였다.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명나라에 사절로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별제감찰(別提監察),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사어(司禦)등을 지내고 한성판관(漢城判官)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재임중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일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광국선무호성원종 공신(光國宣武扈聖原從功臣)이 되고 왜란(倭亂)관계로 투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난이 끝나자 가평군수(加平郡守)로 나가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하니 선조 33년(1600)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흡곡현령(翕谷縣令)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금천석봉산(金川石筆山)하에서 선조 38년(1605)63세로 졸하였다. 아들은 사과(司果)민정(敏政)이며 증 호조참의(贈 戶曹參議)이다.어머니 홍주 백씨 (洪州 白氏)가 떡장사를 하며 글공부를 시켰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묘갈(墓碣)에 의하면,“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 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 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부)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체(體)를 배웠다.그러나 그가 배운 것 은 진위(眞僞)가 문제가 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등 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基昌)에게 미치지 못하니,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논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또 이로부터 사자관 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집비(李別提公집碑),고양에있는 권도원수대첩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장단(長湍)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卞墓表額),과천(果川)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포천(抱川)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隣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평양 기자묘비(箕子墓碑)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 (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 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千祿體)라 한다. 선조(宣祖)는 한석봉의 글씨를 궁전(宮殿)에 걸어놓고 감탄하여 가상(嘉賞)했다. 마침내 선조는 가평군수(加平郡守)인 한석봉에게 하지(下旨)하였다.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케 하고 국민교본(國民敎本)으로 삼기로 하였으니 이는 선조 33년(1600)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 지금도 이 언해 천자문은 많이 보급(普及)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이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여세(餘勢)로 선조(宣祖) 26년(1593)2월 12일 3만여 명을 투입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을 내습(來襲)하니 지리적 이점(地理的 利點)과 아군의 필승의 기백으로 승전(勝戰)하는데 부녀자들의 행주 치마로 나른 돌이 많은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이 승전을 기리기 위해 선조 35년(1602) 덕양산정(德陽山頂)에 행주대첨비(幸州大捷碑:大理石으로 되어 있는 (舊碑)를 세우니 최 립(崔 笠)이 비문을 짓고 한석봉(한석봉(韓石峯)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 끝의 추기(追記) 는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썻다. 비석이 오래되어 훼손(毁損)이 심해지자 1907년 비각을 새로 개축(改築)하였다.그러나 또 훼손되어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補修淨化事業:1969~1970)에 따라 대첩비각(大捷碑閣:舊碑에)을 세웠다.비 상부(上部)에 금이 간 것은 비를 세운 후 왜인(倭人)이 훼상시켰다고 전한다.행주대첨비 구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京畿道 有形文化財) 제74호로 1978년 10월 10일 지정(指定)되었다. 조선조 대학자(大學者)퇴계 이황(퇴계 李滉)선생을 향사(享祀)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데 퇴계선성이 졸한지 4년만인 선조(宣祖)7년(1574)유림(儒林)들이 상의 하여 그가 만년(晩年)에 독서하던 곳인 도산서당(階山書堂)뒤에 이듬 해 도산서원을 세웠다.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의 액자(額字)를 받아 사당(祀堂)에 걸어놓고 퇴계 선생을 향사하였는데 글씨는 선조 8년(1575)한석봉(韓石峯)선생이 썼다. 韓石峯 선생의 예(隸),초서(草書)로 천자문(千字文)을 선조 30년(1597)가을에 썼고 목판(木版)인 것을 탁본(拓本)으로 남겨놓았는데 여기에는 선생이 서명,날인(書名,捺印)하여 남겨 놓았다. 將軍公(韓 萬 孫)(장군공 한 만 손)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무신이다.호군공 탁(護軍公 卓)의 아들이고, 세복(世復)의 손자이며,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6대손이다. 진위장군(振威將軍)을 지냈다. 배위(配位)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상(尙)의 따님이고 아들은 사직 언(司直 彦)이 다 묘는 경상남도 마산 습은동 손좌(慶尙南道 馬山 習隱洞 巽坐)에 있다. 韓 達 孫(한 달 손) 14세중종 19년~광해군 4년(1524~1612) 공(公)의 휘(諱)는 달손(達孫)이요,자(字)는 사문(士文)이다. 교위공 승로(校尉公 承輅)의 아들이고 영수(永守)의 손자이며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6대 손이다. 공은 중종(中宗)19년(1524)생이다. 명종 16년(1561)무부사솨(武副司果)에 오르고 광해(光海)4년(1612)8월26일 89세로 졸하였는데 효행(孝行)이 유명(有明)하였다. 배위(配位)숙부인 봉주 김씨(淑夫人 鳳州 金氏)는 훈도 태순(訓導 泰淳)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호군 응(副護軍 膺),도정 석(都正 碩),장군 후겸(將軍 後謙)이다.묘는 고 묘하 임좌(考幕下 壬坐)에 배위(配位)와 합조(合兆)이다. 正郞公(韓 必 謙)(정랑공 한 필 겸)14세 공(公)의 휘(諱)는 필겸(必謙)이다.생원공 현명(生員公 顯明)의 아들이고 국로(國老)의 손자이며 담(澹續)의 5대손.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6대 손이다. 문정랑(文正郞)을 지냈다. 배위(配位)팔계 정씨(八溪 鄭氏)는 현감 희간(縣監 希侃)의 따님아고 아들은 진사 극현(進士 克賢)이다.묘는 합천 두현(陜川 斗峴)에 있다. 韓 必 讓(한 필 양) 14세 중종 23년~명종 5년(1528~1560) 공(公)의 휘(諱)는 필양(必讓)이다. 생원공 현명(生員公 顯明)의 둘째 아들이고 국로(國老)의 손자이며,담(澹)의 5대손, 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의 6대손이다. 중종(中宗)23년(1528)생이다.참봉(參奉)을 지내고 명종(明宗)15년(1560)8월 12일 졸이다.증 통훈 의금부도사(贈 通訓 義禁府都事)이다. 배위(配位)는 미상(未詳)이고 아들은 조봉대부 효정(朝奉大夫 孝鼎)이다. 묘는 아산 염치면 백택리 후등 갑자(牙山 鹽峙面 白澤里 後嶝 甲子)에 유갈(有碣)인데 실호(失護)되었다 直史館公(韓 守 延) (직사관공 한 수 연) 8세 공(公)의 휘(諱)는 수연(守延)이다.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아들로 예빈경공 광윤(禮賓卿公 光胤)의 손자이다.형(兄)인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전교공 사보(典校公 謝譜),등제공 사수(登第公 謝壽)가 문·과에 등제(登第)함에 힘입어 많은 학업(學業)을 쌓았다.벼슬길에 올라 직사관(直史館: 고려 史館의 벼슬.直館이라고도 하였다.)그 외의 벼슬은 미상(未詳)이며 아들은 경언 (敬彦)이다. 護軍公(韓 尙 完)(호군공 한 상 완) 13세 공(公)의 휘(諱)는 상완(尙完)이요,자(字)는 윤대(允大)이고 호(號)는 죽담(竹潭)이다.참판공 준(泰判公 浚)의 아들이며 숭덕(崇德)의 손자이고 직사관공 수연(直史館公 守延)의 5대손이다. 세조(世祖)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며 봉익대부(奉翊大夫)상호군(上護軍:조선조 때 5衛를 지냈다.배위(配位)는 정부인 경주 이씨(貞夫人 慶州 李氏)로 영의정 춘생(領議政 春生)의 따님이다. 아들은 충순위 숙기(忠順衛 淑기),숙유(淑有계후)이다. 忠順衛公(韓 淑 기)(충순위공 한 숙 기) 14世)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무신(武臣)이다.휘(諱)는 숙기(淑기)이고 자(字)는 균 백(均伯)이다.호군공 상완(護軍公 尙完)의 아들이고 참판공 준(參判公 濬)의 손자이며 직사관공 수연(直史館公 守延)의 6대손이다.세조(世祖)11년(1465)에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장원(壯元)하니 18세 때였다.천성(天性)이 학문(學文)을 좋아하여 정당한 명예(名譽)가 사방에 울려퍼졌고 성균관(成均館)과 문묘(文廟)(共히 孔子를 받드는 사당)의 많은 선비가 추천하여 무관(武官)인 충순위(忠順衛:조선조 때 五衛의 하나인 忠武衛에 속했던 군대인데 世宗 때 설치하였다.)에 있었다. 배위(配位)남원 양씨(南原 梁氏)는 이판 관(吏判 貫)의 따님이며 양위묘(兩位墓)가 인천성암(仁川星巖)에 안장(安葬)되었고 묘표(墓表)도 있었으나 난세병화(亂世兵禍)로 실호(失護)되었다.아들은 정랑 알(正郞 알)이다. 禮賓尹公(韓 漣)(예빈윤공 한 연) 7세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읍(咸鏡南道 安邊郡 安邊邑) 南쪽에 있는 풍류산(風流山)서리동(鋤里洞)에 두 분의 묘(墓)가 있는데 자좌 향방(子坐 午向)으로 자리한 분이 고려(高麗)때 예빈 윤(禮賓尹)의 벼슬을 지낸 휘(諱)연(連)의 묘소(墓所)이고 조금 떨어진 오른쪽 기슭에 임좌 병향(壬坐 丙向)의 묘소가 예빈윤공(禮賓尹公)의 아들인 안원군(安原君)휘(諱)유(裕)의 묘소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사이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등 병화(兵火)를 입어 한때 실호(失護)하는 아픔을 겪다가 1804년에 안변읍내에 살던 公의 후손 성연 (聖淵)이 산송(山訟:墓地 關係로 하는 訟事)으로 손가(孫哥)등과 다투던 中인데 그로 因하여 두 분의 산소임이 저절로 드러나니 문중(門中)에서는 마침내 봉분(封墳)을 개수 (改修)하고 묘역을 다듬었다. 보첩(譜諜)에 보면 公이 예빈윤(禮賓尹)에 오르고 1308년 7월 10일에 王의 병환(病愚)이 위독(危篤)하여 조정(朝廷)에서는 公을 元나라에 보내서 심왕(瀋王)에게 보고(報告)한 기록(記錄)이 있음을 본다. 안변부사(安邊府使)이 수(李 隧)가 지은 묘정(墓庭)비문(碑文)에 보면 公의 풍성 (豊盛)한 적덕누인(積德累仁:덕을 쌓고 어질게 살아온 바를 이름)이 신명(神明)과 인간(人間)의 도움을 얻어 실호(失護)된 유택(幽宅)을 봉심(奉審)할 수 있었다고 傳하여 온다. 또한 신의왕후(神懿王后)를 탄육(誕育)한 가문(家門)이 되었으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덕(功德)이 무성하고 착실(着實)하여 사적(事績)이 많을 터인데도 난세(亂世)를 살아오는 사이 없어지니 망극(罔極)한 후손들의 심회(心懷)를 위로하고 있다. 다만 그 祖上을 밝힐 수 있는 일이니 가계(家系)의 대략(大略)을 적어서 후일(後日) 子孫들의 고증(考證)으로 삼고자 함이다. 公의 아드님은 안원군(安原君)유(裕)요 손자(孫子)는 좌정승(左政丞)에 추증(追贈)된 규인(珪仁)이요 증손(曾孫)은 다섯분인데 맏이가 도염영(都染令)정간(貞幹),둘째는 상장군(上將軍)룡(龍),셋째는 도총제(都摠制)시대(時大),넷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대공(大公),다섯째는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영 문하부사(領 門下府事),경민공(景敏公)경(卿)으로 신의왕후(神懿王后) 의 아버지이다. 예빈윤공(禮賓尹公)은 고려 중엽 처음으로 관북(關北)의 안변부 익실방금구동(安邊府 翼室坊琴龜洞)(지금의 安邊郡 衛益面 琴基里)으로 이사하여 정착(定着)하였다.그후 子孫들이 다시 함주(咸州:지금의 咸興市를 中心한 一帶)지방에 살았다. ※선대(先代)의 산소(山所)를 되찾는 과정에서 가장 힘쓴 이는 公의 원손(遠孫)한 익(韓 益)과 찰방(察訪)한계옥(韓啓玉)이고 묘정비문(墓庭碑文)을 청(請)한 이는 한대곤(韓大坤),한익해(韓翼海)이며 비문(碑文)을 지은이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 수(李 隧)이다.※배위(配位)의 성씨(姓氏)는 병란(兵亂)으로 유사(遺史:記錄 卽 家牒)가 일실(逸失:없어짐)되어 실전(失傳)되어 온다 韓 裕(한 유) 8세 遺 事 李朝贈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戶曹事安原君 公은 조선(朝鮮)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배위(配位)신의왕후(神懿王后)의 증조(曾祖)요 예빈윤공(禮賓尹公:連)의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建國)하고 왕후(王后)의 친정(親庭)조상(祖上)에게 추증(追贈)하였으니 안원군(安原君:裕)에게는 증 순성적덕좌명보리공신 숭정대부문하시랑 찬성사 판도평의 사사 겸 판호조사 안원군(贈 純誠 積德佐命 輔理功臣 崇政大夫 門下侍郞 贊成事 判都評議 司事 兼 判戶曹事 安原君)을 삼았다. 公의 墓所가 임진왜란,병자호란(壬辰倭亂 丙子胡亂)등 병란(兵亂)으로 일시 실전 (失傳)하였다가 公의 아버지 예빈윤공(禮賓尹公:連)의 묘소를 찾을 때 같은 위치(位置)에서 찾았다.즉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읍(咸鏡南道 安邊郡 安邊邑)남쪽에 있는 풍류산(風流山)서리동(鋤里洞)에서 公이 아버지 예빈윤공(禮賓尹公)과 같이 안변부 익실 방 금구동(安邊府 翼室坊 琴龜洞)에 삼았으나 그 孫子代에 와서 함주(咸州)지방으로 옮겨 살았다고 傳해오고 있다. 지금도 옛 터에는 그때 남겨진 주춧돌과 부서진 벽돌 조각들이 남아 있으며 여기서 東南方 十里쯤에 풍류산(風流山)이 있고 그 산 아래 서리동(鋤里洞)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여기가 韓氏門中의 묘소(墓所)라고 하나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분명(分明)하게 지적(指摘)해 말할 수가 없던 차에 그 고을에 사는 사람 들 사이에 묘지관계(墓地關係)로 쟁송사건(爭訟事件)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公의 아들 규인(珪仁)의 墓가 자연히 발현(發現)되었고 그로부터 60年 되는 순조(純祖)4년(1804)에 예빈윤공(禮賓尹公:連)과 안원군(安原君:裕)父子兩世의 墓所를 찾기 에 이른 것이다.망극(罔極)한 일은 누차(累次)병란 (兵亂)으로 유사(遺事:옛기록)를 잃 은바 되니 公의 배위(配位)성씨(姓氏)를 살필길이 없다. 政丞公(韓 圭 仁)(정승공 한 규 인)9세 遺事(유사)公의 諱는 규인(珪仁)이니 안원군(安原君)유(裕)의 아들이요,예빈윤공(禮賓尹公)의 손자(孫子)이다.조선 태조(朝鮮 太祖)이성계(李成桂)의 배위(配位:王后)신의왕후 (神懿王后)의 조부(祖父)로서 익조공신(翊祚功臣)에 특진(特進)보국숭록 대부문하 좌정승 도평의 사사 겸 이조사 안천부원군(輔國崇祿 大夫門下 左政丞 都評議 司事 兼 吏曹事 安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公의 子孫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여러 차례 난리(亂離)를 겪는 사이 문적(文籍:家牒)을 일실(逸失:遺失)하여 中間年代에 山所를 잃어버린 바 되어 원근(遠近)에 사는 후손들이 성묘(省墓)할 길이 없어 한탄하던 차에 신명(神明)의 도움으로 안변읍(安邊邑)에 사는 金氏 등이 장지관계(葬地關係)로 다투다가 송사(訟事)가 제기(提起)되었는 데 바로 그들이 다투던 장소(葬所)가 좌정승(左政丞:珪仁)의 묘소(墓所)라는 확증이 드러나게 되었다.이는 金哥들이 公의 묘소를 몰래 헐어버리고 그 어미를 장사했는데 수 십년 후에 같은 金哥가 그 곁에 묘를 쓰려다가 시비(是非)가 일게된 것이다.이곳이 함경도 안변 풍류산(咸鏡道 安邊 風流山)의 묘좌 유향(卯坐 酉向)의 좌정승 규인(左政丞 珪仁)의 墓所이다. 公이 五男을 두었는데 첫째는 도염령(都染令)정간(貞幹)이요,둘째는 상장군(上將軍)용(龍)이요,셋째가 판돈녕부사(判 敦寧府事)시대(時大)요,넷째는 좌정승(左政丞)대공(大公)이요,다섯째가 안천 부원군(安川 府院君)경(卿)이니 곧 이태조(李太祖)의 왕비(王妃)신의왕후(神懿王后)의 아버지 이다. 위의 기록(記錄)은 公의 신도비(神道碑)에 있는 것을 옮긴 것으로 公의 외손(外孫)되는 가선대부 동지춘추관사(嘉善大夫 同知春秋館事)윤봉조(尹鳳朝)가 글을 지었고 이를 부탁 한 이는 후손 첨지(僉知)극일(克一),유학(幼學)석진(錫晋),참봉(參奉)기(基),석기 (錫基)등이 감독(監督)과 각자(刻字)및 돌을 다듬는 일까지 마쳤다. 公의 배위(配位)성씨(姓氏)는 선대조(先代朝)의 경우와 같이 전해오는 문적(文籍)이 없으니 살필 길이 없다. 上將軍公(韓 龍)(상장군공 한 용)10세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敦寧府事行上將軍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돈녕부사행 상장군) 公의 諱는 용(龍)이니 좌정승(左政丞)규인(珪仁)의 둘째 아들이요,안원군(安原君) 유(裕)의 손자(孫子)로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돈영부사(贈 大匡輔國 崇麓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敦寧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公의 부,조,증조(父,祖,曾祖)三代의 산소(山所)가 안변 풍류산(安邊 風流山)에 있는데 公이 안변(安邊)에서 처음으로 함흥(咸興)에 이사와서 이 고을 동쪽(東)주동면 (州東面)에 터를 잡은 바 되었다. 아들 우(祐)는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이고 손자(孫子)을부(乙富)는 원종공신(原從功臣)부사직(副司直)이요,증손(曾孫)벽(壁)은 돈녕부 주부(敦寧府 主簿) 이다.병란(兵亂)으로 안변(安邊)풍류산(風流山)의 선삼대(先三代)의 묘(墓)가 실전 (失傳)된 것처럼 상장군공(上將軍公:龍)이하 四代의 산소(山所)도 찾지 못한 형편이 어서 함남 함주군 상지천면 복리(咸南 咸州郡 上技川面 福里)에 제단(祭壇)을 설치(設置)하고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그곳에서 매년(每年)향화(香火)를 올리고 있으니 이곳 은 바로 公의 현손(玄孫:高孫)인 참봉(參奉)숭도(崇道)의 묘가 있는 곳이다. 公의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양천 허씨(陽川 許氏)이나 묘소 실전 (墓所 失傳)으로 추모단(追慕壇)을 모아 향화(香火)를 올리고 있다 景敏公(韓 卿)(경민공 한 경)10세 遺事(유사)公의 諱는 경(卿)이요 처음의 관향(貫鄕)을 안변(安邊)이라 하였다가 청주(淸州)로 환본(還本)하였다.예빈윤공(禮賓尹公)의 증손(曾孫)으로 정승공(政丞公)규인(珪仁)의 다섯째 아들이요 안원군(安原君)유(裕)의 손자이다.고려 때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며 신의왕후(神懿王后:景敏公의 딸)가 이성계(李成桂)에게 출가(出嫁) 하였으나 이태조(李太祖)가 개국(開國)하기 1년 전인 1391년 9월 23일 55세에 별세 (別世)하였다.그후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태조(朝鮮 太祖)로 즉위(卽位)하여 公의 딸이 신의왕후 (神懿王后)에 추봉(追封)되자 증 충성공근 적덕유경보리공신(贈 忠誠恭謹 積德유慶輔理功臣)벽상삼한삼중대관령문하부사 안천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 安川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公의 배위(配位)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해 졌는데 보조공신(輔祚功臣)판 형조사(判 刑曹事)윤여(允麗)의 딸이다. 公의 딸이 태조 이성계(太祖李成桂)의 배위(配位)로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되니 친정(親庭)조상(祖上)에게 벼슬이 추증(追贈)되고 형제(兄弟:男妹)는 현달(顯達:出世)하여 문세(門勢)가 흥왕(興旺)하였다. 즉(卽)경민공(景敏公)의 큰아들 성기(成奇)는 안산군(安山君)이고 다음 일(일) 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 崇綠大夫 議政府 右議政)에 시호(諡號) 는 양정(良靖)이다.다음은 정헌대부 한성부 판윤(正憲大夫 漢城府 判尹)에 추증(追贈) 된 검교 한성판윤(檢校 漢城判尹)을 지낸 금강(金剛)이요,다음은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崇綠大夫 判敦寧府事)하고 안원군(安原君)에 봉(封)해진 창수(昌壽)요 다음은 융전(隆田)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시호(諡號)호정(胡靖)이다. 公의 산소(山所)는 함주군 동천면 덕허리 갑원(咸州郡 東川面 德許里 甲原)에 예장 (禮葬)되고,배위(配位)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함주군 운남면 차인동갑원(咸州郡 雲南面 車引洞甲原)에 위치(位置)해 있다. 경민공(景敏公)의 사시장(賜諡狀)은 영 중추부사(領 中樞府事)정익량(鄭翼良)이 지은바,由義而濟曰景(유의이제왈경)이요,應事有功曰敏(응사유공왈민)이다.卽,義理를 쫓아 濟化하는 것을 景이라 하고, 일에 當하여 功이 있는 것을 敏이라 했다. ※경민공(景敏公:卿)에게는 나라에서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전례(典禮)하니 公의 따님이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배위(配位)로 신의왕후(神懿王后) 에 책봉(冊封)되고 公을 국구부 원군(國舅府院君:國王의 丈人)에 증봉(贈封)한데서 비롯된 것이고 나아가 나라에 유공(有功)함이 현저(顯著)하여 내려진 전례(典禮)인 것이다.※公의 사당(祠堂)제사(祭祀)는 봉상시(奉常寺:國家의 王家宗室,功臣 등에 관한 事務를 담당하던 중앙 관청)에서 상례적(常例的)으로 제문(祭文)과 제수(祭需)를 내려 치제(致祭:제사지냄)하였다.卽,사중삭(四仲朔:네 절기의 가운데 달 음 2月,5月,8月,11月)과 사명절(四名節:설날,端午,秋夕,冬至),양기일(兩忌日:內外兩位)에 제사(祭祝)를 지냈다. 良靖公(韓 일(金+刃))(양정공 한 일)?~1433 11세大匡輔國 崇祿大夫 領敦寧府事 右議政(대광보국 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우의정)遺事(유사)공公의 諱는 일(일:혹은 일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음)이요,호(號)는 유재(柔齋)이다.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2男이요 정승공 규인(政丞公 珪仁)의 손자로 신의왕후 (神懿王后)의 동생이다.대광보국 숭록대부 우정승(大匡輔國 崇祿大夫 右政丞)하고 양정공(良靖公)이라 시호(諡號)를 받았다.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최씨(崔氏) 이고 묘소(墓所)는 함주군 기곡면 장동리(咸州郡 岐谷面 長洞里)山 36번지 간좌(艮坐)이다.(兩位,合兆)다음은 조선 세종실록(朝鮮 世宗實錄)을 옮겨 실은 것이다.영돈영부사우의정시양정한공(휘 金+刃)유사(領敦寧府事右議政諡良靖韓公(諱 金+刃)遺事) 세종대왕실록(世宗大王實錄)에 의(依)하면 세종장헌대왕 15년(檀紀 3766·西紀 1433)(世宗莊憲大王 十五年 檀紀 三七六六·西紀 一四三三)三月 六日 영돈녕부사 한 일(領敦寧府事 韓 金+刃)이 졸(卒)하다.일(金+刃)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弟)이다.지략 (智略)과 무예(武藝)가 있어서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매양 행군(行軍) 을 할 때는 항상 휘하(麾下)에 있었고,태조(太祖)가 즉위(卽位)하자 원종공신 철권(原從功臣 鐵券)을 하사(下賜)하였다.공(公)이 졸(卒)함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3일간 철조(三日間 輟朝)하고 치제(致弔)하며 별부(別賻)로 찰과 콩 40 石과 종이 100 권(百券)을 하사(下賜)하고 시호(諡號)를 양정(良靖)이라 하였는데 온량(溫良)하고 즐거워함 이 良이요 폼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음이 靖이다. 양정공(良靖公:金+刃)이 별세(別世)하여 세종임금이 내린 치제문(致祭文) 양정공(한 일)치제문(세종장헌대왕 15년(단기 3766·서기 1433)3월 24일)(良靖公 (韓 金+刃)致祭文(世宗莊憲大王 十五年(檀紀 三七六六·西紀一四三三)三月 二十四日))죽은 영돈녕부사 한 일(領敦寧府事 韓 金+刃)에게 사제(賜祭)하다.그 교서에 이르기를, “죽고 삶에 명(命)이 있으니 이수(理數)의 떳떳함을 피하기 어렵고 은혜(恩惠)와 예 (禮)는 정(情)에서 인연하였으니 마땅히 슬프고 영화롭게 하는 은전을 극진히 할 것이다. 오직 경은 자품이 질박하고 곧으며 행실이 순진(純眞)하여 속적(屬籍)한 높은 신분 (身分)으로서 척리(戚里:나라의 친척)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소고(昭考)께서 대우 하는 예가 돈독하시어 항상 높은 벼슬을 내리셨고 과인은 화목하는 정이 깊어서 돈녕부 (敦寧府)의 長을 삼았다.이로 인해 치사(致仕)하게 하여 높은 향수(享壽)를 바랐더니 하늘이 버리시여 문득 슬픔을 주었도다. 이미 절혜(節惠)로서 시호(諡號)를 정하게 하고, 박전(薄奠)을 베풀어 슬픔을 펴게 하노라. 아아,좋은 일과 슬픈 일에 마음을 같이 하였으니 어찌 옛 정을 잊을 것이며 유명(幽明)이 이치가 같으니 나의 회포를 알아 몸 받을 지어다”하다. 判尹公(韓 金 剛)(판윤공 한 금 강)11세正憲大夫 漢城判尹(정헌대부 한성판윤) 판윤공(判尹公:金剛)은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三男이요, 정승공 규인(政丞公 珪仁)의 손자이다.정헌대부(正憲大夫)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세종(世宗) 15년(1433)에 졸했다. 배위(配位)정부인(貞夫人)남평 문씨(南平 文氏)와 합조(合兆)의 묘소(墓所)는 함주군 상조양면 신안리(咸州郡 上朝陽面 新安里)山 3번지 내동(內洞)신좌(辛坐)이다. 다음은 나라에서 내린 치제문(致祭文:致奠文)이다.판윤공(휘 금강)치전문(判尹公(諱 金剛)致奠文)(世宗莊憲大王 十五年(檀紀 三七六六·西紀 一四三三)二月 十三日) 죽은 검 한성 한금강(檢 漢城 韓金剛)에게 치전(致奠)하다.그 교서(敎書)에,“수명 (壽命)은 천부(天賦)에 말미암으니 진실로 사생(死生)을 벗어나기 어렵고, 은혜는 친한 이로부터 비롯하니 마땅히 처음에서 끝까지 변하지 아니해야 할 것이로다.오직 경은 성품이 단정하고 성실하며 조행(操行)이 맑고 순수(純粹)하여 이미 국척(國戚)의 높음 이 되었으나 영리(榮利)를 생각지 아니하고 시골에 물러가 살았었고, 태종조(太宗朝)에 있어서는 특별(特別)관작(官爵)을 더하였다.몸의 기운을 화하게 길러서 길이 큰 수복 (壽福)을 누리기를 바랐더니 어찌하여 한 병이 문득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고.부음(計音)이 이르매 진설로 측연(惻然)하도다. 작질(爵秩)을 추숭(追崇)하고 겸하여 부의(賻儀)를 내리며 관원을 보내어 치전하여 영혼(靈魂)을 위로하노라. 아아,살아서는 은혜 와 사랑을 두텁게 하였으니 죽어서는 마땅히 슬픔과 영화를 다할 것이므로 이에 교시 (敎示)하노니 생각하건대 마땅히 알기를 다할 것이다”하다.(치전문: 세종대왕께서 내린 공의 장례치를 때의 제사문) 良靖公(韓 昌 壽)(양정공 한 창 수)11세 崇錄大夫判敦寧府事(숭록대부 판돈녕부사) 公의 諱는 창수(昌壽)이니 초명(初名)은 장수(長壽)이다.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넷째 아들이고 정승공 규인(政丞公 珪仁)의 손자이다.신의왕후(神懿王后)와 동복(同腹:兄弟)으로 관작(官爵)은 숭록대부 판돈녕부사(崇祿大夫 判敦寧府事)에 오르고 시호(諡號)는 양정(良靖)인데 수(壽)는 76歲 하였다고 전(傳)하여 온다.그러나 公 의 묘소(墓所)와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및 묘소(墓所)가 난세(亂世)에 일실(逸失: 잃어버림)되니 전(傳)하여 오는 바 없어 민망(憫 )함이 크다.다음은《세종실록(世宗 實錄)》에 있는 유사(遺事)이다. 숭록대부판돈녕부사시양정한공(휘 창수)유사(崇祿大夫判敦寧府事諡良靖韓公(諱 昌壽) 遺事)(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세종(世宗)22年 경신(廣申:檀紀 3773·西紀 144O)11月 29日 판돈녕부사 한창수(判敦寧府事 韓昌壽)가 졸(卒)하다. 公은 함길도 안변(咸吉道 安邊)사람으로 초명 (初名)은 장수(長壽)이다. 처음에는 신의왕후(神懿王后)와 동복(同腹)이라 하여 관직에 보(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가 얼마 아니되어 안원군 (安原君)을 봉하였다.太宗 15年 乙未(檀紀 3748·西紀 1415)봄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오르고,여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옮겼으며,世宗 3年에 특별(特別)히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世宗 10年 무신(戊申)에 숭록대부 판돈녕 부사(崇祿大夫 判敦寧府事)에 올랐다.世宗 18年 병진(丙辰)에 궤장( 杖)을 내렸고 병(病) 으로 사직하여 이때에 이르러 후하니 나이가 76歲였다. 부음이 들리자 특별히 부의를 내리고 조상(弔喪)하게 하였다.시호(諡號)를 양정(良靖)이라 하니 온량(溫良)하고 호악(好樂)함이 양(良)이요,유직 (柔直)하고 끝을 잘 맺은 것을 정(靖)이라 하다.예(禮)로써 장사지냈다.代를 이을 後孫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胡靖公(韓 隆 田)(호정공 한 융 전)11세 知敦寧府事(지돈녕부사)遺事(유사) 公의 諱는 융전(隆田)이니 초명(初名)은 용천(龍天)으로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아들이고 정승공(政丞公)규인(珪仁)의 손자이다. 태종(太宗)때 백신(白身:과거를 치르지 않으신 분)으로 사재부정(司宰副正)이 되고 세종(世宗)15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올랐으나 公이 향리(鄕里)로 물러가기를 원하더니 이때에 졸(卒)하였다.나라에서는 하루동안 조회(朝會)를 폐하고 중사 (中使)를 보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호정(胡靖)이라 증 (贈)했다. 公의 묘소(墓所)는 함주군 상조양면 화음리(咸州郡 上朝陽面 花陰里)보일형(寶일形) 간좌(艮坐)인데 배위 정부인(配位 貞夫人)이씨(李氏)는 公의 묘전(墓前)이고 후배(後配)정부인(貞夫人)김씨(金氏)는 선배 이씨(先配 李氏)의 묘전(墓前)이다. 다음은《세종설록(世宗實錄)》에 있는 유사(遺事)이다. 지돈녕부사시호정한공(휘 융전)유사(知敦寧府事諡號靖韓公(諱 隆田)遺事)(世宗莊憲大王實錄) 世宗 24 壬申年(檀紀 3775·西紀 1442)6月 18日 지돈녕부사 한융전(知敦寧府事 韓隆田)이 졸(卒)하다.처음 이름은 용천(龍天)이니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이모제(異母弟)이다.태종조(太宗朝)에 백신(白身)으로서 바로 사제부정(司宰副正)에 임명되었는데,이로부터 산직(散職)에 버려두고 물러가 전장(田庄)에 있었다. 世宗 15年 癸丑(檀紀 3766·西紀 1433)에 世宗이 불러 서울로 오게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발탁하고 또 의대(衣帶)을 내리매 公이 다시 향리(鄕里)로 물러가기 를 원하더니 이때에 와서 졸하다.나이 74歲였다. 王이 부음을 듣고 하루동안 조회를 폐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가하게 하다.호정(胡靖)이란 시호를 내리니 여러 해동안 수고(壽考)한 것을 호(胡)라 하고 유화(柔和)정지하여 고종(考終)한 것을 靖 이라 한다.아들로는 得守,得明,得生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錦溪君 文忠公(韓 교)(금계군 문충공 한 교)12세 금계군문충공(휘 교)유사(錦溪君文忠公(諱 교)遺事) 公의 姓은 韓이요 휘(諱)는 교(교)요 字는 명보(明甫)요 호(號)는 회묵재(晦默齋)요 시호(論號)는 문충(文忠)이니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우(祐)의 아들이고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용(龍)의 孫子이다. 금주군(錦州郡)분이라,公이 탄생(誠生)할 때 채운(彩雲)이 公의 집을 덮으며 황룡(黃龍)이 집을 감고 향기(香氣)가 끓어 오르는지라 기이(奇異)하여 기록(記錄)하여 두었더니 이날 과연(果然) 公이 탄생(誠生)하니 천자(天資)가 이범(異凡)하고 성품(性品)이 영오(穎悟)하였다. 公 의 나이 19세에 母夫人이 병환(病患)으로 날이 깊으매 분변(糞便)이 달고 씀을 맛보아 증후(症候)를 살피고 혈지(血指)를 관구(灌口)하매 회생(回생)하여 數月後에 별세(別世)하니 죽(粥)과 곡읍(哭泣)으로 3年을 시묘(待墓)하였다.마을이 감화(感化)되어 그 마을을 孝子里라 이름하고 촌전(村前)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우니라. 公이 등제(登第) 하여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이르고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성(誠)을 다하여 奉仕한 공훈(功勳)으로 금계군(錦溪君)으로 封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다.享年 65에 졸하니 墓는 郡南草峴 五里 쯤의 大寶山에 있다.誌에 이르기를 忠誠은 三朝에 저명(著名)하고 효도(孝道)는 10里까지 敎化되었으며 朝廷에 오르면 대절(大節)을 지키고 國家의 승(乘)을 소양(昭揚)하여 嘉靖庚戌(3883)에 明宗大王이 公 의 충효(忠孝)를 가상(嘉尙)히 여겨서 정려(施閭)를 명하시다.임진왜구(壬辰倭寇)가 침입(侵入)하여 公私家舍를 탕잔소(蕩殘燒)할새 孝子里에 이르러 정려(施閭)와 비(碑) 를 보고 公의 孝에 감복(感服)하여 침입(侵入)하지 아니하야 孝子里는 화(禍)를 면(免) 하였도다. 公의 효성(孝誠)은 이국인(異國人)에게도 이같이 感服을 주었다. 향유(鄕儒) 들이 德을 추모(追慕)하여 사(祠)를 지어 향사(享祀)하니 君子의 道는 멀어질수록 더욱 나타남을 公을 보아 알겠도다. 슬프다.公의 忠孝는 국승(國乘)에 수록(收錄)되었고 또 한 유곡사(柳谷祠)를 創建하니 그 가언선행(嘉言善行)은 당시(當時)에도 빛이 났고 후세(後世)에 전(傳)하여 남을 것이나 애석하도다. 年代가 멀고 누차 兵火를 거쳐 문헌(文獻)을 구할수 없으니 무엇으로 그 행장(行狀)과 덕(德)을 상고하리.公의 실행(實行)이 금산군 지여지승람정려음기서원유사(錦山君誌與地勝覺旌閭陰記書院遺事)에 대략 수록(大略 收錄)된 바로 흠앙(欽仰)함이 오래더니 이에 그 後孫 道洙 相五 甫가 公의 유사기록(遺事 記錄)을 나에게 청(請)하기로 국승(國乘)과 가보(家譜)에 의(依)하여 우(右)와 여(如)히 펴노라. 숭정기원후삼임진(崇禎紀元後三壬辰)(4105,1772)陽月 上浣 10月 15日 통훈대부 자인현감 신인명 근지(通訓大夫 慈仁縣監 愼認明 謹誌) 校尉公 奭 系 校尉公(韓 奭)(교위공 한 석)4世 遺 事 :一本諱有益檢校龍虎校尉 공은 고려 초의 무신이다.휘(諱)는 석(奭)이니 일본(一本)유익(有益)이다. 동정공 상휴(同正公 尙休)의 아들이고 교위공 영(校위公 穎)의 손자이다. 무관의 벼슬을 쌓아 검교용호교위(檢校龍虎校樹)에 이르렀다.배위(配位)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상공 익(相公 瀷)의 따님이고 아들은 예빈경공 후지(禮賓卿公 候抵)이다. 禮賓卿公 韓 侯 抵(예빈경공 한 후 지) 5세 공은 고려 초의 문신이다. 휘(諱)는 후지(候抵)이고 교위공 석(校尉公 奭)의 아들이며 동정공 상휴(同正公 尙休)의 손자이다. 태재(太宰:中國이나 고려 때의 으뜸 벼슬)의 공에 따라 평산백(平山伯)에 봉(封)해 졌다.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이었으며 태자첨사(太子詹事:고려 때 東宮의 벼슬 文宗 때 制定)에 추봉(追封)되었다. 배위(配位)는 0 0 김씨(0 0 金氏)로 좨주 상빈(祭酒 尙賓)의 따님이며 아들은 소부·소감 정(小府少監 靖),낭장 기(郞將 基),첨사 원서(詹事 元서)이다 少監公 韓 靖(한 정)6세一本諱晸侍郞少府少監追封太子詹事 고려 의종(毅宗)때의 문신이다.휘(諱)는 정(靖)이고 또는 정(晸)이며 예빈경공 후지(禮賓卿公 候抵)의 아들이요 교위공 석(校위公 奭)의 손자이다. 의종 3년(1149)11월,사신으로 금(金)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는데,그때 허 순(許純)은 방물(方物:特産品)을 바쳤다.이 때 고려는 금나라와 친밀 관계에 있었으므로 양국의 사신이 빈번히 왕래하며 서로 절일(節日)에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던 것이다. 동왕 5년(1159)8월,간관(諫官)과 시어사 김 양(待御史 金 양)등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시사를 논하여 3일간 간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가 며칠 후 성재(省宰)가 모두 죄를 빌며 정사를 보지 않고 있자 왕이 중서시랑평장사판이부사 문공원(中書待郞平章事 判吏部事 文公元)을 비롯하여 간관 김자의(諫官 金子儀),윤인첨(尹麟瞻),대관 최윤의 (臺官 崔允儀),한 정 등 14인을 불러 일을 보도록 위유(위유感論)하였다.어느 해 이부시랑(吏部待郞)에 재임중 이원응(李元鷹)과 서로 틈이 생겨 파직되었더니 왕이 축리(祝釐:神에게 諸王의 복을 비는 것)할 곳을 삼고자 따로 불우(佛宇)를 인재원(安齋院)에 창건할 때 이원응은 이미 죽고, 한 정이 복직되어 그 공사를 인계받아 완성하니 그 공으로 은(銀)과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김돈중(金敦中)이 아우 돈시(敦時)와 함께 아버지 부식(富軾)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를 증수하고 한 정과 함께 한결같이 복을 비니 왕이 이들에게 이르기를“듣건대 경 (卿)들이 과인(寡人)에게 복을 돌린다 하니 심히 가상하도다. 짐이 장차 가서 보겠노라”하였다. 동왕 6년(1152)4월,내시 윤언문(內待 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가산(假山)을 수창궁(壽昌宮)북원(北園)에 쌓고 작은 정자를 그 곁에 지어 만수정(萬壽亭)이라 이름 하고 누런 비단으로 벽에 입혀 사치를 다하여 사람의 눈을 현혹케 하였다. 어느날 임금이 이 정자에서 연회하고 파한 뒤 우연히 가산이 무너지고 암닭이 우는지라 시어사 한 정(待御史 韓 靖)이 어사중승 고영부(倒史中丞 高瑩夫)와 최균심(崔均深)등과 함께 합문에 엎드려 3일 동안이나 윤언문과 한 취(韓 就),이대유(李大有)등을 내치도록 청 하고,또 우간의 신 숙(右諫議 申 淑)과 급사중 임 경(給事中 林 儆)이 상소하여 왕이 마지못하여 쫓아 내쳤다. 그 후 19년(1165) 4월에 이르러 왕이 관란사에 행차하였는데,이에 앞서 한 정과 김돈중 등이 북쪽 산이 빨갛게 벗겨져 초목이 없음을 보고 백성을 동원하여 송백(松拍) 과 삼회(杉檜)와 기화(奇花),이초(異草)를 심고, 단을 쌓아 어실(御室)을 지어 단청으로 장식하였으며,축대와 섬돌도 모두 괴석으로 쌓았더니, 이에 이르러 왕과 재상들이 잔치를 베풀어 흡족히 즐기고,김돈중,김돈시,한 정에게 백금,비단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벼슬은 소부소감(小府少監)에 이르렀다. 배위(配位)교동 전씨(喬桐 田氏)는 동정 화공(同正 和恭)의 따님이며 아들은 검교호부상서 경립(檢校戶部尙書 敬立)이다. 尙書公 (韓 敬 立)(상서공 한 경 립) 7세 遺 事 :初諱儀檢校戶部尙書太中大夫衛尉卿賜金紫魚袋 휘(諱)는 경립(敬立)이고 초휘(初諱)는 의(儀)이다. 소감공 정(少監公 靖)의 아들이고 예빈경공 후지(禮賓卿公 候抵)의 손자이다. 작고 큰 벼슬길에 올라 검교호부 상서(檢校戶部 尙書)에 이르렀고 태중대부위 위경 (太中大夫衛 尉卿)에 오르고 금자어대(金紫魚袋)를 하사(下賜)받았다. 배위(配位)경원 이씨(慶源 李氏)는 동정 명윤(同正 明允)의 따님이며 아들은 좌복야 복수(左僕射 福綏)이다. 僕射公 (韓 福 綏)(복야공 한 복 수) 8세 공은 고려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복수(福綏)이며 상서공 경립(尙書公 敬立)의 아들이고 소감공 정(少監公 靖)의 손자이다.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 상의봉어동정(尙衣奉御同正)에 있었고 예빈승(禮賓丞)또는 좌복야(左僕射:고려 때의 관직으로 文宗 때에 둔 尙書都省 소속 尙書令의 다음 벼슬이다)로 고관직(高官職)에 있었다. 배위(配位)합천 이씨(陜川 李氏)는 호장 형연(戶長 瑩然)의 따님이며 아들은 동정 부(同正 傳)이다. 同正公 (韓 傅)(동정공 한 부) 9세 공은 고려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부(傅)요 일휘(一諱)는 부(簿)또는 보문(보文)이다. 복야공 복수(僕射公 福綏)의 아들이고 상서공 경립(尙書公 敬立)의 손자이다. 임랑(林郞),도염령동정(都染令同正)에 있었다.배위(配位)는 0 0 이씨(0 0 李氏) 로 습유(習유)의 따님이고 아들은 좌복야 평수(左僕射 平수)이다. 左僕射公(韓 平 人+壽)(좌복야공 한 평 수)10세 공은 고려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평수(平 人+壽)이며 일작(一作)은 평수(平壽)이다. 동정공(同正公)부(傅)의아들이고 복야공 복수(僕射公 福 綏)의 손자이다. 공은 높은 벼슬에 올라 상서성(尙書省)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고 검교군 기감(檢校軍 器監)을 지냈다. 배위는 00 이씨로 삼재 재순(三宰 在淳)의 따님이고 후배 합천이씨(後配 陜川李氏)는 학사 순목(學士 淳牧)의 따님이다. 아들은 진사 소(進士 소) 와 참의 연(參議 璉)이다 參議公(韓 璉)(참의공 한 련)11세 공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연(璉)이고 복야공 평수(僕射公 平 人+壽)의 둘째아들이며 동정공 부(同正公 傳)의 손자다. 벼슬길에 올라 보문각 직제학 (寶文閣 直提學)에 있었고 참의(參議)에 나갔다. 문명저세(文名著世) 하여 고령용담 영정(高靈龍潭 暎亭) 촌(村)에 벽송정사(碧松亭舍)를 세워 공(功)을 기렸다. 고령읍지(高靈邑誌)에 실려 있다.아들은 판서 희적(判書 希迪)과승적(承迪),참판 인적(參判 因迪)이다. 判書公 韓 希 迪)(판서공 한 희 적)12世 遺 事 :中顯大夫禮儀判書淸白吏一本典客令至仕一本寶文閣大提學 공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휘(諱)는 희적(希迪)이며, 참의공 연(參議公 璉)의 아들이고 복야공 평수(僕射公 平 人+壽)의 손자 이다.높은 벼슬길에 올라 중현대부 예의판서(中顯大夫 禮儀判書)에 이르고 청백리(淸白吏)의 칭호(稱號)을 받았다. 전객령(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하였는데, 다른책에는 보문각 대제학 (寶文閣 大堤學)으로 되어 있다.배위(配位)는 정부인 합천이씨(貞夫人 陜川李氏)로 제학 계령(提學 桂齡)의 따님이며 아들은 몽계 철충(夢溪 哲沖)이다.墓:慶尙南道 陜川郡 西面 獐谷村 右嶝上 亥坐 埋誌墓左 夢溪先生(韓 哲 沖)(몽계공 한 철 충) 13세충숙왕8년(1321)~? 고려 말(高麗 末)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홍도(弘道)요 호는 몽계(夢溪)이니 판서공(判書公)희적(希迪)의 아들이고 참의공(參議公)연(璉)의 손자이다. 1341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하고 135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경학(經學)과 문장에 능하였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처 양광도 안렴사(楊廣道 按廉使)를 역임하고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학문이 깊고 조예(造詣)가 고명하여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이 가장 친교(親交)하였다.일찌기 목은 이 색(牧隱 李 穡)과는 대소과(大小科)를 같이 급제한 사이로서 공(公)을 칭찬하여 이l르기를“학문과 문장을 내가 추종할 수 없고 지조(持操)를 삼가서 지킴 은 곧 승상(丞相)후작(侯爵)을 봉(封)할만 하다”하였다. 또 초은(樵隱 李仁復)이 시(詩)를 주어 이르기를“마음이 깨끗하고 재주가 있으면 세상에 현인(賢人)이라. 바라건대 그대는 반드시 힘을 써서 기울어진 우리의 유도(儒道) 를 다시 붙들고 일으키게나(經術儒爲貴 廉能世所賢,願君須努力,吾道更扶顚)”하였다. 여말(麗末)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로 두문동(杜門洞)으로 피신하였다가 고려가 망함에 상주 백원산(尙州 白原山)으로 은신하였으나 조선 태조(太祖)가 공의 차자 염(廉)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삼고 불렀으나 고령 석절촌(高靈 石節村)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태종(太宗)도 초빙하였으나 마침내 합천 조동(陜川 釣洞)으로 행적(行蹟)을 감추고 일생을 마쳤다. 배 이씨(配 李氏)그리고 배 안동 권씨(配 安東 權氏)는 대언 확(代言 確)의 따님이 고 배 영가 장씨(配 永嘉 張氏)는 위위 지순(衛尉 之順)의 따님이며 아들은 군수 진(郡守 珍),목사 염(牧使 廉),헌납 겸(獻納 兼),교위 양(校尉 讓)이다. 공과 이인복(李仁復),김 준(金 俊)삼현(三賢)을 면암서원(冕巖書院)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공은 합천 조동(俠川 釣洞)에서 어느 해 6월 25일에 졸하였다. 용지리 분토동 자좌 (龍旨里粉土洞 子坐)에 예장(禮葬)되었다. 난세병화(亂世兵禍)로 수호가 잘 안되더니 인조(仁祖)2년(1624)에 개봉축(改封築)하고 비석도 세웠으나 자획(字劃)이 마멸(磨滅)상태에 이르니 먼 훗날 생원 강세진(生員 姜世晋)찬으로 묘비를 세웠다. 경종(景宗)4년(1724)비석을 파내서 다시 세웠으나 자획(字劃)이 잘 안보여 먼 훗날 묘비를 다시 세웠다.후손 용헌(用憲),용우(用禹)등의 요청에 따라 경술년(庚戌年)봄에 전 의금부도사(前 義禁府都事)은진 송병순(恩津 宋秉珣)찬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공이 합천 조동(陜川 釣洞)에 숨어 있을 때“맑은 시냇가에 해가 저무는데 한가로히 누워 고려를 생각하누나”하고 몽계(夢溪)라 스스로 호(號)를 했다. 묘 아래에 4칸(間)의 재실(齋室)과 부속건물(附屬建物)을 지었다. 재실은 망송재(望松齋)라 하였는데 송도(松都)와 선산(先山)을 바라본다는 뜻이니 충효(忠孝)를 다한다 는 뜻이기도 하다. 신미 천중절(辛未 天中節)9월 야성 송준필(冶城 宋浚弼)의 망송재 중건기(望松齋重建記)가 있다.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여 왔다.한몽계 철중(韓夢漢 哲중)의 백원산(白原山)은신(隱身)과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금오산(金烏山)은신은 백의숙제(白夷叔齊)의 수양산(首陽山)피신과 일치(一致)하는 미거(美擧)라 하였다.공은 고려 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있다가 나라가 망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로 마지막으로 합천(陜川)의 조동(釣洞)에서 생(生)을 마쳤다. 이에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유림(儒林)에서 합천 사동(사洞)에 면암서원(冕巖書院)을 짓고 한몽계 철중(韓夢溪 哲중),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후계 김 준(后溪 金 俊)의 삼현(三賢)을 향사(享祀)하고 향학(鄕學)에 힘써 왔다. 경현사(景賢祠)에도 향배(享配)되었다. 면암사 상량문(冕巖祠 上樑文)은 대사간 이원조(大司諫 李源祚)가 지었고 면암서원 몽계봉안문(冕巖書院 夢溪奉安文)은 제학 이경재(提學 李景在)가 지었다.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때 헐렸으나 유생(儒生)들의 건의에 따라 합천군(陜川郡) 에서 건립 추진중(建立 推進中)인 것으로 안다. 사원의 빈터앞에 몽계공원기신도비(夢溪公院基神道碑)를 세웠다. 墓: 所在地 慶尙南道 陜川郡 龍州面 龍旨里 粉土洞 郡守公(韓 珍)(군수공 한 진)14세 공(公)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휘(諱)는 진(珍)이다.몽계공 철중(夢溪公 哲중)의 큰 아들이고 판서공 희적(判書公 希迪)의 손자이다. 공(公)은 고려 말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생몰년 미상(生歿年 未詳)이며 아들은 선생(善生),종생(終生),위천(位天)이다. 牧使公 (韓 廉)(목사공 한 염)14세 공(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선이다.휘(諱)는 염(廉)이고 호(號)는 석촌(石村)이다.몽계공 철중(夢溪公 哲중)의 둘째 아들이고 판서공 희적(判書公 希迪)의 손자이다. 공(公)은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관(官)이 시랑(侍郞:고려 때 六部 와 六曹의 尙書 다음가는 벼슬)에 이르렀다.부(父)철중(哲중)은 불사이군(不事二君) 의 절의(節義)로 태조(太祖)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신(隱身)하였는데 차자(次子)인 공(公)으로 하여금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삼고 불렀으나 고령 석절촌(高靈 石節村)으로 행적(行蹟)을 감추었고 태종(太宗 1401)이 또 불렀으나 마침내 합천 조동(俠川 釣洞) 으로 행적을 감추었다. 공(公)은 세칭(世稱)청백리(淸白吏)로 불리었으며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은 시 (詩)로서 부임(赴任)할 때 힘썼다.몰년(歿年)은 미상(未詳)이나 기일(忌日)은 9월 18 일이다. 배위(配位)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몰년(歿年)도 미상(未詳)으로 기일(忌日) 은 11월 29일이다. 공의 묘는 경상남도 합천군 현내면 산막동 촌후좌자좌(慶尙南道 陜川郡 縣內面 山幕洞 村後左子坐)에 있고 배위(配位)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묘는 공묘우월곡 죽전등 자좌(公墓右越谷 竹田嶝 子坐)에 있다. 獻納公 (韓 兼)(헌납공 한 겸)14세 공(公)은 조선 초기(初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겸(兼)또는 겸(謙)이다.몽계공 철중(夢溪公 哲중)의 셋째 아들이고 판서공 희적(判書公 希迪)의 손자이다. 공(公)은 공민왕(恭愍王)14년(1365)생이다.조선 태조(太祖)2년(1393)에 생원 (生員)이 되고 동년(同年)에 통훈대부행사간원좌헌납(通訓大夫行司諫院左獻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태종(太宗)14년(1414)정월 초하루에 예랑(禮郞)과 함께 대궐(大闕)에 들어가다 말에서 떨어져 상처(傷處)가 심했다. 임금이 의원(醫員)을 불러 치료(治療)토록 하였으나 쾌유(快癒)치 못하고 다음 날 1월 2일 졸(卒)하니 향년(享年)50이었다. 공(公)은 문학(文學)이 출중(出衆)하고 총민(聰敏)하였으며 재능(才能) 을 인정(認定)받아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불행(不幸)하게도 일찍 세상(世上)을 떠났다. 배위(配位)상산 김씨(商山 金氏)는 호조전서 거도(戶曹典書 居道)의 따님이고 아들 은 부사 가구(府使 可久),대호군 가견(大護軍 可堅)이다. 후계 김 범(后溪 金 範)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墓:慶尙北道 尙州郡 內西面 西灣里 校尉公 (韓 讓)(교위공 한 양)14세 공(公)의 휘(諱)는 양(讓)이다. 몽계공 철중(夢溪公 哲중)의 넷째 아들이고 판서공 희적(判書公 希迪)의 손자이다. 공(公)은 벼슬이 여절교위(勵切校尉)를 지냈다. 배위(配位)숙인 풍양 조씨(淑人 豊陽 趙氏)는 좌랑 안평(住郞 安平)의 따님이고 아들은 현감 계사(縣監 繼思),현감 계정(縣監 繼程)이다. 양위(兩位)의 묘(墓)가 춘성군 신북면 어룡동(春城郡 新北面 魚龍洞)에 합조(合兆)였는데 실호(失護)됨에 춘성군 서면 관음동(春城郡 西面 觀音洞)에 1992년 5월 22일 설단(設壞)하기에 이르렀다. 郎將公(韓 基)(낭장공 한 기)6세 공(公)의 휘(諱)는 기(基)이니 예빈경공 후저(禮賓卿公 候抵)의 둘째 아들이고 교위공 석(校尉公 奭)의 손자이며 소감공 정(少監公 靖)의 아우이다. 무관(武官)벼슬에 올라 직장(直長)을 지냈고 호위낭장(虎衛郞將)을 지냈다. 아들은 대정 정산(隊正 挺山)이다. 隊정公(韓 정 산)(대정공 한 정 산) 7세 공(公)의 휘(諱)는 정산(挺山)이며 낭장공 기(郞將公 基)의 아들이며 예빈경공 후저 (禮賓卿公 候抵)의 손자이다. 무관(武官)에 뜻을 두어 대정(隊正)을 지내고 정의대부 흥위위 상장군(贈 正議大夫 興威衛 上將軍)에 증직되었다. 아들은 중랑장 문필(中郞將 文弼)이다. 將軍公(韓 문 필)(장군공 한 문 필) 8세 공(公)은 고려 중기(中期)의 무신이다.휘(諱)는 문필(文弼)이며 대정공 정산(隊正公 挺山)의 아들이고 낭장공 기(郞將公 基)의 손자이다. 공은 무관(武官)으로 중랑장(中郞將)의 직분을 충성으로 다하여 후에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상장군(贈 金紫光綠大夫 知門下省事 上將軍)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는 오원현부인 이씨(五元縣夫人李氏)로 교위 견(校樹 堅)의 따님이며 아들은 시 장렬 희유(諡 莊烈 希愈)이다.묘(墓)는 선영하(先瑩下)에 있었다. 莊烈公(韓 希 愈)(장열공 한 희 유)9세 고종21년(1234)~충렬왕32년(1306) 重大匡僉議中贊諡莊烈 韓公(중대광 첨의중찬 시 장열)遺事(原文)韓希愈嘉州吏善騎射有膽略 공(公)의 휘(諱)는 희유(希愈)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권신(權臣)이다.가주(嘉州:平北 博川郡 嘉山面)출신으로 이곳의 이속(吏屬)이었다. 중랑장공 문필(中郞將公 文弼)의 아들이고 대정공 정산 (隊正公 挺山)의 손자이다.공은 군졸 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하였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도 대단하여 충렬왕 6년(1280) 5월에는 대장군 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 을 맡게 되었다.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하여 대장군이 된 그에게는 모함 사건도 발생하였다.1282년에는 영통사(靈通寺)승려 홍 단(洪 단)이 개인감정으로 모함하여 국문을 당한 적도 있으나, 무고가 발각되어 홍 단이 오히려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그 뒤 1287년에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좌익만호(左翼萬戶)가 되었다. 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하여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같은 해 8 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도 설도간(薛도千)및 나만알대왕(那蠻알大王)을 보내어 구원한 적이 있었으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적진이 놀라 무너져버렸다. 또한,용사를 잡아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다니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적군 58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왕은 그를 소환하여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다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 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 흔(金 흔)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하여 불법한 일을 꾀한다 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 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인후,김흔 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闊闊不花)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호송되었다.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희유와 인후의 시비독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고,다음 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 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하여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고,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다음 해 즉 충렬왕 32년(1306) 3월 공이 73세로 원나라에서 졸하니 시호(諡號)를 장렬(莊烈)이라 내렸다. 공은 가난해서 자주 남으로부터 빌려 썼다. 매양 왕을 따라 사냥하여 쏘면 명중하여 말을 사(賜)하였으나 또한 기르지 않고 남에게 주었다.인후(印候)가 형으로 섬기고 일찍이 그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아아!내 형의 가난함이 이에 이와 같은가”하고 왕에게 청하여 속(粟)수백 곡(數百 斛:斛은 열말)을 사(賜)하니 공은 스스로“나는 희유(希愈)가 아니라 유유(有愈)가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아들은 정용군 첨(精勇軍 檢),부사 체(府事 체),호군 우(護軍 祐)이다. 精勇軍公(韓 첨)(정용군공 한 첨)10세 공(公)은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무신이다. 휘(諱)는 첨(첨)이며 장렬공 희유(莊烈公 希愈)의 아들이고 중랑장공 문필(中郞將公 文弼)의 손자이다. 공은 무관(武官)에 뜻을 두어 조현대부 사순위 정용군(朝顯大夫 司巡衛 精勇軍)에 있었으나 충렬왕 33년(1307)가주(嘉州)로 귀양보냈다.아들은 별장 지수(別將 之秀)이다. 府使公 韓 체(부사공 한 체)10세 10세 朝顯大夫興威衛精勇護軍成川府使在成川案 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무신이다. 휘(諱)는 체(체)이며 장렬공 희유(莊烈公 希愈)의 둘째 아들이고 중랑장공 문필(中郞將公 文弼)의 손자이다. 공은 무관(武官)에 뜻을 두어 조현대부 흥위위 정용호군(朝顯大夫 興威衛 精勇護軍) 에 있은 후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그리고 성천에서 살았다. 배위(配位)고흥 유씨(高興 柳氏)는 첨의정승 고령부원군 청신(僉議政丞 高靈府院君 淸臣)의 따님이며 아들은 판서 계충(判書 繼忠)이다. 判書公(韓 繼 忠)(판서공 한 계 충)11세 공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이다.공의 휘(諱)는 계충(繼忠)이며 부사공 체(府使公 체)의 아들이고 장렬공 희유(莊烈公 希愈)의 손자이다. 공은 벼슬길에 올라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있었다. 배위(配位)영가군부인 권씨(永嘉郡夫人 權氏. 永嘉는 安東의 옛 이름)는 우정승 예천부원군 문단(右政丞 醴泉府院君 文垣)의 따님이며 묘(墓)는 평안남도 성천군 유동(平安南道 成川郡 柳洞)에 있는데 묘갈(墓碣)이 있다. 判書公(韓 安 海)(판서공 한 안 해)충숙왕16년(1329)~태종18년(1418)12세 공(公)은 고려 말의 문관이다.휘(諱)는 안해(安海)이며 판서공 계충(判書公 繼忠)의 아들이고 부사공 체(府使公 체)의 손자이다. 충숙왕(忠肅王)16년(1329)생이며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조선 태조(太祖) 2년(1393)평양천덕부(平壞川德部)에서 살았다.태종(太宗)18年(1418)3월 9일에 졸하였다. 배위(配位)봉상부인 동군 전씨(奉常夫人 同郡 全氏)는 흥위위부령(興威衛副令)의 따님으로 원 순안 백덕면 적암리 축좌(元 順安 白德面 積岩里 丑坐)에 公과 합조(合兆)이다. 후배(後配)안산 이씨(安山 李氏)는 정(禎)의 따님으로 태종(太宗)18년(1418)10 월 25일 졸하니 선영하(先瑩下)에 안장(安葬)되었다.아들은 부사정 효제(副司正 孝悌),효지(孝智),사직 복정(司直 福石+丁)이다. 生員公 韓 敏(생원공 한 민)14세 공의 휘(諱)는 민(敏)이며 사정공 효제(副司正公 孝悌)의 아들이고 판서공 안해(判書公 安海)의 손자이다.공은 사용성균생원(司勇成均生員)으로 있었다.배위(配位)는 해주 오씨(海州 吳氏)이며 아들은 부호군 장(副護軍 璋)이다. 司直公(韓 福 碇)(사직공 한 복 정)13세?~세종12년(1430)공(公)의 휘(諱)는 복정(福정)이고 판서공 안해(判書公 安海)의 셋째 아들이며 판서공 계충(判書公 繼忠)의 손자이다.사직(司直)을 지냈다.세종(世宗)12년(1430)9월 9일에 졸하였다.배위(配位)전주 임씨(全州 任氏)는 판서 복창(判書 復昌)의 따님으로 공보다 앞서 세종 4년(1422)8월 20일에 졸하였다.묘(墓)는 성천군 유동봉 두산 서록 진좌(成川郡 柳洞鳳 頭山 西麗 辰坐)에 합조(合兆)이며 비갈(碑碣)이 있다. 아들은 인강(仁剛),의강(義剛),교수 예강(敎授 禮剛), 등제 지강(登第 智剛),가선대부 신강(嘉善大夫 信剛)이다. 敎授公(韓 禮 剛)(교수공 한 예 강)14세 공(公)의 휘(諱)는 예강(禮剛)이다.사직공 복정(司直公 福정) 셋째 아들이고 판서공 안해(判書公 安海)의 손자이다.의주(義州)에 거주(居住)하였으며 의주교수(義州敎授)를 지냈다.배위(配位)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로 첨사 홍(僉使 弘)의 따님으로 의주 비현면 신현 북록 경좌(義州 枇峴面 新峴 北麓 庚坐)에 합조(合兆며 비갈(碑碣)이 있다. 아들은 만호 석인(萬戶 碩仁),덕인(德仁),석운(碩雲)이다. 登第公(韓 智 剛)(등제공 한 지 강)14세공(公)의 휘(諱)는 지강(智剛)이다.사직공 복정(司直公 福정)의 넷째 아들이고 판서공 안해(判書公 安海)의 손자이다. 공은 조선 세조(世祖)때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였다.세조 11년(1465)만호 (萬戶)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불배(不拜)하고 사양하였으며 박천(博川)에서 삼았다.기일(忌日)은 12월 17일이다. 배위(配位)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판서 사겸(判書 思謙)의 따님으로 묘(墓)는 송림 봉명산 건좌(松林 鳳嗚山 乾坐)에 합조(合兆)되었다.아들은 직장 경덕(直長 敬德)과 어모장군 윤덕(禦侮將軍 胤德)이다. 嘉善大夫(韓 信 剛)(가선대부 한 신 강)14세 공(公)의 휘(諱)는 신강(信剛)이며 사직공 복정(司直公 福정)의 다섯째 아들이고 판서공 안해(判書公 安海)의 손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성천(成川)에 잉거(仍居:오래 살음)하였고 성종(成宗)20년(1489)9월 14일에 졸 하였다. 배위(配位)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의형(義亨)의 따님이고 기일(忌日)은 6월 21일 이며 묘(墓)는 성천 유동 서동산 간좌(成川 柳洞 西洞山 良坐)에 합조(合兆)이다. 아들은 등제 체인(登第 體仁)이다. 判書公(韓 安 邦)(한 안 방)12世遺 事 :一諱安紡麗朝禑王7年辛酉登文科宣敎郞同14年戊辰通德郞通訓大夫戶曹興書麗亡葉官成川隱居後學專念李朝除復官萬戶不就享年77卒于10月3日 공(公)은 여말(麗末)의 문신이다.휘(諱)는 안방(安邦)이고 일휘(一諱)는 안방(安방)이다.판서공 계충(判書公 繼忠)의 셋째아들이고 부사공 체(府使公 체)의 손자이다. 우왕(禑王)7년(1374)문과에 등제(文科登第)하여 선교랑(宣敎郞)이 되고 동왕 14 년(1388)통덕랑(通德郞)을 거쳐 벼슬을 쌓아 통훈대부 호조전서(通訓大夫 戶曹典書) 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 태조(太祖)가 등극(登極)하니 관(官)을 버리고 성천 (成川)에 은거(隱居)하며 후학(後學)훈몽(訓豪)에 전념(專念)하였다.조선조에서 복관 (復官)을 시켜 만호(萬戶)를 내렸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향년(享年)이 77이었는데 10월 3일이 기일(忌日)이다.아들은 교위 유정(校尉 有정) 이다. 校尉公(韓 有 碇)(교위공 한 유 정)13세 공의 휘는 유정이다. 판서공 안방의 아들이고, 판서공 계충의 손자 이다. 태종(太宗)5년(1405)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였다.그후 돈용교위(敦勇校尉)와 과의교위(果穀校尉)를지냈다.아들은교위 효강 (校尉孝剛)이다. 校尉公(韓 孝 剛)(교위공 한 효 강)14세 공(公)의 휘(諱)는 효강(孝剛)이다.교위공 유정(校尉公 有정)의 아들이며 판서공 안방(判書公 安邦)의 손자이다. 세종(世宗)3년(1421)무과급제(武科及第)하였다.그 후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지냈다.아들은 건충대위 덕휘(建忠隊衛 德輝)이다. 護軍公(韓 祐)(호군공 한 우)10세 공(公)의 휘(諱)는 우(祐)이다.장렬공 희유(莊烈公 希愈)의 셋째 아들이고 중랑장공 문필(中郞將公 文弼)의 손자이다.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奉善大夫 左右衛 保勝護軍)을 지냈다.배위(配位)는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로 민(敏)의 따님이다.아들은 판사 계신(判事 繼信)이다 判書公(韓 安 淮)(판서공 한 안 회)태조원년元年(1392)~?12세 공의 휘(諱)는 안회(安淮)이다.판사공 계신(判事公 繼信)의 아들이고 호군공 우(護軍公 祐)의 손자이다.조선 태조(太祖)원년(1392)생이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해주 최씨(海州 崔氏)로 용(容)의 따님이며 태조 4年(1395)생이다. 아들은 조정(祚정)과 교위 녹정(校尉 綠정)이다. 校尉公(韓 祿 碇)(교위공 한 녹 정)13세 공(公)의 휘(諱)는 녹정(綠石+丁)이다.판서공 안회(判書公 安淮)의 둘째 아들이고 판사공 계신(判事公 繼信)의 손자이다. 세종(世宗)20년(1438)생이며 교위(校尉)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인 안동 김씨(宜人 安東 金氏)로 상복(相福)의 따님인데 세종 18년 (1436)생이다.아들은 교수 순강(敎授 順剛)이다. 敎授公(韓 順 剛)(교수공 한 순 강) 단종원년(1453)~? 14세 공은 조선 초기(初期)의문신이다.휘(諱)는 순강(順剛)이며 교위공 녹정(校樹公 綠정)의 아들이고 판서공 안회(判書公 安淮)의 손자이다. 단종(端宗)원년(1453)생이며 향교 교수(鄕校 敎授)를 지냈다. 배위(配位)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선택(宣澤)의 따님으로 세조(世祖)원년(1455) 생이며 아들은 진사 응란(進士 應爛),방어사 응태(防禦使 應泰)이다. 詹事公(韓 元 서)(첨사공 한 원 서)6세 공은 고려 초기(初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원서이고,예빈경공 후저(禮賓卿公 侯抵)의 셋째아들이고,교위공 석 (校尉公 奭)의 손자 이다. 공은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를 지냈으며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추봉(追封) 되었다. 공과배위묘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아들은 판관 언(彦)이다. 判官公 韓 彦(판관공 한 언) 7세 공(公)의 휘(諱)는 언(彦)이고 첨사공 원서(詹事公 元謂)의 아들이며 예빈경공 후저 (禮賓卿公 侯抵)의 손자이다. 동북면 도감판감(東北面 都監判官)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 밀직사사(銀靑光綠大夫 密直司事)에 추봉(追封)되었다. 아들은 상호군공 영(上護軍公 英)이다. 護軍公(韓 英)(호군공 한 영)8세 공(公)은 고려 중기(中期)의 무신이다.휘(諱)는 영(英)이며 판관공 언(判官公 彦)의 아들이며 첨사공 원서(詹事公 元서)의 손자이다. 공은 은청광록대부 밀직사부사 상호군(銀靑光綠大夫 密直司副使 上護軍)을 치사(致仕)하였다. 배위(配位)는 함안군부인 이씨(咸安郡夫人 李氏)로 묘(墓)는 미상(未詳)이다.아들은 시 문절 종유(諡 文節 宗愈)이다. 文節公(韓 宗 愈)(문절공 한 종 유)충렬왕13년(1287)~공민왕3년(1354)9세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漢陽府院君諡文節韓公(諱 宗愈) 공(公)은 고려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충목(忠穆),공민(恭愍)왕 때의 문신이다.휘(諱)는 종유(宗愈)요 자는 사고(師古)이며 호는 복재(復齋),양화도(楊花徒)이고 호군공 영(護軍公 英)의 아들이며 판관공 언(判官公 彦)의 손자이다 충렬왕 30년(1304)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擺)이 되었다.그 뒤 예문관 옹교가 되었고,충숙왕 7년(1320)정방(政房)의 전주(銓注)에 참여하였다. 이 때 심왕 고(瀋王 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하여 노력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의논하고 간신을 잡아 물리치니,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충혜왕 1년(1331)에는 밀직제학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 를 뽑게 되었다.이 때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瓊)이 부정으로 합격하자 간관 허 옹 (許 邕),정언 조 렴(趙 廉),정천유(鄭天濡)등 이 글을 올려,시험이 공정하지 못하니 다시 시험을 치르기를 청하였다. 또한,충숙왕 복위 8년(1339)조 적(曺 적)의 난 때에는 정승 김 륜(金 倫)과 같이 이 난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그 결과 1등공신으로 책봉되고,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이 주어졌고 전답과 노비도 받게 되었다.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 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같은 해 왕이 악양(岳陽)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그와 이조년 뿐이었는데,이조년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그를 부르게 되었다.1344년에 조칙으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하여 정사를 보필 하게 되어 좌정승에 제수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향리 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공민왕 1년(1352)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書筵)에 들어가니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하였다 한다.동왕 3년(1354)6월 한양(漢陽)옛집에서 68세로 졸하였다.왕은 조회를 보지 아니 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게 하고 시호(諡號)를 문절(文節)이라 내렸다. 묘명(墓銘)에 이르기를“여러 임금을 내려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근로(動勞)를 다하니 초선(貂蟬: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高官의 冠의 장식)의 관면(冠冕:冠은 官 의 총칭)이 문채(文采)있도다.”라고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 실려 있다. 배위(配位)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가락군 관(駕洛君 琯)의 따님이며 아들은 처사 백순(處士 伯淳),호군 중명(護軍 仲明),판사 계상(判事 季詳)이다. 사위중에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희(僖)가 있는데 고려 좌정승(考慮 左政丞)을 지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정간공(靖簡公)이다. 공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의 외 조부이기도 하다 提學公(韓 樞)(제학공 한 추)11세 공(公)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휘(諱)는 추(樞)이니 처사 백순(處士 伯淳)의 아들이며 문절공 종유(文節公 宗愈)의 손자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아들은 감사 고(監司 皐)이다. 監司公(韓 皐)(감사공 한 호)12세 공(公)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휘(諱)는 호(皐)요 제학공 추(提學公 樞)의 아들이고 처사공 백순(處士公 伯淳)의 손자이며 문절공 종유(文節公 宗愈)의 증손(曾孫)이다. 조선 태조(太祖)5년(1396)문과등제(文科登第)하여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나갔고 후에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지냈다. 묘(墓)는 통진불기(通津佛棄)라 전한다.아들은 헌납 호생(獻納 虎生)이다. 獻納公(韓 虎 生)(헌납공 한 호 생)13세 공(公)은 조선 세종(世宗)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호생(虎生)이요 감사공 호(監司公 皐)의 아들이고 제학공 추(提學公 樞)의 손자이며 문절공 종유(文節公 宗愈)의 현손(玄孫)이다. 공은 세종(世宗)26년(1444)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있었고 현감(縣監)과 헌납(獻納)을 연임(連任)하였다. 묘(墓)는 배천하 금산 건부리 죽좌(白川下 金山 乾浮里 丑坐)에 쌍조(雙兆)이며 묘갈 (墓碣)이 있으나 묘는 부전(不傳)이다. 아들은 군수 만령(郡守 萬齡),현감 백령(縣監 百齡),감찰 억령(監察 憶齡),참봉 옥령(參奉 玉齡)이다. 郡守公(韓 萬 齡)(한 만 령)14세 공(公)의 휘(諱)는 만령(萬齡)이며 헌납공 호생(獻納公 虎生)의 아들이고 감사공 호 (監司公 皐)의 손자이다. 공은 성종(成宗)원년(1470)에 문과등제(文科登第)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오르고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역임(歷任)하였다. 아들은 진사 승유(進士 承愈)이다. 縣監公(韓 百 齡)(현감공 한 백 령)14세 공(公)의 휘(諱)는 백령(百齡)이며 헌납공 호생(獻納公 虎生)의 둘째 아들이고 감사공 호(監司公 皐)의 손자이다. 공은 조선 초기(初期)에 옥구현감(沃講縣監)을 지냈다. 監察公(韓 億 齡)(감찰공 한 억 령)14세 공(公)의 휘(諱)는 억령(憶齡)이다.헌납공 호생(獻納公 虎生)의 셋째 아들이고 감사공 고(監司公 皐)의 손자이다. 공은 조선 초기(初期)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다. 아들은 참봉 효신(參奉 孝臣)이다. 參奉公(韓 玉 齡)(참봉공 한 옥 령) 공(公)의 휘(諱)는 옥령(玉齡)이며 헌납공 호생(獻納公 虎生)의 넷째 아들이고 감사공 고(監司公 皐)의 손자이다. 생원(生員)을 거쳐 영희전 참봉(永禧殿 參奉:漢陽 苧洞에 있던 殿閣으로 조선조 世祖 때 의숙공주(懿淑公主)가 살던 곳인데 中宗 원년(1505)단경왕후(端敬王后)가 왕후 의 자리를 물러나서 살던 곳의 參奉)을 지냈다. 배위(配位)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주부 양근(主簿 養根)의 따님으로 묘(墓)는 배천 하 금산 선영하(白川下 金山 先螢下)동원(同原)에 쌍조(雙兆)이며 묘갈(墓碣)이 있다. 아들은 교위 승준(校尉 承俊),승지 승걸(承旨 承傑)이다. 判事公(韓 季 祥)(판사공 한 계 상)10세 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선으로 휘(諱)는 계상(季詳)이다.문절공 종유(文節公 宗愈)의 셋째 아들이고 호군공 영(護軍公 英)의 손자이다. 정랑(正郞)을 지내고 판사 (判事)에 이르렀다. 배위(配位)청주 이씨(淸州 李氏)는 대제학 방직(大場學 邦直)의 따님이며 아들은 판서 천동(判書 天童)이다. 判書公(韓 天 童)(판서공 한 천 동)11세 공(公)은 고려 후기(後期)의 문신으로 휘(諱)는 천동(天童)이다. 판사공 계상(判事公 季祥)의 아들이고 문절공 종유(文節公 宗愈)의 손자이다.우왕 (禑王)12년(1325)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지 중추원사 판도판서(知 中樞院事 版圖判書)에 이르렀다. 배위(配位)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시 문충 숭인(諡 文忠 崇仁)의 따님이고 아들은 정랑 이영(正郞 貽永)이다. 正郞公(韓 貽 永)(정랑공 한 이 영)12세 公의 휘(諱)는 이영(貽永)으로 판서공 천동(判書公 天童)의 아들이고 판사공 계상(判事公 季祥)의 손자이다.조선 태조(太祖)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배위(配位)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부사 서(府使 瑞)의 따님이며 아들은 판관 견(判官 堅)이다. 判官公(韓 堅)(판관공 한 견)13세 공(公)의 휘(諱)는 견(堅)이다.정랑공 이영(正郞公 貽永)의 아들이고 판서공 천동 (判書公 天童)의 손자이다.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로 부사 서(府使 瑞)의 따님이다 조선 초기(初期)에 판관(判官)을 지냈다. 배위(配位)부평 심씨(富平 沈氏)는 판서 도원(判書 道源)의 따님이고 아들은 사직 중후(司直 仲厚)이다. 司直公(韓 中 厚)(사직공 한 중 후)14세공(公)의 휘(諱)는 중후(仲厚)로 판관공 견(判官公 堅)의 아들이고 정랑공 이영(正郞 公 貽永)의 손자이다. 공은 조선 초에 사직(司直)을 지냈다.아들은 문헌 성정(文獻 誠貞)이다. 少卿公 聰禮 系 韓 聰 禮(한 총 예) 2세 遺 事 : 光祿寺少卿追贈內史令 公은 고려 초의 문신으로 諱는 총례(聽禮)이다.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나중에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을 지냈다. 아들은 문하시중(門下待中)으로 시호(諡號)가 정신(貞信)인 언공(彦恭)이다. 貞信公(韓 彦 恭)(정신공 한 언 공)3세 태조23년(930)~목종7년(1004)遺 事 :高麗開國侯三重大匡門下侍中諡貞信韓公 고려 광종(光宗),성종(成宗),목종(穆宗)때의 문신으로 광록시소경(光綠寺少卿)총례(聽禮)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광종(光宗)때 15세로 광문원(光文院)의 서생(書生)이 되었고,뒤이어 승사랑(承事郞)이 되었다가 내승지(內承旨)를 거쳐 내의승지사인(內議承丞旨舍人)에 올랐다.성종 3년(984)형관시랑이 되었고,이어 병관시랑에 올랐다. 990년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 (金紫光祿大夫 檢校兵部尙書 兼 御史大夫)를 제수받고 대장경 481함(函)2,500권과 송태종이 지어 비장한〈전소요연화심륜(詮逍遙蓮花心輪)〉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사 예관시랑판 예빈성사(御史 禮官侍郞判 禮賓省事)가 되어 송나라의 제도를 본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되자 그 부사(副使)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 전중감(殿中監),지예관사(知禮官事)를 거쳐 참지정사 상주국(參知政事 上柱國)이 되었다.목종(穆宗)이 즉위하면서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에 제수되었고,목종 14년(1001)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목종은 본관인 장단을 단주(湍州)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다시 전폐(錢幣)를 쓰고 추포(추布:발이 굵고 거친 벼)를 금하여 백성들의 불편 이 커지자 그 폐단을 상소하여 전폐를 다주(茶酒)나 식며(食味)등의 점포에서만 사용 하게 하고,그밖의 교역에서는 토산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뒤 개국후감수국사(開國侯監修國史)가 되었으며 죽은 뒤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다.현종 18년(1027)에 목종(穆宗)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덕종 2년(1033)에 다시 태부(太傳)가 증직되었다.시호는 정신(貞信)이다. 아들은 지 서경유수(知 西京留守)이며 정종 국구(靖宗 國勇)인 조(祚)이다. 靖宗國舅(한 祚)(정종국구 한 조)4세靖宗國舅 贈門下侍中 知西京留 고려 현종(顯宗)정종(靖宗)때의 문신이다. 문하시중(門下待中)을 지낸 정신공 언공(貞信公 彦恭)의 아들이며 광록시소경(光綠寺少卿)총례(聰禮)의 손자이다. 선대(先代)로부터 명문가에 태어나 글을 좋아하였다.현종(顯宗)12년(1021)6월 한조(韓祚)를 송나라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다음 해 5월 공이 송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제(宋帝)인 인종(仁宗)으로 하여급 성 혜방(聖惠方),음양이택서(陰陽二宅書),건흥력(乾興歷),석전(釋典)의 일장(1藏)을 사(賜)하였다.얼마 안가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동왕 21년(1030)지 서경유 수(知 西京留守)로 삼았다.그 후 문하시중에 추증(追增)되었다. 고려조 제11대의 정종왕(靖宗王)의 비(紀)인 용신왕후(容信王后)는 공의 큰 따님이며 정종 원년(1035)에 왕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다음 해 7월에 병으로 훙(薨;卒)함에 정종 4년(1038)다시 공의 둘째 딸로 용의왕후(容懿王后)로 삼았는데 애상군 방(哀상君 昉),낙랑후 경(樂浪侯 璥),개성후 훤(開城侯 暄)3왕자를 낳았다. 아들은 호부시랑 규(戶部侍郞 圭)이고 또 하나의 아들은 미상이다 文烈公(韓 安 仁)(문열공 한 안 인)6세 遺事(原文) 고려 숙종(肅宗),예종(睿宗)때의 문신이다.초명은 교여(교如).자는 자거(子居)이다.호부시랑 규(戶部侍郞 圭)의 아들이며 정종 국구 조(靖宗 國勇 祚)의 손자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예종의 잠저(潛邸:天子가 아직 卽位하기 前에 있던 邸宅)에 있을 때 공은 이영(李永),이여림(李汝霖)등과 함께 동궁관(東宮官)이었으므로 즉위한 뒤에 형제,친척이 요로에 많이 등용되었다. 벼슬은 예종 때에 우부승선(右副承宣),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형부상서,예부상서,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하였고,인종이 즉위한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에 올랐다. 예종 7년(1112)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1120년에는 지 공거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다.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독점하려던 이자겸(李資謙)일당은 선왕,즉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帶方公 人+甫)를 비롯해서 문공미(文公美),이영,정극영(鄭克永)등 50여명을 살해 혹은 유배하였는데 이때 공이 승주(昇州)감물도(甘勿島: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 일파와 한안인 일파의 대립은 누대문벌과 신진 관료세력과의 대표적 인 대립 현상이었다.후일 인종이 즉위하여 그의 내외손과 현손에게 관직으로 포상할 것을 교서로 내렸다.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공은 힘써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또 역서(易筮:점치는 일)에 능하여 앞 일을 잘 알아 맞추니 일시(一時)에 명류(名流)가 되었다.아들은 기록(記錄)에 없다. 太學士 貞簡公(韓 光 衍)(태학사 정간공 한 광 연)8세 의종7년(1153)~고종24년(1237) 고려 명종(明宗)고종(高宗)때의 문신이다.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판공부사정간공 윤(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判工部事 貞簡公 윤) 의 아들이며 상서좌복야 안중(尙書左僕射 安中)의 손자이다. 약관의 나이에 근시(近侍)로서 수궁승(守宮丞)에 보직되어 강화도(江華島)마정(馬政)을 주관하였다.명종 21년(1191)과거에 급제한 후로 중상승(中尙丞)으로 전직되고 그 후 왕이 불러 공에게 승과 조계종(僧科 曹溪宗)선발을 감시(監試)하게 하였다.대 창령(大倉令)을 거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고)에 이르렀다. 동왕 26년(1196)최충헌(崔忠獻)이 왕에게 청하여 공을 경주에 보내 앞서 주살(誅殺)된 이의민(李義旼)의 3족을 없애게 하였다. 몇년 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는데 선정(善政)하여 도처에서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그 후 병부랑중(兵部郞中)으로 삼았으며 금(金)나라 사신이 왔을 때 반행(伴行)함에 예의에 맞아 호평(好評)을 받았다. 이어 예빈시소경(禮賓侍少卿)에 천거되어 국자사업 사관수찬(國子司業 史館修撰)을 역임하였다.그 후 중대부태복경(中大夫太僕卿)에 시보(試補)되어 국자좨주(國子祭酒) 로 전임하였다.조정에서는 외직(外職)을 중히 여겨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천거하였다. 고종(高宗)6년(1219)몽고의 용장(勇將)합진(哈眞)이 우호관계를 맺기를 요구할 때 그 누구도 가기를 꺼렸으나 공이 지 병마사(知 兵馬使)로서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요병 을 여러 차례 격멸한 공(功)이 있어 은청관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 翰林學士 承旨)에 승진하고 고종 7년(1220)지공거(知貢擧:고려 때 과거를 보이던 考試官)가 되어 예위(禮위 :禮曹)를 맡기도 하였으며 서경(西京)에 재제사(齊祭使)로 가기도 했다. 다음 해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同知樞密院事 戶部尙書)가 되고 1222년 추밀원사 이듬해 보문각 태학사(寶文閣 太學士)가 되었다. 고종 11년(1224)추밀원부사로서 다시 지공거가 되어 진사(進士)를 취하고 손완(孫 琮)등 33인을 뽑았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상사(喪事)에 앞서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라 하였다.83세로 졸하나 아들이 없었다.묘지명(墓誌銘)은《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 실려 있다. 府使公(韓 沖)(부사공 한 충)6세 ?~인종7년(1129) 禮部侍郞 樞密院副使(예부시랑 추밀원부사) 고려 숙종(肅宗),예종(睿宗),인종(仁宗)때의 문신이다. 부(父)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정종 국구(靖宗 國舅)로 지 서경유수 조(知 西京留守 祚)의 손자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2정(2鄭:鄭 沆,鄭克永)한 충(韓 沖)이라 하여 칭송이 컸다. 예종 6년 우보궐 (右補闕)에 제배(除拜)되고 2년 후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거쳐 기거주(起居住)에 전임 되었다. 송(宋)나라에서 사신이 왔었는데 왕이 계상(階上)에서 맞았다.며칠 후 사신이 돌아 가게 되자 공 등이 아뢰기를“조사(詔使)는 원래 상인(商人)으로 벼슬이 낮으니 계하 (階下)에서 절하도록 하여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쫓았다.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이 때 최홍사(崔弘嗣)가 사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개국사(開國寺)대장당(大藏堂)을 창건하려 하므로 이를 탄핵하다가 서경부유수로 좌천되었다.이듬 해 대방공 보(帶方公 보)의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사촌형 한안인(韓安仁)이 죽음을 당하자 그도 외지에 유배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패하자, 인종 5년(1127)에 예부시랑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니 백성 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다 기뻐하였다. 곧 국자왜주 한림시독학사(國子祭酒 翰林侍讀學士)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가 1129년 1월에 졸하였다.성품이 강직(剛直)하고 학업에 독실하여 문장력 (文章力)이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쓰니 이르는 곳마다 공적(功績)이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