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敢問夫子는 惡乎長이시니잇고
曰我는 知言하며 我는 善養吾의 浩然之氣하노라
敢問何謂浩然之氣잇고
曰難言也니라 其爲氣也 至大至剛하니 以直養而無害則塞于天地之間이니라 其爲氣也 配義與道하니 無是면 餒也니라 是集義所生者라 非義 襲而取之也니 行有不慊於心則餒矣니 我 故로 曰告子 未嘗知義라하노니 以其外之也일새니라
必有事焉而勿正하고 心勿忘하며 勿助長也하여 無若宋人然이어다 宋人이 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러니 芒芒然歸하니 謂其人曰今日에 病矣라 予助苗長矣라하여늘 其子趨而往視之하니 苗則槀矣러라
天下之不助苗長者 寡矣니 以爲無益而舍之者는 不耘苗者也오 助之長者는 揠苗者也니 非徒無益이라 而又害之니라
<家苑 譯 1>
(공손추) “감히 묻자오니, 부자께서는 무엇이 장점이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나는 말을 알며 나는 나의 호연한 기운을 잘 기르노라.”
(공손추) “감히 묻자오니, 무엇을 일러 호연한 기운이라고 하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말하기 어려우니라. 그 기운 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곧음으로 길러서 해침이 없으면 곧 천지 사이에 가득 차니라. 그 기운 됨이 義와 道와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말라붙느니라. 이것(기운)은 의를 모아서 생하는 바라. 의가 엄습해서 모아지는 것이 아니니, 행함이 마음에 족하지 못함이 있으면 말라붙으니, 내가 그러므로 ‘고자가 일찍이 의를 알지 못한다.’고 했나니, 그(義) 바깥으로 하기 때문이라.
꼭 사건이 있고 나서야 바로잡지 말고,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 말아서 송나라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 말지어다. 송나라 사람이 그 싹이 (빨리) 자라나지 않음을 민망히 여겨 뽑고 나더니, 망연하게 돌아와서 그 식구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늘 지쳤노라. 내가 싹이 자라도록 도왔노라.’ 하거늘, 그 자식이 뛰어가 보니 싹인즉 말랐더라.
천하에 싹을 도와 자라게 하지 않는 자 적으니, 이로써 보탬이 없다고 놔두는 자는 싹을 김매지 않는 자이고, 도와서 자라게 하는 자는 싹을 뽑는 자이니, 한갓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해칠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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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1>
浩然 물이 넓고 크게 흐르는 모양 餒 (굶)주릴 뇌 襲 엄습할 습 慊 족할 겸 揠 뽑을 알
* ‘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에 대해 趙岐와 程子는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로 떼어 읽고, 혹 ‘必有事焉而勿正心, 勿忘’으로 읽기도 한다. 여기서는 前者의 의견을 따랐다.
또한 주자는 “必有事焉은 有所事也니 如有事於顓臾之有事라 正은 預期也니 春秋傳에 曰戰不正勝이 是也라 如作正心과 義亦同하나 此與大學之所謂正心者와는 語意自不同也라 此는 言養氣者 必以集義爲事하고 而勿預期其效하며 其或未充이어든 則但當勿忘其所有事요 而不可作爲하여 以助其長이니 乃集義養氣之節度也라(‘필유사언’은 일하는 바를 둠이니 ‘有事於顓臾’-『논어』계씨편 제1장-의 ‘有事’와 같음이라. 正은 미리 기약함이니, 춘추좌전-僖公 26년-에 ‘전쟁에 이길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것이라. 正心이라고 지은 것과 뜻이 또한 같으나, 이는 대학의 이른바 정심과는 말뜻이 스스로 같지 않음이라. 이것은, ‘기운을 기르는 자는 반드시 義를 모으는 것으로써 일을 삼고 그 효력을 예기치 말며, 그 혹 차지 못하거든 곧 다만 마땅히 그 일을 둔 바를 잊지 말고 가히 작위적으로 그 자라게 함을 돕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의를 모아서 기운을 기르는 절도니라.)”고 해석했다. 여기서는 뒷 문장인 宋人의 揠苗助長과 연결하여 꼭 사건이 일어나서야 바로잡지 말고 義를 항상 잊지 말고, 사건이 벌어지도록 조장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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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1>
제1장에서 ‘맹자가 제나라의 요직에 등용된다면~’하고 시작된 공손추의 가상적 질문이 仁政으로 결론 맺고, 다시 제2장으로 이어지면서 ‘도가 행해진다면 어떤 마음이 될까?’에 대한 不動心의 답변이 守氣와 守約에서 氣와 志로 나아가고 마침내 知言과 浩然之氣에까지 이르렀다.
◇ 浩然之氣
앞서 ‘맹시사는 守氣를 잘했고, 증자는 守約을 잘했다.’는 말에 공손추는 그렇다면 선생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묻자 맹자는 서슴없이 知言과 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답했다. 호연지기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그 기운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곧음으로 길러서 해침이 없다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 채워지고, 또한 기운은 道義와 짝이 되는데 도의와 배합되지 않는다면 말라붙게 된다. 義는 갑자기 엄습해 밀려와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길러가야 하는 것이다. 고자는 이러한 義를 알지 못하고 ‘不得於言이어든 勿求於心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義를 바깥으로 했기 때문이다.(이 논쟁은 고자상편에 자세히 다뤄진다.)
◇ 揠苗助長
가만히 두어도 될 일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해악만 불러일으킨다는 故事로 유명한 말이다. 성질이 매우 급한 송나라 사람이 모를 심어놓고, 크게 자란 것만이 능사인줄 알고 모의 싹을 모두 잡아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피곤하다고 누우면서 하는 말이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왔다(助苗長)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식이 논에 달려 나가 보았더니 이미 싹은 말라죽어 있었다.
사람이 나서서 해야 할 일과 하늘이 하는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사람은 순명(順命)할 뿐이다. 봄에 씨앗을 심은 뒤 김매는 일을 잊지 않는다면 가을에 오곡백과가 다 영글 것이다. 하늘에 앞서 행하지 말며, 하늘을 앞서더라도 하늘을 어기지 말며, 하늘을 나중하여도 하늘의 때를 받들 줄 알아야 한다(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니라 - 『주역』 건괘 문언전 제6절). 군자는 다만 준비하고 있다가 때에 맞춰 일하는 것을 잊지 않을 뿐이다. 앞서 설명한 ‘君子 藏器於身하여 待時而動’할 뿐이다. 그런데 송나라 사람은 그 싹이 자라지 않음을 민망히 여겨서 싹을 억지로 뽑아 올리고 마치 대단한 일을 한 듯이 집에 와서는 자기가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왔다며 자랑했다.
이를 빌려 맹자는 “천하에 싹을 도와 자라게 하지 않는 자 드물다(天下之不助苗長者 寡矣라).”고 하였다. 義는 ‘集義所生’이어야 하는데 襲取하려는 자들과 같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듯이 꼭 사건이 일어나야 바로잡는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그러지 말고, 義를 항상 마음속에 잊지 말고 작위적으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다 한 가지 의리에 우연히 들어맞는다고 호연지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본래 천지자연의 호연지기를 타고 났는데 이 호연지기를 도와 의로써 합치시켜 꾸준히 몸에 꽉 채워야 호연지기가 길러지는 것이다.
앞서 문왕이 백 년을 다스리고도 무왕과 성왕 대에 이르러서야 德治가 크게 행해진 것은 바로 면면히 이어진 호연지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揠苗助長’은 자기 治世에 공을 이루고자 조급히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빗댄 말로 ‘浩然之氣’와는 대비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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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謂知言이니잇고
曰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 生於其心하여 害於其政하며 發於其政하여 害於其事하나니 聖人이 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
宰我子貢은 善爲說辭하고 冉牛閔子顔淵은 善言德行이러니 孔子兼之하시되 曰我於辭命則不能也로라하시니 然則夫子는 旣聖矣乎신저
曰惡라 是何言也오 昔者에 子貢이 問於孔子曰夫子는 聖矣乎신저 孔子曰聖則吾不能이어니와 我는 學不厭而敎不倦也로라 子貢이 曰學不厭은 智也오 敎不倦은 仁也니 仁且智하시니 夫子는 旣聖矣신저하니 夫聖은 孔子도 不居하시니 是何言也오
昔者에 竊聞之하니 子夏子游子張은 皆有聖人之一體하고 冉牛閔子顔淵은 則具體而微라하니 敢問所安하노이다
曰姑舍是하라
<家苑 譯 2>
(공손추) “무엇을 일러 말을 안다(知言)고 하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치우친 말에 그 가린 바를 알며, 음탕한 말에 그 빠진 바를 알며, 간사한 말에 그 떠나는 바를 알며, 도망하는 말에 그 궁한 바를 아니,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정사를 해치며, 그 정사에서 발표하여 그 일을 해치나니, 성인이 다시 일어나셔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시리라.”
(공손추) “재아 자공은 말을 잘하였고, 염우 민자 안연은 착한 말에 덕스러운 행실이더니 공자는 겸하셨는데도 ‘내 사명에는 능치 못하노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부자는 이미 성인이시로다.”
(맹자) 가라사대, “아니라. 이 무슨 말인고. 옛적에 자공이 공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부자는 성인이신저.’라고 했더니, 공자께서 ‘성인인즉 내 능치 못하지만 나는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노라.’고 하셨다. 자공이, ‘배움을 싫어하지 않음은 지혜이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음은 어짊이니, 어질고 또 지혜로우시니 부자는 이미 성인이시로다.’라고 했으니, 무릇 성인은 공자도 거처하지 않으셨으니, 이 무슨 말인고.”
(공손추) “옛적에 가만히 들으니, 자하 자유 자장은 다 성인의 일부를 체로 하였고, 염우 민자 안연은 곧 (성인의) 체를 갖추었으되 미약하다 하니, 감히 편안한 곳을 묻나이다.”
(맹자) 가라사대, “우선 이를 놔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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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2>
詖 편벽될 피, 치우칠 피 遁 도망할 둔
* 說辭 : 『疏』以辭說人者也(사람들에게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것)
* 善言德行 : 『중용』 제13장에서 공자가 말하는 “言顧行 行考言”의 언행을 말하는 것으로 『疏』에서는 “言之必可行이라야 是善言也오 行之必可言이라야 是德行也라(말은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善言이고, 행실은 반드시 가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야 이것이 덕행이라.)”고 풀이했다.
* 辭命 : 使臣이 군주의 명을 받들어 外賓을 應待하는 일
* 體는 德을 비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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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2>
◇ 知言
맹자의 ‘知言’은 『논어』 가장 끝 문장인 “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也요 不知禮면 無以立也요 無知言이면 無以知人也라(명을 알지 못하면 이로써 군자가 되지 못하고, 예를 알지 못하면 이로써 서지 못하고, 말을 알지 못하면 이로써 사람을 알지 못한다)”에 근거한다. 또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이로써 말하지 못한다(不學詩면 無以言이라 - 『논어』 계씨편 제13장)라고 했다. 맹자는 공자의 이 말씀과 『주역』 계사하전 제12장 끝 문장의 “將叛者는 其辭 慙하고 中心疑者는
其辭 枝하고 吉人之辭는 寡하고 躁人之辭는 多하고 誣善之人은 其辭 游하고 失其守者는 其辭 屈하니라(장차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속마음에서 의심하는 자는 그 말이 분산되고, 길한 사람의 말은 적고,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것을 속이는 사람은 그 말이 놀고,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니라.)”는 말씀을 기초로 知言을 설명했다.
곧 편벽된 말(詖辭)을 하는 사람에게는 막히고 가려진 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음란한 말(淫辭) 속에는 잘못 빠져든 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간사한 말(邪辭)에는 그 사람이 이반할 것을 알 수 있고, 이랬다저랬다 회피하는 말(遁辭) 속에는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궁색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정자의 말은 마음에서 나오기에 잘못하면 그 정사를 해롭게 하고 그 정사는 말이 발로가 되어 모든 일을 해칠 수 있다.
공자는 『주역』 계사상전 제8장 風澤中孚卦 九二爻에 대한 부연 설명에서 “君子居其室하여 出其言에 善이면 則千里之外 應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居其室하여 出其言에 不善이면 則千里之外 違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言出乎身하여 加乎民하며 行發乎邇하여 見乎遠하나니 言行은 君子之樞機니 樞機之發이 榮辱之主也라 言行은 君子之所以動天地也니 可不愼乎아(군자가 그 집에 거처하여 그 말을 냄에 선하면 곧 천 리 밖에서 응하나니 하물며 그 가까운 곳에서야! 그 집에 거처하여 그 말을 냄에 불선하면 곧 천 리 밖에서 어기나니 하물며 그 가까운 곳에서야! 말은 몸에서 나와 백성들에게 더해지며, 행실은 가까운 곳에서 발하여 먼 곳에서 나타나니, 언행은 군자의 추기이니, 추기의 발함이 영욕의 주장이라. 언행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니, 가히 신중하지 아니하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맹자는 옛날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여도 반드시 자기의 말을 따를 것이라 하였다.
맹자의 막힘없는 논리와 달변에 공손추는, 공자의 문하생들 가운데 ‘善爲說辭’하고 ‘善言德行’하는 제자들을 꼽으면서, 공자는 이 둘을 겸비하셨음에도 외교와 관련해서는 능치 못하다고 하셨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맹자야말로 이미 성인이시라고 찬탄한다. 맹자는 자공과 공자의 대화를 들며 ‘성인’이란 존숭의 말에 사양을 표했으나 공자의 ‘學不厭而敎不倦’함은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공손추는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두 부류를 들면서 맹자는 어느 쪽에 속하느냐고 묻는다. 맹자는 이미 공자의 도를 사숙하여 철환주유하면서 공자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었던 터라 ‘姑舍是’라고 하면서 공손추의 말문을 막았다.
[참고] 敎와 誨
공자가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음’은 『논어』 곳곳에서 나타난다. “子曰黙而識之하며 學而不厭하며 誨人不倦이 何有於我哉오”(공자 가라사대 묵묵히 기록하며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음이, 무엇이 나에게 있는고? - 술이편 제2장) “子曰若聖與仁則吾豈敢이리오 抑爲之不厭하며 誨人不倦은 則可謂云爾已矣니라(공자 가라사대, 만약 성인과 인이라면 내 어찌 감당하리오. 아니,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사람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아니함은 곧 가히 이를 만하니라. - 술이편 제33장)
공자는 벼슬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제자들을 가르친 일을 誨라고 했다. 位가 없기에 그 말을 세상에 실현시킬 수 없었고, 늘(每) 말(言)로만 가르치기 때문이다. 空言과 空文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子以四敎하시니 文行忠信이니라(『논어』 술이편 제24장)”고 기록했다. 후자의 四敎는 공자가 벼슬자리에 있었을 때 베풀었던 정사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시경』 『서경』 『주역』 『주례』 등에서 위정자의 정사를 敎라고 칭했으며 필요에 따라 ‘敎之誨之’ ‘敎誨’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다. 『중용』에서 자사는 위정자가 갖추고 실현해야 할 덕목의 하나로 ‘修道之謂敎’라고 했는데, 유학경전의 문헌상 『맹자』에 들어서면서 敎와 誨가 位를 분별하지 않고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많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남용되는 현상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뜻도 모른 채 심각한 언어남발과 남용이 빚어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참고] 공자의 제자들 (아래 내용은 졸저 논어역해 제1권 부록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사마천의 史記 「孔子世家」에 따르면, 공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모두 3천여 명으로 그중 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달한 자가 72명이라고 되어 있다. 흔히 이들을 身通弟子라 하고, 그중 열 명의 제자를 孔門十哲(공문십철)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자들의 장점에 따라 언급된 열 명의 제자로 논어 先進篇에 기록되어 있다.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로다 德行엔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이오 言語엔 宰我 子貢이오 政事엔 冉有 季路요 文學엔 子游 子夏이니라(공자 가라사대 진나라 채나라에서 나를 따른 자 모두가 문하에 없도다. 덕행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오, 언어엔 재아 자공이오, 정사엔 염유 계로요, 문학엔 자유 자하이니라).”
여기서 덕행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와의 응대 수사가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에 뛰어난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덕행, 언어, 정사, 문학 네 가지를 들어 제자들을 나누어 말하였기에 흔히 四科十哲이라고도 한다. 四科라는 말은 후한 때 왕충이 쓴 논형(論衡)의 문공편(問孔篇)과 後漢書의 정현전(鄭玄傳)에 나타난다. 十哲이란 말은 당나라 때 유지기(劉知幾)가 쓴 역사이론서인 史通의 암혹편(暗惑篇)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자라 일컫는 曾參이나 有若 子張 등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주자는 ‘皆不及門也’를 ‘문하에 없도다.’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 당시 공자의 나이는 69세로 轍環周遊(철환주유)를 마치고 마지막 말년을 노나라에서 보낼 때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철환주유를 하면서 가장 곤경에 빠졌던 때가 진나라와 채나라에서였다. 이때 그를 따랐던 열 명의 제자 가운데 진나라나 채나라에서 벼슬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皆不及門也’를 ‘벼슬에 오르지 못했도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공자의 주요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는, 공자의 마음을 가장 잘 품었다는 懷心弟子[안연, 증자], 공자를 수행하며 가르침을 잘 받은 見知弟子[자하, 자공], 親炙弟子(친자제자, 불을 쬐듯이 공자 가까이서 직접 배운 제자), 공자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학맥을 가장 잘 이었다는 再傳弟子[자사, 맹자] 등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32명이고, 논어의 편명으로 등장한 인물은 公冶長(5편), 仲弓(6편 雍也), 顔淵(12편), 子路(13편), 原憲(14편 憲問), 子張(19편)으로 모두 7명이다. 제자들과 관련해서는 拙著인 논어역해 제1권 부록에 담아두었다. |
曰伯夷伊尹은 何如하니잇고
曰不同道하니 非其君不事하며 非其民不使하여 治則進하고 亂則退는 伯夷也오 何事非君이며 何使非民이리오하여 治亦進하며 亂亦進은 伊尹也오 可以仕則仕하며 可以止則止하며 可以久則久하며 可以速則速은 孔子也시니 皆古聖人也라 吾未能有行焉이어니와 乃所願則學孔子也로라
伯夷伊尹이 於孔子에 若是班乎잇가
曰否라 自有生民以來로 未有孔子也시니라
曰然則有同與잇가
曰有하니 得百里之地而君之면 皆能以朝諸侯有天下어니와 行一不義하며 殺一不辜而得天下는 皆不爲也리니 是則同하니라
曰敢問其所以異하노이다
曰宰我子貢有若은 智足以知聖人이니 汙不至阿其所好니라 宰我曰以予觀於夫子컨댄 賢於堯舜이 遠矣샷다 子貢이 曰見其禮而知其政하며 聞其樂而知其德이니 由百世之後하여 等百世之王컨댄 莫之能違也니 自生民以來로 未有夫子也시니라 有若이 曰豈惟民哉리오 麒麟之於走獸와 鳳凰之於飛鳥와 泰山之於丘垤와 河海之於行潦에 類也며 聖人之於民에 亦類
也시니 出於其類하며 拔乎其萃나 自生民以來로 未有盛於孔子也시니라
<家苑 譯 3>
(공손추) 가로대, “백이와 이윤은 어떠하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도가 같지 아니하니 그 인군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며,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여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우면 물러간 이는 백이이고, 무엇을 섬긴들 인군이 아니며 무엇을 부린들 백성이 아니리오하며, 다스려져도 나가며 어지러워져도 나간 이는 이윤이고, 벼슬을 할 만하면 벼슬하며,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고, 오래할 만하면 오래하며, 서두를 만하면 서둘러 하신 이는 공자이시니, 다 옛 성인이라. 내 능히 행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에 원하는 바인즉 공자를 배우려고 하노라.”
(공손추) “백이와 이윤이 공자와 같은 반열이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아니라. 생민이 있은 이래로부터 공자만 하신 이가 있지 않았느니라.”
(공손추) 가로대, “그렇다면 (백이와 이윤과 공자는) 같음이 있나이까?”
(맹자) 가라사대, “있으니, 백 리의 땅을 얻어서 인군을 한다면 다 제후를 조회하여 천하를 둘 수 있거니와, 하나라도 의롭지 않음을 행하며 하나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 짓은 다 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곧 같으니라.”
(공손추) 가로대, “감히 그 다른 바를 묻겠나이다.”
(맹자) 가라사대, “재아와 자공과 유약은 지혜로움이 족히 성인을 알지니 아래해도 그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는데 이르지 않았느니라. 재아는 ‘내가 부자를 보건대 요순보다 어짊이 깊으셨다.’고 했고, 자공은 ‘그 예를 보고 그 정사를 알며, 그 음악을 듣고 그 덕을 아니, 백 세 뒤에 이르기까지 백 세의 왕(聖王)들을 견주더라도 능히 어긋남이 없으리니 생민 이래로부터 부자 만하신 이가 있지 않았다.’고 했고, 유약은 ‘어찌 백성뿐이리오. 달리는 짐승 가운데에서 기린과, 나는 새 가운데에서 봉황과, 크고 작은 언덕 가운데에서 태산과, 흐르는 물 가운데에서 강과 바다와 같은 종류이며, 백성들 가운데에서 성인과 또한 같은 종류이시니, 그 무리에서 나와 그 모인 것 가운데서 뛰어나나, 생민 이래로 공자보다 성대한 이가 있지 않았다.’고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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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3>
汙 ‘아래 와’, 더러울 와(오), 汚와 같음. 由 말미암을 유, 따를 유 等 견줄 등, 등급 垤 개밋둑 질 潦 물 흐를 요, 개천 요 萃 모일 취(췌) * 百世 : 世를 세대로 보면 백 세대의 뒤를 가리키고, 一世를 30년으로 3천년이 된다. 由百世는 ‘공자로부터 백 세 뒤에(從孔子後百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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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3>
◇ 生民未有이신 공자
맹자가 공자의 제자들에게 비유되는 것을 탐탐치 않게 여김을 눈치 챈 공손추가 얼른 말을 돌려 백이와 숙제에 관해 물었다. 백이에 대해서는 공자가 ‘옛날의 현인(古之賢人也)’이며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고(求仁而得仁)’ ‘수양산 아래서 굶어죽었으나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칭송했다’(『논어』 술이편 제14장과 계씨편 제12장)고 했으며, 이윤에 대해서는 자하가 ‘탕임금이 발탁하여 등용했더니 어질지 못한 자가 멀어졌다(湯有天下에 選於衆하사 擧伊尹하시니 不仁者 遠矣니라 - 『논어』 안연편 제22장)’.고 표현한 인물이다.
맹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의 양극단의 다른 점을 비교한 뒤에 中道의 變通를 취하신 공자의 도를 열거하고, 공자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열어보였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재상을 섭정하다가 끝내 도를 실현할 수 없게 되자 56살의 나이에 주유철환을 시작했다. 13여 년 간 공자는 衛 陳 蔡 宋 晉 楚 鄭 齊 등의 나라를 주유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68세가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위해 유학경전을 정리하였다. 맹자 또한 왕도를 펼 군주만 있다면 출사하려고 했기에 당시 군주들이 禮로써 초빙하면 달려갔다. ‘所願則學孔子也’라는 대목에서 맹자의 공자에 대한 깊은 崇慕의 정과 함께 원대한 이상을 느낄 수 있다. 공자의 세 제자들의 말을 빌려 ‘自生民以來 未有孔子也(‘生民未有’로 줄여 씀)‘를 세 번에 걸쳐 강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출처 : 孟子易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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